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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머리를 숭배한 천혜의 포구 전남 강진

醉月 2023. 3. 21. 13:42

소의 오른쪽 귀 옆의 위치에 있는 고성사 전경.

 

전남 강진(康津)읍에 가보니 읍내의 주산(主山)이 우두봉(牛頭峰)이었다. 소대가리 봉이라는 의미이다. 큰 소의 머리가 강진만 바다 쪽을 바라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냥 우두봉이 아니라 소 머리 주위에 여러 가지 ‘보조 장치’가 장착된 봉우리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장치? 우선 소 머리의 오른쪽 위치에 고성사(高聲寺)라는 절이 배치된 점이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세운 비보(裨補)사찰에 해당한다. 소의 오른쪽 귀에는 종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 종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오른쪽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름도 소리 ‘성(聲)’ 자를 써서 고성사라고 지은 셈이다.

 강진 우두봉 주변의 장치들

그렇다면 왼쪽 귀는 무엇이 있는가. ‘핑경’ 마을이 있다. 핑경은 풍경의 사투리이다. 소의 왼쪽 귀에 해당하는 부위에는 ‘핑경’이 들어간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소의 눈 부위에는 샘물이 있다. 왼쪽 눈 부위에 동문공동샘이 있는데, 동문샘 옆에는 유배왔던 다산이 임시로 머물렀던 주막집 행랑채 ‘사의재(四宜齋)’가 있다. 오른쪽 눈에는 서문공동샘이 있다. 오대산 적멸보궁 밑에는 용의 눈에 해당하는 용안수(龍眼水)라는 샘물이 있고, 구례 화엄사 구층암 위쪽의 봉명암에는 봉의 눈에 해당하는 봉안수(鳳眼水)라는 샘물이 있다. 강진의 샘물은 우안수(牛眼水)인 셈이다.

현재의 읍내 도서관 자리는 소의 코에 해당한다. 소의 입 앞부분에는 소가 뜯어 먹는 풀밭도 있다. 동네이름은 목리(牧里)이다. 목(牧)은 방목, 또는 목우(牧牛)의 뜻이다. 강진의료원에서 성전으로 나가는 부분이 ‘시끄테’라고 해서 소의 혀 부분이다. 시끄테는 혓바닥의 사투리이다. 솔치로 넘어가는 홍암마을 뒷산에는 귀밑재가 있는데, 소의 귀 아래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향교가 있는 목화마을은 원래 이름이 목아동(牧兒洞)이다. 소에게 풀을 먹이는 목동이라는 뜻이다. 동성리에는 소의 목 부위에 씌우는 멍에처럼 생겼다고 해서 멍에배미라는 논도 있다. 가장 결정적인 지명은 가우도(駕牛島)이다. 가마 ‘가(駕)’ 자이다. 강진만 중간에 여의도처럼 있는 섬이다. 지금은 출렁다리를 설치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 

가우도는 ‘소가 끄는 가마’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이 ‘학이 끄는 가마’이듯이 가우도라는 지명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강진은 온통 소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특이한 뉘앙스의 지역이다. 

왜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해발 300~400m의 나지막한 산을 소머리로 상징화하였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고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거대한 소머리를 얹어 놓고 강진만을 드나드는 뱃사람들, 즉 해상무역 종사자들의 안전과 사업번창을 위해 드리는 희생제물이 소 대가리이다. 

이 소 대가리 제물은 한 번 설치해 놓으면 자주 바꿀 필요가 없다. 몇천 년도 쭉 간다. 한국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 건물 낙성식을 할 때 고사를 드린다. 그 제물로는 소 머리가 최고이다. 소 머리 다음에 돼지 머리가 아니던가! 예로부터 큰 제사에는 소 대가리를 삶아 놓고 제사를 드렸다. 그 소 대가리 제사 전통을 가장 큰 규모로 보여주는 심벌이 바로 강진의 우두봉이라 할 수 있다. 그 우두봉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지명과 풍수적 비보(裨補)를 해 놓았던 것이다.

고성사 앞으로 강진만이 보인다.

 

장보고 시대부터 천혜의 포구

그 배경에는 강진만이 있다. 인체의 자궁과도 같은 형상이다. 바닷가에서 육지로 길쭉하게 들어갈 수 있다. 대략 20㎞의 길이나 될까. 만(灣)의 안으로 들어와서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포구가 남포(南浦, 南塘浦)였다. 남포는 자궁의 가장 안쪽에 해당한다. 바다로부터 들어온 물류가 최종 도착하는 포구이기도 하다. 이 남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봉우리가 바로 우두봉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강진만에 들어오는 모든 뱃사람들은 이 우두봉을 바라다보며 소원을 기원하고 안전 항해를 빌었을 것이다. 그 해상 물류 세력의 안전항해를 위하여 소 대가리를 모셔 놓았다고 보는 게 맞다. 말하자면 소신(神)을 섬겼던 증거이다. 

