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바다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썰물의 오후 세 시. 오늘은 서른두 명의 늙은 어머니들이 갯벌로 나갔습니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가 위태위태한 일흔아홉의 병상이네 어머니도, 걸진 농담을 입에 달고 있는 이장댁 아주머니도 ‘뻘배’를 밀며 아득하게 멀리 나간 바다의 끝으로 갔습니다. 여기는 전남 보성의 여자만(汝自灣)의 섬, 장도입니다. ‘꼬막’ 하면 누가 뭐래도 ‘벌교’를 첫손으로 꼽지만 벌교에서도 가장 튼실하게 여문 참꼬막은 여기 여자만, 그것도 장도의 기름진 개펄에서 잡아내는 것들입니다. 육지 사람들이야 꼬막이라면 다 같은 줄 알지만, 참꼬막은 새꼬막과 감히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참꼬막의 촉촉한 속살과 졸깃한 식감은 새꼬막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새꼬막은 배로 잡지만, 참꼬막은 추운 겨울 고된 노동의 수고로 잡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그마치 대여섯 배의 값에도 ‘없어서 못 파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육지 사람들이 지금까지 맛본 꼬막은 열이면 열, 모두 새꼬막일 테니 그 차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장도는 꼬막이며 바지락, 낙지에 칠게, 문저리(망둥이)까지…. 잠시도 손을 쉬지 않는 섬사람들이 정직한 노동과 바꿔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이 사는 섬마을입니다. 장도에는 사실 눈을 씻고 봐도 눈이 번쩍 뜨일만한 경관은 없습니다. 물때마다 달라지는 배 시간 때문에 섬에 들어가기도 쉽잖습니다. 겨누지 않고 찾아갔다가는 발을 딛지도 못할 것이고, 경치를 찾아 들어온 이들은 거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섬에서 보아야 할 것은 순한 사람들이 일궈온 소박한 삶입니다. 장도에는 전교생이라야 딱 두 명뿐인 벌교초등학교 장도 분교가 있고, 팽나무 거목이 휘어 감고 있는 오래된 샘이 있으며, 호수처럼 유순한 바다와 너른 갯벌을 끼고 걸을 수 있는 부드러운 길이 있습니다. 어긋난 기대와 낡아서 익숙한 풍경 사이쯤에 그 섬이 있습니다. 경관을 보겠다는 욕심을 다 버리고, 그저 마음을 놓아두어 평안해질 때 섬은 비로소 보입니다. 폐염전 자리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숲을 기웃거리거나, 바닷물 찰랑이는 분교 앞 노두길을 걸어 목섬까지 걷거나, 거기서 아직 초록빛을 잃지 않은 초지에 누워 여자만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풍성해집니다. 아 참, 장도의 목섬에 가시겠다면, 600년 전쯤 장도에 유배 왔다는 코끼리 얘기는 꼭 들어보시기를….
# 첫 동물재판, 그리고 섬으로 유배 온 코끼리 전남 보성의 섬 장도. 난데없지만 먼저 600년 전 그 섬으로 들어왔던 ‘코끼리’ 얘기부터 시작하자. 섬의 형상이 노루를 닮았다고 해서 ‘노루 장(獐)’자를 이름으로 쓰고 있지만, 엉뚱하게 코끼리 이야기로 시작하는 건 장도에는 한때 코끼리가 살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사람을 밟아 죽인 죄로 재판을 받고 내려온 코끼리였다.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동물재판의 주인공이자, 유배형을 받았던 코끼리다. 장도의 코끼리 얘기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조선 태종 1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411년의 일이다. 일본의 국왕 원의지가 즉위하면서 코끼리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암놈은 일본에 두고 수컷을 보내왔으니 친교의 의미였다. 코끼리는 군마(軍馬)를 관리하던 부서인 사복시에서 맡아 길렀다. 한 번도 코끼리를 본 적 없던 조정에서 코끼리야말로 귀한 구경거리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구경하는 자세가 호기심과 탄성이 아니라, 뜻밖에 능멸과 조롱이었다. 조정의 관료들은 난생처음 본 괴이한 생김새의 코끼리를 조롱했다. 하루 네댓 말의 콩을 먹어치우는 먹성을 감당하지 못해 굶주리기가 다반사였던 코끼리는, 사람들의 놀림까지 받다 보니 포악해졌던 모양이었다. 코끼리는 자신에게 침을 뱉고 비웃던 지금의 건설교통부 장관쯤 되는 벼슬아치(공조전서)를 그만 밟아 죽이고 만다. 한낱 동물이 사람을, 그것도 장관급의 관료를 밟아 죽였으니 이거야말로 ‘대형 사고’였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을 밟아 죽인 코끼리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야 했을까. 