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시인 이원규의 지리산 사람들

醉月 2012. 10. 21. 07:51
代이은 지리산·섬진강의 산증인 우두성
지리산 최초 등산모임 ‘연하반’ 초대회장 우종수씨 아들…
반달곰 서식 첫 조사, 환경부의 종 복원사업 나서게 해
 
지리산의 품에 깃들어 산 지 어느덧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7번 이사를 하며 지리산둘레길 언저리의 빈집에서 살아가지만, 아직 지리산을 제대로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한 골짜기에 1년씩 살아도 30년은 더 살아야 할 정도로 큰 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 비춰보면 그리 짧지 않은 날들이었다. ‘모성의 산’답게 그 너른 품에 기대어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1 지리산 최초의 등산모임인 ‘연하반’을 창립한 우두성씨의 아버지 우종수씨 일행이 지리산 등산허가를 받고 첫 공식 산행을 하고 있다.
 

등산이 아니라 입산할 때마다 떠올리는 당대의 큰어른들이 있다. 지리산 최초의 산악회 ‘연하반’의 우종수·함태식 선생과 불일평전의 변규화 선생, 그리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다. 허만수 선생은 이미 오래 전에 심심산중으로 사라지고, 변규화 선생마저 몇 년 전에 별세하고 말았다. 노고단산장과 피아골산장에서 40여 년 산장지기였던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선생도 여든 살을 넘기며 하산하고, 92세의 우종수(禹鍾秀) 선생도 노인성 치매로 겨우 아들의 얼굴을 아주 잠깐씩 알아볼 정도로 쇠약해져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하여 지리산에 큰어른들이 물러난 텅 빈 자리를 이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우종수 선생의 아들 우두성(禹斗晟·60) 구례문화원장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행하며 ‘지리산 사랑’을 온몸으로 이어왔다. 1996년 지리산자연환경생태보존회를 창립해 지리산 반달가슴곰의 생존 사실을 최초로 알리는 등 종복원사업을 시작하게 하고, 섬진강 수달서식지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선포하는 데 앞장서 왔다. 마침내 아버지를 비롯한 ‘큰어른들’의 대를 이어 지리산의 ‘산증인’이자 ‘어른’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 2 가수 안치환(맨왼쪽)이 우두성씨 부부와 함께 반야봉 정상에 올랐다 3 우종수씨가 1975년 피아골에서 지리산 종주코스 최초의 이정표를 달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수 안치환씨와 오래 전부터 친분을 이어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두성 구례문화원장도 이미 그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안치환씨가 지리산 근처에 공연하러 올 때마다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 특히 내가 쓴 졸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안치환씨가 작곡해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지리산 마니아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사실 이 시의 모태는 그의 아버지 우종수 선생에게서 비롯됐으니 참으로 각별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 최초의 등산모임인 연하반(烟霞伴)의 후신인 지리산악회의 우종수 회장은 1972년 국립공원협회에서 발행하는 창간호 <금수강산>(계간)에 지리산의 대표적 경관 10곳을 선정해 ‘지리산 10경’을 발표했다. 이름하여 노고단 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봉 낙조, 벽소 명월, 세석 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봉 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가 바로 그것인데, 나는 그저 이미 40년 전에 발표된 이 ‘지리산 10경’에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해 덧칠한 시를 발표했을 뿐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세상사 모두 저 혼자의 힘으로는 되지 않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치게 된다.

 

1957년 지리산 종주코스 첫 개발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 ‘구례둘레길 게스트하우스’에서 우두성 구례문화원장을 만났다. 근황을 물었더니 “아이구, 산에도 제대로 못 가고 죽을 맛입니다. 매일 산에 들락거리던 사람이 문화원 일하랴, 혼자 게스트하우스 청소까지 하랴 올 여름엔 더위를 다 먹고 말았습니다” 하며 허허 웃는다.


▲ 1 우두성씨의 아버지 우종수씨(오른쪽 서 있는 사람)가 지리산 최초 등산모임인 ‘연하반’을 만들어 노고단을 등산하면서 텐트를 치고 있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원래 화산농원으로 버섯과 산채나물 등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그 한쪽에는 반달가슴곰이 살고 있었다. 초기의 지리산 반달곰 종복원사업 때 등산객을 졸졸 따라 다니는 등의 인간친화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결국 퇴출당한 그 유명한 반달곰 ‘천왕이’ 등의 임시사육장이었던 것이다. 2004년 도법·수경스님 등과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할 때 잠시 들른 적이 있는데, 내가 생전 처음 반달곰을 직접 본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언제나 단아한 모습의 우두성 원장과 차를 마시며 흥미진진한 지리산의 옛날 얘기들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어르신들을 따라 지리산에 올랐지요. 그때는 정말 며칠 동안 짐을 꾸렸습니다. 산행하는 날 아침이면 온 동네사람들이 장비와 짐들을 구경하러 왔지요. 마치 탐험대가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일일이 배웅도 하고요. 그때는 정말 산행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사실 지리산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입산금지 지역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에도 10여 년 동안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국 유일의 작전지대였다. 그러나 그 기간에도 입산 허가를 받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바로 우두성 원장의 아버지 우종수 선생이 주도한 지리산 최초의 등반모임인 ‘연하반’이었다. 

 

“저의 아버님은 1951년부터 구례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아버님의 기록에 따르면 1955년 4월에 구례중 교사 8명이 처음으로 구례경찰서에 입산신고하고 허락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일행 대다수가 노고단에 올라본 경험이 없는 분들인데다 빨치산과 군경이 다니면서 수많은 길이 나 있어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하산했지요. 그리하여 1955년 5월 5일 교사들과 일반인들이 ‘연하반’을 조직하고(회장 손재훈, 총무 우종수) 재도전했으나 또 실패합니다. 결국 5월 말에야 마침내 노고단을 올랐다고 하니 지금의 노고단 오르기와는 격세지감이 있지요.” 

 

때마침 날씨가 좋았던 바로 그날, 우종수 선생 일행은 노고단(길상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반야봉·세석평전·천왕봉 등의 장엄한 지리산을 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하산 이후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가본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오른 사람이 있었고, 세석평전에서 천왕봉을 다녔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반야봉~벽소령~세석평전까지가 문제였다.

 

“당시까지는 노고단에서 주능선을 타고 천왕봉을 오르는 종주등반의 개념이 없었지요. 그때부터 아버님은 사냥꾼과 약초꾼, 빨치산 부역자들을 찾아다니며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등산로를 알아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957년이 되어서야 연하반은 화엄사~노고단~반야봉~세석평전~연하봉~제석봉~천왕봉~중산리 종주코스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 후부터 등반로를 정비하고, 이정표를 설치하는가 하면 종주능선의 샘을 발굴했지요. 그리고 아직 이름조차 없던 무명 봉우리의 이름을 짓기도 하며 등반지도 제작에 착수해 1962년에야 지리산 최초의 등반지도를 완성합니다.”

지리산 옛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두성 원장의 눈빛이 한층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구례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그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남다르다. 부자지간이라는 혈육의 정을 넘어 지리산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의 존경심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연하반의 중심축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지리산종주 등반로 개척, 최초의 지리산 등반지도 작성·배포뿐만이 아니라 음양수의 전설, 황호랑이 막터 등 20여 편의 설화를 발굴해 <산>이라는 잡지 등에 발표하고,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운동을 주도했다. 1967년 마침내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뒤 연하반을 지리산악회로 개칭하고 회장을 역임하며 40여 년간 지리산을 알리고 보존하는 데 앞장섰다.

