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 모양의 건물이 서 있는 곳이 삼천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널공원이다.
공원과 해안도로 사이에는 공원에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수직엘리베이터와 스카이브리지를 연결해 만든 ‘청널문화오름’을 설치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속담은 잊어줘요”… 매력 만점 소도시 삼천포
‘사천8경’꼽히는 실안도로 낙조
바다 보이는 극장 등 낭만 가득
삼천포종합시장 ‘오일장’ 난전
홍콩 뒷골목 연상 이국적 풍경
삼천포 출신 ‘박재삼거리’ 이어
최근 트로트가수 ‘박서진길’도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 타고
볼거리 많은 작은 섬 ‘늑도’로
관람차·회전목마 품은 동물원
국내 딱 한마리뿐인 새 ‘슈빌’
수족관서 수영하는 ‘하마’등
희귀 생물들 구경할 수 있어
사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누구나 안다. ‘잘 나가다가…’로 시작하는 삼천포(三千浦)와 관련한 속담 말이다. 삼천포와 사천이 통합할 때 ‘삼천포시’ 대신 ‘사천시’가 된 것도, 이 속담의 부정적인 인식 탓이 컸다. 한국방송윤리위원회가 1977년 방송에서 이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했고, 상경시위까지 벌인 지역주민의 반발로 쓰지 말자고 오래전부터 말해왔음에도 이 속담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세대가 지난 아직도 공동의 기억 속에 굳건하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의 유래라고 알려진 게 열 가지쯤 된다. 삼천포행 열차 때문이란 얘기도 있고, 진주에 가려던 장사꾼 얘기, 부대로 복귀하려던 해군 얘기까지 다양하다. 속담 속의 삼천포는 ‘잘 못 간 곳’이다. 그냥 잘 못 간 게 아니라, 거기 가게 된 게 ‘낭패’에 가까운 장소다. 열차를 잘못 탔던, 진주를 가려던 장사꾼이든, 원대복귀가 늦어진 해군이든, 그들이 길을 잃은 건 삼천포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 잘 나가서 삼천포에 빠지다
가 보면 안다. 삼천포는 매력적인 소도시다. 남쪽 바다 특유의 독특한 서정이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삼천포가 매력적인 건, 스스로 그 매력을 잘 몰라서다. 삼천포 사람들은 정이 많지만 투박하되 셈이 빠르지 않다. 지역도, 사람도 뻐기거나 젠체하는 약삭빠른 관광지 느낌이 아니다.
삼천포 사람들은 제 자랑을 잘 못할 뿐만 아니라 남의 칭찬도 그냥 들어주는 법이 없다. 대꾸는 한결같다. “어데예?” 겸양과 쑥스러움이다. ‘여긴(삼천포에는) 암것(아무것)도 없다’지만, 이런 사람들일수록 속 깊은 고향 사랑이 깊은 법. 그런 그들에게 삼천포행(行)을 낭패처럼 말했으니 왜 화가 나지 않았을까.
항의도 하고 시위도 해봤지만 속담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삼천포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속담을 바꿔보자. 먼저 ‘잘 나가다가’를 지우고, 삼천포 뒤에 붙는 조사는 ‘로’에서 ‘에’로 바꿨다. ‘삼천포로 빠지다’가 아니라 ‘삼천포에 빠지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샛길로 빠지는’ 게 아니라 ‘매력에 빠지는’ 곳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잘 나가서’ 푹 빠지게 되는 삼천포의 매력 이야기다.
노산공원 아래 해변 갯바위에 설치한 ‘삼천포아가씨’ 동상.
삼천포아가씨는 은방울자매가 불러 히트한 노래다.
# 노을의 바다를 끼고 이어진 길
삼천포에 가려면 바다를 끼고 있는 동네 실안동을 지난다. 실안동이 끼고 있는 사천만의 바다는 ‘노을의 바다’다. 해질 무렵에 실안해안도로를 달리면 오른쪽 옆구리 쪽 바다와 하늘이 온통 다 붉게 젖는다. 이곳의 노을은 이름까지 따로 있다. ‘실안낙조’다. 실안해안도로에서 죽방렴 말뚝 너머로 해지는 낙조 풍경을 이렇게 부른다. ‘사천 8경’ 중 하나다.
