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색의 등대 앞에 서서 남쪽의 바다를 내다봅니다. 등대 주위의 바람을 막는 시멘트 담에 창문처럼 내놓은 사각의 공간이 그대로 액자가 됩니다. 그 액자 안에 옥빛 바다 위에 용이 꼬리를 담그고 있는 형상을 한 여수의 땅끝 ‘소룡단’이 그림처럼 담겼습니다. 그림 주위로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가 배경처럼 펼쳐졌고, 반짝이는 바다 위를 삼치잡이 배와 멸치떼를 쫓는 기선권현망 선단이 미끄러졌습니다. 전남 여수 금오열도의 남쪽 끝에 아슬아슬 매달린 섬. 이곳은 소리도입니다. 섬의 형상이 솔개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솔개 연(鳶)’자를 쓰는 ‘연도’란 행정 명칭이 버젓이 있음에도, 다들 이 섬을 소리도라고 부릅니다. 연도라는 한자 이름이 붙여진 게 조선 태조 때. 줄잡아 60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여태 소리도라 부르니 섬사람들의 고집이 보통은 아닙니다. 소리도는 육지와 멀어서 더 아름다워진 섬입니다. 기력이 쇠한 바다와 척박한 땅을 끝내 떠나지 않고 고집스럽게 섬을 지키고 있는 소리도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갯것을 거두어 공평하게 나눠가며 살고 있었습니다. 먼바다가 데려온 거친 파도로 조각한 소리도의 해안 경관도 훌륭했고, 빼어난 풍경마다 실타래처럼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섬에서 정말로 아름다웠던 건 소박한 섬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섬에서 잊을 수 없었던 건 마을 대소사 때나 차려내는 밥상이었습니다. 갖가지 해물로 가히 ‘최고의 밥상’이라 일컬을 만큼 호화로웠지만, 수저를 들며 울컥했던 건 함께 나누는 그 밥상이 섬사람들의 고된 울력과 수고로 차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소리도는 멀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전남 여수의 소리도는 ‘앞바다’다. 기상청은 지난해 12월 10일부터 소리도를 ‘여수 먼바다’에서 ‘여수 앞바다’로 편입했다. 그날부터 소리도의 기상은 ‘앞바다’의 예보에 따른다. 소리도 사람들은 이만한 일로도 감격했다. 육지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도, 뱃길이 짧아진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늘 아득한 ‘먼바다’였던 섬이 ‘앞바다’로 불리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섬사람들은 자랑스러워했다. 섬 주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소리도는 아직도 여전히 멀다. 먼저 여수. 수도권에서 여수까지만 해도 얼마나 먼 길인가. 그 길 끝의 여수항에서 다시 배로 두 시간을 더 가야 소리도에 닿는다. 여수항에서 직선거리는 40㎞. 여객선이래야 하루 두 편이 고작인 데다, 그마저도 이 섬과 저 섬을 다 들러 가는 ‘완행’ 배가 운항하는지라 두 시간이 꼬박 걸린다. 그럼에도 소리도를 찾아가는 첫 번째 이유는 ‘멀다’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육지와의 먼 거리는 섬을 섬답게 만든다. 육지 사람들에게 ‘외딴 섬 여행’의 로망은 도피, 혹은 탈출을 의미한다. ‘고립된 섬’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피신이 되는, 갇히는 것이 곧 탈출이 되는 역설이다. 육지 사람들에게 섬 여행이란 그렇다. 그래서 섬에서 기대하게 되는 건 번잡한 일상과 이어진 끈을 다 끊어낸 ‘칩거의 시간’이다. 그래 봐야 고작 하루나 이틀쯤의 짧은 시간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자면 섬은 멀어야 맞다. 멀어야 더 또렷하고, 멀어야 더 맑다. 여수에서 금오도와 안도를 거쳐 소리도로 들어가는 이른 아침의 뱃길은 부드러웠다. 가을은 바다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바람이 제법 찼다. 밤새 삼치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작은 어선들이 아침 햇살에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가르며 돌아오고 있었다. 멸치떼의 회유를 막아선 기선권현망 선단을 뒤따르던 가공선에서는 갓 잡은 멸치를 삶아내는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게 섬인지 육지인지 모를 만큼 커다란 섬, 금오도를 지나고 바다 한가운데 부유하듯 떠있는 작은 섬들을 지난다. 먼바다 파도가 깊이 일렁이기 시작하자마자 소리도의 깊숙한 내만으로 배가 들어갔다. 내만의 바다는 바닷속이 훤히 비치는 쪽빛이었다. 내만 뒤쪽으로 처마 낮은 집들이 먼바다의 거친 바람을 피해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먼 섬에 걸맞은 비밀스러운 항구. 바로 소리도의 연도리 항구였다.