지리산 ‘선녀와 나무꾼’ 신도웅·박경애 부부
서울서 살다 귀농 16년차… 음악·무용 전공한 교사 출신 예술가
아코디언 연주하는 나무꾼과 호미 든 꽃밭의 선녀의 대변신
 
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와 나무꾼’이 실제로 지리산에 살고 있다. 사실이다. 날마다 그들의 삶을 흠모하며 사는 이웃집 사람으로서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다. 수취인 이름을 그냥 ‘선녀와 나무꾼’이라 쓴 뒤 편지를 보낸다면 며칠 안에 반드시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1지리산 ‘선녀와 나무꾼’으로 통하는 신도웅·박경애 부부가 귀농 16년차를 맞아 자신들이 직접 조성한 집앞 뜰에서 포즈를 취했다.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중기마을. 섬진강변 19번국도의 벚꽃길에서 부자슈퍼를 지나 골목길을 50m쯤 올라가면 빨간 우체통과 대문, 그리고 1톤 트럭에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새겨진 집이 있다.

 

골목길 왼쪽에는 ‘피아노를 치는 허수아비’가 눈길을 끄는 안채가 있고, 오른쪽 두 개의 대문을 들어서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사계절 아름다운 꽃밭의 정원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다용도 주방과 마치 몽골의 겔 같은 팔각정의 작업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이 모두 나무꾼과 선녀가 오랜 세월 동안 재활용과 폐자재로 직접 만든 것이다. 안채는 소 외양간을 개조한 것이고, 아래채는 꽃사슴 축사를 개조한 것이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하나씩 짓다 보니 무려 건물이 6동이나 된다. 얼핏 둘러봐도 주인장의 이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건물과 정원 곳곳에는 세월과 땀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이 마을을 처음 지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호기심에 안팎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집이 바로 나무꾼 신도웅(59), 선녀 박경애(53)씨의 집이다. 멋진 카우보이모자를 쓰지 않았을 때의 나무꾼이나 외출할 때의 선글라스를 벗은 선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의 아저씨 아줌마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마을의 집집마다 수도 검침하러 다니는 모습이나 산중의 고사리를 뜯거나 호미를 들고 텃밭과 꽃밭을 가꾸는 모습은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요즘 말로 스펙이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다. 나무꾼 신도웅씨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나왔고, 선녀 박경애씨는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교사 출신 엘리트 예술가들이다. 신도웅씨의 친형은 ‘재즈피아노의 대부’로 널리 알려진 신관웅씨이며, 그의 절친한 음악계 동료로는 소리꾼 장사익을 발굴한 피아니스트 임창동씨 등이 있다.

 

이들 부부가 귀농한 지는 벌써 16년이 지났다. 1998년에 입산한 나보다 먼저 지리산에 들어왔으며, 당시는 귀농 혹은 귀촌 바람이 불기 전이었다. 일찌감치 도시 생활을 접고 선녀가 살던 하늘나라가 아니라 곳곳에 선녀탕이 있는 지리산에 안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도피의 승천이 아니라 행복의 연착륙이었던 것이다.

 

서울대·이화여대 출신 엘리트
이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아주 오래 전 서울의 진선여고 교사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각 음악선생 바로 옆자리에 하필이면 새로운 처녀 무용선생이 앉으면서 운명은 시작됐다. 순진한 나무꾼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표현을 못해 어쩔 줄 모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의 여섯 살 차이는 요즘과 달리 꽤 큰 것이었다. 막상 연애를 시작하고도 공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몰래 하는 사랑도 결국엔 드러나게 돼있다. 어찌 그 간절한 눈빛과 몸짓마저 감출 수 있겠는가. 노총각과 처녀 선생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의 날카로운 눈썰미와 교사들의 구설수를 피해갈 수 없었다.


▲ 2 나무꾼 신도웅씨가 직접 만든 게스트하우스 전경.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종 꽃들이 만발해 있는 아름다운 게스트하우스다.
 

마침내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그 당시 사립학교는 국공립학교와 달리 부부교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무꾼과 선녀의 은밀한 연애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당당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학교를 그만 두거나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먼저 결단을 내려 계원예고로 자리를 옮겼다.

 

신혼의 교사 부부는 눈치 볼 것 없이 주말이나 방학이면 전국 어디든 마음껏 여행을 다녔다. 전국 곳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산과 바다며 강변에 텐트를 치고 꿈같은 날들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알콩달콩 전설처럼 아들과 딸, 두 아이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그만 자연에 중독된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무꾼 신도웅씨가 귀농을 꿈꾸기 시작했다. 원래 나무꾼이 충남 서산의 농촌 출신이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도시보다는 시골이 더 좋아졌다. 음악예술계에 있어서도 치열한 서울의 무한경쟁이 싫었고 답답했다. 정년퇴직을 한 뒤 시골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자던 신혼 초의 약속은 앞당겨져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 살을 조금 넘긴 나무꾼이 “함께 갈 수 없다면 내가 먼저 지리산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했다. 

 

나무꾼 신도웅씨는 서울을 떠나올 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의 삶이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귀농의 꿈을 꿔 왔지요. 음악계에 있어서도 프로는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가르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행복과는 자꾸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인데, 프로로서의 삶은 언제나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잖아요? 콩쿠르도 1등만 기억되고 나머지는 전부 잊혀지잖아요. 그러니 도대체 만족을 느낄 수 없었지요.

 

나는 그것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언제나 남들과 경쟁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던 조바심을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었지요. 물론 나는 실패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추어로서의 음악 인생이 어쩌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것도 자연과 더불어 농사도 짓고 꽃사슴도 기르면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즐기고 싶었지요.”

 

처음 나무꾼이 홀로 지리산에 내려와 터를 잡은 곳은 경남 산청이었다. 그러나 산청에서 맞이한 첫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지리산의 동쪽인 산청은 북풍한설을 피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 무렵 우연히 하동군 화개에 들렀다가 한겨울에도 흙냄새 풀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여기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직 입산 초기였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등 뒤로는 지리산이 북풍한설을 막아주고 앞으로는 매화꽃과 벚꽃이 만발하는 무릉도원 같은 섬진강변을 헤매다 바로 이 마을인 화개면 덕은리 중기마을을 찾아냈다.

 

퇴직하면 가자던 귀농, 마흔 넘어 단행
일단 빈집을 구해 3년간 500만 원에 살기로 하고 덜컥 계약을 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려니 이 빈집을 수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 것 같았다. 이미 마을 뒷산의 임야도 사고, 마을 안의 축사 등도 사두었기에 과감하게 이 집을 포기했다. 초기의 시행착오로 산청에서의 정착금과 더불어 계약금 500만 원만 날린 셈이 되었다. 그 대신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고치면 훌륭한 집이 될 것 같았다.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되도록 있는 그대로를 살리며 폐자재나 재활용품들을 이용했다. 


