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꽃의 달인’ 유박

醉月 2008. 8. 4. 07:33
“깊은 밤 홀로 꽃 사이에 서니 옷깃 가득 이슬과 향기에 젖어…”
꽃을 사랑한 사람은 고래로 부지기수다. 조선시대에도 꽃, 그중에도 매화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선비는 꽤나 많았다. 그러나 취미와 사랑의 단계를 넘어 학문적 경지에 이른 진정한 전문가는 드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번잡한 세상을 등진 채 ‘꽃나라’를 세운 은사(隱士) 유박은 시대를 풍미한 꽃의 달인이었다.

거제도 앞바다에 외도라는 섬이 있다. 섬 전체가 온통 특이한 꽃과 나무로 가득한 멋진 세계. 외도처럼 온갖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세계를 일컬어 옛사람은 ‘중향국(衆香國)’이라고 했다. 오늘날은 전국 곳곳에 이런 종류의 화원(花園)이 개발되어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특이한 외국산 꽃들이 주종을 이룬, 상업적으로 경영되는 화원이 대부분이다. 물론 전통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화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손님을 끌어 모으는 화원이 존재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외국종 꽃을 마음대로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에.

대신 궁궐이나 개인저택에 화원을 조성하여 꽃을 즐기는 기풍은 매우 강했다. 18세기 조선에선 개인저택마다 화원을 조성하는 일이 서울과 평양, 개성 등지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정원에 특이한 화훼와 수목을 구해 심고 친구들을 초청해 감상하는 모임이 곳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복사꽃이 만발한 봄철에는 꽃놀이 열풍이 불기 일쑤였다. 정조 연간의 시인 목만중(睦萬中)은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화병 속의 꽃을 감상하며 이렇게 자위하기도 했다.

온 나라가 미쳐 날뛰는 이유는 모두 꽃 때문이니
작은 화병 속 맑은 꽃을 마주하네.
밤들어 비바람이 속절없이 지나가도
주렴 안에 호젓이 있는 나를 어찌하겠나.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던 당시 호사가들의 취미는 결코 오늘날의 꽃 애호가들에 뒤지지 않는다. 갖가지 꽃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한 글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꽃의 품종을 개량하는 등 화훼에 대해 광범위한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도 많았다. 화벽(花癖, 꽃에 대한 병)을 지닌 마니아가 부쩍 늘었고, 그들에 관한 소상한 정보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강이천의 ‘이화관총화(梨花館叢話)’에 등장하는, ‘국화품종을 개량한 김 노인’에 관한 다음 이야기도 그 한 사례다.

옛날 여항(閭巷)에 김 노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국화를 잘 심어서 꽃을 일찍 피게도, 늦게 피게도 했다. 그의 꽃밭엔 몇 치 크기로 키워 손톱처럼 작은 꽃이 빛깔은 곱고 자태는 간드러진 것도 있고, 한 길 넘는 크기로 키워 꽃이 몹시 큰 것도 있다. 게다가 꽃의 색깔이 옻칠한 듯 검기도 하고, 또 가지 하나에 여러 빛깔의 꽃이 섞여 피기도 했다. 귀공자들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 다투어 꽃을 샀기 때문에 노인은 그 값으로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그 방법을 비밀에 부쳐 후에는 비방을 전하는 자가 없다.

 

꽃에 담긴 ‘하늘의 빛깔’

그런가 하면 피어난 꽃에서 천지의 조화를 읽어내는 이 시기 사람들의 정서도 흥미롭다. 다음은 18세기 중반의 시인 이봉환(李鳳煥)이 꽃을 감상하는 방법을 두고 한 말이다.

