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술과 詩의 風情

醉月 2008. 4. 14. 23:27


선조 때 시인 권필은 과거 응시를 권유하는 벗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은 하니,
매양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오.
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리요."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라고 하여 시와 술로 밖에는 풀길 없는 뜻같지 않은 세상에서의 갈등을 씁쓸히 노래하고 있다.

또 이수광은 〈술회〉란 작품에서,
시는 교묘한 솜씨로 만물 아로새기고 
술은 빗자루 되어 온갖 근심 쓸어가네.  

라고 노래한 바 있다.
가슴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정염이 있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지울길 없는 근심이 있다.
시가 있어 이를 노래하고,
한잔 술이 빗자루 되어 그 근심을 깨끗이 쓸어내매,
마음 속에는 어느새 호연한 기상이 솟아난다.
 
실명씨의 작품이다

술은 언제 나고 시름은 언제 난지
술나고 시름난지 시름 난 후 술이 난지
아마도 술이 난 후에 시름 난가 하노라
 
술과 시름은 동무 삼아 다닌다.
시름 때문에 술을 마시는가,
술 때문에 시름이 생기는가?
시름이 있으니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보면 시름은 간데 없다.
술만 있고 시름이 없다면,
시름만 있고 술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살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정태화(鄭太和)는

술을 취케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상쾌하지 않은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도연히 앉았노라니,
가슴 속에 숨었던 시름이란 놈들이 일제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이제 물러 가렵니다` 하며 하직을 고해 온다.
내게 왔던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야 있나.
넘치는 한 잔 술로 가는 시름을 전송하련다.

김육(金堉)의 이런 시는 어떨까.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을 부르시소
초당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
 
술이 굼실 익으면 술 익었다 벗을 청하고,
꽃 피어 향기 흐르자 또 그 핑계로 동무를 부른다.
만나서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긴가?
더도 덜도 말고 딱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함이다.

 
시 있는 곳에 술이 있고 술 있는 곳에 노래가 있다.
더욱이 세상일은 언제나 공정치 아니하고,
시비는 늘 전도되며,
정의는 불의 앞에 항상 좌절을 경험하기 마련임에랴.

주선(酒仙) 이백은 일찍이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시름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라 하여 늘 지니고 가는 가눌 길 없는 삶의 근심을 노래한 바 있다.
가뜩이나 쓴 인생에 한 잔 술이 없대서야 무슨 낙이 있겠는가.

李白의 友人會宿를 보면
 
천고의 이 시름 씻어내고자  
연거퍼 백병의 술을 마신다.                    
좋은 밤 소곤소곤 청담 나누며                 
두둥실 흰 달에 잠 못 이룬다.                  
거나해 공산에 드러누우면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린걸.                
     
 
백병의 술로도 씻어낼 수 없는 근심이 있다.
천고의 근심을 씻자고 마시는 술이니 목전의 상황에 얽매여 일희일비하는 소인배의 근심은 아니다.
우주를 품어안고 천고를 가늠하는 위대한 고독자의 근심이다.
어느덧 흰달은 동산 위로 두둥실 떠올라 어둡기만 하던 자리를 구석구석 비춰준다.
거나해 그대로 드러 누우면 드넓은 우주가 마치 포근한 솜이불 같구나.
 
楊萬里는

강 바람 날더러 시 지으라 하고  
산 달은 날 불러 술마시게 하는도다.            
취하여 진 꽃 위로 거꾸러지니                 
천지가 바로 이부자리로구나.              
     
 
강 바람 솔솔 불어와 시심을 붇돋우고,
산 달은 내게 거나한 주흥을 부추긴다.
강 바람 산 달에 주흥이 도도하니 시 읊다 취한 술에 진 꽃잎 위로 아예 드러눕는다.
편안하구나.
꽃잎 깔린 대지는 향기로운 요가 되고,
달빛 밝은 저 하늘은 비단의 이불이라.
건곤일척에 不知老之將至로다.
늙음이 장차 오는 것도 모르겠네.

