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金炳淵 小考

醉月 2012. 10. 12. 08:11
金炳淵(1807∼1863) 小考
― {夢遊野談} 所載 記文을 中心으로 ―
홍성남

 

1. 序論
'삿갓'의 代名詞로 人口에 膾炙되고 있는 金炳淵(1807∼1863)에 관한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한두 가지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金炳淵은 조선조 후기(19세기)를 살다간 放浪詩人으로서 '김삿갓'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해외(중국·일본·러시아)에까지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문화관광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매달 발간하는 '이 달의 문화인물'로 금년 9월에는 蘭고  金炳淵이 선정되어 각종 기념행사가 예정에 있다.

 

김병연이 생존했던 19세기는 순조(1800∼1834)로부터 헌종(1834∼1849), 철종(1849∼1864)에 이르기까지 3代에 해당한다. 이 시기 조선왕조는 왕실의 외척 一門에 의한 勢道政治로 국정은 문란해지고, 순조 11년(辛未, 1811) 평안도 농민항쟁과 같은, 크고 작은 민란과 외세의 침노 등으로 朝野가 難境에 처한 시기였다. 그는 순조 7년(丁卯, 1807) 漢陽의 서북쪽인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친 金安根과 모친 함평 이씨 사이에 二男으로 태어났다.

 

5세 때인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洪景來(1780∼1812)亂 때 그의 조부인 金益淳이 亂軍에 투항·협력했다는 大逆罪로 말미암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그의 가문은 滅門之禍를 당하게 될 처지에 있었다. 다행히 김익순의 奴婢인 金聖秀의 도움으로 禍網에서 빠져 나온 그의 가족은 신분을 숨긴 채 황해도 谷山, 강원도 寧越 등지에서 오랫동안 遊離漂迫의 곤궁한 극한적 삶을 살았다. 김병연은 그의 나이 21세인 순조 28년(丁亥, 1827)에 쇠락한 가문을 위해 一時 상경하여 海藏 申錫愚(1805∼1865) 등과 교유하며 立身揚名의 길을 모색했지만 출세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放浪의 길을 떠나기 시작하여 철종 13년(癸亥, 1863) 그의 나이 57세의 일기로 全羅南道 同福에서 타계하기까지 그는 京鄕各地를 遊離乞食을 하며 참담한 삶을 살았지만, 많은 詩文과 일화를 남긴 바 있다.

 

김병연은 放浪騷人답게 생전에 한 권의 시집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신실한 자료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당대 문인들이 남긴 話集에 그의 片鱗이 실려 있고, 이응수가 경향각지에 산재한 그의 구전자료들을 채록·수집·고증하여 그의 死後 67년만인 1939년(己卯)에 {金笠詩集}을 간행한 것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김병연 연구의 토대를 마련한 功力은 있지만 김병연의 僞作詩는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그동안 김병연에 관한 연구는 텍스트의 眞僞, 한시 분석, 개화기 시가의 연계성, 작가론 등 주목할 만한 연구성과들이 나와 있어 본고를 전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본고는 김병연과 同時代를 살다간 夢遊子 李遇駿(1801∼1867)의 {夢遊野談} 所載 '古今詩話' 항목에 실려 있는 김병연의 記文을 학계에 소개하는데 일차적인 의의를 둔다. 이우준은 1849년 겨울부터 1852년 사이에 {蓬史}(金剛山 遊記)→{夢遊燕行錄(夢遊錄)}→{夢遊詩集}→{夢遊野談}을 차례로 찬술하였으며, 불행히도 {夢遊詩集}은 燒失되어 현재 序文만 남아 있고, {蓬史}를 제외한 두 작품은 影印으로 간행된 바 있다. 이우준에 관한 논의는 拙稿와 金貞淑의 論文을 참조하기 바란다.

{夢遊野談}에 실려 있는 김병연의 기문을 중심으로 그의 실상과 수록된 漢詩 두 작품을 간략하게나마 분석해보면 김병연의 삶과 문학을 미력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記文으로 본 金炳淵
이우준은 일찍이 科擧에 뜻을 두었으나, 조선 후기 科弊로 인하여 김병연과 마찬가지로 宦路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재야의 지식인으로 19세기를 살다간 文士이다. 이우준은 漢城의 尾泉(현 서울시 西大門區 渼斤洞 부근)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성장한 지역은 김병연이 태어난 楊州와 같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성싶다.

