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심재우의 조선시대_죄와 벌의 사회사

醉月 2009. 10. 12. 09:03

정조 때 사형 집행 신중했다

형벌과 국가권력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양초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를 할 것. 이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긴 후,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 그의 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하였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후 유황 불로 태울 것. 이어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릴 것.”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가운데 하나인 미셸 푸코(1926-1984)의 유명한 저작 『감시와 처벌』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위의 무시무시한 구절은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프랑스에서 국왕 시해 미수범에게 내려진 판결문이다. 

  판결문에 나오는 잔혹한 장면은 실제로 1757년에 수많은 구경꾼을 앞에 두고 연출되었는데, 비극의 주인공은 병사 출신의 시종 무관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후 체포된 다미엥이란 인물이었다.

  푸코는 책에서 다미엥이 사형에 처해지는 장면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엽기적이고 잔인한 것, 혹은 남의 불행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의 책의 해당 부분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도판1) 14세기 초반 유럽에서 행해진 형벌의 하나인 거열형 모습

  사실 형벌은 권력자의 중요한 정치적 행사이자 불경스런 백성에 대한 경고 메세지이다. 권력자는 형벌을 통해 가능한 최대의 통치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새롭고도 특이한 형벌이 개발되고 사용되었다.

  우리가 전근대사회의 형벌하면 잔혹한 광경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형벌이 갖는 이 같은 기능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오해가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전통사회 형벌이 서양에 비해 훨씬 잔혹하고, 법이 미개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독일의 경우 중세의 가혹한 형사법을 제거할 목적으로 1532년에 「카롤리나 형사법전」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전 속을 들여다 보면 여전히 잔혹한 형벌이 존속하고 있었다. 수레로 찢어 죽이기(車裂)는 기본이고, 솥에 넣어 끓여 죽이기(烹刑), 꼬챙이로 쑤셔 죽이기(串刺刑), 불에 태워 죽이기(火刑), 물속에 넣어 죽이기(溺刑) 등이 버젓이 법전에 실려 있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법전에 함께 등장하는 손목 자르기(斷手刑), 손가락 자르기(斷指刑), 귀 베기(斷耳刑), 코 베기(斷鼻刑), 혀 베기(斷舌刑), 눈 도려내기(抉目刑)는 오히려 가벼운 형벌에 속했다.


(도판2) 20세기 전후 한 청년이 태(笞)를 맞는 사진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유럽사회가 이처럼 16세기까지 형법이 미개상태에 있었던 것에 비해 중국에서는 7세기에 마련된 당률(唐律)의 우수성이 돋보인다는 것이 일본의 유명한 법사학자 니이다 노부루(仁井田陞)의 지적이다. 

  당률에서는 중국 고대의 잔혹한 육형(肉刑), 예컨대 도둑질한 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먹으로 죄명을 몸에 새겨 넣는 묵형(墨刑), 음식을 훔친 자에게 음식 냄새를 맡는 코를 베는 의형(劓刑), 도망간 죄인이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강간이나 간통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가 다시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남성을 잘라내는 궁형(宮刑) 등과 같은 형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형벌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공권력의 상징이었음은 전통시대 동양과 서양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치 서양은 우수한 법제도와 인권의식을 갖추고 있었고 동양은 그렇지 못했다는 식의 이해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편협한 인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근대 동양의 형벌이 서양보다 좀더 인간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나 할까?


『심리록』에 나타난 18세기 조선의 죄와 벌

  여기서 잠시 조선시대 형벌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조선시대 처벌의 주요 내용은 『대명률』에 규정한 이른바 ‘오형(五刑)’으로 표준화되어 나타난다. 오형이란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 등 다섯 가지 유형의 처벌을 말한다.

  먼저 태형과 장형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범한 자에게 태와 장이라는 형장으로 볼기를 치는 처벌이다. 좀더 무거운 죄를 범한 자는 도형에 처해졌다. 도형은 장형을 집행한 후 1년에서 3년까지 일정 지역에서 노역에 종사하도록 하는 처벌이다.

  유형은 무거운 죄를 지은 중죄인에 대한 처벌로 사형 바로 아래의 형벌이다. ‘귀양’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유형은 생활 근거지로부터 격리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생활을 해야 하는 종신형이었다.


(도판3) 종로에서 치도곤을 집행하는 장면(19세기 말의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법정 최고 형벌은 사형이다. 사형은 집행 방법에 따라 목을 매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두 가지로 나뉘며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지금 우리의 관념으로는 어떻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여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같은 사형죄수라도 죄가 중한 경우 참형에 처했다.

  흔히 알고 있는 ‘능지처참’은 교형, 참형과 다른 특별한 사형 집행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능지처참은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도 하는데, 역모를 꾸민 대역죄인, 주인 혹은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 등이 능지처참의 대상이었다.

  죄인의 몸을 찢어 죽인다는 점에서 오늘날 참혹한 형벌의 대명사처럼 인식된 이 능지처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조선시대에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것만 가지고 조선의 형법과 형벌의 저급성을 운운하는 것은 위험하다.


(도판4) 역적 참수 장면(19세기 말의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조선의 법문화, 특히 18세기 범죄와 형벌의 사회사를 숨김없이 알려주는 자료가 『심리록(審理錄)』이다. 『심리록』은 국왕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던 1775년 12월부터 사망한 1800년 6월까지 직접 심리한 사형범죄자에 대한 사건 내용과 그 처리과정을 요약하여 기록한 일종의 형사판례집이다.

  책에는 모두 1,112건의 범죄 기록이 나오는데, 조선 팔도에서 인구수에 견주어 살인 등 강력범죄가 가장 잦은 지역은 서울ㆍ황해도ㆍ경기도 등 수도권이었다. 서울의 범죄는 모두 161건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기록상 18만 9천여 명으로 전체의 2.6%에 그쳤으나 범죄 건수는 14.5%에 달해 다른 지역보다 범죄 비율이 5.7배나 됐다.

  서울 인근 지역의 황해도, 경기도도 전국 평균치보다 범죄비율이 높았는데, 이처럼 수도권의 범죄 발생률이 높았다는 사실은 당시 도시화와 유민의 유입 등으로 적지 않은 도시 문제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행정구역상 5부였던 서울 안에서는 신흥 상공업 지대였던 서부(현재의 용산, 마포 일대)에서 가장 많은 69건의 범죄가 발생하였다. 지방 도시별로는 전주(21건)와 평양(20건), 해주(18건), 봉산(17건), 공주(16건), 순천(14건), 충주(13건), 대구ㆍ광주ㆍ재령(12건) 등이 범죄 다발지였다.


(도판5) 『흠휼전칙』이라는 책자에 나오는 조선후기의 각종 형구. 목에 씌우는 칼의 무게가 죄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 흥미롭다.

  『심리록』에 실린 범죄 유형은 살인 등 인명 범죄가 1,004건(90.3%)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경제 범죄(6.7%), 관권 침해 범죄(1.9%), 사회풍속 범죄(1.2%) 순이었다.

  특히 공문서 위조, 왕실 및 관용물품 절도 같은 경제 범죄의 경우 서울 지역에서 전체 건수 74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건이 일어났다. 이는 조선후기 서울에서 도시화, 상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사회적 갈등ㆍ일탈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통계이다.

  한편 인명 범죄 가운데 16.1%를 차지하는 162건이 가족, 친족간의 살인 사건이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매우 가까운 사람들 간에도 살인으로 표출된 극단적 갈등이 많았던 셈이다.

  가족과 친족 사이에 발생한 살인 사건은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부부 사이에 발생한 사건도 70건이나 되었다. 부부 사이의 살인은 모두 남편이 처, 첩을 살해한 것으로 여성들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이는 조선후기 여성의 취약한 사회적 지위, 가족 내의 위상을 보여준다.

  『심리록』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국왕 정조가 내린 판결의 내용이다. 정조는 1,112명의 중죄인 가운데 36명(3.2%)에게만 실제 사형 집행을 판결하고, 나머지 상당수는 감형(44%)하거나 석방(30.8%)시켰다.

  당시 법률상으로 사형 처벌 조문이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수 대부분의 생명을 보전케 한 정조의 이 같은 조처는 이전 어느 시기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너그러운 판결이었다.


(도판6) 정조가 중죄인을 심리, 판결한 내용을 담은 『심리록』


현재의 사형제 폐지 논란을 바라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시민단체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사형제 폐지 운동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은 국가에 의한 계획적인 법적 살인으로서 국가 테러리즘의 한 종류라고까지 말한다.

  그들은 범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권을 함부로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점, 사형의 형벌이 기대하는 것만큼 흉악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그 이유로 들어 사형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12월 30일에 사형집행 대기자 23명에 대해 대규모 사형집행을 한 뒤로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에서는 단 한 건의 사형 집행도 하지 않고 있다.

  사형제 폐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형 제도는 그대로 두되 집행을 하지 않는 애매한 입장을 정부가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앞으로 2007년 말까지 사형집행을 하지 않을 경우 10년간 사형집행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도 국제적으로 사실상의 사형제 페지국으로 분류되게 된다.

  조선시대의 죄와 벌을 공부한 필자는 현재의 사형제 폐지 논란에 의견을 개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사형 제도를 비롯한 현재의 형사사법제도 전반의 개혁 방향과 관련해서 조선시대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형수라 할지라도 사형에 처하는 대신 최대한의 관용적 판결을 내리고, 재판에 있어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횡포를 막아내고자 이른바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실천한 정조의 법제도 개혁과 체제 정비 노력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다. 

※ 이 글은 남명학연구원에서 2005년에 간행한 『선비문화』 7호에 실린 필자의 원고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곤장’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조선전기에는 곤장이 없었다고?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사실을 종종 오해하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때론 작은 오해 하나하나가 모여 역사 해석을 전혀 엉뚱하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상식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빠른 시일 내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곤장’의 경우도 대중들에게 잘못 알려진 부분이 적지 않다.

  곤장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형장의 일종이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검색해보면 조선 초기부터 ‘곤장’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번역상의 오류이다. 곤장은 조선전기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곤장은 한자로 ‘곤(棍)’이라 쓰는데, 고려와 조선의 매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 ‘태(笞)’와 ‘장(杖)’과는 다르다. 태의 모양은 <그림 1>에서 보듯이 가느다란 회초리를 떠올리면 되는데, 길이가 1미터가 조금 넘고 지름이 1센티미터가 채 안되었다. 그리고 장은 태보다 지름이 약간 클 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다.

  반면 곤장은 <그림 2>처럼 배를 젓는 노와 같이 길고 넓적하게 생겨서, 강도가 태와 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곤장을 잘못 맞았다가는 속된 말로 뼈도 추스르기 힘들었는데, 한말 선교사들이 남긴 견문기에서는 불과 몇 대에 피가 맺히고 십여 대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더라고 곤장을 맞던 죄인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그림 1> 죄지은 여자에게 태형을 집행하는 장면으로, 회초리 모양의 형장인 ‘태’가 보인다.


<그림 2> 포도청에서 곤장의 하나인 치도곤을 치는 장면이다.

  조선전기에 없었던 곤장은 그럼 언제 출현한 것일까? 『신보수교집록』이라는 법전에 보면 순치 연간(1644-1662)에 제정된 법규 가운데 ‘군병아문(軍兵衙門)이 아닌 곳에서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문이 나오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법전 조문상 가장 이른 시기의 곤장에 관한 규정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곤장에 대한 용례가 이보다 조금 더 앞선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선조 32년(1599) 9월 17일에 함종현령 홍준(洪遵)이라는 인물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부당하게 피해자 가족에게 곤장을 가한 죄로 장령의 탄핵을 받고 있다. 이로써 대략 선조 연간 무렵부터 곤장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웃나라인 명나라에서는 곤장을 일찍부터 사용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군이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조선에서도 배워서 쓰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물론 아직은 순전히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2. 곤장에도 등급이 있었다.

  선조대 무렵부터 사용되던 곤장은 군영이나 포도청ㆍ진영ㆍ토포영 등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적을 다스리는 기관에 한해서 사용을 허락하였는데, 사용 방법은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다. 이후 곤장에 관한 세부적인 조처들도 마련되었는데, 현종 4년(1663)에는 곤장의 재질을 버드나무로 정하였고, 숙종 11년(1685)에는 아예 30대 이상 치지 못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곤장은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모두 다섯 가지나 되었다. 이 다섯 가지는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과 <그림 2>에 등장하는 치도곤(治盜棍) 등을 말한다. 정조가 관리들의 형벌 남용을 막기 위해 각종 형구(刑具)의 크기를 통일한 『흠휼전칙』(1778)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반포하였는데, 이 책에서 곤장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곤장의 종류와 크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흠휼전칙』에 수록되어 있다.

  <그림 3>에서 보듯이 길이는 중곤(重棍)이 가장 긴 약 181센티미터쯤 되는 반면, 타격부의 너비와 두께는 치도곤(治盜棍)이 각각 16센티미터, 3센티미터 내외로 제일 두텁고 크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곤장을 누가 사용할 수 있었는지 좀 더 알아보자.

  먼저 중곤(重棍)은 병조판서, 군문대장,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가 죽을죄를 저지른 자를 다스릴 때만 쓸 수 있었고, 대곤(大棍)은 군문(軍門)의 도제조, 병조판서, 군문대장, 중군, 금군별장,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및 2품 이상의 고위직 군무사성(軍務使星)이 사용할 수 있었다.

  중곤(中棍)은 내병조, 도총부, 군문의 종사관, 군문의 별장, 천총, 금군장, 좌우순청, 영장, 겸영장, 우후, 중군, 변방의 수령, 사산참군, 3품 이하의 군무사성이 사용할 수 있으며, 소곤(小棍)은 군문의 파총, 초관, 첨사, 별장, 만호, 권관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치도곤(治盜棍)은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겸토포사, 변방의 수령, 변장(邊將) 등이 도적을 다스리거나 변정(邊政)ㆍ송정(松政)에 관계된 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상 『흠휼전칙』의 규정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변방의 수령 등 군사권을 쥔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을 수령들은 곤장을 사용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지방 사또가 수틀리면 으레 곤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같은 행위가 당시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그래도 곤장을 치겠다!

  『흠휼전칙』에 정한 곤장에 관한 규정은 법전인 『대전통편』에까지 실렸으며, 이후에도 군무(軍務)에 관련된 죄인을 다스리는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만 곤장 사용이 허락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처벌 대수까지 세밀하게 명시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19세기에 만들어진 당시 대표적인 중앙군인 훈련도감에 관한 사례를 모은 책자인 『훈국총요(訓局總要)』를 보면 별장ㆍ천총 등 장교들이 소속 군인에겐 15대, 소속이 다르면 7대 이상 곤장을 치지 못하도록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규정을 잘 만들어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요새말로 ‘공직 기강 확립’ 구호가 잠시 뜸해질 땐 어김없이, 정부의 감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지방 고을 수령들이 규정과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형장을 남용하여 예사로 곤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고을 수령들이 법을 집행할 때 통쾌한 맛을 느끼고자 태ㆍ장보다는 곤장을 즐겨 사용하는 당시 세태를 강하게 꼬집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두들겨야 통쾌한 것일까? 정조 말기 창원부사 이여절(李汝節)이란 인물은 부임 이후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무려 경내 삼십 여명의 백성들을 곤장 등으로 마구 매질해서 죽였다. 혹 인간 내면에 원래 이처럼 잔혹한 심성이 숨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4> 일제 초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소장한 대곤(大棍) 사진이다. 길이가 약 186센티미터로

 『흠휼전칙』 규정보다 10센티미터 정도 길다. 곤장 실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사회경제실에 전시되어 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1. 영화 ‘살인의 추억’과 조선시대 연쇄살인

  2003년에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어난 경기도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모두 열 차례에 걸쳐 발생한 이 사건은 1988년 9월에 있었던 여덟 번째 사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 살인 사건이다. 당시 이들 사건이 잔인한 범행 수법, 희대의 연쇄 살인으로 인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던 사실을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화성 사건 자체는 비극이지만, 아무튼 영화 ‘살인의 추억’은 2003년 한 해 동안 5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같은 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였다. 영화의 이같은 성공에는 탄탄한 구성도 한 몫 했겠지만, 살인, 수사, 추리극에 대한 사람들의 원초적인 호기심도 흥행에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도판 1>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호기심을 좀 더 넓혀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화 ‘살인의 추억’을 닮은 사건이 조선시대에도 있었을까?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화성 사건과 같은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은 없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드물긴 해도 연쇄 살인이나 엽기적인 집단 살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영조의 재위 10년인 1734년 5월 5일자 실록 기사에 따르면 경기도 광주에 사는 노 영만(永萬)이란 자가 자신의 주인과 동료 노비를 포함하여 무려 30여 명을 집단으로 연쇄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한 명도 아닌 수십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영만은 결국 그에 의해 부모를 잃은 동료 세적(世迪)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잔인한 연쇄 살인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도대체 영만이 왜 살인을 시도했는가? 어떻게 수십 명을 죽일 수 있었을까? 필자 또한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실록 기록이 소략하여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쉽게도 파악할 수 없다.


<도판 2> 조선시대 살인 사건 발생시 사망자 검시 때 활용했던 검시 지침서 『신주무원록』. 조선후기에는 수정본, 언해본도 나왔다.
 
  주지하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인은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극단적인 일탈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형법상 살인자를 법정 최고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엄중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이 늘 상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통계학자들에 따르면 살인 사건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왕 살인에 대해 이야기한 이상, 아래에서는 과거의 살인 사건 가운데 서로 너무나 잘 아는 가까운 사이인 부부간에 발생한 살인 사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2.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속담에 ‘양주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다. 언뜻 어렵게 들리겠지만 여기서 ‘양주’는 한자로 ‘兩主’, 즉 부부(바깥주인과 안주인)를 말한다. 결국 부부 싸움은 쉽게 봉합된다는 이야기인데, 항상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과거의 사건들이 증명해 준다.

  조선 정조 임금 때를 예로 들어 보자. 『심리록』에 따르면 부부 싸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배우자를 살인한 사건이 70건이나 집계되었다. 『심리록』은 정조 임금 재위 약 25년간 국왕이 직접 심리한 중죄수에 대한 판결 기록 1,112건을 모은 일종의 형사판례집에 해당하는 책자인데, 그 가운데 살인 사건은 가장 많은 964건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발생한 배우자 살인 사건은 전체 살인 사건의 7.3%에 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적지 않은 수의 살인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부부간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시기 다른 범죄 사례와 마찬가지로 평민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70건 사례 모두 가해자 남편에 의해 처, 첩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도판 3> 정조 때 중죄인 심리, 판결 기록을 모은 책자 『심리록』. 사진은 1778년 한성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부분이다.

  남편의 부인 살해 이유는 다양했지만 가정불화가 주원인이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사일을 소홀히 하거나 첩과 반목한다는 이유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재수 없으면 1799년 전라도 전주의 분매(分梅)라는 여성처럼 술주정 잘못했다가 남편에게 얻어맞아 3일 만에 죽기도 했다.

  처의 간통 또한 남편으로서는 극단적인 살인도 불사할 중대한 사안이었던 것 같다. 처의 외간 남자와의 간통을 참지 못해 일어난 살인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787년 평안도 영유의 박재숙(朴載淑)이란 인물은 부인 함 여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묶어 놓고 주리를 틀어 죽게 하였으며, 심지어 1785년 전라도 무안의 정금불(鄭金不)이란 자는 부인 김 여인의 간통에 이성을 잃고 부인의 코를 베고 팔뚝을 잘라 11일 만에 죽게 하는 잔혹성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심리록』의 기록에는 아내의 남편 살인 사건이 하나도 보고된 바가 없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 내내 아내의 남편 살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간혹 실록에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실리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는데, 다만 조선시대에 동일한 배우자 살인이라고 해도 남편의 아내 살인과 달리 아내의 남편 살인은 차원이 다른 훨씬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적 덕목이 사회 깊숙이 내면화되어가던 조선시대에 부인의 남편에 대한 관계는, 신하의 군주에 대한 관계 및 노비의 주인에 대한 관계와 동일하게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부인이 남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 관리들이 합동으로 죄인을 심문할 정도로 큰 변고로 여겼으며, 살인한 여성을 사형에 처함은 물론 가족과 고을 수령까지 연좌시키는 것을 법전에 명문화하였다. 이는 앞서 『심리록』에 실린 부인을 살해한 가해자인 남편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정이 참작되어 실제로 사형에 처해진 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3. 일제하 남편 살해 여성들

  앞서 정조 때의 살인 사건 기록인 『심리록』에 부인의 남편 살해 사건은 한 건도 확인되지 않은 반면, 남편의 부인 살해 사건은 70건에 달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창하게 가부장제의 질곡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조선후기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취약한 지위를 웅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근대 이후의 부부 갈등 양상은 어떠했을까? 한말, 일제하 배우자 살인 사건 데이터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배우자 살인 사건에서 여성의 남편 살해의 비중이 조선후기, 한말, 일제시대로 내려오면서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말의 검안(檢案) 자료를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전체 살인 사건 483건 가운데 배우자를 살인한 사건이 30건을 차지한다. 이 30건 가운데 남편의 부인 살인이 23건이지만, 부인의 남편 살인 사례도 7건이나 차지하고 있어 한말에는 앞선 시기와 달리 부인의 남편 살인 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음을 알려준다.