# 소리도는 맛있다 소리도는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섬이다. 섬의 면적은 4.82㎢. 서울 여의도의 1.5배가 좀 넘는다. 먼 섬치고는 그래도 큰 축에 속하지만, 섬의 인구가 355명이니 작은 섬이다. 이것도 서류상 거주인구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섬 안에 사는 이들은 151가구, 211명에 불과하다. 한데 연도마을회관 안의 현황표에 적어놓은 인구는 500명이다. 언제 써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되, 그새 절반 이상의 인구가 줄어든 셈이다. 먼바다의 다른 섬들이 대개 그렇듯, 소리도도 한때 고기잡이로 흥청거렸던 때가 있었다. 근해에서 낚시로 허벅지만 한 굵기의 삼치를 배 한가득 싣고 돌아오던 때였다. 소리도에서 잡은 삼치는 잡아내기 바쁘게 일본으로 수출됐다. 그러나 시간은 섬사람의 편이 아니었다. 삼치떼는 떠나버렸고, 그나마 연안에서 소형 어선으로 유지해오던 고대구리(소형 저인망 어선) 어업마저 금지되면서 섬은 쇠락했다. 게다가 20년 전 이 섬의 앞바다에서 씨프린스호가 좌초되는 사고가 났다. 배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범벅이 된 바다 앞에서 섬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해안으로 밀려 들어온 기름을 닦아내다 지쳐버린 이웃들은 섬을 떠났다. 나가면 살길이 막막해서, 또 고향을 등질 수 없어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만 섬에 남았다. 소리도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들이 더 많다. 섬에는 식당이 단 한 곳도 없다. 술집도 다방도 섬에는 없다. 이게 불편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소리도에는 대여섯 곳의 민박집이 있다. 여행객들은 적지만 그나마 발길이 잦은 낚시꾼들을 받으려 방을 내준 집들이다. 밥은 식당 대신 민박집에서 차려낸다. 돈 받고 밥 내주는 식당 음식이 아니라, 섬사람들이 제 밥상에다 수저를 하나 더 올리는 식으로 차려내는 진짜 섬마을 밥상이다. 운이 좋다면 다른 데서는 흔히 맛보지 못할 상을 받을 수도 있다. 소리도에서는 다섯 명의 해녀가 물질을 하는데, 마침 물질 때에 맞춰 가서 청한다면 갓 잡은 손바닥만 한 자연산 홍합이며 전복 따위를 상에 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아주 드문 일이겠지만 마침 섬사람의 결혼식이 있다면 돈 주고도 맛볼 수 없는,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상을 받을 수 있다. 섬 안에 혼인이 있으면 연안에서 갓 잡은 생선회와 홍합과 전복, 소라는 물론이고 주민들이 울력으로 갯가에서 뜯어 일일이 손질해서 솜씨 좋게 무쳐낸 배말과 거북손, 곰봇 따위를 맛볼 수 있다. 섬을 찾아간 날에 마침 이런 상을 받았는데, 감히 ‘일생 최고의 밥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성찬이었다. “외지인이 얼마를 내면 이런 밥상을 차려주느냐”고 연도리 이장을 붙잡고 채근하며 물었더니 여간 난처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 전체가 동원되는 울력으로 거두고 차린 음식들이라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얘기였다. 소리도에서는 공동분배의 규약이 있다. 규약에 따라 해녀가 물질을 하거나 갯가를 뒤져 거둬들인 것들을 마을 전체 가구가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해녀들은 섬 주변에서 제가 거둬들인 것들을 마을 공동의 수입으로 내놓고 일당만 받고 있으니, 소리도에서는 남획이란 없다. 갯것의 수확뿐만이 아니었다. 한 해 두 번 치르는 경로회 잔치도 수입이 좀 나은 이들 몇몇이 비용을 쾌척해서 상을 차리는 게 전통이다. 혼자 된 할아버지를 위해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반찬을 만들어서 매주 목요일에 나누어주기도 한다. 소리도의 나눔은 형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육지와 ‘멀다’는 이유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 소리도는 아름답다 경관 대신 다른 얘기를 앞세웠지만 소리도가 보여주는 풍경도 빼어나다. 먼저 소리도 등대부터. 한일병합이 되던 해인 1910년 세워진 소리도 등대는 여느 해안의 등대처럼 우람하지 않다. 등탑의 높이는 9m 남짓. 하지만 먼바다의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 단애를 이루는 섬 동남쪽 끝 해발 82m의 절벽에 자리 잡고 있어 해수면에서의 높이로 재면 90m가 넘는다. 이쯤은 돼야 거친 망망대해에서 길잡이 노릇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연도마을에서 가볍게 언덕을 넘어 덕포마을의 자갈 해변을 지나 등대로 이어지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다. 