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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들의 ‘대기실’ 환자방 24시

醉月 2008. 10. 20. 20:39
암환자들의 ‘대기실’ 환자방 24시
우리 사회에는 참 많은 ‘방’이 존재한다. 마이크를 잡고 열창하는 노래방,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PC방과 플스방, 오붓하게 영화를 즐기는 비디오방과 DVD방. 후끈하게 땀 흘리는 찜질방도 있다. 대부분 놀이와 즐거움을 위한 공간들이다. 그런데 같은 ‘방’이란 이름을 쓰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공간이 하나 있다. 투병의 고통과 간병의 안타까움, 완치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곳, 바로 ‘환자방’이다.

▲ 고양시 마두동 국립암센터 주변에 있는 ‘환자방’과 간판들.
“대학병원 병실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  항암치료 환자들 병원 근처에 방 얻어 숙식

 환자방은 지방에 사는 암 환자나 장기 투병 환자들이 서울과 수도권의 대형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장소다. 암 수술을 받은 뒤 방사선 치료나 후속 항암치료를 받으려고 상경한 환자와 보호자들이 병원 바로 근처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일종의 하숙방인 셈이다. 환자방은 물론 법적인 용어는 아니다. 아직 이를 정의하는 규정도 없다.

수술을 받은 암 환자들은 같은 병원에 입원해서 이어지는 항암 치료까지 받기를 원하지만 병원에서는 좀더 상태가 위중하고 긴급한 환자에게 병실을 내줘야 한다고 말한다. 지방에서 올라와 통원 치료를 받고 있는 한 암 환자는 “수술한 뒤 실밥도 뽑지 않았는데 급한 다른 환자들이 많다며 퇴원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이기적이세요.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도 좀 생각하세요” 하고 쏘아붙이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짐을 쌌다는 환자 보호자도 있었다. 국립암센터·서울대병원·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세브란스병원 등 암 환자들 사이에서 ‘빅5(big 5)’로 불리는 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이 빚어낸 결과 중 하나다.

환자들이 ‘큰 병원’ 근처에 숙소를 잡기는 쉽지 않다. ‘길고 지루한’ 암 투병 과정에서 치료를 받을 때마다 서울에 사는 친지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미안한 일이다. 숙소가 바로 병원 근처가 아니면 치료를 받은 뒤 휘적대는 몸을 끌고 가기에도 진이 빠진다. 일반 숙박업소에 묵기도 여의치 않다. 하루에도 몇 차례 객실을 회전시키는 ‘대실(貸室) 영업’으로 더 짭짤한 수익을 내는 숙박업소가 며칠이나 길게는 한두 달씩 머무르는 암 환자를 달가워 할 리 없다. 숙박 시설을 잡았다고 해도 편하지만은 않다. 비용이 적잖이 들고 취사가 금지돼 있어 식사를 밖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환자방이다. 
 
일산 국립암센터 인근에만 20여곳 몰려  주방·화장실 갖추고 하루 2만~4만원

지난 10월 6일 오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을 찾았다. 2001년에 문을 연 국립암센터는 전국 각지의 암 환자들이 모여드는 ‘암 치료의 메카’. 병원 1층 로비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가까운 환자방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자, “정문 앞, 길 건너편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와 보호자 중 상당수는 이용 경험이 있다면서 위치, 가격대, 장단기 체류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고 병원 앞에서 길을 건너 빌딩들을 둘러보니 곳곳에 환자방 간판이 보였다. 입구에는 ‘쾌적한 공간 최신시설 완비’ ‘깨끗하고 분위기 좋은 원룸. 스카이라이프, 정수기 등 시설 완비’ 등 글귀와 전화번호, 약도가 적힌 명함이 놓여 있었다. 의료기 판매점 2층에 보이는 J환자방은 ‘원룸형 콘도식 냉난방 최신시설’을 내세우는 곳.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복도를 사이에 두고 5개의 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밖으로 창문을 내고 어른 서넛이 기거할 만한 ‘큰 방’의 하루 사용 요금은 4만원. 환자와 보호자 두 사람이 지낼 정도의 ‘작은 방’은 3만원에서 3만5000원 사이였다. 한 달 요금은 80만~90만원 선.