[화(花)라는 글자는 초(草)에서 나왔고 화(化)에서 나왔다. 천지의 조화를 볼 수 있는 사물이 하나가 아니지만, 그 기묘한 변환(變幻)의 극단을 달리는 것으로 초목의 조화에 비할 것이 없다. 비유하자면 지인(至人)이 때때로 기묘한 말을 찬란하게 하는 것과 같고, 꽃봉오리가 활짝 피는 사이에 몹시 오묘한 무늬가 보일락말락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만약 천지간에 본래 꽃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꽃 한 송이가 피었다고 하자. 그 꽃을 본 사람들은 이상한 물건, 괴이한 일로 여길 테고, 들은 사람들은 거짓이라 여겨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화옹(造化翁)이 부린 장난기는 꽃에 대해 가장 심하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듯, 이 시대 사람들은 꽃을 가장 빼어난 천지의 조화로 간주했다. 이봉환은 화(花)란 글자가 풀의 조화를 뜻하는 제작원리를 가졌다고 전제하고, 천지간에 최고의 변환(變幻)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가환(李家煥) 역시 극도의 찬탄을 토해냈다. 그는 기원(綺園)이란 이름의 화원에 써준 글에서 꽃을 가꾸어 구경하는 것이 천지 아래 최고의 유희(遊戱)라는 찬사를 보냈다. “하늘은 기이한 빛깔을 소유하고 인간은 그것을 빌려다 쓴다”고 표현한 그는, 하늘이 소유한 그 기이한 빛깔을 빌려 쓰는 인간 가운데 솜씨가 가장 모자란 자가 비단 짜는 여인이고, 약은 꾀를 발휘하는 자가 시인(詩人)이며, 가장 잘 빌려 쓰는 자가 꽃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기발한 생각을 표현했다.

   

[그러니 그 누가 기원(綺園)의 주인보다 낫겠는가? 기원 주인은 몇 이랑의 땅을 개간하여 이름난 화훼(花卉)를 죽 심었다. 붉은 색, 녹색, 자주색, 비취색, 옥색, 담황색, 단향목색, 흰색, 얕은 멋, 깊은 멋, 성글게 심은 꽃, 빽빽하게 심은 꽃, 새로운 꽃, 묵은 꽃, 일찍 피는 꽃, 늦게 피는 꽃, 저물 때 피는 꽃, 새벽에 피는 꽃, 갠 날 피는 꽃, 비 올 때 피는 꽃 등등. 온갖 꽃이 찬란하게 어우러져 빛깔을 뽐낸다. 이렇게 진짜 정취(情趣)로 진짜 빛깔을 대하니 그 무엇이 우열을 다투겠는가.

그렇지만 주인은 화훼의 위치를 안배하고, 심고 접붙이고 물을 뿌리고 물길을 터주며, 흙을 북돋고 가지를 쳐내는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멍청하고 완고한 들 늙은이가 한 해 내내 목 뻣뻣하게 베개 높이고 누웠다가, 기원 동산에 꽃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흔연히 찾아가서는, 온종일 마음 편하게 구경하는 행복에는 비교할 수 있으랴!]

꽃을 가꾸는 기원의 주인이야말로 비단을 짜는 여인보다도, 조화의 비밀을 표현해내는 시인보다도 더 자연이 선사하는 진정한 빛깔, 진정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요지의 글이다. 가끔 화원을 찾아가 꽃을 감상하는 행복을 최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 글에서 꽃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탐닉과 열정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이렇듯 꽃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당대의 마니아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이가 오늘의 주인공인 화훼전문가 유박(柳璞, 1730∼87)이다. 꽃에 대한 사랑과 전문적 지식에서 그를 따를 자가 많지 않다. 이제 화벽(花癖)의 유박, 유박의 화벽에 얽힌 옛이야기를 만나보자.

유박은 영·정조 시대의 화훼전문가다. 본인이 직접 백화암(百花菴)이란 화원을 경영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화암수록(花菴隨錄)’이란 화훼 전문서를 지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 책은 조선 전기에 강희안(姜希顔)이 저술한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짝을 이루는 그야말로 소중한 저술이다.

유박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1730년에 태어나 1787년에 죽었다. 자는 화서(和瑞), 호는 백화암(百花菴)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로 윤석중(尹錫中)의 딸이다. 아래로는 딸만 셋을 두어 각기 신세창(愼世昌), 이정륜(李廷倫), 조항규(趙恒奎)에게 시집갔다. 일반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이지만, 실학자로 유명한 유득공(柳得恭)의 7촌 당숙이라는 점을 알고 나면 조금은 친숙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꽃과 함께 살리라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과거에 오르지도, 벼슬을 하지도 않았다. 황해도 배천군 금곡(金谷)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의 주변에는 명사들도 별로 없었다. ‘화암수록’에 실려 있는 자작시를 근거로 그가 1778년에 배천군 향교를 이전하는 공사를 감독한 사실과 가끔 서울에 들른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꽃을 가꾼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한 일을 밝히고 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저명한 문인들 사이에서 그의 애화벽(愛花癖)이 회자되었고 그 또한 자신의 취미와 행적을 감추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시골에서 화원을 경영하는 그였지만 문인들로부터 받은 시와 산문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따라서 ‘화암수록’과 문인들로부터 받은 글의 도움을 받는다면 유박의 독특한 삶과 내면은 복원이 가능하다.

