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잘 아는 일본 관광지에 닛코(日光)가 있다. 이곳은 에도 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를 둔 도쇼궁(東照宮) 때문에 유명하다. 이 신사(神社) 앞에는 신에게 상징적으로 바치는 말을 두는 헛간 격자 벽에 세 마리 원숭이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나는 눈을 가리고, 하나는 귀를 막고, 하나는 입을 막고 있는 그 조각을 삼원(三猿·산엔)이라 한다.
그러면서 네 마리의 원숭이상을 조각한 것은 논어에서 기원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논어에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어서 그 말에 따라 네 마리를 조각했다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하지 말라”라고 한 그의 말은 명백히 잘못이다. 게다가 사회자의 추가 설명이 걸작이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뜻이어서 본래 고환을 가린 원숭이가 있었지만 그 형상이 하도 음탕해서 없앴다는 것이다.
며칠 후 일본 중세문학과 불교를 전공하는 일본 교수들에게 삼원의 기원에 대해 물었더니 답변이 각기 달랐다. 한 분은 원숭이는 말을 수호한다는 설이 있어서 원숭이 형상을 만든 것이되, 세 마리의 상을 조각한 이유는 일본 천태종의 가르침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분은 삼종(三從)의 설이 와전되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이렇게 추정했다. 도쇼궁은 일본 신도의 사상과 불교의 사상을 융합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격화한 건조물이기는 하지만, 일본 승려들은 유학(儒學)도 함께 공부했고 에도 막부가 성립할 때는 유학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므로, 원숭이 조각도 논어에서 기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운운한 말은 본래 논어 안연(顔淵) 편의 첫 장(章)에 나온다.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말라’라는 뜻의 물(勿)이란 말이 네 번 나오므로 이것을 사물(四勿)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제자 안연(顔淵)이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이라고 했다. 극기복례란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예란 본래 예주(醴酒), 곧 감주를 이용해서 거행하는 의례를 의미했다. 여기서는 한 개인이 사회화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각종 통과의례와 한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각종 의식을 뜻한다. 과거에는 국가 전례나 종묘 제사에서부터 귀족 계층의 관례, 혼례, 장례와 상례 등이 모두 일정한 의식으로 정해져 있었다. 오늘날에도 각 단체의 의식과 가정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실상 예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다시 안연이 욕심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하자, 공자는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에서 사사로운 욕망을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시청언동의 각각에 대해‘예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안연 편의 첫 장은 극기복례에 관해 문답했다고 하여 ‘극기복례장’이라고 부른다. 전체를 다시 읽어보자. 원문에 우리말의 토를 달아 소개한다. 이 현토는 조선 선조 때 교정청에서 만든 논어언해(論語諺解)를 기준으로 하되, 현대의 어법에 맞춰 약간 수정한 것이다.
顔淵(안연)이 問仁(문인)한대 子曰(자왈), 克己復禮(극기복례)가 爲仁(위인)이니 一日克己復禮(일일극기복례)면 天下(천하)가 歸仁焉(귀인언)하나니 爲仁(위인)이 由己(유기)니 而由人乎哉(이유인호재)아.
顔淵曰(안연왈), 請問其目(청문기목)하노이다. 子曰(자왈), 非禮勿視(비례물시)하며 非禮勿聽(비례물청)하며 非禮勿言(비례물언)하며 非禮勿動(비례물동)이니라.
顔淵曰(안연왈), 回雖不敏(회수불민)이나 請事斯語矣(청사사어의)로리이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높은 지위의 위정자가 하루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인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시작하겠는가?”라고 했다.
안연이 “그 조목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 안연은 말했다. “회(안연 자신의 이름)가 똑똑하지는 못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
논어에는 이렇듯 공자와 제자가 문답을 주고받은 내용이 많다. 또 공자와 위정자의 대화, 공자와 은둔자의 대화, 공자 제자들 사이의 문답, 제자와 위정자의 대화도 들어 있다. 그래서 책 이름에 답술(答述)이란 뜻의 어(語)를 사용했다. 논(論)은 논변(論辯)이란 말인 듯하다. 따라서 논어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들의 어록이다. 모두 20편인데, 전체를 상론과 하론으로 나누기도 한다.
공자는 예(禮)를 이상적 시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예법으로 보았다. 곧 예가 지닌 지속의 측면을 중시하여, 기존의 예를 자의적으로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형식 모두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또한 각 개인은 예를 구속 요건으로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예를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공자는 양화(陽貨) 제11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禮云禮云(예운예운)이나 玉帛云乎哉(옥백운호재)아.
사람들이 예다 예다 하지만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옥과 폐백을 두고 예라 하는 것이겠느냐?
예법과 의식은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다. 하지만 형식만 중시하면 사회 전체가 활력을 잃게 된다고 공자는 경고한 것이다. 공자는 사회 구성체의 안정을 위해서는 예를 중시해야 한다고 여기고, 특히 위정자와 지식층의 실천 의지를 문제 삼았다. 이 점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담아들어야 할 측면도 있다. 공자가 주목했듯이 예는 사회의 구성원을 조화롭게 하고 사회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각 개인은 부정한 욕심을 버리고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공적 가치에 자신의 행동을 부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논어의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말은 “예가 아니면 간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정말이지 “논어 읽으면서 논어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는 것은 요행일 따름이다
논어의 원문에는 眞(참 진)이란 글자가 없다. 공자는 참된 인간이 되라고 가르쳤는데 어째서 원문에 眞이 없을까, 의아해 할지 모른다.
논어에서 인간의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直(곧을 직)이다. 直은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설에 따르면 기원이 이러하다.
直은 省(살필 성)과 (숨을 은)으로 이루어져 있다. 省은 눈이 지닌 주술의 힘을 더 크게 하려고 눈썹에 칠을 한 모습이다. 후에 지역을 순찰해서 부정을 단속하는 일을 가리켰다. 은 담으로 둘러싸인 은신처를 뜻한다. 곧 直은 몰래 조사해서 부정을 바로잡는다는 뜻을 지녔다. 정직(正直)이라는 복합어로 주로 사용한다.
