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걸다_08

醉月 2012. 10. 24. 07:46

명품 가방? 고급 승용차? 낚싯대 하나면 충분해!

대복고 조대

 

낚시터(釣臺)
세상일에 무심한데 오직 하나 낚싯대라(萬事無心一釣竿)
삼공 벼슬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三公不換此江山)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까닭에(平生誤識劉文叔)
헛된 명성만 세상 가득 드러냈네(惹起虛名滿世間)

▲ 김홍도 ‘삼공불환도’ 1801년. 비단에 색. 133.7×418.4. 리움

‘명품 가방, 고급 승용차, 정원 딸린 집, 회원제 피트니스클럽, 목 좋은 빌딩, 퍼스트클래스, 럭셔리 크루즈여행’. 친구들에게 ‘부자’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물어봤더니 나온 대답이었다. 우리 시대의 부자 개념을 압축한 단어들이다. 이것들은 대복고(戴復古·1167~?)의 시에 등장한 ‘삼공(三公)’에 해당한다. 삼공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세 정승을 의미하는데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상징한다. 그런데 시인은 낚싯대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단다. 큰 집도 필요 없고 낚싯대 드리울 수 있는 강산만 있으면 된단다. 원래부터 욕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삼공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한심한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강렬한 유혹을 간단없이 물리쳐버린 그가 궁금해진다.

이 시는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기원전 37년~서기 43년)을 위한 헌사다. 엄광의 입장이 되어 쓴 시다. 엄광은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년~서기 57년)와 친구였다. 자(字)가 문숙(文叔)인 광무제는 황제가 되자 어린 시절의 친구 엄광을 불렀다. 믿을 만한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함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됐으니 얼굴만 들이밀어도 한자리를 얻을 판에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광무제 유문숙이 사람을 보내 수소문을 해보니 엄광은 양가죽 옷을 걸치고 냇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촌부로 살다 죽었다.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 간 엄광의 모습은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엄광이 낚시질하던 곳이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였기 때문이다. 남송(南宋)의 시인 대복고가 ‘낚시터(釣臺)’를 쓴 이유도 그의 절개를 찬탄하기 위함이다. 낚시꾼을 그린 그림의 주인공이 강태공 말고 엄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결론이 나왔다. 엄광이 무균(無菌)스러운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삼공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거부하는 청맹과니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삼정승 벼슬보다 더 욕심나는 삶

화성(畵聖)이라 불리는 김홍도(金弘道·1745~?)가 대복고의 시 ‘낚시터’의 한 구절을 제목 삼아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를 그렸다. ‘삼공의 벼슬을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三公不換此江山)’에서 앞 글자만 취했다. 8폭 병풍 대작인 이 작품은 오른쪽 1폭이 일부 불에 타서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고, 각 폭이 연결되는 부분이 조금씩 잘려나가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옛이야기에서 화제(畵題)를 가져온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와 풍속화가 결합된 김홍도의 말년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은 웅장한 산과 바위를 등지고 대각선으로 배치된 기와집 안의 풍경이 1폭에서 4폭까지 전개돼 있고, 5폭부터 8폭까지는 집 밖의 풍경이다.(병풍 그림이나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된다.) 집 안 풍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조감도법(鳥瞰圖法)을 활용해 안채와 바깥채의 일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그렸다. 닭과 개가 한가롭게 놀고 있는 안채는 여성의 공간임을 알 수 있도록 아낙네가 집 안에서 일하고 있다. 남성의 공간인 바깥채에서는 책을 읽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자식을 가르치고 벗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돼 있다. 그 외 집안 곳곳에 학, 말, 사슴 등을 그려 넣었으며 시중 드는 아낙과 말먹이를 주는 하인 등의 모습도 잊지 않았다. 풍속화로 이름난 김홍도의 장기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한 선비가 누각에 앉아 새를 감상하는 건물 바깥으로는 기름진 밭과 돛단배가 떠 있는 강이 보인다. 특별한 사건이 눈에 띄지 않아 자칫 민틋해지기 쉬운 풍경인데 김홍도 특유의 구성력이 그림을 살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림 제목은 ‘삼공불환도’인데 엄광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낚시터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7폭 상단에 보이는 돛대 달린 강가 풍경이 엄광이 낚시한 엄뢰(嚴瀨)는 아닐 텐데 그는 어디로 숨은 걸까?