  이같은 부인의 남편 살해 범죄가 증가하는 추세는 일제시대에 오면서 확연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시대 초기인 1911년부터 1915년까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된 여성이 전국적으로 128명에 달하여 매년 이같은 범죄가 평균 25건 내외가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1929년 현재 감옥에 수감된 여성 살인범 106명 가운데 63%에 달하는 67명이 남편을 살해한 부인들이었다.


<도판 4> 『동아일보』 1925년 10월 23일자 기사에 실린 남편 살해범 김정필에 대한 기사의 일부. 김정필은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함경도 시골마을의 한 아낙으로, 어린 나이에 병든 남편에게 시집 와 호된 시집살이을 견디다 못해 나이 어린 남편을 살해하였다.

  여성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조혼(早婚)이나 축첩(蓄妾), 종래의 전통적 가부장제의 온존 등이 일제시대 여성의 남편 살해 범죄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음은 충분히 추정 가능하다. 그렇지만 배우자 살인 사건 중 여성의 남편 살해 사건의 비중이 왜 이전 시기에 비해 증가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되기엔 아직 부족해 보인다.

  아무튼 남편의 부인 살해든, 부인의 남편 살해든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사소한 부부 갈등이 얼마든지 이런 일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 아닐까? 속담과 달리 부부 싸움은 때때로 칼로 물 베기로 끝나지 않고 파국적 종말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에 유의할 일이다.

 

 

 

 

 

암행어사 이야기 ① - 마패와 유척

  1. 암행어사란?

  요즘 현대판 암행어사가 유행이다. 군 내무반의 악습을 감찰하기 위해 암행어사 제도를 도입한 부대가 뉴스의 화제가 되는가 하면, 작년 지방선거에서는 부정, 탈법선거 단속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판 암행어사인 비공개 선거부정감시단이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상대를 기죽이는 관복 대신 남루한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친근한 인상의 아저씨! 우리의 이미지 속 조선의 암행어사는 부패 관리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해 파견된 희망의 메신저로서 각인되어 있다. 여기서는 설화나 소설 속의 암행어사와 잠시 거리를 둔 진짜 역사 속 암행어사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암행어사란 무엇인가? 암행어사를 말하기에 앞서 어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어사란 조선시대에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 관리를 말한다. 어사는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했으므로 그 직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당하관이란 정3품 이하의 벼슬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같은 정3품이라도 통정대부 이상은 당상관(堂上官), 통훈대부 이하는 당하관으로 분류해 당상관은 중진대접을 했지만 당하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승정원, 삼사(三司), 예문관 등 임금을 직접 모시는 시종신(侍從臣) 중에서 어사를 선발해 정3품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했다.

  어사는 그 임무에 따라 감진어사, 순무어사, 안핵어사 따위가 있다. 감진어사(監賑御史)는 기근이 들었을 때 해당 지방에 파견되어 기근의 실태를 조사하고 지방관들의 구제 활동을 감독했다. 다른 어사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당하관 중에서 선발했는데, 특별히 당상관이 선발될 경우에는 ‘사(史)’ 대신 ‘사(使)’를 썼다.

  순무어사(巡撫御史)는 지방에서 변란이 일거나 재해가 생겼을 때 해당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사건을 진정했고, 안핵어사(按覈御史)는 지방에서 발생하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어사다.

  그런데 이렇게 왕의 특명을 다 알 수 있는 일반 어사들과 달리 암행어사(暗行御史)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닌다는 암행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 목적과 행선지, 자신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맡은 일을 수행한 어사다.


<그림 1> 박문수 초상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의 초상이다. 박문수는 조선 영조 때 활약하였으며, 초상화는 현재 박문수 묘소가 위치한 충남 천안의 고령박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에서 시행한 암행어사 제도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감찰 제도였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 일찍부터 절대 권력자인 황제가 자기의 측근을 어사로 임명해 지방을 살피도록 했지만, 조선의 암행어사처럼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암행 감찰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방방곡곡의 지방 관리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백성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국왕이 비밀리에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은 효과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암행어사는 자칫 거리가 멀어서 도저히 미칠 것 같지 않은 산간벽지의 백성들에까지 왕의 성덕을 베풀어주고,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는 자들이었다.


  2.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조선 중종 임금부터 조선말기인 고종 임금까지 무려 400여 년간 암행어사 파견이 계속되었는데,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백성들에게 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오죽하면 ‘어사우(御史雨)’ 즉 ‘어사 비’라는 말이 생겼을까?

  중국 당나라 때 백성들의 억울한 옥사가 쌓여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이 때 감찰어사 안진경이 옥사의 원한을 풀어주자 비가 내렸다. 어사우는 이 고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 초기 성종 임금은 가뭄이 심하게 들자 조정 대신들을 불러 무슨 일을 해결하지 못했기에 가뭄이 가시지 않는지 묻는다. 이에 좌참찬 성임(成任)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전에 어사(御史)가 각 지방을 돌며 억울한 옥사(獄事)를 판결하자, 하늘에서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어사 비’라고 했으니, 곧 억울한 옥사를 심리해 사람들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함이 마땅합니다.(『성종실록』 권143, 성종 13년 7월 4일)

  굳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춘향전』의 이몽룡이 그랬듯이, 당시 부패한 관리를 징계하고 백성들의 원통함을 해결해주던 이들이 암행어사였다.

  그런데 어떤 관리가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이기도 했다. 탐관오리들의 혼백을 빼놓는 추상같은 암행어사도 때로 임무 수행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허다했다. 해진 도포와 망가진 갓으로 변변한 여비도 없이 암행 길에 올라 좁디좁은 주막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다반사였다.

  때로 암행어사는 임무 수행과정에서도 종종 사단이 생기곤 했다. 중종 34년(1539)에 강원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송기수(宋麒壽)는 강릉에서 수령의 비리를 증명할 수 있는 불법문서를 적발하고도 이를 도난당하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림 2> 황협의 암행어사 보고서 『수행기사(繡行紀事)』
1833년(순조 33) 충청우도(忠淸右道)에 파견된 암행어사 황협이 파견된 후 염탐한 내용, 지방관의 비리 등을 기록한 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심한 경우 파견된 암행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조 39년(1763) 실록을 보면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홍양한은 출두를 앞두고 여관에서 음식을 먹다가 급사했다는데, 사건 발생 이후 유력한 용의자를 붙잡아 심문했지만 독살로 추정되는 홍 어사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3. 암행어사들이 소지하고 있던 물건은?

  어사들은 마패를 지니고 다녔다. 그럼 암행어사만 마패를 지닐 수 있었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패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증명서다. 당시 교통은 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말을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른 이동 방법이었기 때문에, 어사뿐 아니라 공무로 지방에 출장가는 관원들도 마패를 발급받아 역마를 이용했다.

  암행어사뿐 아니라 봉명사신(奉命使臣 :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도 공무상 마패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암행어사만이 마패를 지닌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패가 암행어사의 증표이기는 하지만, 암행어사만이 마패를 소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사는 소지한 마패에 조각된 수량만큼 역마를 징발할 수 있었다. 예컨대 말이 세 마리 그려진 3마패의 경우 자신과 수행원이 타는 말과 짐을 싣는 말을 포함하여 모두 3필의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가 가지고 다니는 마패는 역마 이용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때로 암행어사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어사출도 시에 역졸이 마패를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도’라고 크게 외쳤으며, 암행어사가 출도(出道) 이후 인장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 3> 마패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마패 이미지이다. 조선시대 당대에 제작된 진품인지, 현대에 와서 만든 모조품인지는 실물을 확인해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현재 전하는 마패 가운데 모조품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조선 초기에 마패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파손이 심해 세종 때 철로 제조했다가, 『경국대전』을 반포한 무렵부터는 구리로 만들어 사용되었다.

  원형으로 된 마패의 앞면에는 징발 가능한 말의 수를 표시하고, 뒷면은 발행처와 연호(年號), 마패를 제작한 날짜 등을 새겼다. 그리고 상부에 구멍이 난 돌출부를 두어 끈으로 허리에 찰 수 있도록 했다.

  암행어사에 관한 이야기가 유행하면서 조선시대 이후 일제, 해방 직후까지도 마패가 모조품이나 기념품으로 많이 만들어졌으므로 혹 개인이 소장한 마패가 있는 경우 그 진위 여부를 먼저 따져보는 것이 좋다.

  그런데 마패와 함께 암행어사가 유척(鍮尺)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를 말하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대개 두 개의 유척을 지급했다고 한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는 태(笞)나 장(杖) 등의 형구 크기를 법전 규정대로 준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 징수를 고르게 하는데 쓰고자 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형구를 잴 때, 토지 측량할 때, 가정에서 의복을 제조할 때 등 각각의 용도에 쓰이는 자의 규격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암행어사는 필요한 용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자를 가지고 다녔다.


<그림 4> 유척
조선시대 놋쇠로 만든 자. 파견된 암행어사들은 유척을 지니고 다녔다.

  한편 암행어사는 국왕으로부터 봉서(封書)와 사목(事目)을 받았다. 봉서는 일종의 어사 임명장과 같은 것으로 암행어사의 임명 취지, 감찰 대상 지역의 명칭, 임무에 대한 사항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사목은 어사의 직무상의 준수 규칙과 염찰 목적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봉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마패와 유척, 봉서와 사목 등은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지녔던 것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우리들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활약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암행어사 이야기 ② - 박문수 설화를 찾아서

  1.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전설, 박문수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암행어사는 두말할 필요 없이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박문수하면 관직생활 대부분을 암행어사로 보낸 줄로만 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활동한 것은 영조 때 딱 두 차례에 불과하다.

  현재 암행어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전국 각 지역에서 널리 전승되어 왔는데, 박문수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박문수 관련 설화는 조선후기에 기록된 ≪청구야담(靑邱野談)≫, ≪동야휘집(東野彙集)≫, ≪계서야담(溪西野談)≫, ≪기문총화(記聞叢話)≫ 등의 야담집에 십여 편 넘게 실려 있고, 최근에 채록해 정리된 ≪한국구비문학대계≫ 등 설화집에는 삼백여 편이 전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화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모두 실존인물 박문수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박문수의 암행어사 활동 당시의 행적이 공식 기록에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설화를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박문수에 관한 몇 가지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역사 속 박문수는 잠시 제쳐두고 이야기 속 박문수의 모습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도판 1> 고령박씨 종중재실.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위치한 고령박씨 종중재실. 2006년 필자가 답사할 당시 공사중이었으며,

박문수 묘는 뒤편의 산 속에 있다.


  2. 소설 속 박문수

  먼저 일제시대에 출판된 소설 ≪박문수전≫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박문수전≫은 1915년에 한성서관(漢城書館)과 유일서관(唯一書館)에서 처음 간행하였는데, 그 후 1921년과 1926년에 다시 발행되기도 하였다.

  이 소설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이야기가 제1회에 실려 있고, 제2회와 제3회는 박문수와 관계없는 중국 명대의 소설을 번역ㆍ번안한 것이다. 박문수의 앞 일을 내다보는 선견지명, 억울한 사람들의 원통함을 해결해주는 정의의 사도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제1회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도판 2> 1921년에 발행된 소설 ≪박문수전≫의 첫부분

  조선 영조 때 박문수가 이인좌와 정희량의 난을 진압한 후 암행어사에 선발되어 충청도,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덕유산에 이르렀다. 험한 산길을 헤매다가 등불을 찾아 어떤 집에 이르니, 한 노인이 단도를 들고 젊은 아들 배 위에 올라가 ‘이 놈 죽어라, 이 놈 죽어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누운 사람은 반항도 하지 않고 ‘다만 죽겠습니다’ 하는 말 뿐이었다. 박문수가 자세한 사연을 알아보았다.

  노인은 글방의 훈장인 유안거이고 그 아들은 유득주인데, 유씨 가족 외에 구씨와 천씨만 살아 이곳을 구천동이라 부른다고 했다. 유안거 이웃에 천운서와 그의 아들 천동수 부자가 사는데, 천동수의 처가 행실이 좋지 못했다.

  그런데 천운서 부자가 천동수의 처와 유득주가 통간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 보복으로 내일 합동 혼례를 올려 유안거의 부인은 천운서가 차지하고, 유득주의 부인은 천동수가 차지하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안거 부자는 살아 욕을 당하기 전에 온 가족이 죽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박문수는 유안거를 안심시킨 뒤, 곧 무주 관부에 출도해 오방신장(五方神將)의 군복을 만들게 한 뒤, 땅 재주 잘하는 광대 네 명을 뽑아 그들과 박문수가 각각 신장 군복을 입고 구천동으로 달려갔다.

  천운서 부자에 의한 폐륜적인 혼례가 치러지기 직전,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오방신장이 들이닥쳐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운서 부자를 잡아 깊은 산골로 끌고 가 죽여버렸다. 이 모두 박문수의 지략에 의한 것이었다.

  10년 후 박문수가 삼남어사(三南御史) 자격으로 다시 구천동을 찾아가니 예전에 보지 못하던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고, 유안거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유안거가 박문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 10년 전 천가 부자가 옥황상제에게 잡혀간 뒤 동민들이 ‘저 집은 곧 하늘이 아는 집이다’라고 하며, 이 집을 지어준 뒤 해마다 곡식을 갖다 바쳐 이렇게 잘 살게 되었고, 유안거 또한 동민들의 자제를 더욱 정성껏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박어사는 이튿날 구천동을 떠나 삼남지방을 암행하고 다스린 지 2년 후, 어사직을 사직하고 내직으로 복귀했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평생 경력을 왕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박문수가 무주 구천동을 다스린 일과 유안거의 전후 사정을 아뢰니, 왕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박문수의 도량을 칭찬했다.(≪박문수전(朴文秀傳)≫ 백합사․동흥서관, 1921)


<도판 3> 박문수 묘.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묘의 좌우에 무인석이 세워져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박문수는 구씨, 천씨들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구천동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부부간에 생이별을 할 지경에 처한 유씨 가족을 구원해준다. 더욱이 박문수는 몰락한 선비 집안인 유씨 가족이 앞으로도 구천동에서 따돌림을 받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했다.

  즉 유씨 가족을 괴롭히던 천운세 부자의 처형이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꾸며, 그곳 주민들에게 유씨 가족은 하늘이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이처럼 소설에서 암행어사 박문수는 곤경에 처한 백성을 구원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3. 설화 속 박문수

  소설 ≪박문수전≫의 내용은 앞서 본 것과 같다. 그럼 설화나 전설 속 박문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 전하는 여러 설화 속에서도 박문수는 신출귀몰하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살인한 중을 붙잡아 억울한 죄수를 풀어주는 <홍판서 누명 벗겨 준 박문수> 이야기를 한 가지 소개한다.


<도판 4> 기은박문수도서목록(耆隱朴文秀圖書目錄). 문화재관리국에서 1979년에 박문수 종가에 소장된 전적을 조사하여 목록으로 간행한 책자이다. 책에 실린 박문수 관련 문헌의 상당수는 현재 도난당하고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옛날에 홍판서가 홀로 된 며느리와 살았다. 어느 날 며느리 혼자 집에 있는데, 젋은 중이 와서 시주하라고 했다. 며느리가 시주하려고 문밖으로 나가니,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끌린 중이 그녀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정을 통하려 했다. 그녀가 중의 요구를 뿌리치며 반항하자 중은 집의 기둥에 꽂혀 있던 낫으로 그녀를 찌르고 달아났다.

  홍판서가 집에 돌아와 며느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 몸에 박힌 낫을 빼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술집 마누라가 와서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노파는 “홍판서가 며느리를 겁탈하려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칼로 찔러 죽였다”고 관가에 신고했다. 그래서 홍판서는 며느리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고을 가까이 오다가 한 중을 만났는데, 명지 바지에 기름 때가 졸졸 흐르는 모습이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박 어사는 그 중을 수상히 여겨서 함께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중은 자기가 시주를 얻으러 갔다가 주인 여자의 미모에 반해 겁탈하려다가 말을 듣지 않자 죽인 일이 있다고 했다.

  박 어사가 중과 헤어져 홍판서 집에 방문하여 홍판서가 며느리를 죽인 죄로 곧 사형에 처해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중이 거처하는 절로 사령들을 파견하여 살인한 중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홍판서는 석방되었다.(≪한국구비문학대계≫ 강화군 내가면 설화)

  위 이야기에서 보듯이 박문수는 며느리를 살해한 죄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가난한 양반을 구출하고 살인을 저지른 중을 잡아가두는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암행어사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불법한 관리나 악인을 처벌하기도 한다.

  또한 전국을 순행하면서 나이 많은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혼인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처럼 상당수 설화 속에서 박문수는 절대적인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지는 관리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물론 박문수가 민중들이 바라는 영웅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박문수 설화 중에는 간혹 박문수가 평범한 인물로 등장하거나 심한 경우 지혜가 부족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요즘의 자유분방한 젊은 친구들처럼 박문수는 여인을 유혹하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 암행 중에 원두막에서 만난 처녀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도판 5> 2003년 MBC 월화 드라마로 방영된 <어사 박문수>의 주연 배우들

  이처럼 박문수 설화 속에는 박문수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지만 이들 설화를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현존하는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설화는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파견된 지역은 경상도와 충청도 뿐이지만, 설화에서는 조선 팔도에 다 암행어사로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암행어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박문수는 실존인물 박문수 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암행어사들을 통칭한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박문수 이름을 빌려 모든 암행어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다양한 지역에서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가 구전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박문수는 점차 암행어사의 대명사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복수는 나의 것

  1. 영화 ‘복수는 나의 것’

  2002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폭력과 복수가 난무하는 상당히 살벌하고도 박진감 넘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연히 비디오로 빌려서 재미있게 감상한 기억이 있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선천적으로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류(신하균)에게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임지은)가 있다. 불행하게도 누나의 병이 악화되어 신장 이식이 아니면 얼마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누나와 혈액형이 달라 이식 수술이 좌절된 류는 장기밀매단과 접촉해 자신의 신장과 전 재산 천 만원을 넘겨주고 누나를 위한 신장을 받기로 한다.

  그러나 류는 장기 밀매단으로부터 장기도 뺐기고 돈도 털리는 사기를 당하게 된다. 때마침 병원에서 누나에게 적합한 신장을 찾아내어 수술비 천 만원만 있으면 누나를 살릴 수 있게 된다. 류와 그의 연인 영미(배두나)는 유괴를 결심한다. 이들 류와 영미가 납치한 아이는 중소기업체의 사장 동진(송강호)의 딸 유선(한보배)이었다.

  류의 희망대로 라면 몸값을 받은 아이는 풀려난다. 그리고 류의 누나도 수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된다. 유괴가 파렴치한 범죄라는 사실만 잠시 덮어둔다면 이같은 결론은 모두가 만족할만한 해피 엔딩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영화를 비극으로 몰아간다.

  류가 아이의 몸값을 받은 날, 류의 유괴 사실을 안 누나가 자살하고 동진의 딸 유선도 우연한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는다. 회사 일에만 몰두해 이혼을 당하고 회사마저 어려워진 후 딸에게 생의 전부를 걸었던 동진은 딸의 죽음 앞에 복수를 결심한다. 누나를 잃은 류 역시 자신이 유괴를 택하게 한 장기 밀매단에게 응징을 준비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이들의 복수에서 시작된다. 신하균은 사실상 누나를 죽게 한 장본인인 장기밀매 브로커들을 찾아내 야구방망이로 구타하거나 드라이버로 목을 찌르는 처절한 보복을 감행한다. 송강호의 죽은 딸을 위한 복수는 더욱 극적이며 참혹하다.


<도판 1> 영화 ‘복수는 나의 것’ 포스터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성공 여부와 감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복수’이다. 영화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가까운 피붙이에 해를 가할 경우 우리들도 무관심할 수 있을까? 설령 그렇더라도 꼭 이렇게 처참하게 복수해야만 했을까?

  송강호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신하균과 배두나를 죽인 송강호도 결국은 배두나가 속한 조직의 조직원 칼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복수를 위해 감행한 그의 행동은 판결에서 얼마나 정상이 참작될 수 있을까? 등등...

  사람들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고 한다. 복수는 생명체의 본능이며, 생리적 반사작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꼭 앞의 영화에서처럼 극단적인 갈등이 아니더라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앙갚음, 보복, 복수는 종종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럼 국가에서는 복수를 감행한 이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2. 조선 정조 때의 두 가지 살인 사건

  예상 가능하듯이 조선시대에도 사람들 간에 복수 행위가 종종 감행되었다. 복수 문제 처리에 대한 조선시대의 논란을 살피기에 앞서 전라도 강진에서 일년 사이에 연속해서 발생한 두 건의 살인 사건을 소개한다.

  하나는 1789년에 발생한 노파 살인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이보다 1년 전에 발생한 아비 원수에 대한 복수 살인 사건이었다. 이들 사건은 앞서 본 영화 ‘복수는 나의 것’만큼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적지만, 적어도 잔혹함에 있어서는 견줄 만하다고 생각된다.


<도판 2> 정약용의 3대 저작 중 하나인 『흠흠신서(欽欽新書)』. 조선 정조 임금 때 발생한 상당수 살인 사건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노파 살인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강진 탑동리에는 양가(良家)의 딸 김은애(金銀愛)란 여성이 살고 있었다. 당시 김은애는 갓 출가한 상태였는데, 사단은 마을에 같이 사는 기생 출신의 노파 안 여인에게서 비롯되었다.