먼저 길 얘기부터. 삼천포 실안해안도로는 ‘무지개 도로’라고 불린다. 해안도로의 톱니 같은 경계석에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을 칠했다. 무지개색 경계석의 미감은, 낭만적이라는 사람도 있고 촌스럽다는 이들도 있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뭔가 돋보이도록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으로 실안해안도로 주변에 만들어 놓은 게 제법 많다.
그중 하나가 노을 전망대다. 해안의 바다 쪽에 길과 나란한 다리를 놓아 산책코스를 만들고 ‘노을 전망대’라는 명패를 달았다. 차로가 아니라 바다로 이어진 보행 전용 도로 위에서 마음껏 낙조를 감상하라는 뜻이다. 허전할까 걱정스러웠는지 다리 한가운데 전망공간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의 조형물을 세웠다. 기둥을 친친 감고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두 마리 용의 기세가 자못 비장하긴 한데, 노을의 정서와도 맞지 않는 듯하고, 삼천포의 정서와도 좀체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올해가 ‘용의 해’이니 시의적절하긴 하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용현면 주문마을 해변에서 사천해전 전망교를 만난다. 사천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킨 전투다. 전망교는 바다로 뻗어 나간 다리다. 해전을 전망한다지만, 다리 끝까지 가서 보는 건 암초 ‘덩덕궁 바위’다. 지리산의 산신 마고 할미가 남해로 가던 중에 앉아 쉬었던 곳이란다. 암초에는 사람 궁둥이가 꼭 들어맞는 모양의 자국이 있다는데, 바위 아래 구멍이 있어 인근 마을에서 거문고를 타면 이 구멍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있다. 호기심으로 구멍에 머리를 넣었던 이가 마고 할미에게 잡혀 빨려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안해안도로에서 바다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해안도로 어디서든 사천만의 바다 너머로 ‘산’이 보인다. 사천의 이명산과 봉명산, 하동의 금오산, 광양의 백운산이 펼쳐진다. 하이라이트는 가장 뒤쪽에 세워둔 병풍처럼 푸른 그림자로 떠오르는 지리산 천왕봉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수족관 아라마루의 하마 ‘하식이’,
국내 딱 한 마리뿐인 새 슈빌, 바다가 보이는 영화관인 메가박스 삼천포의 상영관.
# 바다가 보이는 극장의 낭만
실안해안도로 인근에 국내에서 유일한 ‘바다가 보이는 극장’이 있다. 아르떼 리조트 본관에 있는 영화관 ‘메가박스 사천’이다. 4층 영화관에 있는 3개 상영관 모두 한쪽 벽면이 바다다. 1관은 스크린을 마주 보고 왼쪽 벽 전체가, 2관과 3관은 오른쪽 벽 전체가 바다가 보이는 분할 유리창이다. 벽 하나가 다 유리창이니, 극장 안으로 환한 햇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어둡고 답답한 다른 극장과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영화가 시작되거나 끝날 때 암막 커튼을 여닫는데 그때 보이는 바다 풍경이 인상적이다.
상영관은 각각 30석 규모로 스크린도 작은 편이지만, 리클라이닝 좌석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안락하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다면 꼭 가 보시기를…. ‘바다가 보이는 극장에서’에서, 혹은 ‘삼천포에서’ 영화를 봤다는 새로운 경험치를 얻을 수 있으니까. 1, 2, 3관 모두 바다를 볼 수 있고 구조도 비슷하니 조망은 별 차이가 없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그중 바다와 더 가까운 1관이 낫겠다.
