산에 오름은 배움길과 같아서 큰 고생 뒤엔 반드시 큰 즐거움 있다. 오직 하늘만 오르지 못할 뿐 나머지 땅은 내 발이 밟으리라. 이용휴의 ‘백두산을 찾아가고 그 김에 동방 명산을 두루 여행하는 정란을 배웅하며’ 중 제7수. |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호흡하기만 해도 현대인은 행복감을 느낀다. 가까운 자연을 벗어나 더 먼 나라, 더 광대한 대륙을 밟는 낯선 세계에 대한 여행이라면 더구나 일상으로부터의 탈주일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인식과 존재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여행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수세기 전 여행이란 비용이나 시간, 노력에서 말할 수 없는 투자를 요구했다. 그렇기에 먼 옛날 탐험가 혹은 여행가의 역할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대륙을 넘어 다른 문명세계를 넘나든 마테오 리치나 이븐 바투타,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항해한 정화(鄭和), 중국 대륙 구석구석을 뒤진 서하객(徐霞客), 그리고 신라시대 승려 혜초의 행적을 보면 여행의 참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금강산 열풍이 불었고 많은 이들이 명산을 탐방하는 멋을 즐겼다. 특히 18세기 이후 문인들은 남다른 여행 체험을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그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여행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잠시 즐긴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연 그 시대에 여행 그 자체에 생의 의미를 둔 전문여행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고전 공부에 열중한 청년기 고전을 들추다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특이한 사람 한둘쯤은 꼭 마주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명산대천을 누빈 전문여행가도 분명히 있었다. 오늘날의 여행가라는 개념에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어도 여행에 대한 열정이라든가 발로 걷고 당나귀를 타는 등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다다르는 여행가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말이다.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91)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던 것. 그는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으로,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 1605∼78) 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 경상도 출신 사대부가 전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정란도 처음에는 다른 사대부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었다. 서얼에다가 경상도 출신인 신유한은 문과에 장원급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조선 후기에 서얼이 문과에 장원급제한 일도 없었을 뿐더러 더구나 경상도 출신이 그러한 영광을 누린 예도 없다. 신유한은 신분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정란은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말을 빌려 타고 금오산에서 200리나 되는 길을 달려 가야산 밑에 머물고 있는 신유한을 찾아갔다. 신유한이 정란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정란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세간에서 이롭다고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온갖 것을 살펴보았지만 한 가지도 좋아할 것이 없고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옛사람의 문장입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공부했으나 장성해서도 알 수 없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문수보살에게 내 병통을 묻고, 유마힐거사에게 설법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유한은 정란의 문수보살이나 유마힐거사가 되기를 거부했다. 고문(古文)이 시서(詩書)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온갖 세상사람들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분분히 모여드니 그들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낫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던 것. 정란은 발끈했으나 이내 다시 학문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졸랐다. 그제야 신유한은 이 당돌하고 기백 넘치는 젊은이에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공부하라는 뜻을 담아 ‘정란에게 주는 글(贈鄭幼觀瀾序)’을 써준다. 이 글은 신유한의 문집 ‘청천집(靑泉集)’에 실려 있다. 한동안 정란은 신유한의 문인(門人)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서른, 세상에 묶인 그물을 끊고 나이 서른에 접어든 정란은 공부를 접고 여행을 떠났다. 경전을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는 사대부의 길 대신 여행이란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잠시 현실을 벗어나 산수와 자연을 탐방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권장할 일이지만, 여행 자체를 즐겨 전문적으로 여행하는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로 여겨졌다. 더구나 조선시대 선비에게 있어 이러한 현실방기는 절대적 금기의 하나였다. 그래서 여행에 몰두한 선비들은 대부분 현실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탈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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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란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현실도피적이었다기보다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긍정했다. 그는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의 욕망으로 끓어 넘쳤다. 우선 정란의 성격이 그랬다. 정란은 성품이 오만하여 남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기를 잘했다. 세상이 정한 예법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에게 온갖 제한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조선의 현실이 성에 찰 리 없다. 자연스럽게 그는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남경희(南景曦, 1748∼1812)는 ‘정창해전(鄭滄海傳)’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선생은 생김새가 깡마르고 기이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성품은 뻣뻣하고 오만하였으며, 다리를 쭉 펴고 앉기를 좋아하는 등 예법에 구애되지 않았다. 문예에 일찍 숙달하였으나 머리를 굽혀 과거 공부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약관 나이에 청천 신유한의 문하에서 배워 문장의 큰 취지를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하며 “대장부가 해동에서 태어나 비록 사마천처럼 천하를 유람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동의 명산대천을 두루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며 노새 한 마리를 장만하여 홀연히 혼자 길을 떠났다.》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하여 살기를 거부했다. 대신 여행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당시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이었다. 서른의 나이에 그는 과감히 여행길에 올랐다.
