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노산대에서 바라본 풍경.
훗날의 권력을 도모하기 위한 지금의 계책은 모두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시대나 힘은 현재에만 유효하며 사람의 욕심은 그 현재의 힘에 쏠리는 이치 때문에 그렇다.
중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1년 가까이 중국 난징(南京)에 머문 적이 있다. 그 시절 나는 난징의 교외에 있는 쯔진산 기슭을 자주 찾았다. 울창한 숲 속 이곳저곳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큰절 영곡사가 있는가 하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능침이었던 명효릉이며, 삼국시대 손권의 무덤, 근대의 쑨원 묘가 모두 이곳에 있다.
유해도 그 옛날에 옮겨졌고 전각들도 많이 사라졌지만 주원장의 묘역은 장대 화려한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점에서 보듯 이 명효릉은 중국 황제의 전통 묘제 연구에도 큰 보기가 된다. 자극적인 역사의 냄새를 풍기는 명효릉 숲길을 걸을 때면 나는 더러 세종과 수양대군, 단종을 떠올리기도 했다.
평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오른 주원장은 중국 역대 황제 중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이로 기록된다. 반대파에 대한 징치는 그보다 참혹할 수 없었다. 좌승상 호유용을 역모 죄로 엮어 처단하는 과정에서 1만3000여 명을 처형했고, 탁월한 장수였던 남옥을 제거하면서 1만5000여 명을 살육했다. 태자 주표는 아버지를 자주 만류하곤 했는데, 그 일로 아버지의 미움을 사 우울증으로 죽었다.
주원장은 주표의 아들 주윤문을 태손으로 봉하고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다. 당시 주윤문의 나이 16세. 어린 손자가 황위를 잇는 데 중신들이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주원장은 또 신하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혹여 아들들이 태손인 조카를 해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차마 그들마저 미리 죽일 수는 없는 일. 하여 아들들을 경계하는 ‘황명조훈’을 지어 내렸다. 여기에는 맏이의 법통을 지키라는 엄명과 함께 누구든 이를 어기면 때려죽여도 무방하다는 규정을 넣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 주원장은 자신이 죽더라도 아들들은 문상을 오지 말고 영지를 지키라는 교지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영락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 손쉽게 궁성을 차지했고, 어린 왕(혜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윤문과 단종
영락제의 황위 찬탈과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은 시간의 거리는 50년을 겨우 넘는다. 몸 약한 아들(문종)을 두고 특히 세손(단종)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세종이 바다 건너 명나라에서 벌어진 저간의 사정을 모를 턱이 없었다. 여건이 흡사한데도 우리네 임금은 살육보다는 타이름과 당부를 택했다. 그러나 잔혹한 사전 대비책으로도 꺾을 수 없는 최고 권력을 향한 욕심과 의지는 당부와 달램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 유혈이 낭자한 왕위찬탈의 드라마가 벌어지는 건, 중화 땅이나 조선 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지상의 모든 권좌는 선혈을 덮은 융단 위에 차려지게 마련이다.
단종은 8세 때 세종에 의해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며 문종이 승하한 후 12세 어린 나이로 왕좌에 올랐다. 병약했던 문종은 임종 때에도 나이 어린 세자를 걱정해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단종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일단의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를 죽였고, 왕명으로 대신들을 소집한 뒤 대궐문 앞에서 모두 죽였다.
수양대군이 권력을 틀어쥐자 단종은 그를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사를 모두 처리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단종은 더 이상 왕좌를 지킬 처지가 아님을 알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 6월,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꾸민 계획은 실행 전에 발각되었다. 세조는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강원 영월에 유폐시켰다.