울창한 상록 활엽수림 사이로 난 숲길을 포장도로 대신 넓적한 구들돌을 깔아 잔디를 입혔다. 그 길은 지금 한창 꽃을 피워낸 누리장나무의 짙은 향기가 안내한다. 숲길에는 산무화과라고 불리는 천선과의 열매도 잘 익어서 지천이다. 이런 길이 더 길었으면 싶은데 금세 소리도 등대다. 순백색의 육각형 콘크리트로 지어진 등대는 아담하다. 거친 파도만큼이나 바람이 센지 등대 앞에는 높은 시멘트 담장을 세워놓았다. 담장에는 바다를 내다볼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그 구멍이 액자가 돼서 남쪽으로 길게 밀고 나간 섬의 끝자락 ‘소룡단’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그 안에 담겼다. 소룡단. 작은 용의 꼬리 형상을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작은 용이 있으면 큰 용도 있을 터. 등대가 앉은 자리가 바로 대룡단이다. 등대에서 소룡단의 곶 끝까지 나무 덱 탐방로가 이어져 있다. 그 길에서는 콧구멍처럼 뚫려 바닷물이 들고나는 쌍굴이 내려다보인다. 솔숲 우거진 등쪽에는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다. 용의 잔등을 밟고 양옆으로 바다를 끼고 걷는 길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옥빛이었다. 어디 이곳뿐일까. 연도마을 내만 쪽의 코끼리가 바닷물을 마시는 형상의 코바위도, 방목 흑염소들이 야생동물이 돼서 겅중거리는 가파른 바위 벼랑 무섭이의 경관도 인상적이다. # 소리도의 보물이야기 소리도의 아름다움은 이야기와 잘 겹쳐진다. 연도란 한자 이름 대신 ‘소리도’란 이름을 지켜왔듯이 섬 곳곳에는 옛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노루빠진굴, 고추가루, 예쁜바위, 가랑포, 째진곳, 무섭이, 큰도둑놈집터……. 이름만으로도 어떤 지형인지, 무슨 얘기를 담고 있는지 대충 짚이는 이름들이다. 먼바다 쪽의 파도를 받는 섬의 남쪽과 동쪽에 특히 이런 이름이 많다. 기암괴석의 경관마다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등대 직벽 아래의 솔팽이굴에 깃들어있다. 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김만옥(68) 씨에게 들은 잘 믿기지 않는 영화 같은 보물섬 이야기. 때는 1627년. 네덜란드의 상선이 일본에서 황금을 싣고 인도네시아 식민기지로 가던 중 해적선에 쫓기다가 소리도의 솔팽이굴에 황금을 숨겨두고 도망쳤다. 그때 선원 중의 한 명이 보물을 숨긴 곳을 성경책에 지도로 표시해두었다. 그리고 350여 년이 흐른 뒤 미국 국적의 네덜란드인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성경책 속의 지도를 가지고 왔단다. 그 얘기를 소리도 출신의 병사가 듣게 됐다. 병사는 제대 후 동굴탐사를 해보았으나 동굴 안쪽이 막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 보물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걸 그저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던 것은 김 씨가 카투사 병사의 이름이 ‘손연수’이며, 성경책의 지도에 적혀 있었던 섬 이름이 ‘SOJIDO(소지도)’였다고 또박또박 댔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뒤로도 섬 주민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내려온 탐사대와 인근 군부대 장병들까지 여러 차례 보물찾기를 시도했지만 굴 끝이 바위로 닫혀있어 보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단다. 바다를 끼고 있는 소리도 바깥의 자연경관도 훌륭하지만, 섬 안의 낡고 오래된 소박한 풍경도 그 못지않다. 골목의 옛 돌담이며 행여 거센 바닷바람에 지붕이 날아갈까, 그물로 붙잡아 매두거나 슬레이트 지붕 위에다 팔뚝만 한 굵기의 밧줄을 올려둔 집들이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다. 느티나무 우거진 당산 숲으로 이어지는 작은 천변에는 서툰 솜씨로 바위를 쪼아서 쓴 ‘박정희 대통령 하사금’ 비석이 남아있다. 자그마한 하천을 정비한 기념비인데 대통령이 직접 하사금을 내렸을 리는 없고, 정부의 쥐꼬리만 한 돈을 받아 진행된 사업이었을 텐데 그게 그렇게도 고마웠던 모양이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기울어가는 살림에도 저희끼리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온 섬사람들이 지나온 시간들. 소리도 마을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먼 바닷길 너머의 섬이어서, 오래 가난했던 섬이어서 여태 남아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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