어찌 제왕의 문에 드는 것을 부러워하리

단정한 필치로 그린 이 작품의 제발(題跋)을 쓴 홍의영(洪儀泳·1750~1815)에 의하면, ‘신유년(辛酉年) 겨울 12월에 임금의 병환인 수두가 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장씨(仲長氏)가 지은 낙지론(樂志論)을 화제로 썼는데 그 말이 그림에 부합되는 것을 골랐다’고 밝혔다. 중장씨는 후한(後漢) 때의 문인 중장통(仲張統·179~219)인데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전원에서 자신의 뜻을 즐기며 살았다. 그 뜻이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 ‘낙지론(樂志論·뜻대로 삶을 즐김)’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거처하는 곳에 좋은 논밭과 넓은 집이 있고, 산을 등지고 냇물이 곁에 흐르며 도랑과 못이 둘러 있으며, 대나무와 수목이 죽 펼쳐져 있고, 앞에는 타작마당과 채소밭이 있고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 배와 수레가 걷거나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대신하고, 심부름하는 이가 육체를 부리는 일에서 쉬게 해준다. 갖가지 진미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내나 자식들은 몸을 괴롭히는 수고 없이 편안하다. 좋은 벗들이 모여 머무르면 술과 안주를 차려서 즐기며, 기쁠 때나 좋은 날에는 새끼 양과 돼지로 제사를 지낸다. 밭이랑과 동산을 거닐고 숲에서 노닐며,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시원한 바람을 좇으며, 헤엄치는 잉어를 낚고, 높이 나는 기러기를 주살로 잡는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좋은 집으로 돌아온다. 깊숙한 방에서 정신을 편안히 하고 노자의 현묘하고 허무한 도를 생각하며, 정화된 정기를 호흡하여 지인(至人·도인)과 같아지고자 한다. 통달한 사람 몇 명과 도를 논하고 경서를 강론하며, 하늘과 땅을 올려보고 내려보며 고금의 인물들을 종합해 평한다. ‘남풍(南風)’의 전아한 가락을 연주하고 ‘청상(淸商)’의 미묘한 곡도 연주한다. 온 세상을 초월하여 유유히 노닐며 놀고, 하늘과 땅 사이를 곁눈질하며 시대의 책임을 맡지 않고 기약된 목숨을 길이 보존한다. 이와 같이 하면 하늘을 넘어 우주 밖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리?’

이제야 그림이 이해된다. 김홍도는 대복고의 시 ‘낚시터’를 제목으로 삼고, 중장통이 지은 ‘낙지론’을 내용으로 해 그림을 완성했다. 지은이는 다르지만 대복고나 중장통이 지향한 세계는 한마디로 ‘전원에서의 행복한 삶’이었다. 그 삶은 제왕의 문에 들어가는 것도 부럽지 않은 열락의 삶이었다. 남과 차별되는 ‘퍼스트클래스’로서의 몇 가지 혜택을 누린다 하여 폴짝폴짝 뛰는 범인들의 좁은 속내로는 가늠조차 어려운 유장한 세계다

 

시 속의 시, 그림 속의 그림

나대경 산에 사네

 

산에 사네(山居)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내 집은 깊은 산속에 있어 매년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余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푸른 이끼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이 길바닥에 가득하네(蒼蘚盈堦 落花滿徑)
문에는 두드리는 사람 없고 솔 그림자 들쑥날쑥한데(門無剝啄 松影參差)
새 소리 위아래로 오르내릴 제 낮잠이 막 깊이 드네(禽聲上下 午睡初足)
돌아가 산골 샘물 긷고 솔가지 주워와 쓴 차를 끓여 마시네(旋汲山泉 拾松枝 煮苦茗啜之)

 

▲ 김희성 ‘산정일장’. 종이에 연한 색. 29.5×37.2cm. 간송미술관

오랫동안 귀농을 꿈꾸던 친구가 드디어 사표를 던졌다. 퇴직금으로 강원도에 작은 집을 장만한 그는 인생 말년을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했다. 산새들이 극성스럽게 고성을 질러도 짜증스럽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친구의 얼굴은 긴 세월 우려낸 결심을 실천한 사람의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 귀농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하면서 한없이 부러워하는 나를 뒤로 하고 그 친구는 강원도로 떠났다.

이제 그는 건조하게 울려대는 알람 대신 부드러운 침묵 속에서 잠을 깰 테고, 창가에 심어둔 대나무들이 뻣뻣해진 근육을 풀 때쯤 잠자리에 들 것이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며 달력을 넘기는 대신 푸른 이끼가 섬돌에 차오르는 모습을 보며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구름의 냄새를 맡고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사노라면 그에게 운명은 더 이상 납처럼 무겁지 않고, 거만하게 혼을 짓누르던 걱정 따위는 맥을 못 추고 물러날 것이다. 먼 산골이라 찾아오는 벗이 없어 적적할 때도 있겠지만 일하다 지치면 낮잠을 자고, 해질녘이면 마루에 앉아 노을을 고봉으로 담은 차를 마시며 시집을 펼칠 것이다. 갈 봄 여름 없이 저만치 홀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사노라면 앞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아침 해는 소년의 앞날처럼 길기만 할 것이다. 산에 사는(山居) 사람의 고즈넉함이 그의 삶을 온기스럽게 데워줄 것이다. 그는 사람답게 살 것이다.