▲ 1 선녀와 나무꾼이 살고 있는 몽골식 겔 모양의 집과 정원. 이곳에서 그들은 인생 3막 세 번째 신혼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집 짓는 일을 해보니 정말로 재미있더라구요. 힘들기는 했지만 천천히 조금씩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내가 직접 방바닥이며 벽과 지붕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엄청난 행복감을 안겨줬습니다. 음악 전문인 내게 있어 집짓기는 아마추어일 뿐이었죠. 정말로 날마다 즐기면서 아내와 내가 살아갈 둥지를 하나씩 지었습니다.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절대로 이런 행복감을 맛보지 못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은 스트레스로 벌써 죽었거나 음악적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신도웅씨는 일단 살 집을 완성하자 나무꾼답게 꿈에도 그리던 꽃사슴을 키우기 시작했다. 물론 농사도 시작했지만 이보다는 일단 꽃사슴을 키우면 귀농자로서의 생활비 마련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사슴사육이 막차를 타던 시점이었다. 또 한 번의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꽃사슴이 70마리로 불어나는데 팔리지는 않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비싼 사료도 다 떨어져 가는데 굶고 있는 꽃사슴을 바라보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날마다 새벽이면 1톤 트럭을 몰고 섬진강변에 나가 하루 종일 풀을 베었다. 강변 모래밭에 차바퀴가 빠지는가 하면 하루 종일 낫질을 하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그래도 꽃사슴의 맑은 눈망울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돈은 안 되지만, 이른 새벽의 섬진강 물안개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풀을 베러 나가는 새벽이 꿈만 같았습니다. 고생은 많았지만 내가 꿈꾸던 음악세계가 비로소 내게로 다가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요. 다시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하며 서울에서의 1등을 위한 음악과 결별하고 지리산과 섬진강의 행복한 음악을 만나기 시작했지요.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꽃사슴들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꽃사슴을 키우던 축사 자리에 주방이 딸린 집을 짓고 그 옆에 몽골의 겔 모양을 본 따 나의 음악 작업실을 직접 지었습니다. 지금도 피아노를 치거나 아코디언을 연주하다 보면 문득 꽃사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리산 첫 찻집 '녹향다원'의 처녀다모(茶母) 오신옥씨

녹향의 그녀가 그 누구와도 악수를 하지 않는 까닭은?

 

화개장터와 쌍계사 십리벚꽃길로 널리 알려진 경남 하동군 화개면은 지리산의 중심 골짜기 중 하나다. 가히 신선들이 살 만한 동네라는 뜻의 동천(洞天)이라는 말이 그 어느 곳보다 잘 어울리는 별천지가 화개동천이다. 눈 덮인 지리산의 한겨울에도 언제나 이 골짜기에선 흙내음 풀내음이 확 끼쳐오고, 마침내 녹차꽃 향기와 더불어 매화 등이 연이어 피어나는 수류화개(水流花開)의 명승지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생의 한철 꼭 살아볼 만한 생거지(生居地)이자 마침내 죽어서도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천년을 더 살고픈 사거지(死居地)다. 이름하여 무릉도원에 견줄 만한 청학동의 전설이 곳곳에 서려 있는 곳. 더구나 이 골짜기의 쌍계사 일원은 우리나라 녹차의 원조로서 시배지가 있는 곳이며, 불교음악 범패의 진원지로서 판소리와 민요와 정악, 칠불사에서 신곡 30곡을 지었다는 우륵의 거문고 등 우리의 전통음악과 민족예술의 고향이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 어쩌다 시절 인연으로 이 골짜기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들은 모두 축복 받은 이들이 아닐 수 없다. 나도 15년간 지리산에 살며 일곱 번 이사했지만 아직 이 골짜기에는 살아보지 못했다. 빈집 인연이 없었다. 다만 이곳에 산다 하더라도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이 이 천혜의 자연조건 속에서 스스로의 기운을 잘 다스리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행복감과 만족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기운을 다스리는 단초 중 하나가 녹차다. 산나물이나 약초 등 좋은 것들이 허다하지만 지리산 작설차야말로 이 화개동천의 맑은 물과 공기 등 지수화풍이 낳은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 대숲 속에서 죽로차를 보고 오신옥씨가 내려오고 있다.

고운 선생이 읊은 바 있듯이 ‘깊숙이 숨겨진 호리병 속 별천지’라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만 50여 년을 살며 ‘녹차와 결혼한 여인’이 있다. 예로부터 화개장터에서 쌍계1교까지 이어진 십리벚꽃길을 연인이 손잡고 걸으면 결혼하게 된다는 ‘혼인길’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정작 이 여인은 아직 처녀다. 친구들은 손주 볼 나이가 되었으니 어느새 노처녀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가 노처녀가 되도록 한 것이라고는 30여 년간 날마다 찻집 문을 열고, 녹차를 마시고, 녹차를 따라주고, 녹차를 만든 것뿐이다. 오직 녹차만을 사랑하며 녹차와 결혼한 유일한 지리산녀다.

쌍계사 주차장과 버스터미널이 있는 쌍계1교 앞에서 31년째 자리 잡은 찻집 ‘녹향다원’(綠香茶園)의 오신옥(51)씨. 그녀가 바로 1980년대 초반 지리산 최초의 녹찻집 ‘석천다원’의 문을 연 주인장이다. 20대 약관의 나이에 ‘지리산의 사랑방’을 만들고 녹차와 더불어 수많은 지리산 마니아들과 교류해 왔다. 그 모든 인연들의 중심고리는 이 찻집과 녹차였다.

▲ 지리산 첫 찻지 녹향다원 전경. 30년 전통의 찻집답게 낡은 건물 그대로다.

30년 동안 공식 인터뷰 한 번도 안 해

오신옥씨를 표현하는 말들 중에는 ‘백작약꽃 같은 여인’ 등의 멋진 수사도 있지만, 말 그대로 ‘지리산의 차여인’이자 ‘녹차미녀’다. 단 두 글자로 더 줄여 표현한다면 ‘다모’(茶母)라 부를 만하다. 지리산의 여신인 마고할미나 성모할매의 선녀 이미지가 나이 50세를 넘기면서 녹차와 화학적으로 결합된 화개동천의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에서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며, 그동안 쌍계사와 그 말사인 국사암과 칠불사 등에 연이 닿은 스님들 또한 그럴 것이고, 지리산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자리에 앉아서 녹차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지리산의 유일무이한 일이지만, 되새겨보면 이 또한 전생의 업보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30년을 한결같이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마주 앉아 눈을 맞추며 찻잔을 함께 들 수 있겠는가. 아마도 생각건대 전생에 지독히 외로웠으리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이승에서는 이렇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얘기를 하고 정성들여 차를 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다모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 녹향다원은 한꺼번에 10명 이상이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오히려 더 아늑해 보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그녀를 휩싸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정작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사실은 언제나 외로우며, “녹차와 결혼했다”는 말 속에는 여전히 ‘노처녀’라는 그림자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한겨울 눈보라 속의 녹차꽃이나 직근의 뿌리처럼 스스로를 버티는 저력이 없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무너졌을 것이다. 그동안 집안이 세 번이나 망하고, 2남4녀의 장녀로서 결혼을 포기한 채 가계를 책임지면서도 그 누구에게 내색 하나 보이지 않고 홀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그녀의 내공이 실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향다원의 오신옥씨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냥 차나 한 잔 하자”며 “그래도 오랜 인연인데 저녁에 앞집 ‘신사와 빈대떡’ 언니와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공식 인터뷰를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다. 그동안 17번의 하동 야생녹차 문화축제가 벌어지고 벚꽃 축제 등 해마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곳곳의 녹차 명가며 식당들이 지면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해도 단호히 거절해 왔다.

