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남사마을의 고택 남호정사 마당에 ‘이씨매’가 환하게 피어났다. ‘산청 삼매(三梅)’ 중 하나인 원정매를 비롯해 최씨매, 박씨매 등 이름난 명매(名梅)가 자라고 있는 남사마을에서, 이씨매는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매화다.
바야흐로 봄. 남녘에서는 매화와 산수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와 함께 맞는 두 번째 봄입니다. 긴 겨울 뒤의 봄이 반갑습니다만, 축포처럼 피워올린 봄꽃을 물러나서 바라봐야 해서 아쉽습니다. 아직은 거리를 두어야 하는 때이니까요. 기억하시지요. 지난해 봄날에 여기저기서 주민들이 ‘외지인들이 찾아온다’며 봄꽃을 갈아엎어 버린 일을 말입니다. 봄꽃을 찾아가는 여정을 말하기가 못내 조심스러웠던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궁리 끝에 되도록 한가한 봄꽃 여행을 권하기로 했습니다. 봄꽃이 무더기로 피어나 꽃 대궐을 이루는, 그래서 상춘객들이 북적거리는 그런 곳 말고 고요하지만 드문드문 꽃이 없지 않아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걸으며 봄꽃과 봄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경남 산청의 이름난 세 그루 매화나무, 그러니까 ‘산청 삼매(三梅)’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사실 산청에 매화나무가 세 그루만 있는 것도 아니고 봄꽃이 꼭 매화만도 아닙니다. 그윽한 정취가 깃든 산청에서는 호젓한 봄 마중을 할 수 있으니 ‘매화는 그저 핑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 고요한 꽃구경… 매화 보러 산청으로
매화나무일까, 매실나무일까. 둘을 구분하는 건 간단하다. 매실을 위해 심은 건 매실나무, 매화를 보기 위해 심은 건 매화나무다. 그렇다면 섬진강 변에 화려하게 흐드러지게 피는 건 매실나무다. 꽃도 보지만, 나무를 심은 뜻이 매실에 있어서다. 경남 산청에는 ‘명매(名梅)’라 불러 마땅한, 오래된 매화나무 세 그루가 있다. 이름하여 ‘산청 삼매’다. 이름난 매화는 보통 산속 사찰에 있는데, 산청의 세 그루 매화나무는 집이나 마을 어귀에서 그윽한 매향을 내뿜는다. 모여서 피어나지 않고, 한꺼번에 피어 번성하지도 않는다. 가지 끝에 이따금 무심하게 생각난 듯 꽃을 피운다. 꽃이야 피었거나 말았거나 차량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봄꽃 행락지에다 대면 쓸쓸하기까지 하다.
산청 삼매 중에서 먼저 남사마을의 ‘원정매’부터 구경해 보자. 고려말 문신 하즙이 자기 집 마당에다 심은 매화나무인데, 하즙의 시호 ‘원정(元正)’을 매화 이름으로 삼았다. 하즙이 서른 살 즈음에 심은 것이라면 매화나무 수령은 688년. 마흔에 심었다 해도 678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였으나 2007년에 본래의 할아버지 나무는 죽었고, 죽은 나무 옆에서 자라는 손자뻘 후계목 매화나무 가지에서 연분홍빛 감도는 매화가 이제 하나둘 피어나고 있다. 죽은 나무 발치에는 하즙의 매화 시를 새긴 작은 돌비석이 있다. “집 앞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섣달 찬 겨울에도 아리따운 꽃 나를 위해 피웠네 /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더라.”
하씨 고가의 원정매뿐만 아니라 남사마을에는 골목을 따라 늘어선 고택 담 안쪽에 매화나무를 비롯해 기품있는 오래된 나무들이 유독 많다. 고택과 돌담뿐만 아니라 나무 구경만으로도 반나절이 짧다. 남사마을엔 산청 삼매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이제 막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최씨 고가의 ‘최씨매’가 있고, 전통염색 체험장으로 쓰이는 남호정사에는 마을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매화를 피우는 ‘이씨매’도 있다. 이씨매는 지금이 절정이다. 사효재에는 기이하게 자라고 있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고, 선명당에는 우람한 단풍나무 노거수와 남사마을에서 가장 늦게 꽃을 피우는 ‘정씨매’가 있다. 두 그루 나무가 ×자로 가지를 교차해 자라는 이씨 고가 앞 돌담길 회화나무도 볼만하다. 남사마을 뒤쪽 사수천 건너편에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때 묵어갔다는 자리에 세운 사당 니사재가 있다. 니사재 마당에는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있는 ‘박씨매’와 함께 가지와 가지가 붙은 연리지가 여럿인 배롱나무가 눈길을 붙잡는다.
