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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길 끊긴 거문도서 본 희망

醉月 2021. 3. 12. 19:09
거문도의 남쪽 끝 ‘거문도 등대’로 이어지는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룬 숲길. 섬에 도착하자마자 한 번, 섬에 고립된 뒤에 다시 한 번 다녀왔는데, 걷는 속도와 보고 온 것이 완연하게 달랐다. 이 숲 터널을 다시 걸었을 때는 파도 소리와 봄의 냄새, 바람의 촉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 뱃길 끊긴 거문도서 본 희망

섬에 갇혔다.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뱃길이 끊겨 전남 여수의 가장 먼 섬, 거문도에 갇혀 나흘을 보냈다. 코로나 시대에 여행이 조심스럽듯, 여행취재도 조심스럽다. 사람들을 한데 모으지 않는 여행 얘기를 위해 먼 곳으로 떠난 출장이었다. 뜻밖의 결항으로 속수무책의 섬에서 보낸 나흘의 경험은,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겪는 불안이나 무력감과 거의 같은 모양으로 포개졌다. 여행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던 섬에서의 고립의 경험은,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고립이 종래에는 좀 더 나은 방식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란 희망 섞인 기대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고립된 섬에서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무력감’이었다. 여수 출발 거문도행 쾌속선 운항 여부는 매일 오전 6시 30분쯤 선사가 결정했다. 그날 배가 뜨는지, 뜨지 않는지를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물어야 했다. 두 시간쯤 전에 일어나 일기예보와 바다 날씨를 번갈아 확인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정됐던 약속과 일정이 엉망이 돼버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이라도 편히 지내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말뿐이었다. 갇혔다는 생각은 불안함과 조급함을 불러들였다.

그럼에도 갇혀 있는 동안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고립된 섬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갔다. 섬에서의 시간은, 바삐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시간과 질량과 무게가 달랐다. 무료한 시간과 맞닥뜨린 것도 수확이었다. 무료함은 섬에서의 속도를 늦추게 했고, 속도를 늦추니 여유가 얻어졌다. 거문도 서도의 불탄봉(195m) 능선에 앉아 쪽빛 바다를 내려다보며 비워두고 온 자리를 오래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얻은 수확이었다. 끊긴 뱃길은 섬을 여행하는 방식을 바꿔 주었다.

시간을 쪼개서 하는 여행이 행동이나 동선으로 계획되고 실행됐다면, 여유가 주어진 여행에서는 공간과 시간 대신 ‘나의 느낌’이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갇힌 섬에서의 고립의 경험도, ‘거리두기’로 묶인 코로나의 일상도 ‘타의에 의한 고립과 격리’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다만 코로나 시대가 더 고약했던 건, 타인의 존재가 잠재적 불안요소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코로나로 얻은 게 왜 없을까. 느닷없는 여객선 결항이 섬을 여행하는 방식과 속도를 바꾸게 했듯이,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의 고통도 종국에는 좀 더 나은 방식의 여행 혹은 삶으로 이끌 것을 믿는다.

여행을 통해 세계는 새롭게 다가오고, 여행 속에서 우리는 성찰한다. 어디 여행만 그런가. 배가 끊기는 돌발사건으로, 때로는 방을 바꾸는 사소한 일상의 변화만으로도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거문도의 여행 이야기이자, 우리가 건너가는 코로나 시대의 위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거문도 서도의 불탄봉 아래 능선 ‘기와집몰랑’의 모습. 몰랑이란 전라도 사투리로 ‘산마루’라는 뜻이다. 바다 쪽에서 보면 바위로 이어진 능선이 기와집 영마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기와집몰랑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여기 서면 기암절벽 아래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여수항서 배로 2시간 20분 가야 닿을 수 있는곳