이수광은 또 〈言志〉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천지는 커다란 이부자리요  
강하는 하나의 술 연못일세.             
천날을 깨지말고 취하여보자            
꿈속에 태평시절 지나쳐보자.         
   
 
천지를 이부자리로 깔고 덮으니,
드넓은 강물이 그대로 술이로구나.
그 술을 천일 동안 마시어 보자.
취하거든 깨지말고 잠을 자리라.
그 사이에 인간세상에는 태평성대의 노래가락이 울려 퍼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듯 술은 가슴 속 깊은 시름을 녹여주는 묘약이 된다.

李鼎輔의 아니 깬들 어떠리를 보면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玩月長醉 하려뇨
 
꽃 구경은 달빛 아래서 해야 제격이고,
술은 꽃 아래서 달빛 보며 마셔야 제맛이 난다.
맛진 술이 있어도 벗이 없대서야 무슨 맛이 나겠는가.
어여쁜 꽃과 흐는한 달빛,
매운 누룩으로 담근 술에 싫증나지 않는 벗.
꽃 향기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누룩에 취하고 우정에 취하니 이 취기는 영영 깨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술이 취하거든 깨지말게 삼기거나
님을 만나거든 이별 없게 삼기거나
술 깨고 님 이별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실명씨는
취하거든 깨지를 말고,
만났거든 이별을 모르고 지낼 일이다.
취한 술은 쉬이 깨고 좋은 님은 쉬 떠나니,
인생에 무슨 이런 장난이 있단 말인가?
술 깬 뒤 님 떠난 빈 자리를 더듬는 슬픔에 인생의 시름만 깊어 간다.
 
白光勳의 병들어 누운 친구를 그리며 지은 시다

술 걸러 그대 오길 기다리면서    
거문고 빗겨 들고 봄볕 아까와.                 
시냇물도 그댈 향해 흘러가누나                
길 따라 솔 그림자 늘어섰구나.     
            
 
동지 섣달에 담근 술 항아리에서 굼실 풍겨나는 누룩의 향내.
진작에 탁주를 잘 걸러 놓고 그대가 자리 털고 일어나 나를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다.
거문고를 빗겨 들고 한 곡조 타는 뜻은 남은 볕이 아쉽고 아까운 때문이다.
그대에게 향하는 나의 이 마음,
시냇물도 내 안 같아서 흘러 흘러 흘러가고,
그 길 따라 솔 그림자가 줄줄이 늘이웠다.
이 솔의 푸르름 닮아 그대 빨리 쾌차 하소.
따뜻히 손을 잡고 술 한잔 나눕시다.
 
권필이 함께 술마시기로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자,
무료히 앉았다가 속이 상해 혼자 술 마시며 지은 시다.

님 만나 술 찾으면 술이 없더니  
술 두고 님 그리면 님이 오잖네.                
백년간 이 내 일이 매일 이렇다                
혼자 웃고 서너잔을 주욱 들이키노라.        

벗이 있고 술이 있대서 그 자리가 늘 유쾌할 수도 없다.
벗은 마음에 맞는 벗이라야 벗이랄 것이요,
술은 즐거워 마시는 술이라야 술이랄 것이다. 
 
정철의 시를 보면

一定 백년 산들 긔 아니 초초한가
초초한 浮生이 무슨 일을 하려 하여
내 잡아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하는가
 
아마도 좌중에 한 친구가 권하는 술잔을 자꾸 내밀며 흥을 깼던 모양이다.
에이 못생긴 친구.
백년을 산다해도 흰 말이 벽 틈 사이로 지나가듯 짧은 세월인데,
덧 없는 뜬 인생이 무엇이 바빠 이 정다운 술잔마저 마다한단 말인가.
안돼. 내 잔 한잔 기어이 받게.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있어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놂이 좋아라               실명씨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앞에 두고, 좋은 술 좋은 안주로 좋게 노니 좋다는 것이다. 흥겨운 자리고 보니 진진한 흥취는 끊어질 듯 이어져 한 낯에 시작한 자리가 해 지고도 끝날 줄을 모른다.
 
