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인의 가야문화권 답사'는 가야 유적과 유물이 다수 남아있는 6개의 지역을 답사한 내용을 쓴 답사기입니다. 답사 중 에피소드는 물론 주로 유적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나 고찰에 대해 써 나갈 계획입니다. 가야 유적 뿐 아닌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역사적 유적이나 고고학적인 이야기, 신화나 전설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내용을 담아 쓸 생각입니다. 답사 대상은 수로왕의 탄생지인 금관가야의 김해, 신라와의 중간지점이었던 비화가야의 창녕, 후기가야연맹체를 이끌던 대가야의 고령, 옥전고분군으로 잘 알려진 다라국의 합천, 이름 보다 훨씬 큰 소가야의 고성, 영원한 2인자였던 아라가야의 함안입니다. 이번 답사는 네이버 지식in의 지식활동대 지원을 받아 이뤄졌으며,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우 3인과 동행하였습니다. |
"어라. 이게 뭐지? 네이버 지식원정대?"
할 일이 없어 무료하게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어느 날, 평소 자주 들어가는 네이버 지식in에 접속해 여러 글들을 읽는 와중, 유난히도 눈에 띠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지식원정대. 유명한 영화인 반지원정대처럼 지식원정대라는 이벤트를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호기심 차원에서 클릭해보니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200만원 지원?!?!?!
무려 200만원이나 지원해 준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것도 몇 사람이 아닌 100명을 선발하여 200만원을 지원해준다니... 과연 네이버가 통이 크긴 크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그에 따른 조건은 있었다.
네이버 지식in 내에서 고수 이상의 등급이거나 디렉토리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어야 하며, 지원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세부적으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지원서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기존에 자신이 쓴 답변 중에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지식들을 스스로 10개 정도 선별하여 지원서에 첨부해야 했다.
선발 대상은 크게 3가지 군으로 나눠져 있다. 국내외 탐방, 물품기기 구입, 그리고 지식나눔이 그것이다. 지식나눔은 자신의 지식이나 활동 경력을 통한 경험을 가지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 봉사활동 차원에서 지식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번 심사는 네이버 운영진 뿐 아닌, 관련 분야의 전문적인 외부 인사들, 즉 PD나 교수, 배우, 여행가 등이 같이 참여하여 검토해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학생에게 200만원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법. 게다가 고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선 우리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하나라도 더 많이 봐두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여행을 좋아하여 늘 카메라를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성격을 가진 나지만, 정작 금전적 여유는 충분치 않아 하루나 1박 2일 정도로만 계획을 잡고 깔짝깔짝 다니기 일쑤였기에, 이번 기회는 충분히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무료한 일상에 던져진 흥미로운 기회, 지식원정대
그럼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이에 대해 고민하기에 앞서 답사에 동행할 학우들을 찾아 연락해보았다. 혼자 가기에는 심심하고, 또한 여럿이 가서 보면 더욱더 느낄만한 게 많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연락한 상대는 오은석군. 고고학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지식도 많지만, 그만큼 다소 엉뚱한 면이 많은 친구였다. 이번 이벤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일단 신라의 고도인 경주 답사로 테마를 잡아보기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일정을 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경주라는 아이템은 조금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주는 좋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새로운 맛이 다소 적고, 식상하다는 느낌을 아무래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백제도 좋지만 백제는 애초에 내가 다니는 대학교가 백제의 고도인 부여에 위치해있고, 이미 여러 번 답사를 다녔기에 굳이 이번 기회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어디가...? 그때 번뜩 생각난 게 바로 가야였다. 가야는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에 치여 살던 작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번성하였고, 백제나 신라와도 경쟁하던 입장이었음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지방 자치단체에서도 이를 가지고 활발한 발굴 빛 보수, 정비 공사를 하여 다니기 좋게 해놓았기에 이곳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날 가야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는 곳은 어디어디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가야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나라인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를 기준으로 생각하였다. 금관가야는 오늘날의 김해, 아라가야는 함안, 대가야는 고령, 소가야는 고성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외에도 여러 소국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가야연맹체를 이끈 맹주국은 금관가야와 대가야였기 때문에 이를 좀 더 중점을 두어 보기로 하였고, 금관가야에서 부산을, 대가야에서 남원을 추가하였다.
교통수단은 애초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세 명과 함께 답사를 다닐 거라는 식의 세부계획을 정성껏 작성하였다. 그때 같이 답사를 가기로 한 정동귀군이 나에게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근데 대중교통으로 이용하기엔 많은 것을 보기 힘들지 않아? 렌트카를 이용하는 건 어떨까?"
라고 하면서 운전병으로 전역한 같은 과 동기인 김사현군을 추천해 주었다. 결국 렌트카를 빌려 답사를 떠나기로 하고, 우리는 이를 추가하여 다시 세부적인 계획을 작성해 네이버에 제출하였다.
역사에서 잊혀진 철의 왕국, 가야로의 여행을 계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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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네이버에 제출을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내던 어느 날, 네이버 측에서 연락이 왔다. '가야의 유적 및 유물 답사'라는 이름으로 지식원정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고 말이다. 애초에 같이 가기로 한 오은석군과 정동귀군, 김사현군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였고, 우리는 그때부터 천천히 답사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일단 네이버에 제출한 계획서대로 답사에 필요한 여러 소품들과 전문서적을 구입하였고, 렌트카를 계약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정동귀군이 기존의 계획대로 하려면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고, 이러면 마지막 끝난 날 렌트카를 돌려주기가 복잡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경남일대에 비해 남원은 전북에 있기에 너무 떨어져 있어, 차라리 다른 지역을 넣는 게 어떨까라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조금 방향을 수정해 보았다.
기존에는 4가야를 중심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가야소국 중 6개국을 가기로 수정하였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는 그대로 두고, 여기에 창녕의 비화가야와 합천의 다라국을 넣기로 하였다. 이 두 곳도 가야의 문화재들이 여럿 있고, 그에 따른 박물관도 건립되어 있기에 좀 더 풍부한 유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D-day를 6월 23일로 잡았다. 그리고 가야의 문화재 뿐 아닌 이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몇몇 유적이나,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나 명승지 또한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5박 6일간의 답사. 가야의 문화권을 다 돌아보기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보다 도전하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힘차게 출발하였다.
자. 이제부터는 5박 6일 동안 둘러보았던 수많은 문화재와 그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여행 때 있던 일 등을 이야기를 이곳에 연재하면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6월 23일. 드디어 답사 첫날이다. 계획으로만 짜 놓았던 답사를 실제로 한다는 점에서 다들 흥분해 있었다. 우리는 일단 두 팀으로 나눠 김해 진영역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나와 정동귀군은 기차로, 김사현군과 오은석군은 렌트카를 가지고 진영역으로 오기로 한 것이다. 오전 11시 정도가 되어 우리는 진영역에서 내리고, 김사현군과 오은석군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움의 인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서로의 짐을 렌트카의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오늘 일정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미리 메신저를 통하여 대강의 일정을 잡아 놓았는데 점심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일단 박물관은 시간을 많이 체류하니깐, 유적지를 우선으로 가자. 수로왕비릉을 먼저 가는게 어떨까?"
운전대를 잡은 김사현군의 제안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비게이션으로 수로왕비릉을 입력하고 그에 맞춰 이동하였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김해는 개인적으로는 4번째 방문이라 크게 낯설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2번 왔었고, 대학생이 되어 답사 차원으로 한번 왔었다. 그리고 오늘은 5박 6일의 일정을 시작하는 출발지로서 김해로 오게 되었다.
수로왕비릉 주차장, 그 곳의 비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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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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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분 정도 만에 도착하여 수로왕비릉 앞의 주차장에 차를 대놓았다. 마침 우리가 차를 댄 곳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주로 마을과 관련된 유적으로 보이는데, 환호, 도랑, 주혈 등이 나왔다고 한다. 환호란 마을 주위를 판 도랑을 일컬으며, 주혈은 기둥구멍을 말한다. 즉 이를 통하여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잇는데, 그 규모를 보아 청동기시대 당시에는 제법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즉 이곳엔 큰 마을 혹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된 마을이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 이러한 추정과 함께 수로왕비릉을 보아야 할까? 사실 수로왕비릉의 근처에는 구지봉이 있다. 구지봉은 가야의 건국신화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서, 이곳에 구간이 올라가 구지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럼 그 구간이라고 하는 이 지역의 지도자들이 거처하던 마을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그 흔적을 쉽게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누구도 쉽게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학문이 바로 고고학이 아니었던가!
홍살문을 지나 수로왕비릉의 입구에 섰다. 책으로만 보던 수로왕비릉의 모습은 어떨까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로왕비릉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는데, 여름철이라 한참 자라나는 잔디를 깎고 있는 분들이 더러 보였다. 입구에서 정면에 수로왕비가 묻혀 있다고 하는 큰 무덤이 있으며, 이보다 앞에서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그보다 좀 더 앞쪽에는 관리사 대문이 있는데, 이를 넘어 들어가 보면 고직사와 돈종문, 그리고 숭보재가 자리 잡고 있다.
국제결혼 수로왕 커플, 알고 보면 연상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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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현의 표준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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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기록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 유리왕이 중국인인 치희와 결혼한 게 조금 더 앞선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를 대략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에 따르면 구간 등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좋은 배필을 얻어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자, 수로왕은 하늘의 명령으로 짝이 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신하를 시켜 망산도(望山島)와 승점(乘岾)에서 기다리게 하니, 정말 서남쪽에서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가 오고 있었다. 이를 들은 구간 등이 그들에게 찾아가 모시려고 하나, 배 안에 있던 허황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느냐?"
그러자 수로왕은 이를 옳게 여겨,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쳐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왕후 또한 나루터에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자신이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그리고 둘은 만나게 되며 왕은 허황옥과 함께 온 사람들에게 여러 선물들을 준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침전으로 가고, 허황옥은 수로왕에게 자신의 이름과 이곳으로 온 사연을 말하였다.
허황옥은 본디 아유타국의 공주로 열여섯 살이라고 한다. 본국에 있을 때가 올 5월로 부왕과 모후가 하늘의 상제가 가락국의 수로와 결혼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상제의 말에 따라 허왕옥을 보내 가야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수로왕은 자기 또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서 둘은 혼인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허황옥은 보주태후(普州太后)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 허왕옥을 맞이하는 수로왕의 태도가 자연스럽고, 또한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수로왕의 나이를 말하면 누구나 놀란다. 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의 나이는 7살. 16살이던 허황옥과는 무려 9살의 차이가 나는 연상연하 커플이다. 물론 신화적인 이야기고, 허황옥이 158세, 수로왕이 159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들어보면 그대로 신용하긴 어려워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조선시대의 문헌인 허목의 <미수기언>이나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는 천축국, 즉 지금의 인도라고 나온다. 그러나 인도에서 가야까지 오기엔 현실적으로 무리가 많다는 점,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허황옥이 아유타국을 출발한 때는 5월이며, 가야에 도착한 때는 7월이기에 이 기간 만에 인도에서 가야로 오기는 힘들다는 점 등을 생각한다면 다른 쪽에서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주로 그 위치를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찾고 있다.
수로왕비릉, 과연 허황옥의 무덤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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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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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이 과연 허황옥의 무덤이 맞을까? 이 대답에 확실한 대답을 하는 이는 없지만, 사실은 아니라고 보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수로왕의 무덤과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주위에 구산동 고분군이 있고 입지 조건이 일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겉보기에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 즉 둥글게 흙을 쌓아 다진 무덤으로 보는데, 내부는 토광묘(土壙墓)나 석실묘(石室墓)로 보기도 한다.
