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심경호 교수와 함께 읽는 한문고전

醉月 2011. 3. 31. 08:48

논어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심경호 고려대 교수가 주간조선 독자에게 한문 고전을 읽어줍니다. 심 교수는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 몽골, 베트남의 한문 고전까지 소개할 예정입니다. 심 교수는 ‘당시(唐詩)읽기’(1998년), ‘한시기행’(2005년), ‘한학 입문’(2007년), ‘선인들의 자서전:나는 어떤 사람인가’(2010년) 등 다수의 한문학 관련 저술을 낸 바 있습니다. 동아시아 고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심 교수가 안내하는 한문 경전 독법을 따라가면서 독자 여러분의 삶이 윤택해지는 기쁨을 맛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잘 아는 일본 관광지에 닛코(日光)가 있다. 이곳은 에도 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를 둔 도쇼궁(東照宮) 때문에 유명하다. 이 신사(神社) 앞에는 신에게 상징적으로 바치는 말을 두는 헛간 격자 벽에 세 마리 원숭이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나는 눈을 가리고, 하나는 귀를 막고, 하나는 입을 막고 있는 그 조각을 삼원(三猿·산엔)이라 한다. 
   
▲ 공자성적도 ‘聖門四科’/ photo 성균관대 박물관
   지난 4월에 일본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보니, 본래 네 마리의 상이 있어야 했는데 하나는 일부러 없앴다고 하면서 없어진 하나가 어떤 형상이었겠느냐는 퀴즈가 나왔다. 출연자들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사회자는‘고환을 가린 형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네 마리의 원숭이상을 조각한 것은 논어에서 기원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논어에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어서 그 말에 따라 네 마리를 조각했다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하지 말라”라고 한 그의 말은 명백히 잘못이다. 게다가 사회자의 추가 설명이 걸작이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뜻이어서 본래 고환을 가린 원숭이가 있었지만 그 형상이 하도 음탕해서 없앴다는 것이다.
   
   며칠 후 일본 중세문학과 불교를 전공하는 일본 교수들에게 삼원의 기원에 대해 물었더니 답변이 각기 달랐다. 한 분은 원숭이는 말을 수호한다는 설이 있어서 원숭이 형상을 만든 것이되, 세 마리의 상을 조각한 이유는 일본 천태종의 가르침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분은 삼종(三從)의 설이 와전되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이렇게 추정했다. 도쇼궁은 일본 신도의 사상과 불교의 사상을 융합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격화한 건조물이기는 하지만, 일본 승려들은 유학(儒學)도 함께 공부했고 에도 막부가 성립할 때는 유학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므로, 원숭이 조각도 논어에서 기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운운한 말은 본래 논어 안연(顔淵) 편의 첫 장(章)에 나온다.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말라’라는 뜻의 물(勿)이란 말이 네 번 나오므로 이것을 사물(四勿)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제자 안연(顔淵)이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이라고 했다. 극기복례란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예란 본래 예주(醴酒), 곧 감주를 이용해서 거행하는 의례를 의미했다. 여기서는 한 개인이 사회화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각종 통과의례와 한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각종 의식을 뜻한다. 과거에는 국가 전례나 종묘 제사에서부터 귀족 계층의 관례, 혼례, 장례와 상례 등이 모두 일정한 의식으로 정해져 있었다. 오늘날에도 각 단체의 의식과 가정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실상 예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도쇼궁의 삼원(三猿)
공자는 사회의 여러 계층들을 응집시켜 통일시키는 원리가 인(仁)이고, 그것을 행동과 의식으로 구체화한 것이 예(禮)라고 보았다. 그리고 각 개인이 자기의 부정한 욕망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그것이 곧 인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다시 안연이 욕심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하자, 공자는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에서 사사로운 욕망을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시청언동의 각각에 대해‘예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안연 편의 첫 장은 극기복례에 관해 문답했다고 하여 ‘극기복례장’이라고 부른다. 전체를 다시 읽어보자. 원문에 우리말의 토를 달아 소개한다. 이 현토는 조선 선조 때 교정청에서 만든 논어언해(論語諺解)를 기준으로 하되, 현대의 어법에 맞춰 약간 수정한 것이다.
   
   顔淵(안연)이 問仁(문인)한대 子曰(자왈), 克己復禮(극기복례)가 爲仁(위인)이니 一日克己復禮(일일극기복례)면 天下(천하)가 歸仁焉(귀인언)하나니 爲仁(위인)이 由己(유기)니 而由人乎哉(이유인호재)아.
   
   顔淵曰(안연왈), 請問其目(청문기목)하노이다. 子曰(자왈), 非禮勿視(비례물시)하며 非禮勿聽(비례물청)하며 非禮勿言(비례물언)하며 非禮勿動(비례물동)이니라.
   
   顔淵曰(안연왈), 回雖不敏(회수불민)이나 請事斯語矣(청사사어의)로리이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높은 지위의 위정자가 하루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인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시작하겠는가?”라고 했다.
   
   안연이 “그 조목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 안연은 말했다. “회(안연 자신의 이름)가 똑똑하지는 못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

   
   논어에는 이렇듯 공자와 제자가 문답을 주고받은 내용이 많다. 또 공자와 위정자의 대화, 공자와 은둔자의 대화, 공자 제자들 사이의 문답, 제자와 위정자의 대화도 들어 있다. 그래서 책 이름에 답술(答述)이란 뜻의 어(語)를 사용했다. 논(論)은 논변(論辯)이란 말인 듯하다. 따라서 논어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들의 어록이다. 모두 20편인데, 전체를 상론과 하론으로 나누기도 한다.
   
   공자는 예(禮)를 이상적 시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예법으로 보았다. 곧 예가 지닌 지속의 측면을 중시하여, 기존의 예를 자의적으로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형식 모두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또한 각 개인은 예를 구속 요건으로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예를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공자는 양화(陽貨) 제11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禮云禮云(예운예운)이나 玉帛云乎哉(옥백운호재)아.
   
   사람들이 예다 예다 하지만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옥과 폐백을 두고 예라 하는 것이겠느냐?

   
   예법과 의식은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다. 하지만 형식만 중시하면 사회 전체가 활력을 잃게 된다고 공자는 경고한 것이다. 공자는 사회 구성체의 안정을 위해서는 예를 중시해야 한다고 여기고, 특히 위정자와 지식층의 실천 의지를 문제 삼았다. 이 점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담아들어야 할 측면도 있다. 공자가 주목했듯이 예는 사회의 구성원을 조화롭게 하고 사회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각 개인은 부정한 욕심을 버리고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공적 가치에 자신의 행동을 부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논어의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말은 “예가 아니면 간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정말이지 “논어 읽으면서 논어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는 것은 요행일 따름이다

논어의 원문에는 眞(참 진)이란 글자가 없다. 공자는 참된 인간이 되라고 가르쳤는데 어째서 원문에 眞이 없을까, 의아해 할지 모른다.
   
   논어에서 인간의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直(곧을 직)이다. 直은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설에 따르면 기원이 이러하다.
   
   直은 省(살필 성)과 (숨을 은)으로 이루어져 있다. 省은 눈이 지닌 주술의 힘을 더 크게 하려고 눈썹에 칠을 한 모습이다. 후에 지역을 순찰해서 부정을 단속하는 일을 가리켰다. 은 담으로 둘러싸인 은신처를 뜻한다. 곧 直은 몰래 조사해서 부정을 바로잡는다는 뜻을 지녔다. 정직(正直)이라는 복합어로 주로 사용한다.
   
   한편 眞의 꼭대기는 죽은 사람을 거꾸로 매단 모습인 化(될 화)와 같고, 아래의 (매달 현)은 머리를 거꾸로 걸어둔 형태다. 곧 眞은 예기치 못한 재난을 당하여 고꾸라져 죽은 사람을 말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으므로 영원한 것, 참의 존재라는 뜻을 지니며, 거기서부터 진실(眞實)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영원한 진실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 장자다. 이에 비해 인간의 참 본성을 정직하다고 주장한 것이 논어다.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는 정직하지 못한 인간은 살아 있다 해도 참 존재가 아니며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人之生也直(인지생야직)하니 罔之生也(망지생야)는 幸而免(행이면)이니라.
   사람의 생명 본질은 정직함이니, 정직함 없이 사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일 뿐이다.

   
   
   공자는 정직하지 않아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나 정직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덕목이라고 믿었다.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공자는 당대의 사람들은 그 옛날의 이상 시대에 올바른 도를 실천해서 형성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직한 심성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斯民也(사민야)는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삼대지소이직도이행야)니라.
   지금 이 사람들은 하, 은, 주 삼대 때 이래로 올바른 도를 실행하여 형성하여 왔다.

   
   
   공자는 공야장(公冶長) 편에서 미생고(微生高)란 사람의 사례를 통해서는 정직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미생고는 정직하다고 소문 난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려달라고 하자 마침 식초가 집에 없어 식초를 이웃에서 빌려다 주었다. 이때 자기 집에 없으면 없다고 해야 했거늘 그러지 않았고, 이웃에 가서는 자기가 쓸 것이라 했다. 공자는 미생고가 자신의 양심을 굽히고 명예를 추구한 잘못, 미덕을 갈취하려고 은혜를 파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정직은 어떠한 흠결도 있어서는 안되는 순수한 상태의 도덕관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논어를 주자학의 관점에서 해설한 주석들을 모은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읽은 논어의 텍스트. 고려대학교 만송소장 목판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면 정직은 지극히 공적인 태도를 말한다. 헌문(憲問) 편에서 공자는 남이 내게 원한을 품고 있거늘 나의 편에서 은덕을 베푼다면 그것은 무언가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以直報怨(이직보원)이요 以德報德(이덕보덕)이니라.
   정직함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

   
   
   곧 공자는 내게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정직의 태도로 대하라고 했다. 사랑하고 미워함, 취하고 버림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는 것이 정직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의 장에서 보면 정직은 올바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일을 말한다. 위령공 편에서 공자는 사어(史魚)라는 인물에 대해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 같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 같았도다”라고 칭송했다. 사어는 위(衛)나라 대부인데, 평소 어진 거백옥(?伯玉)은 등용하지 못하고 모자란 미자하(彌子瑕)는 물리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래서 임종 때 빈소를 제대로 갖추지 말고 시신을 창문 아래에 두라고 유언했다. 위나라 군주가 조문을 왔다가 곡절을 알고서는 뉘우쳤다고 한다. 자기의 시신으로 군주에게 간언을 한 것이다. 사어는 신하로서 “군주를 속이지도 않고 군주의 안색을 범하면서까지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정직함을 실천한 것이다.
   
   인간이 정직하게 살아나가는 데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둘 있다. 만일 법률상의 신의가 인륜의 도리와 충돌할 때는 인륜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 또 자기만 정직하다 여기지 말고 현실의 맥락을 두루 살피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자로(子路) 편에 보면, 초(楚)나라 섭공(葉公)이 자기 고장에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증인으로 나선 정직한 아들이 있다고 자랑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덮어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덮어줄 것이니,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절대적 사랑의 관계이므로, 부모가 법을 어기면 자식은 울면서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양화(陽貨) 편에서 공자는 인간의 주요한 덕목으로 인(仁), 지(知), 신(信), 직(直), 용(勇), 강(剛)의 여섯 가지를 들되 그 덕목들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각각 우(愚), 탕(蕩), 적(賊), 교(絞), 난(亂), 광(狂)의 여섯 폐단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정직하되 공부하지 않으면 빠지게 되는 폐단이 교(絞)다. 교는 급하다는 뜻으로, 전체 맥락을 살피지 않고 자신만 올바르다고 주장하여 상황을 얽히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논어의 가르침은 인(仁)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공자는 인간이 인(仁)을 실천하는 이유는 누구나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정직은 곧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과 관계가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 주자 즉 주희(朱熹·1130~1200)도 임종 때 제자들에게 直에 주목하라고 가르쳤다. 71세로 죽기 직전의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1층에 계셨는데 설사를 조금 하셨다. 건양 지사 장규(張揆)가 와서 물품을 드렸으나 선생은 거절하시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조금만이라도 관대한 정치를 한다면 백성은 그만큼 은혜를 더 얻을 수가 있을 것이오.” 장규는 재상의 위세를 믿고 가혹한 행정을 하고 있어 백성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날 밤 선생은 횡거선생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대해 강론하셨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하는 요점은 하나하나의 사실에 대해 그 시비를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다. 그것이 오래 쌓이면 마음이 이(理)와 하나가 되어 마음에서 피어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 아무 사심이 없게 된다. 성인들이 만사에 대응하고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은 직(直)의 원리에 따를 따름이다.”
   