 
金樽에 가득한 술을 슬카장 기울이고
취한 후 긴 노래에 즐거움이 하도 하다
어즈버 석양이 盡타마라 달이 좇아 오노매         鄭斗卿
 
 
술이 거나하니 노래가 없슬쏘냐. 벗님의 소매자락이 절로 너울거린다. 해가 진다고 흥이야 다할쏘냐. 서산엔 해가 지고, 동산에선 달이 뜬다. 저 달이 지고 나면 또 해가 떠오겠지. 어찌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떠리. 
 
 
창 밖에 국화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 온다
아희야 거문고 淸쳐라 밤새도록 놀리라              실명씨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 법이다. 창밖에 국화를 심어두고 그 아래 흙을 파 술동이를 묻어 두었다. 傲霜孤節 서리 맞아 국화가 피고, 동이를 열고 보니 냄새가 진동한다. 술에 주린 腸에서 절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때 마침  `이리 오너라`하는 귀익은 벗님의 목소리가 동산에 막 떠오른 달과 함께 사립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희야 거문고 내오너라. 깊어가는 가을밤을 밤새도록 놀아보자. 
 
 
달이 뚜렷하여 碧空에 걸렸으니
萬古風霜에 떨어짐즉 하다만은
지금에 취객을 위하여 長照金樽 하노매              李德馨
 
 
만고풍상을 다 겪고도 저 달은 떨어질줄 모르고 벽공에 걸려 있다. 달이 저렇듯 뚜렷히 빈 하늘을 밝히고 있는 뜻은 술 마시는 나그네의 거나한 주흥을 위함이 아닐 것인가. 즐거운 이 자리 더욱 환해지라고, 행여나 권커니 자커니 할 때 실수하지 말라고, 수구초심 저 하늘을 밝히고 있구나.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먹고 취할선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風淸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申欽
 
 
즐거워 마시는 술인데 청탁을 관계하랴. 마셔 취하기는 청탁이 한결 같다. 光風霽月, 빛나는 바람이 구름에 가린 달을 씻겨, 오늘은 달이 밝고 솔바람 소리 맑으니 이 술에 취해 영영 깨지 않는데도 여한이 없겠다. 

 
지어미 잠깨야 술맛보라 하더라
 
 
陽坡의 풀이 기니 봄빗치 느저 잇다
小園 桃花는 밤비예 다 피거다
아희야 쇼 됴히 머겨 논밭 갈게 하여라            辛啓榮
 
 
농가의 봄날은 이렇게 온다. 양지녘 언덕에 햇볕이 따뜻하고, 그 볕에 봄풀은 웃자랐구나. 간밤 비 맞아 복사꽃이 활짝 피니, 집집마다 논밭에선 쟁기질이 한창이다. 아침에 소를 든든히 먹여 아이를 재촉하여 들로 나간다.
 
 
오늘은 비 개거냐 삿갓에 호미 메고
베잠방이 걷오추고 큰 논을 다 맨 후에
쉬다가 점심에 탁주 먹고 새 논으로 가리라        金兌錫
 
 
그리하여 또 여름이 오고, 장마비 그치자 햇살이 짱짱하다. 그새 논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삿갓 쓰고 호미 메고 김을 매러 나간다. 베잠방이를 활씬 걷어 붙이고, 댓바람에 큰 논의 김을 다 매고 나니, 어느덧 등에는 흐믓한 땀이 배이고 배에선 꼬르륵 시장기를 느낀다. 때맞춰 집에서는 새참을 내온다. 나무 그늘에 앉아 한땀을 들이고, 탁주를 반주로 배불리 밥을 먹고 다시 새 힘을 얻어 새 논에 김매러 간다.
 
