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14

醉月 2012. 9. 27. 07:34

소쩍새 소리 그늘에서 유유자적 쉬어가는 나그네

충남 공주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성깔 있고 멋스러운 계룡산 연봉.

 

사람의 인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를 접하는 이의 주정(主情)에 좌우되듯 산의 인상 또한 그 품을 찾아들고 마루턱에 올라서는 사람의 정서에 달렸다. 골짝을 거쳐 산꼭대기에 올랐는지 아니면 능선 길을 걸었는지, 봄날에 찾았는지, 비 오는 여름날에 만났는지, 덧붙여 동행한 자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산의 모습, 산의 느낌이 달라진다.

계룡산은 성깔 있으면서도 멋스러운 구석이 많은 장년의 사내 같다. 스무 번도 넘게 이 산에 오르면서, 그리고 내 나이 쉰도 훨씬 넘은 때에 규정해본 산의 인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갓 스물의 어린 나이에 맨 처음 이 산을 만났을 때만 해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풍수지리며 무속과 유사종교에 대한 선입관으로 기이(奇異)와 영묘(靈妙)의 감정이입이 없지 않았지만 그 사이 내 의식이 변하듯 산 또한 많은 변화를 거쳤다.

 

장년의 사내 같은 계룡

계룡은 크고 넉넉한 산이 아니다. 자태가 특별히 빼어난 것도 아니다. 키 높이만 따지자면 인근의 서대산보다 높지 않고 현란함으로 치면 지척의 대둔산에 미치지 못한다. 넉넉하고 부드럽기로는 100리 안팎의 속리산을 감당할 수 없다. 주위에 이런 벗들을 둔 덕일까. 계룡은 돌올하면서 넉넉하고 현란하면서 무디다. 오기와 겸손, 세련과 질박을 아울러 지녔기에 이는 계룡의 멋이 된다.

수년 전부터 계룡산의 번잡함은 도봉산, 관악산과 다를 바 없이 됐다. 벚꽃철 단풍철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남달리 한적한 산행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신원사 쪽의 산길을 오르는 것이 예사지만 이쪽은 접근하기가 동학사나 갑사만큼 쉽지 않다는 난점이 있다.

공용주차장에서 가까운 산길 하나를 소개한다. 동학사 입구, 그러니까 오른편의 상가가 끝나고 조그만 다리가 나타나는 데서 걸음을 멈춘다. 등산로 안내판이 선 그곳에서 뭇 사람을 떠나보내고 오른쪽 샛길로 올라서는 것이다. 여관 건물을 지나면 천장 매표소가 나온다. 무당골을 지나 큰배재로 오르는 이 산길은 사계절 어느 때든 한적하고 아름답다. 다른 등산로에는 돌계단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흙길을 걷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맑은 개울이 쉼 없이 숲길을 따른다. 보통 걸음이면 한 시간 만에 큰배재 능마루에 올라설 수 있다.

이곳에서 10여 분 평지 길을 걸으면 남매탑이 나온다. 바람 부는 가을날에는 바닥에 밤톨이 깔리는 산길이다. 남매탑에 닿았으면 반드시 삼불봉을 올라야 한다. 계룡산 전경은 물론 공주 유성까지 한눈에 잡히는 장쾌한 조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기운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는 이곳에서 남매탑으로 되내려와 동학사로 하산하면 그만이다.

 

계룡산 도예촌.

 

그렇지 않을 경우 삼불봉~관음봉을 잇는 1.8km 자연성릉을 종주한 뒤 관음봉에서 동학사로 하산하면 더 좋다. 좁은 산길을 쉼 없이 오르내리며 깎아지른 단애를 통과하고 바위 벼랑에 걸린 아득한 철 사다리를 오르는 재미는 이 한 시간의 종주 코스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동학사에서 공주 가는 길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티재를 넘고 금강 청벽을 거친 뒤 강 물줄기를 따라 산기슭 길을 달려야 했다. 그 중간 중간에는 계룡산을 파고들어 직접 갑사로 가는 풍치 좋은 산길도 있고 신원사는 물론 윤증(尹拯) 고택(古宅)을 만날 수 있는 논산 가는 갈림길도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 청벽에서 곧장 강을 타넘는 큰 다리가 생기면서 이 길은 차들의 행적마저 뜸한 옛길이 됐다. 터널이 뚫려 힘겹게 고갯마루를 타넘을 일도 없게 됐다. 고속도와 다를 바 없는 새 길 덕에 대전-공주 내왕이 옆집 나들이처럼 쉬워졌지만 경치 보며 길 가는 재미는 훨씬 덜해졌다.