   
   만년의 주자는 간신 한탁주가 그의 학문을 비판하고 그의 제자들을 탄압하여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다리에도 병이 있었고 가슴은 늘 콱콱 막혔으며, 60대에는 왼쪽 눈이 완전히 실명했다. 그렇지만 주자는 인간에 대한 낭만적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주자는 자연도 直의 원리에 따라 운행하고 성인도 直의 원칙에 따라 인간 구원의 사업을 이루었듯이, 공부하는 사람도 시비를 분명하게 밝혀서 생각이나 감정을 늘 정직하게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본성을 정직하다고 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공자의 가르침은 얼핏 보면 무척 단순하면서 낭만적이다. 하지만 현실구원의 그 음성은 너무도 강렬하다.

天之未喪斯文也이니 匡人이 其如予何리오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거늘 광 땅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한문 고전에 관해 강의하는 교양과목 수업 때 공자를 어떤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느냐고 학생들에게 묻고는, 대학(고려대학) 구내에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찾아보고 자신의 이미지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라는 숙제를 내었다. 학생들은 캠퍼스 안에 공자의 조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주쯤 뒤 여러 학생들이 대학원 건물에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중국 산둥대학이 2005년 고려대학교에 증정한 이 조각상은 공자를 어질고 지혜가 많은 인물로 잘 부각시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무언가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공자는 단순히 어질고 지혜가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쉰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얻었지만, 국내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천하를 떠돌면서 자신의 이상을 전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쉰이 넘어 오늘날 사법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라는 직책을 갖게 되었을 때는 권세가를 붙잡아서 사형에 처할 만큼 매서운 면이 있었고, 천하를 떠돌 때는 상가의 개와 같이 추레한 몰골이었으며, 만년에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을 때는 평온하고 인자한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 추레한 몰골, 평온한 얼굴을 저 조각상은 도저히 한꺼번에 담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비단 고려대학교의 캠퍼스에 있는 조각상만 공자의 모습을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대만, 일본, 심지어 미국에 있는 공자의 조각이나 초상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대개 무언가가 부족했다. 더구나 후대에 공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이마를 지나치게 불거져 나오게 만들고 해구(海口)라고 해서 커다란 입을 지닌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아예 공자가 아니라 괴물을 상상해냈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다만 사법관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었을 때의 형상을 마치 염라대왕처럼 무섭게 그린 그림은 오히려 실상을 얻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논어를 읽는 것은 자기만의 공자 상(像)을 마음속에 그려내는 일이다. 일생 천 번, 만 번을 읽고 원문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운다고 해도 자기만의 공자상을 그려낼 수 없다면 그것은 논어를 공부한 것이 아니다.
   

▲ 1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공자 초상. 2 대사구 시절의 공자상(곡부 문물국). 3 장안 비림의 공자상.


   공자의 일생에 관해 신뢰할 만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권47에 작성해 둔 공자 세가(孔子 世家)이다. 세가는 제후로서 정치권력을 행사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적는 양식인데, 사마천은 공자의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마치 제후의 전기를 적듯이 공자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후에 나온 공자의 전기는 모두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단 사마천의 글도 공자가 죽고 난 400년 뒤의 글이므로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
   
   공자는 이름이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자(子)는 선생의 뜻으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한문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공자의 이름인 丘라는 글자가 나와 있을 때 글자 그대로 읽지 않고 피하여 아무개 모(某)라고 읽는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邑), 즉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흘(紇), 자는 숙량(叔梁)이고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다. 공자는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빈곤 속에 자랐으나 주나라의 전통 문화를 학습하였으며 말단 관리를 거쳐 50세가 넘어서 노나라 정공(定公)에게 발탁되었다. 공자는 노나라 실력자인 세 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의 권력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기원전 497년, 56세 때 실각하여 노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 후 14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遊說)하다가 기원전 484년 69세 때 고향에 돌아가 교육에 전념했다. 이 무렵 아들 리(鯉)와 제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으며 74세로 사망했다.
   
   공자는 주 왕조의 질서를 모범으로 삼아 이상적인 덕치(德治)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공자는 가족제도 속에 사회질서의 원리가 있다고 보고, 보편적인 도덕의 기초를 인(仁)이라는 인간 내면의 자연성에서 구했다. 또한 인(仁)이 사회에서 구현되려면 사회규범인 예(禮)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자의 사후에 제자백가가 일어났으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나와서 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하를 떠돌 때의 공자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평했다고 한다. 상가지구란 집 잃은 개, 곧 들개라는 뜻이다. 15년 전쯤 홍콩·대만·일본·한국의 합작으로 만든 공자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각 장면마다 검은 들개가 등장한다. 공자의 현실적 처지를 상징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상가지구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사기의 공자세가에 나온다. 정나라에서 공자는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동문 부근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를 본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마는 요(堯) 임금을 닮고, 목은 순(舜) 임금의 사법관 고요(皐陶) 같으며, 어깨는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우(禹) 임금에게 세 치 미치지 못했고, 실의한 모습은 집 잃은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이 그 말을 전하자 공자는 웃으면서 “내 모습을 묘사한 것은 과연 그럴까 알 수 없으나, 상가의 개 같다고 한 말은 옳은 듯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공자는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몹시 어지러웠으므로 이상주의를 받아들일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후들로서는 부국강병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공리주의자들이 더 필요했다. 공자는 붙어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돌았다. 그것을 철환천하(轍環天下)라고 한다. 그 모습은 집 잃은 개처럼 실의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광(匡)이란 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를 양호(陽虎)란 인물로 오인해서 핍박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文王旣沒(문왕기몰)하시니 文不在玆乎(문부재자호)아 天之將喪斯文也(천지장상사문야)인댄 後死者(후사자)가 不得與於斯文也(부득여어사문야)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천지미상사문야)이니 匡人(광인)이 其如予何(기여여하)리오.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왕이 만든 문화는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문화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후세의 내가 이 문화에 간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거늘 광 땅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은 은나라 말의 서백(西伯)으로, 주나라를 일으켰다. 그 문화적 영웅에 의해 이루어진 사문(斯文), 곧 ‘이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하는 자부심을 드러낸 말이다. 사문이라고 하면 유학이라든가 유교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악명 높았던 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말도 ‘유교의 정통을 어지럽히고 해치는 자’라는 의미로 남을 혹독하게 비방하는 말이었다.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는 하늘에 대한 관심보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관심을 깊이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선진(先進) 편을 보면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리고 당시 세상을 피해 살던 은자(隱者)들과 조우하거나 그들의 비난을 들었을 때도, 새 짐승과는 한 무리가 될 수 없으며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공자는 곤궁에 처해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논어를 읽는 일은 그 강인한 인격을 배우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열자(列子)

渤海之東 不知幾億萬里有大壑焉
발해 동쪽 몇 억만 리인지 모를 곳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경주의 안압지는 고대의 정원 문화가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목선이나 주령(酒令) 같은 유물들은 당시의 유희 광경을 상상하게 한다.
   
   조선시대에 안압지는 기러기가 날고 오리가 물놀이하는 곳으로 인식되었지, 고대 유적으로서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용장사 부근에 오래 살았던 김시습은 안압지를 안하지(安夏池)라 부르고, “못을 파서 바다를 만들어 물고기와 소라를 기르고, 용의 목구멍으로 물을 뿜어내니 형세가 우람하다”고 노래했을 뿐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안압지 중앙에는 세 개의 섬이 있고, 그 섬들은 봉래, 방장, 영주 등 신선이 거주하는 삼신산을 상징했다고 한다.
   
   못을 파고 삼신산을 조성하는 방식은 동아시아 고대의 정원에서는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진시황은 상림원에 못을 파고 봉래산을 만들었고, 한무제는 건장궁의 태액지에 삼신산을 만들었다. 백제 무왕도 궁남지에 방장산을 만들었으며, 백제의 정원을 만드는 기법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 하늘에서 본 경주 안압지 / 조선일보사


   예로부터 안압지의 섬은 저절로 움직인다는 전설이 있었다. 정조 때 승지 김상집은 신라의 고적에 대해 보고하는 중에 “안압지에 흙이 떠 있고 넓이가 너럭바위만하고 그 위에 덩굴풀이 있는데,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라고 했다. 삼신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섬이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실은 삼신산 설화와 관련이 있다.
   
   삼신산 이야기는 도가 계통의 여러 고전에서 나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자(列子)라는 고전이다. 주나라의 열어구(列禦寇)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열어구는 가공 인물인 듯하다. 이야기 속에는 후대인 위진 시대의 불교 사상도 뒤섞여 있다. 열자는 전한 말기에 이미 현재와 같이 천서(天瑞), 황제(黃帝), 주목왕(周穆王), 중니(仲尼), 탕문(湯問), 역명(力命), 양주(楊朱), 설부(說符) 등 8편의 구조가 갖추어져 있었던 듯하다.
   
   진(晉)나라 때 장잠(張湛)이란 사람이 주석을 한 책이 널리 읽혔는데, 장잠이 원래의 책을 바탕에 깔고 여러 다른 기록을 뒤섞었는지 모른다. 이 책은 노자·장자와 함께 도가사상의 고전으로 널리 읽혔으며, 특히 생명 현상과 우주 자연의 변화를 성찰하고 그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논했다. 조원(造園) 방식에 삼신산의 상징을 도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고대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삼신산 이야기는 열자의 탕문(湯問) 편에 나온다. 원문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渤海之東(발해지동), 不知幾億萬里有大壑焉(부지기억만리유대학언).…其中有五山焉(기중유오산언). 一曰岱輿(일왈대여), 二曰員嶠(이왈원교), 三曰方壺(삼왈방호), 四曰瀛洲(사왈영주), 五曰蓬萊(오왈봉래).
   
   발해의 동쪽, 몇 억만 리인지 모를 곳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 속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어서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혹은 방장方丈), 영주(瀛洲), 봉래(蓬萊)라고 한다.
   
   五山之根(오산지근), 無所連著(무소연착), 常隨潮波(상수조파), 上下往還(상하왕환), 不得 峙焉(부득잠치언). 仙聖毒之(선성독지), 訴之於帝(소지어제).…乃命?彊(내명우강), 使巨鼇十五(사거별십오), 擧首而戴之(거수이대지).
   
   다섯 산은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늘 물결을 따라서 솟아났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떠돌아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선인들은 이것을 괴롭게 여겨, 이 사실을 천제에게 호소하였다. 즉각 우강(북극을 관장하는 신)에게 명령하여 커다란 거북 15마리에게 머리를 들어 그 산들을 머리 위에 싣도록 했다.
   