남사마을에서 오래된 나무를 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당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것도,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도 있다. 하즙 고택 마당의 원정매는 늙어 죽었으되 기품이나 위엄을 잃지 않았지만, 하즙의 증손자 하연이 일곱 살 때 심었다는 뒷마당의 640년 수령 감나무는 팔다리가 가는 병중의 노인 체형을 닮아 안쓰러운 쪽에 가깝다. 늙고 쇠한 나무 앞에서 어떻게 늙어가야 할지를 생각한다. 그 힌트가 남사마을에서 가장 기품있는 건축물로 꼽히는 정씨 고택의 서재 ‘사양정사’ 기둥 주련에 걸려있다. 청년기부터 중년기,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의 삶을 빗댄 문장을 순서대로 걸어둔 주련에서 마지막 노년기를 담은 글귀를 보자. ‘막막하고 잡을 것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莫把無聊也自傷). 은퇴해 7년 전 귀향, 고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 정양교(67) 씨는 “할아버지가 나의 은퇴를 알고 이 글을 적어놓으신 듯하다”며 “때때로 주련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절집 건축의 전통미, 세련된 현대 건축의 선을 한데 비벼서 만든 절집 ‘수선사’ 전경.
# 바위 문을 지나서 정당매를 찾아가다
남사마을에서 머지않은 단성면 탑동리에는 ‘단속사(斷俗寺)’란 이름을 가졌던 옛 절터가 있다. 단속사는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짚신이 다 해질 만큼 규모가 컸다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었다. 단속사에는 신라의 이름난 화가 솔거의 그림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찰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사찰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 초 대사헌까지 지낸 강회백·회중 형제가 이 절집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며 심은 매화가 남아있었다. 훗날 그가 종 2품인 ‘정당문학’이란 직위의 벼슬에 오르자 사람들은 이 매화에 ‘정당매’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두 기의 비석과 매화각이란 누각까지 거느린 정당매가 지금껏 살아있었다면 수령 650년을 헤아렸으리라. 정당매는 2014년 고사했고 뿌리 옆에서 자라는 후계목이 정당매를 대신해 해마다 환하게 매화를 피우고 있다. 정당매의 개화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 3월 중순까지는 넉넉히 꽃을 볼 수 있겠다. 정당매 주변에는 인근 논둑에서 자라던 야매(野梅) 10여 그루를 옮겨 심어두어 꽃이 제법 화려하다.
지리산 자락의 단속사가 과거 얼마나 대단했던 절인지는 청계리 용두마을 석벽에 새겨진 글씨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석벽은 단속사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했다는데, 돌에 새겨진 ‘광제암문(廣濟 門)’이란 글씨는 1000년 전쯤 단속사의 스님이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글씨는 1489년 김일손이 쓴 지리산 산행기인 ‘두류기행록’에도 나온다. “깎아 세운 바위가 입구에 우뚝 섰고 표면에 광제암문이라고 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의 획이 매우 굳세어 보였다.” 그 굳센 글씨의 획을 지금 찾아가서 만져볼 수 있다. 이런 유물 표기에 인색한 포털사이트 전자 지도에 뜻밖에 ‘광제암문’이란 이름으로 정확하게 표시돼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김일손은 단속사에서 내내 절집의 규모에 감탄한다. ‘(단속사에서) 쓰지 않는 방이 수백 간이나 되었다’고도 했고 ‘동쪽의 행랑에는 500여 개의 석불이 있다’고 썼다. 기행문에는 정당매의 내력도 나온다.
# 서릿발 같은 정신이 피운 꽃
▲ ‘산청 삼매(三梅)’를 한 자리에 모았다. 사진 위는 남명 조식이 말년에 은거한 산천재 앞에서 자라는 ‘남명매’, 사진 가운데는 옛 절집 단속사 터의 ‘정당매’ 후계목이 피운 매화, 사진 아래는 남사마을 하씨 고가의 원정매.
산청 삼매 중에서 원정매와 정당매는 고사하고 후계목이 대를 잇고 있으니 온전한 제 몸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건 ‘남명매’가 유일하다. 남명매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서슬 퍼런 선비 남명 조식이 말년을 보낸 집터인 시천면 사리의 산천재 앞뜰에서 자라는 매화나무다. ‘칼 찬 선비’로 불렸던 선비 조식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자리에 겨울의 삭풍을 견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를 심은 뜻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실 산천재의 매화나무는 특별하달 게 없다. 수령도 어려 보인다. 겉모습만으로는 ‘명매(名梅)’의 반열에 올려놓은 까닭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남명매가 산청 삼매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건 아마도 조식의 서릿발 같은 정신이 고결한 마음을 함의한 매화로 투영됐기 때문이 아닐까.
조식이 환갑의 나이에 합천에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낸 곳이 바로 여기 산청의 산천재다. 조식이 심은 남명매도 산천재 앞에 있고, 그를 기리는 남명기념관도, 그를 배향한 덕천서원도, 그가 드나들었던 백운계곡도, 제자가 지은 세심정도 모두 산청에 있다. 받지 않았지만, 명종 임금이 내린 벼슬도 지금 산청 땅인 단성현을 다스리는 현감자리였다. 조식은 단성현감 직을 거절하면서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다. 칼을 벼린 듯 상소문의 문장은 섬뜩할 정도로 서슬이 퍼렇다. 상소문의 칼날은 국정의 폐단, 그리고 심지어 왕과 왕비를 향한다. 그 내용을 옮겨 적어보면 이렇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그릇됐으며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갔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합니다.”