한편 眞의 꼭대기는 죽은 사람을 거꾸로 매단 모습인 化(될 화)와 같고, 아래의 (매달 현)은 머리를 거꾸로 걸어둔 형태다. 곧 眞은 예기치 못한 재난을 당하여 고꾸라져 죽은 사람을 말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으므로 영원한 것, 참의 존재라는 뜻을 지니며, 거기서부터 진실(眞實)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영원한 진실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 장자다. 이에 비해 인간의 참 본성을 정직하다고 주장한 것이 논어다.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는 정직하지 못한 인간은 살아 있다 해도 참 존재가 아니며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人之生也直(인지생야직)하니 罔之生也(망지생야)는 幸而免(행이면)이니라.
사람의 생명 본질은 정직함이니, 정직함 없이 사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일 뿐이다.
공자는 정직하지 않아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나 정직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덕목이라고 믿었다.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공자는 당대의 사람들은 그 옛날의 이상 시대에 올바른 도를 실천해서 형성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직한 심성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斯民也(사민야)는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삼대지소이직도이행야)니라.
지금 이 사람들은 하, 은, 주 삼대 때 이래로 올바른 도를 실행하여 형성하여 왔다.
공자는 공야장(公冶長) 편에서 미생고(微生高)란 사람의 사례를 통해서는 정직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미생고는 정직하다고 소문 난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려달라고 하자 마침 식초가 집에 없어 식초를 이웃에서 빌려다 주었다. 이때 자기 집에 없으면 없다고 해야 했거늘 그러지 않았고, 이웃에 가서는 자기가 쓸 것이라 했다. 공자는 미생고가 자신의 양심을 굽히고 명예를 추구한 잘못, 미덕을 갈취하려고 은혜를 파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정직은 어떠한 흠결도 있어서는 안되는 순수한 상태의 도덕관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면 정직은 지극히 공적인 태도를 말한다. 헌문(憲問) 편에서 공자는 남이 내게 원한을 품고 있거늘 나의 편에서 은덕을 베푼다면 그것은 무언가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以直報怨(이직보원)이요 以德報德(이덕보덕)이니라.
정직함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
곧 공자는 내게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정직의 태도로 대하라고 했다. 사랑하고 미워함, 취하고 버림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는 것이 정직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의 장에서 보면 정직은 올바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일을 말한다. 위령공 편에서 공자는 사어(史魚)라는 인물에 대해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 같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 같았도다”라고 칭송했다. 사어는 위(衛)나라 대부인데, 평소 어진 거백옥(?伯玉)은 등용하지 못하고 모자란 미자하(彌子瑕)는 물리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래서 임종 때 빈소를 제대로 갖추지 말고 시신을 창문 아래에 두라고 유언했다. 위나라 군주가 조문을 왔다가 곡절을 알고서는 뉘우쳤다고 한다. 자기의 시신으로 군주에게 간언을 한 것이다. 사어는 신하로서 “군주를 속이지도 않고 군주의 안색을 범하면서까지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정직함을 실천한 것이다.
인간이 정직하게 살아나가는 데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둘 있다. 만일 법률상의 신의가 인륜의 도리와 충돌할 때는 인륜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 또 자기만 정직하다 여기지 말고 현실의 맥락을 두루 살피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자로(子路) 편에 보면, 초(楚)나라 섭공(葉公)이 자기 고장에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증인으로 나선 정직한 아들이 있다고 자랑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덮어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덮어줄 것이니,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절대적 사랑의 관계이므로, 부모가 법을 어기면 자식은 울면서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양화(陽貨) 편에서 공자는 인간의 주요한 덕목으로 인(仁), 지(知), 신(信), 직(直), 용(勇), 강(剛)의 여섯 가지를 들되 그 덕목들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각각 우(愚), 탕(蕩), 적(賊), 교(絞), 난(亂), 광(狂)의 여섯 폐단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정직하되 공부하지 않으면 빠지게 되는 폐단이 교(絞)다. 교는 급하다는 뜻으로, 전체 맥락을 살피지 않고 자신만 올바르다고 주장하여 상황을 얽히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논어의 가르침은 인(仁)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공자는 인간이 인(仁)을 실천하는 이유는 누구나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정직은 곧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과 관계가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 주자 즉 주희(朱熹·1130~1200)도 임종 때 제자들에게 直에 주목하라고 가르쳤다. 71세로 죽기 직전의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1층에 계셨는데 설사를 조금 하셨다. 건양 지사 장규(張揆)가 와서 물품을 드렸으나 선생은 거절하시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조금만이라도 관대한 정치를 한다면 백성은 그만큼 은혜를 더 얻을 수가 있을 것이오.” 장규는 재상의 위세를 믿고 가혹한 행정을 하고 있어 백성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날 밤 선생은 횡거선생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대해 강론하셨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하는 요점은 하나하나의 사실에 대해 그 시비를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다. 그것이 오래 쌓이면 마음이 이(理)와 하나가 되어 마음에서 피어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 아무 사심이 없게 된다. 성인들이 만사에 대응하고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은 직(直)의 원리에 따를 따름이다.”
만년의 주자는 간신 한탁주가 그의 학문을 비판하고 그의 제자들을 탄압하여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다리에도 병이 있었고 가슴은 늘 콱콱 막혔으며, 60대에는 왼쪽 눈이 완전히 실명했다. 그렇지만 주자는 인간에 대한 낭만적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주자는 자연도 直의 원리에 따라 운행하고 성인도 直의 원칙에 따라 인간 구원의 사업을 이루었듯이, 공부하는 사람도 시비를 분명하게 밝혀서 생각이나 감정을 늘 정직하게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본성을 정직하다고 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공자의 가르침은 얼핏 보면 무척 단순하면서 낭만적이다. 하지만 현실구원의 그 음성은 너무도 강렬하다.