  이웃의 노파 안 여인은 평소 은애를 중매하려다 실패하자 은애에게 유감을 품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통(私通)하였다고 모함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러한 모함은 은애가 출가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모함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은애가 칼로 안 여인의 목, 어깨, 겨드랑이, 팔, 목, 젖 등 모두 열여덟 곳을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가해자 은애가 입은 적삼과 치마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원래 색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런데 이 때 은애의 나이는 겨우 열 여덟 살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은애는 겨우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셈인데, 아무리 원한이 사무쳤다고 해도 미성년 여성이 칼을 들고 노파를 마구 찌른 잔혹함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다음으로 1788년 일어난 복수 살인 사건은 적ㆍ서간에 일어났다. 사건은 비교적 단순했다. 윤덕규란 자가 집안의 서자(庶子) 윤언서와 다툼 과정에서 윤언서에게 얻어맞고 얼마 뒤 죽었다. 이에 윤덕규의 아들 윤항이 윤언서를 칼로 복수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윤언서를 죽인 이후의 윤항의 행동은 가히 엽기적이었다. 윤항은 죽은 윤언서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어깨에 메고 관가에 자수하러 왔다.

  이처럼 아버지의 원수를 살해한 윤항의 행동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위가 약해서인지 적어도 나는 죽은 자의 창자를 몸에 두른 그 자의 모습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다!


  3. ‘복수’를 어찌할 것인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가가 출현하고 법률이 마련된 나라에서 법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일체의 살인을 금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살인을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는 ‘살인자사(殺人者死)’의 원칙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유교 경전에서는 복수 살인을 오히려 고무, 장려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곡례편(曲禮編)」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다. 아버지를 죽인 자는 이른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에 해당하므로 죽여서 복수해야 한다는 복수의 정당성,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인 경우 국가는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복수할 것을 권장하는 유교 경전과 살인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법규 사이의 갈등은 중국에서 꽤 오랜 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원수를 복수 살인한 자를 예(禮)를 실천한 자로 보아 무죄(無罪)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서부터, 살인 금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복수 살인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복수만을 허용하자는 입장 등 다양하였다.


<도판 3> 최근 방영되고 있는 MBC 창사 46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이산’의 정조 역을 맡은 이서진. 다른 군주에 비해 유난히 정조는 살인자의 감형에 애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의 판결 기조는 법리상 적지 않은 논란을 빚었다.

  그럼 조선시대는 어떠하였는가? 조선시대 형법으로 채택한 「대명률(大明律)」에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복수를 허용하고 있었다. 부모와 조부모를 죽인 사람을 자손된 자가 임의로 살해한 경우에는 장 80에 처하되, 부모와 조부모를 살해할 당시에 즉시 죽인 경우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대명률』 「부조피구(父祖被毆)」).

  부모와 조부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는 행위는 사실상 허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복수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는 점이다. 법에 정한 요건을 갖추지 않는 복수 행위는 법논리에 입각해서 살인죄로 처단해야 옳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복수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에서 위정자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고, 대개는 복수 살인한 자는 정상을 참작하여 석방되기 일쑤였고, 설사 처벌한다 하더라도 사형만은 면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앞서 소개한 두 가지 사건, 즉 노파를 살해한 김은애와 아비의 복수를 감행한 윤항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살펴보면 이른바 충ㆍ효ㆍ열의 유교적 윤리가 조선시대 법집행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먼저 은애에 대한 처리 결과를 보자. 국왕 정조는 최종 판결문에서 정숙한 여인이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하는 일은 뼛속에 사무치는 억울함이라 전제한 후, 자신을 음해한 노파를 살해한 정절과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김은애를 석방하였다. 다음으로, 아비를 죽인 원수를 살해한 것은 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 살인범 윤항도 또한 석방하고 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정조는 은애의 행동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이 교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도내 여러 곳에 사건의 내용과 판결 이유를 상세하게 게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십여 차례 이상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고, 자신이 죽인 자의 창자를 몸에 둘러메고 돌아다녀도 그럴만한 동기가 충분하다면 문제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영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돌아가 보자. 딸의 죽음을 목도한 송강호. 영화에서는 복수심에 불탄 그가 딸을 죽음으로 내몬 신하균과 배두나를 붙잡아 잔인한 복수를 행하는 장면이 매우 박진감있게 전개되고 있다. 다소 엉뚱한 상상이긴 하지만, 만약 송강호가 조선시대에 살았고 그리고 그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딸의 원수’를 살해한 그의 행동은 포상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시대 사형집행인, ‘망나니’

1. 사형제도의 또 다른 피해자, 사형집행인

  전쟁 때도 아닌데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행위, 잘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이 사형이다. 그 동안 줄곧 논란이 된 사형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머지않아 폐지될 것 같다. 2008년 현재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지 10년이 넘은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여기서는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 논란은 접어 두고, 사형집행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동안 사형 제도를 논할 때 사형수, 그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만 주목했을 뿐 사형제도의 또 다른 피해자인 사형집행인을 생각하는 이들은 적었다.

  1950, 60년대 서대문형무소에서 근무했던 권영준이란 분은 1971년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라는 기고문에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사형장 풍경과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지금은 역사전시관으로 변한 서대문형무소에서 근무한 그는 직책상 사형 집행장에 자주 입회했다고 한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곳은 구내 서북쪽 끝 담 밑에 위치한 20평 남짓한 목조단층의 독립가옥이었다. 죄수들은 이 곳을 ‘넥타이 공장’이라 불렀는데, 사형장 문에 들어서는 사형수의 열 명 중 일곱, 여덟 명은 거의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61세의 나이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45분에 사형장에 들어선 조봉암(曺奉巖)의 경우는 여느 사형수와 달랐다고 그는 말한다. 조봉암은 사형 집행 직전까지 너무도 조용하고 침착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마지막 요구 사항은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림 1>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제시기 경성감옥을 시작으로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서대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8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림 2>  일제시대 전국의 애국지사들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내 사형장의 현재 모습

  한편, 최근의 신문 기사에서 필자는 20여 년 전에 한 구치소에서 근무하며 10여 차례에 걸쳐 사형을 집행한 전직 교도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사형수를 사형장까지 데리고 갈 때,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 때, 사형수의 의자 밑 마룻바닥이 아래로 꺼지도록 ‘포인트’(교도관들이 그 장치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를 잡아당길 때의 느낌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형 집행에 참여하는 일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형 집행자 명단에 빠지기 위해 교도관들은 온갖 핑계를 대기도 했다지만, 며칠에 한 번씩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예사였던 1970년대 유신정권 말기에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의 고통은 짐작하기 쉽지 않다.

  사형 집행에 참여한 전직 교도관들 중에는 마약에 손을 대거나, 속세를 떠나 불가(佛家)에 귀의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이들도 사형제도의 또 다른 피해자임에 분명하다.

 

2. 조선시대의 참수형 집행 광경

  그런데 다소 엉뚱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사형집행인의 고통은 조선시대 참수형을 담당한 이른바 ‘망나니’에 비하면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교수형으로 끝나는 지금의 방식에 견주어 본다면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은 훨씬 참혹했기 때문이다.


<그림 3>  북송 때 개봉부 판관(判官)을 지낸 포청천의 무덤. 강직한 것으로 유명한 그의 무덤은 현재 안휘성 합비(合肥)시에 있다.


<그림 4> 포청천이 활약할 당시 죄인을 참수할 때 쓰던 작두이다. 신분이 높은 자는 맨 위의 용모양 작두로 처형했으며, 두 번째가 호랑이 모양 작두, 보통 사람들은 맨 아래의 이른바 ‘개 작두’에 목을 넣어야 했다. 포청천 사당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사형은 목을 매는 교수형(絞刑)과 함께 목을 베는 참수형(斬刑)도 있었다. 그나마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교수형에 비해 참수형이 훨씬 무거운 형벌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사형 집행 방식은 이 외에도 능지처사(陵遲處死), 군문효시(軍門梟示), 오살(五殺), 육시(戮屍) 등 듣기 섬뜩한 사례가 있지만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참수형에 집중하기로 한다.

  당시 참수형을 집행하는 장소로는 지금의 노량진 건너편 노들강변의 새남터, 삼각지로터리에서 공덕동로터리 쪽으로 가면 나오는 당고개, 서소문 밖 네거리, 무교동 일대였다. 사형수라 하더라도 사형 집행은 대개 추분부터 춘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죄가 매우 중한 사형수는 ‘부대시(不待時)’라 하여 판결 즉시 처형했는데, 일제 때 경성형무소장을 지낸 중교정길(中橋政吉)에 따르면 무교동 일대에서 집행하는 사형수는 부대시(不待時) 죄수였다고 한다.

  이 쯤 해서 읽기 거북하더라도 참수형 집행 광경을 설명하기로 하자. 참수형 집행은 조선시대 내내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말의 관리나 선교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소달구지 적재 칸에 사형수의 양팔과 머리칼을 매단 채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그를 압송한다.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사형장에는 사방 약 50보 내외의 넓이로 장막을 둘러치고 구경꾼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죄수가 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집행인, 즉 망나니는 죄수의 옷을 벗기고 죄인의 두 손을 뒤로 묶은 뒤 그의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길다란 자루가 달린 무시무시한 칼로 목을 자른다. 때로는 상투에 줄을 매어 목을 베었는데, 이는 잘린 목을 나무에 매달아 효시(梟示)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5>  참수형을 집행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속에 있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참수를 맡은 망나니는 대개 술에 취한 채 칼을 머리 위로 쳐들고 정신없이 춤을 추다가 흥분 상태에서 그 여세로 칼을 내리쳐 목을 베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한 사형수의 가족이 사형 집행 당일 망나니에게 뇌물을 주지 않을 경우 망나니는 사형수를 단칼에 죽이지 않고 일부러 여러 차례 칼을 사용해 죄수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반드시 그랬다고 단정 짓기에는 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아무튼 지금 ‘망나니’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희화되어 알려지고 있지만, 참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아래에서 보듯 죽기 싫어서 해야 할 일이 망나니 짓이었다.

3. 망나니를 위한 변명

  여기서 궁금한 사실 하나. 도대체 누가 ‘망나니’가 되었을까? 망나니는 도수(刀手), 회자수라고도 불렸는데, 사람들의 목을 단 칼에 베어야 하는 조선시대의 망나니가 원래 사형수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림 6>  비적(匪賊)을 참수하는 장면을 담은 청나라 말기의 판화. 『점석재화보(点石齋畵報)』에 실려 있다. 필자가 소장한 『도설 중국혹형사(圖說 中國酷刑史)』라는 책자에는 1901년과 1930년 중국에서 참수형을 집행하는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지만, 독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차마 싣지 않는다.

  사형수가 사형수의 목을 벤다?  다소 의아해하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이라는 법전의 형전(刑典) 추단(推斷) 조문 중에는 행형쇄장(行刑鎖匠), 즉 참형 집행을 맡은 망나니는 사형수 중에서 자원하는 자가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숙종 임금의 수교(1703년)가 실려 있다. 이보다 100여 년 뒤인 고종 초기의 법률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도 지금의 서울구치소에 해당하는 관청인 전옥서(典獄署) 소속 행형쇄장(行刑鎖匠) 1명을 사형수 중 원하는 자를 국왕께 아뢰어 결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사형수만이 망나니 일을 전담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위의 기록들을  볼 때 적어도 조선후기 망나니의 모집단은 사형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들이 왜 자원했을까?  망나니가 되는 일,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망나니가 된 자는 사형에서 감형되었고, 그들은 감옥에 머물면서 사형 집행이 있을 때만 눈 딱 감고 칼을 휘두르면 되는 일이었다.


<그림 7>  중화민국 시절 참수형을 집행하던 사람의 사진. 서양인이 촬영하였다. 일본에서 2001년 간행한 『도설 중국혹형사』에 실려 있다.

  앞서 언급한 『육전조례』를 보면 이들 망나니가 사용하는 칼을 ‘행형도자(行刑刀子)’라고 하였는데, 앞서 참수형을 집행하는 모습을 담은 『형정도첩』의 그림에서 보듯이 칼날이 초승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중국 고대의 무기 언월도(偃月刀)와 모양이 비슷하였다. 한말에 망나니가 실제 사용했던 행형도자(行刑刀子)는 칼날의 길이가 두 자, 자루 길이가 세 자 정도나 될 정도로 무겁고 길었다고 한다.

  사형수에서 하루아침에 망나니로 둔갑한 그들은 어찌 보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 죄수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흉악무도한 인간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비록 생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살기 위해서 칼을 든 망나니들의 삶이 과연 죽기보다 나은 것인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승정원일기』 숙종 2년 5월 6일자 기사에는 전옥서 소속 망나니 의종(義宗)이 탈옥한 사건이 실려 있다. 의종은 마적(馬賊)으로 체포되어 처형될 날 만을 기다리다가 망나니를 자원하여 사형 집행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탈옥에 성공한 의종의 행적을 이후 기사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과연 의종은 새 삶을 얻었을까? 나는 의종이 죄책감, 두려움 등으로 알콜 중독, 혹은 환청, 환각에 시달리다 자살을 했을 지도 모른다고 감히 상상을 한다. 사람이 사람을 도살하는 일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물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승의 지옥, 감옥

1. 아무리 좋아봐도 감옥은 감옥

  1974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실린 정을병의 단편소설 「육조지」를 아는가? 「육조지」는 작가 자신의 옥중 체험을 소설화한 것으로, 작가는 소설에서 유신 시절 우리의 사법 및 교도 행정의 난맥상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소설 제목은 호되게 남을 때린다의 뜻을 가진 ‘조지다’에서 따온 것으로, 감옥에 간 죄수와 그 죄수를 ‘조져대는’ 자들 간의 상호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육조지란 집 구석은 팔아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는 얘기다.

  가족 중에 혹 감옥살이하는 자가 있으면 면회 가야지 돈 보내야지 변호사도 구해야지 가족들은 집을 팔아야 할 지경이다. 돈 없고 빽 없는 죄수들은 가족이나 친지가 넣어 주는 사식(私食)에 목마르니 닥치는 대로 먹어 댈 수밖에 없다. 간수들은 매번 죄수들이 탈옥을 했는지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늘 죄수 세기에 바쁘다.

  형사는 다른 일도 바쁜 데 차분히 심문할 여유가 없다. 무조건 두들겨 패서라도 자백을 받으면 그만이다. 검사는 수감된 죄수들의 형을 확정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구치소에 수감된 죄수를 불러 댄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가 뭐가 그렇게 힘든지 늘 재판을 미루기 일쑤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암울했던 그 시절에 이래저래 감옥살이 경험은 누구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림 1>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전경. 1908년 경성감옥으로 출발하여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쓰였다.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국근현대사의 아픔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감옥이다.

  요즘은 어떨까? 1970년대에 비한다면 법조계의 부조리가 상당히 개선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옥살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 필자는 2008년 4월 1일부터 교도소와 구치소 등 교정시설에서 그동안 수형자들에게 해오던 알몸 신체검사를 폐지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교정시설에 입소하거나 이송되는 자들에게 행한 알몸 신체검사는 감옥 내에 부정한 물품의 반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법무부 발표에 의하면 연간 9만 여명의 신입 수형자 중 항문 등을 이용해 담배나 이상한 물품을 들여오다 적발된 건수가 평균 15건에 달한다고 한다.

  법무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고 인권침해의 가능성이 있는 알몸 신체검사를 전면 폐지토록 한 이번 조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재소자 인권에 대한 보호 노력이 상당히 제도화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옥살이가 개선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비교적 갖추어진 시설, 충분한 음식 공급은 말할 필요도 없고 수감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옥 중에서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1995년부터 교도소, 구치소 등 교정시설에서 수형자를 대상으로 독학에 의한 학사학위 취득과정(학사고시반)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교정 당국자들이 죄수들의 성공적인 재사회화와 재범방지에 진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감옥생활을 할 만한 것일까? 물론 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봐도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에.

 

2. 조선시대 감옥 시설

  아무리 시설이 좋아지고 대접이 나아졌다고 해도 감옥생활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보다 시설이나 처우 등 여러 면에서 훨씬 열악했던 조선시대의 옥살이는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 구체적으로 조선시대 감옥은 어떠했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감옥의 명칭부터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죄지은 자를 가두는 수감시설을 뜻하는 ‘감옥’이라는 용어는 사실 일본에서 들여온 단어이다. 원래 조선에서는 ‘감옥’이라는 용어 대신에 ‘옥(獄)’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수도 한양에 지금의 서울구치소 격의 전옥서(典獄署)가 있었고, 의금부, 포도청, 내수사에서도 별도의 옥을 두었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감영 소재지 및 각 군현에도 옥이 있었다.

  그 가운데 전옥서는 일반 죄수를 가두는 대표적인 수감시설이었는데, 현재 종로구 서린동의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전옥서가 감옥서(監獄署)로, 1907년에는 감옥서가 다시 감옥(監獄)으로 바뀌면서 이 때부터 감옥이란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림 2> 조선시대 전라도 무주 지도의 읍내 부분. 규장각 소장. 그림의 객사와 동헌 좌측 편에 둥근 모양의 옥(獄)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고종대 제작된 지도 중 감옥 위치를 표시한 군현이 여럿 확인된다.

  한 가지 더. 지금의 교도소와 구치소는 어떻게 다를까? 교도소는 형이 확정된 수형자를 가두고 교정하는 시설인 반면, 구치소는 재판 중에 있는 미결수를 수용하는 곳이다. 앞서 언급한 한말의 감옥은 다시 일제 때 와서 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이 형무소가 1960년대 교도소, 구치소의 전신인 셈이다. 이처럼 흔히 통칭해서 ‘감옥’이라 말하지만, 죄수 수감시설에 대한 명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이야기가 다소 벗어났는데, 다시 과거의 감옥으로 돌아가 보자. 죄수의 열악한 수용환경은 한말 기록에서 일부 확인된다. 1908년 10월 현재 감옥 수감자는 2,019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새로운 감옥 제도에 의해 설치된 전국 8개 감옥의 전체 죄수 수용면적이 약 298평에 불과하였다.

  평당 7명이 넘는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방 3개에 총면적 15평에 불과한 대구감옥의 수감자는 항상 150명을 넘었기 때문에 2교대, 3교대로 잠을 자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옥에서 베개를 베고 편안히 잠을 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림 3> 1950년대의 대구교도소. 위쪽은 내부이며 아래쪽은 정문 사진. 대구교도소의 기원은 1908년 '대구감옥(大邱監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치 당시의 대구감옥은 경상감영 안에 문을 열었는데, 시설이 열악해서 감방 3개에 온돌도 없었다고 한다.

  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때 설치된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당시 전국에서 제일가는 모범감옥이었다고는 하지만 처음 세울 때 양철지붕에 판자로 담을 쌓은 것에 불과하였다.

  그럼 그 이전에는? 사실 조선시대 감옥의 규모, 내부 시설, 수용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분명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보통 사람들도 살아가기 팍팍한 그 시절에 죄짓고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배려해주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조선 건국 후 감옥 제도가 정비되는 것은 세종 임금 때였다. 세종은 죄수 처우에 특히 관심을 두어 서울과 지방 감옥의 표준설계 지침도 마련하였다. 이에 따르면 남녀가 수감될 옥을 별도로 짓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겨울용 한옥(寒獄)과 여름용 서옥(暑獄)을 따로 두어 죄수들이 병들지 않도록 하였다. 실제로 1870년대 전옥서의 서리(書吏)로 근무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전옥서의 옥사 일부는 판자로 바닥을 깐 여름용이었고, 다른 곳은 겨울용 온돌방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감옥 사정이 이후 세종의 의지대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조선 중기에 전옥서와 의금부 옥에서 남, 녀 죄수에 대한 분리 수용이 종종 지켜지지 않아 남녀 간의 문란한 간음은 물론 여죄수가 옥중에서 아기를 출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설사 온돌이 설치되었다 치더라도 죄수들을 위해 겨울에 불을 지핀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연히 추위와 전염병으로 옥사하는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는데, 심한 경우는 중종 13년(1519) 기사에서 보듯이 겨우 동짓달 찬바람에 30여 명이 때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림 4> 한말의 전옥서 건물 배치도. 임재표가 여러 문헌을 토대로 그렸다. 임재표의 논문 「조선시대 인본주의 형사제도에 관한 연구」(단국대 박사학위논문, 2001) 부록 참조.

  수용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추관지(秋官志)』라는 책자에 따르면 18세기 전옥서에는 남자 죄수를 수용하는 옥사가 모두 9칸, 여자 죄수를 수용하는 옥사가 모두 5칸이었다. 정확한 면적을 알 수 없어 단언하긴 곤란하지만, 인조, 효종 임금 때의 실록 기록에 나오는 보통 40명에서 100명 정도의 죄수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광해군 때에는 심한 경우 300명이 넘는 죄수가 수감되기도 하였는데, 김직재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5개월간 전옥서에 수감된 유진(柳袗)이란 분의 옥중일기 『임자록(壬子錄)』에 그대로 나와 있다.