당장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을 것이고, 도리를 모르는 한낱 동물이 한 짓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왕의 친교의 선물을 차마 죽일 수는 없었을 터.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조에서 태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인즉 ‘유배가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고심하던 태종은 코끼리를 순천부의 작은 섬 ‘장도’로 귀양을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수십 척의 어선과 병선이 동원돼 코끼리는 장도로 옮겨졌다. 지금은 보성 땅이지만 당시 장도는 순천부에는 속해 있었다. # 하루 두 번 갯벌로 가둬지는 섬, 장도
장도는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섬이 아니다. 여자만에 떠 있는 장도는 썰물 때면 수심이 낮아지면서 넓은 갯벌이 드러나니 웬만한 배는 들어가지 못한다. 드넓은 해안의 갯벌이 썰물 때마다 섬을 가두는 것이다. 여객선은 썰물의 시간을 피해서 운항하는데, 하루 50분씩 물때가 늦어지니 매일 운항 시간이 달라질밖에…. 하루 두 번 여객선이 오가지만 물때에 따라 규칙적으로 배 시간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승객들 대부분이 주민들이니 섬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출항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배 시간을 맞추기는 어렵지만, 장도까지는 금방이다. 깊은 수심의 항로를 알리는 대나무가 꽂혀 있는 바다를 지나 30분이면 장도의 신경선착장에 닿는다. 선착장 앞바다에 먹으로 찍어 그린 듯한 솔섬이 해무 속에 수묵화처럼 떠 있다. 장도까지는 철부선이 운항하지만, 섬에서는 차가 필요 없다. 바삐 움직이며 봐야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린 걸음으로도 네댓 시간쯤이면 섬의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장도에 내리면 밋밋한 풍광에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암괴석의 해안선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도무지 특별하달 것 없는 풍경들이다. 하지만 배에서 내려서 서너 시간쯤 지나면 섬의 풍경은 거짓말처럼 변한다. 여객선을 끌고 들어온 바다가 멀리 밀려 나가는 썰물 때가 되면 섬 주위에는 찰진 갯벌이 그득히 펼쳐지는 것이다. ‘참 뻘’이라고 했다. 모래나 흙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점토 갯벌이다. 갯벌의 입자가 어찌나 고운지 마치 파운데이션 같았다. 축구장 수십 개쯤은 족히 될만한 광활한 갯벌이 마침 두꺼운 구름 사이로 살짝 나온 볕을 받아 은박지처럼 반짝거렸다. # 고단한 생계로 캐내는 졸깃한 참꼬막의 맛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말쯤이면 장도에서 꼬막잡이가 시작된다. 꼬막의 종류는 피꼬막, 참꼬막, 새꼬막 이렇게 3가지로 나뉜다. 서로 생김새와 맛도 다르지만, 잡는 방법도 저마다 다르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이 쳐주는 건 단연 참꼬막이다. 다른 꼬막보다 골이 깊고 단단한데 속살의 졸깃한 맛과 깊은 향이 다른 꼬막에 비할 바가 아니다. 피꼬막과 새꼬막은 배를 이용해서 형망이라는 그물로 잡아올린다. 그러나 참꼬막은 갯벌에서 사람들이 직접 채취한다. 맛이 좋은 만큼, 또 품이 그만큼 많이 드는 만큼 참꼬막은 비싸다. 참꼬막은 같은 무게의 새꼬막에 비해 가격이 대여섯 배쯤 된다. 바람에 어촌계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간식으로 단팥빵과 두유를 받아든 아낙네들이 ‘뻘배’를 능숙하게 끌며 갯벌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쯤이야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낙네라고 하지만 대부분 칠순에 가까운 할머니들. 그런데 뻘배에 오르자 여간 날랜 게 아니다. 굽은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갯벌에 나온 일흔아홉의 ‘병상이 엄니’도 뻘배를 밀며 금세 가물가물한 갯벌의 지평선 끝까지 갔다. 밀물이 들기 전까지 두세 시간 정도가 최대 작업시간. 그러니 허리 한번 펼 시간도 없다. 이쯤에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묘사된 꼬막잡이의 장면을 들춰본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잡이에 나선 주민들은 그때그때 일당을 받고, 이들이 잡은 꼬막으로 거둔 수익은 한데 모아두었다가 가구마다 똑같이 분배하는 것이 부수마을의 원칙이다. 