   龍伯之國有大人(용백지국유대인)…一釣而連六鼇合負(일조이연육별합부)…於是(어시), 岱輿員嶠二山(대여원교이산), 流於北極(유어북극), 沈於大海(침어대해).
   용백 나라에 거인이 있어, …한 번 낚싯줄을 드리워서 여섯 마리의 거북을 낚아 한데 꿰어서 전부 다 메고 갔다. …이에 대여와 원교의 두 산이 북쪽 끝으로 흘러가버려, 큰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본래 발해 동쪽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골짜기 속에 다섯 산이 있고, 그 산들은 물 위에 둥둥 떠다녔으므로 거기에 사는 신선들이 안정할 수 있도록 상제가 큰 거북들 열 다섯 마리를 시켜서 등에 지고 있게 했다. 그런데 용백국의 거인이 여섯 마리의 거북을 잡아가서 두 섬은 큰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고, 그래서 삼신산이 남았다는 이야기다. 원문의 鼇(오)는 흔히 ‘자라’로 풀이하지만 실제는 큰 바다거북을 말한다.
   
   이 글은 우주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여, 상식을 기준으로 삼아 우주의 큰 진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내용이다. 시간은 무한하다는 것, 공간도 무한하다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지극히 큰 것을 말한 부분에 삼신산 이야기가 나온다. 해당 부분을 전부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이광사의 자호설 photo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광사자필본


   발해의 동쪽, 몇 억만 리인지 모를 곳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는 정말로 밑바닥이 없는 골짜기로, 그 속은 한없이 깊어서 귀허(歸墟)라고 불린다. 천상계의 모든 물, 은하수의 흐름 등이 전부 이 골짜기로 쏟아지는데, 수량은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는다. 골짜기 속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어서 대여, 원교, 방호(혹은 방장), 영주, 봉래라고 한다.
   
   이 산들은 주위가 3만리나 되고, 정상의 평지는 9천리나 된다. 산과 산의 사이는 7만리나 떨어져 있는데, 그것을 이웃에 있다고 말한다. 옥나무가 무리지어 나고 과실은 모두 맛이 있으며, 그것을 먹으면 먹은 사람은 모두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거기에 사는 자는 모두 선인(仙人)의 부류로, 낮이건 밤이건 산에서 산으로 비행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다섯 산은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늘 물결을 따라서 솟아났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떠돌아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선인들은 이것을 괴롭게 여겨, 이 사실을 천제에게 호소하였다. 그러자 천제는 다섯 산이 우주의 사방 끝 쪽으로 흘러가버려 선인들이 거주할 장소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해서, 즉각 우강(?彊)에게 명령하여 커다란 거북 15마리에게 머리를 들어 그 산들을 머리 위에 실어서 서로 교대하며 3교대로 하게 하여, 6만년마다 한 번씩 그렇게 하게 했다. 그래서 다섯 산은 비로소 한 장소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용백(龍伯) 나라의 거인이, 발을 들어 서너 걸음도 떼지 않았거늘 벌써 다섯 산의 곳에 이르러서는, 한 번 낚싯줄을 드리워서 여섯 마리의 거북을 낚아 한데 꿰어서 전부다 메고는 자기 나라로 가서 거북의 껍데기를 태워서 점을 쳤다. 이에 대여와 원교의 두 산이 북쪽 끝으로 흘러가버려, 큰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 때문에 신선 가운데 이주한 자들이 수억이 될 정도였다. 이것을 안 천제는 대단히 화를 내어, 용백의 영토를 축소시켜 좁게 만들고, 또 용백의 백성들은 키를 줄여서 작게 만들었다. 그렇더라도 복희와 신농이 다스리던 때에 용백의 사람들은 키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스케일이 큰 이야기인가. 하지만 또 얼마나 유쾌한가. 발해라는 나라 이름도 이 설화의 공간구조와 관련이 깊다. 또 조선의 학자이자 서도가였던 이광사(李匡師)는 이 글을 인용해서 자기 호를 원교라고 했다. 살던 곳이 지금의 만리 고개, 즉 둥그재(원교圓嶠)인 데다가, 당쟁으로 집안이 망한 것이 마치 원교가 침몰한 것과 같다고 해서 그런 호를 붙인 것이다. 員은 圓의 옛 글자로, 둘은 서로 통해 쓴다.
   
   열자의 ‘탕문’ 편은 상식을 벗어난 거대한 사유 양식이 있을 수 있음을 여러 예증을 들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세속의 인간보다 뛰어난 성인, 성인보다 뛰어난 신령, 신령을 초월한 자연에 대해 논하고, 인간의 분별적 지식에 의해 특정화되고 강조되고 의식된 것의 범위를 뛰어넘어 삶의 최고의 원리인 균(均)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얄팍한 지식과 고착된 상식만으로 남을 재단하고 세상을 편향된 시각으로 이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열자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과 상식이 혹시라도 진리와 도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하고, 사회적 통념이나 떠도는 소문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의 시각을 갖출 필요가 있을 듯하다.

智之所知則淺矣
자기 지식이 아는 것에 제한되어 버리면 도(道)에 이르는 것이 얕아지고 만다

서울의 성수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위치한 압구정동은 본래 압구정이란 정자가 그곳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곧 세조의 정권을 성립시킨 책사 한명회(韓明澮)가 그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벗하면서 살겠다는 뜻에서 압구(狎鷗)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유래한다. 狎은 아주 가깝게 지낸다는 뜻이다. 송나라의 명재상 한기(韓琦)도 압구정이란 정자를 두었던 일이 있으니, 한명회는 스스로를 한기에게 견준 셈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한강 부근에는 정자가 많았지만, 압구정은 가장 유명하고 또 시빗거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명회는 딸을 예종(재위 1468~1469년)의 비로 들이고 또 다른 딸을 성종(재위 1469~1494년)의 비로 들이면서 권력을 내놓지 않아 비난을 샀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당초 왕권을 강화하여 정국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세조 집권 이후에는 높은 관직을 차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조 말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더니 세조가 죽은 뒤 남이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1등에 올랐으며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였을 때는 병조판서까지 겸했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 1등에 올랐고, 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의 일도 관장했다.
   

▲ 겸재 정선의 압구정 그림


   후대의 지식인들이 한명회와 그의 압구정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동각잡기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확실히 그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난다. 언젠가 명나라 사신이 그 정자에 놀러 가겠다고 하자 한명회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한명회는 노기를 띠고 일어났다. 탄핵의 일을 맡은 대간(臺諫)이 한명회의 무례함을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여 한명회는 잠시 외지로 귀양을 가야 했다.
   
   남효온의 ‘추강냉화’에서는 한명회가 정자를 지어놓고도 벼슬에 연연하여 떠나가지 못하므로 임금이 그를 송별하는 시를 짓자 문사들이 차운(次韻)하여 수백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종이 압구정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일이 있는데 이 일화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 여러 시들 가운데 최경지(崔敬止)가 풍자의 뜻을 담아 지은 시가 압권이었다.
   
   
   세 번이나 은총을 흠씬 입자
   정자 있어도 와서 놀 뜻이 없구나.
   마음속 욕심을 정히 가라앉힌다면
   벼슬살이 바다에서도 갈매기와 친하련만.
   
   三接慇懃寵渥優(삼접은근총악우) 有亭無計得來遊(유정무계득래유)
   胸中政使機心靜(흉중정사기심정) 宦海前頭可狎鷗(환해전두가압구)

   
   
   한명회는 이를 미워해서 현판에 올리지 않았다. 뒷날 이윤종(李尹宗)이란 선비가 압구정에 올라 쉬다가 장편 대작을 지었는데 그 끝에 ‘有亭不歸去(유정불귀거), 人間眞沐?(인간진목후)’라 적었다고 한다. “정자 지어두고 귀거래를 하지 않다니, 인간 세상의 정말 원숭이에게 갓을 씌운 격이로다”라는 뜻이다.
   
   압구라는 이름은 물새와 가까이 지내고 세상 욕심을 잊겠다는 뜻이다. 세상 욕심을 기심(機心)이라 하므로 최경지의 시에서 그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압구의 고사는 본래 ‘열자’의 황제(黃帝) 편에서 나왔다.
   
   황제는 중국 신화의 오제(五帝) 가운데 첫 번째 군주로, 중국의 한(漢)민족은 이 황제를 자신의 시조로 생각했다. ‘열자’의 황제 편은 ‘황제가 즉위하여 15년 동안 천부의 본성을 기르고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코와 입을 만족시켰지만 얼굴이 검게 되고 지쳤으므로 그 뒤 15년 동안 머리를 쓰고 지혜를 짜내 백성들을 다스리려 하였으나 역시 얼굴이 검게 되고 지치게 되자 일신을 아끼려고 마음을 쓰는 것도 잘못이고 천하를 다스리려고 마음을 쓰는 것도 잘못이라고 깨닫고 탄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황제는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노니는 꿈을 꾸고 난 후, 최고의 도라는 것은 심상의 분별지로는 발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28년간 나라를 다스려 화서씨의 나라처럼 만든 후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황제편은 인간이 정욕에 좌우되지 말고 우주 법칙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자유자재한 경지가 열린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나간다.
   
   그 가운데 압구의 고사는 이러하다.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와 친하여 갈매기들이 늘 가까이 와서 놀았다. 그것을 본 그의 아버지가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아버지 말대로 다음날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갈매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의 기심(機心)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서 기심을 잊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망기(忘機)라고 하게 되었다.
   
   원문을 읽어보면 이러하다.
   
   
   海上之人(해상지인), 有好?鳥者(유호구조자). 每旦之海上(매단지해상), 從?鳥游(종구조유), ?鳥之至者(구조지지자), 百住而不止(백주이부지). 其父曰(기부왈), 吾聞?鳥皆從汝游(오문구조개종여유), 汝取來(여취래), 吾玩之(오완지). 明日之海上(명일지해상), ?鳥舞而不下也(구조무이불하야).
   
   
   바닷가에 사는 사람으로, 갈매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매일 아침 그는 바닷가로 가서 갈매기와 함께 놀았는데, 그에게 오는 갈매기들이 백 마리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말하길, “듣자니, 갈매기가 너와 함께 노닌다고 하더구나. 네가 하나 잡아 가지고 오면 내가 가지고 놀겠다”라고 했다. 다음날 그가 바닷가로 가자, 갈매기들은 날아올라가 버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원문은 갈매기를 ?鳥(구조)로 적었다. ?(구)는 갈매기 鷗(구)와 같다. 百住而不止(백주이부지)에서 住(주)는 헤아릴 數(수)와 같으니, 백을 헤아려 그칠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원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압구(狎鷗)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후대 사람이 이 고사를 근거로 그 말을 만들어내어, 벼슬을 그만두고 재야에 숨는 은일(隱逸)을 압구라 하게 된 것이다. 구로망기(鷗鷺忘機)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황제 편에서는 이 고사의 뒤에 다음 논평이 붙어 있다. 인간이 갈매기와 친할 만큼 기심을 잊었다는 관점보다도, 갈매기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아는 감응(感應)의 사실에 초점을 둔 것이다.
   
   
   故曰(고왈), 至言去言(지언거언), 至爲無爲(지위무위). 齊智之所知則淺矣(제지지소지칙천의).
   
   
   그러므로 최상의 말은 언어를 떠나고 최상의 행위는 행동이 없다. 자기 지식이 아는 것에 제한되어 버리면 도(道)에 이르는 것이 얕아지고 만다.
   
   齊智之所知(제지지소지)에 대해서는 齊(제)를 한계 짓는다는 뜻으로 보는 설과 齊智(제지)를 일반인의 지혜라는 뜻으로 보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앞의 설을 따랐다.
   