다시 청령포에서
영월 서강 너머의 물돌이 땅 청령포가 곧 단종의 유배지였다.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류해 한 굽이를 도는 지점이다. 그 시대에 누가 이곳을 어린 임금의 유폐지로 추천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대의 지도를 놓고 봐도 이보다 적격의 처소는 없을 듯싶다. 뒤편으론 산이 가리고 3면으로 강줄기가 감아 도니 배를 이용치 않고는 접근할 방도가 없다. 갇힌 땅은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풍광이 좋다. 게다가 관아가 멀지 않으니 감시와 물품 조달이 쉽다. 내일 모레 사약이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어린 왕으로서도 물고기 잡고 멱 감고 노는 가운데 못다 한 공부나 실컷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러나 단종은 이곳에서 두 달 가량밖에 머물지 못한다. 그해 여름 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부득이 읍내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월 읍내에 들어서면서 곧바로 단종릉을 만나게 된다. 단종릉을 먼저 둘러보고 이어 관풍헌에 들렀다가 그다음 청령포를 구경하는 것이 비운의 소년왕 흔적을 더듬는 역사 탐방의 무난한 코스가 된다. 청령포라는 아름다운 자연이 없다면 굳이 단종을 떠올려서 무엇하랴. 단종 때문에 영월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월에 온 김에 단종을 만나보는 것이 훨씬 경쾌한 나그네 걸음이 될 수 있다.
단종릉은 왕릉의 격식을 따르면서도 양식은 아주 단출하다. 야산을 오르듯 비탈을 올라 능묘에 이른 사람들이 안쓰러운 낯빛으로 무덤을 둘러본다. 찰라나마 한 인간의 무덤 앞에 서서 555년 전의 사건을 더듬고 그 애절한 죽음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것도 역사 교육의 힘이다. 포석이 깔린 묘역의 길을 걸을 때마다 내 발바닥에 밟히는 것은 그 억센 생명력을 지닌 질경이들이었다.
물길은 굽이 돌아 산을 가두고
산맥은 또한 휘어 돌아
물길을 막는다.
잔잔한 물살에 발을 적실 때
어느새 푸른 물길을 열고
충신 엄홍도가 물장구치며
앞질러 헤엄쳐 가고 있다
목 메인 마음 전마선에 오르면
물 건너 풀섶에 열여섯 살 노산군이
서성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 하현식 시 ‘청령포에서’ 앞부분
청령포 강물을 건너는 시인의 감정이 상당히 고양돼 있다. 엄홍도는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호장이었다. 강기슭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장릉 자리에 암매장 한 덕에 그 이름이 역사에 남았다. 시인의 눈에는 풀섶을 서성거리는 열여섯 살 단종의 모습이 보이지만, 비정한(?) 내게는 청정한 자연의 풍광만이 가슴 환하게 안겨든다. 그러면 어떤가. 모든 객체와 물상은 보는 이의 주된 정서로 덧칠되는 것이 아니던가.
청령포는 그 자체로 빼어난 산수미를 다 갖추었다. 산을 어루만지며 유연히 휘어 도는 맑은 강줄기와 수줍은 듯 속살을 내밀고 있는 모래톱, 그 너머의 울창한 솔숲과 용용한 산봉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탁월한 풍경화 하나를 만들고 있다. 나는 차라리 이런 풍경에서는 소년왕에게 걸쳐진 피비린내 나는 역사쯤은 잠시 잊기로 마음먹는다.
청량한 공기가 가득한 숲길을 걸어들면, 숨겨놓은 부잣집 별장 같은 단종 어가(御家)를 만난다. 물론 예전의 그 집은 아니다. 팔작지붕의 기와집과 초가집을 복원해놓고 인형으로 당시 왕자(王者)의 귀양살이를 재현해놓았다.
어가를 나와 다시 솔숲을 지나면 강줄기를 돌려놓은 바위 벼랑 위에 설 수 있다. 전망대라 일컫는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서강 주변의 풍경 또한 수려하다. 이 길을 오르는 도중에는 단종이 부인을 그리워하며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망향탑이 있고 전망대 옆쪽으로는 단종이 자주 서울을 바라보며 서 있곤 했다는 노산대도 있지만 그랬거니 여기고 일별하고 지나쳐도 무방할 듯싶다.