등대 가는 길 트레킹도…‘기와집몰랑’ 최고의 경치도…

배가 끊기고 ‘머무름’이 ‘갇힘’으로 바뀌는 순간

일정·포토존·맛집 ‘여행의 3요소’가 무의미해졌다


하루 다섯번만 운행하는 마을버스·후미진 골목…

제식구 밥 챙기듯 차린 식당밥상·오며가며 나누는 눈인사…

‘넘치는 시간’속에서 길어올린 봄날의 완벽한 풍경

‘혼자 한번 섬이 되어 보니’ 진짜 삶이 보였다




# 나흘째 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다

배는, 오늘도 뜨지 않았다. 여수항에서 오는 쾌속선도, 고흥 녹동항에서 오는 철부선도 모두 결항이다. 배가 들어오지 않으니, 섬에서 나가는 배도 없다. 결항 이유는 매일 달랐다. 하루는 바람이 불어서. 이튿날은 파도가 높아서. 그리고 다음 날은, 바람과 파도 둘 다 거세서. 그렇게 뱃길이 끊긴 게 벌써 나흘째다.

섬사람들은 사나흘쯤 배가 뜨지 않는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안달하는 건 관광객뿐이었다. 등산복 차림의 외지인들은 매일 아침 여객선 대합실을 기웃거리다가 아무나 붙들고 “언제쯤 배가 뜨겠느냐”고 묻고 다녔다.

별생각 없이 섬에 들어온 육지 사람들에게는 돌아갈 배가 뜨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에 가깝다. 그런 것쯤은 예삿일인 섬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묻는 외지인에게 ‘내일도 못 나갈 것’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맞는 얘기였지만, 그때는 그게 어찌나 야속했던지 난감한 처지의 육지 사람을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거문도는 멀다. 전남 여수항에서 45노트(육지의 시속으로 80㎞ 남짓) 쾌속선을 타고서도 2시간 20분을 가야 닿는 섬이다. ‘덕분’인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뱃길이 끊겨 예정보다 오래 머무는 동안 거문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거문도의 두 등대를 찾아간 여행 얘기는, 그러나 잠시 뒤로 미뤄두자. 대신 지금부터는 배가 끊기고 난 뒤에 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섬에 머문, 아니 섬에 갇힌 시간이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면서 조바심이 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갇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섬 경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흘 중 덤으로 주어진 이틀 동안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뜻밖에도 ‘여관방 벽지 무늬’였다. 거문도등대 가는 길의 동백꽃보다, 봄볕에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보다, 여관방의 낡은 벽지가 더 오래 선명했다.

벽지 무늬를 찬찬히 보았다는 건 곧 심심했다는 얘기. 즉 ‘무료함의 경험’ 얘기였다. 배가 끊긴 날이라도 섬에서 맘 편히 나돌아다닐 수 없다. 오후에 느닷없이 배가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게 들어온 배가 기상 상황에 따라 조기 출항하는 경우도 있다. 자칫 한눈팔다가 조기 출항한 여객선의 뒷모습을 봐야 하는 낭패도 겪을 수 있다. 그러니 도리없이 여객선 선착장이 가까운 숙소에서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거야말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상록림의 초록이 터널을 이룬 거문도등대 가는 길. 이 길은 지금 모가지째 떨어진 동백꽃의 붉은 빛으로 낭자하다. 봄기운이 완연한 거문도는 동백을 비롯해 수선화, 유채꽃들이 앞다퉈 피고 있다.


# 고립된 섬의 일상이 코로나 시대를 은유하다

섬 여행은 정해진 배 시간 때문에 늘 빠듯한 법이다. 거문도처럼 여객선 운항 간격이 뜸한 섬일수록 시간에 쫓긴다. 팽팽하게 당겨진 섬에서의 시간은, 여객선 결항으로 연실 끊기듯 툭 끊어지고 말았다.

손바닥만 한 섬에서 ‘넘치는 시간’이 주어지자 쓸모없어지는 것이 많았다. 실패하지 않을 맛집 선정도, 포토 포인트에서의 근사한 사진도, 섬 안에서의 빠르고 효율적인 이동도 별 의미가 없어졌다.