조정이 발칵 뒤집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왕권과 실세들의 무능과 타락을 정면으로 겨눈 상소문은 왕조시대에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일이었다. 모멸적인 직언에 왕은 격분했지만 조식은 무사했다. 신하들이 조식의 충정을 높이 사야 한다며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왕조시대에 유교적 정치는 이렇게 작동했다. 조식의 상소문이 어찌 당시의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간담이 서늘해지는 상소문의 문장이, 이 글을 지은 자리인 합천의 뇌룡정 옆 용암서원 앞의 비석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잘 꾸민 절집
산청에 간다면 꼭 소매를 끌어당겨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 절집 ‘수선사’다. 수선사는 논 위에다 세운 참으로 근사한 절집이다. 여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맑은 자연을 건축적 아름다움에다 섬세한 정성을 보태 다듬어냈다고 하면 될까. 불교의 공간은 대개 자연의 경관을 두르고 있는데, 이곳은 자연에다가 사람의 손길을 더해 이룬 공간이다.
수선사는 두 개의 단을 이루며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아래쪽 단의 한쪽은 나무다리가 놓인 둥근 연못이고, 다른 쪽은 직선의 시멘트건축물로 지은 카페다. 위쪽 단은 잔디가 깔린 법당의 영역이다. 작은 연못이 가운데 있고, 뒤쪽과 옆으로 법당이 있다. 여느 절집 같은 한옥건물 법당도 있지만, 농가주택을 손봐 법당으로 앉히기도 했다. 어찌나 감각적이고 깔끔하게 다듬어 놓았는지, 서울 근교의 근사한 카페 수준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돈을 들인 ‘고급’이라는 게 아니다. 사찰이 가진 종교적 경건함을 수선사는 소박함으로 이뤄낸다. 마당의 작은 샘이며, 댓돌 옆의 분수며, 툇마루 아래까지 어느 곳을 봐도 거슬리는 곳이 없다. 흠을 잡으려고 해봐야 도무지 찾을 게 없다. 정성스러운 손길이 오래 가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마루를 닮았다고나 할까.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신고 들어가야 하는 화장실마저도 감탄이 나올 정도다.
산청의 둔철산 아래에는 ‘정취암(淨趣庵)’이 있다. 암자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웬만한 절집 못지않은 규모다. 암자는 내력보다 앉은 자리와 거기서 내다보는 경치로 이름난 곳이다. 암자가 세워진 기암절벽은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산에 못지않다고 해서 한때 소금강이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암봉 아래에 절묘하게 매달려 들어선 암자의 모습이 훌륭하다. 벼랑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삼성각 앞마당에 서면 멀리 황매산과 자굴산, 한우산 능선이 쫙 펼쳐지고 그 앞의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장쾌한 풍경이다. 이렇듯 높이 올라서면 발아래 세상이 한낱 티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 남강변 ‘강삼수 경위길’
빨치산에 맞섰던 유격대장 호국영웅 선정… 공적 기려
산청에는 ‘강삼수 경위길’이 있다. 산청경찰서 뒤편 남강변 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경찰, 그것도 경위 계급의 이름이 새겨진 길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강삼수는 6·25전쟁 즈음에 산청경찰서 유격대장이었다. 그는 10여 명의 유격대원을 지휘해 지리산 주변의 공비들과 62번의 전투를 벌여 322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67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런 전과는 증언이 아니라 증거물을 제출해 경찰 상부로부터 전공을 공인받은 것들이다. 놀라운 건 그가 벌인 치열한 전투에서 단 한 명의 부하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리산을 무대로 신출귀몰하던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의 행적은 전설처럼 회자되지만, 빨치산과 맞섰던 유격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강 경위도 그렇게 잊혔다가 2016년에서야 국가보훈처에 의해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됐다. 산청경찰서 주변의 ‘강삼수 경위길’은 그때 지정된 것이다.
강 경위는 1961년 경찰을 퇴직하고 사회에 나왔으나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1972년 진주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길을 걸으며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고 죽고 죽였던 전쟁의 참상과 목숨을 바쳤음에도 소외됐던 삶, 그리고 그의 쓸쓸한 최후를 생각한다. 강삼수 경위길이 지나는 경호강변의 산수유 나뭇가지에 노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산청에는 ‘동의보감촌’이 있다
산청군이 육성하고 있는 한방테마 관광명소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산청 출신이라는 걸 전제로 조성했지만, 실상은 분명치 않다. 허준을 산청과 연결하게 된 건 허준이 ‘산청 출신 명의 유이태(유의태가 아니다)의 제자였을 것’이란 한 한의학자의 막연한 추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시대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실존인물 유이태는 ‘유의태’로 슬쩍 이름을 바꾸어서 허준의 스승으로 TV 드라마에 등장했고, 허구는 곧 사실로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