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따라잡기 조선에도 있었네
왕희지 난정집서
난정집 서문(蘭亭集序) 왕희지(王羲之)
영화 9년 계축 3월 초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를 열었다(會于會稽山陰之蘭亭,修稧事也)
많은 선비와 늙은이 젊은이가 모두 모였다(群賢畢至,少長咸集)
이곳은 높은 산과 험한 고개와 무성한 숲과 곧은 대나무가 있고(此地有崇山峻嶺,茂林修竹)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又有淸流激湍,映帶左右)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차례대로 자리에 앉으니(引以爲流觴曲水,列坐其次)
비록 사죽의 관현악 같은 성대함은 없으나(雖無絲竹管絃之盛)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그윽한 정을 펴기에는 충분하다(一觴一詠,亦足以暢敘幽情)
▲ 유숙 ‘수계도권’ 1853년, 종이에 연한 색, 30×800㎝, 개인 소장 |
왕희지의 이 글은 시(詩)가 아니라 시를 엮은 ‘난정집(蘭亭集)’의 서문 일부다. ‘난정집’은 중국 동진(東晋·265~316)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307~365)가 353년 3월 3일 난정에 문인 42명을 초대하여 수계(修稧)를 열면서 지은 시를 엮은 문집이다. ‘수계’는 음력 삼월 삼짇날에 맑은 계곡물에서 몸을 씻어냄으로써 겨우내 쌓인 묵은 때와 부정한 기운을 떨쳐버리는 세시풍속이다. 왕희지는 이런 의미 있는 날에 풍광이 빼어난 멋진 장소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그리워할 역사를 만들었다. 최초의 문인 시회였다. ‘난정집’에는 수계에 참석한 문인 21명이 쓴 37편의 시가 담겨 있는데, 본문에 있는 시보다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의 서문이 더 인기가 많아 후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화제(畵題)로 삼아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를 그려 그날을 기념하였다.
42명의 선비가 난정에 모인 뜻은
왕희지의 글은 계속된다. 그의 글 속에는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며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고아(高雅)한 문사(文士)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길지만 워낙 문장이 유명하니 나머지 글도 살펴보기로 하자.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으며, 봄바람은 더없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머리를 들어 우주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흥성함을 보며, 경치를 둘러보며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에 충분하여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다. 무릇 사람이 서로 어울려서 한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이는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벗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대자연에 맡기어 노닐기도 한다. 비록 나아감과 물러남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으나,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得意)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급기야 그 즐거움도 권태롭고, 감정이란 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회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짧은 순간에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짧든 길든 자연의 조화에 따라 결국에는 죽음에 이름에서야!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중대한 일이로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옛사람이 감흥을 일으켰던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일치하여, 옛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 없도다. 죽고 사는 것이 같다는 말이 참으로 허황되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도 망령된 것이라 하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보는 것도 지금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을 순서대로 열거하여 그들이 지은 바를 적는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가 변해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하나이니, 후인들이 이 글을 보면 또한 감회가 있으리라.”
왕희지, 조선에 오다
중국 난정에서 수계가 있은 지 1500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문인들의 뇌리에는,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는 물길 위로 연잎에 술잔을 얹어 띄우는 ‘유상곡수(流觴曲水)’와 물길을 따라 사람들이 주욱 앉아 있는 ‘열좌(列坐)’의 장면이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후인들은 왕희지가 기획하고 진행한 품격 높은 난정에서의 이벤트에 열광했다. 흠모의 시가 줄을 이었고, 풍류가 넘치는 아회(雅會)를 기념하는 그림이 수북이 쌓였다. ‘왕희지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왕사모’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결성되었다.