▲ 부산에서 올라와 환자방을 이용하고 있는 직장암 환자 김태용씨.
치료보다 병원 오고 가는 일이 더 힘든 현실 환자들 “이런 곳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

막 항암 치료를 마치고 환자방으로 들어오는 김태용(60·부산 해운대구 좌동)씨 부부를 만났다. 지난 3월 부산의 한 병원에서 직장암 판정을 받은 김씨는 바로 국립암센터를 찾아 검사를 받은 뒤 6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결과가 나쁘지 않아 퇴원했고, 지금은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이번 일정은 닷새. 주말에 올라와 목요일인 10월 9일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지방 환자들은 치료 받기가 너무 힘들어. 대부분 진료 시간이 오전에 잡혀 있는데 전날 미리 와서 대기하지 않으면 시간 맞추기 불가능할 때가 많거든. 2박3일 달아서(이어서) 주사를 맞는 사람 같으면 입원을 시켜주겠지. 입원실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인데, 나처럼 10여분 (주사) 맞는 사람까지 병실을 내주겠냐고.”

아내 김수월(57)씨가 거들었다. “고속버스, 택시를 갈아 타며 병원까지 오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에요. 왕복 10만원이 넘는 차비는 그렇다 치고, 치료 받고 돌아갈 때는 이 사람, 기운이 다 빠져 고생이 말도 못합니다. 딸 아이 집이 서울 신정동에 있는데 거기서도 차 타고 여기 병원에 한 번 오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그나마 이런 시설이라도 있으니….”

이들 부부는 처음 국립암센터를 찾았을 때는 주변에 환자방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다. 좀더 편하게 진료 받을 수 없을까 고민하던 부부에게 병원 로비에서 만난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은 환자방을 권했다고 했다.

김씨 부부가 이용하는 방 안에는 TV와 작은 냉장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보였다. 출입문 옆에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음식 조리대와 싱크대가 있다. 김태용씨는 “방 안에 화장실이 딸려 있어 나 같은 직장암 환자들에겐 편리하다”고 말했다. 복도로 통하는 창이 나 있는 이 환자방의 하루 사용료는 3만원. 출입구 옆에는 병원과 지방을 오가는 차량 시간표가 걸려 있었다. 화정터미널과 전국 각지의 터미널을 연결하는 고속버스 차편과 요금이 빼곡히 적혀 있다. 경부선과 호남선 KTX 시간표도 보였다.

오전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면 점심 무렵. 부부는 근처의 정발산공원을 찾아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남편의 몸 컨디션이 괜찮을 때면 일산 호수공원까지 돌아오는 조금 먼 코스를 잡기도 한다고 했다.

“살고 있는 부산에서 치료 받지 왜 서울까지 올라와서 고생 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얘기지. 암 판정을 받으면 누구나 최고, 최선의 치료를 받고 싶은 거야. 실제로 여기 와 보니 시스템이나 전문성에서 지방과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 오라 가라 하지 않고 ‘원 스톱’으로 해결해 주고. 큰 병원을 찾을 메리트가 있다는 얘기지. 누군가 그러던데, ‘암 치료에서 명의는 없고 명 시스템만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오가는 불편 이게 참….”

다세대 주택을 개조해 소규모로 운영하기도  대부분 단골… 치료 끝나도 연락 주고 받아


▲ 병원 휴게소는 환자방 정보가 소통되는공간.
새로 지은 빌딩에만 환자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빌딩 뒤쪽, 조용한 주택가에는 다세대 주택의 방을 환자방으로 활용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암센터까지 환자들의 걸음으로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이불이나 침대, TV와 냉장고와 간단한 집기를 갖추고 하루 2만~3만원, 한 달 50만~60만원의 가격으로 환자들을 맞는다.

7년 전부터 이곳에서 환자방을 운영해 왔다는 길복희(80)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다세대 주택 2층으로, 화장실이 딸려 있는 큰 방 하나에 공동 화장실을 써야 하는 방이 2개다. 이곳을 찾았을 때 길 할머니는 오전에 환자가 비우고 간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침구는 새로 빨고 화장실은 락스물을 풀어 닦고 있었다.

“오래 해 왔지. 환자들도 수없이 바뀌었고. 한 번 왔던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데 아직도 연락을 계속하는 환자들이 많아. 해마다 밀감 박스를 보내주는 제주도 환자도 있고, 직접 농사지었다는 쌀을 보내주는 환자도 있지. 연락이 안 되는 환자들도 있는데, 그럴 때면 불안해져. 혹시 안 좋은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해서.”

간암 치료를 위해 암센터를 찾는 전윤필(69·부산 초량2동)씨는 서너 달에 한 번 길 할머니의 환자방을 찾는다. “환자방을 몰랐을 때는 길바닥에 돈을 쏟아부었지요.” 그는 1시간 남짓한 진료를 위해 남편과 함께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 다시 택시를 타고 암센터를 찾았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진료 시간에 쫓겨 몸이 파김치가 되곤 했던 전씨는 4년 전부터 길 할머니의 환자방을 소개 받고 여유를 찾았다. 암센터 병원 로비에 있던 야쿠르트 아줌마와 얘기를 나누다 환자방 소식을 들은 것. 그날 이후 전씨는 길 할머니 방의 ‘단골’이 됐다.