유박이 살았던 곳은 황해도 배천군 금곡이지만 그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젊은 시절엔 한때 서울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는 20대 초반에 금곡에 정착한다. 금곡은 배천군 군치(郡治)로부터 동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이다. 유명한 벽란도(碧瀾渡)의 안쪽에 있는 포구로 경기와 해서지방의 해상교통을 중계하는 요충지이며 해서의 전세(田稅)가 모이는 금곡창(金谷倉)이 있었다. 유득공은 ‘상량문’에서 그가 이곳으로 이주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꽃의 주인은 누구인가? 유아무개 선생이다.
헌원씨(軒轅氏)의 먼 후예로서 조선에 사는 한 포의(布衣)라네.
작은 녹봉 얻자고 허리 굽히지 않고 귀향한 것은 문 앞에 버들을 심은 도연명(陶淵明)을 본받음이요,
계책 하나가 남아 홀연히 바다에 뜬 것은 배를 타고 황금을 베푼 범려(范?)를 사모함이네.
남과 나의 시시비비는 모두 잊었으니 나비가 장자가 되고 장자가 나비가 된 격이요,
귀천과 영욕을 입에 올릴 필요가 있으랴, 엄군평(嚴君平)이 세상을 버리고 세상이 엄군평을 버린 것과 같다.
그리하여 소요하고 노니는 생활로 세월을 보내는 방법을 삼았네.

   

이 글에 나타난 백화암 주인 유박은 한창 나이에 벼슬을 포기하고 바닷가에 정착한 은사의 모습이다. 시비가 난무하고 귀천과 영욕이 무쌍한 현실과 단절한 채 은자의 삶을 택한 것이다.

금곡에 정착한 이후 유박은 이 지역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무려 20년 동안이나 화원의 경영에 정성을 기울였다. 불혹의 나이가 된 그는 지난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읊조린다.

“물가에서 미친 노래를 부른 지 20년인데 어느새 늙어버린 채 온갖 꽃을 앞에 두고 있네(澤藪狂歌二十年 居然老大百花前 - ‘그저 읊다(?吟)’라는 자작시 중의 한 구절)”라고.

또 자신의 집에 얹을 현판에 직접 쓴 ‘화암기(花菴記)’에서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졸렬하여 스스로 판단해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사는 곳의 산수는 무겁고 탁하여 유람할 만한 경치가 드물다. 거적으로 문을 단 궁벽한 집이라 한 해가 다 가도록 훌륭한 분의 수레가 끊어졌다.

근래 사시사철의 화훼 백 본(本)을 구해다 큰 것은 재배하고 작은 것은 옹기를 화단처럼 만들어 화암(花庵) 안에 두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소일하며 세상을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다. 분매와 금취(국화의 일종)는 그 정신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왜철쭉과 영산홍은 그 형세를 멀리서 살펴보며, 웅위함은 단약(丹藥)을 취하고, 계수와 복사꽃은 새로 얻은 첩인 양하고, 치자와 측백은 큰 손님을 대하듯 다뤘다. 교태 있는 용모가 손에 잡힐 듯한 것은 석류이고, 기상이 활달한 것은 파초다. 괴석으로는 뜰에 명산을 만들고, 비쩍 마른 소나무는 태고적 얼굴을 만난다. 풍죽(風竹)은 전국(戰國)시대의 기상을 띠고 있고, 잡종은 시자(侍者)가 된다. 연꽃은 공경히 주렴계(周濂溪)를 마주한 듯하다.