天之未喪斯文也이니 匡人이 其如予何리오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거늘 광 땅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한문 고전에 관해 강의하는 교양과목 수업 때 공자를 어떤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느냐고 학생들에게 묻고는, 대학(고려대학) 구내에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찾아보고 자신의 이미지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라는 숙제를 내었다. 학생들은 캠퍼스 안에 공자의 조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주쯤 뒤 여러 학생들이 대학원 건물에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중국 산둥대학이 2005년 고려대학교에 증정한 이 조각상은 공자를 어질고 지혜가 많은 인물로 잘 부각시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무언가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공자는 단순히 어질고 지혜가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쉰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얻었지만, 국내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천하를 떠돌면서 자신의 이상을 전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쉰이 넘어 오늘날 사법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라는 직책을 갖게 되었을 때는 권세가를 붙잡아서 사형에 처할 만큼 매서운 면이 있었고, 천하를 떠돌 때는 상가의 개와 같이 추레한 몰골이었으며, 만년에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을 때는 평온하고 인자한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 추레한 몰골, 평온한 얼굴을 저 조각상은 도저히 한꺼번에 담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비단 고려대학교의 캠퍼스에 있는 조각상만 공자의 모습을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대만, 일본, 심지어 미국에 있는 공자의 조각이나 초상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대개 무언가가 부족했다. 더구나 후대에 공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이마를 지나치게 불거져 나오게 만들고 해구(海口)라고 해서 커다란 입을 지닌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아예 공자가 아니라 괴물을 상상해냈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다만 사법관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었을 때의 형상을 마치 염라대왕처럼 무섭게 그린 그림은 오히려 실상을 얻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논어를 읽는 것은 자기만의 공자 상(像)을 마음속에 그려내는 일이다. 일생 천 번, 만 번을 읽고 원문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운다고 해도 자기만의 공자상을 그려낼 수 없다면 그것은 논어를 공부한 것이 아니다.
공자의 일생에 관해 신뢰할 만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권47에 작성해 둔 공자 세가(孔子 世家)이다. 세가는 제후로서 정치권력을 행사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적는 양식인데, 사마천은 공자의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마치 제후의 전기를 적듯이 공자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후에 나온 공자의 전기는 모두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단 사마천의 글도 공자가 죽고 난 400년 뒤의 글이므로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
공자는 이름이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자(子)는 선생의 뜻으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한문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공자의 이름인 丘라는 글자가 나와 있을 때 글자 그대로 읽지 않고 피하여 아무개 모(某)라고 읽는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邑), 즉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흘(紇), 자는 숙량(叔梁)이고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다. 공자는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빈곤 속에 자랐으나 주나라의 전통 문화를 학습하였으며 말단 관리를 거쳐 50세가 넘어서 노나라 정공(定公)에게 발탁되었다. 공자는 노나라 실력자인 세 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의 권력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기원전 497년, 56세 때 실각하여 노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 후 14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遊說)하다가 기원전 484년 69세 때 고향에 돌아가 교육에 전념했다. 이 무렵 아들 리(鯉)와 제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으며 74세로 사망했다.
공자는 주 왕조의 질서를 모범으로 삼아 이상적인 덕치(德治)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공자는 가족제도 속에 사회질서의 원리가 있다고 보고, 보편적인 도덕의 기초를 인(仁)이라는 인간 내면의 자연성에서 구했다. 또한 인(仁)이 사회에서 구현되려면 사회규범인 예(禮)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자의 사후에 제자백가가 일어났으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나와서 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하를 떠돌 때의 공자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평했다고 한다. 상가지구란 집 잃은 개, 곧 들개라는 뜻이다. 15년 전쯤 홍콩·대만·일본·한국의 합작으로 만든 공자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각 장면마다 검은 들개가 등장한다. 공자의 현실적 처지를 상징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상가지구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사기의 공자세가에 나온다. 정나라에서 공자는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동문 부근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를 본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마는 요(堯) 임금을 닮고, 목은 순(舜) 임금의 사법관 고요(皐陶) 같으며, 어깨는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우(禹) 임금에게 세 치 미치지 못했고, 실의한 모습은 집 잃은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이 그 말을 전하자 공자는 웃으면서 “내 모습을 묘사한 것은 과연 그럴까 알 수 없으나, 상가의 개 같다고 한 말은 옳은 듯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공자는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몹시 어지러웠으므로 이상주의를 받아들일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후들로서는 부국강병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공리주의자들이 더 필요했다. 공자는 붙어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돌았다. 그것을 철환천하(轍環天下)라고 한다. 그 모습은 집 잃은 개처럼 실의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광(匡)이란 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를 양호(陽虎)란 인물로 오인해서 핍박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文王旣沒(문왕기몰)하시니 文不在玆乎(문부재자호)아 天之將喪斯文也(천지장상사문야)인댄 後死者(후사자)가 不得與於斯文也(부득여어사문야)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천지미상사문야)이니 匡人(광인)이 其如予何(기여여하)리오.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왕이 만든 문화는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문화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후세의 내가 이 문화에 간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거늘 광 땅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은 은나라 말의 서백(西伯)으로, 주나라를 일으켰다. 그 문화적 영웅에 의해 이루어진 사문(斯文), 곧 ‘이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하는 자부심을 드러낸 말이다. 사문이라고 하면 유학이라든가 유교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악명 높았던 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말도 ‘유교의 정통을 어지럽히고 해치는 자’라는 의미로 남을 혹독하게 비방하는 말이었다.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는 하늘에 대한 관심보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관심을 깊이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선진(先進) 편을 보면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리고 당시 세상을 피해 살던 은자(隱者)들과 조우하거나 그들의 비난을 들었을 때도, 새 짐승과는 한 무리가 될 수 없으며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공자는 곤궁에 처해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논어를 읽는 일은 그 강인한 인격을 배우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열자(列子)
渤海之東 不知幾億萬里有大壑焉발해 동쪽 몇 억만 리인지 모를 곳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경주의 안압지는 고대의 정원 문화가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목선이나 주령(酒令) 같은 유물들은 당시의 유희 광경을 상상하게 한다.
조선시대에 안압지는 기러기가 날고 오리가 물놀이하는 곳으로 인식되었지, 고대 유적으로서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용장사 부근에 오래 살았던 김시습은 안압지를 안하지(安夏池)라 부르고, “못을 파서 바다를 만들어 물고기와 소라를 기르고, 용의 목구멍으로 물을 뿜어내니 형세가 우람하다”고 노래했을 뿐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안압지 중앙에는 세 개의 섬이 있고, 그 섬들은 봉래, 방장, 영주 등 신선이 거주하는 삼신산을 상징했다고 한다.
못을 파고 삼신산을 조성하는 방식은 동아시아 고대의 정원에서는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진시황은 상림원에 못을 파고 봉래산을 만들었고, 한무제는 건장궁의 태액지에 삼신산을 만들었다. 백제 무왕도 궁남지에 방장산을 만들었으며, 백제의 정원을 만드는 기법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예로부터 안압지의 섬은 저절로 움직인다는 전설이 있었다. 정조 때 승지 김상집은 신라의 고적에 대해 보고하는 중에 “안압지에 흙이 떠 있고 넓이가 너럭바위만하고 그 위에 덩굴풀이 있는데,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라고 했다. 삼신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섬이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실은 삼신산 설화와 관련이 있다.