섬에 머무는 동안 식사는 마음에 들었던 식당 한 곳에서 거의 다 해결하다시피 했다. 백반을 시키면 매번 갈치 두어 토막부터 내놓고 밥상을 차리는 식당이었다. 물릴 법도 했는데, 맛깔스러운 새 반찬이 올라왔다. 밥을 다 먹기도 전에 다음 식사의 반찬이 기대될 정도였다.

주방을 지키는 두 할머니의 부지런함이 어디 돈벌이와 성공의 열망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성의와 환대를 섞어 일상처럼 차려낸 가족의 밥상에 슬쩍 끼어든 기분이었다. 한 번은 주민들이 잡아온 학꽁치를 손질하던 할머니가 ‘돈에 맞춰주겠다’고 제안해, 시중의 반의반 값도 안 되는 가격에 싱싱한 학꽁치회 맛을 볼 수 있었다.

매일 비슷한 밥상이 물려서 딱 하루 저녁 식사를, 섬 안에 두 개뿐인 중국집 중 한 곳에서 해결했다. 중국집 여주인은 저녁 식사 시간 즈음 먼발치서 자기 집을 향해 걸어오는 외지인을 발견하자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어줬다. 식사를 마친 뒤에야 주인은 “본래 저녁장사는 안 하는데, 결항으로 섬에 갇힌 외지인을 돌려세우기가 뭣해 손님을 받았다”고 했다. 주방장은 보통 아저씨가 맡아보는데, 출타 중이었는지 아주머니가 주방의 웍을 잡았다. 자장면 맛은? 노코멘트.

섬에 머문 지 아무튼 사흘쯤 되자 자연스럽게 섬사람들과 일원이 된 듯했다. 구멍가게 주인은 묻지 않은 날씨 얘기를 먼저 꺼냈고, 오가는 이들과도 자연스레 눈인사를 하게 됐다.

섬으로의 여행을 두고 ‘자발적’ 고립의 경험이라고는 하지만 뱃길이 끊기는 순간, 섬은 ‘타의에 의한’ 격리와 고립의 공간이 된다. 타의로 섬에 고립되면 ‘느리게 가는 무료한 시간’이 주어진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에 하루 다섯 번 운행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섬을 둘러보기도 했고, 바쁜 여행자라면 눈길을 주지도 않았을 후미진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면 선착장에 가 앉아서 저무는 바다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고립된 섬에서의 경험은, 여러모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상황과 닮았다.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의 거리 두기도, 우리에게 무료하고 심심한 시간을 준 게 아닌가. 고립된 섬에서 생각한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에는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 이방인이 지었던 섬 이름, 해밀턴.

▲ 사진 위는 2년 전부터 거문도에서 운행하고 있는 거문여객 마을버스. 하루 다섯 차례 고도와 서도, 동도를 운행한다. 좌석이 모자라 나무의자를 묶어놓았다. 사진 아래는 영국인 묘지 가는 길에 만개한 유채꽃밭.


거문도에서 묵었던 여관의 이름이 ‘해밀턴’이었다. 뜬금없는 외국어 이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때 거문도의 지명이 ‘해밀턴’이었다. 포트 해밀턴이란 지명은 1845년 거문도를 처음 ‘발견’했다는 영국해군 함대가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들의 시선에서나 ‘발견’이지, 따지고 보면 ‘무단 상륙’이다.

그리고 40여 년 뒤 영국 해군은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2년여 동안 거문도를 무단점거했다.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다.

거문도는 세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동도’와 ‘서도’가 농구공을 쥔 두 손의 모양처럼 마주 보고 있고, 두 섬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가운데 바다에 ‘고도’가 있다. 고도는 거문도의 중심이다. 선착장이 고도에 있으니 면사무소도, 경찰서도, 여관도, 식당도 죄다 고도에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국해군 주둔 시절에도 그랬다. 놀라운 건 그 무렵 거문도의 인구수가 2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 쾌속선이 다니면서 뱃길이 가까워진 지금의 인구수보다 더 많았다.

고도에는 영국군 묘지가 있다. 영국해군 점거 시기의 거의 유일한 흔적이다. 영국해군은 거문도 주둔 중 사망한 수병 9명의 묘지를 고도 뒷산에 조성했는데, 후에 6기는 영국으로 옮겨가고 3기만 남았다. 화강암 묘비와 십자가로 장식된 묘지 주변은 ‘거문도 역사공원’으로 조성됐다.