  그럼 옥중의 위생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세종 30년(1448)에 세종 임금이 각 지방에 하달한 옥중 위생 관리 규칙에서 대략 가늠할 수 있다. 해당 규칙에는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냉수를 옥 안에 수시로 넣어주어 죄수들이 마실 수 있게 하고, 한 달에 한번 머리를 감을 수 있도록 하였다. 5월부터 7월까지는 죄수가 원하면 열흘에 한 번 정도는 몸을 씻을 수 있도록 했으며, 10월부터 1월까지의 겨울철에는 옥 안에 볏짚을 두껍게 깔아 주도록 하였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한 달에 머리감기 한 번이 허락된 셈인데, 이마저도 세종 임금의 배려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밖에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감옥 안 위생 상태가 적지 않게 불량하였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 하나 조선시대 감옥살이에는 굶어죽을 자유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백성들도 끼니 걱정하고 살 판국에 죄수들에게 제대로 된 음식이 공급될 리 만무했다. 따라서 그나마 옥바라지를 해줄 가족들이 없는 한 죄수들은 꼼짝없이 배를 곯아야 했다. 1878년 당시 제6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리델 신부가 들창문 하나 없는 움막 같은 감옥에서 굶주림에 지쳐 잠잘 때 썩은 볏짚베개를 뜯어서 씹곤 했다는 일화는 이를 방증하는 한 예이다.

  문제는 조선시대 옥살이의 고통이 이 뿐 만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대놓고 말해서 온갖 괴로움이 다 모인 곳이 감옥이었다.


<그림 5>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刑政圖帖)에 실린 그림 중의 하나. 포도청에 수감된 죄수에게 가족들이 사식(私食)을 주는 장면이다.
 
3. 옥(獄)은 이승의 지옥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옥중오고(獄中五苦)’라 하여 당시 옥살이의 다섯 가지 괴로움을 소개하고 있다. 그 다섯 가지는 형틀의 고통, 토색질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고 독자들 중에는 토색질의 고통에 대해 의아해 할 지 모른다. 사극에서 보듯이 조선의 감옥에서 죄수들이 목에 큰 칼을 차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그래도 참더라도, 고참 죄수와 옥졸들의 토색질과 가혹 행위는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 서울여대 정연식 교수의 저서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1』에도 인용되어 있는 『목민심서』의 감옥 내 신고식 장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옥졸들은 스스로를 ‘신장(神將)’이라 하며 뽑냈고, ‘마왕(魔王)’이라 부르는 고참 죄수들은 가당치 않게 자기 밑에 영좌(領座), 공원(公員), 장무(掌務) 등 갖가지 직책을 가진 부하 죄수들을 두고 신참을 괴롭혔다. 매번 신참 죄수들이 들어오면 이른바 학춤, 원숭이걸이, 알짜기, 골때리기 등의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는데 모두 신참의 돈을 뜯어먹기 위한 것이었다.


<그림 6> 19세기말 풍속화가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학춤추는 죄인’. 『기산풍속도첩』에 실려 있다. 팔을 학날개 모양으로 묶고 다리는 회초리로 쳤을 때의 죄수의 발버둥치는 모습은 학춤과 유사하다.

  신참 죄수는 옥에 들어가면서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먼저 신참이 옥문을 들어서자마자 유문례(踰門禮)를 행하고 돈을 뜯었다. 그리고 일단 감방에 들어서면 먼저 들어온 죄수들과 지면례(知面禮)라는 상견례를 시켰다. 그리고는 신참의 목에 칼을 씌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괴롭히다가 칼을 벗겨주면서 환골례(幻骨禮)를 거치도록 했으며, 며칠 후에는 정식으로 면신례(免新禮)를 행했다.

  부르기 좋아서 ‘예(禮)’이지 앞서 말한 린치를 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신참 죄수가 감방 사정을 잘 파악해서 사식(私食)이나 돈을 뇌물로 제 때 줘야만 이같은 신고식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림 7> 청나라 말기의 『활지옥(活地獄)』이란 책자에 등장하는 신참죄수 신고식 장면. 감옥 내 가혹행위의 전통은 조선이나 청이나 매 한가지였던 것 같다.


<그림 8> 『활지옥(活地獄)』에 나오는 고참죄수가 신참죄수에 사형(私刑)가하는 장면. 신참죄수의 손가락, 발가락을 끈에 묶어 매단 채 촛불을 들이대고 괴롭히는 방식이 기발하다.

  감옥 내 가혹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정조 7년(1783) 10월에 황해도 해주감옥에서 발생한 박해득 치사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사망한 박해득은 해주감옥의 신참죄수였다.

  옥졸 최악재란 자는 박해득에게서 그동안 늘 해오듯 으레 돈 50냥을 뜯으려 하다 말을 듣지 않자 고참죄수 이종봉을 시켜 박해득을 손봐주도록 지시했다. 이에 이종봉은 박해득을 잡아 담 아래에 세우고 쓰고 있는 칼의 끝을 두 발의 발등 위에 올려놓고 새끼줄로 칼판과 다리를 함께 묶었다. 그러자 박해득은 곱사등 모양을 한 채로 옴짝달싹 못하다 결국 썩은 나무가 넘어지듯 담벼락에 부딪히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져 열 흘 만에 죽고 말았다.

  ‘옥(獄)은 이승의 지옥’. 앞서 언급한 『목민심서』에 나오는 다산 정약용의 이 말은 뜻하지 않게 죽은 신참죄수 박해득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능지처사, 더 이상 잔혹할 수 없는....
1. ‘각을 뜬다’는 것은?

“미제의 각을 뜨자!”
“전○○의 각을 뜨자!”

  198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분들이라면, 특히 학내에서의 각종 민주화 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열혈 학생이라면 간혹 위와 같은 말을 외친 적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1986년에 대학에 입학한 겁 많고 소심했던 필자의 경우 이 당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 속에서 위와 같은 절규하는 외침을 들은 기억이 있다.

  독재 타도, 반미 자주화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그 시절, 이 땅의 민주화를 거스르는 독재정권과 거대 제국을 향한 저주의 외침은 비장한 자신의 마음 속 심경을 보여주는 호소력 있는 메아리였음에 분명하다.


<그림 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전경. 중앙도서관 앞과 대학본관 사이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1980년대 서울대학교 학내 집회 장소로 많이 애용되었다.

  당시에도 그 뜻을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필자는 요즘 들어 ‘각을 뜬다’는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표현인가 새삼 되새긴다. 혹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족을 단다면 ‘각을 뜬다’의 ‘각(脚)’은 짐승의 고기 조각을 말한다.

  북한에서 ‘각을 떠서 매 밥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다’는 속어가 있는데, 이 말은 뼈 속 사무치게 증오스런 대상에 퍼붓는 욕으로서 사지를 따로따로 떠서 매 먹이를 만들어도 맺힌 속마음이 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지금이야 구호 속, 혹은 욕설 속에서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실제로 사람의 각을 뜨는 형벌이 존재했으니 그것이 바로 ‘능지처참’이다. 끔찍하고 찝찝한 이야기이지만 아래에서는 능지처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해봐야 소용없는 말이지만 비위가 약하신 분, 혹은 나이 어린 아이들은 가능한 읽지 않기를 바란다.

 

 2. 능지처사, 더 이상 잔혹할 수 없는

  능지처참(凌遲處斬)에서 ‘능지’의 원래 뜻은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를 말한다. 따라서 능지는 가능한 한 느린 속도로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능지처참은 천천히 칼로 한 점 한 점 몸을 베어내고 거의 다 베어냈을 때 배를 가르고 목을 잘라 죄인의 목숨을 빼앗은 형벌이다. 흔히들 ‘능지처참’이라고 말하지만, 법전에 나오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는 용어가 더 맞는 표현이다.

  죄인의 몸에 갈기갈기 난도질을 해서 죽이는 가장 잔혹한 극형 중 하나인 능지처사는 중국의 오대(五代) 시대인 10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산 사람의 살을 베어 죽인 사례가 없진 않았지만, 이 무렵 정식 형벌로 채택되어 행해졌다.

  반역자나 폐륜아를 처단하는 극형으로 이 때 시작된 능지처사의 형벌은 송, 원, 명을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송나라에서는 능지처사의 공개처형이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송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수호지(水滸志)』에 등장하는 이규가 황문병이란 인물의 살을 베어 죽이는 대목은 이렇다.

  이규는 “너는 빨리 죽고 싶겠지만 내가 천천히 죽여주마” 라고 말하고 비수를 꺼내어 황문병의 사타구니부터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려낸 가장자리에서 먹음직스런 살점을 숯불로 구워 술안주로 하여 집어넣었다. 이윽고 다 베어낸 살점이 없어지자 이규는 비수로 황문병의 흉부를 가르고 심장을 꺼내어 취기를 가시기 위한 술국을 끓였다.


<그림 2> 『수호지』에 나오는 능지에 처하는 장면. 판화 상태가 좋지 않지만 소고기나 돼지고기 자르는 모습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全書)』 수록, 명나라 간행).

  그런데 능지처사가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원나라 때의 능지는 120회의 살베기로 끝났지만, 명나라 때의 칼질의 횟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명 정덕 연간인 1510년 환관 류근은 모반죄로 무려 3,357도(刀), 즉 3,357회의 칼질을 당했고,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관리 정만이란 자는 숭정 연간인 1639년에 앞서 소개한 류근보다 더 많은 3,600번의 칼날을 견뎌야 했다.

  환관 류근의 능지처사 집행 현장에 있었던 인물의 기록에 의하면 형의 집행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처음 하루는 엄지, 손등, 흉부의 좌우로 357회의 칼질로 몸을 얇게 베어냈는데, 형을 집행한 자가 10도(刀)마다 잠깐 쉬었고, 중간 중간에 기절한 죄수를 깨웠다. 저녁에는 감옥에 가두어 죽을 먹인 후 다음날 다시 칼질이 시작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정해진 칼질의 횟수를 채웠다고 한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도려낸 살점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인들이 중국어를 습득하기 위한 외국어 교재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라는 책자에는 원나라 수도인 북경성 내에서의 능지처사 집행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형장에 세워진 큰 기둥에 죄수를 묶고 사형 집행을 담당한 자가 칼로 살점을 도려내어 개에게 먹이고 뼈만 남겼다. 또한 앞서 소개한 숭정 연간에 처형된 정만의 잘게 썰린 살점은 형 집행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팔렸는데, 당시 군중들은 부스럼을 치료하는 약의 원료로 정만의 인육을 샀다고 한다.


<그림 3> 중국어 교재인 『박통사언해』. 원나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도 북경성에서 시행한 능지처사 집행 장면도 적혀 있다.

  청에서 집행한 능지처사의 경우 죄수들의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칼질이 앞선 시기보다는 덜했다. 즉 청대에는 능지처사의 칼질 수가 8도(度), 24도, 36도, 72도, 120도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 24도, 즉 24회에 걸쳐 살을 도려내는 순서는 먼저 1ㆍ2도로 양 눈꺼풀, 3ㆍ4도로 양 어깨 살, 56도로 양 젖가슴, 7ㆍ도로 양손과 양팔 사이, 9ㆍ10도로 양 팔과 양 어깨 사이, 11ㆍ12도로 양 넓적다리 살, 13ㆍ14도로 양다리의 장딴지, 15도로 심장, 16도로 목을 자르고, 17ㆍ18도로 양손, 19ㆍ20도로 양팔, 21ㆍ22도로 양 발, 23․24도로 양 다리를 잘랐다. 한편 8도, 즉 8회에 걸쳐 살을 잘라내는 경우는 먼저 1ㆍ2도로 양 눈꺼풀, 3․4도로 양 어깨, 5ㆍ6도로 양 젖가슴, 7도로 심장을 관통하고, 8도로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림 4> 청나라에서 시행한 능지처사. 불륜을 저지는 남녀를 능지처사에 처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가운데 나무에 묶인 여성의 두 팔은 이미 잘려나간 상태이며, 이어서 왼쪽 다리를 자르는 장면이다. 좌측 편에 칼을 들고 있는 자는 곧 있을 참수를 준비하고 있고,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성은 다음 능지처사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금산현보갑장정(金山縣保甲章程)』에 실려 있다.


<그림 5> 능지처사에 처할 때 양 눈꺼풀에 먼저 칼질하여 죄수의 눈을 가리는 장면. 『대청형률(大淸刑律)』 도설(圖說)에 실려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능지처사의 칼질이 양 눈꺼풀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는 눈꺼풀을 얇게 저며 눈을 가림으로써 능지처사를 당하는 죄수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극형을 집행하는 마당에서도 뇌물은 오고갔다. 즉 사형 집행인의 재량으로 목숨을 끊는 것에 완급이 조절되곤 했는데, 죄수의 가족으로부터 웃돈을 받는 경우 집행인은 능지처사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대번에 심장을 칼로 찔러 생명을 끊고, 그 후에 신체를 풀어헤치는 관용을 베풀었다.

 

3. 조선에서는 거열(車裂)로 대신하다

  중국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지속되었던 능지처사의 형벌은 물론 조선왕조 수도 한양에서도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내내 능지처사의 극형이 종종 시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어떤 자들을 능지처사의 극형으로 처단했을까?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보통 형법으로 채택해서 썼는데, 『대명률』의 내용 중에는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이 여럿 등장한다.

 『대명률』의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을 열거하면 우선 역모를 꾀하거나 종묘, 왕릉, 궁궐을 훼손한 경우인데, 이같은 모반․대역죄인은 모의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주모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관계없이 모두 능지처사로 처단하였다.

  다음으로 조부모, 부모, 외조부모를 살해하거나, 남편, 혹은 남편의 부모, 조부모를 살해한 자, 주인을 살해한 노비 등 당시 관념으로 도저히 용납못할 폐륜 살인을 저지른 자도 능지처사로 다스렸다. 일가족 3명을 살해하거나,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여 살해한 자, 외간 남자와 짜고 본 남편을 살해한 처ㆍ첩도 능지처사의 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요컨대 반역자는 물론이고 살인을 저지는 폐륜아․흉악범들은 능지처사로 처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림 6> 1757년 프랑스에서 집행한 거열형 장면(『고문실의 쾌락』, 238쪽). 다미앵이란 인물이 국왕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네 마리의 말에 몸이 묶여 찢겨죽는 모습이다. 조선에서 시행한 능지처사의 집행도 수레가 동원되는 점 말고는 이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사실은 조선에서 능지처사의 집행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대개 수레에 죄인의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수레를 끌어서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로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거열은 ‘환형(轘刑)’, ‘환렬(轘裂)’이라고도 하였는데, 중국 고대에서는 대개 다섯 대의 수레로 몸을 찢었다.

  거열로 능지처사를 대신한 사례로 조선 건국 초기인 태종대의 예를 들어보자. 태종 7년(1407) 충청도 연산현의 시골 여인이 이웃 남자와 짜고 남편을 유인, 살해해 시신을 땅에 유기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주모자인 부인 내은가이(內隱加伊)에 능지의 형이 내려졌다.

  당시 황희(黃喜)는 태종에게 이전부터 능지처사는 거열(車裂)로 대신했다는 사실을 아뢰어 내은가이는 서울의 저자에서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되었고, 그녀의 절단된 사지는 여러 도로 나누어 전시된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수를 거열하였다는 세조, 성종대 기사를 통해 볼 때 조선에서 능지처사는 곧 거열형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죄인의 거열 장소는?  능지처사, 즉 거열형은 도성 밖에서 집행하던 일반 사형 죄수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도성 안 저자 거리에서 연출되었는데, 지금의 서울시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근처에 있었던 군기시(軍器寺) 앞길이 자주 이용되었다.


<그림 7> 군기시가 있던 서울시청 근처 한국프레스센터 사진. 조선시대 거열형은 이 앞길에서 주로 집행하였다.

  특히 역모에 연루된 죄인을 거열할 때에 임금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모든 관리들을 군기시 앞 길에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싫든 좋든 거열하는 장면을 보도록 했는데, 세조가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관련 죄수를 처단할 때 이같이 지시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거열 후 절단된 머리는 효시(梟示)라 하여 대개 3일간 매달아 두었으며, 잘라낸 팔과 다리는 팔도의 각 지역에 돌려보이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죄인의 머리를 내거는 장소로 쓰인 곳은 대개 지금의 종로2가 보신각 근처에 있던 철물교(鐵物橋)였다.

  경우에 따라 능지처사한 죄수의 머리는 3일 이상 매달아두거나, 여러 곳에서 효시를 하기도 하였다. 소론 강경파로서 경종 때 신임사화를 일으키고, 영조 즉위 후에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박필몽(朴弼夢)에 대해 1728년 4월에 영조가 내린 조치가 그것이다. 당시 박필몽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사되었고, 그의 머리는 저자거리에서 6일간 효시된 후 소금에 담가 반란군 소탕 본부인 도순무영에 보내져 다시 효시되었다. 그의 팔다리는 별도로 8도에 각각 보내졌음은 물론이다.


<그림 8> MBC 창사 46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이산’에 등장하는 영조 역을 맡은 탤런트 이순재. 영조는 탕평책, 균역법 등 과감한 정치, 재정 개혁을 단행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지만, 조선의 다른 군주와 마찬가지로 대역 죄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4. 육시, 부관참시 그리고 박피

  앞서 조선에서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과 그 집행 사례를 소개하였는데, 능지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육시와 부관참시가 있다.

  요즘도 간혹 들을 수 있는 욕인 ‘육시랄 놈’이란 말에 등장하는 ‘육시(戮屍)’란 시신을 훼손하는 형벌로, 죽은 자에 대한 능지처사로 생각하면 된다. 조선왕조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취조 도중에 죽은 대역죄인의 시신은 종종 육시를 했다.

  세조 때 고문으로 죽은 사육신 일부가 육시된 것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앞서 언급한 박필몽과 함께 신임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목호룡(睦虎龍) 역시 영조 즉위년인 1724년에 육시를 면치 못했다. 목호룡이 고문으로 옥중에서 급사하자 영조는 당고개(지금의 지하철 당고개 역 근처로 오해하면 안되며, 삼각지로터리에서 공덕동로터리 쪽으로 조금 가면 위치하고 있다)에서 목호룡의 시신을 토막내어 머리는 서소문 밖에 효시하였고, 사흘 뒤에 다시 머리와 팔, 다리를 지방에 돌려 보이게 하였다.

  대역죄인으로 몰리면 끔찍한 수난은 무덤 속 시신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무덤을 파헤쳐 관을 부수고 시신의 목을 잘랐으니, 연산군 때에 김종직(金宗直), 한명회(韓明澮)는 물론이고 임금의 유모까지도 이같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이쯤 해서 글을 끝냈으면 하는 독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왕 능지처사에 대해 말한 김에 마지막으로 잔혹함에서 결코 능지처사에 뒤지지 않는 중국에서 행한 형벌인 ‘박피(剝皮)’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로 한다.

  박피는 살아있는 사람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명나라 때 박피의 형벌이 간간이 시행되었다. 명의 태조 주원장은 탐관오리를 처형할 때 박피, 즉 산 사람의 피부를 벗겨 낸 뒤 그 안에 잡초를 넣고 꿰매 인형을 만들어서 관청 안에 걸어두곤 했다. 그리고 명의 7대 임금 무종은 1512년 모반을 꾀한 자들 가운데 6명의 박피를 명하여, 벗겨낸 가죽으로 말안장을 만들어 자신의 말에 올려놓고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림 9> 서양인이 촬영한 청나라 말기의 능지처사 집행 사진. 보기 거북한 사진이지만 사실적 상황을 묘사하고자 올리니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사람의 잔인함이 도대체 그 끝은 어디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기회에 좀 더 차분히 찾아보기로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능지처사는 조선의 경우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청의 경우 1905년에 각각 금지되었다.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요즘이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법전 속에서 과거의 잔혹한 형벌을 몰아낸 이성의 힘은 분명 찬사 받아야 마땅하다고.

 

 

조선시대의 주홍글씨, 자자형
1. 경을 칠 놈!

  유행을 따르고자 하는 호기심은 젊은이들의 고유한 본성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최근 10대 청소년 사이에 ‘자가 문신’이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가 문신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바늘을 이용해 팔이나 등을 찔러 상처를 낸 뒤 먹물을 넣어 문신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일부 학생들 사이에선 연필깎이 칼을 이용해서 피부를 긁어서 무늬나 글자를 남기는 방법까지 사용한다고 한다.

  자가 문신하는 이유는 물론 가지가지이다. 한 때의 호기심에서 우발적으로, 때론 또래 친구들간의 끈끈한 결속과 단결을 다지기 위해서 등등... 새로운 유행을 추구하는 청소년들을 굳이 탓할 생각은 없지만 역사를 전공한 필자가 보기에 솔직히 최근 청소년들 사이의 문신 행위가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에 문신은 하나의 형벌이었다. 경형(黥刑) 또는 묵형(墨刑)이라고 불리는 자자형(刺字刑)은 대개 도둑질한 자들에게 가했던 형벌로, 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새겨넣는 벌이었다. “경을 칠 놈”이라고 욕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인데, 죄를 지어 평생 얼굴에 문신을 새긴 채 살아갈 놈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말이다.


<그림 1> KBS 드라마 ‘해신’에서 해적 염장으로 분한 송일국. 장보고는 해적 염장의 얼굴에 문신을 새겼다.

  자자형, 즉 묵형은 사실 중국 고대의 형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형벌은 오늘날과 달리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무시무시한 육형(肉刑) 투성이었다. 먹으로 몸에 죄명을 문신하는 묵형은 죄인의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宮刑), 목숨을 빼앗는 사형(死刑)과 함께 ‘오형(五刑)’이라고 하였다.

  고대의 육형은 한나라 문제(文帝)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자자형은 오대(五代) 시기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송나라에서는 국가의 공식적인 형벌체계로 제도화되었다.