 

이우준(1801∼1867)은 김병연(1807∼1863)과 同時代를 살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실상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관한 기문의 全文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金炳淵이란 者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혹은 대로 만든 삿갓을 쓰거나 혹은 패랭이를 쓰고, 혹은 옷이나 신발을 잘 차려 신고, 혹은 때묻은 떨어진 옷이나 다닥다닥 기운 옷을 입었으며, 술을 즐기는데 放恣하게 마시고는 취하여 쓰러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去就는 항상 일정하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사라져 헤아릴 수가 없었고, 다만 그의 姓과 이름을 속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文章으로 사람들에게 名聲이 났다. 사람들이 韻이나 賦를 시키면 묻는대로 대답하니 또한 신기한 말이 많았다. 科 詩나 一般詩가 정밀함과 신속함을 兼備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그의 시의 흠을 評論하면 즉시 눈을 크게 뜨고 말하기를, "어른의 글을 어찌 감히 망령되게 논하는가?" 라고 하였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더불어 견주지 아니하고는 이를 받아들이고 웃었다.
늘 정처없이 어디든지 이르는 곳에서 머물렀는데 혹은 열흘간 혹은 한달간 머물다가 문득 또한 머물 데를 정하지 않고 거처를 떠났다.

 

ⓑ 어떤 東峽人이 나를 위하여 말했다. 鄕村에 한 訓長 선생이 있는데 學童 10여명을 거느리고 앉아서 소리내어 講義를 하고 있는데, 어떤 過客이 해진 옷을 바르게 하고는 들어오더니 朝飯을 달라고 請하자 비로소 이를 거절하며 '빈집에 주인이 없습니다' 라고 핑계를 대고는 '다른 데로 가 보시오' 라고 하니 客이 굳이 앉아 일어나지 않아서 부득이 거친 나물로 밥을 함께 먹는데, '객은 어디에 사십니까?' 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楊州에 살지요' 라고 말했다. '며칠 전 楊州 過客이 이 곳을 지나갔는데 오늘 또 보았으니, 이 곳에 무슨 楊州의 客이 이리도 많은 지요?' 라고 말하였다. 다시 '객은 글을 잘 하시오?' 라고 물으니, '대강 글자는 모을 줄 압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韻字를 부를 것이니 능히 시를 짓겠소' 라고 말하자 '그렇게 하리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 學究는 蒙學先生으로서 겨우 {通史} 初卷과 二卷 정도를 아는 자였다.

 

또 韻考도 없어 산만하게 韻字을 불러, '威(위엄위) 字' 하자 즉시 응하여, 山村 訓長의 위엄이 너무도 많도다. 또 '挑(돋을도) 字' 부르니 다시 응하여, 먼지 낀 작은 冠을 꽉 눌러 쓰고 가래침을 돋구네. 또 ' (무리주) 字' 부르니 다시 응하여, 天皇氏를 읽은 놈이 가장 高學年이고, 風憲을 존칭하며 나의 친한 친구라 하는구나, 또 '鬚(수염수) 字' 부르니 다시 응하여, 매번 모든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고 핑계를 대고, 문득 술자리에서 巡盃가 돌아올 때 나이 많다고 먼저 받네. 또 '州(고을주) 字' 부르니 다시 응하여, 한끼니 밥도 없는 방에 生色 내어 말하기를, 금년 過客은 모두 楊州것들이라 하네.

韻字 다섯 字가 겨우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四句節의 시를 즉시 지어내니 그가 문장에 능수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시골 구석의 공부 좀 한다는 무리는 그의 그러한 기이한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자리를 떠나 물러갔다. 그런데 길에서 그를 만난 사람이 방금 떠나간 사람은 金炳淵이라고 말하여 주었다.

 

ⓒ 어떤 사람이 일찍이 同行하다가 酒店을 지나가는데 주머니가 비어 한 푼의 돈도 없는데 곧바로 나아가 주머니를 비우고 한 잔의 술을 마시더니 머물며 詩 한 句絶을 읊조리며 말했다. 行裝이 쓸쓸하니 껄껄 웃을 노릇이네, 남은 엽전 몇 닢은 또한 많다고 말하네. 주머니 속에 깊이 깊이 있으라고 너에게 警戒했건만, 夕陽에 주막의 술을 보니 어이하리?. 그가 읊은 詩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매우 많다. ⓓ아, 이 사람의 가진 재능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능히 몸가짐을 雅淡히 하고, 행동거지가 늘 일정함이 있다면 來歷은 묻지 않고서도 내가 장차 책상을 짊어지고 가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거리낌 없이 노닐며 구애받지 않으려 하고, 儒敎의 가르침을 벗어 내버리고서, 달게 부질없는 漫浪의 무리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혹 放縱한 선비가 그 窮廢를 당해 재주를 믿고 시대를 깔보며 自暴自棄를 편안히 받아들이는 자이지 않겠는가?