수로왕비릉에서 불과 100m정도 떨어진 구산동 백운대 고분 또한 석실묘이고 신라시대의 분묘이기 때문에 수로왕비릉도 비슷하게 추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야의 건국신화가 얽힌 구지봉과 인접해 있다는 점, 그리고 기록대로 수로왕릉과 1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허황옥이 묻힌 곳이 맞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를 확실히 확인하기가 힘들다. 이미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게 수로왕릉과 함께 도굴 당했으며, 내력이 얽힌 무덤이기에 쉽게 발굴하기가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수로왕비릉이라는 이름으로 그 미스터리를 간직해야 하는 신세다.
수로왕비릉은 조선시대 세종 28년인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인조 25년인 1647년에 영남관찰사인 허적(許積)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원형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장대석을 사용하여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 새겨져 있다.
허황옥을 외국인이라고 보는 견해는 거의 수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하여 김해의 수로왕과 해양의 허황옥 세력이 결합하여 번성하던 무역국가인 금관가야, 즉 가락국의 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국제결혼에 대해서도 아직 사람들의 시각이 온순하지만 않은 지금, 이 둘의 결혼은 선진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우리의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김해 수로왕비릉에 가면, 수로왕비릉의 앞에 자그마한 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은 그냥 일곱 개의 돌이 차곡차곡 쌓아 놓은 모양일 뿐이지만 의외로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띠고 있기에 다른 석탑들에 비해 매우 독특하게 다가온다.
이 탑의 이름은 파사석탑이라고 하며, 파도를 진정시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한다. 희한한 이름처럼 그 연원 또한 매우 깊은 탑이다. 이 파사석탑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황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建武) 24년 무신(48)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해 가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은 이 탑을 싣고 가라 했다. 그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
위의 기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대략적인 파사석탑의 연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 위치를 수로왕비릉이 아닌 호계사라고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그 위치가 호계사에 있다고 써 놓고 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호계(虎溪) 가에 있으며 5층이다. 돌 빛이 붉게 아롱졌으며 질은 좋으면서 무르고, 조각한 것이 배우 기이하다. 전설에는, 허왕후가 서역(西域)에서 올 때에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 한다.
이를 통하여 조선 중기까지는 파사석탑이 지금과는 다른 호계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언제 호계사에서 수로왕비릉으로 옮긴 것일까? 바로 1873년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수로왕비릉 근처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허황옥이 들여온 파사석탑, 과연 가야불교의 시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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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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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의 기이한 생김새를 보고 있다면 여러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은 과연 이게 가야시대의 석탑인가의 여부이다. 석탑이라는 존재는 불교의 존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분한 접근이 필요하다.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은 1백50여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전해오지 않아서 그 지방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가락국 본기>에도 절을 세웠다는 글은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애초에 허황옥과 함께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실 허황옥과 파사석탑을 통하여 남방불교가 가야에 들어온게 아니냐는 의견들이 더러 있었지만, <삼국유사>만 유심히 살펴보아도 이와 불교 전래는 별개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에 이르러 처음으로 그곳에 절을 두었다. 또 왕후사를 세웠는데-아도와 눌지왕의 시대에 해당되니, 법흥왕 전의 일이다-지금까지도 복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는데 그 사실이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이 또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수로왕보다 후대에 비로소 불교가 전래되었고,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일연의 말 그대로 <삼국유사>에는 허황후의 명복을 빌고자 수로왕과 허황옥이 결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액자(額子)에 왕후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밭 10결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왕후사는 장유사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왕후사가 생긴지 5백년 뒤에 장유사 측에서는 왕후사를 없애고 장사(莊舍)로 만들어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읽으면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보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훼손시키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문화재들이 외세의 손에 의해서만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금관가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그러한 기록에 의문을 품고 있다. 정작 불교와 관련된 금관가야의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장유사를 세웠다고 하여, 이를 가야불교의 시초로도 보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부족하다.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가 그 근거지만, 가야시대의 것이 아닌 훨씬 후대의 것이기에, 후대의 윤색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즉 금관가야의 불교를 지금 있는 자료들로서는 확신하긴 힘든 상황이다.
파사석탑, 정말 가야시대의 석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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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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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파사석탑은 정말 가야시대의 석탑일까? 이에 대해서는 차분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파사석탑은 훼손이 매우 심하여 그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략적인 모습은 기록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며,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므로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본초>란 책에 이른 닭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위의 기록 또한 역시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이를 보면 당시에도 그 기묘한 조각이 매우 인상 깊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조각의 흔적을 약간씩만 확인할 수 있고, 그나마 옥개석에서만 볼 수 있다. 기단부나 탑신부의 조각들은 남아있지 않는데, 아마 그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보니 이를 욕심낸 누군가에 의하여 사라진 게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화재에 대한 훼손이 자행됬다면 그만큼 씁쓸한 일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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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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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파사석탑은 앞서 말했듯이 7개의 돌이 쌓아진 모양새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정확한 복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파사석탑의 가장 아랫부분은 연꽃이 아래로 펴져있는 모양, 즉 복련(覆蓮)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런 모양은 주로 석등의 하대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든다. 사실 탑이라면 안정적인 기단석이 있어야하지만, 파사석탑에서는 유실된 모양인지 그러한 기단석을 찾기 힘들다. 이곳에 있는 복련의 하대석은 아마 후대에 복원하면서 근처의 석등과 함께 짜 맞추었기에 생긴 오류로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6개의 돌이 쌓아져있다. 기록에서는 5층탑이라고 하였으므로 아마 돌 하나는 우주석이 아닌 탑신석이나 노반(露盤)으로 생각된다.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돌 중에서 아래의 1층과 2층의 돌에만 조각이 남아 있고, 다른 돌들은 훼손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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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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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과 2층의 추정 옥개석 중 1층의 돌이 더욱더 조각이 섬세하게 남아있다. 앞서 옥개석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지만 상대갑석(上臺甲石)이나 갑석부연(甲石副椽)일 가능성도 있다. 이 돌의 가장 큰 특징은 섬세한 조각이 남아있다는 점인데,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꼭 목조건축에서 공포(栱包)를 보는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다포식(多包式)이라는 형식을 연상시킨다.
별거 없는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파사석탑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생긴다. 조각이 다포식을 표현한 것이고, 그 아래에 우주와 탱주가 놓여 마치 목조건축처럼 생긴 석탑이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면 그 모습은 매우 화려하고, 또한 독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과연 파사석탑이 가야의 것인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긴다.
일단 다포식을 표현한 것이라 친다면 그 시대는 고려 후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다포식은 중국에서는 요나라 때 발생하여 송나라와 원나라 때 널리 쓰였다. 우리나라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들어왔으며, 이 당시엔 그러한 영향들을 바탕으로 독특한 석탑들이 많이 조영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있는 국보 86호인 경천사십층석탑 등이 이러한 예에 속하며 이는 당시 활발한 교역이 예술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에 속한다.
그럼 파사석탑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기존의 가야시대 석탑이라는 이야기와는 별도로 그보다 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목탑의 양식을 상당수 반영하였고, 이를 표현한 매우 아름다운 조각들이 시대가 혼란해 짐으로 인하여 파괴나 도난이 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잔해들은 그러한 훼손의 추억을 지닌 쓸쓸한 잔해인 것이다.
파사석탑은 진기한 모양새 때문에 관심을 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단순히 전설 속에만 자리를 꿰차게 하기보다, 그에 대한 역사성을 파악하여 잠에서 깨우는 것도 후손된 도리가 아니나 싶다. <삼국유사>에 적힌 파사석탑에 대한 시로 글을 맺어본다.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
덕분에 바다 물결 헤쳐왔구나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을 도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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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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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아 거북아 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 首其現也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 燔灼而喫也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구지가>는 가야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수로왕의 설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이 <구지가> 이야기이며, 이 <구지가>가 불려진 장소가 바로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수로왕비릉과 인접해 있으며 도로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가면 바로 구지봉으로 어렵잖게 갈 수 있다.
구지봉은 구수봉(龜首峰), 구봉(龜峰)이라고도 부르는 작은 언덕이다. 구지봉은 그 중에서도 거북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인식되었다. 지금은 아래의 도로 때문에 마치 거북의 머리가 잘린 듯 한 모양새이기에 왠지 모르게 안타깝지만, 당시로는 높지 않으면서도 원만한 구릉지에 김해 시내가 잘 보이기 때문에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신화 속에 나오는 구지봉은, 막상 가보면 그렇게 크게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장소가 갖는 역사성은 상당하다. 구지봉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에 앞서, 구지가에 얽힌 가야의 건국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
구지가가 들려주는 가락국의 건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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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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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서는 구지가와 관련된 수로왕의 이야기와 건국 이야기가 실려있다. 본래 김해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고 하며 본디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사는 곳 북쪽의 구지(龜旨)라는 곳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과 마을 사람 2,3백 명이 거기에 모이자 다시 그 수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 누구 있느냐?"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구간들이 답하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하늘이 명령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면서 산꼭대기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라고 하였다. 그러면 곧 대왕이 내려올 것이라는 말에, 구간들과 마을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윽고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드리워져 땅에 닿는데, 그 끝에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싸여 있었다고 한다.
그 속에는 바로 6개의 황금색 알이 있었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사람들은 다시 보자기로 싸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2일이 지난 그 다음날 마을사람들이 금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모두 어린이로 변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십 수 일이 지나자 이들의 키가 9척에 이르게 되었고, 이 중에서 수로(首露)가 그 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라 가락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5명의 아이도 각자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한 화답으로, 구간들과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구지가였다. 이러한 구지가를 통해 당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제례의식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노래하며 춤을 춘다는 것은 당시 제례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행위였는데, 구지봉에서 하였다는 것은 애초에 이 장소가 제례 의식이 주로 일어났던 장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화에서 나오는 신이적인 의미를 걷어 내더라도 구지봉이 당시 가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국가운영에 제례의 중요성이 어떠하였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하겠다.
구지봉에서 한석봉의 글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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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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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구지봉은 작은 언덕이라 올라가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보면 가야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고, 널찍한 장소가 당시 여러 의식들을 행하기에 적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첫눈에 들어오는 구지봉은 말로만 듣던 것에 비하여 약간 허무한 감은 감출 수 없다.
소나무 숲 사이에 공터가 있고, 그 가운데에는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넙적한 바위 하나가 보이고 김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하나, 그리고 표지판 정도가 전부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구지봉에 대해 약간 실망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오히려 구지봉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구지봉 가운데에 있는 바위를 선돌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바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선돌이란 고대 사람들의 신앙이 들어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바위를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그 위치를 옮겨 세워놓으며 이곳에서 여러 의식을 행함으로써, 바위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이 선돌의 모습을 보아 남근석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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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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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구지봉에는 바둑판식 고인돌 1기가 있다. 흔히들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굳이 고인돌의 모습을 가지고 북방과 남방을 가르기엔 힘든 점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근래 들어서는 남방식 고인돌이나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대신 바둑판식고인돌이나 탁자식고인돌로 부른다.
구지봉의 고인돌은 1기만 있는 게 특이하다. 게다가 김해 시내를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당시 이쪽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던 지배자가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인돌은 종종 무덤이 아닌 제단의 의미로서도 갖는데, 그렇게 되면 선돌과 함께 제례적으로 연관되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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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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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인돌에는 특이하게도 글씨가 새겨져있다. 구지봉에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구지봉석(龜旨峯石)이 그것인데, 글씨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더라도 시원시원하게 잘 쓰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호(韓濩)가 썼다고 전한다.