  죄지은 자에게 문신을 새기는 벌은 비단 동양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청교도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보스턴에서 발생한 간통사건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주홍글씨」라는 장편소설에 형벌로서의 문신이 등장한다.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아는 내용일 것이지만 핵심은 이렇다. 목사 아서 딤스데일과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게 된 헤스터 프린이란 젊은 여성이 간통한 벌로 공개된 장소에서 ‘A(adultery)'라는 글자를 가슴에 새기는 형을 선고받는다. 자신의 죄명을 주홍색 실로 새긴 주홍글씨! 이는 문신을 통해 벌을 주는 행위가 동양과 큰 차이가 없었음음 말해준다.


<그림 2> 1995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주홍글씨’의 포스터. 데미 무어 등 주연, 감독은 롤랑 조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하였다.

  이처럼 과거 몸에 글자를 새기는 벌은 새겨진 글자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었다. 그러한 자자형, 즉 문신이 이제 새로운 멋과 유행의 하나로 변화하는 것을 볼 때 세상사는 요지경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40대의 필자가 너무 보수적이기 때문일까?

2. 조선시대의 주홍글씨, 자자형

  명나라의 형법전인 「대명률」에서는 절도 초범은 오른팔에 ‘절도(竊盜)’ 두 글자를 새기고, 재범은 왼팔에 새기며, 삼범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다. 명나라의 형법을 사용한 조선에서도 「대명률」에 의거하여 절도범에 대해 자자(刺字)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자자형, 즉 형벌로서의 문신은 전왕조인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절도죄를 짓고 귀양 간 죄수가 도망쳤을 때에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가중처벌을 한 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고을에 쫓아낸다는 기사가 있으며, 묘청(妙淸)의 난에 가담한 자들에게 ‘서경역적(西京逆賊)’, 혹은 ‘서경(西京)’이라는 글자를 얼굴에 새겨 유배보낸 사례도 확인된다. 이로써 고려에서 형벌로서의 자자가 종종 집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절도범이 창궐한 세종 임금 때 자자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럼 신체의 어느 부위에 글자를 새겼을까? 팔꿈치와 팔목 사이, 즉 팔뚝에 자자하는 것이 「대명률」의 규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이나 조선 모두 법전과 달리 팔 뿐만 아니라 얼굴 등 안면에도 문신을 새기곤 했다.

  팔이 아닌 얼굴에 글자를 새기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처벌 효과 때문이었다. 조선초기 떼지어 도적질하는 자들이 늘고 심지어 관물까지 훔치는 등 절도범이 기승을 부리자, 당시 조정에서는 도적에 대한 처벌로 팔에 글자를 새겨 넣어 봐야 옷에 가려 죄인에서 수치심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세종 25년(1443)에 도둑질한 자의 양쪽 뺨에 글자를 새겨 가족과 주변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이처럼 얼굴에 자자하는 것을 특별히 ‘경면(黥面)’이라고 한다. 이후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경면은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잠시 금지된 적이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성종, 연산군 때에 자주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글자를 새기는 방법은 이렇다. 대개 바늘 10여 개를 묶어서 살갗을 찔러 상처를 낸 후 먹물을 칠한 후 베로 그 부위를 싸매고 봉한 후에 죄수를 3일 동안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는 먹의 흔적이 피부 깊숙이 새겨지게 하기 위한 조치로, 행여 죄인이 자자한 곳을 물로 씻거나 입으로 빨아내어 흔적을 지울까 우려해서였다. 자자에 쓰이는 먹물은 어떤 것을 썼는지 분명치 않지만 송나라에서 사용하던 자주색이나 흑색의 식물 액즙이 아닐까 싶다.

  그럼 어떤 글자를 새겼을까? 「대명률」을 보면 관용 창고의 곡식이나 돈을 횡령한 자는 ‘도관물(盜官物)’이나 ‘도관전(盜官錢)’, 백주 대낮에 남의 물건을 탈취한 강도는 ‘창탈(搶奪)’, 일반 절도범에게는 ‘절도(竊盜)’ 두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이 때 새겨 넣는 글자의 크기는 사방 3cm 내외로 하였고, 새겨 넣는 글자의 매획의 넓이까지도 법전에 정해두었다.

  이에 반해 조선에서는 다양한 글자를 새겼다. 일반 절도범에게는 ‘절도(竊盜)’ 두 글자를 자자하였지만, 특별히 훔친 물건이 소나 말일 경우 ‘도우(盜牛)’나 ‘도마(盜馬)’를, 그리고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에게는 ‘도살우(盜殺牛)’와 ‘도살마(盜殺馬)’를 새겼다. 또한 장물아비에게는 ‘절와(竊窩)’와 ‘강와(强窩)’ 두 글자를 자자하였고, 훔친 물건이 관용품일 경우에는 특별히 ‘도관물(盜官物)’을 새겨넣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에 문신형인 묵형이 시행되었는데, <그림 4>에서 보듯이 새기는 글자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였다.


<그림 3> 일본 에도시대에 시행했던 팔에 문신형을 집행하는 장면. 여러 사람의 간수가 동원되었고, 문신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꽤 손이 많이 갔다. 오른쪽에는 문신형을 새기는 장소를 그린 것인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1937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심재우)


<그림 4> 일본에서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지역에 따라 문신하는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사법제도연혁도보』수록.  (ⓒ심재우)

  조선에서 자자형의 시행 대상은 앞서 이야기한 절도범 외에 강도, 공금횡령범 등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자자형은 연산군 때에 이르면 노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즉 도망 노비가 붙잡힐 경우 ‘도망(逃亡)’, ‘도노(逃奴)’, ‘도비(逃婢)’를 새겨 넣었고, 심지어 자신의 집 종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예 미리 ‘아무개 집 종’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또 하나 알아 둘 것은 절도범에게 자자형과 함께 중국 고대의 육형인 월형(刖刑)과 유사한 단근형(斷筋刑)이 조선초기 잠시 시행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단근형은 발뒤꿈치의 아킬레스건을 끊는 형벌인데, 세종 17년에 절도 삼범의 상습범에게 부과하였다. 이는 절도 상습범을 차마 죽이지는 않되 발의 힘줄을 끊어 활동을 부자유스럽게 함으로써 절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이마저도 도벽(盜癖)이 심한 자들에게는 형벌 효과가 크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4년 뒤인 세종 21년에는 왼발의 아킬레스건을 끊는 단근형을 받은 후에도 재차 절도를 저지른 죄인에게 왼발의 앞쪽 힘줄마저 끊게 하는 초강경 대응책이 마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영조, 자자형을 폐지하다

  도적질을 한 자들에게 문신, 즉 자자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같은 형벌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노인과 어린이는 자자 대상에서 빠졌다. 노인과 어린이의 경우 원래부터 매를 맞아야 할 때에도 한 대에 얼마씩 속전(贖錢)을 내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자자의 고통은 매질보다 크기 때문에 당연히 자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판부사 허조(許稠)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11년에 70세 이상 노인, 15세 이하 어린이는 자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다음, 군인과 여자에게도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양반 관료들의 경우도 자자를 면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양반 관료들이 자자형에 해당하는 공금횡령을 저지른 경우에도 실제 자자형이 집행된 경우는 드물었다. 뇌물이나 공금횡령 등이 드러난 전임 남원부사 이간(李侃)이나 황희 정승의 아들 황보신(黃保身) 등에게 세종이 자자(刺字)하는 것만은 특별히 면해준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렇다고 관리라고 자자형을 항상 용서해준 것은 아니었다. 세종 6년에 경상도 선산부사 시절의 비리에 연루된 조진(趙瑨)처럼 실제 자자형에 처해진 사례도 없진 않았다.

  그나저나 자자, 특히 얼굴에 주홍글씨가 새겨지면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자형을 당한 자들의 전해 내려오는 애환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자로 인해 얼굴에 새겨진 글자는 전과자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조상 제사에 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애경사에 왕래할 수도 없었다. 행여 고약으로 흉터를 가리고 갓을 쓰고 나다니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고약이 떼어지고 갓이 부러지는 수모를 겪기 일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도 ‘저 집은 경친 놈의 집’이라고 침을 뱉고, 그 집 아이들이 지나가면 ‘저 놈은 경친 놈의 자식’이라고 따돌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자자형을 당한 사람들끼리 인적이 드문 동대문 안에 움집을 파고 살았으니 그들을 ‘땅군’이라고 불렀다. 땅군들은 빌어먹는 거지노릇을 전전하였으니, 한마디로 천덕꾸러기 인생이었다.

  아무튼 숙종 임금 때까지도 시행되던 자자형은 그후 법조목에만 남았고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조는 자자형을 완전히 폐지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이때가 영조 16년(1740)의 일이었다. 당시 영조는 자자 도구를 모두 불살라버리고 다시 이를 사용하는 자는 엄중 징계토록 하였는데, 이같은 자자형 금지 조치는 당시의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중국에서는 자자형이 1905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니 조선은 그에 비해 한참 앞선 셈이었다.


<그림 5> 청나라 시대에 얼굴에 침으로 글자를 새기는 장면. 오진으로 인해 부친을 잃은 아들이 벌로서 의사의 얼굴에 ‘용의살인(庸醫殺人)’이란 문자를 새기고 있다. (ⓒ심재우)

 

4. 이제 문신도 하나의 패션?

  앞서 보았듯이 조선시대의 자자형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벌이다. 그런데 과거 우리나라에서 문신이 앞서 본 것처럼 반드시 형벌로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팔에 새기는 문신은 사랑의 결속 표시로도 행해졌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바늘로 사랑하는 남녀 서로의 팔뚝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연비(聯臂)’라 부르고 있다. 당시 남녀 간에 문신 행위가 적잖게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연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이보다 한참 앞선 성종 임금 때의 그 유명한 어우동 사건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어우동은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사내들 중 특히 좋아했던 대여섯 명의 이름을 팔에 새겨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이규경이 이야기한 애정문신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드물긴 하지만 효를 맹세하는 행위로 문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 10년(1555) 양양에 사는 김수영(金壽永)이란 효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부모가 죽자 채소와 과일도 먹지 않고 3년간 죽으로 연명했으며, 또 스스로 하늘에 맹세하는 글 132자를 지어 자기 손으로 좌우 무릎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림 6> 세계적인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 졸리는 자신이 입양한 아이들의 태어난 위도와 경도를 문신으로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축구 스타 베컴, 이천수 등도 문신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문신이 형벌이 아니라 독특한 자기 표현으로 사용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일까? 요즘 문신은 여전히 터부시되고는 있지만, 서서히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어우동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젊은 열혈 남녀간에 불변의 애정을 기리는 뜻에서 각각 상대방의 이름을 문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보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필자가 이를 가타부타 탓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만에 하나 그토록 다짐한 사랑의 맹세가 산산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을 때 이미 몸에 새긴 글자는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든 불 고문, 낙형
1. 화상의 추억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모여 알코올 램프에서 물을 가열하는 실험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실험 중간에 실수로 가열한 비이커의 물을 내 팔에 쏟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당시 겨울철이라 맨 살이 아닌 입고 있던 옷에 물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부모가 학교 근처 약국을 하는 같은 반 여학생의 발빠른 대처로 화상 부위에 거즈를 바르는 응급조치도 받을 수 있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물집이 생겼던 기억을 떠올릴 때 아마도 2도 화상이 아니었나 싶다. 상처 부위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아무튼 40이 넘은 나이에도 나의 오른쪽 팔뚝에는 그날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화상은 화상이다. 단언컨대 요즘 교과서에는 그같이 위험한 실험이 분명 사라졌으리라...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잠깐의 해프닝이긴 하였지만, 그 당시 어린 나이에도 화상에 대한 두려움을 실감했다는 점이다. 뜨거운 물이 피부에 닿을 때의 전율! 나는 그 느낌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림 1>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서울여대 정연식 교수의 저서. 조선시대 생활 문화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당대의 형벌, 고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초등학생 시절 화상의 추억을 들춰낸 이유는 이 글에서 과거 불을 이용한 형벌이나 고문을 소개하고자 해서이다. 과거 서양에서 불을 이용한 형벌로 화형(火刑)이 있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조선시대에 뜨겁게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인 낙형(烙刑)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다. 이 글에서는 화형, 낙형의 사례를 차례로 설명하기로 한다.

 

2. 이단 재판, 그리고 화형

  잘 알려진 것처럼 화형은 죄인을 산채로 태워 죽이는 형벌로서, 중세의 유럽, 인도, 아시아 등 각지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전통시대 형벌 가운데 무시무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만은 생각할수록 끔찍한 것이 화형이다.

  화형은 일찍이 로마제국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할 때 종종 자행하던 형벌이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방화범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칙에 의거하여 화형으로 처단하곤 했다. 그러다 중세 유럽에 와서는 화형의 적용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이단을 심문하거나 마녀재판 시에도 사용하였다.

  화형 집행 방법이야 대강은 알고 있겠지만 프랑스의 사례를 좀 더 실감나게 소개하면 이렇다. 화형에 처할 죄수가 있을 경우 미리 선정된 장소에다 화형집행대에 해당하는 기둥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키 높이까지 짚과 장작을 몇 겹씩 쌓아올린다. 물론 기둥 주변에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죄인을 묶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다.

  죄수에게는 불에 잘 타게 하기 위해 죄수복 대신 유황이 칠해진 셔츠를 입혔다. 이윽고 죄수를 줄과 쇠사슬로 기둥에 단단히 묶은 후에는 죄수가 들어가던 입구 통로까지도 짚과 장작으로 채워 넣었다. 이렇게 한 후에 불을 붙이면 사방의 장작더미가 일시에 붙이 붙었다고 한다.


<그림 2> 프라하의 얀 후스 동상 ;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으며,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광장의 상징물이다. 얀 후스는 카톨릭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다가 화형당한 순교자로서, 체코에서 높이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산 사람을 화마 속에 넣는 행위가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마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과 상식으로는 그렇게라도 해야 할 몹쓸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아무튼 이처럼 잔혹한 화형이 과거 적지 않게 행해졌음은 세계사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몇 몇 인사들을 열거해 보면 알 수 있다.

  15세기 전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여졌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위해 앞장서 싸웠던 그 유명한 잔 다르크가 훗날 이단으로 지목되어 화형에 처해졌으며, 체코의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도 교황 등 교회지도자들의 부패를 비난하다 교황에 의해 파문당해 1415년에 화형으로 생을 마감한 분이다.


<그림 3> 화형 집행 장면 ; 서양에는 화형에 관한 그림이 많다. 이 그림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 인디언들에게 화형을 집행하는 장면을 그린 동판화이다. 1620년. 『도설 중국혹형사』 수록.

  이단자에 대한 심문과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도 화형 집행은 종종 있었다. 당시 화형에 처해질 희생자들 중에는 먼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이단자들은 산 채로 화형을 당하기 일쑤였다. 『고문실의 쾌락』(자작출판사, 2001)이라는 책자에 보면 1796년 1월에 있었던 이단자에 대한 화형 집행 장면을 목도한 사람의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에는 화형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처형은 정말 잔인했습니다. 여자는 화염에 휩싸여 한시간 반, 남자는 한시간 이상 산 채로 고통 속에 몸부림쳤습니다... 죄인이 계속해서 갈구하는 것은 단지 몇 더미의 장작을 더 태워달라는 것뿐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화염은 타버린 만큼의 장작만 보충하면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탔습니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줄지도 않았고 땔감이 더 많이 허락되어 죽음이 앞당겨지지도 않았습니다.”

  한편 에도막부 시절의 일본에서도 방화범에게 화형을 집행하였다. 다만 일본에서는 <그림 4>에서 보듯이 기둥에 죄수를 묶기 위해 대나무와 새끼줄을 이용하여 거꾸로 된 U자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 4> 일본에서의 화형 ; 에도시대 화형 집행 장면, 화형 집행대 등을 그린 그림이다. 『사법제도 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3.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 낙형

  생을 마감하게 하는 형벌인 화형만큼은 아니지만, 이제부터 이야기할 낙형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모진 고문의 하나였다. 낙형(烙刑)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뜨겁게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이다. 낙형처럼 불을 이용한 고문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겨드랑이 아래에 삶은 계란을 끼워 놓는 고문, 용의자의 손가락에 양초를 매달아 태워서 양초와 피부가 동시에 타들어가도록 하는 고문 등이 있었다.

  흔히 낙형을 단근질이라고 하는데, 본래 단근(斷筋)은 도둑의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서 다시는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앉은뱅이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이 발뒤꿈치 힘줄을 끊는 단근질과 유사하기 때문에 낙형을 단근질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와전된 말이다.


<그림 5> 남원시 춘향테마파크의 감옥 모습 ; 남원시의 관광지 중 하나인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부의 감옥을 재현한 세트장이다. 2008년 여름 휴가 때 찍은 사진으로 죄수들을 매질하던 형틀도 보인다. 요즘 사극에서 죄인을 고문, 형벌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고문할 때 대개 신장(訊杖)이라는 매를 이용하였고, 매질 횟수 등에 있어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자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다른 고문들이 관습적으로 행해졌으니, 그 중 견디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낙형이었다. 사극 등에 보면 숯불에 달군 쇠로 죄수의 온몸을 지지는 고문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원칙적으로 낙형은 발바닥만을 지질 수 있었다. 이를 『숙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하고, 인현왕후를 폐하는 대신 장희빈을 중전으로 정하였다. 이 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 86인이 상소문을 올리고 극력 반대하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숙종은 이 해 4월 25일 한밤중에 상소문 주동자들을 인정문 앞으로 붙잡아 오게 하여 친히 국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으로 지목된 박태보가 신장, 압슬에도 굴하지 않자 숙종은 박태보의 옷을 벗기고 낙형 도구를 가져와 온몸을 두루 지지도록 지시하였다. 이 때 옆에서 지켜보던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은 규정상 낙형은 발바닥을 지질 뿐이라고 만류하여 겨우 진정되긴 했지만, 이미 박태보의 양 다리를 비롯해 여러 곳이 타들어 간 뒤였다. 결국 박태보는 이 날의 모진 고문으로 진도에 유배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인 낙형은 조선 조정에서 이른 시기부터 등장한다. 『성종실록』에 난신적자(亂臣賊子)와 같은 대역 죄인을 심문할 때 썼던 관례가 있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이미 15세기에 취조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후에도 자복을 하지 않는 질긴 죄수들에게 낙형으로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연산군과 광해군 때에 낙형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끔찍한 고문 방식의 하나인 낙형을 가하는 장면은 각종 악형(惡刑)을 상당수 금지시킨 영조 때 조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영조가 낙형을 금지시킨 직접적인 이유가 재미있다. 1733년(영조 9) 8월에 영조는 종기 때문에 여러 번 뜸을 떴는데 뜸을 뜰 때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 뜸뜰 때의 괴로움을 낙형의 고통과 클로즈 업 시키면서 마침내 앞으로 죄수를 국문할 때 낙형을 쓰지 말 것을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림 6> 청나라 말기 『점석재화보』에 실린 절에서의 화형 장면 ; 주지 스님의 방사(房事)를 목격한 소승의 입을 막기 위해 이들 두 명을 장작더미에 올려 화형시키려 하는 장면이다. 가운데 횃불을 든 자가 주지이다. 『도설 중국혹형사』 수록.

  그럼 이웃 나라 중국은 어땠을까?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포락(炮烙)이라 하여 불을 이용한 고문을 썼다. 이미 은나라 때 주왕이 동으로 된 기둥을 숯으로 달구고 맨발의 죄수를 그 위에 걷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후에도 관리들이 죄수를 심문할 때 인두나 달군 가위 등을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17세기 명나라 때에는 ‘홍수혜(紅繡鞋)’라는 신발이 등장했다. 홍수혜를 풀이하면 예쁜 붉은 자수 신발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사실은 숯불 속에서 새빨갛게 달둔 쇠신발을 지칭하였다. 이처럼 당시 달궈진 쇠신발을 피의자에게 신겨 발 가죽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줌으로써 자백을 강요하는 일도 있었다.

 

4.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전통시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두뇌가 고안할 수 있는 잔혹한 고문이나 형벌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앞서 화형, 낙형 등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불을 이용한 형벌이나 고문도 그 가운데 하나리라. 지금은 그같은 잔혹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화상의 공포를 이야기했지만,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흘러 나의 불에 대한 공포와 충격은 대학 1학년 때 다시 찾아왔다. 화상처럼 나 자신의 피부를 덮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강도는 초등학교 시절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것이었다. 바로 이 무렵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그것이었다.

  1970,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야 다 경험한 이야기겠지만 80년대 후반 학생들이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적지 않게 분신(焚身)을 감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경우 대학에 입학한 지 한 학기도 되지 않는 사이에 세 명의 분신자살을 소식으로, 눈으로 접했다.


<그림 7> 이동수의 분신 ; 1986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경 이동수가 서울대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하여 투신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국일보 권주훈 기자가 찍었고, 제18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사진이다.

 

  1986년 4월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등 반미 시위를 주도하던 김세진, 이재호가 신림동 사거리에서 시위 중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식도 잠깐, 5월 20일에는 서울대 오월제 기간 중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의 문익환 목사 연설 도중 원예학과 이동수가 온 몸에 불을 붙이고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 투신하는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 때 그것은 화상의 공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참혹, 분노, 좌절, 절규...