 

위의 기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朴斗世가 쓴 {要路院夜話記}를 연상케 한다. {요로원야화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의복은 남루하지만 겸손하며 판단력이 뛰어난 '나'와 의복은 깨끗하나 교만하고 판단력이 형편없는 '서울 양반' 두 사람이며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상술한 기문은, 김병연에 관한 기문이 실려 있는 {洪景來傳}, {大東詩選}, {大東奇聞}, {綠此集}, {海藏集}, {荷亭集} 등과 함께 그의 인간과 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보아지나, 이에 관한 논의는 차후에 논의할 것이다.

 

앞서 기술한 ⓐ의 대목에서 서술자가 '金炳淵이란 자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김병연과 同時代人 이우준도 봉건적 제질서의 해체양상에서 나타난 流民문제로 인하여 삿갓 김병연과 김삿갓 행세를 하는 사람을 구분하여 알아차릴 수 없는 시대적 요인도 있겠지만 외형면에서 삿갓( 笠)을 쓰거나 패랭이(蔽陽子)를 쓰고 다니고 해진 옷을 입고 다녔다는 점에서 김삿갓은 김병연이라는 등식이 가능하다. 둘째, 술을 좋아하여 매일 취하였다는 점과 거취를 정하지 않고 정처없이 遊離한다는 점에서 김병연임을 알 수 있다. 셋째, 姓과 이름은 속이지 않은 점과 科體詩나 一般詩가 정밀하고 신속한 점에서 김병연임을 증명해준다. 넷째, 김삿갓이 머무는 곳마다 문장으로 소문이 무성한 점과 자신의 시에 결점을 논하는 자에게 대적하지 못하게 반박한 점으로 미루어 김병연이 패기 넘치는 騷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병연과 同時代人인 鄭壽銅(1808∼1856)·鄭萬瑞(1836∼1896) 등은 이른 바 딸각발이 부류에 속하는데, 放浪을 일삼아 전국에 많은 逸話와 諧謔을 남긴 바 있는데, 그들이 남긴 시문이 {金笠詩集}에 실려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의 시집에 실려 있는 모든 시가 김병연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요인이 있다.

 

ⓑ의 부분은 김병연의 '嘲山村訓長'의 詩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시골 훈장을 조롱하는7언 律詩로 李遇駿이 '東峽人'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시골의 훈장 선생이 韻을 부르면 김병연이 즉석에서 시를 읊조리는데 두 사람의 問答形式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기한 '東峽人'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東峽人'과 김병연이 일찍이 만나 본 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 대목은 貧窮을 시적 대상으로 했으나 諧謔이 넘치는 秀作이다. 남은 돈 몇 닢을 많다고 이르는 逆說과 돈에게 주머니 속에 깊이 깊이 있으라는 擬人法과 술을 보니 어찌하겠는가 하는 탄식이 매우 적절하게 연결되어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의 부분은 이우준이 世俗의 구속을 받지 않고 放縱한 삶을 살았던 漫浪의 故事에 김병연의 부정적 삶을 비유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史評으로, 지은이는 그가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그 재능을 믿고 너무 傲慢不遜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현실과 타협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放浪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김병연의 심경을 조심스레 형언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이우준도 同時代人인 김병연과 같이 젊은 시절 가슴에 立身行道의 남다른 儒家的 理想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科弊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낙방의 쓴 잔을 마신 경험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의 流落한 생활의 참담한 내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우준의 {몽유야담} 所載 '古今詩話' 항목에는 상기한 김병연 외에도 竹杖芒鞋로 時俗에 얽매이지 않고 京鄕各地를 流浪하던 進士 朴應爀, 李德湖, 進士 李黃中, 進士 申在  등 當時 그와 관계를 갖었던 몇몇 騷人·墨客들의 詩話가 실려 있음을 볼 때, 규범과 질서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학적 세계관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布衣로 일생을 마친 문사들의 불행했던 시대의 悲運에 그는 깊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 漢詩 分析
3.1. 僞善 諷刺
조선 후기 봉건의 이데아인 儒家敎育의 규범을 담당했던 鄕村의 서당에서 훈장을 만난 김병연이 훈장의 僞善을 리얼하게 暴露한 漢詩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다.
山村訓長太多威  山村 訓長의 위엄이 너무도 많도다
猛着塵冠 唾挑  먼지 낀 작은 冠을 꽉 눌러 쓰고 가래침을 돋구네.
大讀天皇高弟子  天皇氏를 읽은 놈이 가장 高學年이고
尊稱風憲好朋   風憲을 존칭하며 나의 친한 친구라 하는구나
每逢凡字憑昏眼  매번 모든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고 핑계를 대고
輒到巡盃籍白鬚  문득 술자리에서 巡盃가 돌아올 때 나이 많다고 먼저 받네.
一飯空堂生色語  한끼니 밥도 없는 방에 生色 내어 말하기를
今年過客盡楊州  금년 過客 모두 楊州것들이라 하네.
山村學長太多威  산촌 훈장이 너무 위엄이 많아
高着塵冠 唾投  낡은 갓 높이 쓰고 가래침을 돋구네.
大讀天皇高弟子  천황씨를 읽은 놈이 제일 고학년생이고
尊稱風憲好朋   풍헌이라 불러주는 그런 친구 단짝이군.
每逢兀字憑衰眼  모를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 대고
輒到巡杯籍白鬚  술좌석에선 백발 빙자대고 잔 먼저 받네.
一飯 堂生色語  한 끼니 대접하고 생색내는 말이
今年過客盡楊州  금년 과객 모두 서울 것들이라 하네.