삼신산 이야기는 도가 계통의 여러 고전에서 나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자(列子)라는 고전이다. 주나라의 열어구(列禦寇)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열어구는 가공 인물인 듯하다. 이야기 속에는 후대인 위진 시대의 불교 사상도 뒤섞여 있다. 열자는 전한 말기에 이미 현재와 같이 천서(天瑞), 황제(黃帝), 주목왕(周穆王), 중니(仲尼), 탕문(湯問), 역명(力命), 양주(楊朱), 설부(說符) 등 8편의 구조가 갖추어져 있었던 듯하다.
진(晉)나라 때 장잠(張湛)이란 사람이 주석을 한 책이 널리 읽혔는데, 장잠이 원래의 책을 바탕에 깔고 여러 다른 기록을 뒤섞었는지 모른다. 이 책은 노자·장자와 함께 도가사상의 고전으로 널리 읽혔으며, 특히 생명 현상과 우주 자연의 변화를 성찰하고 그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논했다. 조원(造園) 방식에 삼신산의 상징을 도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고대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삼신산 이야기는 열자의 탕문(湯問) 편에 나온다. 원문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渤海之東(발해지동), 不知幾億萬里有大壑焉(부지기억만리유대학언).…其中有五山焉(기중유오산언). 一曰岱輿(일왈대여), 二曰員嶠(이왈원교), 三曰方壺(삼왈방호), 四曰瀛洲(사왈영주), 五曰蓬萊(오왈봉래).
발해의 동쪽, 몇 억만 리인지 모를 곳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 속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어서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혹은 방장方丈), 영주(瀛洲), 봉래(蓬萊)라고 한다.
五山之根(오산지근), 無所連著(무소연착), 常隨潮波(상수조파), 上下往還(상하왕환), 不得 峙焉(부득잠치언). 仙聖毒之(선성독지), 訴之於帝(소지어제).…乃命?彊(내명우강), 使巨鼇十五(사거별십오), 擧首而戴之(거수이대지).
다섯 산은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늘 물결을 따라서 솟아났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떠돌아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선인들은 이것을 괴롭게 여겨, 이 사실을 천제에게 호소하였다. 즉각 우강(북극을 관장하는 신)에게 명령하여 커다란 거북 15마리에게 머리를 들어 그 산들을 머리 위에 싣도록 했다.
龍伯之國有大人(용백지국유대인)…一釣而連六鼇合負(일조이연육별합부)…於是(어시), 岱輿員嶠二山(대여원교이산), 流於北極(유어북극), 沈於大海(침어대해).
용백 나라에 거인이 있어, …한 번 낚싯줄을 드리워서 여섯 마리의 거북을 낚아 한데 꿰어서 전부 다 메고 갔다. …이에 대여와 원교의 두 산이 북쪽 끝으로 흘러가버려, 큰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본래 발해 동쪽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골짜기 속에 다섯 산이 있고, 그 산들은 물 위에 둥둥 떠다녔으므로 거기에 사는 신선들이 안정할 수 있도록 상제가 큰 거북들 열 다섯 마리를 시켜서 등에 지고 있게 했다. 그런데 용백국의 거인이 여섯 마리의 거북을 잡아가서 두 섬은 큰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고, 그래서 삼신산이 남았다는 이야기다. 원문의 鼇(오)는 흔히 ‘자라’로 풀이하지만 실제는 큰 바다거북을 말한다.
이 글은 우주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여, 상식을 기준으로 삼아 우주의 큰 진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내용이다. 시간은 무한하다는 것, 공간도 무한하다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지극히 큰 것을 말한 부분에 삼신산 이야기가 나온다. 해당 부분을 전부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발해의 동쪽, 몇 억만 리인지 모를 곳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는 정말로 밑바닥이 없는 골짜기로, 그 속은 한없이 깊어서 귀허(歸墟)라고 불린다. 천상계의 모든 물, 은하수의 흐름 등이 전부 이 골짜기로 쏟아지는데, 수량은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는다. 골짜기 속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어서 대여, 원교, 방호(혹은 방장), 영주, 봉래라고 한다.
이 산들은 주위가 3만리나 되고, 정상의 평지는 9천리나 된다. 산과 산의 사이는 7만리나 떨어져 있는데, 그것을 이웃에 있다고 말한다. 옥나무가 무리지어 나고 과실은 모두 맛이 있으며, 그것을 먹으면 먹은 사람은 모두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거기에 사는 자는 모두 선인(仙人)의 부류로, 낮이건 밤이건 산에서 산으로 비행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다섯 산은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늘 물결을 따라서 솟아났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떠돌아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선인들은 이것을 괴롭게 여겨, 이 사실을 천제에게 호소하였다. 그러자 천제는 다섯 산이 우주의 사방 끝 쪽으로 흘러가버려 선인들이 거주할 장소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해서, 즉각 우강(?彊)에게 명령하여 커다란 거북 15마리에게 머리를 들어 그 산들을 머리 위에 실어서 서로 교대하며 3교대로 하게 하여, 6만년마다 한 번씩 그렇게 하게 했다. 그래서 다섯 산은 비로소 한 장소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용백(龍伯) 나라의 거인이, 발을 들어 서너 걸음도 떼지 않았거늘 벌써 다섯 산의 곳에 이르러서는, 한 번 낚싯줄을 드리워서 여섯 마리의 거북을 낚아 한데 꿰어서 전부다 메고는 자기 나라로 가서 거북의 껍데기를 태워서 점을 쳤다. 이에 대여와 원교의 두 산이 북쪽 끝으로 흘러가버려, 큰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 때문에 신선 가운데 이주한 자들이 수억이 될 정도였다. 이것을 안 천제는 대단히 화를 내어, 용백의 영토를 축소시켜 좁게 만들고, 또 용백의 백성들은 키를 줄여서 작게 만들었다. 그렇더라도 복희와 신농이 다스리던 때에 용백의 사람들은 키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스케일이 큰 이야기인가. 하지만 또 얼마나 유쾌한가. 발해라는 나라 이름도 이 설화의 공간구조와 관련이 깊다. 또 조선의 학자이자 서도가였던 이광사(李匡師)는 이 글을 인용해서 자기 호를 원교라고 했다. 살던 곳이 지금의 만리 고개, 즉 둥그재(원교圓嶠)인 데다가, 당쟁으로 집안이 망한 것이 마치 원교가 침몰한 것과 같다고 해서 그런 호를 붙인 것이다. 員은 圓의 옛 글자로, 둘은 서로 통해 쓴다.