구지봉은 예로부터 신성하게 여겨지던 장소이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도 남산이 성스럽게 여겨지고, 백제의 부여에서 또한 삼산이라고 하여 일산(日山:금성산), 오산(吳山:오석산), 부산(浮山)이라는 산들이 신성하게 여겨졌다. 고대엔 이런 성소들이 여럿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로왕이 구지봉으로 온 것을 외부세력의 유입으로 보며, 구간은 토착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본다면 수로왕 세력의 유입 후 구간과 큰 마찰 없이 융합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 나가는 데에 있어서 구지봉은 여러 중요한 장소로서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로왕의 탄강설화(誕降說話)가 이곳에 더해져서 성스러운 장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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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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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락국 신화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정조가 쓴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가야시조가락국왕릉치제문(伽倻始祖駕洛國王陵致祭文)'의 몇 구절을 통하여 그러한 후대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기운이 구지봉 언덕에 모이고 氣鍾龜嶽
땅은 계림과 경계 졌으니 地分雞林
빛나는 신인이 燁如神人
하늘로부터 엄연히 임하였네 自天儼臨
이에 영부를 받았으니 乃受靈符
금함에 자색(紫色)의 끈을 매었는데 金盒紫纓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군장이 되니 君乎牧乎
은택이 남쪽 바닷가에 흘러넘쳤네 澤流南瀛
밭에는 서로 두둑을 양보하는 사람이 있고 田有讓耦
집들은 모두 표창할 만한 덕행이 있어서 屋有比封
백성들이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여기니 于于皞皞
혁서의 선통이었네 赫胥禪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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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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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에 방문하였을 때 유적지 팻말 중 가까운 곳에 구산동고분군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사실 애초에 답사 기획안을 짤 때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답사를 와서 보니 거리도 가깝기 때문에 가볼까란 고민을 하였다. 차후에도 이런 식으로 근거리에 있는 유적지를 방문해서 살펴보기로 한 후, 간단하게 길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일단 수로왕비릉의 입구 쪽에 있는 안내원에게 가서 구산동고분군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 그렇게 멀진 않아요. 저쪽 골목으로 쭈욱 올라가시면 됩니다."
라는 간단한 설명과 가까우니 부담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그 설명에 따라 천천히 구산동고분군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 내비게이션에도 구산동고분군이 표시되어 어렵잖게 찾아 갈 수 있었다.
구산동고분군은 자그마한 언덕에 있었다. 작은 놀이터 옆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가파른 계단이었다. 계단 위로 올라가자 전망이 탁 트이면서 공터가 보이는데, 바위들을 넘어 고분처럼 보이는 봉분과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바로 구산동고분군이었다.
그런데 애초의 표지판에는 '구산동고분군'이라 적혀져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김해 구산동 백운대 고분'이라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애초에 고분 뒤에 '군(群)'이 붙으면 여러 개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 되는데, 정작 이곳에는 고분이 1기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나름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단순해 보이는 문화재 이름에 복잡한 사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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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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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해 구산동고분군(龜山洞古墳群)은 사적 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총 4기의 고분으로 이뤄졌는데 크게 보면 고분군이 2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구산동의 고분군과 대성동의 고분군으로 나눠지는데, 우리가 온 곳은 이 중에서도 대성동에 있는 고분, 즉 백운대 고분이었다. 둘은 300여m가 떨어져있기에 사실 같은 고분군으로 묶기엔 약간 어중간한 면도 있다.
구산동의 고분군은 수로왕비릉 뒤편에 있으며 2기가 있는데, 그 중 1기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학술적인 발굴을 거쳤고 당시 사적 제 109호 삼산리고분(三山里古墳)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광복 후 1963년에 다시 사적 75호로 개정되고 명칭 또한 구산동고분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성동에 있는 고분, 즉 백운대 고분은 그 때도 도굴된 무덤 1기가 있다고 보고되었는데 근처에 이와 비슷한 유구가 더 있으리라 생각되어 구릉지 일대 약 3000평을 추가로 사적 제 75호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1997년 3월 부경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애초에 보고된 백운대 고분 외에 별다른 유구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3일부터 7월 30일까지 발굴조사를 하게 되어 이 고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선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유적이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아 사적에서 해제되게 되었다. 대신 경상남도 기념물 223호로 지정되었다.
즉 수로왕비릉의 뒤쪽에 있는 2기의 고분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었지만 둘이 약간의 거리차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따로 있는 무덤처럼 느껴진다. 백운대 고분은 말 그대로 백운대라고 하는 구릉에 단독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김해 구산동 백운대 고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성동에 있기에 명칭의 비애가 참 얄궂게 느껴진다. 하긴 안동 신세동칠층전탑도 알고 보면 법흥동에 있는데도 애초 문화재 기재의 오류 때문에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지 않던가?
도굴된 고분, 하지만 다행히 남아 있는 건 남아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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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경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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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에서 구산동고분군, 즉 백운대고분은 좀 독특한 존재이다. 바로 봉토분, 즉 흙으로 봉분을 쌓아 올린 무덤이기 때문이다. 이게 뭐가 특별하냐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금관가야시대의 다수 무덤들은 봉토분이라기보다도 목관묘나 목곽묘, 즉 나무널을 써서 무덤을 만든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따로 흙을 쌓는, 즉 봉분을 쓰지 않는다. 가락국 왕실의 무덤이라 추측되는 대성동고분군이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야시대 무덤의 변천과정을 본다면 구산동고분군의 무덤형식은 대성동고분군의 그것에 비하여 좀 더 시대가 떨어진다. 그 시기를 주로 6세기 말엽으로 잡는데, 금관가야의 멸망이 532년, 즉 6세기 초라는 점에서 이미 금관가야시대가 아닌 신라시대의 무덤인 셈이다. 무덤은 발굴 이전부터 도굴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때문에 유구가 부분적으로 노출된 상황이었다.
이 백운대고분의 구조를 고고학에서는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즉 굴식돌방무덤이라고 부른다. 횡혈식석실묘란 돌을 쌓아 방처럼 만들어 놓고 통로를 만들어 시신을 넣을 수 있게 한 무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반 대에 이르러 주로 보이고 또 널리 유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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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경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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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운대고분은 횡혈식석실묘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무덤의 구역을 표시하였다. 이때 호석을 2줄로 둘렀는데, 안쪽의 호석은 주석실과 부장석곽 1기를 감싸고 있으며, 바깥쪽의 호석은 부장석곽 1기를 감싸고 있다.
부장석곽이라는 것은 피장자, 즉 무덤의 주인이 쓰던 물건들이나 저승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따로 보관하는 유구이다. 이러한 물건들을 흔히 부장품, 혹은 껴묻거리라고 하는데 가야에서는 이렇게 무덤 외에 따로 보관을 하는 부곽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부장석곽이라는 존재는 이 백운대 고분이 대표적이다.
유물들은 총 58점이 발견되어 도굴된 고분 치고는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주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토기로서 총 44점이 발견되었다. 토기들의 양식을 따져 보았을 때 6세기 후기나 말엽 정도의 유물로 보인다. 또한 무기나 농공구가 포함된 철기가 11점, 금동제 장신구가 3점이 발견되었다.
가야 고도를 신라 무덤이 바라보는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고분의 주인은 신라인이다. 하지만 완전한 신라인이라고 보기엔 가야적인 색채가 더러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을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그리고 신라의 신하로서 당시의 김해를 다스린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금관가야는 대가야와는 달리 신라에게 항복함으로써 나라를 바쳤다. 그래서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인정되었으며, 또한 신라의 정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무력이나 김서현, 김유신과 같은 인물이다. 최근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서현과 김유신이 등장하는데,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이다.
이 백운대고분의 주인 또한 김무력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추측된다. 김무력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신라 정계에 진출하여 관산성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 입지를 다졌지만, 이 무덤의 주인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김해의 땅을 다스리면서 살았으리라.
백운대고분의 입지는 그야말로 김해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다. 등 뒤로는 가야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진 분산성이 있으며 가까이에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이 있다. 그리고 대성동고분군이나 수로왕릉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추측컨대 사후에 자신이 다스리던 가야의 땅을 죽어서까지 내내 보고 싶었기에 일부러 백운대에 무덤을 써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단독분, 즉 홀로 있는 무덤은 그에 대한 세력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피장자의 요청에 의하여 일부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무덤 또한 후자의 경우로 생각하여 죽어서도 가야의 땅을 바라보고, 또한 가야를 위해 살던 자신을 위안하고자 이곳에 무덤을 쓴 게 아닐까? 젊은 날 이 백운대에 올라 가야를 바라보던 망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수로왕릉은 김해를 대표하는 가야의 유적지 중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사적 제 7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단순히 무덤 하나만 딸랑 있는 게 아닌, 여러 건물들이 같이 있어서 말 그대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로왕은 가야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제사가 계속 이어졌고,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숭상되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다른 나라의 시조들의 무덤이 확실치 않은 경우도 있다는 점을 볼 때,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가야 시조의 무덤이 이렇게까지 가꿔져있다는 점은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수로왕릉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마비(下馬碑)였다. 하마비가 표시된 구역부터는 말에서부터 내리는 게 조선시대의 법도로, 주로 사찰이나 향교, 혹은 궁궐이나 왕릉 같은 중요한 장소들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수로왕릉 또한 왕릉이기 때문에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수로왕릉의 입구는 크게 보면 2개로서, 숭화문과 숭경문이 그것이다. 현재 숭경문은 폐쇄되어 있고, 숭화문을 통해서만 들락날락 거릴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외에 작은 문들이 있지만 잘 쓰이진 않는다.
납릉으로 가는 길목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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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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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이 묻힌 곳, 즉 수릉(首陵)이라고도 불리는 납릉(納陵)으로 가는 길목에는 여러 건물들과 문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이기 때문에 일부러 여러 건물들을 두어 격을 높인 것이다. 왕릉에 진입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는데, 입구인 숭화문에서 일직선으로 홍살문, 가락루, 납릉정문, 수로왕릉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여러 건물들을 배치하여 제례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숭화문에서 입장권을 끊은 뒤, 묘역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바로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궁궐이나 향교, 사당, 왕릉 등 신성한 구역의 앞에 설치해 놓는다. 이 홍살문은 신성한 공간으로 진입함에 있어서 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해야 한다는 의미로 세운 것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수로왕릉의 홍살문은 윗부분의 가운데에 이태극의 3지창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 다음으로 보게 되는 것은 가락루(駕洛樓)라는 이름의 누문이다. 언뜻 들으면 중국집 이름 같기도 하지만, 가락은 가야를 의미하며. 이 문은 사실상 수로왕릉의 묘역의 정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청이나 서원, 궁궐, 사찰 등을 가보면 입구에 누문을 둔 경우를 더러 볼 수 있으며, 이를 둠으로 인하여 더욱더 신성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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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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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문을 지나면 왼편에 숭신각(崇神閣)이 보인다. 숭신각을 신도비각(神道碑閣)이라고도 하며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종 22년(1885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의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뤄졌으며, 198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면서 보수되었다고 전한다. 신도비라는 것은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두어, 죽은 이나 무덤에 대하여 적어 놓은 비석을 말한다. 즉 숭신각에는 그러한 비를 봉안한 건물이다.
반대편에는 시생대와 숭정각이 있다. 시생대(豕牲臺)는 춘추대제 때 제사에 쓸 돼지를 잡는 장소이며, 숭정각(崇禎閣)은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을 봉안해 놓은 장소이다. 봉안된 영정은 오낭자화백의 작품으로서 1991년에 둘 다 표준영정으로 지정 되었다.