그 가운데 기이한 것과 예스러운 것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고, 맑은 것과 고결한 것을 취해 벗을 삼으며, 번화한 것과 화려한 것을 취하여 손님을 삼는다. 이러한 즐거움을 남들에게 양보하고자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버린다. 따라서 나 홀로 즐겨도 다행히 금하는 이가 없다. 기쁠 때도 화날 때도 시름겨울 때도 즐거울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언제나 이 화병의 꽃에 의지하면서 내 몸뚱어리를 잊은 채 늙음이 곧 이를 것도 알지 못한다.(‘화암기’ 전문)]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넘어

그는 자신을 주류사회에서 낙오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주류란 과거를 보아 조정에 출사하는 삶이다. 최소한 성리학을 공부하여 향리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행세하며 사는 삶을 추구한다. 선비는 주류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비의 삶을 스스로 거부했다. 사대부의 일원이었으나 고전적인 가치관의 세계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유박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평생 꽃을 키우며 살겠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장부가 꽃에 관심을 두는 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사물에 탐닉하면 의지가 손상된다)라 하여 비판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선비들의 세계에서는 정치나 교화, 경서 등을 제외한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완물상지라 하여 경계했다.

18세기의 성리학자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 같은 이는 뜰에다 많은 꽃을 심고 이를 감상하며 시를 지었다. 그는 시집의 서문 ‘정훼잡영서(庭卉雜詠序)’에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뿐 감히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요컨대 정선생(程先生)의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가슴속에 새겨 꽃에 젖어들어가는 우려를 없앨 것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꽃을 즐기되 거기에 깊이 빠질까 우려하는 마음이다. 꽃에 탐닉해 유학에 소홀할까 염려한 것이다. 이렇듯 당시 사대부들은 완물상지의 계율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유박은 당대를 지배한 의식의 경계를 벗어났다. 자신은 버림받은 자이니 좋아하는 꽃을 스승으로, 벗으로, 손님으로 삼아서 꽃과 함께 인생을 구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남이 가는 길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심로숭(沈魯崇)이 ‘자저실기(自著實紀)’에서 “연못가나 뜰에 이름난 꽃, 아름다운 나무를 심는다면 사람의 성령(性靈)을 배양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일러 완물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되다”고 말한 바와 같이, 꽃에 의미를 두는 사람도 존재했다. 이미 모두가 지향하는 하나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걷는 다양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유박은 새로운 길의 전위에서 제 길을 간 것이었다.

   

‘세상 모든 꽃이 여기서 숨쉰다’

꽃과 나무에 관한 유박의 열정은 꽃의 수집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온갖 꽃을 구해 다 심었다. 새로운 꽃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불원천리 찾아갔고, 심지어는 외국의 선박에서 외국종 꽃을 구한 일도 있다. 그리하여 그의 화원에는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대해 유득공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동으로 들보를 던지네. 벽란도를 오가는 사공들아! 화분을 싣고 금곡으로 가거들랑 뱃삯으로 일문을 달라고 하지 말아라!
서로 들보를 던지네. 돛배가 바람을 받아 떠나면 곧 청주(靑州)와 제주(齊州)라, 우리 동국에는 없어도 중국에는 있는 것이 여지와 종려나무이니 어찌하면 얻을 건가?
남으로 들보를 던지네. 묻노니 뱃사람은 어느 땅 사나인가? 혹시 강진 해남 사는 사람이 아닌가? 동백과 치자 석류, 감자나무를 가져와 다오.
북으로 들보를 던지네. 북으로 가서 꽃을 구하나 꼭 얻지는 못해. 그저 황주(黃州)에는 배가 좋아 긴 나무로 두드려서 먹는다네.
상천(上天) 위에다 들보를 던지네. 흰 느티나무 두 그루가 곧추 서 있어 월궁으로 들어가 늙은 두꺼비를 걷어차고 붉은 계수나무를 꺾어온들 누가 막으랴?
아래 세상에 들보를 던지네. 세상의 화초를 기르는 자들은 종일토록 명리(名利)를 다투는 시장에서 달리다가 저녁에 들어와 뒷짐 지고 우아한 체하지.
엎드려 바라노니, 들보를 올린 뒤로는 새가 꽃술을 쪼지 말고, 벌레가 뿌리를 갉아먹지 않고, 바람이 버팀목을 쓰러뜨리지 않고, 얼음이 화분을 쪼개지 말고, 더위가 국화를 죽이지 않고, 추위가 매화를 병들게 하지 말지어다.
석류에는 향기가 찾아오고, 파초에도 꽃이 피기를 바라노라.
스물네 번 부는 바람바람마다 좋아서 봄이 왔다 봄이 가고
삼백예순 날 날마다 한가로이 꽃이 피고 꽃이 지기를 바라노라.