나는 이런 집에 살 거야

친구는 늠름한 산을 배경으로 아담한 살림집을 지었다. 몇 년 전부터 강원도 산골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더니 특별히 언덕 위에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터전을 골라 이삿짐을 풀었다. 넘치는 책을 주체할 수 없었던 친구는 초옥(草屋)을 두 채 지어 살림집과 서재를 분리했다. 전나무와 생강나무와 두릅나무 사이로 조심스레 기둥을 세우면서 도연명이 부럽지 않도록 복숭아나무를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문은 위압스러운 철문 대신 싸리문을 세워 바깥과 안의 경계로 삼았다. 할 일 없는 날에 낮잠을 즐길 때면 천상의 학이 내려와 춤을 출 수 있도록 마당은 넓게 비워 두었다. 바람 부는 봄밤이면 복숭아꽃 아래 짜 넣은 편상에서 곡주를 마시며 인생을 음미할 것이다. 그때 싸리문 밖 버드나무는 귀거래한 주인을 위해 무희처럼 춤을 추리니 한 나라의 제왕인들 이보다 더 즐거운 말년을 보낼 수 있으랴. 삶이 곧 꿈이고 꿈이 곧 현실이라 꿈과 현실이 사이좋게 화해한 삶 속에서 집주인은 운명과 격한 전투를 벌이지 않고서도 구절양장 우수 어린 생애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

꿈을 꾸듯 강원도로 떠난 친구가 살아갈 산촌 생활 모습을 김희성(金喜誠·1710년대~1763년 이후)이 그렸다. 제시(題詩)로는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나대경(羅大經·1196~1252)의 시구절을 적었다.(문장이 길어서 뒷부분은 생략했다.) 위의 시구절은 흔히 앞 두 글자씩만 취해 ‘산정일장(山靜日長)’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화가의 사랑을 받았는데, 출처는 중국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나대경의 산문집 ‘학림옥로(鶴林玉露)’ 중 산속 생활의 즐거움을 읊은 ‘산거(山居)’ 편에 나온 문장이다. ‘학림옥로’는 나대경의 호 학림(鶴林)을 따서 지은 책으로 모두 18권이며 주희(朱熹), 구양수(歐陽修), 소식(蘇軾) 등의 문인과 학자의 어록, 시문에 관한 논평이 적혀 있다.

‘산정일장’을 그린 김희성은 화원(畵員) 화가로 호를 불염재(不染齋), 불염자(不染子)라 했는데 김희겸(金喜謙)이라는 이명(異名)을 썼다. 그의 아들 김후신(金厚臣)도 화원화가였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 까닭에 그의 그림 속에는 스승의 화풍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산정일장’도 마찬가지다. ‘산정일장’은 ‘학림옥로’의 내용을 모두 여섯 폭으로 그린 작품 중 한 폭으로, 성리학적 이상을 실천하며 사는 은자(隱者)의 삶을 담은 시리즈라 할 수 있다. ‘학림옥로’를 제재로 그린 작가로는 김희성 외에도 심사정(沈師正·1707~1769), 정수영(鄭遂榮·1743~1831), 이인문(李寅文·1745 ~1821), 김홍도(金弘道·1745~?), 오순(吳珣·?), 이재관(李在寬·1783~1838), 허련(許鍊·1809~1892)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때로 ‘학림옥로’의 내용을 여러 폭의 병풍으로 그릴 때도 있었고 한 폭에 전체 내용을 압축해서 그릴 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모든 그림 속에는 나대경의 글을 빙자한 화가의 꿈이 담겼다.

그의 시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대경이 쓴 ‘산거’의 첫 문장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문장은 원래 나대경의 글이 아니었다. 당경(唐庚·1071~1121)이 쓴 ‘술에 취해 자다(醉眠)’라는 시의 첫 번째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전래된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 중 아산 선문대박물관에 소장된 임모본 ‘학림옥로도’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옆에는 ‘나대경이 말하기를 당경의 시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羅鶴林曰唐子西詩云山靜似太古日長如少年…)’라고 적혀 있어(‘子西’는 당경의 字) 나대경이 당경의 시를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학계에서는 이 글이 당경의 시인지 나대경의 산문인지 규명되지 않아 설전을 펼친 적도 있었다. 나대경이 선택한 당경의 시가 나대경의 시로 오인받을 만큼 다른 시구절과 조화를 잘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김홍도의 ‘삼공불환도’에 두 개의 서로 다른 글이 한 화면에 담겨 있다면, 김희성의 ‘산정일장도’에는 ‘시 속의 시’가 담겨 있다. 학문 간의 벽을 허물자는 통섭과 융합이 화두가 된 요즘, 그런 운동을 이미 300여년 전에 실천한 조선시대 선배들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