《사람들은 제 둥지만 돌아보는 새와 같이 / 떠나려다가도 다시 망설이며 빙빙 돌건만 / 그대는 절세(絶世)의 용맹함 지녀서 /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 끊고 벗어났네.》
정란을 가장 잘 이해한 문인 이용휴가 백두산으로 떠나는 정란을 배웅하며 써준 시의 일부다. 부귀와 공명을 위해 주어진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조선조 선비의 길이었지만 정란의 인생목표는 달랐다. 그래서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을 끊을 수 있었다. 정란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채제공(蔡濟恭)은 여행에 몰두한 정란을 두고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의 즐거움과 바꿀 수 없다”고 부러워했다. 여행의 즐거움! 그것이 처자를 버리고, 벼슬도 버린 채 전국을 주유(周遊)한 동기였다. 정란의 친구 강식준(姜式儁)은 정란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람은 숭상하는 것이 같지 않고 제각각 자기 취미를 완성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창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창해 역시 세상 사람이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창해에 대해 나 혼자만이 아는 사실이 있으니, 창해는 세상일을 버리고 산수를 즐기는 고질병이 깊다. 대자연의 원기를 호흡하며 세상 밖을 자유로이 노니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즐거움이라 여겨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지치지 않았다.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여 영화로움과 쇠잔함, 얻음과 잃음에 마음을 쓰는 세인들과는 만만 배나 다르다. 육체조차 누가 된다고 여기는 창해이니 그밖의 것이야 또 말해 무엇 하랴.(소은선생문집 권2 ‘증창해정유관란서 : 贈滄海鄭幼觀瀾序’)》
그랬다. 정란은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이라 여기며, 평범하고 구태의연한 일상의 유혹에 지지 않았다. 정란은 산수에 고질병이 너무 깊고, 여행이 즐겁기 때문에 그 길을 갔을 뿐이다. 그는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는 왜 공부를 포기한 것일까. 정란이 여행에 뜻을 둔 사실을 눈치채고 그의 친구 신국빈(申國賓, 1724∼99)이 다음과 같은 충고를 적은 서찰을 보냈다.