   본래 열자에서는 압구의 고사를 예로 들어, 상식을 넘어선 감응의 오묘함에 대해 말하고, 궁극의 경지는 상식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바닷가의 사람이 갈매기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어울려 놀고, 또 그가 잡아가려고 하자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 내려오지 않은 것은, 갈매기가 말을 떠난 경지에서 감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 한문의 고사는 반드시 원래의 문맥 그대로 쓰이지만은 않는다. 고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그 가운데는 원래 문맥과 독립한 제3의 뜻을 오히려 우세하게 환기하는 것들이 있다. 압구를 인간의 관점에서 은일(隱逸)이라든가 망기(忘機)라든가 하는 뜻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열자’는 사물 하나 하나에 대한 개별 의식을 초월하여 만물을 일체로 보게 되면 사물에 구속되지 않아서 자유자재한 화(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권력을 쥔다는 것은 얼핏 남보다 더 많은 자유를 얻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권력에 얽매이는 것이어서 진정으로 자유자재함은 和의 경지와는 정반대다. 정치권력만 그러하겠는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이 다 그러하리라.

美 작가 샐린저 작품에 등장한 열자의 구방고 이야기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와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부음이 2010년 정월 말 신문에 실렸다. 샐린저는 1951년에 출판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일약 유명해졌던 미국의 작가다. 1919년생이니, 향년 아흔둘. 오랫동안 은둔을 하여, 그를 소재로 삼아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나는 이 소설의 주제나 이야기 방식을 좋아하면서도, 한때 이 소설을 아주 싫어했다. 이유는,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이 책을 읽은 뒤 자신을 주인공 홀든과 동일시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공부를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였다. 교양 강의 때 소개해주려고 되읽고는 서재에 아무렇게나 두었는데, 아들이 그것을 가져다 읽은 것이다. 하도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 성년이 될 때까지 이 책만은 읽지 말아주길 바랐으나, 책을 좋아하는 아들의 촉수를 막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올해 정월 초에 나는 집필 중인 어떤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샐린저가 1963년에 발표한 소설집 ‘목수들아, 대들보를 올려라’(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4)를 읽었다. 그런데 소설 속 글래스가(家)의 장남인 시모어가 뮤리엘과 결혼하기로 해놓고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이야기가 너무 뚱딴지 같았다. 그래서 샐린저가 1953년에 발표한 소설집 ‘아홉 가지 이야기’(최승자 옮김, 문학동네, 2004)도 읽어보았다. 후자에 수록되어 있는 중편‘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을 보면, 천재이지만 분열증을 앓던 시모어는 뮤리엘과 결혼하여 플로리다로 휴가를 가서 자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40대가 된 차남 버디는 시모어의 예술가적 삶을 회상하면서 독백을 하는데, 그것이 ‘시모어 서문(序文)’이다. 이 글은 바로 샐린저 자신이 도달한 미학 세계를 강론한 것이어서 아주 난해하되, 동양의 고전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 매우 특이하다.
   
   두 책을 다 읽고서야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의 첫머리에서 17세의 시모어가 누이동생 프레니를 위해 손전등 불 아래서 구방고(九方皐) 이야기를 읽어주는 장면이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았다. 구방고는 춘추시대에 말(馬)의 상을 잘 보던 사람이다. 시모어는 구방고 이야기에서 외적이고 세세한 것들을 버려두고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응시하라는 지침을 읽어냈던 것이다.
   
   시모어가 누이동생에게 읽어 주는 책은 소설에서는 도교에 관련된 책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실은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나온다. ‘설부’란 우주의 큰 진리를 말하는데, 신표로 쓰던 부절(符節)의 두 쪽이 서로 들어맞듯이 그 진리에 부합시킨다는 뜻이다. 설부 편은 인간사의 천변 만화를 관통하는 도리를 추론하면 모든 일을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변화에 통하는 요령을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때 참진리란 외관에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고 구방고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언(寓言)이다.
   
   진(秦)나라 목공이 좋은 말(馬)을 구하려고, 말을 잘 보고 나이도 많은 백락(伯樂)에게 말 볼 줄 아는 사람이 일족 가운데 있으면 추천하라고 했다. 백락은 자기 자식들은 용렬하여 추천할 자가 없고, 일생 노고를 같이한 구방고가 자기보다 말을 더 잘 본다면서 그를 추천했다. 목공은 구방고로 하여금 명마를 구해 오라고 명했다. 석 달 만에 돌아온 구방고는 사구(沙丘)란 곳에서 천리마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어떤 말인가?”하고 묻자, “암컷이고 털빛이 누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목공이 다른 사람을 시켜 말을 몰고 오게 했는데, 그 말은 수컷인 데다가 흑색이었다. 목공은 백락을 불러 “실패하고 말았도다. 그대가 말을 찾아오게 시킨 자는 누런 색깔인지 검은 색깔인지,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모르거늘, 어찌 말을 제대로 알아보았겠는가?”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백락은 “구방고는 말의 상(相)을 보는데 천기(天機)만 봅니다. 암컷인지 수컷인지, 황색인지 흑색인지는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구방고가 찾은 말은 과연 천하제일의 준마였다. 백락이 구방고를 변호한 내용을 읽어보기로 한다.
   
   
   若皐之所觀(약고지소관), 天機也(천기야). 得其精而忘其?(득기정이망기추), 在其內而忘其外(재기내이망기외). 見其所見(견기소견), 不見其所不見(불견기소불견). 視其所視(시기소시), 而遺其所不視(이유기소불시). 若皐之相馬(약고지상마), 乃有貴乎馬者也(내유귀호마자야).
   
   구방고가 보고자 한 것은 천기(자연스레 갖추어져 있는 본연의 자질)였습니다. 가장 정수가 되는 특징을 파악하고, 허접한 부분은 문제 삼지 않고 잊어버렸으며, 내면적인 본성을 분명하게 살피고, 외면적인 것은 문제 삼지 않고 잊어버렸습니다. 눈으로 잘 보아야 할 것은 충분히 보고,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않았습니다. 응시하여 살펴야 할 것은 충분히 응시하고, 응시해서 살피지 않아도 되는 것은 보지 않았습니다. 구방고가 말을 관상 보는 방식으로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말 자체의 본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천기(天機)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의 기(機)란 인간이나 생물의 생명력을 가리키니, 망기(忘機)란 말의 기(機)가 인공적인 교묘함을 가리킨 것과 다르다. 천기는 자연스레 갖추어져 있는 본연의 자질이란 뜻으로, ‘장자’에도 자주 나온다. 단, 천기라고 해도 관점에 따라 문맥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곧 인체나 생물의 몸에서 천연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하고, 마음이나 생기 같은 내면적인 기능을 가리키기도 한다.
   
   구방고 이야기는 본질은 도외시하고 겉모습만 살피는 세태를 비판하는 말로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역시 이 고사는 외관을 돌파하여 사물의 핵심과 본질에 육박해 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때 여황빈모(驪黃牝牡)라고 하면 검은색과 누런색, 암컷과 수컷이란 말로 사물의 외면적 차별상을 가리킨다. 검은 색 여(驪)는 ‘이’로도 읽는다.
   
   조선 중기의 문인들은 시문에서 특히 천기를 발현하려고 애를 썼다. 이를테면 인조 때 조익(趙翼·1579~1655)은 문장의 스승인 윤근수(尹根壽·1537~1616)가 자신의 문장에 병통이 있다고 지적하자, 서한을 내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이 문장에서 지향하는 바를 밝혔다. 그 일부는 이러하다.
   
   
   사람의 정신 활동은 천기(天機)입니다. 천기가 발동하여 이루어진 것이 곧 글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글에 완급과 장단이 있게 되는 것 또한 글의 자연스러운 형세이니, 글자를 배열하여 문장으로 얽는 데 어찌 하나로 정해진 법칙이 있겠습니까. 글의 형세로 볼 때 본래 꼭 그렇게 해야 할 조건이 그때그때 주어지는 것이니, 완만하게 해야 할 경우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요, 급박하게 해야 할 경우 완만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형세로 보아 꼭 그렇게 되어야 할 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한 글자라도 더 보태면 군더더기가 될 것이요, 한 글자라도 삭제하면 어세가 끊어져 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학은 다리가 길고 오리는 짧은 것처럼 그 길고 짧고 한 본래의 조건에 알맞도록 따라야 하지, 길다고 해서 끊어 버리고 짧다고 해서 이어 붙이면 안 될 것입니다.
   
   
   조익의 실제 글이 그가 지향했듯이 천기를 온전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지 없는지, 평가는 엇갈린다. 요컨대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참문학을 하겠다는 의식이 그의 선언에 담겨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샐린저의 예술론이나 조익의 문장론은 모두 형식보다는 내용, 외관보다는 본질을 중시한 논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열자’에서 구방고의 이야기를 끌어다 썼다. 예술이나 문장에서만 그러하겠는가. 표피적인 것들에 정신과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생명의 깊은 울림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바람이리라.

육도(六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중세기사와 병법서 ‘육도’의 기병전 전술

 

▲ 필라델피아 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은 영화 ‘로키(Rocky)’의 주인공 실베스터 스탤론이 새벽에 거리를 달려와 층계를 오른 뒤 두 팔을 쳐들고 시내를 내려다보는 장면 때문에 명소가 되었다. 영화가 나간 뒤 계단 아래에 로키 동상이 생겼고, 그 앞에서 관광객들은 권투 글러브를 손에 끼고 저마다 포즈를 취한다. 1875년에 펜실베이니아미술관으로 출발하여 현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필적하는 크기를 갖고 있다는 이 미술관을 지난 3월에 찾았다. 헤드셋을 통해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면서 피카소 특별전(Celebrating Picasso)을 관람했는데, 입체파의 발전과 쇠퇴 과정을 차근차근 공부하느라 2층의 상설 전시장은 그냥 훅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뿔싸, 그것이 그렇지 않았다. 서유럽 중세 미술품을 시대별로 전시해 놓은 피리어드 룸(Period Room)을 돌아보면서 점점 눈이 커졌다. 고호의 ‘해바라기’가 방출했던 노란 빛보다도 16세기 엘 그레코의 ‘피에타’와 17세기 루벤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담긴 어두운 눈빛이 내 마음을 더 깊이 헝클어댔다. 마침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내면기행’과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집필한 뒤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그림들보다도 더 나의 시선을 얼어붙게 만든 것이 있었다. 중세 기사의 갑옷 전시실에 진열된, 왼쪽 가슴에 부러진 창이 꽂혀 있는 은색의 갑옷이었다. 기창(騎槍)시합인 틸트(Tilt)에서 기사가 입었던 것으로 1575년 독일 작센주(Saxony)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사무예시합으로 토너먼트의 하나인 틸트는 바리엔렌넨(Ballienrennen)이라고도 하며, 나무 장벽(바리엘)을 사이에 두고 두 기사가 마상 시합을 하다가 말에서 내려서는 두 자루의 검으로 전투를 계속하는 방식이다. 1 대 1 마상 창 시합인 자우스트(joust·란젠게쉬테히 Lanzengestech)와는 조금 다르다. 다만 필라델피아미술관에 전시된 여러 갑옷들에 대한 설명에 모두 틸트라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미술관 측은 틸트를 자우스트와 구분하지 않고 기창시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은색의 갑옷을 걸치고 가슴을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땅에 쓰러졌을 그 인물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은색 스틸의 갑옷은 진흙과 핏방울로 범벅이 되었을 당시의 모습은 남기고 있지 않다. 갑옷의 작은 부분들을 연결하는 일자 홈을 지닌 버튼, 어깨와 무릎을 잘 놀릴 수 있도록 좁은 조각들을 겹쳐 이루어진 곡선부, 기사가 지녔던 용기와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듯 버클 위에 올려진 왼쪽 장갑 부분이, 기사의 이름을 망각 속에 묻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구성하고 있었다.
   