수로왕릉, 그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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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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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릉을 살펴보기에 앞서 납릉정문부터 일단 살펴보자. 납릉의 바로 앞에는 납릉정문(納陵正門)이 있다. 납릉정문은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입구에서 납릉을 바라볼 때 정면에 있지 않고 오른편에 치우쳐져 있는 게 특징이다. 납릉정문은 납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는데, 정작 납릉정문에 새겨진 조각 때문에 후세들에게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쌍어문(雙魚紋)이 그것인데, 이 무늬를 가지고 그 원류를 찾고자 여러 학자들이 의견을 내었다. 이를 가지고 아유타국과 허황옥의 정체를 밝히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확실하게 정의된 것은 없다. 흔히 쌍어문에서 물고기 사이에 있는 탑의 모습이 파사석탑과 닮았다고 하지만, 정작 파사석탑을 보면 그렇게 닮은 편은 아니다. 공주 마곡사 5층석탑이나 보성 대원사 수미광명탑 같은 라마교에서 보이는 탑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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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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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릉정문 너머엔 수로왕이 묻혀있다고 전하는 납릉이 있다. 원형의 봉토분으로서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로 거대한 편이다.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그 격을 높여 놓았다. 하지만 이 납릉이 과연 수로왕의 무덤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릉은 거등왕이 199년에 조성하였으며 당시엔 왕릉 옆에 편방(便房)이라고 하는 작은 건물만 있었다. 이 당시 가야의 무덤은 대개 목곽묘였으며 낮은 봉분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보기엔 힘든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하여 현실적으로 발굴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무덤의 형태가 가야시대의 것과는 다르지만 신라시대 문무왕이 수로왕릉에 사당을 세우면서 동시에 봉분을 크게 성토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당시 신라 왕실의 무덤 양식과 비슷하게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체적인 확인을 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 왜 이러한 말들이 나오는 것일까? 이유는 조선시대의 문헌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수록된 기록 때문이다. <지봉유설>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년에 왜(倭)가 수로왕릉을 도굴하니, 광(壙) 속이 매우 넓었고 두골은 크기가 동분(銅盆)만하며 수족과 경골(脛骨)은 매우 컸다. 관 곁에 두 여자가 있었는데, 얼굴 모습이 살아 있는 것 같으며 나이는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광 밖으로 내놓자 곧 그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도 순장(殉葬)된 자들일 것이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기엔 무리가 있다. 관 곁의 두 여자가 순장자라고 치면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확률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즉 설화적인 이야기이며, 묘광이 크고 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이러한 형식은 횡혈식석실묘, 즉 굴식돌방무덤에서 널리 보이는 형태인데, 당시 신라 왕실의 묘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로왕릉이 18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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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수로왕릉을 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수로왕릉은 사실 나름대로 여러 사연이 얽힌 무덤이지만, 이를 지키려고 하는 후손들의 노력이 많았기에 지금처럼 우리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금관가야, 즉 가락국이 번영하던 때엔 이곳에 종묘를 세워 크게 제사를 지내곤 하였었다. 하지만 가락국이 멸망당한 뒤에는 얼마간 제사가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가야 세력의 도움을 받은 문무왕이 661년 3월에 조서를 내린 이후부터 다시 수로왕릉에선 관리와 제례가 이뤄지게 된다.
당시 문무왕은 자신에게 있어서 수로왕이 15대의 시조가 된다고 하며 남다른 감정을 보인다. 그래서 17대손인 갱세 급간(賡世 級干)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매년 명절마다 제사를 지냈고, 거등왕이 정했던 연중 다섯 날에도 그대로 제사를 지냈다.
이후로도 고려와 조선에 와서도 수축과 보수가 이뤄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도굴로 인하여 황폐화되자 인조 24년(1646년)에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의 능비와 생석(牲石)을 세웠으며, 정조 17년(1793년)에는 경상감사 조시준(趙時俊) 등의 장계를 받아들여 거의 모든 건물들을 새로이 건축하고 전각들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전통들이 그대로 받들어져서 숭선전제례(崇善殿祭禮)가 열린다. 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있다. 조상의 무덤을 지키고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이러한 소중한 유형, 무형문화재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존속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수로왕릉에 대한 제사는 수로왕릉이 조성된 199년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뤄져왔다. 물론 중간 중간 사정에 따라 제사가 끊긴 적도 있지만, 가야 이후 왕조들인 신라나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왕릉으로서 관리되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김해 김씨 같은 유력한 가문들이 자기 조상을 숭앙하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로왕릉의 관리와 제사에 대해서는 다른 유적들에 비해서도 여러 사정들이 있었다. 특히 가야의 멸망 이후에 이 수로왕릉에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막기 위한 후손들 노력 때문일까? 수로왕릉에 대해서는 다른 무덤들에 비해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진다. 특히 <가락국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여러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개중에는 귀신 이야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럼 한번 <가락국기>의 가야괴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로왕 영정에서 피눈물이 쏟아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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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에 의하면 신라 말기 잡간(匝干 : 잡찬) 벼슬에 있던 충지(忠至)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의 부하로 아간(阿干 : 아찬) 벼슬에 있던 영규(英規)라는 자가 있었다. 충지는 힘으로 금관성, 즉 김해를 빼앗고 스스로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영규는 그러한 충지의 힘을 믿고 수로왕릉의 제향(祭享)을 뺏어 멋대로 제사를 올렸다. 단오날에 제사를 올리던 중 사당 대들보가 이유 없이 무너져, 영규가 그 자리에서 깔려 죽게 되었다.
이를 들은 충지는 한탄하며 수로왕의 진영(眞影 : 영정)을 그려 모시게 되었다. 3자에 이르는 비단에 진영을 그려 벽 위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경건히 받들었는데, 사흘도 되지 않아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것도 거의 한 말이나 되는 많은 양의 피로. 충지는 너무나도 깜짝 놀라 진영을 불살랐다. 그리고 수로왕의 직계손으로 알려진 규림(圭林)을 불렀다.
"어제도 불상사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날 수 있는가? 이는 정녕 묘의 위령이 내가 화상을 그려 공양함이 불손하다고 크게 노하신 것 같다. 영규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매우 괴이히 생각되고 두려워서, 화상을 불살라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손이니 그 전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합당하겠다."
이어 규림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인 간원경(間元卿)이 뒤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 그러던 어느 해 단오날, 죽은 영규의 아들인 준필(俊必)이 갑자기 수로왕릉의 사당에 와서 간원경이 차려놓은 제물을 치워버리고 자기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제사 도중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수로왕릉을 지키는 귀신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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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이라고 역시 도굴과 강탈의 위험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로왕릉에 수많은 금과 옥이 있다고 하여 이를 훔쳐가려는 도적들이 있었다. 도적들이 수로왕릉에 들어서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활에 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도적들을 향하여 화살을 겨누더니 순식간에 일고여덟 명을 맞혀 죽였다. 이를 본 도적들은 혼비백산하였다.
그러나 도적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더 준비하여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갔다. 이번엔 그 용사가 없었지만 대신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다. 크기는 30자가 넘고 눈빛은 번개 같았다고 하는데, 순식간에 여덟아홉 명을 물어 죽였다고 한다. 기록에서는 이들이 수로왕을 지키는 신물(神物)이라고 전한다.
고려 성종 10년(991년)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로 있던 조문선(趙文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양전사는 당시 토지 측량을 맡은 관원인데, 그는 수로왕의 능묘를 조사하면서 그 능묘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많아 백성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처음엔 허락하지 않았으나 집요한 요청에 결국 설득되어 수로왕의 묘역을 줄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문선은 즉시 행동에 옮겼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조문선은 어느 날 몹시 피곤함을 느껴 잠에 들게 되었다. 바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일고여덟 명의 귀신들이 밧줄과 칼을 잡고 조문선에게 말했다.
"너에게는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악몽을 꾼 조문선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병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 상태로 밤에 도망쳤는데, 관문을 지나서 그만 죽게 되었다고 한다.
수로왕의 저주?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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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위 가야괴담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유명한 '투탕카멘의 저주'가 생각난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봉상왕 5년(296년)에 고구려를 침입한 모용외가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도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굴을 하던 도중 갑작스레 병사들이 사망하고 음악소리가 흘러나오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퇴각한 일이 있다.
또한 신라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유례 이사금 14년(297년)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신라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던 일이 있었다. 신라군은 이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퇴각하게 되는데 갑자기 대나무 잎을 머리에 꽂은 병사들이 신라군에 합세하여 이서고국의 병사들을 무찌르게 된다. 적군을 없앤 뒤 그들을 보니 수만개의 대나무 잎이 미추 이사금의 무덤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돌아가신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 자신들을 도왔다고 생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하나같이 그에 따른 목적성을 지닌다. 바로 왕릉에 대한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과 이를 어기면 철저한 응징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또한 소위 가야괴담을 보면 수로왕의 직계후손, 즉 김해 김씨가 주로 제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또한 제사를 행하는 세력의 정통성을 말한다. 특히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김해를 장악한 충지마저도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세력들 또한 수로왕릉과 토착세력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수로왕릉 또한 도굴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기록인 <지봉유설>과 <미수기언>, 그리고 <임하필기>에 보면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하여 도굴되었다고 나온다. 물론 순장된 2구의 미녀 시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이한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훼손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동안 수로왕을 지키던 귀신들이 이땐 힘을 못 쓴 셈인가? 왠지 모르게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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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본 내용들엔 수로왕릉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 자칫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수로왕릉 덕분에 죄에서 방면된 사례 또한 있다.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죽소(竹所) 권별(權鼈) 선생의 <해동잡록>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정희량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정희량(鄭希良)은 그가 모시던 연산군에게 경연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이로 인하여 큰 미움을 받게 된다. 결국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해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귀양 도중 어머니를 여의게 되어 자신의 비애와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 수로왕릉을 찾는다. 수로왕릉을 찾은 그는 글을 지어 하소연하였는데, 그날 저녁 꿈에서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정희량에게 나타나 "너는 장차 방면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그 해 겨울, 정희량은 방면되게 된다. 이처럼 수로왕릉은 자신이 미워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주기만 하는 무서운 존재가 아닌, 자신을 받들거나 찾아오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로왕에 대한 제례는 아직도 이어진다.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 11호인 '숭선전 제례(崇善殿祭禮)'가 그것인데,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열린다. 이러한 제례가 아직도 이어진다는 것은 수로왕을 받들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야괴담 또한 그러한 후손들의 노력이 설화로 만들어져 후세에 전해진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설화는 단순한 옛날의 이야기일 뿐만 아닌 그 속에 역사적인 사실들도 종종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에 관한 여러 설화들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에 관련된 여러 전승들은 설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역사적인 내용들도 여럿 있다. <가락국기>에는 그러한 일련의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끄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신라 탈해이사금과 관련된 기록이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김수로왕과 신라 탈해이사금은 상당히 대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히 설화로만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끄집어 낼 수도 있다.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과 탈해이사금의 조우와 대결에 대해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실존성에 대해 논란이 되곤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에서 해석하여 두 이주세력간의 대결을 설화화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일단 이 설화를 한번 살펴보면서, 그 역사성에 대해 해석해보기로 하자.
<가락국기>에서 전해지는 탈해이사금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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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에는 탈해이사금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완하국(玩夏國) 함달파왕의 부인이 임신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오니 그의 키는 다섯 자였고 머리의 둘레는 한 자나 되었다. 혼연히 대궐에 나아가서 왕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고, 나는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하네. 나는 감히 천명(天命)을 어기어 왕위를 남에게 줄 수 없으니,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당신에게 맡길 수도 없네."
"그렇다면 기술(奇術)로써 승부를 결정합시다."
"좋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촌음(寸陰)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 탈해가 본모습대로 돌아오니 왕도 또한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이에 엎드려 항복했다.
"제가 기술을 다투는 장면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서 죽음을 면함은 아마 성인께서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仁德)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 해도 이기기는 진실로 어렵겠습니다."