강진만은 천혜의 항구였다. 태풍을 피할 수 있고, 중국·일본과 항해를 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고대 해상무역의 요충지였다. 아울러 강진에서 제주도를 갈 때 물살이 센 울둘목을 피해서 갈 수 있는 안전한 항구가 바로 강진이었다. 그래서 편안할 ‘강(康)’이다. 편안하게 제주도를 왕래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강진의 강(康) 자가 들어간 이유는 제주도 갔다 오기에 편하다는 점이다. 제주도 가기 전에 추자도가 있는데, 이 추자도는 강진과 멸치젓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추자도 멸치가 거의 강진으로 왔다고 한다. 추자도 사람들이 죽으면 그 묘를 강진에 와서 쓰기도 했다. 그만큼 양쪽이 혼사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울러 강진은 해상왕 장보고의 본부가 있었던 완도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완도가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강진만 입구의 해운(海運) 요지에 있는 섬이었다. 강진만의 대문 위치에 있다. 장보고 시대에 강진만을 드나들던 모든 배들은 완도를 거쳤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 때에는 강진이 고급 도자기인 청자의 주생산지가 되면서 돈이 되는 물류의 중심으로 여전히 기능을 했다. 조류와 바람의 방향만 맞으면 강진에서 도자기를 실은 배가 개성까지 도달하는 데 3박4일이면 가능했다고 한다. 장보고 이전의 고대부터 장보고를 거쳐, 다시 고려시대를 거치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바다 장사꾼들이 강진만을 드나들었다. 이 뱃사람들이 우두봉을 종교적으로 의지하고 신봉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뱃사람들의 종교적 귀의 대상

종교사적으로 볼 때 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바다의 신은 전통적으로 용(龍)이었다. 용왕이 대표적이다. 중세 유럽의 지중해권 해상 물류를 장악해서 잘 먹고 잘 살았던 베네치아 왕국도 바다의 신으로 용을 숭배했던 전통이 남아 있다. 이 용이 불교로 편입되면서 관세음보살 ‘시다바리’로 자리 잡았다. 바다의 파도 위에서 해수관음이 용을 타고 있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불교는 해수관음이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이었는데, 이 해수관음이 용을 타고 있는 것이다.

소는 바다의 신이라기보다는 풍요의 신이었다. 재물의 신이었다. 3만~4만년 전 인도네시아의 동굴에서 발견되는 원시 벽화에 그려진 주요 동물이 소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 야생 소를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차탈휘익의 7000~8000년 전 그림 주제 역시 소다. 소를 잡으면 수백 명이 먹을 수 있는 단백질이 공급되는 셈이다. 그만큼 고대부터 소는 먹거리로 중요했다.

로마에서도 기독교가 국교화되기 전까지는 미트라교(Mithraism)를 믿었다. 미트라 신앙에서는 핵심의례가 소를 도살하는 의례이다. 수소를 도살하는 것이 태양신 미트라의 권력이었다. 소를 도살하는 행위는 성우공양(聖牛供養)이라고 한다. 이 미트라 신앙은 원래 중동의 페르시아 지방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에서 로마에 흘러들어 갔다고 본다. 

수소를 잡는 행위는 빛과 생명의 재생을 상징한다. 소가 죽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명력이 해방되는 모습이고, 이 해방으로 인하여 소를 도살하는 행위가 나중에 쇼의 형태를 띠면서 스페인의 투우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민병훈 ‘유라시아 십이지문화’ 참조)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소의 역할은 바뀐다. 인간 대신에 쟁기질을 해주고 수레를 끌어주면서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동물로 바뀐 것이다. 유목문화보다는 농경문화 쪽에서 소에 대한 대접이 바뀌었다. 유목 사회에서 소는 인간이 먹는 육식의 대상이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또 다른 역할을 부여 받는다.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쟁기질이 많이 필요하다. 한반도에서도 농사일을 소가 하였기 때문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육식을 싫어하는 불교권에서는 소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을 상징한다. 무의식은 아주 힘이 세다. 이 힘센 무의식을 길들이는 것이 수행이다. 절에 가면 벽면에다가 그려 놓은 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이 이를 표현한다. 인도에서는 소를 숭배하기까지 한다. 불교의 ‘능엄경’에서는 대력백우(大力白牛)를 이야기한다. 힘이 센 흰소를 길들여라!

 

미트라 신앙까지 연결되는 소머리 제사

미트라 신앙이 불교권에 들어와 비사문천(毘沙門天)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는 게 정설이다. 절 입구의 사천왕 가운데 북쪽을 담당한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비사문천이기도 하다. 로마의 미트라가 동쪽의 불교권으로 들어와서 비사문천, 다문천왕으로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 공통점은 소에 대한 숭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태백산을 원래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태백산 정상에 사당이 있고, 봄가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 이때 제물로 소를 바친다고 되어 있다. 신당 앞에 소를 매어두고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이 도망한다. 3일 후에 관청에서 그 소를 다시 잡아서 도살한다. 이를 퇴우(退牛)라고 한다는 것이다.

강진읍내 우두봉의 기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미트라 신앙까지 연결된다고 본다. 그 유래가 매우 깊다. 풍요의 신으로 소 대가리를 모셔 놓은 것이다. 그 풍요는 바로 강진이 해상무역의 도시이고, 상업의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다. 바다의 상인들이 숭배했던 신앙 대상이 소였다. 그래서 소의 눈과 혓바닥, 귀, 코앞, 귀밑 등등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에서 소에다가 지명을 묘사한 곳이 여러 군데 있지만 상주의 우복동(牛腹洞)과 강진만의 우두봉(牛頭峰)이 가장 주목된다. 우복동은 소의 배처럼 편안한 곳이라는 뜻이다. 난리 났을 때 피난 가면 살 수 있는 십승지의 대표선수가 바로 우복동이다. 소의 뱃속으로 가면 편안하다는 민초들의 믿음을 대변하는 곳이 우복동이라면 소 대가리를 모셔 놓고 상인들이 안전과 재물을 기원했던 곳이 강진이다. 우복동은 산속에 있고, 우두봉은 바닷가에 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