 

동학사에서 공주까지

그러나 동학사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에는 여전히 들를 만한 데가 여럿 있다. 우선 공주와 유성, 동학사로 나눠지는 박정자 삼거리에서 2km쯤 공주 쪽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상신, 하신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상신까지만 갔다 와도 좋다. 선주형(船舟型)의 특이한 풍수지리를 지닌 이 산속 마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리고 마을 건너편에는 도자기 예술을 하는 작가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도예촌이 있어서 한가롭게 그들의 작업과정을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손에 흙을 묻히는 체험도 할 수 있다.

 

이 샛길 있는 데서 조금 더 진행하면, 오른편 야산 바위벽에 뻥 뚫려 있는 동굴 하나를 볼 수 있다. 공암(孔巖)이라 부르는 이 바위굴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서기(徐起)의 출생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서기는 토정 이지함과 함께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했다. 도로 왼편의 공암마을이 서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이곳 부잣집의 종이었다. 처녀 시절, 그녀가 논에 새를 쫓으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하려고 이 동굴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길 가던 소금장수 사내 하나도 이곳으로 뛰어들어왔다. 다음은 뻔하잖은가.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서기였으니 서기는 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천출(賤出)이지만 그는 학덕이 높아 많은 저서와 제자들을 남겼다. 인근에는 그를 배향하는 사당도 있다.

터널을 통과하면 곧 청벽에 닿는다. 이쯤에서 4차선의 새 도로를 벗어나면 예전 도로를 만날 수 있다. 요기라도 하고 싶다면 이 길로 나가 청벽 어귀의 식당가를 찾으면 좋다. 참게탕이며 새우탕, 장어구이 등 민물고기로 만든 맛깔스러운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대교를 타넘어 북쪽 강안 도로를 달리면 머지않아 ‘석장리박물관’ 진입로가 나타나는데 무조건 차를 빼서 들러볼 만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구석기 유물 전시관’이란 간판을 붙이고 있었던 점에서도 보듯이 이곳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뜻 깊은 곳이다. 잠깐의 공부도 공부지만 참하게 지어놓은 전시관 잔디밭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강과 산의 멋진 경치를 놓칠 수 없다. 그 아득한 과거의 사람들이 왜 이쯤에다 주거지를 차렸는지도 절로 알 만하다. 명창 박동진 선생이 생전부터 마련한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도 여기서 가깝다.

 

공산성(公山城) 소쩍새 소리

강 건너편 나지막한 산에 성벽이 걸려 있고 정자가 있는 풍광이 눈에 잡히면 공주에 다 온 셈이다. 번드레한 건물이 줄지어 있는 강 이편 신시가지는 봐서 뭣하겠는가. 공주대교만 넘으면 이내 운치 있는 공산성을 만나고 무령왕릉이 있는 둔덕에 오를 수 있는데 말이다.

 

술의 그늘

돈의 그늘

여자의 그늘에서도 끝내

쉬지 못하는 사내들의 넋들아

깊은 잠 이루지 못하는 숙맥들아

 

여기 와 잠시 쉬었다 갈지어다

희뿌연 밤안개의 잡목림 속

여리기에 더욱 또렷한

소쩍새 소리의 그늘에 와 잠시

지친 눈 지친 다리 쉬었다 갈지어다.

- 나태주 시 ‘공주 금학동’ 부분

 