열자의 ‘탕문’ 편은 상식을 벗어난 거대한 사유 양식이 있을 수 있음을 여러 예증을 들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세속의 인간보다 뛰어난 성인, 성인보다 뛰어난 신령, 신령을 초월한 자연에 대해 논하고, 인간의 분별적 지식에 의해 특정화되고 강조되고 의식된 것의 범위를 뛰어넘어 삶의 최고의 원리인 균(均)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얄팍한 지식과 고착된 상식만으로 남을 재단하고 세상을 편향된 시각으로 이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열자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과 상식이 혹시라도 진리와 도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하고, 사회적 통념이나 떠도는 소문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의 시각을 갖출 필요가 있을 듯하다.
智之所知則淺矣
자기 지식이 아는 것에 제한되어 버리면 도(道)에 이르는 것이 얕아지고 만다
서울의 성수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위치한 압구정동은 본래 압구정이란 정자가 그곳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곧 세조의 정권을 성립시킨 책사 한명회(韓明澮)가 그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벗하면서 살겠다는 뜻에서 압구(狎鷗)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유래한다. 狎은 아주 가깝게 지낸다는 뜻이다. 송나라의 명재상 한기(韓琦)도 압구정이란 정자를 두었던 일이 있으니, 한명회는 스스로를 한기에게 견준 셈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한강 부근에는 정자가 많았지만, 압구정은 가장 유명하고 또 시빗거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명회는 딸을 예종(재위 1468~1469년)의 비로 들이고 또 다른 딸을 성종(재위 1469~1494년)의 비로 들이면서 권력을 내놓지 않아 비난을 샀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당초 왕권을 강화하여 정국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세조 집권 이후에는 높은 관직을 차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조 말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더니 세조가 죽은 뒤 남이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1등에 올랐으며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였을 때는 병조판서까지 겸했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 1등에 올랐고, 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의 일도 관장했다.
후대의 지식인들이 한명회와 그의 압구정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동각잡기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확실히 그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난다. 언젠가 명나라 사신이 그 정자에 놀러 가겠다고 하자 한명회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한명회는 노기를 띠고 일어났다. 탄핵의 일을 맡은 대간(臺諫)이 한명회의 무례함을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여 한명회는 잠시 외지로 귀양을 가야 했다.
남효온의 ‘추강냉화’에서는 한명회가 정자를 지어놓고도 벼슬에 연연하여 떠나가지 못하므로 임금이 그를 송별하는 시를 짓자 문사들이 차운(次韻)하여 수백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종이 압구정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일이 있는데 이 일화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 여러 시들 가운데 최경지(崔敬止)가 풍자의 뜻을 담아 지은 시가 압권이었다.
세 번이나 은총을 흠씬 입자
정자 있어도 와서 놀 뜻이 없구나.
마음속 욕심을 정히 가라앉힌다면
벼슬살이 바다에서도 갈매기와 친하련만.
三接慇懃寵渥優(삼접은근총악우) 有亭無計得來遊(유정무계득래유)
胸中政使機心靜(흉중정사기심정) 宦海前頭可狎鷗(환해전두가압구)
한명회는 이를 미워해서 현판에 올리지 않았다. 뒷날 이윤종(李尹宗)이란 선비가 압구정에 올라 쉬다가 장편 대작을 지었는데 그 끝에 ‘有亭不歸去(유정불귀거), 人間眞沐?(인간진목후)’라 적었다고 한다. “정자 지어두고 귀거래를 하지 않다니, 인간 세상의 정말 원숭이에게 갓을 씌운 격이로다”라는 뜻이다.
압구라는 이름은 물새와 가까이 지내고 세상 욕심을 잊겠다는 뜻이다. 세상 욕심을 기심(機心)이라 하므로 최경지의 시에서 그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압구의 고사는 본래 ‘열자’의 황제(黃帝) 편에서 나왔다.
황제는 중국 신화의 오제(五帝) 가운데 첫 번째 군주로, 중국의 한(漢)민족은 이 황제를 자신의 시조로 생각했다. ‘열자’의 황제 편은 ‘황제가 즉위하여 15년 동안 천부의 본성을 기르고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코와 입을 만족시켰지만 얼굴이 검게 되고 지쳤으므로 그 뒤 15년 동안 머리를 쓰고 지혜를 짜내 백성들을 다스리려 하였으나 역시 얼굴이 검게 되고 지치게 되자 일신을 아끼려고 마음을 쓰는 것도 잘못이고 천하를 다스리려고 마음을 쓰는 것도 잘못이라고 깨닫고 탄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황제는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노니는 꿈을 꾸고 난 후, 최고의 도라는 것은 심상의 분별지로는 발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28년간 나라를 다스려 화서씨의 나라처럼 만든 후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황제편은 인간이 정욕에 좌우되지 말고 우주 법칙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자유자재한 경지가 열린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나간다.
그 가운데 압구의 고사는 이러하다.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와 친하여 갈매기들이 늘 가까이 와서 놀았다. 그것을 본 그의 아버지가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아버지 말대로 다음날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갈매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의 기심(機心)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서 기심을 잊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망기(忘機)라고 하게 되었다.
원문을 읽어보면 이러하다.
海上之人(해상지인), 有好?鳥者(유호구조자). 每旦之海上(매단지해상), 從?鳥游(종구조유), ?鳥之至者(구조지지자), 百住而不止(백주이부지). 其父曰(기부왈), 吾聞?鳥皆從汝游(오문구조개종여유), 汝取來(여취래), 吾玩之(오완지). 明日之海上(명일지해상), ?鳥舞而不下也(구조무이불하야).