그대가 송(宋) 이하의 책은 보기를 즐겨하지 않고 그저 양한(兩漢) 시대의 문장만 읽고 사마천이 천하를 장쾌하게 노닌 일을 사모하여 “천지의 큼과 조화의 무궁함은 그저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산천을 노닐어 온갖 변화와 괴상한 구경거리를 마음껏 하여 심장과 눈을 웅장하게 하려고 하였소. 그대는 참으로 주자(朱子)가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으며 끝을 알 수 없이 유구한 공적을 이 방문 안에서 이루었음을 모르오. 그대의 의지는 참으로 웅장하다고 하겠으나 그 학문은 잘못되었소. 대저 학문이란 그 근본을 고요함에 두고 천지에 참여하여 교화를 촉진시켜 만물을 기르는 것이니 이 고요함을 버리고서 무엇에 근본을 두겠소?(태을암문집 권4 ‘여정창해유관란 : 與鄭滄海幼觀瀾’)
신국빈은 당시 경상도 출신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알았기에 정란의 여행벽이 못마땅했다. 비판의 핵심은 학문의 근간을 주자학에 두지 않고 문장공부 한답시고 여행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학문의 근본을 정(靜)에 두었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직접 발로 밟지 않고 방 안에 앉아서 침잠하여 성찰해도 대자연의 비밀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신국빈의 말 가운데 주자의 위대한 학문이 이 방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그런데 정란은 천하를 여행하여 직접 대자연을 호흡함으로써 온갖 변화를 목도하고 괴상한 구경거리를 함으로써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사악한 것에 물들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동(動)으로 인한 폐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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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정란의 여행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포부를 키우고 경험을 풍부하게 하여 창작에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고, 그 모범이 사마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천하를 두루 유람한 여행체험에서 나왔고 정란이 여행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긴 신국빈은 그에게 유학의 길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권유한 것이다. 이러한 신국빈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란의 여행에 대한 몰두를 창작을 향한 동기로 돌린 것은 고정관념을 벗지 못한 좁은 소견이다. 정란은 주자학이 아니라 더 큰 세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청노새, 어린 종, 보따리, 이불 한 채 집을 나선 창해가 동반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그 무렵 명산 열풍이 불어 금강산에 오르지 않은 것은 식자층의 수치였다. 하지만 그들의 등산은 호사롭고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를 불러 모으고, 때로는 기생과 악공까지 대동하며 말을 타거나 오르기가 힘들면 중을 동원해 남여(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고독하게 자연과 대면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 비로봉을 네 번이나 올랐다.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백두산을 등반하기 전에 두 번,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마지막으로 1788년 강세황·김홍도·김응환을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오른 일이 확인된다. 9월14일 강세황이 장안사에 묵고 있을 때 어디선가 정란이 표연히 나타난 일이 있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란은 금강산을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화가들에게 그려달라고 해서 ‘산행도(山行圖)’를 만들었다. 남경희는 ‘정창해전’에서 “그는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발길이 네 번이나 비로봉 정상에 이르렀는데 그림을 그려 감상 자료로 삼았다. 그림은 최북(崔北)이 그렸고, 찬(贊)은 혜환(이용휴)이 지었으며, 글씨는 표암(강세황)이 썼으니 이 셋을 삼절(三絶)이라 일렀다”라고 했다. 다음은 남경희가 말하는 이용휴의 찬(贊)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산에 다녀갔다 해도 오히려 공산(空山)이었지.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구나! 그대를 두고 산문(山門)을 처음 연 분이라 해도 좋겠구나!》
이 화첩에는 정란이 앉았거나 선 모습, 길을 걷거나 청노새를 타고 홀로 가는 모습, 외로운 배에 홀로 기대 있는 모습, 지팡이를 짚고 먼 데를 가리키는 모습, 갓을 벗고 두 다리 쭉 뻗고 있는 모습 등등 갖가지 자세가 묘사되어 있다. 이 평에 따르면 정란은 금강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갔지만 그저 다녀만 갔을 뿐 산의 비경을 발견해내지 못했고, 금강산과 감정을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란이 금강산에 오르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한다고 했다. 과장이기는 하지만 그의 탐방이 금강산 바위 하나하나, 골짜기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금강산의 첫 문을 연 사람, 그가 바로 정란이라는 것이다.
야윈 노새 타고 타박타박 남경희의 ‘정창해전’에는 정란이 전국을 여행할 때 타고 다닌 청노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충직한 청노새는 주인을 태우고 금강산을 오르고 관동팔경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오다 그만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묻고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그 제문은 처절하여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이라 불렀다. 그의 쓸쓸하고 지루한 여행길을 함께 한 것은 동료 양반이나 시인묵객이 아니라 청노새와 종 한 명이었다. 건장한 말이 아닌 야윈 청노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그의 여행의 멋을 짐작할 수 있다. 서둘러 목적한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타박타박 먼 길을 걷는 세 개의 그림자가 눈에 선하다. 자동차로 순식간에 산 바로 밑, 절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오늘날 여행객의 행태와는 큰 차이가 있다. 청노새는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에도 등장한다. 남경희는 ‘정창해의 청노새를 위한 노래’를 지어 분신과 같은 청노새를 잃고 시름에 잠긴 정란을 달랬다.