화벽(花癖)을 지닌 유박이 꽃을 구하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케 하는 예찬이다. 동으로 벽란도를 지나 금곡으로 오는 사공들에게 만약 유박의 꽃을 운반하거든 운임을 받지 말라고 했고, 서쪽으로 중국의 청주, 제주에 가서 동국에는 없는 품종인 여지와 종려나무를 구해다 달라고 했다. 남쪽으로는 강진 등지에서 동백과 치자 등속을 구해오고, 북쪽에는 꽃이 없으므로 황주의 특산인 배나무를 구해달라고 했다.

또한 유득공은 검은 색 꽃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다는 말로 유박의 수집벽을 추켜세웠다. 천상의 달나라까지 가서 월계수를 꺾어올 기세라고 익살을 부리면서 꽃을 심기만 하고 감상하지 않는 속물들에 대해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꽃을 열성적으로 구하는 유박에게 감동하여 나중에는 뱃사공들이 먼 곳에 가게 되면 자발적으로 특이한 꽃을 구해다 주기까지 했다. 그는 그 지역에서 화훼전문가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화원을 꾸미는 과정엔 주변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도움이 있었다.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99)이 유박을 위해 쓴 ‘우화재기(寓花齋記)’에는 그에게 동화된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그대가 꽃을 심히 사랑하여 그대에게 동화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가 일 때문에 먼 곳으로 여행하여 며칠, 몇 달 동안 돌아오지 못할 때에는 가족들이 흙을 북돋아 꽃을 심고 꽃에 물을 뿌려주어 적당한 때를 감히 놓치는 법이 없이, 그대가 집에 있을 때와 똑같다고 하오. 이것은 꽃을 사랑하는 그대의 정성이 집안사람을 동화시킨 것이오. 금곡 주위의 마을에서는 그대가 화계를 만들고 꽃뿌리를 심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명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달려오고 권하지 않는 데도 일을 도와 마치 제 일이라서 하지 않으면 안 될 듯이 한다고 하였소. 이것은 꽃을 사랑하는 그대의 정성이 이웃 사람들을 동화시킨 것이오. 그 고을 사람 가운데 배를 타고 고기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완상(玩賞)할 만한 기이한 꽃을 보면 화분에 담아 배에 싣고 기뻐하면서 마치 재물을 바치듯이 와서 바친다고 하였소. 이것은 꽃을 사랑하는 그대의 정성이 뱃사람을 동화시킨 것이오. 그저 한 사람의 포의(布衣)에 불과한 그대가 무슨 힘이 있어 이런 화원을 만들 수 있겠소.]

   

유박의 정성에 감복한 집안사람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어부들이 그를 위해 꽃을 심는 일을 도와주고 멀리서 꽃을 구해다 주었다. 모두가 꽃에 대한 사랑에 동화되어 나온 행동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벼슬도 하지 않고 경제력도 넉넉하지 않은 평범한 포의(布衣)로서 유박이 그 같은 화원을 꾸밀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심로숭도 꽃을 사랑하지만 화원을 만드는 일은 큰돈이 들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토로한 바 있다. 꽃을 향한 유박의 열정과 그에 동화된 주변 사람들이 화원과 주변의 동산에 온갖 품종의 꽃과 나무를 심어 중향국(衆香國)을 만들었던 것이다.

 