곧 탈해는 하직하고 나갔다. 인교(麟郊) 변두리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 배가 와서 대는 뱃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슬그머니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반란을 꾸밀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을 실은 배 500척을 보내어 그를 쫒았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도망하니,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이 기사(記事)에 적힌 일은 신라 쪽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석탈해는 왜 가락국에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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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신라 왕족 석씨의 첫째 왕이자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이다. 신라는 박씨, 김씨, 그리고 석씨가 왕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주로 세력변화에 따라 서로의 합의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왕위계승이 이어졌다. 석씨는 박씨나 김씨에 비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진 못하였으나 신라 초기엔 왕족의 일원으로서 활약하였다.
<가락국기>에서는 탈해이사금의 출자를 완하국이라 적어 놓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적으면서 동시에 정명국(正明國)이나 화하국(花廈國) 출신이라는 설도 제시해 놓았다. 그러면서 용성국의 위치를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리에 있다고 밝혀놓았다.
탈해이사금, 즉 석탈해가 완하국을 떠나 가야에 왔다는 사실은 흥미로우면서도 단순히 설화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도 탈해왕이 금관국, 즉 금관가야의 해변에 닿았다가 다시 신라로 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사실은 이 설화가 단순한 설화로만 치부하기 힘들게 한다. 역사성을 부여한다면 석탈해 세력은 신라로 가서 권력층의 일부가 되기 전 가야에 먼저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탈해왕의 키를 9척이라고 적은 것에 비해, <가락국기>에서는 키가 5자이고 머리 둘레가 1자로 적고 있다. 수로왕의 키가 9척임에 비한다면 석탈해의 모습은 흡사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9척이라고 하는 것과 비교하여 좀 더 시간적으로 앞선 일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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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석탈해는 수로왕에게 가서 다짜고짜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수로왕이 왕의 자리를 내놓을 수 없자고 하자 서로의 기술, 즉 둔갑으로 승부를 가르자고 한다. 한국 설화에서의 둔갑은 흔히 볼 수 있으면서 신이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펼치는 기술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도 하백과 해모수가 서로 둔갑을 겨루는 것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예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둔갑겨루기의 승자는 수로왕. 석탈해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만 자리에서 물러선다. 그러면서 수로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인덕이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석탈해가 배를 타고 달아나자, 오히려 군대를 동원하여 뒤쫓는다. 문제는 여기에서 함선을 500척이나 동원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설화에 나오는 것으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500척이라는 숫자는 당시 쉽게 동원하기엔 큰 무리가 따른다. 삼국통일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해전인 백강구싸움에서 신라의 편을 든 당군의 함대가 170척, 백제의 편을 든 일본군의 함대가 400척 이상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특히 그렇다. 가야의 모든 함대를 동원하더라도 500척을 동원하기 무리인데 겨우 석탈해를 쫒기 위해 500척이나 동원 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 이 기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로왕과 탈해왕의 대립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면, 둘 다 이주세력이고 가야국 내에서의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수로왕이 된 것이며, 그에 따른 군사적인 행위가 있었으리라. 500척의 함선은 이를 설화화 하는 와중에서 가야국의 힘을 과시하려던 의도에서 덧붙여진 게 아닐까 싶다.
역사 속의 수로왕. 그 이미지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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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가락국기>의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기엔 무리인 부분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기록에서 수로왕의 존재가 보인다는 점을 볼 때 무조건 가상인물로 보기도 힘들 듯하다.
<삼국사기>에서도 수로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내용 자체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썼기에 가야에 대한 내용은 약간씩 언급되는 정도일 뿐이어서 건국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가 없다는 점은 아쉽다.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음집벌국과 실질곡국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이를 파사이사금이 중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파사이사금도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이때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게 많다고 하여, 그를 초청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수로왕은 음집벌국에게 그 땅을 주기로 하였고, 문제가 해결된 것을 기념하여 신라에서 연회를 베풀게 되었다. 이 연회는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집단인 6부에서 관장하였는데, 이중 5부에서는 두 번째 관등인 이찬을 보내는데, 한기부에서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냈다. 이를 본 수로왕은 크게 노하여 그의 종인 탐하리를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여 버리고 가야로 떠나버리는 국제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수로왕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신비로우면서도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탈해이사금과의 대결이나 신라에서의 일을 본다면 결코 인자한 할아버지라기보다도 한 성질 있으면서도 오만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그래도 왕으로서 품격이 떨어진다고 보기보다 인간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과한 시선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수로왕의 태도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보기보다 역시 시조왕다운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한 왕조의 시조는 유화하고 인자하기보다도 강하면서도 확실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석탈해나 신라에서의 이야기는 그러한 수로왕의 진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파사이사금이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을 죽인 수로왕에게 해코지는커녕 항의조차 못하고 음집벌국을 정벌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을 본다면, 수로왕 또한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고, 신라 또한 이를 응징하기엔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고대의 인물들은 고리타분하고 온화하다고만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그 면모를 바라보면 인간적이면서도 강한 모습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역사가 지금보다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은, 훨씬 다양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가야는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역사 기록은 적지만, 발굴된 유적들과 유물들은 결코 적지 않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우리는 가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고, 빈약한 기록을 대신하여 그 역사를 찾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특히 가야의 유물들은 신라나 백제에 비해서도 결코 적은 편이 아니기에, 이에 대하여 여러모로 정리와 보존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박물관은 이러한 자료들을 가장 풍성하게 담고, 또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가야문화권에서 가야와 관련된 박물관은 많은 편인데, 이는 다른 백제나 신라문화권 박물관들 수와 비교해 봤을 때에도 매우 이례적이다. 가야를 다루고 있는 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군박물관, 복천동고분군박물관, 창녕박물관, 대가야박물관, 우륵박물관, 합천박물관, 함안박물관 등으로 그 숫자가 적지 않고, 또한 지자체별로 세운 곳들이 많다.
이는 가야가 지역별로 개별적이면서도 독특한 문화를 가졌고, 지자체에서 주요 고분군 일대에 박물관을 세우는 등의 방식으로 충분히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각자 독특한 모양새로서 박물관을 운용하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과 대가야박물관이다. 그 중에서도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를 전반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다른 박물관보다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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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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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은 1992년에 착공되어 1998년에 개관된 이후 가야 유물들을 전시하는 중요한 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2008년에 상설전시관을 새단장하면서 과거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모습은 하늘에서 봤을 때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검은색 벽돌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이는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 한 것이라고 한다.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눠져 있으며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크게 두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으며 제 1전시실은 '가야로 가는길'이라는 테마로, 제 2전시실은 '가야와 가야사람'이라는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가야가 세워지기 이전, 즉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변한을 주로 다뤘으며, 후자는 금관가야를 비롯한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에 대해 다루고 있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다른 유물보다 중요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세 가지 유물에 대해 우선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그림, 그 주인공은?
국립김해박물관은 주로 가야에 큰 비중을 두었지만 가야로의 이행기에도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주요 유적지 유물들을 전시한다. 그 중에서도 창녕 비봉리 패총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패총이란 조개껍질 등 당시 생활 쓰레기들이 퇴적되어 있는 생활유적으로, 특히 이곳은 신석기시대 패총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저습지 유적이다. 이곳에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측되는 8천 년 전 배가 출토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유물들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그림이다. 과연 가장 오래된 동물그림은 어느 동물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멧돼지다. 멧돼지는 예로부터 선조들의 수렵생활 주요 대상 중 하나였다. 멧돼지의 고기는 식량으로도 공급되었으며 그 뼈와 송곳니 등은 장식품이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안면도 고남리패총에서 발견되는 동물 뼈도 사슴과 멧돼지가 주종을 이루는 등 선사시대에 있어 멧돼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유물은 전체적으로 검은 빛을 띠는 토기조각이며, 그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완벽히 남아 있는 게 아닌 크게 세 조각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이어 놓았다. 당연히 본래 유물은 더 컸으리라 보며, 동물그림의 묘사가 섬세하게 잘 되어 있다. 뾰족한 등과 통통한 몸을 보고 주로 멧돼지로 추측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선사시대의 동물들이 그림에 그려지는 경우엔 주술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동물들을 그림으로서 그 동물을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그러한 사례로서는 대표적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을 가지고 당시 수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또 관련된 유물도 여러 곳에서 출토된다.
청동 솥에 콜라 한 병이 다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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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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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면 청동 솥 하나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설명에는 "콜라 한 병이 들어갈까요?"란 질문을 적어 놓았다. 겉보기에 청동 솥이 그렇게 크지 않아 과연 한 병이 다 들어가긴 어려울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8ℓ로서 거의 1되에 가깝다. 이를 보고 이 청동 솥이 물품의 부피를 재기 위한 그릇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청동 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기엔 너무나도 귀한 물건이었다. 즉 외국과의 교류로 인하여 들어온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 대상은 당시로선 주로 중국, 그것도 낙랑군과의 교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청동 솥을 한자로는 동정(銅鼎)이라고 하는데, 鼎이란 발이 3개 달린 솥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이 솥 아래에 불을 피워 음식을 데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주로 제례용으로 사용 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 솥의 윗부분에는 중국 한대의 전서체로 "西 宮鼎, 容一斗, 幷重十七斤七兩, 七"라고 새겨져 있다. 이런 유형의 청동 솥은 중국 황하강 중하류에서 주로 출토되고 우리나라에서도 더러 보이지만 명문이 새겨진 경우는 흔치 않다. 또한 이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정도로 보는데, 매장된 때는 기원후 3세기 정도로 보고 있다. 이처럼 유물의 제작연대보다 훨씬 뒤에 매장되는 경우를 더러 찾아볼 수 있는데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에서도 2세기에 제작된 청동거울이 5세기의 무덤에 묻힌 게 그러한 사례라고 하겠다.
이 유물은 김해 양동리 유적의 322호분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김해 양동리 유적은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군 중 하나로서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등 500여기의 무덤에서 토기, 청동기, 철기 등 5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존속한 유적이다. 유적의 규모를 보아 금관가야의 중요한 세력이 웅거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유물은 그 당시 지배층의 일원이 사용한 것이라 추측된다.
조명 아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수레바퀴모양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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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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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돌아다니다보면 한 쪽에서 어두운 조명 아래에 밝게 빛을 받고 있어 유난히도 돋보이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국립김해박물관은 조명 디자인에 꽤 신경 썼는데 이런 식의 효과를 통해 유물의 고고한 자태를 묘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그런 조명을 받는 유물 중 '수레바퀴모양토기'는 그 특이한 모양새로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끈다.
수레바퀴모양토기[車輪形土器]는 양쪽에 구멍이 뚫린 휘어진 원통 같은 뿔잔의 양 옆에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고, 그 아래에 대각(臺脚)이 달려있는 유물이다. 이와 흡사한 유물로 의령 대의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의 보물 제 637호인 차륜식토기가 있다. 의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이 토기엔 태엽 같이 독특하게 생긴 장식이 뿔잔의 위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럼 왜 이렇게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이 토기에 달려있는 것일까? 토기의 제작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유형의 토기를 흔히 상형토기(像型土器)라고 하는데, 상형토기는 사물이나 동물 등을 형상화하여 토기에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유물들은 주로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며 주로 고분군 내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고분은 결국 죽은 자의 무덤이다. 즉 이 유물도 그에 맞춰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상형토기는 애초에 그 죽은 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수레바퀴모양토기의 모습을 보고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지만, 죽은 자를 저승으로 운반한다는 의미도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국립김해박물관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유물들이 있으며 이곳에서 소개한 유물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2008년의 상설전시관 새 단장을 통하여 조명과 디자인에도 신경을 썼고, 특히 동선을 고려하여 관람로를 조성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가야인들의 직접적인 생활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김해답사에 있어 반드시 필수적인 코스는 역시 이곳이 아닌가 싶다.