바닷가에 사는 사람으로, 갈매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매일 아침 그는 바닷가로 가서 갈매기와 함께 놀았는데, 그에게 오는 갈매기들이 백 마리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말하길, “듣자니, 갈매기가 너와 함께 노닌다고 하더구나. 네가 하나 잡아 가지고 오면 내가 가지고 놀겠다”라고 했다. 다음날 그가 바닷가로 가자, 갈매기들은 날아올라가 버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원문은 갈매기를 ?鳥(구조)로 적었다. ?(구)는 갈매기 鷗(구)와 같다. 百住而不止(백주이부지)에서 住(주)는 헤아릴 數(수)와 같으니, 백을 헤아려 그칠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원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압구(狎鷗)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후대 사람이 이 고사를 근거로 그 말을 만들어내어, 벼슬을 그만두고 재야에 숨는 은일(隱逸)을 압구라 하게 된 것이다. 구로망기(鷗鷺忘機)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황제 편에서는 이 고사의 뒤에 다음 논평이 붙어 있다. 인간이 갈매기와 친할 만큼 기심을 잊었다는 관점보다도, 갈매기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아는 감응(感應)의 사실에 초점을 둔 것이다.
故曰(고왈), 至言去言(지언거언), 至爲無爲(지위무위). 齊智之所知則淺矣(제지지소지칙천의).
그러므로 최상의 말은 언어를 떠나고 최상의 행위는 행동이 없다. 자기 지식이 아는 것에 제한되어 버리면 도(道)에 이르는 것이 얕아지고 만다.
齊智之所知(제지지소지)에 대해서는 齊(제)를 한계 짓는다는 뜻으로 보는 설과 齊智(제지)를 일반인의 지혜라는 뜻으로 보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앞의 설을 따랐다.
본래 열자에서는 압구의 고사를 예로 들어, 상식을 넘어선 감응의 오묘함에 대해 말하고, 궁극의 경지는 상식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바닷가의 사람이 갈매기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어울려 놀고, 또 그가 잡아가려고 하자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 내려오지 않은 것은, 갈매기가 말을 떠난 경지에서 감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 한문의 고사는 반드시 원래의 문맥 그대로 쓰이지만은 않는다. 고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그 가운데는 원래 문맥과 독립한 제3의 뜻을 오히려 우세하게 환기하는 것들이 있다. 압구를 인간의 관점에서 은일(隱逸)이라든가 망기(忘機)라든가 하는 뜻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열자’는 사물 하나 하나에 대한 개별 의식을 초월하여 만물을 일체로 보게 되면 사물에 구속되지 않아서 자유자재한 화(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권력을 쥔다는 것은 얼핏 남보다 더 많은 자유를 얻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권력에 얽매이는 것이어서 진정으로 자유자재함은 和의 경지와는 정반대다. 정치권력만 그러하겠는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이 다 그러하리라.
美 작가 샐린저 작품에 등장한 열자의 구방고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부음이 2010년 정월 말 신문에 실렸다. 샐린저는 1951년에 출판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일약 유명해졌던 미국의 작가다. 1919년생이니, 향년 아흔둘. 오랫동안 은둔을 하여, 그를 소재로 삼아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나는 이 소설의 주제나 이야기 방식을 좋아하면서도, 한때 이 소설을 아주 싫어했다. 이유는,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이 책을 읽은 뒤 자신을 주인공 홀든과 동일시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공부를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였다. 교양 강의 때 소개해주려고 되읽고는 서재에 아무렇게나 두었는데, 아들이 그것을 가져다 읽은 것이다. 하도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 성년이 될 때까지 이 책만은 읽지 말아주길 바랐으나, 책을 좋아하는 아들의 촉수를 막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올해 정월 초에 나는 집필 중인 어떤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샐린저가 1963년에 발표한 소설집 ‘목수들아, 대들보를 올려라’(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4)를 읽었다. 그런데 소설 속 글래스가(家)의 장남인 시모어가 뮤리엘과 결혼하기로 해놓고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이야기가 너무 뚱딴지 같았다. 그래서 샐린저가 1953년에 발표한 소설집 ‘아홉 가지 이야기’(최승자 옮김, 문학동네, 2004)도 읽어보았다. 후자에 수록되어 있는 중편‘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을 보면, 천재이지만 분열증을 앓던 시모어는 뮤리엘과 결혼하여 플로리다로 휴가를 가서 자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40대가 된 차남 버디는 시모어의 예술가적 삶을 회상하면서 독백을 하는데, 그것이 ‘시모어 서문(序文)’이다. 이 글은 바로 샐린저 자신이 도달한 미학 세계를 강론한 것이어서 아주 난해하되, 동양의 고전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 매우 특이하다.
두 책을 다 읽고서야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의 첫머리에서 17세의 시모어가 누이동생 프레니를 위해 손전등 불 아래서 구방고(九方皐) 이야기를 읽어주는 장면이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았다. 구방고는 춘추시대에 말(馬)의 상을 잘 보던 사람이다. 시모어는 구방고 이야기에서 외적이고 세세한 것들을 버려두고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응시하라는 지침을 읽어냈던 것이다.
시모어가 누이동생에게 읽어 주는 책은 소설에서는 도교에 관련된 책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실은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나온다. ‘설부’란 우주의 큰 진리를 말하는데, 신표로 쓰던 부절(符節)의 두 쪽이 서로 들어맞듯이 그 진리에 부합시킨다는 뜻이다. 설부 편은 인간사의 천변 만화를 관통하는 도리를 추론하면 모든 일을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변화에 통하는 요령을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때 참진리란 외관에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고 구방고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언(寓言)이다.
진(秦)나라 목공이 좋은 말(馬)을 구하려고, 말을 잘 보고 나이도 많은 백락(伯樂)에게 말 볼 줄 아는 사람이 일족 가운데 있으면 추천하라고 했다. 백락은 자기 자식들은 용렬하여 추천할 자가 없고, 일생 노고를 같이한 구방고가 자기보다 말을 더 잘 본다면서 그를 추천했다. 목공은 구방고로 하여금 명마를 구해 오라고 명했다. 석 달 만에 돌아온 구방고는 사구(沙丘)란 곳에서 천리마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어떤 말인가?”하고 묻자, “암컷이고 털빛이 누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목공이 다른 사람을 시켜 말을 몰고 오게 했는데, 그 말은 수컷인 데다가 흑색이었다. 목공은 백락을 불러 “실패하고 말았도다. 그대가 말을 찾아오게 시킨 자는 누런 색깔인지 검은 색깔인지,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모르거늘, 어찌 말을 제대로 알아보았겠는가?”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백락은 “구방고는 말의 상(相)을 보는데 천기(天機)만 봅니다. 암컷인지 수컷인지, 황색인지 흑색인지는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구방고가 찾은 말은 과연 천하제일의 준마였다. 백락이 구방고를 변호한 내용을 읽어보기로 한다.