“뭐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처음 석천다원을 열 때부터 그런 다짐을 했거든요. 대나무 숲속에 뿌리 내리고 그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 차나무 죽로차처럼 소박하고 담백하게 살기 위해 거절했을 뿐이지요. 동네 사랑방으로서 나를 찾아오는 이들의 벗이 되고, 녹차를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정도로만 살고 싶었지요. 번거로운 것도 싫고요. 그저 그 초심을 지키다보니 이렇게 됐을 뿐입니다.”

사실 이 글도 공식 인터뷰는 아니다. 지난 15년 동안 동년배로서의 인연과 나이 쉰을 넘기면서 조금은 부드러워진 그녀의 너른 품을 핑계 삼아 요즘 말로 문득 ‘들이댄 것’이다. 사진도 몰래 찍은 도촬에 가깝고, 아주 잠깐 대나무밭 아래 차나무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찍은 것들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내락은 받았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사진촬영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절친’ 언니이자 고향 선배인 바로 앞집 ‘신사와 빈대떡’의 이영재씨와 더불어 사흘 정도 술을 마시며 간신히 얻어낸 ‘암묵적 동의’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사의 ‘삼두마차’ 연관·도법·수경 스님

전생부부처럼 다퉈도 ‘따로 또 같이’… 여린 풀꽃의 덕장, 깐깐한 지장, 섬세한 용장

▲ 몇 년 전 모처럼 수경·연관·도법(사진 왼쪽부터) 스님이 자리를 같이했다. 세 스님이 같이 앉은 사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지리산 실상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최초 가람이자 우리시대의 귀농·대안교육·공동체·생명평화 운동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왔다. 나 또한 이러한 시절 인연으로 실상사의 지혜방에 2년간 머물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해우소를 들락거렸다.

 

지리산에 입산한 지 3년 정도는 그야말로 한 마리 산짐승처럼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섬진강변의 용두리마을과 피아골의 조동마을의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주먹맙을 싸들고 지리산의 골짜기와 능선을 넘나들며 하루해를 보내고는 했다. 좀더 멋진 말로는 ‘자발적 가난’과 ‘무위’와 ‘독거’의 날들이었다. 내 생애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해방과 자유와 일탈의 날들이었다. 한 달에 5만 원 정도, 많게는 20만 원 미만으로 버텨보았다. 돈 없이도 살 수 있고, 돈 없는 만큼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엿보며 즐기며, 그러나 그 고통과 외로움과 멸시와 절망마저 친구로 삼았다. 내 일생일대의 결단을 스스로 치하하고 축하하며 한철 잘 놀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뒷집 할머니와 노총각을 알게 되고, 토지면의 우리식당 할머니와 지리산에 먼저 입산한 이들과 어울리고, 서울의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는 바람에 조금씩 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 소문이 섬진강변 지리산을 넘어 남원의 실상사까지 흘러간 것이다.

▲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할 때 길 위에 앉아 있는 수경·도법 스님과 이원규 시인(사진 왼쪽부터).
10대 혹은 20대 초반에 동진 출가

 

2000년 가을 무렵이었다. 당시 지리산과 실상사에는 새로운 기운과 위기가 동시에 몰아치고 있었다. 도법(道法) 스님과 양재성 목사 등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라는 모임이 막 걸음마를 뗄 때였고, 또 한편으로는 함양군 마천의 ‘지리산댐 계획’으로 용유담과 천년고찰 실상사가 수몰될 위협에 처해 있었다. 도법 스님의 설득으로 30년간 선방 수행만 하던 수경 스님 등이 의기투합,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일꾼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법 스님이 인편과 전화로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세상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짐짓 모른 체 지나치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수경 스님이 꼭 만나고 싶다”는 전언이 몇 번이나 왔다. 도법 스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수경’(收耕)은 법명도 처음 들었거니와 비구니 스님인 줄 알았다. ‘여승이 무슨 일로 나를 보자는 것인가’ 하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3년 만에 서울 갈 일이 있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통신두절로 살던 내게도 휴대폰이 막 생길 무렵이었다. “서울에 간 것을 다 아니 조계사 사무실에서 꼭 수경 스님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처음 수경 스님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비구니 스님이 아닌 데다 굵직한 목소리와 두꺼운 돋보기안경 속의 눈빛도 만만찮았다. 다짜고짜 수경 스님이 “차나 한잔 합시다”며 잿빛 바랑을 풀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물 두 컵을 달라고 부탁하더니 발효차 비슷한 것들을 쏟아 부었다. “좋은 찹니다. 한번 마셔 보슈” 하며 스님이 먼저 주욱 들이켰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들이마시려는데 두 모금도 채 못 마셔 ‘켁’ 하고 멈췄다. 무언가 가는 모래 같은 이물질이 혀에 맺히고 맛은 텁텁했다. “스님, 이게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스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니, 이 사람이 지리산에서 3년을 살았다면서 지리산 흙맛도 몰라! 내가 당신 주려고 지리산 깊은 곳에서 이 귀한 흙을 퍼왔소” 하는 것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아, 예…” 하며 머뭇거리는데, “저랑 일 좀 같이 합시다” 하며 ‘선방’을 날렸다. 나는 얼떨결에 “예” 하고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스님은 곧바로 실상사 종무실에 전화를 걸어 “이원규 시인이 내일 들어가니 방 하나 비워두라”고 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아, 무참하게도 선승의 일격에 그만 기선제압을 당한 것이다. 나 또한 그 순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곧 바로 지리산으로 내려와 다음날 옷가지만 챙긴 채 실상사 지혜방으로 가서 2년간을 사는 화답을 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흙탕물 한 모금의 대가는 2년이 아니라 내 인생의 10년간을 좌우했다. 실상사로 가자마자 낙동강 1,300리를 걷고, 지리산 바깥으로 빙 돌아 세 번을 걷고, 생명평화 탁발순례 1만 리 길과 4대강 3,000리 길과 새만금 삼보일배며 오체투지 등 그 모든 일에 나서서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여파로 지난해에는 결국 내 몸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얻은 결핵성 늑막염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9개월 동안 독한 약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시절 인연으로 실상사에 살면서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그리고 언제나 뒷방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학승’ 연관(然觀) 스님을 조금 더 가까이서 알게 됐다. 이 세 스님들은 10대 혹은 20대 초반에 동진 출가한 뒤부터 참으로 오래 도반생활을 해왔다. 나 또한 지리산 초기의 3년 정도를 빼고는 줄곧 이 세 스님과 연을 이어왔지만, 장장 40여 년간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온 세 스님의 끈끈한 속정을 어찌 미루어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경책성 화법이나 몸짓 또한 어찌 다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폐사지처럼 한가했던 지리산 실상사가 그동안 우리 시대 ‘생명평화의 베이스캠프’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법 스님의 부단한 열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언제나 연관·수경 스님이 있었다. 그리하여 혹자들은 세 스님을 일컬어 ‘실상사의 삼두마차’라 불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도법 스님은 전북 금산사로 출가했으며, 수경 스님은 수덕사, 연관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해 세 스님은 서로 문중이 다르다. 각 문중에서도 이제는 중진을 넘어 원로 대접을 받을 법랍인데 참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것이다.

 

그동안 나는 도법 스님과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1년간 함께했으며, 수경 스님과는 탁발순례와 더불어 낙동강 1,300리와 지리산 850리를 걷고, ‘새만금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등을 하며 총괄팀장의 이름으로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자 했다. 연관 스님과는 그의 ‘백두대간 종주’를 지원하기도 했지만, 이 세 스님과 개신교와 천주교, 원불교 등의 종교인들과 4대강 3,000리를 103일 동안 걷기도 했다. 특히 연관 스님과는 주로 수월암이나 지리산 곳곳에서 차를 마시며 해박하면서도 소박한 스님의 풍모에 이끌려 스님은 가르친 바 없지만 나 스스로 색다른 문학 수업을 받았다.

