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15

醉月 2012. 10. 30. 07:25

사라진 문명을 만나러 가는 길

충남 부여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부소산에서 바라본 백마강.

부여에 오면 저절로 부소산부터 오르게 된다. 풍경이 먼저고 역사가 뒷전이라서가 아니다. 부소산은 역사가 아닌가. ‘따로 국밥’처럼 풍경을 따로 두는 역사는 없다.

아무튼 산을 오른다. 해발 106m. 큰 언덕에 지나지 않은 높이지만 부소산을 언덕에 비유하면 실례다. 키는 작지만 산다운 면모는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길도 철따라 풍경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달라진다. 봄과 가을, 사람 북적이는 때면 산이 제 작은 몸집 때문에 몸살을 앓는 탓에 산을 찾은 이가 되레 안쓰럽다. 차라리 빗방울 떨어지고 눈송이 쏟아지는 때를 골라 이 산을 올라보자. 그 어여쁨에 자못 가슴이 저민다.

낙화암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이편저편의 풍경처럼 삽상하고 근사한 데가 얼마나 있을까. 강줄기와 건너편의 백사장, 남녘 들판, 낙화암 바위 벼랑까지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모양새를 달리하는데, 내가 보기엔 늦가을 해질 무렵이 가장 나은 듯싶다. 아연 강폭이 넓어지면서 물빛이 달라지고 들판은 더욱 아득하니 넓어진다. 디디고 선 벼랑마저 더욱 가팔라져 주위가 온통 처연한 아름다움에 휩싸이는 광경을 나는 이맘때 보았다.

 

부소산에 올라

이 경치를 보며 더러 나는 어린애처럼 부여와 경주를 비교하기도 했다. 경주에는 산은 있지만 강이 없다. 경주를 가리켜 빼어난 풍치를 가진 도읍지라고 하기 어렵다. 한데 부여는 그림처럼 산수(山水)를 다 갖췄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것도 혹여 이런 경치 때문은 아닐까? 방어의 요지라 여겨 산수를 가졌는데 뒷날에는 오히려 그 산수에 빠져 방어를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곁들여보는 것이다.

날마다 부소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던 백제의 임금과 벼슬아치들에게 신라와 고구려는 얼마나 멀고 아득했을까. 어쩌면 그들과 국경을 같이한다는 현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같은 강으로 나당(羅唐)의 군선이 밀려들었다는 얘기조차 꿈같은 소리로 들린다. 부소산과 백마강은 그렇듯 짝을 이뤄 어여쁘다.

 

나도 산마루 군창지 근처에서 탄화된 곡식알을 손바닥에 얹어본 일이 있다. 과거 역사의 증거물인데, 이상하게 참혹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함, 경이. 그런 느낌이었던 듯싶다. 시간의 간극에서 오는 비현실감 때문이라기보다 주변 자연에서 비롯된 현실 왜곡이 아니었을까. 학자들도 부소산성의 구실에 대해 유사시엔 군사방어시설이지만 평상시엔 왕과 귀족들이 유흥과 소풍을 즐기는 비원(秘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낙화암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는 뜻으로 타사암(墮死巖)이라고 적고 있다. 나라를 망친 임금은 중국에 끌려가서도 체신 때문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여생을 보냈는데, 불타는 궁궐에서 내쫓긴 궁녀들만 애꿎게 천 길 벼랑에 몸을 던졌다. 망국의 역사에는 이런 비장, 참혹미를 갖춘 전설이 곁들여지는 법이다. 그리고 자연은 자연대로 그 전설을 먹고 자라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과 더 긴밀하게 감정을 교류한다.

 

벼랑길로 해서 고란사로 내려간다. 강가 바위벽 아래 차려진 절집은 찾아오는 이만 드물다면 그 자체로 유현한 도량인데 이제는 하도 사람들의 내왕이 잦아 그런 맛이 사라지고 없다.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왕들이 노닐던 휴식공간이라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는 설이 있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낙화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고려 때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백마강이 낳은 시인, 신동엽

시내에 나온 김에 잠깐 시인 신동엽을 만나보기로 한다.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는 부근, 부여읍 동남리에 그의 생가가 있다. ‘껍데기는 가라’‘금강’ 등의 시로 이름 높은 그는 1930년 이 집에서 태어났다.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신동엽은 1959년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체제 순응적이라 해서 순수시의 경향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던 그는 토착정서에 역사의식을 담은 민족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은 그의 시 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마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신동엽 시 ‘금강’ 첫 부분

 

정림사의 정림사지 5층 석탑.

 

그의 시는 특히 정치적으로 각박하던 시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역사, 통일, 민중 같은 집단 가치가 독재, 외세, 매판자본에 대항하는 새 이데올로기로 부각되던 때 그는 ‘고뇌하고’ ‘저항하는’ 시대의 양심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중요하게 거명되는 데 대해서는 “문학의 내재적 가치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감당했던 세계관의 시대적 적실성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신동엽은 “정치적으로 옳지만 예술적으로 글렀고, 더러는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글렀다”(고종석)는 심한 말까지 듣기도 한다.

신동엽의 시비는 부여에서 백마강을 건너 보령으로 넘어가는 길목, 즉 백제대교 옆 소나무 숲에 서 있다. 시인의 작고 1주기 때 그의 유족과 친구들이 세운 것이다. 저 홀로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두고도 지배계급에게 억눌리는 민초들의 피땀이라고 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애인의 숨결이라고 읊는 시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안목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시를 읊고 소설을 읽겠는가.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 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 신동엽 시 ‘그 사람에게’ 전문

 

신동엽에게도 이런 적막한 시가 있음이 반갑고 고맙다.