 

㉠은 {夢遊野談} 所載 한시이고,
㉡은 '嘲山村訓長' 7律 전문으로 정대구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의 한시 가운데 '威'는 微韻, '挑'는 豪韻, '鬚'는 虞韻, ' '·'州'는 平聲이다.

 

㉠, ㉡의 詩題가 '嘲山村學長', '楊州途中,' '嘲山村訓長' 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일차적으로 김병연의 放浪과 무관하지 않지만,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이응수가 공력으로 만든 {金笠詩集}을 아무런 고증도 없이 후대인들이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팔아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 이를 刊行한 데 있다.

 

㉠과 ㉡의 밑줄 친 2행 부분은 본래  의 글자는 가래(spade)를 의미하고, 唾의 글자는 침(saliva, spit)이다. 여기서 두 글자를 합하면 가래침(spittle)으로 우리말을 漢字를 빌어서 표시한 語戱詩(혹은 새김詩)이다.

 

㉠, ㉡의 한시는 허세와 위엄에 찬 시골 서당의 訓長을 嘲弄한 것이다. 김병연은 당시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썩어빠진 시골 훈장의 정체성을 여실히 吐露하고 있다. 洪景來亂이 김병연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이후 정처 없이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만난 시골 훈장은 인격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기품 있는 선생이었다면 그가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지 낀 冠을 쓰고 가래침을 뱉으며 점잖을 빼는 모습이 김병연의 눈에 거슬렸고, 모르는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고 핑계를 대고 술상이 나오면 나이를 빙자해서 먼저 마시려는 무례를 범하면서도, 한끼니 밥도 없는 방에 生色을 내고, 금년 우리 집을 찾는 나그네는 모두 楊州라고 말하는 데서 훈장의 虛勢와 僞善이 김병연의 눈에 얼마나 많이 가득 차있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3.2. 諧謔
諧謔은 비교적 긍정적 측면을 띠고 부드럽게 나타나는 웃음인 반면에 전술한 諷刺는 고발, 폭로 등 부정적 요소가 강해서 찌르는 듯한 웃음으로 나타나는 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차이를 보이지만, 어떤 웃음을 동반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일치를 보인다. 풍자가 강하게 대상을 교정하려는 목적의식을 띠고 있는 반면에 해학은 그러한 목적으로서보다는 자위수단으로서 쓰이고 있다. 해학은 그 궁극적 대상이 전체적인데 비해 풍자는 그 대상이 어느 특정한 경우에 집중하는 경향이다.
行李蕭條絶可呵  行裝이 쓸쓸하니 껄걸웃을 노릇이네,
餘錢數葉亦云多  남은 엽전 몇 닢은 또한 많다고 말하네.
囊中戒汝深深在  주머니 속에 깊이 깊이 있으라고 너에게 警戒했건만,
野店斜陽見酒何  夕陽에 주막에서 술을 보니 어이하리?

千里行裝付一柯  천리 길을 한 개 지팡이에 의지하니,
餘錢七葉尙云多  남은 엽전 일곱 닢은 오히려 많다 하겠노라.
囊中戒爾深深在  주머니 속 깊이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野店斜陽見酒何  석양에 주막에서 술을 보니 어찌하리.

 

㉢은 {夢遊野談} 所載 漢詩이고,
㉣의 시는 '難〔sic 艱〕飮野店'의 7절 전문으로 정대구의 번역을 따랐다. ㉢의 漢詩 중에 3행 '汝'의 글자가 {南溪野談}에는 '爾'의 글자로 되어 있으며, "이 시는 賣文하여 천냥을 받아 죄다 흩어버린 후 托意해서 지었다.(右詩賣文千兩盡散後托意作)" 라는 대목이 {몽유야담} 기문에는 보이지 않는다.