▲ 1 수경 스님이 머물던 실상사 극락전. 지금은 도법 스님의 처소다. / 2 연관 스님의 처소 수월암. 파초가 연관 스님의 기품을 닮은 듯하다.
풀꽃상 시상식장 연관 스님은 끝내 안 나타나

 

그런데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세 스님의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도법 스님은 합리적이면서도 근본주의자인 ‘깐깐한 지장(智將)’이요, 수경 스님은 선객다우면서도 ‘섬세한 용장(勇將)’이요, 연관 스님은 선비나 학자다우면서도 큰 덩치에 비해 ‘여린 풀꽃의 덕장(德將)’이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리산 댐 문제’가 불거지자 도법 스님은 선객인 수경 스님을 ‘진속불이’의 관점으로 끝까지 설득해 산문 밖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수경 스님 또한 그 화답으로 도보순례뿐 아니라 ‘삼보일배’에 이르기까지 내친 김에 온몸으로 나섰다. 그러나 연관 스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의 ‘목석’이었다. 학승의 자세를 잃지 않고 언제나 그늘과 배후를 자처해 왔다.

 

12년 전 제6회 풀꽃상 시상식 날의 풍경이 떠오른다. 세 스님이 지리산 물봉선과 함께 수상을 하게 되었는데, 연관 스님은 이른 아침 산에 오른 뒤 끝내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7대 종단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한 ‘지리산 위령제’를 전후해 도법 스님이 스스로 산문 밖 출입을 삼가며 3년 기도에 들어가자 수경 스님은 이를 대신해 사회 전면에 나서고, 연관 스님은 조용히 목숨을 걸고 한겨울 ‘백두대간 1,500리 종주’로 화답했다.

 

‘해인사 청동대불 사건’ 때는 오히려 연관 스님이 앞장을 섰으며, 생명평화탁발순례길에는 도법 스님이 단장을 맡아 일선에 서자 수경 스님은 도감을 맡으며 묵언하는 등 ‘따로 또 같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계종 특별수도원인 봉암사에서의 동안거에서도 수경 스님은 ‘조식취모’의 공양주를 맡고, 연관 스님은 ‘당시역사’의 불목하니를 맡으며 수행을 했으며, 그 와중에도 수경 스님은 ‘지율 스님과 새만금 문제’에, 연관 스님은 ‘황교수 사태’에 눈길을 접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도법 스님은 여여히 생명평화의 길을 걷고 걸었으니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의 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로 만나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서로 다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주변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전생의 부부’였을 거라며 키득거렸다.

 

제주 4·3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도법 스님은 1965년 출가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도법 스님은 두 스님과 의기투합해 1995년부터 실상사 주지 소임을 맡으며 지리산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한국 불교개혁의 최선봉역을 맡으며 조계종 화쟁위원회,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종교평화위원회를 합친 기구인 자성과쇄신결사본부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안으로는 스님들의 대학원 격인 강원 화림원을 만들어 후학교육에도 매진하는 한편 바깥으로는 화엄경의 가르침과 인도의 간디사상 등을 접목한 생명평화운동과 불교계의 쇄신을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다.

 

“불교의 핵심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딱 두 마디예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세상에 나의 존재가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뜻이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온 세상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내가 최선을 다해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 10주년 기념잔치에 많은 학생들이 즐기고 있다.
연관 스님, 도법 스님에게 직격탄 날리기도

 

도법 스님은 때로 논리적이면서도 장황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또한 이처럼 어려운 것을 현실적으로 단순명쾌하게 정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덩치가 큰 연관 스님은 과묵하다 못해 때로는 석장승처럼 씨익 웃기만 한다. 20대 초반에 해인사로 출가한 스님은 우봉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다. 그 뒤로 10여 년 동안 봉암사·상원사·해인사 등의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김천 직지사의 관응 큰스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경전 공부를 시작한 학승이 되었다. <해인지>의 ‘호계삼소’에 따르면, 탄허·운허 큰스님과 함께 손꼽히던 ‘대강백’ 관응 스님이 20년 가까이 직지사에서 상주하면서 ‘글 잘하는’ 스님들을 모아 경과 논을 가르쳤는데, 연관 스님은 그 첫 번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칭 ‘문학도’였던 연관 스님을 관응 큰스님이 마치 친자식처럼 아껴 외국에 나갈 때도 수행하게 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관 스님은 절대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사진 찍히거나 행사에 참석하거나 인터뷰를 절대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명한 스테디셀러 <죽창수필> 등과 경전 등을 번역해 펴내는 일, 해마다 하안거와 동안거 등 선방에 드는 그 외의 시간에는 실상사 바로 뒤 수월암에서 홀로 밥을 끓여 먹는다. “그냥 혼자 살아요. 내 한 몸 누구한테 또 업을 짓겠어요. 사실 공양주도 귀찮고, 상좌도 귀찮고. 아직 몸 성한데 중이 뭐 독거살이 해야죠.” 늘 이런 식이다.

 

그러고 보면 연관 스님은 한 번도 주지 소임을 맡아 본 적이 없다. 소임을 맡은 게 있다면 실상사 화림원의 초대학장이나 그를 역경의 길로 이끈 관응 스님이 주석하던 직지사, 문경의 김룡사, 태안반도의 흥주사 등지에서 강백을 한 것이 전부다. 상좌가 여럿 있지만 ‘따로 내세우거나 챙기지 않고’ 역경에만 몰두해 왔다. 말하자면 불교계 내부의 ‘세 불리기’ 등 이런 것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불교계 안팎에서 “역경에 있어 성실하고도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연관 스님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왕생집>, <죽창수필>, <선문단련설>, <금강경간정기> 등이 있다.

▲ 연관 스님은 산에 오를 때면 언제나 승복 위에 등산복을 입고 감쪽같이 신분을 감추곤 한다.
그런데 한 번은 역경과 선방수행에만 몰두하던 연관 스님이 느닷없이 도법 스님에게 죽비를 든 일이 있었다. 이른바 ‘황우석 교수 사건’ 때의 일이다. 도법 스님이 몇 군데의 언론에 ‘불교계의 황우석 지지에 대한 비판’ 등의 인터뷰와 기고를 하자, ‘우석선생 친근기’를 쓴 바 있는 연관 스님이 불교신문을 통해 장장 40여 년간의 도반에게 공개적으로 ‘도법 스님, 이젠 그만 두시라’는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언론은 ‘불교계의 내분’ 운운하는가 하면, 불교계 안팎과 네티즌들은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저마다 아전인수격으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관 스님은 그동안 언론 등에 한 번도 기고한 적이 없었다. 도법 스님 또한 느닷없이 공개적으로 뺨을 맞은 격이니 일단은 참으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세 스님과의 오랜 인연으로 그 논쟁을 수습하는 어쭙잖은 화해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한 수를 배웠다. 두 스님이 휘두르는 다소 감정적인 시퍼런 칼날이 베고자 하는 것 또한 미망과 전도몽상이니 사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더구나 일방적이긴 하지만 불가의 아름다운 가풍인 도반 간 ‘경책’과 ‘탁마’의 실전을 몸소 보여주고 있으니 이 어찌 부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결별의 기운이 감돌던 이 사건을 보며 새삼스럽게 느낀 흥미로운 사실은 세 스님의 평상시 풍모가 뒤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향이 풍기니 참으로 기이한 양상이 아닐 수 없었다. 연관 스님은 잠시 덕장이기를 포기(?)한 ‘깐깐한 지장’을 표방한 듯하고, 수경 스님은 두 스님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여린 풀꽃의 덕장’이 되었으며, 묵묵부답인 도법 스님은 ‘대범한 용장’이 되었다. 이렇게 뒤섞이고 보니 ‘그것 참, 이 또한 오래 살다 보니 서로 한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정수리로 흘러들었다. 부창부수요, 전생의 부부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편, 속세에 널리 알려진 수경 스님은 선방의 선객에서 저잣거리로 나오자마자 활화산 같은 열정을 보였다.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상임대표,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화계사 주지 등을 맡으며 한국사에 있어서 투쟁이 아니라 고행을 통한 자기성찰의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보일배와 오체투지였다. 실로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스팔트를 기어가는 한 마리 자벌레가 되었다. 내게는 아버지 같고 큰형님 같은 분이었다. 10여 년간 길 위의 천막살이를 했으니 눈빛만 봐도 척척 알아들었다.