 
올여논 물 실어 놓고 棉花 밭 매오리라
울 밑에 외를 따고 보리 능거 점심하소
뒷집에 빚은 술 익었거든 차자나마 가져오세        李鼎輔
 
 
마른 논에 넘치도록 물을 실으니, 올벼에 아연 생기가 돋는다. 이제는 목화밭에 김을 맬 차례구나. 그리고는 울 밑에 덩굴진 외를 따야지. 겉보리를 찧어내어 보리밥을 한솥 해서 고추장에 외를 찍어 한 입 가득 베어 문다. 이 때에 한잔 술이 없대서야 말이 안돼지. 뒷집에 새로 빚은 술이 익었다더냐. 외상일지라도 몇 잔 술을 안 마실 수 없구나. 
 
 
앞 내에 고기 낚고 뒷 뫼에 산채 캐어
아침 밥 죠히 먹고 초당에 누웠으니
지어미 잠 깨야 이르되 술 맛 보라 하더라           실명씨
 
 
새벽에 일어나 앞내에 나간다.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버들에 꿰어차고, 뒷 뫼에 건듯 올라 산나물을 캐어서는, 물고기 산나물로 아침 밥 배불리 먹고 초당에 드러누웠다. 아내는 곤히 잠든 나를 깨우더니만 싱겁게 "새 술이 잘 익었는데 술 한잔 허실라우." 한다.  
 
 
午睡를 느지 깨야 醉眼을 열어 보니
밤비에 갓핀 꽃이 暗香을 보내나다
아마도 山家에 맑은 맛이 이 좋은가 하노라          金天澤
 
 
낮잠을 늦게 깼다고 했지만 밤비에 갓핀 꽃을 말하고 있으니, 간밤 술에 취해 한낮에야 일어난 것이다. 깨긴 깼지만 정신은 들지 않아 멍하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코 끝에 전해오는 내음이 있다. 간밤 비맞아 핀 꽃의 향기가 심심해서 방안으로 들어왔구나. 덜 깬 술의 취기가 꽃 향기에 취해 다시 올라온다.
 
 
청류벽에 배를 매고 白銀灘에 그물 걸고
자 넘는 고기를 실같이 膾쳐 놓고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終日醉를 하리라           尹游
 
 
청류벽 푸른 절벽 아래 배를 매어 두고, 은물결 여울목에 그물을 걸어두니 자 넘는 고기들이 펄떡펄떡 뛰는구나. 실같이 켜를 내어 회를 쳐놓고, 한잔 술 그득 따라 하루 종일 마시리라.
 
 
대추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뜻드르며
벼 뷘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먹고 어이리          黃喜
 
 
대추 볼이 발갛게 물든 것을 보니 가을이구나. 알밤도 제멋에 겨워 송이를 벌어 땅위에 떨어진다. 추수 끝난 논바닥엔 논게가 굼실굼실 그득하구나. 그 게를 잡아다가 게장을 담궈두니, 대추에 알밤에 안주가 풍성하다. 때 마침 술이 익어 한잔 생각 자욱한데, 그 술을 걸러 마시라고 체장수가 `체 사려!` 외치며 문 앞을 지나간다. 한잔 술을 아니 먹을 도리가 없다.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 하노라           尹善道
 
 
혼자 마시는 술이 좋을 때가 있다. 무연히 먼 뫼를 동무 삼아 마주 앉았다. 한사발 들이키고 산을 한 번 올려본다. 꿈에 그리던 님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듯 반가운 청산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웃기도 그렇고 할말도 없지만 `자네도 한잔 받게` 철철 넘치게 한잔 따라 청산 쪽으로 돌려 놓는다. 흐믓하다.

 
 
맹세 풀이 하리라
 
 
술을 취케 먹고 오다가 공산에 자니
뉘 날 깨우리 천지 즉 금침이로다
광풍이 細雨를 몰아 잠든 나를 깨우다          趙浚
 
 
비틀비틀 취한 걸음은 가눌 길이 없는데, 빈산을 깔고 누워 잠이 들었다. 깨우지 마라 이 포근한 잠을. 그 꼴을 보다 못해 심술이 난 일진광풍이 자는 내 이부자리 위로 보슬비 한줌을 뿌리고 간다. 비로소 정신이 든다. 여기는 어딘가. 나는 누군가.