토박이 공주 시인은 벌써 ‘쉬지 못하는 사내들’이며 ‘잠 못 이루는 숙맥’들을 초대하고 있다. 도시라고 해도 공주 일락산 기슭에서는 밤마다 소쩍새가 운다면서 하는 유혹이다. 금학동은 물론 시인이 사는 동리이기도 하지만 전통 깊은 공주교육대와 공주여고 등이 있는, 아직도 공주다운 맛을 그대로 지닌 마을이다. 나도 어느 땐가 지금은 작고한 신정식 시인을 좇아가 공주의 또 다른 시인 조재훈 선생과 함께 이 동리의 소문난 동동주를 마신 일이 있는데 글쎄, 그때도 공주교육대 뒷산에서는 소쩍새가 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편뿐인가. 무수한 송덕비가 늘어선 상수리나무 숲길로 해서 공산성에 오르면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보다 더 청량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산성 정자에 앉아 성벽을 내려다보고 성벽 아래의 강물에 눈을 빠뜨리고 있노라면 문득 그동안 내가 끌고 다녔던 지친 걸음과 정처 없던 넋마저 안쓰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여 웅진에 와서 이 고요 속에 한때나마 쉴 수 있음이 무한 고맙고 복스러운 것이다.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 천도 때부터 수도의 본거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왕좌를 물려받은 문주왕은 눈물을 머금고 천도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475년). 100년도 못 되지만 웅진 백제의 역사는 그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당시 백제의 왕궁도 이 성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멸망 때에는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이곳에 피신했다가 항복했다.

 

무덤 속의 시간

공산성을 나와 큰길을 건너면 곧 송산리 고분군이 있는 언덕바지를 오를 수 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세상의 이목을 모았던 이곳 고분군에 서면 동쪽으로 공산성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금강이 아늑히 감싸 돈다. 동남쪽으로는 계룡산이 전면에 펼쳐 있어 풍광 또한 뛰어나다. 편의상 고분은 제1호, 제2호, 제3호 식으로 호칭하는데 그중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굴된 제6호분은 무령왕릉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이곳을 대표하는 백제 왕릉이었다. 유일한 벽돌무덤 인데다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 공산성.

 

이 6호분은 도굴되고 발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많이 훼손되어 비만 오면 물이 샜다. 이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한 인부의 삽 끝에 뜻밖의 벽돌 모서리가 부딪혔다. 공사 책임자가 벽을 따라 들어가보니 아치형 묘실 입구가 나타났다. 그는 즉시 공사를 중지하고 이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했다. 1971년 7월 8일, 순결한 무령왕릉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신문의 컬러 사진으로 대했던 묘실 내부의 모습은 지금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화려한 금관이며 주옥 등은 내게 별 관심거리가 못되었다. 역사학계의 획기적 발견이라고 하는 지석조차 그런 것이거니 여겼다. 놀라운 것, 그것은 시간의 흔적이었다. 대석(臺石)에 놓였던 왕의 관이 무덤 속에 흐르는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데 이어 왕비의 관짝이 무너진다…. 떨어져 있던 두 관의 관목(棺木)이 그렇게 뒤엉켜 있었던 것. 무덤 속에 흐른 1400년의 시간이 그 한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캄캄한 무덤 속에서 어느 날, 저 홀로 무너지는 관짝이 내는 소리를 상상해보라.

무령대왕릉 모형관까지 둘러본 뒤, 다시 큰길을 따라 국립공주박물관을 찾아가는 때는 차들의 내왕이 번잡스러운데 햇살마저 따갑다. 서울의 동대문거리를 걷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어느새 공주도 이렇게 도시가 다 돼버렸다.

 

조붓한 골목길이 있었는데, 여기

코납짝집들이 있었는데

깨끗한 추억이 살았었는데, 여기

사람의 숨결이 들렸었는데.

- 나태주 시 ‘공주’ 전문

 

이제 그렇지 못하다는 시인의 한탄도 그래서 실감이 난다.

 

우금치의 동학군 위령탑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첫 고개가 우금치(牛金峙)다. 고개 정상에 높다란 동학혁명군의 위령탑이 서 있어 행인들의 발목을 잡는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제2차 농민 봉기군이 공주 입성을 위해 이 고개에서 일본군이며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처절한 패배를 당했는데 그때 희생당한 농민군의 혼을 달래는 탑이다. 그해 10월 농민군은 논산을 출발해 이인, 효포, 능치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웅치 점령에 실패하고 경천으로 일단 물러난다. 11월 9일 농민군은 우금치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을 돌파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세는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직이 제대로 안 된 농민군은 삽시에 무너졌다. 전봉준도 소수의 휘하만 이끌고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순창 땅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동학군의 공주 전투는 곧 최후의 항전인 동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최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작은 통곡 어디에다 뿌리랴

어디에다 뿌리랴

골짜기마다 불어난 물이

저 두고 온 三南을 적신다면

부드럽게 적신다면

아! 그런 신새벽이 온다면,

-조재훈 시 ‘계룡산을 넘으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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