   문득 한문고전 가운데 육도(六韜)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 책이 중국의 고대 전술과는 달리 기병전의 전술을 상세하게 실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기병전은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그 이전까지는 전거(戰車)를 이용하여 공격하거나 군진이 서로 대치하다가 보병끼리 접전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육도의 도(韜)는 화살을 넣는 주머니로 ‘거두어 갈무리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는 병법의 비결을 깊이 감추고 나타내지 않음에 있다고 본 것이다. 전체는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 등 6권 60편으로, 병법만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대도(大道), 인간학과 조직학, 정전(政戰)과 인륜을 두루 논하였다. 그런데 ‘견도’의 ‘전기(戰騎)’에서는 기병에게 열 가지 승리할 전법과 아홉 가지 패할 전법이 있다고 하고, 승리 전법의 하나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이 전장에 막 이르러 아직 군진이 정돈되지 않아서 전군과 후군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전군의 기병을 함락시키고 그 좌우를 공격한다면 적은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적의 군진이 정돈되어 견고해져서 사졸에게 투지가 있을 때에는, 우리 기병은 좌우 양익으로부터 협공하여 에워싸듯이 해서, 그 중간을 치달려 지나가고 치달려 와서, 바람처럼 신속하게 우레처럼 격렬하게, 백주가 어둡게 될 정도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자주 깃발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저 우아한 스틸 갑옷을 걸친 중세의 기사가 틸트에서 투구 앞면을 가린 상태로 창을 꼬나든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기병을 ‘육도’에서 상기하게 된다. 그 기병의 전법이란 것도 오늘날 보기에는 상투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와 나의 전략과 형세를 비교하여 전법을 구상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적이 정돈되어 있을 때는 그를 교란시키고 마치 이쪽의 군세가 상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깃발을 자주 바꾸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육도’는 ‘삼략(三略)’이란 책과 아울러 흔히 ‘육도삼략’이라 일컫는다. 주나라의 태공망(여망)이 지었다고 전하지만 위진남북조시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려오고 마치 옛날 책인 것처럼 꾸민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을 알 수 없는 위서(僞書)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책이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만만하지 않다. 우선 송나라 때 고대 병법서의 고전들을 일컫는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무경칠서’를 대단히 중시해서 조선 전기에 수양대군은 최항을 시켜 ‘무경칠서주해(武經七書註解)’ 10권 5책을 만들게 했다. 조선시대의 무과시험 때는 무예 과목 이외에 강서(講書) 과목이 있었는데, 강서에서 ‘무경칠서’ 가운데 하나를 택해 이해의 정도를 시험하게 되어 있었다.
   
   1748년(영조 24년)에 통신사 조명채(曺命采)가 지은 ‘봉사일본시문견록’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병법서 가운데 이 ‘육도’를 숭상해 왔다. 옛날 제호천황(醍酉胡天皇) 때에 신하 대강유(大江維)를 당나라에 보내어, 황금 5만냥을 바치고 육도·삼략 및 군승도(軍勝圖) 42조를 구득하여 당시까지 전한다고도 했다.
   
   육도를 위서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문체가 치졸하다고 말하지만, 조선의 정조는 병법서 가운데 “육도와 손무자(孫武子) 같은 책은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건실하며 이취(理趣)가 정밀하고 깊으니, 의당 제자(諸子) 중에서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더구나 육도의 많은 어휘들이 성어로 널리 쓰이고, 심지어 이 책에서 거론한 의식은 후세의 의식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천하 얻는 것을 축록(逐鹿)이라 하는 것은 육도에서 “천하를 취득하는 것이 사슴 쫓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또 장수를 임명할 때 군주가 장수에게 부월(斧鉞·도끼)을 주어 휘하 장병을 벌하는 권한을 위임하는 의식을 치른 것은 ‘용도’의 ‘입장(立將)’에 근거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장수를 임명할 때는 좋은 날을 가려 교외에서 열병을 하면서 이와 같은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무도’의 ‘발계(發啓)’에 나오는 ‘?鳥將擊(지조장격) 卑飛斂翼(비비염익)’이란 말은 전투의 미학을 멋지게 표현했다. ‘지조’는 독수리나 매와 같은 맹금을 말하니 “맹금이 공격할 때는 먼저 낮게 날면서 날개를 거두는 법이다”라는 뜻이다. 맹금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신중하게 기회를 살피다가 한 번 공격하여 적에게 치명타를 가한다는 뜻이다.
   또 ‘문도’의 ‘수토(守土)’에서는 반드시 전투에서의 일만이 아니라 군주의 정치에 대해서도 유비적(類比的) 의의를 지닌 다음과 같은 단락도 있다.
   
   
   日中必彗(일중필혜), 操刀必割(조도필할), 執斧必伐(집부필벌). 日中不彗(일중불혜), 是謂失時(시위실시). 操刀不割(조도불할), 執斧不伐(집부불벌), 失利之期(실리지기).
   태양이 중앙에 와서 정오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옷을 말려야 하고, 칼을 잡고 있으면 반드시 가르며, 도끼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쳐야 한다. 태양이 중앙에 왔는데도 옷을 말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시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칼을 잡고 있으면서 가르지 않고, 도끼를 잡고 있으면서 치지 않는다면 이로운 시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일을 행하려면 과감하게 결단하여 제때에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니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쳐라”라는 속담도 이 단락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원문의 ‘彗’는 ‘’와 같으며, 포쇄(曝?)한다는 뜻이다. 저 필라델피아미술관의 창에 찔린 스틸 갑옷을 남겨둔 중세의 기사는 맹금이 공격하듯 ‘낮게 날면서 날개를 거두는’ 자세를 취하지 못한 것일까? 틸트에서 상대의 창에 찔리는 사이, 그가 꼬나들었던 창은 상대의 어디를 쳤을까?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킬고어 중령과 ‘육도’에서 내세운 장수의 도리

 

▲ 목판본 [육도직해] 1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우리 군대가 대군이라는 점을 믿고 적을 경시하지 말라.
   군주의 명령을 받았다는 점을 대단하게 여겨 필사(必死)의 태도를 취하지 말라.
   자기의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남을 천시하지 말라.
   혼자 결정을 고집해서 뭇사람의 상식을 무시하지 말라.
   스스로 변설이 뛰어나다고 해도 실전에서 반드시 통하리라 믿지 말라.
   병사가 앉지 않으면 앉지 말라.
   병사가 식사하지 않으면 식사하지 말라.
   더위에도 추위에도 병사들과 함께 하라.
   이렇게 하면 병사들은 반드시 사력을 다하여 싸울 것이다.
   
   
   도쿄 도에이신주쿠(都營新宿)선의 퇴근 전철 안에서 ‘육도(六韜)’를 펼쳤을 때,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의 6권 가운데 제3권 ‘용도(龍韜)’에 들어 있는‘입장(立將)’ 가운데 일부다.
   
   ‘용도’는 용이 자유자재로 변환하듯이 군사를 쓰는 방법도 오묘하다는 것을 말한 장이다. 그 가운데 ‘입장’은 장수로서 적합한 인물을 선별하여 그를 장수로 임명하는 도리에 대해 설명했다. 곧 군주는 장수에게 전투의 전권을 부여하되, 위의 번역문에서 알 수 있듯이 장수에게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리라는 다짐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문은 같은 형태의 구문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 마치 타령이나 염불을 하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勿以三軍爲衆而輕敵(물이삼군위중이경적)
   勿以受命爲重而必死(물이수명위중이필사)
   勿以身貴而賤人(물이신귀이천인)
   勿以獨見而遺衆(물이독견이유중)
   勿以辯說爲必然(물이변설위필연)
   士未坐勿坐(사미좌물좌)
   士未食勿食(사미식물식)
   寒暑必同(한서필동)
   如此則士衆必盡死力(여차즉사중필진사력)

   
   
   ‘병사가 앉지 않으면 앉지 말고 병사가 식사하지 않으면 식사하지 말라’는 뜻의 ‘士未坐勿坐(사미좌물좌) 士未食勿食(사미식물식)’ 부분을 웅얼거리다가, 문득 미국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1979년)’에 나온 빌 킬고어 중령(로버트 듀발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킬고어 중령은 악마의 화신이다. 그는 서핑을 하려고 헬기 군단을 몰고 가서 바그너의 ‘발퀴레’를 크게 틀고는 월맹의 마을을 공격하고, 전투기들이 쏟아내는 네이팜탄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면서 “아침 무렵의 네이팜 냄새가 너무도 좋다”고 말한다. 어쩌면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자체인 커츠 대령(Colonel Walter E. Kurtz· 말론 브란도 분)을 또 다른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특수부대의 윌러드(마틴 쉰 분)는 킬고어 중령에게 일종의 호의를 지녀,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그의 처지에 공감하기까지 하는 듯하다. 아직 ‘암흑의 핵심’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킬고어 중령이 부하들과 동고동락하여 부하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마음이 끌려 그랬을 것이다. 야영장의 모닥불 주위에서 병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기타를 튕기는 킬고어의 모습은, ‘육도’에서 장수가 부하 병사들을 대할 때 유의하라고 강조한 내용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쟁은 그 자체가 ‘암흑’이다. 근대 이전의 역사를 보면, 침략을 당하는 쪽만큼이나 전쟁을 일으키는 쪽도 심각한 타격을 입어왔다. 수와 당이 무모하게 고구려 정벌을 꿈꾸다가 나라 자체가 전복되거나 내부의 혼란을 겪은 일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수나라는 문제 때 1회, 양제 때 3회나 고구려를 침략했고, 당나라는 태종 때 3회 침략을 하고 고종 때 1회 침략을 기도하다가 중지했다. 어째서 수나라와 당나라가 무모하고 또 집요하게 고구려 정벌을 감행했는지, 그 역사적 의미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로서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물리친 고구려의 국력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외적의 침략으로 많은 민중들이 희생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시려온다. 훗날 거란과 몽골의 고려 침략, 일본과 후금의 조선 침략은 더욱 우리 민족의 문화와 민중의 삶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렇기에 어느 시기에나 외적의 침략에 맞서는 유비무환의 무(武)가 요청된다. 그래서였을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는 문(文)에 중심을 두어온 관점을 바꾸어 문(文)과 무(武)의 병존 혹은 조화를 주장하는 논리가 대두되었다.
   
   그런 면에서 장현광(張顯光·1554~ 1637)이 지은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은 새로운 관점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논설문이다. 그는 문과 무가 둘로 나누어져 임진왜란의 병화를 만났다고 판단하고 이 글을 지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어찌 문과 무를 완전히 갈라서 둘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참다운 문에는 반드시 무가 있고, 참다운 무는 반드시 문에 근본을 둔다. 이미 문 밖의 무가 없고 또 무 없는 문이 없으므로, 무가 없는 문은 참다운 문이 아니며 문을 떠난 무는 참다운 무가 아니다. 문과 무가 한 길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렇겠는가?…아! 지금 시대에 문과 무를 겸비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문이 참다운 문이 되어 무를 겸하고 무가 참다운 무가 되어 문에 근본을 둔 경우를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으니, 어찌 문과 무를 겸한 재주를 보통 사람들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윤(伊尹) 같은 사람을 한 명만 얻는다면 한갓 문만을 숭상하는 경박한 습속을 거의 개혁할 수 있을 것이며, 외방 군대에 있는 사람으로서 중산보(仲山甫) 같은 사람을 한 명만 얻는다면 한갓 무만을 숭상하는 누추한 폐습을 거의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문과 무가 합해 한 길이 되어서 문은 무의 근본이 되고 무는 문의 공용(功用)이 될 것이다.
   