 
거나한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이렇듯 꿈속같이 아련하다. 몸은 천근만근 말을 듣지 않고, 마음은 두둥실 떠올라 도도한 주흥을 가눌길 없다. 똑바로 걷는 걸음이 자꾸만 헛감기고, 그러는 사이에 날이 저문다. 다음 시는 바로 이런 정황을 노래한 것이다.
 
 
취한 걸음 더딘 줄 몰랐었는데  
갈 길이 멀다고 말을 하누나.                
갈까마귀 너는 또 무슨 일이냐                
산 밖엔 어느새 석양이예요.                    
不知醉行緩  但道歸路長
寒鴉亦何事  山外是斜陽              백광훈
 
 
낮술에 발갛게 취한 걸음이 갈지자로 놓인다. 다급해진 종놈은 자꾸만 곁에서 갈 길이 멀다고 쫑알댄다. 갈까마귀마저도 서두르라 우짖는다. 3.4구는 문답이다. "네 이놈! 까마귀야 조용히 해라." "빨리 빨리 서둘러요. 밤이 옵니다."
 
 
강 가 바위 위에 취해 잠드니  
해는 져서 먼 산이 어둑하구나.                
앞 여울로 새 한마리 지나가는데               
안개 비에 수풀은 자옥 젖었네.                  
醉眠江上石 日落遠峯陰
獨鳥前灘過 沈沈烟雨林                백광훈
 
 
강가 경치에 취해 바위 위서 마신 술에 잠이 들었다. 깨고 보니 해는 이미 뉘엿하여 먼 뫼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외로운 새 한마리 앞 여울을 건넌다. 둥지를 찾아 깃드는게다. 나도 가야지. 그런데 안개 비에 수풀은 자옥히 젖어, 그 새를 파묻고 말았다. 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또 어디로 가야하나?
 
 
불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물이 곧 술이니라.
그래서 마시면 가슴이 타느니라. 물은 없어지고
불만 남느니라. 그 불 속에서 푸드득 한 마리
새가 날아가야 불은 꺼지고 아침이 되느니라.
 
 
박희진 시인의 〈술〉이란 작품이다. 물 속에 불이 들어 있는 것이 술이다. 멋진 표현이 아닌가. 그래서 술을 마시면 가슴에서 불이 난다. 물을 마셨는데 불이 나는 것이 술이다. 그 불을 끄려면 그 불 속에서 푸드득 새 한 마리를 꺼내 아침 하늘에 날려 보내야 하리라. 선문답 같다. 그런데 도도한 주흥은 환한 아침이 되었다 해도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세모의 외론 마을 눈은 펑펑 내리고 
대숲 아래 사립문은 낮에도 닫혀 있다.          
술 취해 이불 끼고 드러누워 있자니            
주인은 일어나라 남은 술을 권하누나.           
孤村歲暮雪개개 竹下柴扉午未開
中酒擁衾용不起  主人扶首勸餘杯             권필
 
 
눈이 펑펑 내렸다. 대숲 아래 사립문은 답쌓인 눈 때문에 열 수가 없다. 할 일이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 술이 낮부터 시작하여 밤을 새웠다. 취한 속에 이불을 끼고 누워 대낮까지 뒹굴고 있는데, 주인이 들어오더니 남은 술로 해장을 하자고 머리를 부축해 일으킨다. 
 
 
며칠을 연거푸 술을 마셔도  
오늘 아침 흥취가 거나하구나.                  
그대의 말이야 옳기야 옳지                    
그렇지만 국화 향을 어쩐단 말요.               
數日留連飮  今朝興又多
卿言也復是  奈此菊枝何                      권필
 
 
술에 절어 사는 그를 보다 못한 아내가 제발 술을 끊으라고 바가지를 긁자, 대답 대신 아내에게 써주었다는 시다. 며칠 계속해서 마셔댄 속인데도 아침 댓바람부터 한 잔 술 생각이 그득하다. 그런데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니 저 향기 그윽한 국화꽃에게나 가서 책임을 물어 따지라는 말씀이다.  
 