 

그런 수경 스님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떠나기 1년 전부터 나는 수경 스님으로부터 삼각산 화계사에서 처음 환계(還戒)라는 말을 들었다. 스님은 이미 저잣거리를 떠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부처님께 조계종단의 계율마저 돌려주고, 법복을 벗고 산중의 농사꾼 촌로로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담담하고도 차분한 말투로 “내가 속세에서 할 일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내 몸도 마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부처님께 계율마저 돌려주고 산중 촌로로 돌아가 배추농사를 짓겠다. 그때까지만 함께하자”고 했다. 오체투지를 앞둔 설날 아침에 스님이 던진 화두 ‘환계’란 말은 실로 두려웠고, 무서웠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속으로는 설마설마 했다. 아수라지옥 같은 저잣거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인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를 하며 병든 몸과 지친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신심의 발로’ 정도로 생각했다. 선방 수좌로만 살다가 저잣거리에 나온 뒤 처음으로 화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도 마치 행자승처럼 늘 그렇게 ‘댓돌 위의 신발부터 똑바로 놓으라’는 조고각하의 첫 마음으로 살아왔었다. 그동안 무릎관절은 다 문드러지고 안 좋은 눈은 더욱 나빠지는 등 온몸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당대의 유마 거사이자 환경보살이었다.

▲ 오체투지.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 이렇게 자벌레처럼 기어서 갔다.
수경 스님 홀연히 자취 감춰

 

그런 수경 스님이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미움도 원망도 다 받아들이겠다”며 솔직 대범한 발로참회의 글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생사 해탈의 관문을 넘어서지 못한 채 얘기하는 것은 자기 위선”이라며 “죽음이 두렵다”, “대접 받는 것도 싫다”는 스님의 처절한 고백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천막생활의 도보순례 중에도 이른 새벽에 먼저 일어나 주변 공중화장실의 누런 소변기와 대변기를 남몰래 맨손으로 깨끗이 닦아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은 한 달에 한 번도 잘 씻지 않던 스님이었다. 1주일 동안 빨지 않은 양말을 햇볕에 말려가며 신다 보니 던지면 꼿꼿하게 설 지경이 되어 “스님, 더러워 죽겠어요. 제발 좀 씻으세요” 핀잔을 주면 “야, 향싼 종이에 향기 나듯이 내 몸에는 향기가 나, 맡아봐” 하며 허허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사실 처음으로 지리산둘레길에 대한 고민과 제안을 한 사람도 수경 스님이었다. 2000년 낙동강 1,300리와 2001년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를 할 때, 내가 사전답사를 했는데 도저히 사람이 걸을 만한 길이 없었다. 그 모든 길들이 차량 위주로 바뀌었으니 목숨을 걸고 순례해야 했다. 지리산 순례 때 수경 스님이 “최대한 비포장길과 고갯길 등을 찾아보라”고 해서 몇 번의 사전답사를 더해야 했다. 그 고민이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 때 도법 스님과 걸으며 공유하게 되고, 건교부 장관을 몇 번 만나면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문광부에서 논의되다 다시 산림청으로 이관돼 애초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지금의 어정쩡한 지리산둘레길이 탄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는 다음에 또 얘기할 것이다.

 

어찌됐든, 속세에 널리 알려진 수경 스님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마디로 잘 있다. 어디에 있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수염이 거뭇거뭇 자라고 눈빛 더욱 형형해진 스님은 충청도의 어느 산중에서 텃밭을 가꾸며 아픈 다리 절면서도 날마다 포행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비로소 덕숭문중의 맏상좌답게 산중의 ‘사자’가 되어 수행자다운 독거살이를 하고 있다. 그동안 법복을 벗어놓고 전국의 폐사지를 홀로 돌아보고, 인도의 아쉬람 등지에 몸을 숨기며 살아오다 마침내 정착했다. 더 큰 수경 스님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서 있다.

 

현재 세 스님은 지난 15년과는 서로 다른 길 위에 있다. 도법 스님은 세상 깊숙이 나아가고, 연관 스님은 선방과 역경에 몰두하고, 수경 스님은 은산철벽의 경계를 넘어 홀로 수행하고 있다. 얼핏 보면 지리산 실상사의 삼두마차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었다. 우리 사회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경책과 탁마의 삼인행’ 혹은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화이부동의 삼인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하여 ‘실상사 삼두마차’의 현 상황은 ‘따로 또 같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또 다른 절정이 아닐 수 없다. 시절이 하수상한 시절에 다만 그것이 부러울 뿐이다. 

▲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하면서 눈보라를 만났다.


 악양 동천의 ‘지리산 화가 부부’ 오치근·박나리씨

남원 운봉 출신 오치근의 어린이 그림책… 아내 박나리와 은별·은솔 ‘두 딸 가족’의 행복

▲ 지리산 화가가족 은별이네 식구. 가족 4명이 모두 지리산 관련 그림을 그리는 유일무이한 가족이다. 왼쪽부터 부인 박나리씨, 남편 오치근씨, 큰딸 (오)은별, 작은딸 (오)은솔.
아름다운 ‘화가 가족’이 지리산에 살고 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상신마을과 노전마을 사이 외딴집에 지리산 운봉 출신의 화가 오치근(42)씨와 그의 아내 박나리(36)씨, 그리고 다섯 살 터울의 어여쁜 딸인 은별(10)·은솔(5)이네가 살고 있다.