   
   장현광은 정치의 지도자나 군대의 통솔자와 같은 출중한 인물에게 문과 무가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지, 무 자체의 독립적 가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당시의 문약(文弱)한 지식인들을 버쩍 깨우는 일갈(一喝)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현광보다 다음 시대의 이익(李瀷·1681~1763)은 우리나라 역사를 노래체의 연작시로 서술한 ‘해동악부(海東樂府)’ 속에 강감찬(姜邯贊)의 사적을 소재로 삼은 ‘금화팔지가(金花八枝歌)’를 배치해 두었다. 즉 고려 현종 10년(1019) 2월 기축의 날에, 강감찬은 거란의 군사를 귀주(龜州)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당시 두 군사가 대치하기만 하고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을 때, 김종현(金宗顯)이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나아갔는데, 홀연 비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으므로, 우리 군사는 승기를 잡아 날래게 적을 공격했다. 거란 군사들의 시신은 석천(石川) 너머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들을 덮었고, 고작 수천 명이 생환했을 뿐이다. 갑오의 날에 강감찬이 개선하자, 현종은 영파역에까지 나가서 채붕을 설치하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장수들에게 여덟 개 가지가 달린 황금 꽃을 선사하고 강감찬의 머리에는 그 황금 꽃을 친히 꽂아주었다.
   
   이익은 유교적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지만, 강감찬의 승첩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무공을 높이 평가했다. 고려는 초기부터 거란과의 알력이 잦았으나,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박종기 교수에 의하면 3차 전쟁에서 강감찬이 거란을 패퇴시킨 것은 거란의 무력 침략을 자제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11세기 초부터 12세기 초 금나라가 설 때까지 동아시아 질서를 안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 강감찬의 대승은 바로 강감찬이 군사들의 고통을 함께 했기에, 병졸들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쿄의 붐비는 전철 안에서 ‘육도’를 펴서 읽다가, 이런저런 상념에 젖었다. 정조대왕(1752~1800)이 ‘육도’의 문장을 칭송하고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해동명장전’을 지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도래할 어둠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문과 무의 조화가 요청된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국가는 멸망을 늘 우려해야 존속하는 것”

▲ 자암집(상)
최근 서너 해 묵혀 두었던 원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묶다가, 이민환(·1573~1649)이란 인물의 사적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崔陟傳)’에 명나라 유격장군 교일기(喬一琦)의 부하인 소주 사람 오세영이 후금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최척과 함께 탈출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세영의 일은 이민환의 사적을 닮은 면이 있다. 그래서 이민환의 아우 이민성(李民宬·1570~1629)은 ‘최척전’의 작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형을 모략하는 음험한 꿍꿍이를 알 수 있다고 분개해서 ‘제최척전후(題崔陟傳後)’라는 시를 지어 이 소설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이민환은 광해군 10년(1618)에 명나라가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 평안관찰사로서 강홍립 원수의 막하가 되었다. 참판 강홍립은 경기·양호·양서 등 5도 도원수였고, 평안 병사 김경서는 부원수를 겸하였고, 이민환·이정남·정응정은 문무종사(文武從事)였다. 당시 5도의 병마 2만여명을 조발하여 서변으로 보냈으며 경상도·강원도의 병마는 북도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광해군 11년(1619) 심하(深河) 부차(富車)의 싸움에서 명나라 군사가 패전하자 우리 장수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민환은 후금의 포로가 되어 17개월 동안 건주(建州) 흥경(興京)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책문(冊門)의 안쪽이라고 해서 책중(柵中)이라 부르기도 한다. 1620년 8월 후금은 조선과 화친하려는 뜻에서 강홍립은 그대로 억류하되, 구금된 관리와 장수 가운데 세 사람을 내보내려 하여 명패를 뽑았는데 이민환의 명패가 셋 중에 들어 있었다. 후금은 이민환 등 세 사람에게 화친을 종용하는 외교문서를 지참하게 하고 책문 밖으로 내보냈다. 한데 귀국 후 박엽(朴燁)의 무고로 4년 동안 관서 지방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고도 한다.
   

▲ 자암집(하)-책중일기

이민환은 건주에 구금되어 있을 때 ‘책중일기(冊中日記)’를 작성하여 심하 전투의 시말을 알리고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을 작성해서 후금의 팔기군 제도와 전법, 후금의 요동 정벌 계획 등을 보고하는 한편 방비책 6조를 건의했다. ‘건주문견록’은 후금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보면 그 ‘만물문(萬物門)’의 ‘인마일심(人馬一心)’ 항에서 이민환의 ‘건주문견록’을 인용하여 후금의 군사들이 말을 타는 모습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말을 타고 달리려면 몸을 구부리고, 그치려면 바르게 앉고, 왼쪽으로 가려면 왼쪽 발을 더 디디고, 오른쪽으로 가려면 오른발을 더 디딘다. 그러면 고삐를 잡고 채찍질할 것이 없이 종일 마음대로 달릴 수 있다. 그리고 말을 기르는 데 있어서도 콩이나 조를 자주 먹이지 말고 안장이나 굴레를 벗겨 방목하면 풍설(風雪)이나 한서(寒暑)를 가리지 않는다. 한 사람이 말 10필을 몰고 다녀도 서로 발로 차거나 입으로 물어뜯지 않으며 혹 시장하고 갈증이 있어도 피곤해 하지 않는다. 말을 길들이는 것이 대략 이와 같았다.
   
   
   이익은 이민환의 기록이 두보의 ‘호청총가(胡靑騘歌)’에 나오는 “이 말은 전장에서 대적할 것이 없나니, 사람과 한 맘 되어 큰 공을 이루니(此馬臨陳久無敵, 與人一心成大功)”라는 구절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했다.
   병법서인 ‘육도’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인마일심(人馬一心)은 기병의 조련 정도로서 가장 최고의 경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육도는 ‘문도(文韜)’에서 전투의 기술이나 무비(武備)보다도 문덕(文德)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고, ‘무도(武韜)’에서는 덕을 쌓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민생을 평온하게 하며 국내를 안정시키는 길은 적국을 정벌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실제의 전투는 군사 작전의 오묘함, 진법(陣法)의 탁월함, 적지에서의 전투 능력, 각 군사들의 패기가 더욱 중요하기에 ‘용도’의 편자는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에서 그 각각의 매뉴얼을 진진하게 펼쳐 보인 것이다.
   
   특히 ‘용도’는 적을 공략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적어서 무거(武車·전차), 기효(騎驍·적을 공격하는 날랜 기병), 치진(馳陳·부대 간의 연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기병대), 선봉(選鋒·선발된 선봉대) 등을 활용해서 호기(好機)를 보아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했다.
   
   기병들이 인마일심의 경지까지 가려면 군주와 조정이 평화 시에도 멸망을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군사 개인의 능력을 숙달시키는 제도를 확립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도’의 마지막 절 ‘병도(兵道)’의 다음 구절이 주목된다. ‘병도’라는 용병술의 요체란 뜻이다.
   
   今商王知存而不知亡, 知樂而不知殃. 夫存者非存, 存於慮亡. 樂者非樂, 在於慮殃.(금상왕지존이부지망, 지락이부지앙. 부존자비존, 존어여망. 낙자비락, 재어
   여앙)

   
   

▲ 자암집(하)-건주문견록

지금 상나라(은나라) 왕 주(紂)는 국가가 무사히 존속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멸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을 알고 재앙이 오리란 것을 모릅니다. 국가가 우연하게 존속하는 것은 진정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멸망을 우려하기에 존속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즐거운 것은 참된 즐거움이 아닙니다.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참된 즐거움은 재앙이 올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혼자만의 즐거움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무비(武備)는 이른바 국가 안보를 이용해서 대중을 억압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일과는 다르다. 우리는 무비를 소홀히 하여 자주 외침을 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광해군 때 후금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변환시킬 만큼 급속하게 성장했다. 당시의 조정은 외교를 통해 외침을 늦추고 점진적으로 대비하려고 계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도 상층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멸망을 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민환은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 때 장현광의 종사관으로 참전하게 되고 죽은 뒤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그렇지만 일생 ‘절개 잃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때문에 최척전이 유포되었을 때 이민성은 형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저와 같은 논문 투의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뒷날 성호 이익, 연려실 이긍익, 다산 정약용은 이민환이 생환하여 남긴 기록물들이 지닌 무비(武備)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군비와 관련된 사항을 여럿 적으면서 그때마다 이민환의 글들을 인용했다. 이긍익은 건주의 패전 사실을 고증할 때 이민환의 기록을 언급했다. 다산 정약용은 ‘비어고(備禦攷)’를 편집할 때 이민환의 문집인 ‘자암집(紫巖集)’이 매우 긴요하다고 여겼다.
   
   정약용은 중국(청)과의 관계가 우호적이건만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 바다를 따라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여순(旅順) 입구, 금주(金州)와 산동성 연변, 아래로 절강성과 복건성의 남쪽에 이르는 곳까지의 물길이 순탄하고 위험한 곳과 당시 조빙(朝聘)하던 도로를 채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도 멸망을 우려하는 마음으로 ‘비어(備禦)’의 방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포박자(抱朴子)

하늘에 날아오른다고 한들 지상보다 즐거울 것인가

▲ 인체의 경락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내경도(內經圖).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 말의 큰 학자인데 일기를 적듯이 시를 지어 6000여수를 남겼다. 그 가운데 포박자(抱朴子)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포박자는 중국 동진 때 사람 갈홍(葛洪·283~343?)이 지은 도교 고전이다. 시 ‘포박자’에 나오는 삼생석(三生石)과 갈홍천(葛洪川)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천축사(天竺寺) 부근에 있는 바위와 시내다.
   
   
   달놀이 하던 삼생석은 그대로지만
   갈홍천가에는 구름 연기 자욱하여라
   내겐 한가한 천지가 따로 있어
   고요함 속 공부가 좌선과도 같아라

   
   
   ‘포박자’ 시를 풀이하면 이쯤 되겠다.
   
   옛 사람이 삼생의 인연을 이야기하던 바위는 그대로 있지만 옛 사람이 삼생의 인연을 깨닫고 기쁨을 누렸던 갈홍천은 구름 안개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갈홍천은 저 동진 때 갈홍이 신선술을 연마한 곳이지 않은가. 이 풍광을 보면 옛 사람이 삼생의 인연을 깨우친 일도 갈홍이 신선의 경지를 추구한 일도 도무지 무의미하다. 역시 고요함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마치 불교의 참선과도 같은 성리학 공부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랴.
   
   
   삼생석과 갈홍천이란 지명은 당나라 말 원교(袁郊)의 소설 ‘감택요(甘澤謠)’의 이야기에서 왔다. 고려와 조선의 지식인들도 즐겨 읽은 ‘태평광기(太平廣記)’라는 유서(類書·옛날의 백과사전)에도 내용이 실려 있다.
   
   당나라 때 이원(李源)은 낙양의 혜림사(惠林寺)에 머물면서 승려 원택(圓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둘이 배를 타고 형주(荊州)를 거쳐 남포(南浦)에 놀러 갔다가 비단 배자를 입고 물을 긷고 있는 한 부인을 보았다. 그러자 원택이 울면서 말했다. “저 부인은 왕씨인데 임신한 지 3년이 됐다. 내가 그 아들이 되어야 하는데 3년이나 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저 부인이 낳지 못하고 있다. 부인을 보았으니 이제는 벗어날 길이 없다. 부적과 주문을 이용해서 나를 다시 태어나게 도와달라. 사흘 뒤 아이를 씻기는 의식을 할 때 찾아온다면 웃는 표정을 지어 아이가 나라는 징표를 보이겠다. 그리고 13년 뒤 중추일 달밤에 항주의 천축사 밖에서 다시 만나자.”
   