《창해 선생은 기이함을 좋아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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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노새를 묻고 난 뒤 정란이 남경희에게 부탁하여 지은 시다. 보통의 말이 화려한 재갈과 안장으로 치장하고 도회지를 다니는 반면, 이 청노새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오골을 태우고 산수를 다니는 천성의 소유자요, 주인의 산수벽을 이해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남경희는 청노새가 몸을 뒤집어 그림 속에 들어가 그 긴 얼굴이 살아 있는 듯이 느껴지므로 정란에게 그림 속 청노새와 함께 다시 산길을 따라 여행을 하라고 시를 맺었다. 정란은 전국을 떠돈 여행가지만 본래 시와 문장에 능한 문인이었다. 세상을 주유하며 시와 글을 지어 소지한 해낭(奚囊)에 넣었다. 산의 풍치를 묘사하거나 그림을 그려 산맥과 수맥을 표시한 ‘유산기(遊山記)’도 그 해낭에 들어 있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이 서첩이 ‘불후첩(不朽帖)’이다.
산과 예술의 결정체 ‘불후첩’ 정란은 자신의 여행체험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첩을 엮으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후첩’이라는 이름을 단다. 그는 이 화첩을 당대의 명사인 채제공과 성대중(成大中) 등에게 보이고 글을 받았다. 채제공은 정란에게 “당신이란 사람 자체가 썩어서 사라지지 않을 존재”라고 하며 그림이나 찬사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란은 예술적 심성의 소유자였다. 화가 김홍도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표작인 ‘단원도’는 사실 정란을 위해 그린 것이다. 여기에 멋진 사연과 함께. 이 그림 상단에는 정란이 쓴 2편의 시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은 제사(題辭)가 실려 있다. 정란은 1780년 묘향산을 거쳐 의주로 해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금강산을 거쳐 돌아온 뒤 서울 김홍도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가 신축년(1781년)이었다. 아마 백두산을 유람한 행적을 김홍도에게 전해주고 그림을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간 듯하다. 그 자리에 화가 강희언(姜熙彦)도 함께 했다. 여기서 정란은 필시 그 귀한 백두산 여행담을 재미있게 늘어놓았던 모양이다. 나이가 가장 많은 정란이 좌장의 위치를 점하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희언은 술을 권했다. 한 시대 명사 3명이 둘러앉아 즐겁고 진솔한 시간을 보내고 이를 진솔회(眞率會)라 불렀다.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784년 12월, 경상도 안기역의 찰방(察訪, 요즘의 역장)으로 재직하던 김홍도를 정란이 또 찾았다. 정란은 “얼굴과 용모에는 여전히 산수의 구름 기상이 서려 있고, 그 정력은 늙었는데도 불구하고 쇠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음해 봄 한라산을 등반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김홍도는 그의 여행욕에 대해 “대단히 기이하고 웅장하다”고 경탄하면서 그와 “닷새 낮밤으로 취하면서 회포를 푼 후” 4년 전 모임을 추억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림을 보면 단원의 멋들어진 정원 초가집 마루에 거문고를 뜯는 이가 김홍도이고, 그 옆에 부채를 부치는 이가 강희언이며, 앞쪽으로 긴 수염에 늙수그레한 이가 정란이다. 버드나무 휘늘어진 열려진 대문 앞에 벙거지를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아이가 정란을 따라다니는 종이고, 그 옆에 비쩍 마른 청노새가 보인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린 명작 속에 당대 최고의 여행가 정란이 우연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화가와 여행가는 세상을 오시하는 오골(傲骨)의 자태와 누가 뭐라든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면에서 통하는 데가 있었다.