 

임형택은 상기한 대목을 두고 평하기를, "과연 金笠이 科文을 팔아 그토록 큰 돈을 얻고 죄책감에서 돈을 희롱하고 자기를 희롱할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그의 주머니에 담긴 약소한 돈은 글의 댓가로 받은 것이라. 몇 푼이 그의 전 재산이다. 저녁나절 주막에서 술을 보면 달아나기 쉬우니 고이고이 있으라고 돈에게 다짐하는 것은 익살이다. 이처럼 쓸쓸한 행장은 남의 경멸을 살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한히 허탈감을 준다. 이에 弄世의 태도를 취하게 되며, 익살에 自嘲 어린 諧笑를 유발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의 한시는 기본적으로 떠도는 나그네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본 시의 '行裝·葉錢· 酒'의 명사는 이 작품의 주된 매개체가 된다. 행장은 여행할 때 쓰이는 行具이며, 葉錢은 사람의 생활에서 '문화적인 징표'일 수 있으며, 술은 수천리를 유랑하는 신세로 전락한 김병연의 여정을 푸는 운치있는 題材임에는 틀림없다. 정처없이 방랑하는 김병연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삿갓과 남루한 옷과 쓸쓸한 행장이 전부인 그로서 돈이 餘裕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는 流浪의 길목에서 접한 사람들에게 글을 지어준 댓가로 받았을 몇 푼의 돈이 술로 빠져나가기 쉬우니,

 

"주머니 속 고이고이 있으라고 '너(爾·汝)'에게 경계했다"는 구절에서 당시 그의 삶이 얼마나 참담했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너(爾·汝)'는 葉錢을 擬人化한 것으로, 高麗朝 엽전을 의인화하여 당세의 여러 가지 국정상의 병폐와 인간성의 여러 국면을 의인화한 林 椿의 {孔方傳}(假傳)을 연상하게 한다. 저녁노을 붉게 물든 술내 나는 주막을 지나는 愛酒家인 김병연으로서 몇 푼의 '엽전'과 '술'은 보통 사람의 경우와는 달랐을 법한데, 몇 푼의 돈을 諧謔的으로 생동감 있게 形象化한 것은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 재확인되며, 오랫동안 방랑에서 뼈아프게 느껴 왔을 그가 酒幕에서 얼큰하게 취하여 哀愁와 시름을 잊고 싶은 심정에서 지은 傑作이다.

 

4. 結論
조선 후기(19세기) 洪景來亂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이후 전국 각지를 流浪하다 일생을 마감한 삿갓 金炳淵(1807∼1863)은 放浪 詩人답게 文獻記錄보다는 口傳에 의한 기록이 많은 것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본고는 김병연과 同時代人으로서 비교적 信實한 그의 記文을 싣고 있는 李遇駿(1801∼1867)의 {夢遊野談}을 중심으로 김병연의 삶과 문학을 究明하였다.

 

이우준이 서술한 片鱗으로서 김병연의 삶과 문학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우준은 當代人들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김병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동시대인으로서 그의 외면적인 모습보다는 그의 流落한 생활의 참담한 내면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데에 있다. 삿갓이나 패랭이를 쓰고 남루한 옷차림새로 姓名은 속이지 않고 行雲流水처럼 各地를 다니며 술이 취할지라도 거침없이 쏟아내는 詩는 만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에 탄복한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지 않고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이우준의 기문을 통해서 그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기문에 실려 있는 '嘲山村訓長(山村 訓長을 嘲弄하다)'과 '艱飮野店(酒幕에서 힘겹게 술을 마시다)'의 두편의 詩는 비록 서술자가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김병연의 詩作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자의 詩는 鄕村 훈장의 僞善을 여실히 諷刺한 시이고, 후자의 詩는 貧窮을 시적 대상으로 했으며, 몇 푼의 葉錢을 諧謔的으로 생동감있게 形象化한 詩이다. 葉錢을 擬人化한 점에서 후자의 시는 高麗時代 林 椿의 저작인 {孔方傳}과 一脈相通한다.
일찍이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傲慢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현실과 타협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放浪의 길을 걸었던 김병연의 뼈아픈 생활의 참담한 내면을 이우준의 기문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김병연 외에도 그 당시 時俗에 얽매이지 않고 寒士로 一生을 마감한 몇몇 文士들의 불행했던 時代의 悲運을 이우준은 지나치지 않고 그의 깊은 내면에 文學이라는 樣式을 통하여 조심스레 드러낸 것이 {몽유야담} 所載 記文에서 再確認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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