가야는 문헌기록이 적지만 고고학적 유적이나 유물은 다른 신라나 백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을 자랑한다. 특히 유물들은 다양하면서도 수량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토기다. 토기는 옛 사람들이 쓰던 그릇이나 항아리 등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다양한 모양의 용기를 여러 방법으로 사용하듯이, 그 당시 사람들도 다양한 종류의 토기를 만들어서 썼다.
가야토기는 소박한 모습이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이 자아낸 세련미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신라토기의 경우 직선적이지만, 가야토기는 곡선적이기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더해진다. 게다가 가야는 흔히 알려졌듯이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소국마다 다 약간씩 다른 토기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다채롭다는 인상을 준다.
지역으로는 주로 낙동강을 기준으로 삼아 낙동강 동안을 신라토기, 서안을 가야토기로 본다. 지역 범위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넓은데 가야의 토기들이 경남 서남부권을 넘어 전북이나 전남에서도 보이기도 한다. 교역한 산물로서 백제나 신라, 일본에서도 흔적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가야토기는 제작방법과 소성상태를 가지고 적갈색연질토기(赤褐色軟質土器)와 회청색도질토기(灰靑色陶質土器)로 나눈다. 시대에 따라서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기도 하며 이 경우 당시 발전과정 및 정치 상황과 연계시켜 이야기하곤 한다. 당시 금관가야나 대가야 등이 있었던 지역을 김해식, 고령식 등 명칭을 붙여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항들이 매우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야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절대로 빼먹을 수 없는 게 바로 이 토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그럼 국립김해박물관에 진열된 토기들을 중심으로 가야토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연질토기가 적갈색을 띠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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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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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토기를 이야기 할 때 흔히 도질토기를 이야기한다.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토기들이 있었지만, 도질토기부터 가야토기만의 개성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질토기들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 전 토기들을 일단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지역에선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적갈색 민무늬토기와는 다른 회색 계통 경질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는 3세기 말까지 이어진다. 이를 고고학에서는 김해식토기 또는 와질토기라고도 한다. 이들 토기 모양은 각 지역별로 차이가 없고, 거의 비슷해서 진변한(辰弁韓) 공통문화라고도 부른다. 4세기 이후로는 대부분 토기들이 보다 더 단단한 회청색 경질토기로 발전하는데, 4세기 것을 고식 도질토기, 5세기 이후 것을 신식 도질토기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적갈색연질토기의 경우 주로 생활유적인 패총과 주거지, 매장유구 등에서 고루 출토되고,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생산기술을 계승 발전시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이들은 그늘에 잘 말린 후 노천요에서 700℃~800℃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는데, 이때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기 때문에 그 색깔이 적갈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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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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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갈색연질토기는 주로 시루나 소형발 등 실생활과 관련된 용기로 많이 제작되었으며, 중대형의 장란형옹은 옹관 등 매장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기존 민무늬토기에 비해 표면이 매끈하지만 연질이기 때문에 흡수성이 강하다.
고령 내곡동 토기가마터에서는 적갈색연질토기가 도질토기와 함께 출토되는데, 비록 제작수법과 소성방식이 다를지라도 같은 가마에서 구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초기에는 적갈색연질토기가 많다가 서서히 둘의 양이 비슷해지고, 종래에는 도질토기 양이 늘면서 가야토기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도질토기에 밀려 점차 비실용적인 무덤의 껴묻거리(=부장품)로만 쓰인 것으로 보인다.
가야토기의 미학, 도질토기에서 찾다
도질토기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이 가장 많고 주거지나 패총 등 생활유적에서도 일부 출토된다. 도질토기는 후기와질토기의 전통 위에 새로 전래된 제도기술(製陶技術)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릇 형태는 테쌓기(輪積法)로 성형하여 타봉(打棒)으로 두드리면서 모양을 잡아간다. 그런 다음 물레를 사용하여 물손질을 하고 표면을 잘 다듬어 문양을 새긴 후 그늘에서 말린다. 등요에서 1000℃~1200℃ 가량 높은 온도로 소성하여 완성한다.
등요(登窯)에서 소성(燒成) 할 때 도중에 가마 입구를 막아버리는데, 이로 인하여 산소 공급이 차단된다. 앞서 살펴보았던 적갈색연질토기가 노천요에서 소성함으로서 산소공급이 원활하게 되는 것과 반대되는데, 이렇게 하면 가마 안에서 일산화탄소가스가 발생하며 토기의 바탕흙에 함유된 철분에서 산소를 빼내게 된다. 이러면서 도질토기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회청색 색깔이 나타나는 것이다.
때에 따라선 거무스름한 색이 나타나기도 하며, 토기 몸에 재가 쌓여 높은 온도에 녹으면서, 녹청색 또는 녹갈색의 자연유가 되기도 하고 빨간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자연유(自然油)는 인위적으로 유약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생기는데, 주로 표면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러한 모습이 초현대적인 느낌마저 주는데, 이 또한 가야토기의 미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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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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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질토기는 가야토기의 주류를 이루며 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고배, 장경호, 단경호, 기대, 소형원저광구호 등이 있으며 또한 사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상형토기(像型土器)도 있다. 가야토기는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야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고배류와 장경호, 발형기대, 통형기대이다.
가야토기는 5세기 대가 그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는 가야에 속한 여러 나라들에서 서로 독특하고 다양한 모습의 토기들이 등장하고, 또한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에도 가야토기들이 전래되어 고훈시대(古墳時代)를 대표하는 토기인 쓰에키(須惠器)의 발생과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야토기의 몰락, 신라토기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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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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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가야토기들도 결국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6세기에 들어서 가야는 신라에 비해 정치적으로 밀리는 상황이 온다. 또한 금관가야를 비롯한 남부의 가야 소국들도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그 세력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신라 세력은 가야지역에 그 발을 디디게 되며, 서서히 신라토기도 그 범위를 넓히게 된다.
신라토기 뿐만 아니라 백제토기의 영향도 들어온다. 백제 또한 세력의 확장에 따라 가야에 손을 대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정치, 문화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야토기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두 세력의 영향을 마냥 무시 할 수만은 없었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고배(高杯), 즉 굽다리접시다. 가야토기를 대표하는 기종 중 하나가 바로 고배인데, 이 고배는 비교적 얕은 배신(杯身) 아래에, 나팔형으로 벌어지는 긴 굽다리(臺却)가 있는데, 이 굽다리에 2단의 투창을 상하 일치되게 뚫어 놓는데 혹은 함안의 불꽃무늬토기처럼 가야 소국들만의 독자적인 장식을 가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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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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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던 굽다리접시가 신라 영향을 받으면서 모습이 변하게 된다. 이른바 통일양식(統一樣式) 토기문화로 변화되어 낮은 굽다리접시(短角高杯)가 나타난다. 이 외에도 신라의 영향을 받은 토기들이 다수 등장하며, 혹은 다른 유물이나 유적에서도 신라의 영향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서히 가야의 색채는 사라지고 신라의 색채로 변하게 된다.
고대사를 살펴볼 때 토기의 존재는 단순히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용기의 의미를 넘어, 그 정치적인 의미를 살펴 볼 때 근거자료나 참고자료로 유용하게 쓰인다. 고대의 각국들은 자기 나라만의 독자적인 토기문화가 있었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최대한 자신들의 색채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상황에서 가야토기는 백제토기나 신라토기 등과는 비교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전체적으로 일정 부분은 공통된 모습을 보이면서 지역적으로 몇 가지 차이를 둠으로서 개별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김해지역, 고령지역, 함안지역, 고성지역, 창녕지역 등이 대표적으로서, 이를 통하여 당시 세력들이 개별적인 정치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그릇이나 쪼가리에 불과한 토기들이지만, 그 내면을 깊이 바라보면 우리에게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철의 왕국 가야. 가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언제나 빠짐없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이다. 가야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결코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이 철이고, 또한 가야와 관련된 유물 중에서 토기와 함께 주종을 이루는 게 또한 철기이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철기로 인하여 가야는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한때는 신라를 압박하는 수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렇듯 가야와 철기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철은 청동기와는 달리 좀 더 구하기가 쉽고 단단하기 때문에 무기로 만들기 제격이다. 게다가 농기구 등으로도 만들 수 있고, 당시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교역의 주된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우수한 철기를 가진 이는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으며, 가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야세력이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이 바로 이 철기에 있었다. 기록을 통해서도 가야 철기의 우수함을 알 수 있으며, 고고학적 유물로서도 이러한 경향은 충분히 발견된다. 또한 철기의 등장은 단순히 우수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넘어, 정복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후의 역사는 기존의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격렬하고 어지러운 시대로 치닫게 되며, 동시에 문화의 발달이나 사회의 발달을 이루는 큰 계기가 된다.
철은 어떻게 생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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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물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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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언론을 통하여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하나 알려졌다. 바로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홍천 철정리 Ⅱ 유적지를 발굴하던 중 철기유물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철기유물이 무슨 대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유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기유물로서 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640년에서 620년 사이, 즉 기원전 7세기경의 유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통하여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상한을 높일 수도 있지만 이를 확신하기엔 좀 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자료를 축적해야 한다고 본다.
역사상에서 철기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기원전 1000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철기가 제작되었으며 우리나라는 기원전 4~3세기 정도부터 유입되고, 기원전 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지역은 기원전후 단계에 철광석을 이용한 철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철의 생산은 크게 5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채광, 제련, 용해, 정련, 단련 등이 그것이다. 채광(採鑛)은 철광석을 캐내는 작업으로서 주변에 있는 우수한 철산지가 있어야 가능한데, 가야지역은 양산 등 철산지가 풍부하였다. 다음은 제련(製鍊)으로서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공정이다. 제철로에 철을 넣고 숯으로 불을 지피는데, 철은 일반적으로 1500℃ 이상의 온도에서 녹지만, 숯과 함께 넣으면 1300℃ 정도에서 녹는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철과 철찌꺼기(Slag)가 분리된다. 최근 한국문물연구원에 의해 창원 봉림동유적에서 4~5세기경의 제철유적이 발견된 바가 있는데, 이곳을 가야시대의 제철유적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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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왕국 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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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단계는 바로 용해와 정련이 있다. 용해(鎔解)는 주조(鑄造)라고도 하는데, 제련공정에서 얻어진 환원철 중 탄소량이 높은 선철을 녹여 주조제품을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이때 쓰이는 것이 도가니와 거푸집인데, 거푸집에 만들고자 하는 제품의 모양을 만들고 그 속에 쇳물을 부어 철기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철기를 주조철기라고 하며 솥이나 도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련(精鍊)은 단야(鍛冶)라고도 하며 환원철 중 탄소량이 낮은 철괴를 조정하여 단조용 소재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때 쓰이는 것이 집게, 망치, 받침모루, 끌, 숫돌 등으로서 가야지역에서는 양산 북정리나 합천 옥전 등에서 이와 같은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다음 단계는 단련(鍛鍊)으로서 철소재를 불에 달궈 두드려서 단조철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를 통하여 주로 무기나 농기구 등이 만들어지며, 이 경우 주조를 한 것 보다 내구성이 강하다고 한다.
