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코에 꿰인 삶 그 희망의 노래 망양정에서는 가없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일하는 학과의 학생들은 베트남에서 온 두세 명을 제외하곤 전원이 중국인 유학생이다.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굳이 바다 건너온 이들을 위해 학기마다 한 번씩 우리네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 과목을 개설해놓았다. 나는 경주, 안동을 가더라도 꼭 바다를 거치는 일정을 고집한다. 대륙에서 나고 자란 녀석들이기에 스무 해를 살면서도 바다를 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이국의 땅에서 생전 처음 망망대해를 대하며 갖는 감개는 실로 형언키 어려운 것이 된다.
안동을 찾아간 지난해 가을에 굳이 울진을 여정에 포함시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을 거친 뒤 불영계곡을 통과해 울진 망양해수욕장까지 가는 코스였다. 훤칠한 금강송 춘양목이 우거진 산간을 통과하는 내내 골짝 물이 잘생긴 바위들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멋진 풍경이 차창 밖에 펼쳐졌다. 그런데도 이를 보겠다고 눈동자를 빛내는 녀석은 없었다. 온종일 차를 달려도 산의 모양새를 볼 수 없는 대평원에 익숙한 녀석들이라,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달리는 이곳 찻간에서는 금세 멀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망양정의 望洋之歎
녹초가 된 학생들이 심신을 추스르도록 불영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다리를 건너고 숲길을 걸어 이윽고 마주한 절집 풍광은 여느 때 찾아도 정갈하고 소담스럽다. 주변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을 닮았다고 해서 ‘천축산 불영사’라고 이름 붙였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절간에서 쉬이 보기 어려운 연못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은 안팎으로 가지가지 수생식물들을 키우며 화폭인 양 둘레의 풍경까지 죄 담고 있다. 특히 물가의 배롱나무들이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때는 자못 몽환적인 분위기를 빚어내기도 한다.
불영계곡을 흐르는 광천의 물줄기는 울진의 민물고기연구센터 앞에서 왕피천 본류와 합해져 동해로 든다. 내륙의 하천이 긴 여정을 마치고 바다로 드는 곳에 모래톱이 만들어졌는데, 그곳이 망양해수욕장이다. 바다를 만난 외국의 젊은이들이 언제 지쳐 떨어졌던가 싶게 환호성을 지르며 다투어 모래밭을 내달린다. 그리고 마주한 망망대해.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 쉼 없이 밀려오는 물결 앞에서 그들은 한순간 넋을 앗기고 만다. 바다는, 그들에게 경이(驚異) 자체였다.
강이 어떻게 바다의 품을 파고들며, 뭍과 바다가 어떻게 만나 속살거리는지 볼라치면 그 모래톱 어귀의 허름한 마을 뒤편 길로 해서 야트막한 산꼭대기에 오르면 된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날렵한 정자 하나가 이곳에 서 있다. 망양정(望洋亭)이다. 날갯짓하듯 지붕을 펼치고 있는 모습은 가벼운 듯하면서도 당당하다.
정자에 오르면 왕피천 물줄기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와 만나는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가없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조선 숙종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을 하사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정자는 예전의 그 정자가 아니다.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하고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의 마지막을 망양정으로 장식하고 있지만 그 또한 지금의 망양정이 아니다. 본래의 망양정은 울진 기성면 망양리에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오래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있었다. 1858년(철종 9년) 새로 정자를 지을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2005년 기존 정자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 건립했다.
정자에는 정철의 관동별곡과 함께 숙종이 하사한 편액과 시, 정조의 어제시(御製詩), 이산해, 김시습의 시 등이 걸려 있다. 망양정을 단순히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고 새기기보다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는, 망양지탄(望洋之歎)에서 나온 말로 보는 것이 훨씬 그럴싸하다.
울진을 찾아가는 방법은 나처럼 봉화 쪽에서 불영계곡을 통해 가는 방법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강릉에서 동해, 삼척을 지나 7번 해안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이 경우 울진 땅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포구가 죽변항이다. 예부터 죽변은 어업기지로 이름이 난 포구였는데, 근래는 드라마며 예능 프로그램 촬영지로 유명해 찾는 이가 많다. 특히 죽변등대와 그 주변은 그 독특한 풍광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봉평 신라비가 전하는 이야기
죽변을 벗어나 남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최근에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새 명소 하나가 있다. 신라시대의 비석 하나가 발견돼 갑작스레 유명해진 봉평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되는 평창군의 봉평과 지명이 같아 괜히 친근감을 주기도 한다. 1988년 죽변면 봉평리에 살던 농부 한 사람이 밭갈이를 하다가 우연히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곧 봉평 신라비다.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이 비의 제작 연대는 524년(법흥왕 11년)께로 당시의 율령과 관제 등이 적혀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석비로 평가되었다. 이 비는 그해 국보로 지정됐다.