 

소설가 공지영씨의 베스트셀러인 <지리산 행복학교>에도 잠깐 등장하는 연인이다. 물론 이 책은 팩트와 픽션의 혼합인 ‘팩션’이기에 실명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로 나오는데, 결혼승낙을 받지 못한 연애시절의 에피소드가 작가의 상상력과 더불어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이는 10여 년 전 이들의 ‘지리산 동거시절’을 다루고 있다. ‘스발녀의 정모’ 편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스발녀’는 ‘스스로 발등을 찍은 여자들’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굳이 풀이하자면 ‘가난한 남자에게 푹 빠져 스스로 지리산까지 와서 사는 여자들’을 상징한다. 나의 아내 ‘고알피엠(RPM) 여사’ 신희지씨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지리산으로 ‘사라진’ 딸을 찾으러 달려온 한 어머니(예비 장모)가 화개동천의 계곡에서 사위와 마주친 얘기(126쪽)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젊은이의 안내로 산속 좁은 길로 들어서 한참을 올라가는데 모퉁이를 돌자 선녀들이 목욕을 했을 것 같은 푸르고 깊은 소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불시에 습격을 받은 듯 수영을 하던 젊은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아싸! 어머니는 짧은 탄성을 내지르더니 옷을 훌훌 벗고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뭐 어떻게 보면 비키니 차림이라고 해야 할까 쩝!) 뛰어들었다. 그리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물속에서 솟구쳐 오른 어머니는 그제서야 두리번거리며 딸을 찾았다. 팔다리가 긴 게 게을러빠지게 생긴 녀석 뒤에 딸이 숨어 있는 게 보였다. 어머니는 조각가 등 뒤에 숨어 있는 딸을 향해 말했다.

 

“시원하니 살 만하네…. 이만하면 괜찮다.”

 

그리고 그날 처음 물속에서 대면한 사위는 한나절 내내 민망한 차림의 장모와 멱을 감다가 시원하게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사실 나도 10여 년 전 여름날의 이 현장에 함께 있었다. 쌍계사에서 칠불사로 가는 길가 동정산장 아래의 계곡에서 벌어진 일이다. 오치근·박나리씨 부부가 사랑의 도피처(?)로 악양면의 빈집을 구해 동거를 시작할 무렵의 얘기다. 조금 과장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이미 몇 번 안면이 있었던 우리는 처음 만난 장모님과 더불어 팬티바람으로 물놀이를 하는 진기한 풍경이 연출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장모님 또한 꽉 막힌 어른이 아니라 열린 분이었으니 더불어 시원한 맥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뒷부분은 사실 오치근씨 부부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의 연애담으로 이어진다.

▲ 아빠 오치근씨와 은별이가 지리산둘레길 곳곳을 둘러보고 담아낸 <지리산 이야기>에 나오는 그림.
‘사랑의 도피처’로 지리산에서 동거 시작

 

화가 오치근·박나리씨는 조선대 미대를 졸업했다. 군대를 다녀온 오치근씨가 복학했을 때 막 미대에 입학한 박나리씨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학생이 아직 어린 신입생을 다른 학생들의 환심을 사기 전에 낚아챈 것(?)이다. 현역 등 주변 남학생들의 질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박나리씨도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회화과 선배에게 푹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불같은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위 민중화를 그리는 운동권 미대생이었으니 취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졸업을 했지만 어차피 변변한 직장도 없으니 결혼이다 뭐다 할 형편도 못되었고, 처가의 허락도 받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의 도피처로 삼은 곳이 지리산이었다. 

 

그리하여 책 속의 얘기처럼 일단 수소문 끝에 딸을 찾아온 장모의 내락은 받았지만, 변변한 직장도 없는 화가 사위에 대한 장인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또다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결국 동거인 오치근·박나리씨는 오직 결혼을 하기 위해 잠시 지리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장인을 설득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사를 가 공공미술을 하는 어느 ‘조형연구소’에 위장취업(?)을 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장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 더 중요했으므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연구소’라는 그럴 듯한 말에 넘어가 장인도 결혼 승낙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공공미술은 초창기였으니 고생만 될 뿐 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다 공공미술의 주제 등의 제약이 너무 많아 물고기나 구름 등 뻔한 벽화만을 그려야 하는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새롭게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어린이 그림책이었다. 이동도서관인 ‘어린이 그림책 버스 뚜뚜’를 몰고 순천 기적의도서관과 서귀포 기적의도서관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전히 돈이 안 되는 일만 하다 보니 생계를 제대로 꾸릴 수 없었다. 그런데다 첫딸 은별이가 태어나자 도시생활이 더욱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에 다니던 친구가 “어린이 그림책을 그려보라”며 백석 시인의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건네주었다.

 

“민중미술을 하던 네가 자존심 상할까봐, 그래서 고민 끝에 백석 시인을 고른 거야. 이걸 한 번 그려봐. 앞으로는 어린이 그림책이 대세일 거야. 민중미술도 중요하지만 은별이도 태어났으니 애한테도 좋고 생활비도 좀 벌어야지.”

▲ 지리산학교 전체 수업 때 화가 박나리씨가 수강자들에게 보디페인팅을 그려주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백석 동화시집 그려

 

처음 보는 백석 시인의 동화시 12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나같이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짧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바닷가 물웅덩이에 집게 네 형제가 살고 있다. 집게로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한 세 형은 다른 동물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택한 막내 집게만이 살아남는다. 쉬우면서도 묵직한 교훈을 담고 있다.

 

곧바로 작업을 시작해 백석의 동화시 <산골총각>이라는 책을 펴냈다. 바로 이 무렵부터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막내 집게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거듭했다. 결론은 지리산행이었다. 삭막한 도시를 떠나 본격적으로 그림도 그리고, 어린 딸도 고향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어차피 가난했지만 결혼 이전의 꿈만 같던 지리산 동거시절이 더 그리워졌다. 그리하여 큰맘 먹고 다시 하동군 악양면으로 이사를 했다.

▲ 아빠 오치근씨가 그려준 딸 은별이와 은솔이의 모습.
사실 오치근 화가는 귀농자나 귀촌자가 아니다. 온전한 지리산 원주민이다. 지금도 전북 남원시 운봉읍 신기리에 본가가 있다. 널리 알려진 지리산둘레길이 바로 이 마을 앞 람천 둑길을 지나간다. 내가 2009년 <월간山> 6월호에 ‘미리 가보는 지리산둘레길 300km’를 연재할 때 이미 한 차례 소개한 적이 있다. 

 

‘경남 함양과 도경계를 이루는 전북 남원은 한국 고전소설과 판소리의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동편제 판소리의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 및 이성계의 황산대첩비 등이 있는 곳이 바로 해발 400m의 고원분지형 운봉평야다. 지리산학교의 그림반 선생인 화가 오치근이 바로 지리산둘레길의 신기리 출신이다. 지금도 부모님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언젠가는 화가 오치근이 람천 둑길의 아렷한 봄밤의 정취를 명작의 그림으로 그릴 날도 있으리라. 이렇듯 어쩌면 역사에 남지 않을 일들도 소소하게 이 길은 그 모두를 기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길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허수룩한 집이라도 세상의 모든 집은 누군가의 첫사랑인 ‘옛 애인의 집’이요, 그 모든 마을 숲이나 다리 아래나 둑길은 그 첫사랑들의 밀회장소가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따지고 보면 마침내 세상도처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다.’

 

결국 화가 부부는 아직 어린 딸 은별이를 안고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악양면의 빈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고향 운봉도 좋지만 사랑의 추억이 곳곳에 서려 있는 섬진강과 평사리 무딤이들이 자꾸 발길을 잡아끌었다. 고향 운봉에는 농사철에 들러 부모님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어린이책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빈집 하나를 두고 나와의 특별한 사연이 생기기도 했다.

▲ 지리산 화가가족들이 펴낸 책들을 한데 모았다.
빈집서 살다 집주인 나타나 집 부숴

 

당시 나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문수골에 살았는데, 내가 지리산에 와서 살아본 여섯 번째 집이었다. 이곳에서 한 3년 살았으니 다시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서도 한철 살고 싶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보니 몇 군데 빈집이 있었다. 지금이야 눈을 씻고 봐도 빈집을 구하기 어려운데다 땅값이며 집값도 엄청나게 많이 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여러 집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는데 동매리의 한 외딴집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과도 적당히 떨어져 있고 주변 풍광 또한 너무나 좋았다.