가야 주요 수출품이자 화폐였던 덩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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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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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야의 철기문화를 반영해 주는 유물들은 무엇이 있을까? 여러 철제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철정(鐵鋌), 즉 덩이쇠가 돋보인다. 덩이쇠란 요즘의 제철소에서 만드는 큰 철판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3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부산과 김해지방의 대형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서도 이러한 덩이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진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 ․ 예 ․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郡)에도 공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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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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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러한 덩이쇠가 당시에는 화폐처럼 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록에서처럼 외부와의 교역품으로서 인기가 좋았는데, 이는 가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국가들은 이런 덩이쇠를 교역품으로 높은 의의를 두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6년 봄 3월의 기록에서도 나오며,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마노스쿠네[斯摩宿禰]는 종자인 니하야[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오색의 채견(綵絹) 각 한 필, 각궁전(角弓箭)과 아울러 철정(鐵鋌) 40매를 니하야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나온 철정을 우리가 아는 덩이쇠와 동일한 것이라 본다면, 당시 백제에서도 널리 만들고 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되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달러와도 같은 화폐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묻혀있는 대성동고분군에서도 덩이쇠들이 많이 보이는데, 3세기 후반의 고분인 29호분의 경우 피장자가 눕는 공간에 이런 덩이쇠를 깔아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29호분의 피장자는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돈방석과 같은 돈침대에서 저승생활을 보내길 염원했던 걸까?
가야는 철로 무엇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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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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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야는 철로 무엇을 만들었을까? 가야에서 만들어진 철제품은 수량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갑옷, 투구, 무기, 마구, 농기구, 그리고 제례용품 등이 있다. 역시 돋보이는 존재는 무기와 갑주로서, 사실 우리가 고대의 무기체계 등을 파악 할 때 고구려 고분벽화와 함께 가장 많이 참조하는 게 가야의 철제유물들이다.
이 시기가 되면 소국 간의 혹은 국가 간의 영역다툼이나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이뤄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무기가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며, 철기의 등장은 무기의 위력을 배가시킨다. 청동기보다 내구도가 높고, 보급률도 높게 유지할 수 있으며 다양한 무기를 통해 수많은 전술들을 구가할 수 있게 된다.
가야에서 출토되는 무기들을 보면 화살촉이나 칼, 도끼, 창 등을 여럿 볼 수 있다. 특히 칼의 경우 고리자루칼로 대표되는 장식성이 뛰어난 칼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가야의 경우엔 용무늬와 봉황무늬 등을 다양하게 이용하고 금과 은으로 상감과 장식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칼들은 실전적인 용도 외에도 위세품으로의 성격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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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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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갑옷은 주로 판갑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에서는 판갑이 발달하였는데 본래는 나무나 가죽, 짐승 뼈로 갑옷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4세기에 들어선 철로 된 갑옷과 투구가 등장한다. 갑옷과 투구에도 장식을 가미하는데, 합천 옥전에서 발굴된 금동장식투구가 대표적이다.
또한 말에게도 갑옷을 씌우는 이른바 개마기병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체적인 유물이 가야지역에서 여럿 발견된다. 합천 옥전고분군이나 김해 대성동고분군 등에서 말머리가리개가 나오며, 함안 마갑총에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이 출토된 바 있다.
이처럼 풍부한 철제유물이 나오는 가야이기 때문에 흔히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기록과 유물 등으로도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많기 때문에 그러한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 가야의 영광을 이끈 건 가야인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이 철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야는 비록 작은 나라로 알고 있지만 이들이 남긴 유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결코 작은 나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뭐야. 분명 맞게 찾아 왔는데 왜 고분들이 안 보이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출발한 우리는 근처에 있는 대성동고분군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정작 고분들은 보이지 않고 큰 언덕과 근처 2개의 건물만 있을 뿐이었다. 고분군이라고 한다면 먼저 큰 봉분들이 연상되는데, 이곳에는 전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바라본 큰 언덕은 바로 애꼬지언덕. 애꼬지언덕을 왜꼬지언덕이라고도 하는데, 이 언덕에는 금관가야의 수많은 무덤들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무덤들이 잘 드러나지 않아, 처음 이곳에 온 사람들을 굉장히 의아하게 만든다. 이곳이 바로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인 대성동고분군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은 사적 제 3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의 김해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높다. 그리고 주변에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봉황대유적 등 가야의 여러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대성동고분군 내에서 중요한 유물과 유구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유적의 중요성, 그리고 접근의 용이성 등으로 인하여 대성동고분군은 정비가 잘 되어 있는 축에 속한다. 크게 대성동고분군과 노출전시관, 그리고 대성동고분전시관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특히 대성동고분군은 시민들이 편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대성동고분군은 왜 큰 언덕 하나가 전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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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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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고분군은 왜 애꼬지언덕 하나가 전부일까? 부여나 경주에 가면 높게 쌓아올린 봉분들로 이뤄진 고분군들이 많다. 이는 가야문화권 내에서 고령 지산동고분군이나 함안 도항리ㆍ말산리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도 마찬가지이기에, 더욱더 특이해 보인다. 이는 고분의 양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며, 당시의 묘제와 사상을 보아야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외면상으로는 큰 언덕뿐이지만 발굴된 바에 따르면 이곳엔 고분들이 6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하며 조사된 무덤만 총 136기나 된다. 이곳의 묘제, 즉 고분양식은 다양한데 널무덤, 덧널무덤, 독무덤, 돌덧널무덤, 그리고 굴식돌방무덤와 앞트임식돌방무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된 묘제는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木槨墓]은 큰 나무 널을 써서 만든 무덤으로 널무덤[木棺墓]과는 차이가 있다. 널무덤은 나무로 된 관에 시신을 묻고 매장함에 비해 덧널무덤은 큰 널을 짜서 그 속에 관을 넣어두거나 아니면 그대로 안치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고학에서는 주로 그 규모 등을 가지고 차이를 따진다.
널무덤 다음에 조성된 것이 덧널무덤인데,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총 46기가 있으며 이 중에서 대형 덧널무덤이 30기나 된다. 이들은 언덕의 중심과 능선부에 위치하며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이르는 금관가야 지배집단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은 무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고분군에서 쉽게 보이는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덤의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의 경우 봉분을 쌓긴 하지만 그 이후의 무덤양식들에 비해서는 봉분을 낮게 쌓는다.
또한 이 대성동고분군은 무덤을 중복되어 조성한다는 게 특징인데, 이 말은 기존 무덤 위에 다시 무덤을 쓴다는 뜻이며, 나중에 무덤을 쓸 때 기존 무덤 일부를 파괴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게 계속되고 봉분이 뚜렷하지 않거나 흙이 깎아 내려지는 등의 변화 때문에, 지금의 우리는 그냥 큰 언덕 하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가야인들은 왜 무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을까?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가야인들은 자신들 선조의 무덤 위에 바로 자신의 무덤을 썼다. 그러면서 그 선조의 무덤을 파괴하곤 했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노출전시관에 있다.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겨 놓아 복원해 전시한 것이다. 다른 무덤들은 흙으로 덮은 데에 반해 그 모습을 그대로 두었기에 당시의 무덤 축조 방식과 유물의 배치 모습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29호분은 3세기 후반의 왕묘로 보며, 39호분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즉 100년이라는 시대 차이가 나는데, 29호분의 경우 청동솥이나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 등 중요한 유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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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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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덤 간의 중복은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한 다른 금관가야 무덤축조방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이유를 학계에서는 주로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교체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조금 달리 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이 시기 동안 가야 역사에서 뚜렷한 세력교체를 보여주는 계기가 없을 뿐더러 무덤 양식과 유물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금관가야 내의 복잡한 내부사정을 오늘날까지 알기는 어렵지만 이를 무조건 정치적 변동으로 해석하기보다 조금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정치적 변동이라고 하더라도 무덤의 일부를 파괴한 것이고 이러한 양상은 계속 보이는데, 이는 좁은 지역 중 일부에다가 계속 무덤을 쓰려고 하는 성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가야인들은 이 대성동고분군의 언덕을 중요시하게 여겼으며 이곳에 무덤을 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추측해본다면 꼭 불가능한 추론은 아니다. 기록에서도 고대인들은 소도(蘇塗) 등 일부 지역을 신성한 지역으로 삼기도 하였다는 점을 볼 때, 이곳도 당시엔 일종의 성소(聖所)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대성동고분군, 지금 그곳엔 무엇이 남아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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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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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이곳의 고분군은 29호분과 39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흙으로 덮어 놓았다. 그 때문에 이곳에 있는 고분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다른 지역의 고분군들이야 봉토를 쌓아 올렸기에 고분군임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지만 이곳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럼 대신 어떤 방식을 사용하여 고분을 구분할까?
바로 보도블록이나 목재를 이용하여 아래의 무덤 모습을 위에서 보여주고 있다. 꽤 독특한 발상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밟고 있는 땅 아래의 고분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또 중첩관계도 어찌 되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또 안내판을 설치하여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놓았다. 다만 그 설명이 또렷하지 않고 색이 바란 것도 더러 있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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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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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성동고분전시관을 세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나 당시 금관가야의 무덤이나 유물들, 그리고 생활모습과 고분의 축조 방법에 대해서 전시를 해 놓고 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아쉽게도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서 내부를 관람할 수 없지만, 당시 가야의 모습을 성심성의껏 복원하여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조성해 놓았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기마무사상과 병사들의 모습을 복원하였는데, 그 얼굴의 모습 또한 김해 예안리 12호분과 41호분에서 출토된 두개골을 바탕으로 만드는 등 나름대로 고증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고분형식들의 차이나 유물들의 모습 등도 보기 쉽게 만들고, 당시의 순장 광경까지 복원함으로써 가야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국립김해박물관이 실제 유물들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대성동고분군박물관은 복원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입지적인 환경이나 고분과 유물의 격으로 볼 때 3세기부터 5세기 정도의 가야 왕족들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가야를 대표하는 고분으로서 비록 봉분이 없어 다른 고분군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지만, 그 속에 숨은 비밀은 어마어마하다. 김해 애꼬지언덕, 겉으로 보기엔 야산보다 낮은 작은 언덕일 뿐이지만, 가야인들에겐 자신들이 가장 우러러보았던 왕족들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성소였을 것이다.
가야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진다. 전기는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연맹체를 중심으로, 후기는 반파국, 즉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체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물론 이러한 국가 외에 수많은 가야소국들이 각자의 사활을 걸며 발전을 도모하고 생존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흥하고 몰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심은 역시 수로왕의 나라인 금관가야였다. 금관가야는 일찍부터 낙랑, 왜 등과 교역을 통하여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였으며, 그들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철은 이들을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의 김해에는 이런 금관가야의 여러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도 대성동고분군은 가장 중심된 고분군으로 금관가야의 왕들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다른 유적들에서 나온 유물들에 비해 격이 높고, 유구의 모습 또한 더욱더 크고 정교하게 되어 있다. 주로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가야국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왕은 총 9명이라고 나온다. 수로왕과 거등왕 이후로 9대손인 구형왕까지 있는데, 이러한 계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후기의 왕들의 경우엔 어느 정도 신뢰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가락국기가 저술되면서 정리된 계보로 보인다. 즉 사실상 금관가야의 왕 계보는 미스터리 속에 남아있다고 봐야겠다. 더불어 가야의 역사를 이끌어 나갔던 왕들의 무덤도 그 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대성동고분군 내에는 136기의 고분들이 있다. 이 중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고분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왕들의 안식처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있다. 바로 1호분과 29호분, 39호분이 그것으로서 이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며 당시 왕들의 마지막 모습을 유추해보도록 하자.
죽은 자를 위해 산 사람을 죽여라! 대성동 1호분
고분은 주로 조사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지기 때문에 사실 번호 자체는 크게 중요하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대성동 1호분의 경우 1번이라는 번호가 부끄럽지 않게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그 규모도 꽤 큰 편이다. 대성동 1호분은 목곽묘, 즉 덧널무덤으로 보고 있는데 금관가야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주로 이런 덧널무덤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이런 무덤의 규모가 기존의 널무덤에 비해 커지고 유물들도 많이 매납되고 격이 높아지며 순장된 피장자들도 더러 눈에 띄기 때문이다.