할당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이 잡는다고 일당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대충 시늉만 하다 제 일당만 챙기면 그뿐일 듯싶은데, 갯벌에 나간 아낙네들은 손을 잠시도 쉬지 않는다. 밀물이 들기 시작하자 아낙네들은 가물가물한 갯벌의 지평선 끝에서 뻘배를 밀며 돌아왔다. 꼬막은 왜 하필 이리 추운 겨울에 제맛을 내는 것인지. 춥고 고된 노동도 평생을 하면 굳은살이 박이는 것일까.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갯벌에서 나와 개흙을 털어내던 아낙네들은 이내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며 바삐 집으로 돌아갔다. # 고요한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곳 대촌마을에서 부수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양쪽으로 바다가 밀려 들어온 좁은 목이다. 여기에 학교가 있다. 전교생이 딱 두 명뿐인 벌교초등학교 장도분교다. 그나마 학기 초에 여학생 한 명이 육지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전교생이 한 명으로 줄었다가 새로 부임해온 보건진료소장의 아들이 전학 오면서 다시 두 명이 된 것이라 했다. 마침 학교를 찾아간 날에 학생 한 명이 할아버지가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서 젊은 교사와 한 명의 학생이 마주 앉아 수업을 하는 모습이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장도에서 만나는 건 모두 이런 풍경들이다. 오후 나절 섬을 가둔 내만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꼬막껍데기를 시멘트와 이겨 바른 섬마을 돌담의 골목에도, 아름드리 팽나무와 그 아래 우물도, 난대림 숲의 그늘에도 평화로운 적막이 가득 차있었다. 빨랫줄에는 허드레 생선인 문저리(망둥이)와 무청이 나란히 해풍에 말라가고 있었고, 부드러운 갯벌에는 칠게와 농게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여행지를 찾아가서 이름난 곳들을 다 바삐 둘러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의무감 혹은 호기심 또는 욕망이 사라진 평화로운 시간이 거기 있었다. 배를 타러 신경선착장으로 되돌아 나가는 길. 대촌마을 어귀의 폐가 툇마루에 단정하게 걸려있는 액자가 눈에 띄었다. 글자 한 자를 써서 액자 속에는 담아놓았는데 그 글씨가 하필 ‘고요할 정(靜)’자였다. 처음 얘기로 되돌아가 다시 코끼리 이야기. 장도에 유배 왔던 코끼리는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 마을 주민들은 장도로 들어온 코끼리가 학교 앞 갯벌의 노두길 너머의 목섬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섬 안에 변변히 먹을 풀이 없어 해초를 뜯어 먹으며 코끼리는 날마다 수척해져 갔고, 사람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이 다시 조정으로 코끼리를 불러올렸는데, 그 후 세종 때까지 코끼리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전전했다는 사정이 전해진다. 수도권에서 가자면 호남고속도로 익산분기점에서 익산∼포항 고속도로와 순천∼완주 고속도로를 차례로 갈아타고 동순천 톨게이트로 나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고흥나들목으로 나가 벌교 방면으로 향한다. 벌교역 못미처 벌교삼성병원을 끼고 우회전해 영등리와 박석마을을 지나면 장도로 가는 배가 뜨는 상진항이다. 장도는 전남도에서 추진하는 ‘가고 싶은 섬가꾸기’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매일 달라지는 배 시간은 박형욱 주민협의회위원장(010-7604-1140)에게 문의하면 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장도에서 여자만의 드넓은 갯벌을 보겠다면 필히 숙박을 해야 한다. 장도는 250여 호 615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라 관광객을 받는 숙소는 한 곳도 없다. 민박을 구하거나 마을회관 신세를 져야 한다. 식당도 한 곳도 없어 민박집에 따로 부탁해야 한다. 박형욱 주민협의회위원장에게 문의하면 민박집을 연결해 준다. 가능하다면 마을회관을 얻는 것이 좋겠다. 욕실이 불편한 게 흠이지만, 넓고 쾌적한 편이다. 꼬막은 섬에서 나와서 벌교읍의 식당에서 맛보는 것이 좋겠다. 벌교읍에는 꼬막을 내는 식당들이 즐비하지만, 원조꼬막식당(061-857-7678)이 단연 압권이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한국관광의 별 베스트10’의 외식 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름난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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