  이로부터 5년 후인 1991년 5월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분신자살을 생명을 담보로 하는 민주화 투쟁이라 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김지하의 지적처럼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던져 스스로를 산화하면서 외쳤던 그들의 절규가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나는 늦었지만 다시 되돌아 보고 싶다. 화형과 낙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분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무원록』과 조선시대의 검시
1. 범죄추리물, 대중의 관심을 끌다

  2006년 이후 경기 서남부 일대에서 실종된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으로 요즘 전국이 시끄럽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몇 년전까지만 해도 범죄심리학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살인을 무려 일곱 번이나 저지르고도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는 피의자를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인 ‘사이코패스’로 정의하는가 하면, 연쇄살인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범죄심리 분석관 ‘프로파일러’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증대하였다.

  범죄가 갈수록 지능화되면서 범죄 물증 확보하기 위해 일선 경찰서의 과학수사팀의 역할도 한층 강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은 범죄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휴지, 담배, 침, 발자국 등을 수집하는가 하면, DNA 분석을 위해 핏 자국이나 머리카락 등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의자로부터 연쇄살인을 자백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피의자 트럭에서 발견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의 것과 동일한 DNA를 갖는 혈은이었다.

  차마 떠올리기 싫은 현실의 잔혹한 범죄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스릴과 공포를 느끼게 해준다는 이유에서인지 갈수록 각종 매체들에서 쏟아내는 범죄 추리물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림 1> 영화 『혈의누』 포스터
; 2005년에 개봉한 김대승 감독의 범죄 스릴러물이다.

  미국 CBS에서 성공리에 방영되던 과학수사 관련 드라마인 『CSI 과학수사대』는 우리나라에서도 MBC와 OCN 등에서 시즌별로 방송 중에 있다. 적지 않은 매니아를 확보하고 있는 『CSI 과학수사대』가 현대 미국의 과학 수사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면, 우리가 별로 주목하지 못했던 과거 우리나라의 범죄 수사 모습을 생생하게 극화하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작품들로 영화 『혈의 누』, 드라마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이 있다.


<그림 2> 드라마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 2007년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2005년에 개봉된 영화 『혈의 누』는 1808년 조선의 외딴 섬마을인 동화도에서 5일간 일어났던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영화배우 차승원은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수사관으로 등장한다.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은 한마디로 ‘조선판 CSI’라는 평가를 받는 추리 드라마이다. 2007년부터 케이블채널에서 상영된 이 드라마는 갑오개혁 이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살인사건을 과학적으로 수사하여 해결해가는 수사팀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는 조선과학수사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살인사건 피해자의 사망 원인을 정확히 확정하고, 증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도대체 이들 범죄추리물의 시나리오는 어떤 자료에 근거해서 만들어졌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시체 검시 및 과학 수사 방식이 당시 실상을 보여주는가?

 

2.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 절차는?

  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신중하고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런 점에서 앞서 소개한 조선시대 범죄추리물에 등장하는 시체 검시 및 수사 기법은 비교적 역사적 고증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실제로 조선시대 살인 사건의 검시 및 수사 절차가 어떠했는지를 당시 법의학 지침서로 쓰인 『무원록(無寃錄)』과 조선시대 사체 검시 보고서인 『검안(檢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시대에 변사 사건이 발생하여 관에 신고가 들어오면 즉시 사건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차 수사는 시신이 놓여진 장소의 관할 관리가 담당하였는데, 서울의 경우 지금의 구청장 급에 견줄 수 있는 부장(部長)이, 지방의 경우 시장․군수에 해당하는 고을 수령(守令)이 수사를 총괄하였다. 지금이야 수사를 맡은 검찰, 경찰이 행정부로부터 일정하게 독립되어 있었지만, 행정권과 사법권, 수사권 등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는 당시로서는 행정기관의 수장이 강력사건 수사까지도 떠맡고 있었던 셈이다.

  사건 현장에 관리가 출동할 때에는 아전들을 보조 인력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들은 시체를 다루는 일에서부터 관련자 심문 등의 제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때 사건 수사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시체의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격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검시는 사망 원인 파악이 핵심이요, 관련자 진술은 그 다음이다”라는 말처럼 당시 사람들은 두 가지 중에서 왜 죽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더 중시하였다.


<그림 3> 시신의 검시
; 조선시대 시신을 검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검시 초기에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미세한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시신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술찌꺼기, 식초, 물 등을 이용하여 시신의 몸을 세척하였다. 우측 상단의 관복을 입은 자가 검시의 총책임자이며, 하단에 붙잡혀 온 자는 살인 피의자로 보인다.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싸늘한 시신을 앞에 두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가려내고, 행여 억울한 죽음은 아닌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적 지식이 총동원될 필요가 있었다. 『무원록』은 이 때 참고해야 할 필수적인 책자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원래 시체 검시의 방법을 상세히 기록한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에서 간행한 법의학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자가 본격적으로 검시에 활용된 때는 조선 세종 임금 때 우리 실정에 맞게 주석을 단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조선후기 영조 임금 때에는 시대 변화에 맞게 내용을 보완한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편했고, 정조 임금 때에는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까지 제작되었다.


<그림 4> 『무원록』의 현대 번역본들
;『무원록』의 언해본은 1975년 법제처에서 법제자료로 영인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언해』에 대한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좌측이 『신주무원록』(김호 번역), 우측이 『역주 증수무원록언해』(송철의 등 번역).

  사망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무원록』에서는 시체의 머리부터 검안하기 시작하여 신장과 얼굴의 빛깔, 팔과 다리, 피부의 손상 여부 등 모든 신체 부위를 상세히 살펴보고 조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요즘처럼 첨단 장비와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무원록』에서는 사망 원인 조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검시용 재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 검시용 재료를 응용법물(應用法物)이라고 하는데, 술, 술찌꺼기, 식초(醋), 소금, 초(椒), 파, 매실, 감초, 토분(土盆), 망치, 탕수기(湯水器), 목탄, 백반, 백지, 솜, 거적자리, 닭, 가는 노끈, 재, 분기(盆器), 자, 은비녀 등이 그것이다.

  검시 재료를 동원하여 시신의 사망 원인을 확정하고, 목격자를 비롯한 관련자들의 심문을 종합하여 상부 관서에 보고하면 1차 수사는 끝이 난다. 그러나 사람의 인명이 달린 살인 사건의 경우 시신 검시와 수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2차 검시는 수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동일인이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에 따라 지방의 경우는 이웃 고을 수령이, 서울의 경우는 한성부의 낭관(郎官)이 맡았다. 두 차례의 검시를 통해서도 사망 원인이 애매한 경우에는 심지어 3차, 4차 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끝으로 이들 수사 기록을 종합하여 사건의 최종 판결을 내리는 사람은 국왕이었다.


<그림 5> 칼을 차고 있는 죄인 사진
; 조선시대에 살인 등 중죄인의 경우는 감옥에서도 칼을 차고 있었다. 아울러 증거가 명백한데도 자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합법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도판의 사진에 나오는 죄수의 죄명과 촬영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생활과 풍속』(서문당) 수록.

  이상 조선시대 이루어진 일련의 수사, 검시 절차를 살펴볼 때 형사 재판에서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죄수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적지 않게 제도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삼가고 신중하라는 ‘흠휼(欽恤)’ 정신이 녹아있다고나 할까...

 

3. 『무원록』을 통해 본 조선시대 검시

  현대 사회에서 수사는 일종의 과학이다. 살인 등 강력사건이 날 때마다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우리나라 첨단 과학수사를 이끄는 곳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과학수사 전담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고 원님들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처리하였는데, 앞서 소개한 『무원록』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먼저 궁금한 것은 사망 시간을 어떻게 단정했을까 하는 점이다. 『무원록』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과 소요 기간을 정리해두어 이를 통해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었다.

  시신은 크게 세 단계의 부패과정을 거치는데 읽기 거북하겠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먼저 얼굴이나 배 등 피부색이 누렇게 혹은 파랗게 변하는 단계, 코와 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배가 팽창하고 몸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단계, 마지막으로 부패가 더욱 진행하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패하는 기간은 계절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한여름에는 부패가 빨리 진행되어 3-4일 만에 3단계의 부패가 모두 진행되는 반면, 겨울에는 1단계를 거치는 데도 4-5일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그림 6> 검시할 때 살펴보아야 할 시신의 앞, 뒷면
;『무원록』에 나오는 사망자의 신체 부위를 그림으로 그린 시형도(屍型圖)이다. 앙면(仰面)은 앞면, 합면(合面)은 뒷면을 말한다. 검시관은 이 시형도에 나오는 각 신체부위의 상태를 『검안』에 꼼꼼하게 기록해야 했다.

  다음으로 육안으로 기본적인 사망 원인을 판별하는 핵심은 시체의 몸 색깔이었다. 『무원록』에서는 사망 원인에 따라 얼굴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검시관은 무엇보다 시체의 안색 등을 잘 살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예컨대 얻어맞아 죽은 경우는 시신이 적색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며 독살이나 질식사의 경우 청색, 병사한 경우는 황색, 시신이 부패한 경우는 흑색을 띤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살해한 후에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로 목을 맨 시체의 경우 기혈(氣血)이 통하지 않아 백색을 띤다는 주의사항도 적고 있다.

  한편, 몸 색깔과 함께 시신에 나타난 상처나 흔적은 중요 관찰 대상이었다.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검시하는 과정에서 앞서 제시한 검시용 재료 중 술찌꺼기, 식초 등이 활용되었다. 먼저 술찌꺼기, 식초 등을 시체에 씌우고 죽은 자의 옷가지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끓인 식초와 술을 부어두면 식초와 술 기운이 스며들어 시체가 부드러워진다. 이 때 물로 술찌꺼기와 식초를 제거하는데, 이럴 경우 잘 보이지 않던 상흔도 찾아낼 수 있었다.

 『무원록』에는 이밖에도 흥미로운 수사 기법이 소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들께서는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본을 참고하길 바라며, 여기서는 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화학물질을 활용해 혈은을 찾는 방법이다. 살인자가 사용한 흉기로 의심되는 깨끗한 칼을 숯불로 달군 후 그 위에 고농도의 식초로 씻어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내게 하는 수사이다. 이는 혈액의 단백질 성분이 산에 노출되면 응고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오늘날 과학수사팀의 현장 감식 과정에서 혈은을 찾기 위해 ‘루미놀’이라는 질소화합물을 이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림 7> 부인에 의해 독살되는 남편
;『금병매(金甁梅)』에 나오는 독살 장면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독살되었어도 병사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검시관은 은비녀 등을 이용해 타살 여부를 밝혀야 한다. 『중국인의 사체관찰학』(웅산각, 일본) 책자에 수록.

  다음 중독사의 판별을 위해 은비녀, 혹은 살아있는 닭과 백반을 활용하는 것도 기발하다. 사실 독에 반응하는 은의 성질을 이용하여 은비녀로 독살 여부를 살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방법이다. 독살이 의심스러운 경우 은비녀를 취엄나무 껍질로 삶은 물로 깨끗이 씻은 후 죽은 자의 목구멍에 넣어두고 입을 종이로 봉한다. 얼마 후 은비녀를 빼냈을 때 색이 푸른 빛을 띤 검은색으로 변하면 독살이 분명하다.

  독살을 살피는 다른 방법으로 제시한 닭과 백반 이용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즉 백반 한 뭉치를 죽은 자의 목구멍에 넣었다가 한 두 시간 후에 꺼내어 닭에게 먹여서 닭이 죽으면 독살로 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백성 중에 이렇게 실험한 닭을 먹는 사건이 발생했는지 영조는 1764년(영조 40)에 앞으로 닭을 이용한 방법을 가능한 쓰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4. 『검안』, 그리고 격동기 근대

  지금까지 조선시대 살인 사건의 처리 절차, 시신에 대한 검시 과정을 『무원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았다. 앞서 제시한 사례 등을 종합할 때 조선시대 변사 사건 수사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만큼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생활 속에서 얻은 과학 지식이 실제 검시 및 수사에 적극 활용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사건 수사 및 검시 과정에서 시대적 한계도 적지 않았다. 먼저 변사자에 대한 검시가 종종 생략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선조 34년(1601)에는 수령이 관하 백성을 형벌로 다스리다가 죽은 경우 굳이 검시까지 하지는 말 것을 규정으로 만들었으며, 영조 28년(1752)에는 연좌되어 유배지에 머물던 양반집 부녀자가 죽은 경우에 검시하는 것은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라 판단하여 이 또한 검시를 중지시켰다. 이들 조치 모두 나름의 이유는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려 했다면 이같은 조치는 적절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행했던 검시 방법 중 의학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 법의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원록』에서 언급한 사망 원인에 대한 진단에 섣부른 일반화가 종종 눈에 띤다고 한다.

  특히 『무원록』에는 핏방울의 응고 여부로 부모자식, 형제자매 여부를 판명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예컨대, 부모의 해골 위에 자식의 피를 물방울처럼 떨어뜨리면 친자식인 경우 피가 해골에 스며들며 아닌 경우는 스며들지 않는다는 주장이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림 8> 1905년 강원도 철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검시 보고서
; 철원군수가 칼에 찔러 죽은 자의 시신을 검시하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확보하여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린 검시보고서이다. 원본은 대검찰청에 소장되어 있고, 도록 『한성판윤전』(서울특별시립박물관, 1997)에 도판이 실려 있다.

  아무튼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대한제국기에 발생한 살인사건의 검시보고서인 『검안』이 수백 종 보관되어 있어, 실제 구한말 사건 수사 내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각종 범죄추리극, 범죄 및 수사 관련 대중서들도 이들 자료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최근 쏟아지고 있는 영상물이든 책자이든 간에 시대적 맥락을 추적하기 보다는 엽기적이거나 극단적인 사건을 침소봉대하거나, 조선시대의 과학적 수사기법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20세기 전후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와중에 기층 사회 구성원들의 삶과 갈등 양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역사학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이 당시 범죄 사건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거대 사회변동 양상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복원되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머나 먼 유배 길 -조선의 유배 (1)
1.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 유배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르미 벤담. 우리에게 공리주의자로 잘 알려진 그는 1791년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것을 설계하였다. 파놉티콘의 구조는 감옥의 중앙에 감시탑을 세우고 원형의 벽면 둘레에 죄수들의 감방을 배치하는 형태로, 감방은 밝게 하고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해서 죄수들이 교도관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자연히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들은 보이지 않는 감시탑 속의 누군가로부터 늘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벤담이 설계한 뒤 별로 주목받지 못한 파놉티콘 감옥은 훗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푸코는 잘 알려진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이 파놉티콘의 감시 체계를 사회 전체를 해석하는 데 활용하여,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권력자가 만인을 감시하는 거대한 감금사회, 감시사회로 이해하였다.


<그림 1> 파놉티콘 :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의 설계도. 『감시와 처벌』(강원대 출판부, 박홍규 번역) 앞부분에 실려 있다.

  사회에 대한 푸코의 진단이 과연 적실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근 들어 전자주민카드, 전자출입증 등 각종 전자문서를 통한 권력기관의 개인 사생활 파악이 가능해지면서 푸코의 경고는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지적처럼 이제 가정,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은 감옥과 다름없는 또 하나의 감시 통제기구일지도 모르겠다.

  푸코의 심오한 철학적 담론은 제쳐두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죄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대표적인 감시 기구가 감옥이란 사실이다. 우리나라 현행 형법에 등장하는 형벌은 사형, 징역, 금고, 자격상실, 자격정지, 벌금, 구류, 과료, 몰수 등 모두 9종인데, 사형 다음의 무거운 형벌인 징역과 금고는 감옥살이를 의미한다. 다만 같은 감옥살이라 하더라도 죄수들이 일을 해야 하는 징역형에 비해, 노역에서 면제된 금고형이 더 가벼운 형벌이었다. 그럼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에도 감옥이 있었지만, 감옥은 형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를 가둬두는 곳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구치소인 셈이다. 따라서 기결수를 가둬둘 감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사형보다 한 단계 아래의 큰 죄를 지은 자들에게 별도의 형벌로 다스렸는데, 그것이 바로 유배형이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다섯 가지 형벌로는 사형(死刑), 유형(流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유형이 바로 유배형을 말한다.


<그림 2> 섬으로 보내지는 죄수 : 일본 에도시대에도 조선시대 유배와 같은 추방형이 있었다. 추방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은 ‘엔토(遠島)’, 즉 멀리 떨어진 섬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에도시대의 고문형벌』(어문학사, 임명수) 86쪽에 실려 있다.

  그럼 유배형은 어떤 형벌인가? ‘귀양’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유배형은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 보내 종신토록 살게 하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오해가 있다. 유배형은 양반들에게만 행해진 형벌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치범으로서 양반 관료들이 유배된 사례가 많긴 하지만, 일반 평민, 천민들도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다. 또 하나. 조정에서 뿐 아니라 지방의 관찰사 직권으로도 형사 잡범에게 유배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유배형은 형기가 종신이라는 점, 유배지에서 노역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로 치면 ‘무기금고’에 비유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유배형이 지금과 같은 좁은 감옥살이에 비해 훨씬 나았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나름의 적지 않은 애환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조선시대 독특한 형벌인 유배형의 특징은 무엇인지, 유배지 선정과 죄수들의 실제 유배길은 어떠했는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이름난 유배지들

  먼저 유배형의 등급부터 알아보자. 유배형은 죄인의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등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3천리 밖으로의 유배가 가능했는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워낙 땅이 넓다보니 세 등급으로 유배 보내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죄수가 정해진 유배지로 이동할 때 빙빙 돌고 돌아 해당 리 수를 채우게 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세종 12년(1430)에는 등급별로 유배지를 정해버렸다.

  예를 들어 죄인이 전라도에 사는 경우의 유배지로는 경상도, 강원도, 내지 함경도 고을이나 해변으로 한정하였는데, 다른 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각 대상 유배지가 정해졌다. 이 세종 때 규정에 따르면 ‘유 2천리’는 거주지로부터 6백리 밖 고을, ‘유 2천 5백리’는 7백 5십리 밖 고을, ‘유 3천리’는 9백리 밖 해변 고을이 유배지가 된다. 말이 3천리이지 실제 유배지는 9백리 밖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수교정례(受敎定例)』 현종 13년(1672) 수교에서 보듯이 현종 때에는 최소한 1천리 밖으로 유배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법에 정한 유배지 조항은 후에도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었다. 또한 실제 운영 면에서도 원칙과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유배지를 배정하는데 정실이 개입되어 거주지 인근 고을에 형식적으로 유배 보내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아예 서울 근교인 강화도 교동(喬桐)은 왕족들의 유배지로서 유명하였다.

  사실 조선시대 거의 전 국토가 유배지였다.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유배지의 거리, 유배지로의 이동 경로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의금부노정기(義禁府路程記)』를 보면 336개 고을이 유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 조선시대 유배지로 이름난 전라도 여러 섬들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은 유배인들을 종신토록 격리시키기엔 안성마춤이었다.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청년사, 정연식) 179쪽 수록.

  유배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곳으로는 아무래도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변경 고을이나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등 전라도의 외딴 섬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은 거리도 거리지만 워낙 변두리이다 보니 해당 지역 사람들이 살기에도 기후나 물자 등 생활 여건이 열악하였다.

  특히 섬 지역은 육지와 차단되어 있어서 유배인들의 배소 이탈 염려가 없는 최적의 유배지였다. 반면, 유배인들에게는 운 좋게 중간에 사면되어 유배에서 풀려나거나 죽지 않는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땅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아무리 먼 유배지라고 하더라도 변경 지역이나 해안 마을에 죄인을 유폐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이들 지역 대신에 섬 지역으로의 도배(島配)가 크게 늘었다.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유배지로서 애용되었다.

  특히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인 제주도는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조선시대 많은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관리 뿐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조 반정으로 쫓겨난 국왕 광해군의 최종 유배지도 제주도였다. 처음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군은 몇 차례 옮겨 다니면서 15년을 떠돌다가 1637년 제주도에 들어와 67세의 나이로 병사하기 까지 3년 여를 이곳에서 지냈다.


<그림 4> 제주도의 오현단 :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관리로 부임하여 이곳 학문과 교육 진흥에 공헌한 다섯 분을 기리고 있는 제단.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헐린 귤림서원(橘林書院)이 있던 곳이다.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추앙하는 조선시대 다섯 분 관리들의 위패가 모셔진 ‘오현단(五賢壇)’이 있다. 여기에 모셔진 제주 오현은 김정(金淨),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 송인수(宋麟壽), 송시열(宋時烈) 등인데, 이 가운데 김정, 정온, 송시열 세 분이 유배인이다. 제주도에서 유배인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의 3개 읍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가운데 특히 대정현으로 유배객이 주로 몰렸다. 이 곳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드세고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죄인을 종신 유폐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많은 유배객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대정현의 포구 모슬포를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 빗대어 ‘못살포’라고 했을까?

  제주도 외에도 유배지로서 악명을 떨친 곳으로는 전라도 연안의 망망대해 외로운 흑산도, 추자도, 거제도, 신지도 등 조그만 섬들이었다. 이 중 제주도, 거제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유배지로 일컬어지는 흑산도는 오늘날 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흑산도 아가씨’로 유명한데,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하였다.