비문에는 이 비가 세워지기 전 이곳의 노비들이 험준한 산성에 함부로 불을 지르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조정에서는 대군을 일으켜 사태를 진압했고 이후 왕과 신료들이 모여 사후처리의 일환으로 얼룩소의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의식을 치르는 한편 현지의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60대 혹은 100대의 곤장을 치는 형을 내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새 국보의 발견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좋은 계기가 됐다. 군(郡)에서는 거금을 투입해 전시관을 짓고 공원을 꾸몄다.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비석 하나만으로는 흥행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여겨 광개토대왕비, 진흥왕 척경비 등 소문난 비석들을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 전시하는가 하면, 예전 고을 수령들의 송덕비들까지 잔디밭에 도열시켰다. 중국 시안(西安)의 비림(碑林) 같은 명소를 이곳에 꾸미겠다는 식의 의욕은 엿볼 수 있지만, 실물이 아닌 모형들이 빚어내는 그 어정쩡한 느낌은 끝내 떨칠 수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비문이 적고 있는 사건을 형상화해 당시 민중의 생활상이며 지배층의 제례 등을 볼 수 있게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월송정에서 신선 되는 꿈
월송정(越松亭)은 울진공항 아래편의 구산해수욕장에 있는 이름난 정자다. 평해중학교 뒤쪽 진입로를 통해 솔숲으로 들면 이 빼어난 정자를 만나게 된다. 그 옛날에도 이곳엔 송림이 우거졌던 모양, 신라의 화랑들이 울창한 솔숲에서 달을 즐기고 바다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초의 정자는 고려시대에 세워졌다.
관동 8경의 하나인 이 정자에 오르면 울창한 송림 사이로 뽀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쪽빛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과 모래와 바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자연의 진체를 보여주는 자리에 정자가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 눈부신 햇살이 있고 청량한 바람이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정철이 이곳의 아름다움과 분위기에 취해 신선이 되는 꿈을 꾼 것도 무리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누워 선잠에 설핏 들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르는 말이 그대를 내가 모르겠는가, 그대는 하늘에서 온 신선이시네’라는 관동별곡의 그 넉넉한 품도 이곳에서는 충분히 그럴 성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자는 성종 임금의 일화를 곁들이면서 한층 유명해졌다. 왕이 화공(畵工)에게 명한다. “조선 팔도의 정자 중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을 그려 오라.” 화공이 여러 정자의 그림을 바쳤는데 왕이 그림들을 살펴보곤 “월송정에 비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직접 가보지도 못하는 곳을 고작 그림으로 구경하는 왕의 처지가 딱하며, 제 땅의 경치에 1, 2등 등수를 매기는 심사도 각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월송정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철거됐다가 1980년 옛 모습으로 복원됐다.
월송정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끼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방파제가 길게 바다로 빠져나간 후포항에 이른다. 오징어, 대게, 꽁치 등 어족의 집산지로 이름난 후포의 원래 지명은 ‘후리포’. 육지에서 그물의 양끝을 끌어당겨 고기를 잡던 ‘후리그물질’이 성행한 포구라서 이런 지명을 얻었다. 바다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포구에 서면 이 바다와 이 땅이 키운 한 시인이 떠오른다. 후포가 낳은 시인 김명인(金明仁)이다. 그가 예전 후리포의 생동감 넘치는 어로 작업을 추억한다.
“어릴 적만 해도 원양에서 쫓겨온 멸치떼가 시커멓게 동네 앞바다를 물들이면, 마을의 선도(先導)가 동산에 올라 목청껏 고함을 지르거나 횃불을 흔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장정들이 그물을 실은 배를 부리나케 띄워 밀려온 고기떼를 가두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동네가 달려 나가 그물의 양끝을 끌어당겼다. 그물 폭이 좁혀질수록 찢어져라 요동치던 고기떼의 장관으로 내 어린 시절은 얼마나 생동했던가.”
그러나 그의 시가 그리는 후포는 훨씬 더 고단과 적막에 기울어져 있다. 그립고 아픈 추억의 땅이다.
경북 울진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바다는 조용하다, 헛소문처럼
장마비 양철지붕을 후둘기다 지나가면
낮잠도 무성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
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
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
채 씻기다만 버드나무 한 그루
이따금씩 원동기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
바람은 성채(城砦)만한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적막도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
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
누리엔 놀다가는 파도가 쌓아놓은
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
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
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너는,
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
흉어(凶漁)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
키 큰 장다리 제 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
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
스스로 받아 챙기던 욕망은 다 그런 것일까
멈칫멈칫 나아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자다깨다 자다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
헤매며 길을 잃는다
그래도, 눈을 들어 보리라, 저 산들과
산들이 끊어놓은 자리
다시 이어져 달려 나가는 눈물겨운 수평선을
- 김명인 시 ‘후포’ 전문
내 모래알의 시간
천형(天刑) 같은 가난에 의해 그물코에 꿰인 삶을 살면서도 눈물겨운 수평선에서 희망을 엿보던 후포의 시간들이 그의 시가 되고 그의 생존이 됨을 알 수 있다. “…무섭게 다가왔던 가난에는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방기(放棄)되었던 사람들의 마을. 한낱 생존의 싸움에서조차 무기력하게 마침내 체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소박한 이웃들의 터전이 나의 고향”이었다고 토로하는 시인은 “멀리 뻗어나가는 수평선은 이곳에 내가 갇혀 있음을 역설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어디론가 끝없는 동경으로” 자신을 이끌었다고 고백한다.
횟집들이 줄지어 서 있고 바다를 찾아온 관광의 차들이 포구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늘의 후포에는 시인이 거느렸던 그 과거의 시간들마저 지워지고 없다. “이 우주적인 바다의 어디에 내 모래알의 시간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오늘의 후포에서 시인이 탄식조로 자문하지만 이는 곧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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