 

그러나 막상 그 빈집에 가보니 식수로 사용할 수도도 끊겨 있고, 방안의 도배도 엉망이었다.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초배지를 바르는 등 애를 써도 잘 붙지 않았다. 그야말로 벽면이 너덜너덜했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좋았지만 막상 이사를 하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결정적인 것은 이 집의 부엌과 마당 3분의 1 아래로 물길이 이어져 있었다. 예전의 아주 작은 계곡을 복개해서 집을 지었던 것이다. 여전히 땅속에는 큰 돌과 자갈들이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마당과 부엌의 한쪽은 늘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아내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오치근씨 가족도 빈집을 구하다 이 집을 보게 된 것이다. 화가의 눈으로 보기에 이 빈집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바로 이곳이다’ 결정하고는 계곡에 호스를 이어 식수를 끌어오고 방안의 벽면도 어렵게 도배한 뒤 이사를 했다. 전형적인 시골의 서민집인 이 낡은 집에 살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아직 어린 딸 은별이가 자연에 익숙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오치근씨의 작품집도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백석 시인의 동화시를 수묵담채화로 그린 <오징어와 검복>이었다. 바로 이 책을 시작으로 왕성한 어린이 그림책 작가로 발을 내딛게 됐으니 더욱 의미 있는 집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살 뻔했던 바로 이 집에서 그는 새로운 화가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겨우 8개월도 못 채우고 하루아침에 이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어느 날 승용차가 한 대 오더니 대뜸 집주인이라고 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싼 집세로 살기로 하고 들어왔으니 따로 집주인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대개는 빈집에 사는 관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연히 구두로 계약을 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집주인은 “1가구2주택 문제에 걸려 그러니 당장 이사를 가라. 이 집을 부숴야 한다”고 했다. 집 없는 서러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 작은딸 은솔이가 그린 그림들.
그런데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이른 아침부터 포클레인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방문을 여니 이미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려고 막 달려들고 있었다. 소리치며 맨발로 뛰어나가니 그제서야 깜짝 놀란 포클레인 기사가 내려왔다. “아니, 사람이 살고 있었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집을 밀어버리라는 말만 듣고 왔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린 딸과 아내는 우는데, 차마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기만 했다.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오치근 화가의 가족들은 지금도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면 몸서리 쳐진다고 했다. 집 없는 설움을 지리산에서도 당하고 보니 아무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마을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죽어라 그림을 그렸다. 반드시 내 집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동읍내에서 미술학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다 보니 마침내 노전마을과 상신마을 사이의 조그만 땅을 사게 됐다. 돈이 마련되는 대로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둘째 딸인 은솔이가 태어나고, 가난한 살림살이로 집을 지으려니 도대체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일단 대충 집을 지은 뒤에 이사부터 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의 집도 아직 미완성이다. 하지만 주변 전망이 좋은 데다, 내 집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다행히 <오징어와 검복>을 낸 뒤부터 출판사 등에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규항씨가 펴내는 어린이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도 연재하고, 원화 전시회와 강연 요청도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악양면에 지역주민과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 ‘책보따리’를 만드는 데도 앞장서 초대관장을 맡았다.

 

2011년 여름에는 인터넷서점인 예스24와 공지영의 독자 200명이 뜻을 모아 도서 1,000여 권을 기증했다. 하지만 ‘책보따리’가 널리 알려지는 등 자리를 잡다 보니 여러 가지 오해나 시샘 어린 말들도 생기고, 문화관광부 지원의 도서관 건립문제 등으로 지역주민들과 마찰도 일어나는 등 소란스러워지자 미련 없이 관장직을 내려놓았다. 정상궤도에 올려놓았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알게 모르게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어린이책 그림에 더욱 더 몰두했다. 백석의 동화시를 그린 <집게네 네 형제>(개구리네 한솥밥) 등을 연이어 출간했다. “한국적 정서를 누구보다 잘 표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백석 시인의 시 세계를 각각 다른 기법을 통해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12년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승’, ‘고향’ 등의 시로 널리 알려진 백석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 새 작품 <도깨비 이야기>에 나오는 그림.
가족 네 명 모두 그림 그리는 유일무이

 

또 은별이와 함께 시작한 연재를 마치자마자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을 펴내 주목을 받았다. 섬진강 구석구석 17곳을 여행하며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아름다운 풍경을 아름다운 그림과 딸 은별이의 동심 가득한 그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또한 사단법인 숲길과 계약해 <지리산둘레길 가이드북>의 그림 작업도 하고, <고양이가 왜?>, <꿈이 자라는 나무> 등도 펴냈다.

 

이에 화답하듯 아내 박나리씨도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자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계간 <차와 문화>에 2011년부터 ‘차 그림여행’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부부가 함께 그린 <소금밭 딱새>를 펴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리하여 남편과 아내, 아빠와 딸이 함께 책을 펴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살 은솔이도 언니를 따라 그림을 그린다. 이름하여 지리산의 유일무이한 ‘화가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최근에도 엄마는 딸들과 함께 ‘차 그림여행’을 다니고, 아빠와 은별이도 지리산둘레길과 곳곳을 <지리산 이야기>로 담아내기 위해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 최근에는 보리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은별·은솔의 이름에서 따온 ‘별과 솔이의 그림이야기’를 온가족이 함께 그리기 시작했다.

 

오치근·박나리 부부와 어린 두 딸 은별·은솔이는 말 그대로 스타가 되었다. ‘지리산학교&지리산행복학교’의 전체수업 때도 단연 인기가 높다. 이미 초창기 지리산학교에서 그림반의 선생을 맡았던 오치근씨는 네 개의 지리산학교로 분화 확장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학교인 이곳에서 미술관 여행을 담당하기도 하고, 박나리씨는 전체수업 때마다 얼굴과 팔에 보디페인팅을 해주고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단연 인기 만점이다.

 

더구나 은별이는 장기자랑 때마다 초등학교 3학년답지 않게 판소리의 단가인 ‘사철가’를 유창하게 불러 전국에서 온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알고 보면 판소리 동편제의 김소현·박정선 명창에게 배우는 제자다. 술을 한 잔 걸치면 이따금씩 소리 한 자락을 하는 그 아비에 그 딸이요, 과연 동편제의 고장인 운봉의 손녀딸답다.

 

지난 겨울에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이 선정된 것이다. 한국아동문학인협회에서 2011년 5차 우수추천도서로 선정된 <산골 총각>에 이어 그 성과가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국 도서관에서의 강연과 원화전시, 그리고 파주출판단지 책잔치 등에 참가하는 등 바빠졌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은별이네 화가가족은 날마다 행복한 날들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막내딸 은솔이가 한눈에 반해버린 우리집 ‘얼씨구’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갔는데, 그 이름을 복실이라 지었다. 언젠가는 이 강아지도 이들의 그림책에 등장할 것이다. 오늘도 아름다운 네 가족이 지리산과 섬진강을 누비며 하나하나 그 풍경을 그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이들에게 지리산과 섬진강은 그 누구에게보다 더 많은 비경을 보여 주고, 이들의 그림 속에 행복의 기운을 선사해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는 나의 졸시와 이들의 그림이 함께하는 시화전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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