   원택은 이날 저녁에 숨을 거두었고 왕씨 부인은 아이를 낳았다. 사흘 뒤 아기 씻기는 의식 때 이원이 가서 보니 아이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원은 자초지종을 왕씨 집에 전했고 이에 왕씨 집은 재물을 내어 원택을 후히 장사지냈다. 이원이 13년 뒤 갈홍천가에 가 보니 어떤 목동이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삼생석 위의 그 옛날 정혼이거니, 음풍농월하는 건 굳이 논할 것도 없네. 벗이 멀리 찾아 주니 진정 미안하오만, 이 몸은 달라졌어도 본성은 그대로 있다오(三生石上舊精魂, 賞月吟風不要論. 慚愧情人遠相訪, 此身雖異性長存).”
   
   약속대로 원택은 이원과 재회한 것이다.
   
   삼생석이나 갈홍천에 얽힌 이야기는 불교의 윤회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이색은 그 이야기를 끌어오면서‘포박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불로장생을 말하는 갈홍의 불로설이나 윤회인연을 설하는 불교의 삼생설이 모두 허망하다고 여겨 그런 것이다. 강하게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불로장생과 윤회인연의 상상은 그 나름대로 멋지기는 하지만 과연 인간이 시간의 추이(推移)를 극복하고 영원히 살 수 있겠느냐고 회의한 것이다.
   
   이색의 ‘포박자’는 동파(東坡), 즉 소식(蘇軾)이 ‘영락사를 방문했더니 문장로는 이미 죽은 뒤였다(過永樂文長老已卒)’라는 시에서 토로한 슬픔의 감정을 ‘마음 공부’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소동파는 ‘승려 원택의 전’을 작성할 정도로 원택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는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의 영락사에서 알고 지내던 동향 출신의 문장로(이름의 한 글자가 문인 승려)가 죽은 뒤 원택 이야기를 끌어와 슬픔을 토로했다.
   
   
   전번엔 학처럼 마른 모습 보고 못 알아보았더니
   어느샌가 구름 속으로 돌아가 찾을 길이 없다니
   세 번 방문에 그대는 늙어 병들고는 죽고 말아
   손가락 튕길 짧은 시각에 과거 현재 미래가 지나고 말았네
   남의 죽음은 늘 보아 눈물 흘리지 않게 되었지만
   고향 사람을 이렇게 잊지 못함은 정분이 남아서리
   전당(錢塘)으로 원택을 찾아간 당나라 이원처럼
   갈홍천가에 가을 깊이만 기다리리라

   
   
   갈홍의 ‘포박자’는 불로장생하려면 단약을 만들어 금액(金液)을 마시라고 한다. 금액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므로, 몸 안에 기를 운행시키고 방중술을 익히라고 한다. 도무지 상식적인 생활 감각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포박자’의 상상이 황당하기만 할까? ‘극언(極言·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편을 일부 살펴보자. 체력을 단련하거나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조바심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있다.
   
   
   손상된다는 것은 마치 등잔불이 기름을 소모하듯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금방 없어지는 것을 말하고, 보탬이 된다는 것은 마치 볍씨를 뿌려 가꾸는 것같이 눈에 띄지는 않으나 금방 무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가꾸고 성정을 기르는 데 있어서도 작은 일부터 삼가야 한다. 작은 보탬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닦지 않아서는 안 되고, 작은 손상이 해로울 것이 없다고 막지 않아서도 안 된다. 작은 것을 모으면 그것이 크게 되고, 하나가 없어지면 1억개도 없어지게 된다. 작은 것을 아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한다면 그는 도(道)를 아는 사람이다.
   
   
   몸 만드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기르는 일에도 해당한다. 그렇기에 조선의 풍운아 허균은 포박자의 이 단락을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불로장생한다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일일까? 신선이 되어 승천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사는 일이야말로 즐겁지 않을까? ‘근구(勤求·온 마음으로 구하라)’편의 다음 말을 보자.
   
   
   보통 사람이 급급하게 구하는 것은 권세, 이익, 육욕이다. 내 몸이 건강하지 않다면 관직이나 권력, 황금과 보석, 요염한 미녀를 끼고 있더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뜻하는 대로 오래 살게 되었다고 하자. 즉시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잠시 이 세상에 지선(地仙)으로서 머물러 있어도 좋다. 팽조나 노자 등은 인간 세계에 수백 년을 그대로 머물러 인생을 즐길 대로 즐긴 뒤에 천천히 승천하였다. 이것은 멋진 일이다.
   
   
   땅에 사는 신선을 지선(地仙) 혹은 지행선(地行仙)이라고 한다. ‘대속(對俗)’편에서도 갈홍은 말했다. 사람이 불로장생을 원하는 것은 오늘의 쾌락을 아끼기에 그러는 것이지, 본디 하늘에 오르기를 급급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날아오른다고 한들 지상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포박자’는 가르친다. 권세와 이익과 육욕을 구하려 급급하지 말고 내 몸의 건강을 우선 돌보라고. 그래서 지행선을 꿈꾸라고.

‘입당구법순례행기’

장보고 예찬한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
9세기 신라·당나라·일본 국제관계 한눈에

 

▲ 일본 미이데라(三井寺) 소장 시라기 묘전(新羅眀神) 좌상.

일본 교토(京都) 히에이산(比叡山) 정상 엔랴쿠지(延曆寺)에는 2002년 1월 13일에 ‘청해진대사 장보고’라는 비명이 새겨진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엔랴쿠지는 788년에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쵸(最澄·767~822)가 칸무(桓武) 천황의 명에 의해 세운 사원이다. 히에이산 그 자체가 엔랴쿠지를 나타내고, 콘폰추도(根本中堂·주신전, 국보전), 카이단(戒壇·서품소), 전교대사 묘소, 적산궁 등 부속건물이 있다. 1994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일본 최대 종파인 천태종의 본산 엔랴쿠지에 청해진대사 장보고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엔랴쿠지에 장보고 기념비가 서게 된 이유는 사이쵸의 제자로서 엔랴쿠지 불교의 기초를 쌓은 9세기의 일본 승려 엔닌(円仁·794~864)이 당나라 여행을 하고 무사히 귀환하기까지 장보고와 그 후계자 장영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엔닌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에 따라 세키잔젠인(赤山禪院)을 세우고 ‘신라명신’을 봉안했다. 이 신라명신은 장보고를 신격화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닛토구호쥰레이고키)’라는 유명한 기행문을 남겼다. 원본은 없어졌으나 1291년에 교토 기온(祇園) 쵸라쿠지(長樂寺)의 겐인(兼胤)이 72세 때 베낀 사본이 존재하여 이것이 1883년에 교토 도지(東寺)의 간치인(觀智院)에서 발견됐다. 그 후 1955년에 전 주일대사로서 미국 하버드대학의 옌징(燕京)연구소 소장이던 라이샤워(E.O.Reischouer) 교수가 이 책을 연구해서 ‘Ennin’s Travel in Tang China’라는 연구서를 간행한 이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엔닌은 일본 최후의 견당사를 수행한 입당청익승(入唐請益僧)이었다. 일본의 입당 유학생에는 학문생(學問生)과 청익승(請益僧)의 두 부류가 있다. 청익승은 스승을 방문해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기입당 연구생으로 환학생(還學生)이라고도 했다. 이에 비해 학문생은 정규 유학생으로 장기체재하면서 공부를 했다. 당시 청익 법사가 엔닌, 유학 법사가 엔사이(円載)였다. 엔닌은 838년 7월에 견당사 후지와라노츠네츠구(藤原常嗣·796~840)를 따라 당나라의 여러 사찰을 순례했다. 귀국한 뒤에는 산문파(山門派)의 조사(祖師)가 되었다. 법호는 지가쿠대사(慈覺大師)라고 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는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 : 836년(당나라 개성開成 원년, 일본 승화承和 5년) 6월 13일부터 839년(개성 4년) 4월 18일까지
   
   권2 : 839년(개성 4년) 4월 19일부터 840년(개성 5년) 5월 16일까지
   
   권3 : 840년(개성 5년) 5월 17일부터 843년(회창會昌 3년) 5월 25일까지
   
   권4 : 843년(회창 3년) 6월부터 847년(당나라 대중大中 원년, 일본 승화承和 14년) 12월 14일까지
   
   1권은 엔닌이 일행과 함께 장안으로 떠났다가 자신만 구법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적었다. 2권은 적산 법화원에 머물면서 오대산 여행을 한 내용을 기록했다. 3권은 오대산 성지를 순례하며 일본에 전해지지 않은 문서와 그림을 구하고 장안에 머물며 문헌을 필사한 뒤 838년 귀국을 신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4권은 회창폐불(會昌廢佛)을 당해 환속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 내용이다.
   
   그런데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권2에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원은 소유 논에서 매년 쌀 500석을 수확했고 겨울에는 ‘묘법연화경’을,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승려는 모두 30명이었으며 그중 일본인은 6명이라고 한다. 라이샤워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연구하면서 ‘중국의 신라인’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일본어판을 보면 제8장이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인’이란 제목이다.
   
   라이샤워는 당시 신라 출신자들은 중국 동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신라인들은 평온한 지중해 연안에서 상인들이 그 주변 영역에 대해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신라의 해상지배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엔닌의 일기도 다른 자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극동의 해상무역에서 신라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도전은 아직 역부족이었다. 비록 일본 견당사의 관료기구가 효율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럽다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일본선에 의한 엔닌의 중국 도해(渡海)와 그 이후의 산동 연안의 항해, 일본 견당사의 비극적 항해 기술(패배를 고한 기록) 등은, 뒤에 신라가 엔닌을 아주 쉽게 산동 연안을 몇 번이고 왕복하여 실어 날라주고 마침내 일본에 되돌려 보내준 스피드와 기동력과 비교한다면,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신라인과 일본인의 항해기술 차이는 또 한 가지 사례로 잘 알 수 있다. 즉 일본 견당사가 그들의 주요한 일행의 귀국에 접하여 안전을 기약하기 위해 60인의 신라인 키잡이와 선원을 고용했다는 기록이다. 최초의 견당사 선단에 배속된 신라인 통역의 역할도, 항해기술과 관련하여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상륙 수속 때 외교적으로 대단히 유익했을 뿐만 아니라 엔닌 자신이 중국 도해의 양상을 전한 바에 의하면 각 배의 항해기술상 전문가 중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했음을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극동에 있어서 제해권을 신라인이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는 실제로는 이윽고 한계를 보이게 되지만, 어쨌든 엔닌의 시대에는 신라인들이 이 지역 해상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발해 관련 기록이 아주 많다. 엔닌이 기착한 등주와 청주(靑州)는 발해와 당나라의 무역이 활발하던 곳이었다. 당나라는 등주에 호시(互市·공적 교역 장소)로서 신라관과 함께 발해관을 설치했다.
   
   840년 7월에 엔닌은 밀교를 배우기 위해 장안으로 향했는데 7월 3일에 칠불교계원에 들러, 발해 승려 정소(貞素)가 쓴 ‘영선삼장(霊仙三藏)을 곡하는 시 및 서’를 보고는 그것을 베꼈다. 칠불교계원은 대력영경사(大曆靈境寺)의 말사였다.
   