  좁은 땅에 극도로 열악한 생활환경, 육지 소식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 없는 외롭고도 쓸쓸한 처지. 아마도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며 속이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가사처럼 유배객들의 가슴도 이곳에서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추자도는 정조 때 귀양간 대전별감 출신 안조환(安肇煥)이 쓴 유배가사에 ‘하늘이 만든 지옥(天作地獄)’으로 묘사될 정도로 최악의 유배지 중 하나였다. 이밖에 거제도, 신지도 등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들도 흑산도, 추자도와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중죄를 진 유배인들이라도 열악한 섬에 평생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했다. 그래서 중간에 절도(絶島)에 유배보내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영조는 1726년(영조 2)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에 유배보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보다 2년 뒤에는 관아도 없고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만 섬에는 유배보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고종 초기에 만들어진 『대전회통』에서는 추자도, 제주목 유배를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림 5> 『대전회통』에 나오는 유배지 제한 조치 : 빨간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이 흑산도, 추자도 등 섬 지역에는 유배객을 보내지 말도록 하는 규정이다. 『대전회통』 형전 「추단(推斷)」 항목에 실려 있다.

  그렇지만 규제 조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이들 섬들에 유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이 순조 1년(1801) 천주교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된 일은 유명한 일이거니와, 고종 때 최익현, 김평묵, 김윤식 등 상당수 지식인들의 경우 『대전회통』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로 귀양가곤 했다.

 

3. 머나 먼 유배 길

  앞서 언급했듯이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료들에게 한 두 번의 귀양살이는 흔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조선시대 당파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연루된 지식인들 상당수가 경험한 유배! 그럼 이들 유배죄인들의 유배지까지의 노정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먼저 유배인이 관원 신분일 경우 호송 책임은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평천민은 형조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같은 관원이라도 등급에 따라 호송관이 달랐는데, 정2품 이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 이상 고위 관원은 의금부 도사(都事)가 맡았다. 그리고 이외의 관원들의 경우도 당상관은 서리(書吏), 당하관은 나장(羅將)이 나누어 맡았으며, 관직과 무관한 평천민은 지나는 고을의 역졸(驛卒)이 번갈아가며 호송을 책임졌다.

  지금처럼 편리한 교통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상, 죄인들이 유배지까지 하루 이틀 만에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수 십일이 소요되는 게 예사였다. 규정상 하루 평균 8, 90리는 가야했기 때문에 이동 수단으로는 말이 자주 이용되었다. 그럼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은 누가 충당했을까?

  유배지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비용은 대개 유배인 자비로 해결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 압송관의 여행 경비까지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압송관 입장에서도 죄인의 압송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으므로 으레 수고비를 챙겼다.

  이는 유배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선조 때 광해군 책봉을 건의한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몰려 1591년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된 홍성민(洪聖民)의 경우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 옷가지와 음식물 등을 장만하기 위해 가산(家産)을 턴 상황을 문집에 남기고 있다.

  한편, 어떤 직책,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 압송관도 달랐듯이 유배지로의 긴 여행길도 죄인 처지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랐다. 평천민 대부분의 유배 길은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못지 않게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이동하는 것은 예사였으며,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은 관리, 제법 힘깨나 쓰던 돈 많은 양반들의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지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지나는 길에 선산(先山)에 들러 성묘를 하거나 중간에 며칠씩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조선대 김경숙 교수의 유배 일기 분석에 따르면 관직자들의 유배 길은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간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 가득했으며, 심지어 호화판 유람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경종 2년(1722)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甲山) 유배 길에 오른 윤양래(尹陽來)의 경우 전체 18일 여행 동안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부터 후한 접대는 물론 많은 노자를 받았다.

  그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물자를 제공받았던지 수령이 챙겨준 물건을 싣고 가던 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심지어 윤양래의 호송관인 의금부 도사는 같이 동행하지 않고 별도로 출발했으며, 중간에 험준한 고갯길에서는 자신이 타고 가던 가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림 6> 조헌 신도비 : 충북 옥천에 있는 조헌 묘소 앞의 신도비. 충북 유형문화재 183호

  선조 22년(1589)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된 조헌(趙憲)은 경유지인 안변(安邊)에서 부사(府使)와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날 술이 깨질 않아 출발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광해군 10년(1618)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북청(北靑) 유배 길에 오른 이항복(李恒福)은 가는 길에 함흥(咸興)과 홍원(洪原)에서 기생 덕선(德仙), 조생(趙生) 집에서 묵기도 하였다. 특히 기생 조생(趙生)은 이전에 유배객 윤선도(尹善道)와의 술 자리로 인해 그 총명함이 서울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이항복은 유배 가는 길에 일부러 그녀를 만나는 호사를 부렸다.

<그림 7> 백사 이항복 초상화 : 필자 미상의 이항복 초상화. 광해군에게 인목대비의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던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으며, 5개월 만에 병사하는 불운을 맞는다.

  한편, 섬으로 떠나는 유배 길은 육지와는 사정이 또 달랐다. 간혹 파도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객을 실은 배가 풍랑 때문에 표류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전라도 관찰사나 제주 목사의 보고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들어갈 때에는 전라도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출발하여 보길도, 소안도, 진도 등을 경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거센 바람 때문에 몇 일 씩 배를 띄우지 못해 지체하기도 했으며, 풍랑에 떠밀려 제주도의 어느 포구에 도착할 지도 일정하지 않았다.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아우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라도 강진을 출발해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한 사실에 안도한 것을 보면 제주 유배 길은 그곳 생활만큼이나 힘든 여정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유배 길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 힘깨나 쓰던 관리인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이 다소 해소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마음까지 홀가분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다.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떠나는 길인만큼 배소(配所)에서 벌어질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조선의 유배 (2)
1. ‘권불십년’을 되새기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잊을 만하면 한번 씩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정치인들의 비리 소식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다.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 넘기기 힘들며, 권력은 기껏해야 십년을 가지 않는다는 너무나 상식과도 같은 이야기!

  그런데 재임 중에 유난히 도덕성을 강조한 참여 정부 시절의 대통령과 연루된 금품 수수 관련 최근의 의혹은 정치 보복적 성격, 살아있는 권력과의 처벌의 형평성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로 국민들에게 주는 충격이 크다. 과연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한국 현대사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권력의 무상함은 과거 조선시대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한 때 권력을 틀어 쥔 수많은 조선시대 정치인들이 사화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각하는 불운을 겪었다. 때론 권력형 비리로 인해, 때론 반대파란 이유 만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그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상당수는 기약 없이 외딴 곳에 유폐되어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했다.


<그림 1> 조선시대의 기본 형벌 :『대명률』에 나오는 태, 장, 도, 유, 사형의 다섯 형벌을 말한다. 이 중 유형이 곧 유배형이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여러 조선의 정치인들이 겪었던 유배형은 자신의 생활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에 처박혀야 하는 종신 추방형이었다. 조정에 복귀할 가능성이 큰 자인가 실세한 인물인가에 따라, 그리고 관리 신분인가 일반 무지렁이인가에 따라 유배 길에서의 이들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고, 당연히 유배지로의 노정은 물론 유배지에서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몇 년 전에 유배가사의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귀양살이의 여러 면모들을 생생하게 밝힌 서울여대 정연식 교수의 글이 제출되었다. ‘권불십년’의 가르침이 절실한 오늘, 정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추적함으로써 권력의 무상함과 아울러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의 삶의 교훈을 되짚어보면 어떨까?


<그림 2> 명나라 정치범의 감옥행 : 명나라에서 출판한 『의열기(義烈記)』에 나오는 삽화 일부분으로, 오른쪽에 수갑을 차고 줄에 목을 맨 죄인의 정확한 죄명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좁은 공간에 수감되는 것보다는 유배형이 그나마 좀 낫지 않았을까? (출처:『도설 중국혹형사』 148쪽.)

 

2. 천덕꾸러기 신세, 유배인

  유배에 처해져 유배지로 떠나는 여정이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었듯이 유배지에서의 삶 또한 지역, 시기, 신분에 따라 다양하였다. 우선 유배객의 유배지에서 생활을 좌우하는 자로는 아무래도 고을 수령을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 같다. 유배인 관리 감독을 총괄하고 있는 수령은 유배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배인들의 거처 및 보수주인(保授主人) 선정을 좌우하였다.

  여기서 보수주인이란 유배지에서 유배인의 숙식을 책임진 사람을 말하는데, 어떤 보수주인을 만나느냐는 유배객의 앞으로의 생활의 질을 가늠하는 중대 사안이었다. 대개 자신의 가족들 챙기기도 빠듯한 생활에 군식구가 느는 일이므로, 당연히 보수주인이 유배객을 떠맡는 일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보수주인은 수령의 명을 거역하기 쉽지 않은 읍내의 아전(衙前), 군교(軍校), 관노(官奴) 등 관속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 관에서 유배객을 배정할라치면 갖은 핑계로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어쩔 수 없이 유배객을 떠맡는 경우에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림 3> 유배지 호적에 올라있는 유배인 : 1759년 『경상도 단성현 호적대장』의 일부로, 단성현 현내면 죽전 마을의 제1통 부분이다. 모두 다섯 집 가운데 첫 번째가 속오군(束伍軍) 이세남 집인데, 이세남 가족 기록 말미에 형조(刑曹)에서 유배 온 31세의 홍일창이란 인물이 보인다. 여기서 이세남은 형사 범죄를 저지르고 단성에 유배된 홍일창의 숙식을 책임진 보수주인(保授主人)이다.

  정조 때 대전별감 출신으로 추자도로 유배간 안조환(安肇煥)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보수주인으로부터 구박을 받은 사례이다. 그는 추자도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모습을 유배가사 「만언사(萬言詞)」에 묘사하였는데, 추자도에 도착한 첫날 아무도 그를 맡으려 하지 않아 관원이 강제로 한 집을 지정하자 집 주인은 그릇을 내던지며 그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자기도 세 식구 먹고살기 힘든 마당에 무슨 유배객을 맞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유배객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거처를 정해야 했지만, 보수주인에 내맡긴 처지에서 돈이 없으면 궁색한 꼴을 면할 수 없었다. 관에서 특별히 보살펴주지 않는 이상 심한 경우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고을에서는 보수주인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맡기는 대신에 마을민 전체가 돌아가면서 급식을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유배객이나 마을민이나 마뜩찮은 것은 매 한가지였다.

  다산 정약용은 곡산부사 시절에 고을에 배정된 유배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유배인들을 모두 그곳에 지내게 하였고, 고을 기금을 별도로 마련하여 이들의 곡식, 반찬, 생활용품을 충당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유배인 숙식을 일방적으로 보수주인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림 4> 조선시대 남원의 감옥 : 전남 남원시 춘향 테마파트에 복원되어 있는 감옥 세트장이다. 유배인들은 유배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감옥에 구속되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사실 조정에서도 고을의 골칫거리인 유배인 배정에 신경이 쓰이긴 매 한가지였다. 그래서 정조 8년(1784)에는 흉년이 든 재해 지역에는 유배인을 내려보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보다 4년 뒤에는 아예 한 고을의 유배인 숫자를 10명으로 못박았다. 고을민에게 유배객은 곱게 이야기해서 불청객이요, 한 마디로 천덕꾸러기였다.

 

3. 산 무덤이나 다름없는 ‘위리안치’

  비록 생면부지의 땅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긴 했지만 유배인들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큰 구속은 없었다. 대개 한 달에 두 차례, 즉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고을 수령의 점고(點告) 때 관아에 들어가 자신이 도망가지 않고 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수고를 해야하는 것 외에는 관으로부터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았다.

  고을 경내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동에도 큰 제약이 없었으며, 원칙적으로는 유배지에 가족을 데리고 와 살 수도 있었다. 조선에서 법으로 쓰고 있는 명나라의 『대명률』 규정에 가족 동반을 허용하고 있으며, 세종 31년(1449)과 정조 14년(1790)에 유배인의 가족들이 모여 살며 왕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마땅한 호구책이 없는 이상 척박한 변방이나 시골마을, 외딴 섬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대개 유배에 처해질 경우 가족은 고향에 두고 혼자 떠났지만, 법 자체가 가족 동반을 막지는 않았다.


<그림 5> 영월 청령포에 복원된 단종의 거처 :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곳은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단종은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했다고 한다. 가시울타리를 두른 것은 아니지만 ‘위리안치’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위리안치는 무거운 죄를 짓고 국왕의 큰 노여움을 산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종종 내려졌는데,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조치였다. 위리안치에 처할 경우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켰음은 물론, 집 주위에 탱자나무 따위로 가시울타리를 둘러 감옥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감금과 격리 조치를 취하였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는 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전라도 익산 등지에 안치된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에게 의금부에서 1464년(세조 10) 거주지 제한 조치를 취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무렵 위리안치 죄인의 감금 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즉, 집의 담장 밖에 나무로 일종의 바리케이트를 치고, 열흘에 한 번씩 음식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갔다. 또한 담장 안에는 우물을 파서 생활하게 하였으며, 행여 집 안 사람과 내통하거나 물품을 제공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처벌하였다.

  한편, 집 주위를 둘러싼 가시울타리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높아서 낮에도 햇빛조차 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종 때 기묘사화로 함경도 온성(穩城)에 위리안치된 기준(奇遵)의 경우 가시울타리의 높이가 4-5길(丈), 울타리 둘레가 50자(尺)였다고 하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로 1776년 흑산도로 유배된 김구주(金龜柱)도 문집 속에 자신의 거처 주변 울타리의 높이가 3길 정도였다고 쓰고 있다. 또한 경종 때 명천에 유배된 윤양래(尹陽來)의 집 주위 울타리 높이도 5길이었다.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위리의 높이는 5-9미터에 달하는 셈이다.

  이처럼 둘러친 높은 가시울타리가 처마를 가려 집안에 햇빛이 들지 않아 대낮이라도 한밤중과 같았으며,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기준의 불평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고을 사람들은 기준의 집을 ‘산 무덤(生冢)’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림 6> ‘위리안치’된 유배인 그림 : 가시울타리를 두른 집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유배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중종 때의 기준에 비한다면 광해군 6년(1614)에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의 처벌을 주장하다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된 정온(鄭蘊)의 경우는 사정이 그나마 조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정온은 대정현 동문 안에 위치한 작은 민가에 안치되었는데, 진흙으로 된 집에는 그나마 부엌과 노비들의 거처, 손님방까지 갖추고 있었고 대정현감의 배려로 서실(書室) 두 칸에 수 백권의 서가를 비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온의 집 또한 하자가 있었으니, 집이 너무 낮아 똑바로 설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갑갑한 감금 생활은 안치된 죄인에게 자연히 탈출을 떠올리게 했을 법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으로 졸지에 폐세자(廢世子)가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왕자 이지(李祬)가 땅굴을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혔으며, 이보다 앞선 선조 2년(1569)에는 보성군에 안치된 종친 신의(申檥)가 아예 소홀한 감시망을 뚫고 제멋대로 밖으로 나가 대담하게도 남의 애첩 몸에 손을 대 조정에 압송되는 일도 있었다.

 

4. 그 때 그 때 다른 유배생활

  앞서 보았듯이 대개 유배인의 거처가 편안할 수는 없었고 처우 또한 조정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유배를 온 건지, 유람을 온 건지 알 수 없는 정도로 호화판 귀양살이도 있었으니 철종 4년(1853)에 함경도 명천에 유배된 김진형(金鎭衡)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김진형은 이조판서 서기순이란 자를 탄핵하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명천에 유배되어 두 달 동안 생활하였는데, 그곳 생활을 자신이 지은 가사 「북천가(北遷歌)」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김진형은 명천 유배지로 오는 길에 이미 여러 수령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명천에 도착해서는 삼천석꾼을 보주수인으로 배정받아 넓은 집에 살며 그곳 선비들과 어울리며 음주가무를 즐겼다.

  배소를 벗어난 경성(鏡城)의 칠보산 구경을 떠난 것은 물론, 스물도 안 된 기생과 동침하며 꿈같은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기생과 만나 맘껏 즐기며 방탕하기까지 한 경험을 「북천가」곳곳에 늘어놓았으니, 근신과 반성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유배객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림 7> 김정희 초상 : 소치 허련이 제주도에 유배 중인 스승 김정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의 부분. 『추사 김정희-학예 일치의 경치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01쪽)

  김진형보다 조금 앞선 1840년(헌종 6)에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의 경우에도 딱히 군색한 생활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처음 대정현에 도착한 추사가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거처로 삼은 곳은 읍성 안 송계순의 집이었다.

  이후 그는 거처를 옮겨가며 대정현에서 무려 9년 가까이 지내며 외로움을 달래야 했지만, 하인 서너 명이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그의 수발을 들었고 제자들도 몇 차례나 귀한 책을 사서 보내는 등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다.

  이처럼 유배인의 삶이 늘 고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배인의 경우 유배지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단하였으며, 정계 복귀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나 빈한한 사람의 경우 유배생활이 길어질수록 생존을 위한 극도의 수치와 고통까지 경험해야 했다.

  제주도의 최초 여성 유배인으로 알려진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의 경우는 광해군 5년(1613) 제주에 유배되어 명색이 왕비를 낳은 귀한 몸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팔며 생활해야 했으며, 선조 24년(1591) 함경도 부령(富寧)의 귀양길에 오른 홍성민(洪聖民)은 그곳에서 식량이 바닥나자 데리고 온 종과 함께 상업에 나서면서 차라리 농부가 부럽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림 8> 추자도 : 정조 때 안조환의 눈물겨운 귀양살이의 현장 추자도의 현재 전경. 추자도는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하나,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며 생활은 전라남도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 나마 다행이었다. 앞서 소개한 정조 때 추자도에 유배된 대전별감 안조환의 귀양살이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유배지에 도착한 첫 날부터 주인으로부터 온갖 냉대를 받은 그는 한동안 처마 밑에서 자야했음은 물론, 1년 내내 달랑 옷 한 벌로 버티며 버선이나 이불도 없이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두둑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코흘리개 애들이라도 가르칠 학식을 쌓아 둔 것도 아닌 이상 척박한 외딴 섬에서 살기 위해선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흡사 종살이처럼 주인집 마당쓸기, 불때기, 쇠똥치기, 도랑치기, 집지키기 등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안조환. 그는 마침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비렁뱅이처럼 동네를 돌며 동냥을 하기에 이른다. 도대체 이보다 눈물겨운 귀양살이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5.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조선시대 심각한 정치대립의 와중에서 유배를 비켜간 관리들은 좀 과장해 이야기한다면 행운아가 아니었나 싶다. 유배는 조선의 정치인들에게 결코 낯선 형벌은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처량하고 비참한 유배지에서의 삶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척박한 불모의 땅 유배지에서도 학문과 예술은 꽃피운다는 진실을...


<그림 9> 유배 관련 연구서 및 번역서 : 조선시대 독특한 형벌의 하나인 유배는 정치적, 문화사적으로 새롭게 재조명해 볼만한 주제이다.

  허균(許筠)은 자신의 평론집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이산해(李山海)의 시가 늘그막에 강원도 평해에 귀양 가서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예로 들어, 문장이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초를 겪으며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뎌야 묘한 경지에 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유배의 고통을 이겨내며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나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통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그 중 하나이다.

  다산은 정조가 죽은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강진에서 그는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무려 18년의 세월동안 외로운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당시 다산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박석무가 번역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청작과비평사, 1991)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절절한 가족 사랑과 학문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 10> 다산초당 : 다산 정약용이 10여 년간 머문 강진의 만덕산 기슭에 위치한 다산초당. 본래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6년에 무너져 없어졌는데, 1957년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하면서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

  편지에서 다산은 자식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9남매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고 2남 1녀만 장성하였는데, 늘 두 아들의 글공부를 걱정했다. 우리 집안은 화를 입은 폐족(廢族)이니 남보다 학문에 더욱 정진하라는 것이다.

  폐족이면서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 사람들보다 백배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근심이 없겠다. (1802년 2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다산의 학문에 대한 열정도 애틋한 가족애 못지않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채찍질에 힘을 쏟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불후의 저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은 모두 유배지 강진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그에게 있어 유배의 시련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니라 그저 빛나는 성취의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무릎을 짓밟는 고문, 압슬
1. 남영동 대공분실

  5공화국의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에 악명을 떨치던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보안3과가 자리했던 이 7층짜리 건물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한 채 현재는 2005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를 거쳐 박종철 인권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많은 조직 사건, 간첩단 사건이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 속에서 쓰러져 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도 이 건물 509호 조사실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그림 1>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경 : 독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치던 경찰청 보안3과 건물. 5층이 조사실 전용이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11일자.)

  이곳 대공분실을 거쳐간 대학생, 활동가 중에는 1983년에 결성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을 역임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근태 전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는 1985년 깃발사건으로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이다.

  고문이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줄뿐 아니라,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성을 유린하는가 하는 것은 당시 김근태 전의원의 법정 진술을 통해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이곳 대공분실에서 몇 시간에 걸친 전기고문과 물고문, 집단 구타를 수 차례에 걸쳐 당했다고 한다. 고문기술자로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던 이모 경감도 그를 고문한 경찰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림 2> 남영동 대공분실의 5층 조사실 복도 모습 : 5층에는 조사실이 16개가 있었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11일자.)

  그에 가해진 고문은 전기고문이 중심이었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위해 행해졌다. 고문을 하는 동안에는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고문을 할 때는 눈을 가리고 온몸을 발가벗긴 다음에 고문대에 눕혀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다. 발목과 무릎, 허벅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까는데,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다. 전기고문은 처음엔 약하고 짧게 하다가 나중에는 강하고 길게 강약을 반복하였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알몸 상태에서 능욕당하는 수치. 계속되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 그는 마침내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했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조서 내용을 쓸 수밖에 없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몸무림치는 와중에 들려오는 라디오 속 DJ의 너무나도 한가로운 목소리를 김근태 전의원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훗날 술회하였다. 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던 모습이 불과 10여년 전의 한국 현대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2. 조선시대의 고문

  현실에서 고문이라는 야만적 폭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현재 우리나라에서 고문 행위는 불법이다. 하지만 과거 조선시대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지금과는 달리 합법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럼 당시 고문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조선시대에는 법에 고문 절차와 고문 방법에 대해 일정한 원칙을 정해두었는데, 고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신장(訊杖)이라는 매로 피의자를 가격하는 것이다.


