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일대에 이른 ‘봄꽃 경보’를 발령합니다. 화사한 봄꽃 구경을 하시려거든 올해는 한시라도 일찍 서두르셔야 하겠습니다. 남녘 섬진강 일대에 일찌감치 밀려온 화신(花信)으로 벌써부터 ‘꽃 사태’가 났으니 말입니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전남 구례에는 벌써 화사하게 피어난 산수유가 만개를 목전에 두고 있고, 전남 광양의 섬진강변 매화 농원에는 벌써 절반쯤 꽃망울이 터져 절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섬진강 건너편 경남 하동의 차밭에도 초록빛이 하루하루 짙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봄꽃은 두서가 없습니다. 봄기운이 번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매화가 피어난 뒤 곧바로 산수유가 피어나는 게 순서지만, 올해는 산수유 개화속도가 매화를 멀찌감치 앞질렀습니다. 매화의 꽃소식도 빠른데, 산수유가 그 속도를 앞질러버렸으니 주민들마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입니다. 예기치 않게 이르게 내습한 꽃소식은 반갑지만, 정작 봄꽃 피는 시기에 맞춰 축제를 기획한 섬진강변의 지자체와 주민들은 황망해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지난겨울이 유독 추웠던 탓에 꽃이 늦어질 것으로 예상해 축제시기를 늦춰 잡았다가 자칫 낭패를 당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구례의 산수유는 벌써 거진 다 피었는데, 정작 산수유 축제는 다음 주말인 29일에야 시작합니다. 광양의 매화축제는 그보다 1주일이 빠르긴 하지만, 매화가 거진 다 핀 채 축제가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속도라면 매화며 산수유에 이어 피어나는 하동 쌍계사의 벚꽃도 훨씬 더 이르겠지요. 사정이 이러니 올해는 봄꽃 축제의 끝물에 찾아갔다가는 자칫 다 떨어진 꽃잎만 보고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해에는 개화시기가 예측보다 늦어져 정작 축제 때 맺힌 꽃망울만 보고 돌아와야 했던 관광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는데, 올해는 축제에 맞춰 느지막이 찾아갔다가 다 지고만 꽃 앞에서 실망한 이들의 항의가 적잖을 듯합니다. 봄기운으로 가득한 지리산의 능선 아래 섬진강 일대는 우리 땅에 당도한 봄을 화사한 꽃으로 마중하는 명소입니다. 강변둑의 풀은 초록빛을 더하고 겨우내 무거웠던 지리산의 산그림자에도 봄안개가 옅게 드리우면서 봄의 기운이 완연합니다. 섬진강 일대에서 봄마다 꽃대궐을 이루는 구례와 광양, 하동으로 향하는 여정은 워낙 알려진 곳인 데다 그저 강물만 따라가면 되니 따로 길잡이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가장 빼어난 봄의 풍경을 보겠다면 시간과 순서를 잘 맞춰가야 합니다. 섬진강 일대의 봄꽃을 가장 아름답게 보는 방법. 남녘의 봄꽃 소식과 함께 이번 주에는 그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 오전 7시:전남 구례 사성암 섬진강 부근으로 봄꽃을 보러갔다면 되도록 이른 아침에 자그마한 암자 사성암에 들르는 게 순서다. 사성암은 구례읍에서 섬진강 건너편 문척면 죽마리의 해발 531m 오산의 눈썹자리쯤의 암봉에 매달려 있는 암자. 자라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자라 오(鰲)’자를 쓰는 오산은 해발 500m가 넘으니 다른 지역이라면 제대로 된 산 대접을 받겠지만, 정면으로 거대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는 바람에 여기서는 숫제 야산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정상 부근의 암봉은 제법 힘차다. 사성암은 그 암봉에 자리잡고 있는데, 백제 때인 1500여 년 전 연기조사가 창건한 이래 원효, 도선, 진각, 의상 등 4명의 고승이 머물며 수도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4명의 성인이 거처하던 곳이라 해서 암자에 ‘사성(四聖)’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사성암은 바위 벼랑의 허공에 기둥을 올려 매달듯 지어놓은 암자의 풍모도 나무랄 데 없지만, 그보다 몇 갑절 더 빼어난 것이 암봉을 등에 두고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치다. 암자 뒤편으로 난 돌계단 길을 잠깐만 올라서면 지리산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가 있다. 왼쪽부터 지리산의 만복대와 성삼재, 차일봉, 노고단, 반야봉, 왕시루봉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압도적인 풍광이다. 왕시루봉의 어깨너머로 보일 듯 말 듯 천왕봉도 뾰족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장중한 지리능선의 발치에는 구례읍과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들판 한가운데로는 섬진강 물길이 굽이쳐 흘러가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이런 풍경은 낮에도 볼 수 있지만, 굳이 이른 아침에 사성암을 찾아가라 권하는 이유는 봄날 아침이면 지리산의 허리 아래쯤에 가득 차는 운무 때문이다. 습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봄날이면 지리산 아래 구례 일대는 온통 안개로 휩싸인다. 이런 날에 사성암에 올라서면 지리산이 마치 안개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이리저리 몰려가는 운무의 바다 사이로 언듯언듯 섬진강의 물굽이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더없이 몽환적이다. 기대처럼 운무가 흘러다니지 않는다 해도 한낮보다는 오전 나절의 시야가 훨씬 더 깨끗하니 되도록 이른 시간에 사성암에 오르는 것이 더 낫겠다.