“나는 아직 힘이 있어” 서른 살부터 20여년간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탐방했지만 백두산과 한라산은 미답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쉰다섯 되던 해, 정란은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웠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백두산이 탐험의 대상이 된 것은 18세기 이후로 이의철, 홍계희, 박종, 김진상, 서명응, 조엄, 신광하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이 당시에 백두산을 등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이 그 지역 관료로 부임했거나 귀양을 간 김에 백두산에 올랐고, 신광하처럼 친지가 그 지역의 벼슬아치가 된 기회를 이용해 10여명에 이르는 부대를 이끌고 등반하기도 했다.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던 것이다.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은 여행가로서 그의 삶을 완성하는 목표였다. 다음은 쉰다섯 살의 정란이 열두 살짜리 강이천에게 자신의 계획과 의욕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늙은이가 서른이 되어 청노새 한 마리, 아이종 하나,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를 가지고 남으로는 낙동강을 노닐고, 덕유산을 오르고 속리산을 더듬고 월출산에 오르고 지리산을 엿보았고, 서로는 대동강을 굽어보고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구경하고 단발령을 넘어 두 번 금강산에 들어가서 바닷가를 따라 돌아왔지. 오직 북쪽의 백두산과 남쪽의 한라산에는 아직도 창해옹의 발자국이 없단 말씀이야. 하지만 나는 아직 힘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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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쉰다섯 살 노인에게 백두산과 한라산을 오르는 일이 생각만큼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힘이 있어”라는 말이 더욱 비장하게 들린다. 정란은 등반에 앞서 이용휴와 신경준 등 명사들을 두루 방문하여 여행계획을 비추며 격려의 글을 받아냈다. 이용휴는 다음 시를 써서 그의 등반 성공을 축원했다.
오래도록 백두산 좋다는 말 들어
정란은 18세기 호남이 배출한 3대 천재 중 하나라는 신경준을 찾아가 “나는 곧 관서 땅으로 가서 왕검성에 이르러 토산(兎山)과 정전제를 구경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단군대를 방문하고 개마고원을 넘어서 불함산(不咸山)에 오를 것이오. 그리하여 이국(二國) 산천을 내려다본 다음에 남쪽으로 내려와 지달산과 설악산을 노닐고서 돌아올 것이오”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한 지 이태 뒤인 1780년 전후한 시기에 정란은 등반을 감행했다.
“이제 한라산만 남았다” 그의 백두산 유람은 거의 1년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에게 신기한 견문을 전달했다. 강이천에게는 도중에 고생한 일, 유람하며 본 일, 산과 계곡의 기이함, 구름과 초목의 온갖 모습을 밤새도록 말해주었다. 화가 최북에게는 자신이 본 것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친구 신국빈에게 보여주었다. 정란보다 조금 늦게 1784년 백두산 여행을 다녀온 신광하는 호까지도 백택(白澤)으로 바꿀 만큼 당대인들에게 백두산 체험은 충격적이었다. 백두산 천지(옛날에는 대택〔大澤〕이라 불렀다)를 구경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정란은 친구에게 “백두산 정상에 올랐더니 천하만사가 까마득히 저절로 잊혀졌소. 세상의 이른바 부귀빈천, 사생과 애환이 하나도 내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제왕과 영웅호걸의 업적이란 것도 그저 미미한 것에 불과하더이다”라고 그 충격을 전해주었다. 한편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정란은 이제 한라산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용휴가 이렇게 만류하는 글을 써주었다.