若皐之所觀(약고지소관), 天機也(천기야). 得其精而忘其?(득기정이망기추), 在其內而忘其外(재기내이망기외). 見其所見(견기소견), 不見其所不見(불견기소불견). 視其所視(시기소시), 而遺其所不視(이유기소불시). 若皐之相馬(약고지상마), 乃有貴乎馬者也(내유귀호마자야).
구방고가 보고자 한 것은 천기(자연스레 갖추어져 있는 본연의 자질)였습니다. 가장 정수가 되는 특징을 파악하고, 허접한 부분은 문제 삼지 않고 잊어버렸으며, 내면적인 본성을 분명하게 살피고, 외면적인 것은 문제 삼지 않고 잊어버렸습니다. 눈으로 잘 보아야 할 것은 충분히 보고,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않았습니다. 응시하여 살펴야 할 것은 충분히 응시하고, 응시해서 살피지 않아도 되는 것은 보지 않았습니다. 구방고가 말을 관상 보는 방식으로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말 자체의 본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천기(天機)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의 기(機)란 인간이나 생물의 생명력을 가리키니, 망기(忘機)란 말의 기(機)가 인공적인 교묘함을 가리킨 것과 다르다. 천기는 자연스레 갖추어져 있는 본연의 자질이란 뜻으로, ‘장자’에도 자주 나온다. 단, 천기라고 해도 관점에 따라 문맥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곧 인체나 생물의 몸에서 천연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하고, 마음이나 생기 같은 내면적인 기능을 가리키기도 한다.
구방고 이야기는 본질은 도외시하고 겉모습만 살피는 세태를 비판하는 말로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역시 이 고사는 외관을 돌파하여 사물의 핵심과 본질에 육박해 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때 여황빈모(驪黃牝牡)라고 하면 검은색과 누런색, 암컷과 수컷이란 말로 사물의 외면적 차별상을 가리킨다. 검은 색 여(驪)는 ‘이’로도 읽는다.
조선 중기의 문인들은 시문에서 특히 천기를 발현하려고 애를 썼다. 이를테면 인조 때 조익(趙翼·1579~1655)은 문장의 스승인 윤근수(尹根壽·1537~1616)가 자신의 문장에 병통이 있다고 지적하자, 서한을 내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이 문장에서 지향하는 바를 밝혔다. 그 일부는 이러하다.
사람의 정신 활동은 천기(天機)입니다. 천기가 발동하여 이루어진 것이 곧 글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글에 완급과 장단이 있게 되는 것 또한 글의 자연스러운 형세이니, 글자를 배열하여 문장으로 얽는 데 어찌 하나로 정해진 법칙이 있겠습니까. 글의 형세로 볼 때 본래 꼭 그렇게 해야 할 조건이 그때그때 주어지는 것이니, 완만하게 해야 할 경우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요, 급박하게 해야 할 경우 완만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형세로 보아 꼭 그렇게 되어야 할 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한 글자라도 더 보태면 군더더기가 될 것이요, 한 글자라도 삭제하면 어세가 끊어져 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학은 다리가 길고 오리는 짧은 것처럼 그 길고 짧고 한 본래의 조건에 알맞도록 따라야 하지, 길다고 해서 끊어 버리고 짧다고 해서 이어 붙이면 안 될 것입니다.
조익의 실제 글이 그가 지향했듯이 천기를 온전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지 없는지, 평가는 엇갈린다. 요컨대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참문학을 하겠다는 의식이 그의 선언에 담겨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샐린저의 예술론이나 조익의 문장론은 모두 형식보다는 내용, 외관보다는 본질을 중시한 논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열자’에서 구방고의 이야기를 끌어다 썼다. 예술이나 문장에서만 그러하겠는가. 표피적인 것들에 정신과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생명의 깊은 울림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바람이리라.
육도(六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중세기사와 병법서 ‘육도’의 기병전 전술
▲ 필라델피아 미술관 |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은 영화 ‘로키(Rocky)’의 주인공 실베스터 스탤론이 새벽에 거리를 달려와 층계를 오른 뒤 두 팔을 쳐들고 시내를 내려다보는 장면 때문에 명소가 되었다. 영화가 나간 뒤 계단 아래에 로키 동상이 생겼고, 그 앞에서 관광객들은 권투 글러브를 손에 끼고 저마다 포즈를 취한다. 1875년에 펜실베이니아미술관으로 출발하여 현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필적하는 크기를 갖고 있다는 이 미술관을 지난 3월에 찾았다. 헤드셋을 통해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면서 피카소 특별전(Celebrating Picasso)을 관람했는데, 입체파의 발전과 쇠퇴 과정을 차근차근 공부하느라 2층의 상설 전시장은 그냥 훅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뿔싸, 그것이 그렇지 않았다. 서유럽 중세 미술품을 시대별로 전시해 놓은 피리어드 룸(Period Room)을 돌아보면서 점점 눈이 커졌다. 고호의 ‘해바라기’가 방출했던 노란 빛보다도 16세기 엘 그레코의 ‘피에타’와 17세기 루벤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담긴 어두운 눈빛이 내 마음을 더 깊이 헝클어댔다. 마침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내면기행’과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집필한 뒤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그림들보다도 더 나의 시선을 얼어붙게 만든 것이 있었다. 중세 기사의 갑옷 전시실에 진열된, 왼쪽 가슴에 부러진 창이 꽂혀 있는 은색의 갑옷이었다. 기창(騎槍)시합인 틸트(Tilt)에서 기사가 입었던 것으로 1575년 독일 작센주(Saxony)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사무예시합으로 토너먼트의 하나인 틸트는 바리엔렌넨(Ballienrennen)이라고도 하며, 나무 장벽(바리엘)을 사이에 두고 두 기사가 마상 시합을 하다가 말에서 내려서는 두 자루의 검으로 전투를 계속하는 방식이다. 1 대 1 마상 창 시합인 자우스트(joust·란젠게쉬테히 Lanzengestech)와는 조금 다르다. 다만 필라델피아미술관에 전시된 여러 갑옷들에 대한 설명에 모두 틸트라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미술관 측은 틸트를 자우스트와 구분하지 않고 기창시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은색의 갑옷을 걸치고 가슴을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땅에 쓰러졌을 그 인물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은색 스틸의 갑옷은 진흙과 핏방울로 범벅이 되었을 당시의 모습은 남기고 있지 않다. 갑옷의 작은 부분들을 연결하는 일자 홈을 지닌 버튼, 어깨와 무릎을 잘 놀릴 수 있도록 좁은 조각들을 겹쳐 이루어진 곡선부, 기사가 지녔던 용기와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듯 버클 위에 올려진 왼쪽 장갑 부분이, 기사의 이름을 망각 속에 묻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구성하고 있었다.