왕희지에 대한 열광은 단지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급기야는 ‘왕희지 따라잡기’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의 화가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이 그린 ‘수계도권’은 30명의 중인(中人)들이 1853년 3월 3일 서울 남산 기슭에서 ‘왕희지가 놀았던 놀이를 좇아서’ 계를 닦고 시 한 수씩을 지은 장면을 증명한 인증샷이다. 장소와 등장 인물은 다르지만 모임의 취지와 뜻을 고스란히 계승한 난정수계의 조선 버전이다. 그 버전은 형식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장소가 조선이라는 실정에 맞게 갓 쓰고 한복 입은 조선 사람으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왕희지가 중국 산음의 난정에서 출발하여 1500년의 시간 동안 걷고 걸어 조선의 남산에 도착해보니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1831~1915)이 자신의 역할을 맡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참석자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모임을 주도한 김석준은 23세였고 그림을 그린 유숙은 27세였다. 최연소자인 안재흥(安在興)은 20세였고 최고령자인 변종운(卞鍾運)은 63세였다. 마치 우리 시대의 동호회 모임 같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시회 장소로 들어가는 사람과,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는 사람, 그리고 왼쪽 끝에서 곡수(曲水)를 바라보며 시상(詩想)에 잠긴 사람이다. 특히 중앙에는 총 참석자 30명 중 22명의 인물을 배치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유숙은 초상화를 잘 그린 화가답게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각 인물의 특징이 최대한 잘 드러날 수 있게 정교하게 그렸다. 담청(淡靑)과 담홍(淡紅)이 두드러지는 그림 속 인물들은 담박하고 아취 있는 문인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분상으로는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지만 그들이 누리는 문화만큼은 사대부에 뒤지고 싶지 않은 여항(閭巷) 문사들의 지향성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길이가 8m에 이르는 ‘수계도권’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을 관념적으로 구성하여 그린 데서 벗어나 화가가 직접 참여한 실제 장면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사대부라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기던 시회를 중인 계층이 적극 즐기고 향유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삶의 모델을 부러워하는 차원을 넘어 직접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임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호우시절, 사랑한다면 봄비처럼
두보 춘야희우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春夜喜雨) 두보(杜甫)
반가운 비가 시절을 알아(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내리네(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隨風潛入夜)
만물을 적셔주며 아무런 소리도 없네(潤物細無聲)
들판의 오솔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野徑雲俱黑)
강 위에 뜬 배는 등불만 비추네(江船火燭明)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曉看紅濕處)
금관성이 꽃으로 겹겹이 덮여 있네(花重錦官城)
▲ 심사정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1735년. 비단에 먹. 153.2×61㎝. 국립중앙박물관 |
봄 가뭄이 극심하다. 푸석거리는 대지 위로 흙먼지만이 풀풀 날린다. 싱싱하게 세상을 향해 내달리던 여린 새싹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성장을 멈추었다. 올봄도 헐벗음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배가 고픈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나서보지만 거기도 가물기는 마찬가지여서 주린 배를 채우기는 여의치 않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보니 반가운 비가 내렸다. 행여 고단한 잠을 깨울까 봐 봄비는 바람 따라 몰래 들어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고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는 더 오려는 듯 새벽 들판의 오솔길은 아직도 어둑어둑하다. 흐린 구름 사이로 강 위에 뜬 배의 등불만이 반짝거린다. 새벽이 걷히면서 보니 밤새 내린 비로 촉촉해진 붉은 꽃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다. 뭐라 언질을 해준 것도 아닌데 시절을 알고 내려준 봄비가 더없이 고맙고 기쁘다. 금관성은 쓰촨(四川)성의 수도인 청두(成都)의 별칭이다.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712~770)가 가뭄 끝에 내린 반가운 비를 보고 그 감흥을 노래했다. 이 시가 특히 가슴에 와닿은 이유는 두보의 시이기 때문이다. 두보는 생애의 대부분을 객지를 떠돌며 살았는데 평생 배고픔 속에서 병마와 씨름하며 시를 지었다. 가장이 집을 비운 사이 사랑하는 아들은 굶어 죽었다. 중국 문학사에는 시로 이름난 사람이 별처럼 많지만 두보의 시가 특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공감을 얻는 것은, 그의 시 속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힘 없는 민초들의 직접적인 아픔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春夜喜雨(춘야희우)’ 또한 봄밤에 내리는 비를 보고 제3자적 입장에서 얄팍한 감상을 읊은 시가 아니다. 비가 대지를 적시자 이제 우리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옆에 있는 사람을 와락 껴안고 싶은 반가움이 담겨 있는 시다. 허기를 채워주는 시다.