백화암, 꽃의 박물관

화원을 경영한 지 10년 가까이 되자 유박은 초가집을 개축해 새로 집을 짓고 백화암(百花菴)이라 이름붙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우화재(寓花齋)와 백화암이라는 두 채의 집을 지었다. 하나는 꽃에 파묻혀 산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백 종의 꽃으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의미이니, 꽃에 미친 사람의 작명으로 썩잘 어울린다. 우화재에 관한 기록은 채제공이 쓴 글에만 보이나 백화암에 관한 기록은 유득공, 유금, 이헌경, 목만중, 정범조 등 다수의 기록에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우화재와 백화암이 같은 건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서로 다른 시기에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백화암을 지은 구체적인 동기와 과정은 유득공의 ‘금곡(金谷)의 백화암(百花菴)에 부친 상량문’의 다음 구절에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여기에 낡은 집 있거니, 옛날 집 그대로라.
낮에는 지붕을 얹고 밤에는 새끼줄을 꼬니, 모든 일을 농사짓는 여가를 이용하였고,
애꾸눈이 수준기(水準器)로 재고, 곱사등이가 흙손질을 하니, 멋모르고 일을 시킨다는 비방이 나오랴?
향기롭다, 들보 올리는 제사에는 연주(延州)의 좋은 음식을 장만하고
영롱하다, 왕골자리 재료로는 강서(江西)의 용수초(龍鬚艸)를 엮었네.
숲과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은 우리 당숙이 말씀하던 바요
시문과 서화를 전해온 분들은 한 시대의 인물인 아무개라네.
비록 초가집 한 채에 불과하나
백화암이라 부르기에 넉넉하네.
제자들이 늘어서 혹은 마루에 오르고 혹은 방 안에 들어간 일과 같지 않은가?
서로들 주인과 손님으로 나뉘어 너는 동쪽 계단에 서고 나는 서쪽 계단에 서네.
나무를 잘 심는 곽탁타(郭?駝)를 만나면 상객(上客)으로 모시고,
도화마(桃花馬)를 자랑하던 옛사람과 비교해 어떠한가?
과연 번화하던 금곡(金谷)이
어느새 향기의 나라로 변했구나!
어떤 사람은 무엇 하러 그리 힘들게 하나 그만두게나 하지만
웃고 대꾸하지 않으니 유유자적할 뿐이라.
10년 세월 강호에 머물러 도리(桃李) 만발한 문 앞에는 발길을 끊었으니
한 봄 내내 그림 속이라 벌과 나비가 나는 바람 속에 꿈이 잦다.

백화암을 예찬한 쓴 글이 많지만 유득공의 글이 가장 상세하다. 10년 세월 강호에 머물러 있다고 했으니 금곡에 정착한 지 10년 만에 개축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비록 초가집 한 채이지만 안팎으로 꽃과 나무를 심어 백화암이라 하기에 충분한 꽃의 나라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힘든 일을 뭐하러 하느냐고 핀잔해도 그는 대꾸 없이 유유자적했다고 했다.

유박 자신도 감회가 남달랐는지 ‘집이 이루어지다(堂成)’라는 두 편의 시를 지었다. 그중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한 칸 짓고 보니/ 늘그막에 병주(幷州)가 그리워 도리어 우습구나(十載經營一草堂, 老來還笑幷州鄕)”란 구절에서 역시 10년을 말하고 있다.

백화암은 꽃에 파묻혀 지내는 유박의 삶이 영위되는 공간이다. 그는 자신의 아호 역시 백화암(百花菴), 또는 줄여서 화암(花菴)이라고 지었다. 그는 ‘화암기(花菴記)’를 지어 꽃과 더불어 지내는 즐거움을 말했는데, 특별히 ‘화암만어(花菴?語)’ 4개 조에서 멋지게 표현했다. 그중 3개 조는 이렇다.

   

[달은 서산에 숨고 밤은 적적한 삼경, 이 몸 홀로 꽃 사이에 서니 옷깃 가득 이슬과 천연의 향기에 젖는다.
화암(花菴)에서 잠을 실컷 자고 나니 흰 갈매기는 모두 날아간다. 뜰 가득 석양이 내리쬐고 강촌은 적적할 때 어디선가 뱃사공은 뱃노래 한 가락을 뽑아 어기여차 소리 원근에서 들려온다.
붉고 흰 꽃 몇 그루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다정한 사람은 술병을 들고 나귀를 울리며 온다. 상에는 책, 시렁에는 거문고. 웬일인지 아이들은 바둑판 하나를 다시 내온다.]

세속적이고 번잡한 일을 떠나 자연과 더불어 지내고, 꽃과 함께 보내는 여유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백화암을 짓고서 서울의 저명한 문인들에게 연락하여 시문을 받았다. 꽃에 대한 사랑과 전문성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행동이다. 유득공은 특별히 ‘금곡(金谷)의 백화암(百花菴)에 부친 상량문’을 썼고, 유금, 이헌경, 목만중, 정범조, 이용휴 등이 시와 문장을 써서 그에게 부쳤다. 모두 남인 인사들로서 문명(文名)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이용휴가 지은 ‘멀리서 백화암에 부친다(寄題百花菴)’에는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유박의 멋이 잘 드러나 있다.