《정일사가 역내(域內)의 많은 승경지를 두루 노닐고서도 오히려 역외(域外)의 명산을 보지 못했다고 한스럽게 여겼다. 나는 일사에게 일렀다. “비유하자면, 절세미인을 사모하는 자가 한번 미인을 보게 되면 마음이 바로 심드렁해지는 것과 같네. 차라리 오랜 세월 마음에 놓아두고 혹여라도 한번 만나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소.”(이용휴 ‘정일사의 백두산 유람기의 뒤에 쓰다’)》
이용휴가 절세미인은 직접 보는 것보다 보지 않고 그리워만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말로 정란을 달래는 품이 재미있다. 또 이용휴는 명산 하나쯤은 오르지 말고 남겨두라는 말도 건넨다. 그만큼 한라산에 오르겠다는 정란의 의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기세였지만 정란이 한라산과 조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김홍도와 만난 1784년, 새봄이 되면 한라산을 오르겠노라고 한 것을 보면 1785년 봄에 한라산 등반에 성공한 듯하다. 정란은 만년에 서울에 들러 성대중을 찾아가 ‘불후첩’을 내어놓고 글을 받으려 했다. 성대중은 한 가지 삽화를 들어 정란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길 것을 예언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옛일에 해박한 사람이 있어 그를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마두(利馬竇, 마테오 리치)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은 한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었지만 창해를 이마두에 비교했다. 창해옹은 그 말을 흔쾌히 여기고 좋아했다. 이마두라면 천하를 두루 구경했고, 창해옹은 동국(東國)을 두루 구경했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한 점은 같다. 그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했다.》
앞에서 본 김홍도의 그림에서 과연 마테오 리치와 닮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까. 진실이야 판명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정란의 풍모에서 마테오 리치와 같은 위대한 여행가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여행가의 삶은 고단했다. 서른 이후 정란이 본격적인 여행에 빠지면서 모든 세속적 성공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채제공은 화첩을 들고 찾아온 정란을 평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명산대천 여행을 좋아한다”고 평했다. 가정에 무책임한 정란을 대신한 사람은 외아들 정기동(鄭箕東, 1758∼75)이었다. 아들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만취(晩翠)이나 갓 결혼한 18세에 요절했다. 그리 젊어서 죽었으니 기록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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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용휴가 쓴 묘지명에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정란은 아들이 죽은 후 1778년 서울로 가서 이용휴와 신경준에게 아들 묘지명과 묘갈명을 부탁했다. 이용휴는 ‘포의정군묘지명(布衣鄭君墓誌銘)’을, 신경준은 ‘정동야묘갈명(鄭東野墓碣銘)’을 각각 지어주었다. 이용휴의 글을 읽어보자.
《남다른 덕을 지녔음에도 오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까닭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다른 덕을 행하는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기에 하늘이 그를 세상에 내려 보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끔 한다. (…중략…) 정군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갖추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님이 원하기도 전에 실천했고, 말씀을 하면 메아리처럼 바로 반응했다. 이 일 저 일 모두 봉양하여 부모가 계신 줄만 알 뿐 자기 자신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밖의 일은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책을 좋아하여 남들이 식욕과 색욕에 대해서 탐하듯 하였다. 죽기 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일과 책을 다 읽지 못한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임종을 앞두고서 그 아내인 조씨(趙氏)에게 시부모를 잘 모실 것과 책을 무덤에 함께 묻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내가 흔쾌히 허락하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명(銘)을 짓는다. 눈을 한번 감고 나면 온갖 욕망이 사라져 만사가 끝이다. 그대는 부인으로 자식을 삼고 서책으로 순장을 해서 평소의 뜻을 이었구나!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고 경전에 일렀고, 군자의 마음은 죽어도 그치지 않는다고 선유(先儒)가 말하더니 바로 그대를 두고 한 말이다.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대의 모습이 떠오르고, 달빛 처연하고 바람 시리게 불며, 나무가 흔들리고 새가 울 때면 밤늦도록 책을 읽는 그대의 독서성(讀書聲)이 들리겠지.》
이용휴는 정기동을 모범이라고 했다. 그런 모범이 일찍 저세상으로 간 간절한 슬픔을 표현하되 특히 명(銘)에서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을 담았다. 여행에 빠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은 글로만 보아도 처연하다.
가정을 포기한 山水癖 기동의 외삼촌은 조카가 그토록 좋아하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을 상심하여 그에게 가르치려던 내용을 필사해 ‘칠등귀독편(漆燈歸讀編)’을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칠흑같이 깜깜한 등불 밑으로 돌아가 읽어야 할 책’이란 이름이니, 무덤에서나마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공부도 마치지 못하고 죽은 조카에 대해 애통해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느껴진다. 명의 마지막 대목 “달빛 처연하고 바람 시리게 불며, 나무가 흔들리고 새가 울 때면 밤늦도록 책을 읽는 그대의 독서성이 들리겠지”는 곧 아들의 환청을 듣는 정란을 묘사하고 있다. 정란은 기성사회의 관례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위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용휴는 수백 년 뒤 그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기다려보자고 했다(이용휴의 ‘바다 건너 한라산에 오를 사람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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