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중국 위왕에 얽힌 허풍스러운 전설을 덜어낸다고 해도 고흥의 팔영산은 남녘의 바다를 조망하는 산 중에서 으뜸의 자리를 넘볼 만하다. 고흥은 봉래산, 천등산, 마복산 등 기암으로 솟은 산과 넓고 기름진 갯벌,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다도해를 두루 품고 있지만, 고흥 10경 중에서 팔영산이 제 1경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팔영산은 고흥의 산이 아니라, 고흥 전체를 대표한다. 세어보지 않았지만, 고흥읍과 인근 면 소재지의 수많은 간판의 상호 가운데 ‘우주’를 빼고 나면 ‘팔영’이란 이름이 가장 많으리라. 분식점도, 당구장도, 구멍가게도 ‘팔영’의 이름을 달고 있다. 고흥의 외나로도에 우주센터가 들어선 이후 모텔마저 이름으로 가져다 쓰고 있는 ‘우주’만큼은 감히 넘볼 수 없지만 말이다.
팔영산이란 이름은 여덟 개의 암봉을 의미하지만, 사실 암봉의 숫자는 그보다 두어 개 더 많다. 산 아래서 산정에 뚜렷하게 보이는 암봉을 헤아린 숫자가 여덟이고, 등산로로 한데 붙여서 오르는 봉우리가 여덟이다. 보통 능가사 앞의 주차장에서 출발해 흔들바위를 거쳐 1봉부터 8봉까지를 순서대로 오르고, 탑재 쪽으로 내려와 원점으로 회귀하는 게 일반적인 코스. 보통 4시간 30분쯤 걸린다. 이게 좀 벅차다면 해발 300m쯤 되는 팔영산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해 8봉에 오른 뒤 1봉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걸으면 3시간이면 넉넉하다. 팔영산 등산의 매력은 8할이 조망이고 나머지가 암봉을 짚고 오르내리는 재미다. 남북으로 나란한 8개 봉우리의 이름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암봉을 오르는 맛이 좋다. ‘선비의 그림자’를 뜻하는 제1봉 유영봉(儒影峰)에서 ‘비췻빛 푸르름이 쌓였다’는 8봉 ‘적취봉(積翠峰)’에 이르기까지 모든 봉우리마다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여덟 개 봉우리 중에서 가장 장쾌한 경관이 펼쳐지는 자리가 제6봉인 두류봉이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봉우리는? 뜻밖에도 팔영산의 정상은 8개의 암봉 중에는 없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8봉에서 능선길로 20분쯤 더 가서 만나는 깃대봉(609m)이다. 능선을 바다 쪽으로 내밀고 있는 깃대봉에 서면 고흥 동남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팔영산의 조망이 빼어나다는 건 남북으로 나란한 8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내내 동쪽으로는 여자만 바다가, 남쪽으로는 나로도 일대의 바다가
비단폭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의 여자만 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경관도 압도적이고, 한낮의 나로도 일대 바다가 햇볕에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모습도 황홀하다. 시계가 또렷한 날이라면 거문도와 손죽도, 초도 등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가을이 더 깊어져 일교차가 커지면
점점이 떠 있는 섬의 아랫도리를 감는 해무가 또 몽환적이다. 이즈음이라면 더 압도적인 것이 해창만 일대의 익어가는 논의 모습이다. 발아래로
누렇게 익은 벼들이 너른 들에 물결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해창만의 들녘에 노란색이 더 짙어져 팔영산에서의 조망은 하루하루 더 아름다워진다.