 
술 먹지 말자하고 큰 맹서 하였더니
잔 잡고 굽어 보니 선웃음 절로 나네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맹서 풀이 하오리라       실명씨
 
 
술 때문에 자꾸 실수가 생기니 단주(斷酒)의 결심을 단단히 했다. 지키지 못할 맹서인줄은 번연히 알았어도, 한 번 한 맹세이니 며칠은 가야할 것이 아닌가. 저도 몰래 손 내밀어 술잔을 잡고 보니 며칠 전 그 맹서가 객쩍기 짝이 없다. 에이 모르겠다. 넘치도록 술 부어라. 맹서 풀이 해보리라.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하매 남의 시비 모를러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리라             宋寅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는 시조도 있지만,  말 때문이 말이 생기는 말 많은 세상이다. 들은 말은 즉시 잊고 보고도 못 본듯이, 시비를 멀리하는 묘방이 아닌가. 약삭빠른 처세라고 나무라지 마라. 세상 길은 언제나 풍파 잘 날 없으니, 다만 성한 두 손으로 술잔이나 잡으리라.   
 
 
술도 먹으려니와 德 없으면 亂하나니
춤도 추려니와 禮 없으면 잡되나니
아마도 德禮를 지키면 만수무강 하리라       尹善道
 
 
한잔 술에도 덕이 있어야 한다. 춤을 추더라도 예가 있어야 한다. 덕 없이 마시는 술은 난잡하여 종당에는 亂身에 이르고, 예 없이 추는 춤은 추잡하여 끝내는 망신을 부른다. 예를 지켜 덕을 지녀 마시는 술과 춤이라야 삶에 활력이 되고 자양이 된다.

 
원나라 때 吳澄이란 이는 《輟耕錄》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만 바라는 바는 동이에 술이 비지 않고 부엌에 연기가 끊이지 않으며, 띠집이 새지 않고 베옷을 늘 입을 수 있으며, 숲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낚을 수 있다면 영화도 욕됨도 없이 즐거움이 매우 클 것이다. 이만하면 일생이 만족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옥황상제께서 들었다면 `그런 거 있으면 내가 하겠다 요놈아!` 하고 야단을 치실 말씀이다.

 
지금까지 옛 시조와 한시를 통해 술과 문학에 얽힌 실타래 같은 사연을 풀어 보았다. 선인들의 술자리에는 거나한 풍류가 있고, 따뜻한 체온이 있다. 지나침을 경계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돈후한 격조가 있다. 미희를 끼고 폭탄주에 취해 인사불성의 광태(狂態)를 서슴지 않는 오늘의 만용은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가? 알지 못할 일이다.
 
 

그밖에 술을 주제로 한 시조들
 
韓濩
짚 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이야 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李德馨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토록 먹으면서
萬古英雄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劉伶 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申欽
술 먹고 노는 일을 나도 왼 줄 알건마는
信陵君 무덤 위에 밭가는 줄 못보신가
백년이 亦草草 하니 아니 놀고 어이리
 
 
李安訥
천지를 帳幕 삼고 일월로 燈燭 삼아
北海를 휘어다가 酒樽에 대어두고
南極에 老人星 대하여 늙을 뉘를 모르리라
 
 
蔡裕後
다나 쓰나 이 탁주 좋고 대테 메운 질병들이 더욱 좋애
어론자 박구기를 둥둥 띄워 두고
아이야 절이김치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정철
재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단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희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고 일러라
 
 
실명씨
술은 뉘 삼기며 이별은 뉘 내신고
술 나자 이별 나자 이별 후에 술이 나니
취하고 님 이별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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