문득 한문고전 가운데 육도(六韜)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 책이 중국의 고대 전술과는 달리 기병전의 전술을 상세하게 실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기병전은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그 이전까지는 전거(戰車)를 이용하여 공격하거나 군진이 서로 대치하다가 보병끼리 접전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육도의 도(韜)는 화살을 넣는 주머니로 ‘거두어 갈무리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는 병법의 비결을 깊이 감추고 나타내지 않음에 있다고 본 것이다. 전체는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 등 6권 60편으로, 병법만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대도(大道), 인간학과 조직학, 정전(政戰)과 인륜을 두루 논하였다. 그런데 ‘견도’의 ‘전기(戰騎)’에서는 기병에게 열 가지 승리할 전법과 아홉 가지 패할 전법이 있다고 하고, 승리 전법의 하나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이 전장에 막 이르러 아직 군진이 정돈되지 않아서 전군과 후군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전군의 기병을 함락시키고 그 좌우를 공격한다면 적은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적의 군진이 정돈되어 견고해져서 사졸에게 투지가 있을 때에는, 우리 기병은 좌우 양익으로부터 협공하여 에워싸듯이 해서, 그 중간을 치달려 지나가고 치달려 와서, 바람처럼 신속하게 우레처럼 격렬하게, 백주가 어둡게 될 정도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자주 깃발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저 우아한 스틸 갑옷을 걸친 중세의 기사가 틸트에서 투구 앞면을 가린 상태로 창을 꼬나든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기병을 ‘육도’에서 상기하게 된다. 그 기병의 전법이란 것도 오늘날 보기에는 상투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와 나의 전략과 형세를 비교하여 전법을 구상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적이 정돈되어 있을 때는 그를 교란시키고 마치 이쪽의 군세가 상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깃발을 자주 바꾸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육도’는 ‘삼략(三略)’이란 책과 아울러 흔히 ‘육도삼략’이라 일컫는다. 주나라의 태공망(여망)이 지었다고 전하지만 위진남북조시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려오고 마치 옛날 책인 것처럼 꾸민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을 알 수 없는 위서(僞書)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책이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만만하지 않다. 우선 송나라 때 고대 병법서의 고전들을 일컫는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무경칠서’를 대단히 중시해서 조선 전기에 수양대군은 최항을 시켜 ‘무경칠서주해(武經七書註解)’ 10권 5책을 만들게 했다. 조선시대의 무과시험 때는 무예 과목 이외에 강서(講書) 과목이 있었는데, 강서에서 ‘무경칠서’ 가운데 하나를 택해 이해의 정도를 시험하게 되어 있었다.
1748년(영조 24년)에 통신사 조명채(曺命采)가 지은 ‘봉사일본시문견록’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병법서 가운데 이 ‘육도’를 숭상해 왔다. 옛날 제호천황(醍酉胡天皇) 때에 신하 대강유(大江維)를 당나라에 보내어, 황금 5만냥을 바치고 육도·삼략 및 군승도(軍勝圖) 42조를 구득하여 당시까지 전한다고도 했다.
육도를 위서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문체가 치졸하다고 말하지만, 조선의 정조는 병법서 가운데 “육도와 손무자(孫武子) 같은 책은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건실하며 이취(理趣)가 정밀하고 깊으니, 의당 제자(諸子) 중에서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더구나 육도의 많은 어휘들이 성어로 널리 쓰이고, 심지어 이 책에서 거론한 의식은 후세의 의식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천하 얻는 것을 축록(逐鹿)이라 하는 것은 육도에서 “천하를 취득하는 것이 사슴 쫓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또 장수를 임명할 때 군주가 장수에게 부월(斧鉞·도끼)을 주어 휘하 장병을 벌하는 권한을 위임하는 의식을 치른 것은 ‘용도’의 ‘입장(立將)’에 근거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장수를 임명할 때는 좋은 날을 가려 교외에서 열병을 하면서 이와 같은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무도’의 ‘발계(發啓)’에 나오는 ‘?鳥將擊(지조장격) 卑飛斂翼(비비염익)’이란 말은 전투의 미학을 멋지게 표현했다. ‘지조’는 독수리나 매와 같은 맹금을 말하니 “맹금이 공격할 때는 먼저 낮게 날면서 날개를 거두는 법이다”라는 뜻이다. 맹금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신중하게 기회를 살피다가 한 번 공격하여 적에게 치명타를 가한다는 뜻이다.
또 ‘문도’의 ‘수토(守土)’에서는 반드시 전투에서의 일만이 아니라 군주의 정치에 대해서도 유비적(類比的) 의의를 지닌 다음과 같은 단락도 있다.
日中必彗(일중필혜), 操刀必割(조도필할), 執斧必伐(집부필벌). 日中不彗(일중불혜), 是謂失時(시위실시). 操刀不割(조도불할), 執斧不伐(집부불벌), 失利之期(실리지기).
태양이 중앙에 와서 정오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옷을 말려야 하고, 칼을 잡고 있으면 반드시 가르며, 도끼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쳐야 한다. 태양이 중앙에 왔는데도 옷을 말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시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칼을 잡고 있으면서 가르지 않고, 도끼를 잡고 있으면서 치지 않는다면 이로운 시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일을 행하려면 과감하게 결단하여 제때에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니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쳐라”라는 속담도 이 단락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원문의 ‘彗’는 ‘’와 같으며, 포쇄(曝?)한다는 뜻이다. 저 필라델피아미술관의 창에 찔린 스틸 갑옷을 남겨둔 중세의 기사는 맹금이 공격하듯 ‘낮게 날면서 날개를 거두는’ 자세를 취하지 못한 것일까? 틸트에서 상대의 창에 찔리는 사이, 그가 꼬나들었던 창은 상대의 어디를 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