# 풍요의 들판에 절망과 슬픔이 스미다…오마도간척지
고흥의 가을을 빛나게 치장하는 들녁 가운데 하나인 고흥의 오마도는 소록도와 함께 한센인들의 절망과 슬픔이 묻혀있는 곳이다. 녹동항에서 해안도로를 끼고 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금세 만나게 되는 오마도 간척지. 이제 막 초록에서 노란빛으로 익어가는 벼들이 물결치는 이 풍요의 들판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무대가 된 곳이다. 말 모양의 섬 다섯 개를 메워 만든 여의도 면적의 3배에 이르는 1100만여㎡(330만 평)의 오마도 간척지는 50여 년 전 소록도 한센인들의 고된 노동과 간절한 희망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소록도의 한센인들은 1962년부터 3년여 동안 소록도 북쪽 풍양반도에서 도양읍 봉암반도까지 2㎞가 훨씬 넘는 바다를 맨손으로 닫아 오마도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한센병 음성환자 2000명이 2개의 작업대로 나누어 교대로 한 달씩 일했다. 당시 소록도 주민 5000명 중 음성환자는 3300명. 이 가운데 작업이 가능한 인원이 2000명 정도였다니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나섰던 셈이었다. 지급된 장비는 삽과 손수레뿐. 대나무와 소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수심 8m가 넘는 바다에 박아놓으면 이튿날 펄 속으로 다 잠겨버렸고, 인근의 산에서 캐낸 흙과 바위를 리어카로 실어 바다에 퍼부으면 밀물의 바다가 이내 흙을 육지 쪽으로 밀어붙였다. 사다리를 다시 짜서 바다에 넣고 밀려 나간 흙을 허물어 다시 바다에 넣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천신만고 끝에 막은 제방도 허망하게 터져버렸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이었다. 부상자는 속출했고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센인들은 왜 이런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정착’이었다. 완치돼 전염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음성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병원으로부터 귀향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향했던 이들은 십중팔구 다 병원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가족마저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간척사업을 주도했던 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61년에 부임한 군 출신의 조창원 소록도병원장이었다. 조 원장은 완치돼도 돌아갈 곳이 없는 한센인들에게 바다 간척사업에 나서면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소록도를 떠나 육지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한센병 환자들은 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치유되지 않을 상처의 시작이 이랬다.
# 가장 불쌍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 그러나 물막이 공정이 80~90%가 끝났을 무렵, 정부는 돌연 간척지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모두 내쫓았다. 총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한센병 환자와는 함께 살 수 없다’고 반대하던 간척지 주변 주민들의 민원에 굴복했던 것이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땅을 만들어 살고자 했던 한센인들의 꿈은 이렇듯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소외된 병자들을 국가가 주도하는 건설사업에 동원했던 것이나 약속을 저버리고 파렴치하게 마지막 꿈마저 빼앗았던 건 무자비한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폭력에 유린당한 이들은 이 땅에서 가장 낮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긴 제방 안쪽의 간척지는 지금 풍요로 출렁거리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논의 누렇게 익은 벼가 가을 햇볕에 형광빛으로 빛났고, 그 너머의 마을들은 적막한 평화로 가득 차 있었다. 유일하게 당시의 폭력을 증거하는 곳이 방조제 제방 끝 간척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한센인 추모공원이다. 공원에는 당시의 고된 노동 장면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함께 방조제 건설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한센인들을 위로하는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위령탑 아래에는 돔 형식으로 지어진 작은 테마관이 있다. 거기에는 방조제 건설 당시의 사진들과 함께 김형주 한센인 개척단 부단장이 간척지에서 쫓겨날 당시에 썼던 울분과 분노에 찬 글이 아프게 새겨져 있다.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오마도 간척공사가) 세계적인 대 기만극으로 막을 내렸기에 여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이쯤에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한 구절을 다시 읽어본다.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지 50여 년이 지난 2012년에야 뒤늦게 오마도 간척지에 한센인 추모공원이 세워졌다. 반세기의 시간이 흘렀지만
한센인들의 깊은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한센인의 날을 맞아 추모공원을 찾은 한센인총연합회 회원들의 헌화와 분향행사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귀띔. 이날 한센인 후손들은, 피땀 흘려 제방공사를 했으나 땅 한 평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뜬 이들의 위령탑 앞에서 ‘우리는
분향할 자격도 없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 해창만, 가난으로 만들어 낸 풍요의 땅 고흥의 간척지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동쪽의 해창만이다. 바다를 막은 방조제 쪽의 너른 평야에는 수로의 물길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어 해가 뜨고 저물 때마다 붉은 기운이 거기 담긴다. 수로가 한데 모이는 기수역 물가에서는 어린 숭어들이 물수제비를 뜨듯 여기저기서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그 너머로 옥대도, 조도, 취도, 와도, 동도, 대섬…. 도합 스무 개가 넘었다는 섬이 죄다 육지가 돼서 평야에 작은 산처럼 솟아있었다. 그 사이로 난 자로 잰듯한 길들이 까마득하게 소실점으로 사라졌다.