   영선, 즉 레이센은 일본 법상종(法相宗)의 승려다. 804년에 제18차 견당사의 한 사람으로서 45세에 당나라에 갔는데, 일본 승려로서는 특이하게 삼장법사(三藏法師)의 호를 받았다. 하지만 820년에 헌종이 배불론자에게 살해되자 박해를 피해 오대산으로 갔다가 827년에 87세로 죽었다. 독살 당했다고 한다. 발해 승려 정소(貞素·?~828)는 813년 가을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가서 응공(應公)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데 영선은 곧 응공의 스승이었으므로 정소는 영선과 친교를 맺었다. 정소는 일본에서 영선에게 보내는 황금을 전하기도 하고 영선이 일본에 보내는 불경 등을 전하기도 했다. 827년 겨울 당나라에 간 그는 828년 4월 오대산에 들렀으나 영선은 이미 영경사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독살된 뒤였다. 그때 그가 영선을 애도하여 지은 시는 이러하다.
   
   
   제도(濟度) 못하는 미망(迷妄)의 이 마음은 절로 눈물을 떨군다만
   영선선사의 정은 법안에 의해 유천(저승)에서 닫혀 있노라
   훗날 만일 창파의 객인 나에 대해 묻는다면
   분명히 말하리라, (달마처럼) 신발을 벗어놓고 백족으로 돌아갔다고
   
   不 塵心淚自涓(불흘진심루자연)
   情因法眼奄幽泉(정인법안엄유천)
   明朝儻問滄波客(명조당문창파객)
   的說遺鞋白足還(적설유혜백족환)

   
   
   영선은 바닷길로 귀국하다가 도리포(요동반도 끝)에서 풍랑을 만나 일행과 함께 죽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9세기의 신라, 발해, 당나라, 일본의 국제 관계와 인물 교류, 사상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전이다. 라이샤워가 당나라, 신라, 일본의 공존 체계에 대한 국제적 연구를 활성화시킨 공적은 크다.
   
   하지만 그가 신라와 장보고를 예찬하려고 연구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는 극동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을 관념적으로 희망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 연구자들의 본격적인 연구가 아쉽다. 원문은 무척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본 연구자의 번역에도 오역이 눈에 띈다.

 

‘진랍풍토기’

‘앙코르와트 재발견’ 단초 제공한 13세기 중국인의 캄보디아 방문기

 

▲ 진랍풍토기
캄보디아의 앙코르톰과 바이욘 사원, 그리고 앙코르와트는 정말 기이한 유적이다. 씨엠립 공항을 떠난 비행기의 옆자리에 우연히 앉으신 어떤 할머니가 돌밖에 본 것이 없다고 푸념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사원 입구에 선 돌탑 위 석상의 얼굴과 회랑 벽면을 가득 채운 부조, 신의 사원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힌두교, 불교가 중층으로 포개어 만든 신성한 공기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두 번 갔다 왔지만, 나이가 더 들면 또 가서 석양의 사원을 바라보고 싶다.
   
   이 캄보디아의 유적이 근대에 조명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 때 주달관(周達觀·1266~1346)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 때문이다. ‘진랍풍토기’란 어떤 책인가? 진랍을 시찰하고 그곳의 풍토를 보고한 한문 문건이다. 진랍이란 어느 곳인가? 캄보디아의 옛 나라, 곧 고대 캄보디아(Kambujia)의 앙코르(Angkor) 왕조(802∼1431)를 말한다. 진랍이라는 명칭은 수나라 역사를 당나라 때 정리한 ‘수서(隋書)’ 제4권에 처음 등장한다. 원나라 때 완성된 ‘송사(宋史)’ 권489에는 이 나라 역사를 정리한 ‘진랍전’이 들어 있다. 진랍은 점랍(占臘)이라고도 적는다. 원나라 때 현지에서는 감패지(甘?智)라고 불렀다고 한다. 캄보디아라는 발음을 한자로 베낀 표현이다.
   
   진랍풍토기를 작성한 주달관은 어떤 인물인가? 원나라 때 영가(永嘉), 즉 절강성 온주 영가현 사람으로, 호를 초정일민(草庭逸民)이라 했다. 온주는 원나라 때 해상무역을 감독하는 시박사(市舶司)가 있었으므로, 주달관은 해외무역에 관계했거나 시박사의 일에 관여했던 듯하다. 주달관은 어째서 캄보디아에 갔다 왔는가? 원나라 성종(테무르 칸)이 원정(元貞) 원년(1295) 6월, 진랍에 가는 사신 일행을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주달관은 1281년 10월에 점성(占城·참파왕국) 행성에서 진랍국으로 파견된 호부만호와 금패천호가 돌아오지 못한 사건을 문책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만호와 천호가 캄보디아로 파견된 것은 아니고, 그들이 살해된 곳도 캄보디아가 아니라 베트남이었다. 다만 주달관이 원나라의 대외 정책 때문에 앙코르에 간 것은 분명하다.
   
   진랍풍토기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이 책은 명나라, 청나라의 여러 총서에 수록되어 그 속에 담긴 기이한 이야기가 한자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아벨 레뮈자(A. Remusat)가 1819년에 프랑스어로 이 책을 번역하면서다. 그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삼고 1898년에 하노이에 프랑스극동학원(EFEO)을 설립했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했던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그곳의 교수로 있으면서 1902년 그 학원의 기관지에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주를 발표했다. 이후 번역본으로 프랑스어·일본어·영어본·캄보디아본(柬 寨文), 그리고 독일어본이 나왔다. 펠리오 자신은 새로운 역주를 시도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1945년에 죽었다. 한국어 번역본도 있으나,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
   
   주달관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동쪽을 숭상하여, 그 궁궐이 동쪽을 향해 문을 내었다고 했다. 중국의 궁궐이 남면(南面)하는 것과 달랐던 것이다. 또 캄보디아의 전설에 따르면 국왕은 인간과 나가(여자 뱀)의 몸에서 태어났고, 나가의 부친이 국토의 수호신이자, 왕과 나라의 수호신이기도 하다고 한다. 주달관은 왕이 나가의 정령과 밤마다 교접한다는 기이한 전설을 기록해 두었다.
   
   주달관에 따르면 왕이 집무하는 곳에는 금창이 있고, 창의 격자 좌우에 있는 4각형의 기둥 위에 거울이 있다. 거울은 약 40~50개가 있어서, 차의 곁에 줄지어 놓여 있다. 그 금창의 아래에는 코끼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궁전에는 기이한 곳이 많다고 하는데, 감시가 심하여 볼 수가 없다. 밤이 되면 왕이 그 궁전의 금탑(비메아나카스) 아래에서 잠을 잔다. 지역민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탑 속에는 아홉 개의 머리가 달린 뱀의 정령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나라 전체 토지의 주인이다.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 매일 밤마다 나타난다. 이에 왕은 먼저 그와 동침하여 관계하는데, 그 사이에는 비록 왕비라 해도 함부로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고(二鼓·두 번째 알림 시각, 네 시간)가 지나 그때 탑에서 나와 비로소 아내나 첩과 함께 잘 수가 있다. 만일 이 뱀의 정령이 어느 날 밤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번왕(番王·캄보디아 왕)이 죽을 때가 된 것이다. 만일 번왕이 하룻밤이라도 탑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반드시 재앙을 입는다.”
   
   ‘금창의 아래에는 코끼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표현은 현재의 이른바 ‘코끼리 테라스(Terrace of the Elephants)’를 말한다. 테라스 위의 건물들이 지금은 없지만, 주달관의 당시에는 테라스 위 높이 3m되는 곳에 건물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1296년 2월 20일, 주달관 등은 온주를 출발해 복주(福州·푸저우), 해남(海南· 하이난) 등 해로를 따라갔다. 칠주양(七洲洋)을 지나 안남을 거쳐 메콩강의 수로에 있는 캄보디아 캄퐁 참에 이르러 메콩강을 따라 점성(占城)·진포(眞蒲)·사남(査南)·반로촌(半路村)·불촌(佛村·보리살주菩提薩州)을 거쳐 담양(淡洋·똔레삽 호수)을 건너 오가국(吳哥國)에 도착해 해안에 상륙했다. 그리고 7월에 마침내 진랍의 수도인 오가성(吳哥城·야소다라프라, 현재의 앙코르톰)에 도착했다. 주달관 일행은 술리안드라바르만(재위 1295?~1307)이 다스리는 캄보디아에서 약 1년간 생활했다. 그리고 1297년 6월에 귀국길에 올라 8월 12일에 영파로 돌아왔다. 그리고 1312년 이전에 진랍풍토기를 엮었다.
   
   주달관은 캄보디아의 역사에 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진랍풍토기는 약 8500자의 짧은 분량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달관은 캄보디아 수도, 거주민의 생활, 경제, 문화, 습속, 언어, 물산 등을 상세히 서술했다. 앙코르톰을 묘사한 기록은 이러하다.
   
   주성(州城·도성, 현재의 앙코르톰)은 둘레가 이십 리(약 11.78㎞)쯤 된다. 다섯 개의 문이 있고, 문은 각각 이중으로 되어 있다. 오직 동쪽을 향해서만 두 개의 문(북쪽 승리의 문과 남쪽 사자(死者)의 문)을 두었고, 나머지 방향에는 모두 하나의 문만 두었다. 성의 바깥에는 커다란 호(濠·해자)가 있고, 해자의 위에는 모두 성내의 큰 길로 통하는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의 양쪽에는 모두 석신(石神) 54개가 있는데, 석장군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아주 거대하고 용맹스럽다. 다섯 개의 문은 모두 서로 비슷하다. 다리의 난간은 모두 돌로 만들었고, 뱀의 형상을 새겨두었는데, 그 뱀은 모두 아홉 개(일곱 개의 잘못인 듯)의 머리를 갖고 있다. 54개의 석신은 모두 손으로 뱀을 품고 있어서, 마치 뱀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듯한 자세이다. 성문의 위에는 커다란 돌로 만든 불두(佛頭) 다섯 개가 있고, 그 얼굴은 동서남북의 사방을 향하고 있으며, 중앙에 둔 하나의 얼굴은 금으로 장식했다. 문의 양쪽에는 돌을 깎아서 코끼리의 형상(안팎에 코끼리 두상의 석조가 있어 좌우 양측에 각각 3개씩이므로 모두 12개이다)을 만들어 두었다. 성의 벽은 모두 돌을 차곡차곡 겹쳐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2장(丈·약 6.5m)쯤 된다. 돌은 아주 주밀하고 견고한 데다가, 잡초가 자라 있지 않다. 그런데 여장(女墻·성벽 위 낮은 담)은 없다.
   
   또한 주달관은 ‘실녀’의 항에서, 이른바 성녀식(成女式)인 진담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진담은 캄보디아어로 미성년 남녀를 뜻하는 촘톤을 한자로 표기한 말이다.
   
   민간에서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그 부모는 반드시 장래의 행복을 기원하여 “너는 남들이 강하게 탐내어 장차 천, 백의 남자에게 시집가라!”라고 말한다. 부잣집의 여자는 일곱 살에서 아홉 살이 되면, 가난한 집의 여자는 열한 살이 되면, 반드시 승려와 도사에게 명하여 그 동정을 없애는데, 이것을 진담이라 한다. 즉 관리가 매년, 중국의 달력으로 말하면 4월 중의 하루를 선택하여, 나라 안에 이렇게 포고한다. “응당 여자를 길러서 진담의 시기에 해당하는 집이 있으면 우선 진담을 행하고 관리에게 보고하라.” 관리는 그 집에 우선 커다란 납촉(양초) 하나를 지급한다. 그 납촉의 위 한 곳에 눈금을 새겨, 이 진담의 밤에 저물녘이 되면 점화할 것을 약속하고, 눈금을 새긴 곳까지 납촉이 타들어 가면 그것이 진담의 시각이다.
   
   주달관의 전후에도 캄보디아를 방문한 중국 사신은 여럿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에 관한 기록은 진랍풍토기가 유일하다. 그러니 참으로 귀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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