국립암센터 주변에 있는 환자방은 모두 20여곳. 환자방을 알선하기도 한다는 건일공인중개사 임정태 대표는 “방 서너 개짜리 작은 환자방에서 10여개 있는 곳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방 개수가 100개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암센터 인근의 일산은혜교회(담임목사 강경민)에서는 경제적인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은혜쉼터(031-901-3042)’를 운영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교회에서 도보로 10여분 떨어진 주택가의 다세대 주택 건물 3층에 있는 쉼터는 방 3개에 환자들을 모신다. 비용은 없고, 쌀과 기본적인 부식, 화장지 등 기초생활용품을 제공한다. 간혹 여러 환자 가정이 함께 생활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신경이 날카로운 환자와 보호자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풍납동 아산병원 주변에선 원룸·고시원도 이용 월 30만원, 환자방보다 싸지만 시설은 떨어져

10월 7일, 송파구 풍납동 아산병원 주변의 환자방을 찾았다. 병원 근처에 있는 간이 매점에서 지방 환자가 묵어갈 수 있는 환자방을 묻자, 주인은 곧바로 전화번호와 위치가 적힌 고시원·원룸 명함을 건네줬다.

아산병원에서 10분 거리, 주택가 골목에는 ‘고시원·원룸’ ‘리빙텔’ ‘원룸텔’ 간판을 내건 시설 3곳이 몰려 있었다. 일산 국립암센터 주변처럼 ‘환자방’ 간판을 내건 곳은 없었다. 대부분 직장인과 일반인, 고시생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환자들에게도 문은 열려 있었다.

H고시원·원룸은 건물 2층의 일반 고시원과는 별도로 3층의 방 20개를 환자용 공간으로 따로 마련했다. 침대와 TV, 냉장고 등을 갖췄지만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다. 이용료는 한 달을 기준으로 30만~40만원 선. 가격대가 낮은 만큼 일산 마두동의 환자방에 비해 시설이나 환경이 떨어졌다. 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한 환자의 보호자는 “장기 치료를 하다 보면 병원비, 약값 부담이 만만찮다”면서 “만족스러운 환경은 아니지만 하루 1만원 정도의 돈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곳이 어디 또 있겠냐”고 말했다.
 
“위생·감염 예방 등 환자방 관리에 주의 필요  대형병원에만 몰리는 의료시스템부터 해결해야”

지방 환자들이 환자방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의료소비자시민연대 강태언 사무총장은 “지역적으로 왜곡된 의료 인프라의 문제에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암 환자들이 서울의 대형 병원이나 고양의 국립암센터에서 치료받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의료 서비스의 질에 대한 판단에 따른 그들의 절박한 선택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강 총장은 앞으로 의료 민영화가 시장논리에 따라 강도 높게 추진되면 지역적 불평등이 한층 심화되고 결국 더 많은 환자들이 서울과 수도권의 ‘큰 병원’을 찾아 환자방을 전전하는 사태를 야기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10월 6일 한나라당 임두성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 받은 ‘2007년도 16개 시도별 진료비 외부유입 현황’ 자료는 서울의 의료기관이 지방의 환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실태를 나타내고 있다. 서울 지역의 총 진료비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진료비, 즉 타 지방의 환자들이 서울의 병·의원을 찾아 지출한 진료비의 비율은 34.8%로 가장 높았다. 전국 평균은 24%. 금액별로는 1조5180억원의 이익을 남긴 것으로 조사됐다.

강태언 사무총장은 환자들이 지금처럼 환자방으로 떠돌지 않기 위해서는 3차 대형병원과 1차 병원과의 유기적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3차 병원과 1차 병원 사이의 ‘떠넘기기식’ 행태 때문에 중간에 있는 환자들만 애꿎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 그는 환자방이 일반 숙박업과는 달리 환자를 대상으로 한 공간인 점을 감안하면 위생이나 감염 예방에 좀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환자들의 수요가 엄연히 존재하고 이에 따른 공급이 있는 게 현실이라면 방치하기보다는 양성화해 제도적으로 관리를 하는 시스템으로 나가자는 얘기다.

국립암센터의 윤영호 기획조정실장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환자들이 가까운 곳에서 최선의 진료를 받는 것”이라며 “지방 암센터가 국립 암센터와 다양한 파트너십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진료 수준을 끌어올려 환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표준적인 치료가 가능할 경우에는 각 지역 암센터를, 해결이 안 될 경우에는 새로운 치료법이나 임상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있는 국립암센터를 찾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해 나가면 장기적으로 환자들의 큰 병원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