향기로운 풀에 녹색 빛이 오르면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 뽑지 않네.
다시 신기한 구경거리를 갖추고자
먼 지역에서 종려나무 사온다네.
시내를 따라 동산을 건너올 때
작은 수레를 굳이 탈 것인가?
낮은 가지는 때로 갓을 치고
떨어진 꽃술은 소매에 붙네.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숲을 거니네.
집에서 진지 차렸다고 고해도
“천천히 하지”라고 답할 뿐.
꽃부리 먹고 열매를 먹는 그대는
어엿한 옛날의 궤거(��)일세.
“조물주는 청복(淸福)을 아끼건만
어째서 내게만 듬뿍 주셨을까?”
꽃 아래서 때로 술잔을 들며
스스로 축하도 하고 칭찬도 하네.
동전 냄새와 고기비린내는
온갖 꽃내음이 씻어주네.

 

‘화목품제(花木品題)’로 연 꽃 품평회

화원을 경영한 지 거의 20년 되던 해인 1772년 이전에 유박은 친구인 안습제(安習濟, 1733~?)와 주고받은 편지를 근거로 ‘화목품제(花木品題)’를 저술했다. 꽃과 나무의 등급을 나누어 평가한 것으로서 오랫동안 꽃을 키우고 감상한 체험과 지식의 핵심을 담았다. 이 책에서 유박은 꽃을 모두 9개 등급으로 나누었다. 다음은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1등: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소나무. 기준은 고표일운(高標逸韻)
2등: 모란, 작약, 왜홍(倭紅), 해류(海榴), 파초. 기준은 부귀(富貴)함
3등: 치자, 동백, 사계(四季), 종려, 만년송(萬年松). 기준은 운치(韻致)
4등: 화리(華梨), 소철, 서향화(瑞香花), 포도, 귤. 기준은 운치(韻致)
5등: 석류, 복사꽃, 해당, 장미, 수양버들. 기준은 번화(繁華)함
6등: 두견, 살구, 백일홍, 감, 오동. 기준은 번화(繁華)함
7등: 배, 정향(庭香), 목련, 앵두, 단풍. 기준은 제각각의 장점을 취한다. 이하 같다.
8등: 목근(木槿·무궁화), 패랭이꽃, 옥잠화, 봉선화, 두충.
9등: 규화(葵花, 접시꽃), 전추사(剪秋紗), 금전화(金錢花), 창잠, 화양목(華楊木)]

모두 45종의 꽃을 각각의 기준에 따라 9개 등급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의 판단으로 가장 빼어난 45종의 꽃을 선발한 것이다. 그는 또 이 9등급에서 제외된 화목(花木) 가운데 능금, 단내(丹柰), 산수유, 위성류(渭城柳), 백합, 상해당(常海棠), 산단화(山丹花), 철쭉, 백자(栢子), 측백, 비자(枇子), 은행 12종의 화목을 뽑아서 더 보태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다. 45종의 꽃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는데, 작약을 한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작약(芍藥): 귀우(貴友)이고, 꽃의 재상이다.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 천엽구(千葉臼), 천엽순홍(千葉純紅)이 귀한 종이다. 가을에 파종하는 것이 좋다. 작약은 한번 화가 나면 3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럴 때는 반드시 인분을 주어 화를 풀어야 한다.]

각각의 꽃을 설명한 것에는 주목할 만한 견해가 많다. 또 꽃 이름의 고증에도 적지않은 신경을 썼다. 해당화를 설명한 대목에는 이런 언급도 보인다.

[해당화: 대개 우리나라 사람은 꽃의 명칭과 품종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다. 동백꽃을 산다(山茶)로 알고, 백일홍을 자미(紫薇)로, 향불(香佛)을 신이화(辛夷花)로, 소철을 비파(枇杷)로 안다. 서향(瑞香)은 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도 못한다. 월사계(月四季)도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무엇이라 이름하는지 모른다. 해마다 북경에 들어가는 사신들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는 수많은 꽃 가운데 자신의 미학적 기준을 적용해 꽃의 품평회를 열었다. 이미 강희안이 ‘양화소록’에서 자신의 기준대로 꽃을 품평한 일이 있지만 그는 관점이 달랐다. 그 기준을 소상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일단이 직접 쓴 ‘화목구등품제자서’에 드러나 있다.