극장 얘기가 나온 김에 옛날 삼천포극장 얘기를 꺼내보자. 오래전 삼천포 구항 뒤쪽에 삼천포극장이 있었다. 1950년대 문을 연 이 극장의 전성기를, 삼천포 사람들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 ‘성춘향’이 상영할 무렵인 1961년쯤으로 기억했다. 그 시기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해에 춘향전을 극화한 두 편의 영화 ‘성춘향’과 ‘춘향전’이 동시에 개봉했기 때문이었다. 각각 당대 최고 여배우 최은희와 김지미를 춘향으로 내세운 두 편의 영화가 정면대결한 ‘빅매치’였다. 그 시절, 극장은 자리 지정 없이 표를 팔았다. 모두 입석 표였던 셈인데, 그때 삼천포극장에서 ‘성춘향’을 봤다는 강덕모(83) 씨는 “극장 주변이 인산인해였고, 극장 안에도 자리에 앉아 보는 사람보다 서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빅매치 결과는? 최은희 주연, 신상옥 감독 ‘성춘향’의 압도적인 KO승이었다.
관객이 오죽 많았으면 삼천포극장 극장주가 운수업을 하던 이와 동업해 극장 하나를 또 차렸을까. 노산공원 아래 허름한 창고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극장을 들이고 ‘제일극장’이란 간판을 달았다. 전성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삼천리극장과 제일극장은 1990년 폐업했다. 극장 없는 소도시가 됐던 사천에 극장이 다시 들어선 건 2015년의 일이다. 메가박스 사천점이 문을 열었고, 2년 뒤에 삼천포에도 바다가 보이는 극장이 문을 열었다. 삼천포극장이 폐업한 지 27년 만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영화관’이란 프리미엄에도 극장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평일이긴 했지만, 오전 삼천포극장 1관에서는 딱 4명이 영화를 봤다. 운이 좋다면 전세 낸 것처럼 영화관을 독차지할 수도 있을 듯했다.
# 원도심이 아직도 도시의 중심인 곳
삼천포에는 이른바 ‘원도심’이라 할 만한 곳이 없다. 다른 지방 도시는 쇠락한 구도심이 있는데, 삼천포에는 그런 곳이 없다. 바다에 기대 사는 삼천포는 과거에도, 지금도 삼천포항이 중심이다. 도시의 중심이 한 번도 옮겨 간 적이 없으니 ‘원도심’이 ‘현 도심’이란 뜻이다. 삼천포에 오래전의 풍경이 지워지고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삼천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삼천포항이 개항한 건 1910년쯤의 일이니, 건너온 시간이 110년 남짓이다. 침식지형이 발달한 삼천포는 뻘밭이 많았다. 청널이니, 팔포널이니, 진널이니 하는 지명에서 ‘널’이란 뻘밭에 널빤지를 놓고 건너다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식민지 시대에 삼천포는 경남의 관문이었다. 당시 경남의 도청소재지가 진주였는데, 일본에서 진주로 들어가는 통로가 삼천포였던 것이다. 삼천포에 사람들이 모여든 건 삼천포에 들어온 일본 원양어선단이 조선인에게 조업 준비나 잔심부름 등을 맡기면서부터다. 농사 지은 건 6개월 뒤에나 돈으로 바꿀 수 있었고, 취직한다 해도 월급은 한 달 뒤에나 받는데, 뱃일을 하면 일하는 즉시 품삯을 내줬다. 한 달 뒤, 반년 뒤를 기약할 수 없을 만큼 일이 거칠고 위험해서였으리라.
당시 일본의 고등어잡이 돛단배를 ‘우다시 배’라고 불렀는데, 그 시절 삼천포에는 스무 척이 넘는 우다시 배가 있었다. 일제히 조업에 나섰던 배가 한꺼번에 포구로 돌아오는 날이면 어업의 전진기지였던 삼천포 전체가 흥청거렸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고깃배가 드나들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가장 번성했던 건 시장이었다. 그 시절 삼천포는 도시 전체가 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창때는 우시장과 나무시장, 물시장이 따로 섰을 정도였다. 지금도 삼천포에는 시장이 많다. 새벽시장이 있고, 삼천포중앙시장이 있으며 삼천포종합시장과 서부시장, 용궁수산시장이 있다.