<그림 3> 조선시대 태ㆍ장과 신장  : 태ㆍ장은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는 형구이며, 신장은 고문할 때 쓰는 매이다. 신장은 종류가 세 가지인데 추국(推鞫)할 때 쓰는 것이 좀더 굵고 두껍다. 『흠휼전칙(欽恤典則)』 수록.

  범죄의 정황이 분명한데도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는 자에게는 으레 고문을 가했는데 이 때 흔히 길이가 약 1미터 정도 되는 신장이라는 매를 이용했다. 원래 신장으로는 다리를 치게 되어 있었는데, 구체적인 타격 부위는 피의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 부분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사극 같은데서 볼 수 있는 ‘동틀’이라는 형틀 의자에 앉혀놓고 피의자의 두 다리를 의자에 고정시킨 후 정강이 부위를 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장을 아무렇게나 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장은 한 번에 30대 이상을 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한 번 신장을 친 후에는 사흘 뒤에 다시 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제한 규정이 없다면 고문 중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장은 기본적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죄인이 물고(物故)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림 4> 변학도가 춘향이 고문하는 모습 : 남원테마파크에 있는 모형. 원래 조선시대 법에는 고문할 때 신장으로 종아리를 때리게 되어 있으나, 모형에서 보듯이 동틀에 앉혀서 정강이를 치기도 하였다.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단단한 몸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매 앞에서 견뎌낼 재간은 없었다. 대개 몇 차례의 매질만으로 피의자는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게 중에는 아무리 신장을 가해도 끄덕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 취조는 이것으로 끝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신장으로 자백을 받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고문 방법이 동원되었다.

  무릎을 꿇게 하여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무릎을 짓밟는 고문인 압슬형(壓膝刑), 숯불에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烙刑), 양쪽 엄지발가락을 한데 묶어 모아놓고 발바닥을 치는 난장형(亂杖刑), 붉은 몽둥이로 몸을 찌르는 주장당문(朱杖撞問), 또한 다리 사이에 몽둥이 두 개를 끼워 벌려서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주리(周牢) 등과 같은 또 다른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리로 산 너머 산이었다.


3. 일본 에도시대의 고문 ‘이시다키’

  조선시대 고문 절차와 다양한 고문 방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나하나 설명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이 가운데 압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압슬(壓膝)’은 누를 압(壓), 무릎 슬(膝) 글자 그대로 피의자의 무릎을 밟아서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으로 조선초기부터 신장으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할 경우에 특별히 사용되던 고문 방법이었다. 이 조선의 압슬과 유사한 고문이 일본에도 있었는데, 에도시대에 시행된 ‘이시다키(石抱)’가 그것이다.

  최근 임명수가 쓴 『에도시대의 고문형벌』(어문학사, 2009)를 보면 일본 에도시대에는 대략 네 가지 유형의 고문이 가해졌다고 한다. 그 네 가지는 무치우치(笞打), 이시다키(石抱), 에비제메(海老責), 쓰리제메(釣責)를 말한다.


<그림 5>  에도시대의 고문, 이시다키와 무치우치 :  왼쪽 그림이 이시다키, 오른쪽 그림이 무치우치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 수록.)

  무치우치는 피의자의 상반신을 벗기고 양 손목을 등 뒤로 해서 묶은 뒤에 채찍으로 어깨 부위를 세게 때리는 채찍질 고문이었다. 무치우치로도 자백하지 않는 자에게 이시다키가 행해졌는데, 일종의 ‘돌 안기 고문’이다. 이밖에 에비제메와 쓰리제메는 피의자의 고문받는 자세를 본따 ‘새우 고문’, ‘매달기 고문’이라 하였다.

  먼저 에비제메는 양팔을 뒤로 한 채 그림에서 보듯이 어깨와 다리를 바짝 밀착시켜 꽁꽁 묶어서 온몸을 새우모양으로 만들어 고통을 주는 방식이다. 쓰리제메는 양팔을 뒤로 비틀어 올려 손과 손목을 종이와 짚으로 감아 밧줄로 묶은 후 남은 밧줄로 가슴을 감아 고정시켜 매다는 것으로, 매달린 무게로 인해 2시간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림 6> 에도시대의 고문, 에비제메와 쓰리제메 :  왼쪽 그림이 에비제메, 오른쪽 그림이 쓰리제메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 수록.)

  이시다키 고문 방법을 좀더 살펴보자. 이시다키를 할 때에는 먼저 기둥에 피의자의 몸과 양팔을 뒤로 묶은 뒤, 삼각으로 날카롭게 홈이 파인 삼각판 위에 무릎을 꿇게 한다. 삼각판 위에 무릎을 꿇게 되면 뾰족한 것이 정강이에 닿아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본격적인 고문은 그 상태에서 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으면서 시작된다.

  당시 고문에 사용하는 돌은 청백색의 결이 고운 수성암(水成岩)이 사용되었다. 돌은 대략 길이 1m, 폭 33cm, 두께 10cm로 자른 것인데, 무게는 1장에 48kg이 넘었다. 돌을 한 장, 한 장 무릎 위에 올리면 돌의 무게 때문에 삼각대 위의 정강이를 누르게 되는데, 죄인은 서서히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시다키는 보통 다섯 장부터 시작했는데, 대여섯 장을 무릎위에 올려놓으면 대부분의 경우 기절하거나 바로 자백했다고 한다. 물론 때로는 심지어 돌 열 장을 올려놓아도 꿈적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견디다 못해 온몸이 파랗게 변하고 피를 토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 죽는 자들도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4. 무릎을 짓밟는 고문, 압슬

  앞서 보았듯이 이시다키는 무릎에 심한 고통을 주문 고문이며, 조선에서 시행한 압슬도 이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시다키가 무릎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인데 비해, 압슬은 무릎을 사람이 올라가서 밟는 것이 다르다.

  압슬 방법은 이렇다. 즉, 먼저 자갈을 널 위에 깔고 피의자의 무릎을 꿇게 한 뒤 다시 자갈을 부어 무릎 주위를 채워넣은 뒤, 그 위에 사람들이 올라설 수 있도록 새로운 널을 다시 올려놓고 형리 등 고문집행관들이 그 위에서 지근지근 짓밟아서 고통을 주는 고문이다.

  울퉁불퉁한 돌에 놓인 무릎을 사정없이 밟아대니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피가 솟아 땅으로 흐르기 예사였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잔인하고 참혹한 장면이 아니기 때문에 이정도가 뭐 그리 큰 고통을 주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문을 당하는 당사자로서는 숨이 금방이라도 멈출 듯 괴로웠다.


<그림 7> 김준근의 ‘죄인 널뛰는 형벌’ :  한말의 화가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의 하나로 무릎을 꿇게 하여 널을 밟아 고통을 주는 압슬과 유사한 형태의 고문.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수록.

  그런데 압슬을 시행할 때 자갈 대신에 종종 사금파리를 깨뜨려 깔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압슬을 ‘압사(壓沙)’라고 하였다. 그런데 압슬이 꼭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고문은 아닌 것 같다. 고려 충렬왕 때에 심양(沈諹)이란 자를 문초하면서 나무토막을 다리 위에 놓고 노끈으로 묶은 다음 기왓장을 다리 사이에 끼워 사람을 시켜 번갈아 그 위를 밟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는 말이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때에 이미 압슬형을 시행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처럼 압슬은 조선왕조의 초기부터 조정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사용하였다.

  압슬을 시행하면서 관련 규정이 마련되기도 하였는데, 태종 17년(1415) 5월 11일 실록 기사에 따르면 압슬을 가할 때 널에 올라가 밟아대는 사람을 처음에는 두 명으로 제한하였고, 그래도 자복하지 않으면 두 번째에는 네 명, 세 번째에는 여섯 명까지 올라가서 밟도록 하였다. 그리고 역모나 패륜, 강도, 살인과 같은 중죄인 외에는 압슬을 함부로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릎을 망가뜨리는 등 고문 후유증이 제법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압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 자백하는 일도 생겼다. 세종 18년(1436)에 별시위(別侍衛) 이석철(李錫哲)의 조카 유중인(柳仲諲)이란 자가 이석철의 부인 유씨(柳氏)와 간통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와 고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유중인과 유씨는 조카와 숙모 사이로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로서는 용납받기 어려운 패륜 범죄에 해당했다.

  유중인은 바로 체포되어 고문에 처해졌는데, 신장으로 가하는 매질을 네 차례나 당하였고 그 중간에 압슬도 세 차례 시행되었다. 견디다 못한 그가 간통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죄 값으로 목을 내 놓을 판이었는데, 사실은 이것이 거짓 자백이었다.

  그는 고문을 못 이겨 자백하긴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옥중에서 몰래 자신의 종에게 편지를 보내 신문고를 쳐서 임금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결국 다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의 간통은 무고로 밝혀졌다. 압슬 등 참기 힘든 고문을 해대는데 누가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림 8> 청나라 말기의 족책(足責) 고문 :  상해 법정에서 주점을 강탈한 피의자를 심문하는 모습. 독특한 고문기구 좌우에 있는 두 명이 손과 발로 고문을 가하고 있다. 무릎에 고통을 가한다는 점에서 압슬과 일부 유사하다. 『점석재화보(點石齎畵報)』 수록(『도설 중국혹형사』 54쪽).

  한편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어린아이와 노인은 고문할 수 없었는데, 간혹 어린 아이에게도 압슬을 가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선조 22년(1589)에 선조대 최대의 정치사건인 기축옥사, 즉 정여립 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역모사건이라는 선을 넘어 동인(東人) 정파 정치인에 대한 정치탄압사건으로 비화하여 수많은 호남 지역 유신들이 무고, 조작, 연좌로 죽임을 당했다.

  이 때 남명 조식의 문인이며 동인내 강경파였던 이발(李潑) 일가는 대부분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이발의 여든 두 살 모친 윤씨(尹氏)와 열 살짜리 아들 이명철(李命哲)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옥사에 연루되어 2년을 끌다가 결국 윤씨는 매를 맞아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명철도 압슬에 승복하지 않고 견디다가 죽고 말았다.

  정파 간에 두고두고 갈등과 후유증을 남긴 이 기축옥사는 불행하게도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의 역모사건 처리의 선례가 되었다. 취약한 명분을 가지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공안 통치를 행했는데, 압슬, 낙형 등 가혹한 고문이 자주 동원됨으로써 평범한 범죄가 대규모 역모사건으로 확대, 비화되곤 했다.

  이후에도 간간이 사용되던 압슬형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마지막 사례는 영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1725년 1월에 있었다. 영조가 선왕인 경종의 능(陵)에 행차하던 중 군사 이천해란 자가 영조의 어가(御駕) 앞에 뛰어들어 큰소리로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였는데,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조가 무려 24차례에 걸쳐 그에게 압슬을 가하고 그 날로 처형한 것이 그것이다.

  이후 영조는 뒤늦게 이천해에 대한 심문이 너무 가혹했다고 후회하고 신하들에게 더 이상 압슬을 가해 심문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혹독한 고문의 하나인 압슬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임금이 내려주는 약, 사약
1. 죄인은 사약을 받아라!

  최근 TV 드라마에서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다른 분들도 경험했겠지만 사극을 보면 늘 익숙한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죄인이 임금이 내려주는 사약(賜藥)을 마시고 죽는 장면이다. 몇 년 전에 SBS에서 방영된 사극 ‘왕과 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과 나’는 조선 성종, 연산군 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남성(男性)을 잘라버린 조선시대 환관 김처선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극 중에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비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왕의 얼굴을 할퀴는 등 투기를 일삼고 왕실을 저주했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로 분한 탤런트는 현재 인기가 높은 구혜선인데, 드라마 속의 폐비 윤씨가 사약받는 광경을 보면 이렇다.


<그림 1> 사극 ‘왕과 나’의 한 장면 :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는 장면이다.

  성종 임금이 좌승지를 통해 내린 사약을 받은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죽거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가는 길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이는 자신의 아들인 원자(훗날의 연산군)가 장차 보위에 올라 능행가시는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이내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는다.

  폐비 윤씨가 실제 사약을 받으며 남긴 말이 무엇인지는 현재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에서 사약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인물이 비단 폐비 윤씨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궁금한 사실 하나. 사약은 누구에게 내려졌을까?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처단하기 위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는 교형, 참형, 능지처사 등이 있었다. 교형이 죄인의 목을 매서 죽게 하는 형벌이라면, 이보다 무거운 형벌인 참형은 목을 베는 형벌이었다. 대역죄인이나 패륜죄인의 경우에는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의 방법을 쓰기도 했다. 어떻게 죽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대인들의 관념에서는 죄의 경중에 따라 이 또한 구분하여 집행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 방법 중 사약을 받는 것은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는 사람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즉 정부 고위 관료나 왕실 가족들의 경우 반란 등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일반백성들처럼 감옥이나 저자 거리에서 교형, 참형, 능지처사로 처단되는 것을 면해주었다.


<그림2> 사약을 받는 광경을 그린 그림 :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가운데 하나이다. 왼쪽의 무릎을 꿇고 앉은 자가 사약을 마시는 찰나이며, 주변의 관리와 아전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럼 임금이 중죄인에게 교형, 참형이 아닌 사약으로 죄를 다스리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예기(禮記)』에 보면 ‘사가살(士可殺) 불가욕(不可辱)’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여서는 안된다는 말로서, 그만큼 이들의 염치와 의리를 존중해주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반 관리나 왕실 가족들은 죽더라도 임금이 내리신 사약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그나마 명예롭게 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는 것도 등급이 있었다고나 할까.....


2. 사약의 재료

  사극에서 사약을 마시는 장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궁금증은 사약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관련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사약의 성분이 무엇이라고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약의 재료에 대한 추정은 가능하다.

  먼저 중국의 예부터 들어보자. 고대 중국에서는 독약으로 짐새의 독, 즉 짐독(鴆毒)을 썼다고 전한다. 짐새는 검은 자색의 깃털, 긴 목, 붉은 부리 등을 가진 새의 일종으로 수리나 독수리와 비슷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짐새는 독사만 먹고 살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독사의 독이 짐새의 온 몸에 퍼져 있었다. 이 짐새의 깃털을 술에 담가서 독주를 만들어 독약으로 사용하면 그 맹렬한 독성이 빠른 속도로 온 몸에 퍼져 치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진나라 이후에는 짐독이 아닌 비소(砒素)를 사용한 독살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소는 금속광택이 나는 비금속 원소로서, 그 화합물은 독성이 있어 현재에도 농약 및 의약의 원료로 쓰이는 물질이다.


<그림 3> 비소 덩어리 : 사약의 주재료인 비상을 만들 때 쓰는 비소. 독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에서 사용한 사약의 경우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소를 가공해서 만든 비상(砒霜)이 주재료였던 것 같다. 혹은 뿌리에 독성이 있는 식물인 부자(附子)를 비상과 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아무튼 사약의 핵심은 비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럼 도대체 비상의 독성이 얼마나 강했을까?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집필한 과학기술서적인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보면 비상을 제조하는 방법을 적고 있다. 즉, 비소 덩어리(砒石)를 흙 가마에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상태로 태우면 비소 증기가 위로 올라가 솥 안쪽 벽에 붙게 되는데 이것을 떼어내면 비상이 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비상을 논밭의 농약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당시 비상 제조가 매우 활발했다고 전한다.

  또한 이규경은 비상의 강한 독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비소 덩어리를 태워서 비상을 만드는 동안에 연기에 노출된 초목은 모두 죽어버릴 정도로 독이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연기를 흡입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 일을 하는 사람은 2년 안에 전업(轉業)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독에 노출되어 수염이나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다고도 하였다.


<그림 4> 이규경이 지은 『오주서종박물고변』 : 해당 면은 비소 덩어리를 이용하여 비상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죽은 사람의 사망원인을 밝히는데 참고가 된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에 비상을 먹고 자살한 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해당 내용을 소개하면 비상에 중독되어 죽은 자는 만 하루가 지나면 온몸에 작은 포진이 발생하고 몸의 색깔도 청흑색으로 변한다. 게다가 눈동자와 혀가 터져 나오고, 입술이 파열되고, 두 귀가 부어서 커질 뿐만 아니라 복부가 팽창하고 항문이 부어 벌여진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맹독으로 인해 온몸이 상한 처참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같은 묘사로 볼 때 사약을 마신 자들이 사극에서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죽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3. 사약에 얽힌 이야기들

  조선에서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이 임금의 마지막 배려였다면,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할복자살’이 있었다. 사약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잠시 할복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에도시대에 장군이 중죄를 지은 무사(武士)의 정상을 참작할 경우 그를 참수에 처하는 대신 스스로 할복케 하였는데, 할복자살은 무사가 그나마 자신의 체면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 5> 할복 장면 : 일본에서 할복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가운데 앉아 있는 이의 앞에는 할복에 쓰일 단도가 놓여져 있으며, 오른쪽의 집행인은 할복 중에 목을 베기 위해 칼을 들고 있다.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할복 장소에는 대개 사방으로 목면을 둘러쳐서 다름 사람이 구경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할복할 당사자 외에 여러 집행인들이 입회하였다. 할복자는 이들과 인사를 한 후 앉아서 겉옷을 벗어 할복할 복부를 드러낸다. 이후 미리 준비된 단도를 오른손에 거꾸로 쥐고 할복을 감행한다.

  할복은 왼쪽 배에 칼끝을 꽂아 오른쪽 배에 걸쳐 한 일 자로 가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사형 집행인의 한 사람이 할복자의 등 뒤에 있다가 할복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할복인의 머리에 칼을 내리쳐서 목을 베면 할복 의식은 끝이 난다.

  이상이 할복 광경이었다. 말이 할복자살이지 사실상 명령에 의한 할복, 처형으로서의 할복인 셈이다. 그럼 이제 다시 조선의 사약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 정쟁의 와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약을 마시고 죽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가운데는 정치적 지위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관료들도 있었고, 왕비와 후궁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 외척들도 있었다.


<그림 6> 장희빈의 묘소 : 서오릉(西五陵)에 위치한 장희빈의 묘소이다. 궁녀 출신으로써 한 때나마 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장희빈의 경우도 숙종에 의해 결국 사사되고 만다.

  그럼 사약 집행 방법을 좀더 알아보자. 임금의 사사 명령을 집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의금부의 보고에 나와 있다. 즉 왕명을 집행하기 위해 사약을 가지고 파견되는 관리는 의금부의 낭청(郎廳), 대개 도사(都事)가 맡았다. 예컨대 인조반정 이후 강화에 유배된 강화군의 폐세자(廢世子)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의금부 도사 이유형(李惟馨)이 파견된 것이 그 한 예이다.

  왕명을 받은 도사는 죄인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갔는데 사약을 내리기에 앞서 먼저 죄인에게 왕명(王命)을 유시하였다. 이 때 도사는 의녀(醫女)를 대동하였으며, 약물은 왕실의 의료기관인 전의감(典醫監)에서 가져왔다. 간혹 사약을 받을 죄수가 한양에 있는 경우 의금부 도사 대신에 승정원 승지가 직접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인물은 형방승지 이세좌(李世佐)였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아버지로서 계축옥사에 연루된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할 때도 담당 승지인 권진(權縉)이 맡았다.

  이 중 이세좌는 운이 아주 나쁜 경우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되고 난 후 즉위한 연산군이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된 인물들을 제거하고자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윤씨에 사약을 전한 이세좌는 선왕의 심부름을 한 죄로 이같은 화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경상도 곤양에서 자진(自盡)하라는 왕명을 받고 목매어 죽고 말았다.

  한편, 고위 관리라고 해서 모두 사약을 받은 것은 아니다. 노론 4대신의 하나로 정승의 자리까지 오른 이건명(李健命)의 경우 경종 때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유배지인 전라도 흥양의 섬 나로도에서 죽게 되었는데, 경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리는 대신에 참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림 7> 이건명 초상 : 경종 때 소론이 득세하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이건명(李健命)의 초상이다. (과천시 소장.)


<그림 8> 송시열(宋時烈) 초상 : 조선후기 서인, 특히 노론을 이끈 대표적인 정치가인 송시열의 초상. 숙종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도 사사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국보 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사약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한다. 그 중 하나가 조선후기 숙종 때 서인의 영수 격인 송시열(宋時烈)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장희빈의 소생인 훗날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을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는데, 얼마나 신빙성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약 한 사발로 죽지 않아 두 사발을 마셨다는 말이 전한다. 그만큼 사약에 잘 견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송시열의 사례는 명종 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은 임형수(林亨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다가 뒤에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인 전라도 나주에 거쳐하던 도중 을사사화로 사사되는 운명에 처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임형수의 주량(酒量)에 한정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사약을 내렸을 때 독주를 열 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않았고,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자 마침내 파견된 관리들이 할 수 없이 목을 졸라 죽게 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조선시대 사약은 그나마 임금의 배려가 담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 목숨을 빼앗는 일인 한 권력에 의해 집행되는 사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의 흔적을 쫓다 보면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때론 억울하게, 때론 불행하게 사약과 함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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