강가에 배가 있는 풍경인 줄 알았더니
‘춘야희우’에는 봄, 밤, 비, 들판, 오솔길, 구름, 강, 배, 등불, 꽃 등의 시어(詩語)가 담겨 있다. 이 시어로 빚어낸 봄날 새벽의 풍경을 화가는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해냈을까.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는 두보의 ‘춘야희우’ 중 ‘들판의 오솔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는 등불만 비추네’라는 시구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은 전경·중경·후경이 지그재그로 구성되어 변화와 깊이가 느껴진다. 전경의 언덕에는 종류가 다른 나무들을 여러 그루 배치했고, 중경에는 버드나무 아래 사공이 탄 배를, 후경의 원산(遠山)에는 미점(米點)을 찍어 습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는 원말(元末) 사대가(四大家)에서 명대(明代)의 오파(吳派)로 이어지는 남종화풍(南宗畵風)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담백한 필치의 구성과,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화면은 심사정이 조선 후기에 남종화의 대가로 인정받는 이유를 말해준다.
그림은 ‘반가운 비’를 그렸음에도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다. 어둠 때문에 아직 은밀한 밤비의 방문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공은 새벽부터 손님을 기다리느라 배에서 졸고 있다. 억지로 졸음을 참으며 꾸벅거리는 사공의 어깨 위로 무거운 구름이 내려 앉았다. 그 풍경이 고즈넉하다 못해 적막하다. 사공 뒤에서는 새벽안개가 산과 마을의 이음새를 덮은 채 구름 속으로 잦아든다. 늙은 바람을 따라 밤에 몰래 들어온 봄비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잠시 후 어둠이 걷히고 나면 붉게 젖어 있는 꽃으로 드러나리라. 드러나면 알게 되리. 간밤에 내린 비가 꽃과 나무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를.
그림의 주제가 된 시구는 화면 맨 위에 적혀 있다. 시구를 무시하고 그림만 보게 되면 ‘밤에 강가에 배를 대다’라는 뜻의 ‘江上夜泊(강상야박)’이라는 그림 제목이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그림 속에 시구를 적어 놓은 이상, 그림 제목을 ‘강상야박’이 아닌 ‘춘야희우’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운치가 있을 것 같다. ‘춘야희우’라는 제목을 붙였을 경우, 그것이 두보의 시인 줄 아는 사람은 시 전체가 주는 울림을 떠올리며 그림을 볼 것이다. 두보의 시인 줄 모르는 사람은 강가에 배가 있는 풍경인데 왜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의아해서 시를 찾아보게 될 것이다. 이래저래 시와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제목이 좋지 않겠는가.
누구의 가슴에 봄비처럼 스며들까
허진호 감독이 만든 한·중 합작 영화 중에 ‘호우시절(好雨時節)’이 있다. 정우성과 가오위안위안(高圓圓)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두보초당(杜甫草堂)이 있는 쓰촨성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애잔한 사랑을 그렸다. ‘때를 알고 내리는 비처럼, 다시 그 사람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옛사랑을 희미한 기억 속에 덮어두고 사는 연인들에게 그렇게 묻는 영화다. 영화는 쓰촨 대지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주인공이 두보초당에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내용인데 배경만 두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화 제목 또한 두보의 ‘춘야희우’의 첫 구절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에서 따왔다.
여기서 ‘호우(好雨)’는 장대비를 뜻하는 ‘집중호우(集中豪雨)’와는 다르다.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셔주는 조용하고 수줍은 봄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가슴에 ‘호우(好雨)’처럼 살포시 젖어들어야 한다. ‘호우(豪雨)’처럼 작달비로 마구 퍼부으면 부담스럽다. 봄이 되니 반가운 비가 시절을 알아 내리는 것처럼 우리들의 사랑도 봄비처럼 팍팍한 가슴을 적셔 주었으면 좋겠다. 심사정의 ‘강상야박도’ 또한 호우(好雨)처럼 슬그머니 우리의 가슴속에 스며드는 작품이다. 두보의 시가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심사정의 그림으로 환생했다면, 천삼백 년이 흐른 뒤에는 남녀간의 사랑을 얘기하는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다음에는 어떤 사람의 가슴에 비를 뿌려 꽃을 피울까. 누구의 가슴속에 봄비처럼 스며들어 피리를 불고 춤을 추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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