이중 여행자에게 추천하는 곳이 4, 9일에 서는 오일장인 삼천포종합시장이다. 시장의 중심은 지은 지 37년 된 4층짜리 경남아파트 상가다. ‘가’동부터 ‘마’동까지 아파트 5개 동을 지으면서 1층을 모두 상가로 설계했다. 지금으로 치면 ‘주상복합 아파트’인 셈이다. 장날이면 낡은 아파트 상가 주변으로 리어카와 난전이 가득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홍콩의 뒷골목 시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이국적이다. 계란꽃김밥부터 못난이 만두, 국수와 꽈배기까지 오일장에 먹거리가 풍성한 건 물론이다.
장날 삼천포종합시장에 좌판을 깐 생선 난전.
# 시인의 길, 그리고 가수의 길
삼천포를 대표하는 인물은 시인 박재삼이다. 삼천포 곳곳에 그의 시가 있다. 삼천포 구항구 바로 옆 노산공원은 삼천포의 정서적 여유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애기동백꽃이 한창인 노산공원 한복판에는 시인의 생애를 기리는 박재삼문학관이 있다.
삼천포는 박재삼의 고향이 아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태어났고, 삼천포로 건너온 건 네 살 때다. 그래도 그는 평생 삼천포를 고향으로 삼고 살았던 ‘삼천포의 시인’이다. 문학관 안에는 시인이 쓰던 책장과 서탁, 생전에 읽던 책과 친필 메모원고지, 스크랩북, 그리고 안경, 시계, 도장, 지갑, 만년필 등을 가져다 놓은 시인의 방이 있다.
시인의 유년은 가난했다. 문학관에 걸어둔 시에서는 그 시절 상처가 묻어나온다. “해방된 다음 해 / 노산 언덕에 가서 /눈 아래 무역회사 자리 / 홀로 삼천포 중학교 입학식을 보았다./ 기부금 삼 천원이 없어서 나는 / 여기 쫓겨오듯 와서 / 빛나는 모표와 모자와 새 교복을 / 눈물 속에서 보았다/… (중략)…/학교 가는 대신 /이 눈물 범벅을 씻고 /세상을 멋지게 훌륭하게 / 헤쳐가리라 다짐했다./… (후략)… <시 ‘추억에서 31’ 중에서>. 후략한 부분에는 이렇게 다짐하고 살았던 삶의 결말이 나온다. 가서 읽어보시길….
문학관이 들어선 자리는 유년 시절의 그가 삼천포중학교 입학식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곳이었다. 훗날 그는 어려웠던 시절을 술회하면서 “가난해서 슬펐고, 슬퍼서 시를 썼지만, 시가 있어 행복했다”는 글을 남겼다.
문학관에서 나와 동백꽃 만발한 노산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길이 바다 쪽으로 이어지는데, 길 끝의 갯바위에 ‘삼천포 아가씨’ 동상이 있다. 1960년대 삼천포에는 부산, 마산, 통영, 여수를 다니는 연안 여객선이 있었다. 금성호, 일신호, 동광호, 엔젤호, 비너스호…. 삼천포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는 여객선 이름이다. 그 시절 부두의 사랑과 이별 사연을 담은 은방울 자매의 구성진 노래가 ‘삼천포 아가씨’다. 당대의 작사가 반야월이 노랫말을 지어서 그랬을까. 노래가 영화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히트를 해서 남쪽의 작은 항구 삼천포를 전국에 알렸다. 동상은 그걸 기념해서 노래가 발표된 지 50주년이 되는 2011년 세운 것이다.
‘박재삼거리’는 최근까지 삼천포에서 인물의 이름을 내건 유일한 거리였다. 그런데 최근 하나가 더 생겼다. 이름하여 ‘박서진길’이다. 장구 치며 노래하는 삼천포 출신 트로트 가수 박서진 이름을 따서 조성한 길이다. 물으나 마나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만든 길이다. 박서진 길은 삼천포항 주차장에서 노을카페거리 주변까지 5.8㎞에 달한다. 가수의 길이 시인의 길보다 몇 배나 더 길다.
# 수족관 하마와 지붕 너머 바다
이제 삼천포에서 꼭 가봐야 할 곳들을 꼽아보자. 삼천포에는 ‘사천바다 케이블카’가 있다. 이걸 타면 다른 케이블카보다 보는 풍경이 훨씬 다채롭다. 케이블카 승차장에서 바다 건너 작은 섬 늑도로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정류장 뒤쪽 각산 정상에 오른 뒤 다시 승차장으로 돌아온다. 케이블카로 바다와 섬, 산을 두루 다 보는 셈이다.