유폐 이듬해인 1457년 10월 마침내 단종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한다. 공교롭게도 왕명을 받들어 사약을 들고 온 이는 지난날 단종을 호송해서 청령포에 안치시켰던 금부도사 왕방연이었다. 속설에 의하면, 왕방연은 차마 어명을 받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명심을 가졌던 통인 하나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아무튼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하면 금부도사의 임무는 끝난다. 이미 지난해 단종을 청령포에 유폐시키고 떠나던 때 그 안쓰러운 마음을 시 한 수로 남겼던 왕방연으로서는 소년왕의 시신까지 확인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으리라. ‘천 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로 시작되는 그의 시조를 새긴 돌 하나가 서강 언덕에 서서 청령포를 바라보고 있다.
김삿갓과 영월
청령포에서 차를 달려 30분이면 닿는, 하동면 와석리 마대산 자락에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가 있다. 그의 묘와 집터가 산언덕에 있으며 근래 지은 문학관이 이웃해 있다. 청령포가 물에 갇힌 유배지라면 이곳은 산으로 닫힌 또 다른 귀양지다. 소년왕은 그 육신이 갇혀 있었지만 김삿갓은 정신의 차양 속에 제 일생을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간을 찾아든 때는 벌써 해질녘이었다. 늦가을, 산속 냉기가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흙길이 질척거려 걷기도 힘이 들었다. 이윽고 다다른 그의 묘소. 외로운 봉분 하나가 석양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 외롭고 스산한 그의 생애와 다를 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묘 자락에 소주 한잔이라도 붓고 싶지만 그럴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늘은 높지만 머리 쳐들 곳 없고,
땅은 넓지만 다리 펼 곳이 없네.
밤중에 누각에 오른 것은 달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요,
사흘 굶은 것은 신선이 돼보겠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네.
- 김병연 시 ‘스스로 탄식하며(自嘆)’
부랑의 생애. 그의 떠돌이 삶은 30년이 넘는다. 따라서 그의 이곳 산중 삶도 두세 해를 넘지 않는다. 스물 초반에 떠난 집을 해골이 돼서 찾아왔다. 구천을 방랑하는 그에게는 이제 제 죽음의 징표라고 만들어놓은 무덤조차 거추장스러우리라.
나도 그와는 아주 연분이 없지 않다. 1979년 봄, 당시 나는 장편 역사소설 한 편을 쓴다며 허구한 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뒷날 모 일간지에 연재됐던 졸작 ‘서북풍’이 그것이었는데 이야기는 홍경래 난에 관한 것이었다. 평안도 박천에서 군사를 일으킨 홍경래는 파죽지세로 가산, 선천 등 인근 고을을 점령한다. 가산 군수 정시는 끝까지 저항하다 봉기군에게 참살되지만 선천 부사 김익순은 인부와 병부를 내놓으며 순순히 항복한다. 이 장면을 그리는 과정에서 나는 벌써 삿갓 김병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김익순의 항복에는 이미 김병연의 비극적 생애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익순의 친손자인데 그때 나이 겨우 넷이었다.
난이 평정되고 김익순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자 김병연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산간 오지 영월로 들어와 화전민이 된다. 스무 살 나이 때 김병연은 영월 동헌의 백일장에 나아가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논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했다. 그러나 뒤늦게 집안 내력을 알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백일장 이전에 벌써 자신의 가족사를 알고 있었다는 학계의 주장도 있는데 음미해볼 만하다. 20대 초 그가 서울로 올라가 이름을 바꾸고 권문가에서 공부를 한 행적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결국 그는 영월로 돌아왔다가 처자식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오르는데 한때나마 조상을 욕하면서까지 입신양명을 꿈꿨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그러한 유랑을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각지를 방랑하며 수많은 시를 지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유랑생활은 57세로 그가 전라도 화순에서 숨지면서 막을 내렸다. 화순에 있던 그의 무덤은 차남 익균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는 특유의 재기와 해학으로 세상을 풍자한 즉흥시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자신 양반의식을 버린 적은 없었다. 그의 시들이 함량 미달의 양반들을 조롱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그리곤 있지만 봉건사회의 체제와 질서를 비판한 경우는 없었다. 이것이 그의 시가 가진 한계였으며, 운명적 충격을 소화하는 데 평생을 소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근원적 요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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