# 오전 10시:구례에서 광양으로 이즈음 섬진강에서 볼 수 있는 봄꽃은 매화와 산수유다. 사성암에서 거리로 보자면 구례의 산수유가 더 가깝지만, 광양의 매화부터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광양의 매화는 대부분이 백매화인데 아침 볕의 흰 꽃잎이 훨씬 더 깨끗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게다가 달큰하고 그윽한 매화 향은 한낮보다는 오전이 훨씬 더 짙다. 매화 향 짙기로는 한밤중이 최고긴 하지만 오전 나절의 향도 못지않다. 반면에 산수유는 오후 나절의 볕을 받아야 노란빛이 더 화사해진다. 사성암 쪽에서 광양의 매화를 만나러 가려면 861번 국도를 타고 가는 게 좋겠다. 섬진강 왼쪽에 바짝 붙어 가는 하동 쪽의 19번 국도가 더 번듯하지만, 섬진강의 수면이 아침 볕을 받아 빛으로 잘게 부서지는 모습을 마주하고 달리는 맛을 느끼려면 강 오른쪽으로 난 861번 도로가 제격이다. 강 건너 저쪽의 화개장터와 쌍계사 입구를 지나는 19번 국도는 좀 수선스럽지만, 강 이쪽 편의 지방도로에서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화려한 매화가 도열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섬진강의 반짝이는 강물에서 견지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들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은박지에 그려진 그림처럼 회화적이다.
매화는 화사하게 피었지만 요즘 청매실농원 주인 홍쌍리 여사의 심기가 그닥 편치 않다. 올해는 입춘도 경칩도 일찍 들어 매화가 일찍 필 것이라 했는데, 광양시청에서 매화축제를 이번 주말로 늦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광양시청 측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난해에는 꽃이 늦어 축제가 다 끝난 뒤에야 꽃이 피는 바람에 관광객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았던 터. 그래서 올해는 좀 여유 있게 축제일자를 잡은 것이 이리되고 말았다. 청매실농원 입장에서야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니 축제 때 사람이 많이 찾아오면 귀찮고 번잡스럽기만 할 게 뻔한 일. 하지만 홍 여사는 “이리 예쁘게 핀 꽃을 여러 사람이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다 핀 꽃을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아까워서 어쩌냐”며 웃었다. 올해 매화축제 기간 동안에는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임시 부교가 설치된다. 강 건너 하동 땅에서 걸어서 섬진강을 건너 광양 청매실농원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부교를 놓는 것. 축제 개막 사흘 전쯤에 부교를 놓을 예정인데, 그렇게 되면 축제 때마다 농원 앞 도로의 상습적인 체증도 좀 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오후 2시:광양에서 하동으로 매화 구경으로 오전 시간을 다 보냈다면 오후에는 섬진교를 건너 하동으로 가는 게 순서다. 하동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다시 구례 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이 길은 4월 초쯤 벚꽃이 필 무렵이라면 당당한 ‘주연급’의 길이지만, 매화가 피고 지는 지금은 ‘조연’의 역할이다. 지나온 광양 청매실농원 일대에다 대면 어림도 없지만, 19번 국도의 광양 쪽에도 매화가 심어진 자그마한 농원이 제법 있다. 광양의 매화농원보다는 규모가 작긴 하지만 꽃의 화려함이야 어디 다를까. 산자락의 오솔길을 따라 매화꽃향을 즐기며 한적하게 산책을 할 수 있는 마을이 이쪽에는 얼마든지 있다. 광양 청매실농원의 소란스러움이 싫다면 아예 이쪽의 고즈넉한 매화농원을 겨눠서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겠다. 하동 쪽에는 강변의 백사장과 짙푸른 송림도 있다. 백사장을 딛고 강변으로 내려가 부드럽게 흘러가는 섬진강물에 손을 담가보는 것도 좋겠고, 강변의 송림 그늘에 들어 가슴을 펴고 소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로 샤워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루하루 초록빛이 짙어오는 차밭도 이즈음 하동에서 만날 수 있는 광경이다. 차나무들이 구불구불 이랑으로 이어지며 반짝이는 초록빛의 화사함은 봄꽃의 아름다움 못지않다. 특히 강변에 줄 맞춰 심어진 차나무들 사이로 순백의 매화가 피어나면 차나무의 초록과 대비돼 더욱 화사하게 빛난다. 19번 국도를 달리면서 시간 여유가 좀 있다면 화개장터를 지나 쌍계사 쪽으로 계곡의 물길을 따라 들어서보는 것도 좋겠다. 계곡의 좌우 쪽으로 매화며 산수유가 흐드러진 사이로 단정하게 가꿔진 차밭의 이랑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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