영국군 주둔 당시 거문도 주민과의 마찰은 거의 없었다. 혹시나 있을 주민과의 갈등이나 콜레라, 천연두 등 감염병 전파 등을 우려해 영국군이 엄격한 교류금지원칙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신세를 지게 되면 돈으로 갚았다. 우물물을 마시고 주민에게 은화를 줬다는 기록도 있고, 일을 시키면 꼭 품삯을 주었다. 영국해군이 돌아간 뒤에 거문도 주민들이 ‘품삯을 주지 않으면 일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관료들이 당혹해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대항해시대 쇠퇴기의 자취를 보는 심경은 좀 복잡하지만, 화르르 피어난 봄꽃들로 금세 잊힌다. 공원은 물론이고 공원까지 가는 길에도 노란 유채꽃은 온통 흐드러졌고, 수선화는 벌써 만개의 시간을 지나서 하나둘 지고 있는 중이다.

영국해군 점거 자료를 뒤지다가 우연히 본 당시 영국해군이 찍은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볏짚을 잔뜩 실은 목선에서 일가족인 듯싶은 4명의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 무렵 거문도 어부들은 여름이면 조류와 바람을 타고 울릉도까지 가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생활하다가 가을이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돌아왔다. 일상을 목숨을 건 모험처럼 거칠게 살았던 뱃사람들의 삶이었다. 그 사진이 섬 북쪽 녹산등대 가는 길목인 서도마을의 담벼락에 벽화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니 빼놓지 마시길….


# 거문도를 걷는 아름다운 두 길

▲ 사진 위는 거문도등대. 1905년 처음 불을 밝힌 등대는 왼쪽의 작은 등대이고, 오른쪽 높은 등대는 근래 다시 지은 것이다. 사진 아래는 거문도 북쪽의 녹산등대. 녹산등대는 부드러운 초지의 유연하게 굽이치는 길 끝에 있다.


지도를 꺼내볼 것도 없다. 거문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트레킹이다. 코스는 두 개다. 하나는 서도 남쪽의 거문도등대까지 가는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서도 북쪽의 녹산등대까지 가는 코스다.

둘 다 목적지는 ‘등대’지만, 두 코스는 식생과 환경, 그리고 경관이 전혀 다르다.

사람마다 취향과 느낌이 다르니 ‘둘 중 어느 곳이 더 낫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불가능하다. 이쪽 코스에 맞을 법한 사람이 의외로 저쪽 코스를 더 좋아하기도 하고, 저쪽을 추천했는데 이쪽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일치기로 오전 배를 타고 들어와, 오후 배로 나가는 일정으로 거문도에 들어오는 이들은 도리없이 둘 중 한 코스를 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이 참 난감하다. 더 나은 곳을 추천해준다 해도 한 곳을 다녀오는 것만으로 거문도 여행을 끝낼 수 없다. 한 곳만 다녀오면 다른 한 곳은 언젠가 다시 가봐야 할 ‘다녀오지 못한 곳’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거문도를 대표하는 트레킹 코스는 서도 남쪽의 ‘거문도등대 가는 길’이다. 등대까지 가는 코스는 세 가지쯤의 선택이 있다. 거문도등대로 가는 들머리 초입의 지명이 ‘목넘어’인데, 목넘어에서 등대까지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코스는 ‘목넘어까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나뉜다.

목넘어에서 등대까지 이어지는 1.5㎞ 남짓의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 숲길로 꼽힌다. 어둑한 동백 숲에서 해조음과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울음을 따라가면 어느새 등대에 당도한다. 거문도등대는 1905년 남해안 최초로 세워진 것인데, 지금은 높이 솟은 새 등대가 불을 밝힌다.