봉수대가 있는 각산 정상의 전망대에 오르면 한려수도 일대의 바다와 섬은 물론이고, 남해로 넘어가는 5개의 교량으로 구성된 창선·삼천포대교를 내려다볼 수 있다. ‘너도나도 케이블카’라는 비판도 있고 손님이 줄어 운영 수지타산을 맞추기도 힘겹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관광객을 삼천포까지 끌어들이는 무기로 케이블카만 한 게 없다.
개인적으로 삼천포에서 추천하는 곳은, 늑도대교를 건너거나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가는 작은 섬 늑도다. 늑도에는 아쿠아리움과 함께 대관람차, 회전목마가 있는 동물원이 들어서 있다. 아쿠아리움 ‘아라마루’는 시설도 훌륭하지만, 뜻밖의 대표생물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곳에는 다른 수족관에서는 볼 수 없는 하마가 있다. 수족관에 하마를 전시하는 건 미국 뉴저지주 캠든의 ‘어드벤처 아쿠아리움’에 이어 세계 2번째란다.
아라마루의 하마 이름은 ‘하식이’. 몸무게 2.3t에 몸길이 150㎝로 국내에서 가장 큰 하마다. 수조 앞에서 물 깊이 잠수해서 슬로 모션처럼 움직이는 하마의 모습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가까이서 보는 하마가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하마는 육상생활을 하다가 오후 1시쯤 수조로 들어오니 그 시간에 맞춰 가는 게 좋겠다.
아라마루의 강점은 ‘희귀생물’이다. 하마 외에도 국내 딱 한 마리뿐인 새 ‘슈빌’이 있다. 날 수 있는 새 중에서 가장 큰 새로 ‘공룡의 후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기이한 외모를 한 새다. 상대방을 노려보는 듯한 눈매가 특히 인상적이다. 이밖에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인도 가비알, 미얀마 왕뱀 등 신기한 생물이 많다.
삼천포항 도선 선착장 뒤편 언덕 위의 청널공원은 삼천포항과 죽방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섬이 떠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최적의 전망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언덕 정상의 파란 지붕 풍차건물은 마을 주민들이 카페로 운영하는 곳이다. 지난해 5월 해안도로에서 언덕 위 청널공원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스카이브리지와 수직엘리베이터를 결합한 형태의 ‘청널문화오름’을 완공해 접근성이 더 좋아졌다.
마침표를 힘주어 찍듯, 마지막으로 권하는 곳이 ‘망산카페’다. 망산은 삼천포항 뒤쪽의 작은 언덕. 카페는 허름한 주택가 뒤편의 언덕을 등 뒤에 두고 항구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본래 활터가 있던 자리에다 지은 주민공동시설을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는 주택가 지붕 뒤로 보인다. 사람 사는 풍경 뒤편의 바다 모습은 뭉클한 아름다움이 있다. 바다가 일상인 삼천포 사람들은 심드렁한 듯해서, 눈부신 경관이 펼쳐지는 해질 무렵에 간대도 카페에서 혼자일 가능성이 높다. 커피보다는 진하게 달인 대추차가 낫지만, 말린 고구마로 끓여낸 ‘빼때기죽’은 그야말로 ‘진짜’다.
■ 삼천포와 쥐치
삼천포의 ‘좋았던 시절’은 쥐포가 ‘국민 간식’으로 떠올랐던 1970년대다. 쥐포의 정식명칭은 ‘쥐치포’지만 그때는 그냥 ‘쥐포’라 불렀다. 상품가치가 없어 비료로 쓰이던 쥐치를 주민들이 일본의 조미 어포 가공기술로 포를 만든 게 시작이었다. 1970년대 삼천포의 쥐치포 가공업체는 100여 곳에 달했다. 천덕꾸러기 취급 받던 쥐치로 번성했던 것이다. 쥐치는 1990년대 들어 가격이 오르면서 수요·생산이 급감해 ‘삼천포 쥐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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