[근래 여러 공자와 부마도위의 저택에서는 소철, 화리, 종려를 경쟁하듯 숭상하여 먼 지역에서 나오는 것을 연모해 정원 화목의 윗자리를 주는 반면, 거리낌없이 매화와 국화를 둘째가는 품질로 여긴다. 그래서 드디어 평범한 인물과 빼어난 선비를 나란히 줄 세운다. 이제 꽃의 세계에서 순서를 정하는 사람은 근엄하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영은 아직 바다를 넘어오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 난초와 지초, 여지라고 부르는 것들은 진품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들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신기함만을 좇아서 품평하지 않았다. 즉 중국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신품종이라고 해서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고, 진품이 아닌 종자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했다. 근엄한 잣대를 적용해 꽃의 등급을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꽃의 등급을 정한 다음에 꽃의 품평회를 따로 열었다. ‘화품평론(花品評論)’조에서 갖가지 꽃의 특징을 네 글자와 여덟 글자로 품평하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 품평한 말을 가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매화: 강과 산의 정신, 태고적 면목.
국화: 혼연한 원기, 무한한 조화.
연꽃: 얼음같이 차고 가을 물같이 맑다. 갠 하늘의 달과 햇볕 속의 바람이다.
모란: 부귀하고 번화한 모습이라 공론이 벌써 정해졌다.
작약: 수많은 꽃 가운데 우뚝 선 최고로 붉고 흰 꽃이 패자를 다툰다.
왜홍(倭紅): 현란함이 온갖 꽃을 어지럽게 하며 꽃의 숲에서 권력을 휘두른다.
해류(海榴): 서시(西施)가 찡그린 모습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애가 끊어지게 한다.
석류: 조비연(趙飛燕)과 양귀비가 모든 후궁의 총애를 독차지한다.
서향화(瑞香花): 한가로울 때의 특별한 벗으로 십리에 맑은 향기가 풍긴다.
치자: 비쩍 마른 두루미, 구름 위를 나는 기러기로서 곡기를 끊고 세상을 도망한 듯하다.
동백: 선풍도골(仙風道骨)로 세속과 단절하고 사람과 떨어져 산다.
해당화: 말쑥한 모습이 고운데, 잠에서 덜 깨어 몽롱하다.
장미: 샛노란 정색(正色)이 그 자태가 우아하다.
백일홍: 순영(舜英)이 얼굴이 붉은 일이 있겠는가?
살구꽃: 절등(絶等)한 소성(小星, 少妾).
배꽃: 우아한 부인.
패랭이꽃: 곡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정향: 질박한 행자(行者).
옥잠화: 영리한 사미승.
전추사: 문 밖에 시중하는 동자.]

유박은 여러 꽃의 각기 다른 특징과 인상을 명확하게 포착하여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본래 동양사회에서는 인간을 비롯해서 가치 있는 온갖 사물을 인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를 즐겼다. 대표적인 것으로 인품(人品)이 있고, 시품(詩品), 서품(書品), 화품(畵品)이 있는데 유박은 그러한 방법을 꽃의 특징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의 화품(花品)을 살펴보면 꽃의 특징과 썩 잘 맞아떨어진다. 패랭이꽃을 곡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不哭孩兒)라고 표현한 것이나 살구꽃을 절등(絶等)한 소성(小星, 少妾)이라고 표현한 것은 참으로 문학적이면서도 기묘하다. 그가 꽃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며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순 전문가 아닌 시대의 학자

안습제는 유박의 평을 보고서 소박한 성품과 병적인 사랑이 아니라면 이렇듯 미묘하게 꽃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유박의 정신이 꽃의 정령과 몰래 만나 은밀히 통한 결과라고 탄복했다. 유박이 사람인지 꽃인지 헷갈린다고도 했다. 꽃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모두 유박에게 ‘(당신이) 내 주인이오, 내 주인이오!’라고 할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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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평가해 그 높낮이를 가려내고 다양한 종의 꽃이 지닌 특징을 파악하는 것은 안목과 미학의 깊이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의 평가는 자기 멋대로의 잣대를 적용한 자의적 평가가 아니라, 강희안 이래 내려오는 조선 사대부의 꽃에 대한 미의식을 바탕에 깔고 중국측 전례까지 섭취한 뒤에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유박은 단순한 원예업자나 화훼전문가의 수준을 넘어 학술적인 의미에서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꽃을 사랑한 사람은 고래로 부지기수다. 그중에서도 매화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사람은 꽤나 많다. 그러나 취미와 사랑의 단계를 넘어서 꽃에 관한 진정한 전문가라고 일컬을 만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유박은 조선시대를 풍미한 꽃의 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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