목넘어까지 가는 가장 짧고 쉬운 코스는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이렇게 가면 등대까지 다녀오는 시간을 다 합쳐 3시간이면 넉넉하다. 반면 가장 길고 어려운 코스인 덕촌마을에서 해발 195m의 불탄봉 정상을 넘어가는 코스다. 능선을 따라 걷다가 목넘어로 내려서면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린다. 용의 등 같은 섬의 능선을 딛고 발아래로 쪽빛 바다와 기이한 해안 경관을 내려다보며 걷는, 오래 잊히지 않을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둘을 절충한 4시간짜리 코스가 유림해변 뒤쪽에서 불탄봉 아래 ‘기와집몰랑’ 능선으로 질러가는 코스다. ‘몰랑’이란 전라도 사투리로 산마루라는 뜻. 바다에서 보면 이 능선이 기와집 영마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기와집몰랑에 서면 아찔한 기암절벽 아래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바다 쪽으로 밀고 나온 섬 끝의 거문도등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히 ‘거문도 최고의 경치’라 해도 손색없는 자리다.



# 녹산등대에서 만난 완벽한 봄 풍경

거문도 남쪽에 거문도등대가 있다면, 북쪽에는 녹산등대가 있다. 녹산등대 가는 길의 풍경과 분위기는 거문도등대와는 사뭇 다르다. 거문도등대 가는 길이 어둑한 동백 숲 터널 속을 걷는 절경의 길이라면, 녹산등대 가는 길은 초지로 이뤄진 부드러운 능선을 걷는 밝고 환한 길이다. 능선을 따라 지난가을의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제주도 어디쯤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다.

녹산등대 가는 유연하게 굽은 길 위에다가 군데군데 시를 적어 매달아 두었다. 그중 한 편. 안도현 시인의 시 ‘섬’을 읽어본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 혼자서 훌쩍 / 하면서 섬에 한 번 가봐라. 그곳에 /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 삶이란 게 뭔가 / 삶이란 게 뭔가 /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지금 거문도에 간다면, 녹산등대 가는 길 위에서 봄볕이 따스한 날, 초지의 언덕 위 벤치에 앉아 푸른 바다를 보면서 이 시를 외울 수 있다.

녹산등대 가는 길 위에는 ‘인어해양공원’이 있다. 말이 공원이지, 초승달 위에 앉은 인어상과 주변의 나무덱이 시설물의 전부인 소박한 공간이다. 인어는 거문도 일대에서 전해지는 전설 속의 ‘신지끼’다.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는 날에 돌을 던져 어부들에게 위험을 알렸다는 전설 속의 인어다. 달 위에 앉은 인어상의 한 손에도 돌이 들려 있다.

공원의 인어상처럼 녹산등대도 소박하기 짝이 없다. 거문도등대처럼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기암의 해변도 없다. 그럼에도 녹산등대로 이어지는 유연한 길 위에서는 경관에 취해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대체 뭐가 그리 좋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해줄 말은 없지만, 바다와 봄볕과 바람과 파도 소리가 어우러지는 봄 풍경이 완벽했다.

털어놓고 말하자면 먼바다의 섬 거문도는 코로나의 와중에 사람들이 몰리는 봄꽃 흐드러진 명소로의 여행 대신 택한 곳이었다. 하지만 봄꽃의 명소를 다시 갈 수 있게 된다 해도, 무료했던 이른 봄날의 거문도가 더 오래 가슴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섬에 갇힌 지 나흘째 되는 날. 천신만고 끝에 고흥 녹동항에서 들어온 철부선을 타고 육지로 나가는 뱃머리 위에서 그 생각을 했다.


■ 거문도에는 테니스장이 있다

거문도역사공원 가는 길의 거문초등학교 옆 언덕에 테니스장이 있다. 이름하여 ‘해밀턴 테니스장’이다. 거문도 주둔 당시 영국해군이 지금의 거문초교 옆에다 테니스장을 만들어 테니스를 쳤는데, 그게 우리 땅에 만들어진 최초의 테니스장이다. 그 사실을 기념해 대한테니스협회에서 거문도에 해밀턴 테니스장을 조성했다. 문이 열려 있어 라켓과 공만 가져간다면 테니스를 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