백제가 지금의 공주 땅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것은 538년(성왕 16년)의 일이다. 그 뒤 여섯 명의 왕을 세우면서 부여는 120년간 명실상부한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번성기에는 13만여 호(戶)가 살았다 하니 당시의 부여가 지금의 부여보다 더 크고 번창했음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멸망한 나라는 후대에 남기는 것이 거의 없다. 텅 빈 정림사 절터에 서 있노라면 그 허망감, 고절감이 가슴을 친다.

 

텅 빈 정림사 절터

백제문화단지.

 

이제 3000여 평이나 되는 이 절터도 발굴조사를 마치고 정리가 되었고 근처에 번듯하게 박물관도 세워졌다. 풀풀 먼지가 피어나던 때와는 격세지감이 있지만 사라진 문명에 대한 공허감이 제대로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는 탓에 오랜 기간 이 절터는 그냥 절터로만 존재해왔다. 그러다가 일제 때 처음 조사가 실시됐고, 그때 출토된 기와 조각에 ‘정림사(定林寺)’란 글자가 또렷이 적혀 있은 덕에 사라진 절의 이름을 찾게 되었다.

 

지금은 금당(金堂) 자리에 최근에 복원한 건물만이 덩그렇게 서 있지만 본래의 절은 회랑이 전체를 빙 두르고 가운데 연못까지 두고 있던 운치 있는 절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도 이곳에 있다. 오늘날까지 부여 땅에 남아 있는 백제탑이라곤 오직 이것뿐이다. 한때 탑에 새겨진 소정방 관련 비문으로 인해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이를 기념해 세운 탑으로 오해했던 적도 있었다.

 

마멸 상태가 극히 심한 석불좌상도 예전엔 맨땅에 방치돼 있었는데 이제는 복원된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불신(佛身)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 등은 완전히 없어졌다. 평평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형식적으로 처리되어 있어 부처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편이다. 정림사 남쪽의 궁남지도 격을 갖추어 새 단장을 마친 덕에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그치질 않는다.

 

이 정도의 복원과 정리만으로는 백제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큰 것일까. 지지난해, 백마강 건너편에 백제문화단지가 문을 열었다. 예전 구릉지 사이로 논밭과 농가들이 아기자기 앉아 있던 규암면 합정리 일대가 거대한 관광단지로 바뀐 것이다. 사비성을 재현한다고 해서 우람한 전각들이 들어찼는가 하면, 백제의 풍속을 되살린다고 민속촌까지 꾸며놓았다. 지방정부가 17년의 시간과 7000억 원에 가까운 거금을 투자해 만든 회심의 역작이 바로 이 ‘잃어버린 왕국의 부활’이다. 처음 이곳에 와본 사람은 그 거대한 규모와 화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 창덕궁은 여기에 비하면 차라리 옹색하다.

 

백마강 나루터.

 

지난해 봄, 외국인 유학생들을 이끌고 이곳을 찾았던 나로서도 이 뜻하지 않은 장관에 한동안 당황스러웠다. 발굴과 보존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어 1500년 전의 역사 재현이 가능하다고 믿고 무모할 정도의 의지와 열정, 돈을 쏟아 부은 이들에 대한 놀라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자문해 본다. 고구려에 대한 향수가 짙다고 해서 경기도 용인 땅에 고구려 왕궁을 복원해도 되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복원이고 재현인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쯤에서는 궁궐을 만들어놓고도 ‘백제궁’이니 ‘재현 사비궁’이니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문화단지’라고 얼버무린 속사정도 알만하다. 근처에서 아직도 한창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대기업의 리조트 사업과 연관시켜보면 더욱 그렇다. 거대한 영화세트장을 둘러보고 나왔다는 느낌. 그것이 나만의 감상이 아니길 바랄 따름이다.

“백마강에서 뱃놀이를 해본 적이 있는가?”

 

부여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내가 더러 묻는 질문이다. 유적지는 왜 찾아가는가? 역사를 공부하러?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정말이지 만사가 그런 식이라면 나는 애당초 길을 나서지 않겠다. 감흥이 없는 여로는 고역의 행로와 다를 바 없다. 흥은 즐거움이다. 왜 굳이 그 즐거움을 마다하는가. 나는 숙제 때문인지, 아니면 공부에 보탬 된다고 여겨서 그런지 박물관에서 노트를 펴들고 전시물의 설명을 깨알같이 옮겨 적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고 느끼면 그만이지 고생스레 무엇을 왜 적고 있는가. 잊어먹을까봐? 잊어먹으면 어때서? 유물과 유적지는 나중에 천천히 봐도 괜찮다. 정 시간이 없으면 훗날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부여를 찾았다면 해 지고 놀빛이 하늘에 퍼질 때쯤 백제대교를 건너 나루터 규암으로 가볼 일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놀잇배 한 척은 빌리면 좋겠다. 뱃전에 쏘가리탕, 새우탕 등을 갖춘 술상이라도 얹으면 금상첨화다. 뱃놀이는 철저히 뱃놀이다워야 한다.

 

해 저물녘 뱃놀이를

 

규암에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고란사를 다녀오는 선유(船遊)야말로 흥이 흥을 부르는 좋은 놀이다. 성긴 빗방울이 떨어져도 좋고 교교히 달빛이 쏟아지면 더욱 좋다. 취중에 스스로 의자왕이 되면 어떻고 사비성을 불사른 소정방이 돼보면 어떠랴. 강에서 강 같은 시간을 보고 포말(泡沫) 같은 사람살이와 나를 바라보는 그것만으로도 부여에 온 즐거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