오마만의 간척이 한센병 환자들의 억울함으로 쌓은 것이었다면, 해창만의 간척은 도시빈민들의 가난으로 쌓은 것이었다. 해창만 간척은 일제시대부터 수차례 사업이 추진되다가 비로소 1962년 군부정권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번째 목표이던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해 추진됐다. 본격 간척공사가 이뤄진 것은 1964년. 간척은 정부의 자조근로사업으로 진행됐다. 바다를 가로질러 2.9㎞와 3.6㎞짜리 두 개의 방조제를 세우는 대공사였다. 간척공사에는 3050가구의 영세민들이 동원됐다. 이들 중에는 정부가 선발한 서울의 도시 빈민들도 끼어있었다. 정부는 간척사업에서 일하는 대가로 집과 땅을 나눠주기로 하고 서울에서 200가구의 빈민을 모집해 간척지별로 50가구씩을 이주시켰다. 당시 해창만 간척지에도 이런 과정을 거쳐 50가구가 내려와 포두면 길두리의 덕촌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땅이 하늘’이었던 시절이라, 자원자들이 쇄도했다. 그러나 공사현장에서 맞닥뜨린 노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지게로, 또 밀차로 돌과 흙을 퍼나르던 노동도 힘이 들었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건 오전 4시쯤 일어나 1시간 반 동안 산길을 걸어서 공사 현장에 당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오후 7시쯤 일이 끝나면 다시 그만큼을 걸어 캄캄한 밤에나 집에 돌아왔다.
덕촌마을은 아직 간척사업이 이뤄졌던 50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50여 가구 중에서 7~8가구는 당시 이주해 온 그 집을 여태 지키며 살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오순태(84) 씨도 그중 하나다. 무슨 큰 특혜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어찌어찌 영세민 선발에 응모해 슬쩍 끼어 서울에서 온 기자가 고된 노동에 두 달 만에 손을 들고 나간 빈자리를 운 좋게 잡았다고 했다. 당시 한 달 품삯은 1400원. 입에 겨우 풀칠하기도 어려운 정도의 돈이었다니 도합 4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가혹하고 위험했던 노동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었다. 오 씨는 당시 이웃들 중에서는 남편이 일을 하러 간 사이에 아녀자는 마을을 돌며 구걸을 나가는 집들도 적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래도 간혹 배급으로 내주던 밀가루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그 밀가루를 하루라도 더 타 먹으러 직선으로 이으면 곧 끝날 방조제 공사를 갖은 이유를 대서 내만 안쪽으로 방조제를 끌고 들어와서는 활처럼 휘어지게 공사를 했다고 했다. 하루라도 더 공사를 해야 밀가루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으니 갖은 수를 써서 공사기간을 늘렸던 것이다. 먹을 것과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떤 노동이라도 마다치 않았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오마만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이 다 쫓겨났지만, 해창만의 도시 빈민들은 3년 만에 간척지의 땅 9917㎡(3000평)씩을 받았다. 갯돌이 뒹굴고 모래까지 섞인 척박한 땅이었지만, 내 땅의 꿈을 이뤘다. 이렇게 얻은 제 땅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오 씨는 땅을 받은 날, 아내와 그 땅 앞에서 밤을 새웠다고 했다. 나락이 여물고 있는 해창만 방조제 안쪽의 적지 않은 땅이 이렇게 가난으로 일구어 감격으로 얻어진 것들이었다. 오 씨와 함께 들판으로 나가 그가 처음 제 땅을 받았던 자리에 서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의 물결을 바라보노라니 콧날이 시큰해졌다. 땅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열망이 감동적인 건 중년 이상의 세대들이라면 너나없이 뿌리를 농촌에 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모두들 건너왔던
가난했던 시절이 추억의 이름으로 가슴에 인장처럼 찍혀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즐겨보려던 것이,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눈물과 가난으로 일군 땅이 지금 모두 다 풍요로운 가을이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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