1호분은 주곽과 부곽으로 나눠져 있으며 주곽의 경우 길이가 6m이며, 너비가 2.3m이다. 주곽은 무덤의 주인공, 즉 피장자를 매장하는 곳을 말하며, 부곽은 피장자가 저승세계로 가지고 갈 물건인 껴묻거리들을 매납한 곳을 말한다. 애초에는 2호분과 연결된 모습을 보여, 거기에 딸린 부곽으로 보았지만 유물들을 살펴본 결과 1호분의 부곽으로 판명되었다. 이렇게 물건들을 저승으로 같이 보내긴 하지만 이보다 더한 것도 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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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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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껴묻거리삼는 것, 이를 순장이라고 한다. 즉 묘의 주인공 이외의 사람이 같이 묻히는 것을 말하며, 가야의 고분에서는 이러한 순장이 더러 나타나는데 이를 가지고 당시 사람들의 위계관계를 살펴보곤 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서도 순장의 기록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며, 사실 이는 우리 민족만의 특수한 풍습이 아닌 세계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풍습이었다. 인권을 존중하는 오늘날엔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당시엔 오늘날과 사상적으로 달랐기에 가능하였다.
대성동 1호분은 묘의 주인공이 제일 가운데에 묻히고 그의 옆과 아래에 순장자 또한 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는데 고배, 유개장경호, 발형기대 등의 토기류와 자귀, 보습 등의 철제 농기구, 화살촉, 창, 등자 등의 무기와 마구가 출토되었다. 특히 통형동기(筒形銅器)라는 유물도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철제 창의 끝에 끼우는 물미로 생각된다. 창의 끝에 이런 것을 끼움으로서 내구성을 더 강하게 하고, 혹은 제례 의식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1호분은 여러차례에 걸쳐 도굴되었고,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크게 도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유물들이 여럿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당시의 매장 풍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유적들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역할이라 하겠다.
돈침대, 아니 철침대에서 마지막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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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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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29호분은 39호분과 함께 노출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이라기보단 매장 당시의 모습으로 최대한 복원한 것으로서 사실 당시엔 현재보다 유물들이 적거나 부숴진 게 많았다. 하지만 이 고분들로 인하여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의 매장풍습을 알 수 있으니 소중한 자료라 하겠다.
29호분은 대성동고분군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고분 중 하나이다. 무덤의 크기는 길이가 9.6m, 너비가 5.6m에 이르고 무덤에서 껴묻거리를 놓는 쪽과 피장자가 묻힌 쪽으로 나눈게 특징이다. 단지들을 질서정연하게 놔두었는데 6×8열로 나열하였으며, 덩이쇠도 91점 가량 열을 지어 깐 것이 특징이다.
다른 무덤보다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된 모습이 피장자가 왠지 결벽증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도 들게 한다. 특히 눈여겨 볼 만한 점은 덩이쇠[鐵鋌]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덩이쇠는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로서 이른바 철덩어리이다. <삼국지>에도 이를 화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에 덩이쇠를 가공하여 철제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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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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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시상대(屍床臺), 즉 침대처럼 피장자가 눕는 부분을 덩이쇠로 깔아놓았다. 이른바 당시의 돈 침대라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현세의 부귀를 저승까지 갖고 가려는 인간의 욕심은 똑같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내세에도 누리고자 크게 무덤을 조성하고 온갖 진귀한 물건들도 다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일까? 영원하길 바라던 그의 운명도 한 세기가 못 지나 무너지고 만다. 그 위로 다른 이의 무덤이 쓰이고, 그럼으로 인하여 무덤의 일부가 훼손되게 된다. 그 훼손된 부분 중 시상대도 있다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내세를 위해 많은 유물들을 가져가도, 그게 과연 영원히 지속될지는 의문이 생긴다.
29호분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철촉이 300여 점이 넘게 출토되었으며 칼이나 도끼, 철검 등 여러 무기류가 발굴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동솥이다. 청동솥은 우리나라에선 자주 쓰지 않던 것으로 주로 북방민족들이 사용하였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몽골 도르릭나르스(Дуурлиг нарсны) 흉노 무덤에서도 청동솥이 발견되어 세간의 흥미를 끈 바가 있다. 이러 유물들을 통하여 당시 김해의 활발한 교역을 알 수 있다.
4세기 후반 가야의 타임캡슐, 39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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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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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분은 앞서 말한대로 29호분의 일부를 파괴하면서 조성된 무덤이다. 이 또한 덧널무덤으로서 주곽과 부곽으로 나눠진다. 주곽은 길이 5.6m, 너비 3m이며, 부곽은 길이 2.6m, 너비 3.2m이다. 흥미롭게도 이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출토되었기에 4세기 후반의 가야 무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일단 주곽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곽의 남쪽과 서쪽면에는 토기들을 두었으며 북동쪽에는 투구 2점과 갑옷을 놔두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목가리개와 허리가리개, 갑옷부속구와 칼 등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통형동기와 철제 창, 그리고 2구의 순장유골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곽은 토기를 가득 메웠으며 토기 사이에서 재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곽은 애초에 주곽을 보조하는 용도를 갖는다. 따라서 주곽에 미처 다 넣지 못한 물건들을 부곽에 넣기도 하는데, 이는 내세에서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해주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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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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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과 무기들이 출토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는 전쟁이 굉장히 많아지고 군인들이 그만큼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된다. 39호분의 피장자 또한 갑옷을 입은 채로 매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활발한 정복전쟁의 소산물로서 가야 내부터 소국끼리는 물론 주변을 에워싼 세력과의 싸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물들을 위세품으로 판단하고, 실제로 사용하였다기보다 단순히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매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엔 우리의 생각보다도 많은 전쟁이 있었고, 지배층 또한 스스로의 권익과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9호분은 이런 점에서 당시의 유물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 또한 소중하게 여겨지지만, 이를 넘어서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대성동고분군 내에서는 이 외에도 수많은 무덤들이 있으며, 그런 무덤들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무덤들은 그런 대성동고분군 내에서도 의미가 깊은 유구들이 많은데, 개중에는 왕릉도 더러 있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사실 삼국시대에는 무령왕릉 외에 다른 무덤들 중에서 과연 무엇이 왕릉이고 그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성동고분군의 고분들은 이러한 수수께끼를 푸는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 많다. 후손된 몸으로서 이에 깊은 관심을 갖고 또 연구하여 조상들의 모습을 알아가는 것, 이게 바로 우리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가야에서는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풍습을 유추해보면서 그들의 문화를 알아갈 수 있는데, 고분은 특히 유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안겨준다. 그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고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또 그동안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은 이 고분연구로 인하여 크게 증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비해 국력은 미약한 편이었지만, 고분에 대한 자료는 매우 풍부하다. 중요한 고분군들도 여러 군데에 산포되어 있으며, 이는 가야가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닌 지방분권적인 국가였기에 그 양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가야의 여러 주요한 고분군들 중에서도 김해의 대성동고분군과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은 전기와 후기가야 연맹체를 주도한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특별하다.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고분을 살펴보면 비슷한 점과 함께 서로 다른 점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이는 시대차이가 주원인으로 작용하는데, 가야의 고분문화 중 금관가야의 고분문화가 좀 더 이르고, 대가야의 고분문화는 좀 더 늦은 추세를 보여준다. 이는 고분이 집중적으로 조영된 시기가 서로 다르고, 고고학자들은 그 집중 조영된 시기를 각국의 전성기로 파악하고 있다.
가야문화권의 주요 고분은 돌널무덤, 널무덤, 덧널무덤, 구덩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굴식돌방무덤, 독무덤 등이 있다. 이 중 돌널무덤[石棺墓]은 주로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고, 가야뿐만 아닌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된 묘제이다. 독무덤[甕棺墓]은 가야시대 전시기에 걸쳐 사용되었지만 주요 묘제는 아니었으며 주로 소형으로 제작되었다.
가야시대 주요 고분들, 즉 주로 지배층이나 널리 사용되었던 고분들을 순서대로 말하자면 널무덤, 덧널무덤, 구덩식돌방무덤, 그리고 굴식돌방무덤이다. 대성동고분군에서도 역시 이러한 고분들이 모두 나옴으로서 가야의 고분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주로 널무덤과 덧널무덤에 관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제시되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관가야의 전신(前身), 구야국의 주요무덤인 널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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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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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관을 짜고 땅을 파서 매장한 무덤을 고고학에서는 널무덤[木棺墓]이라고 하며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무덤은 가야지역에서 널리 쓰인 묘제(墓制)로서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모두 34기가 조사되었는데 대체로 표고 9m 이하의 평지나 거의 평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되었다. 1~2세기 대에 만들어진 것이 많고, 관은 굵은 통나무나 각재를 사용하여서 만드는데, 그동안은 오늘날의 관처럼 판자를 이용하여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하지만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다호리 1호분이, 통나무로 된 구유모양으로 발견되고 나서부턴 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단순히 판자로만 만들었을 거라는 인식과는 달리하게 되었으며 유구의 조사에 있어서도 이를 염두하고 발굴에 임하게 되었다.
널무덤을 발굴해보면 주로 평면이 'ㅍ'자 모양이고 단면이 'ㅂ'자 모양으로 3㎝정도의 두께로 된 판자를 결구시켜서 관을 만든 게 많다. 관 안에는 주로 몸에 지니는 장신구만 넣고, 다른 껴묻거리들은 관 밑의 부장구덩이[腰坑]나 관 밖의 뒷채움흙[充塡土], 혹은 관 위에 두는 경우가 많다.
무덤 내의 껴묻거리를 살펴보면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질과 양에서 개인 사이에 큰 차이가 있고 집단 사이에서도 차이가 심하다. 하지만 무덤의 규모나 입지에서는 계층이나 집단차이가 그다지 많이 보이진 않는다. 출토되는 유물은 각종 토기나 철기, 칠기,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와질토기가 대부분이며 철기는 무기와 농공구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장신구는 청색의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나 팔찌가 출토되었다.
<삼국지>에 보면 주수(主帥)와 천군(天君)의 존재가 보인다. 당시 구야국을 비롯한 변한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 주수와 천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각각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유적 상으로는 당시의 여러 무덤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아직까지 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모습을 보이기엔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덧널무덤이 조영되는 3세기 이후부터는 이러한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가락국 중심으로의 통합, 그리고 덧널무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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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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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곽을 짜고 땅을 파서 매장한 무덤을 덧널무덤[木槨墓]이라고 부른다. 또한 고고학에서는 이러한 묘제를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라고도 부른다. 이렇게만 보면 널무덤과 덧널무덤은 언뜻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직접 보게 되면 그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단 크기에서도 차이가 나며,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껴묻거리나 짜임새 등에서도 차이가 크다. 학계에서는 이 시점을 구야국에서 가락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가체계를 이룬 것으로 짐작된다.
덧널무덤은 2세기 중후엽 영남지역에서 나타나는데, 대형 덧널무덤이라고 하더라도 3세기 대까지는 무덤 외부의 봉토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즉 3세기 대의 덧널무덤은 면적에 비해 깊이가 얕은 편이다. 하지만 4~5세기에 들어서는 무덤의 깊이가 매우 깊어지고 그만큼 외부의 봉토도 높아진다. 4세기 전반부터는 따로 껴묻거리를 더 넣기 위하여 부곽(副槨)이라는 시설이 등장하며, 사람을 순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묘광의 깊이가 3~4m정도로 다른 형식의 덧널무덤보다 현저하게 깊은 모습을 보인다.
덧널무덤에서는 각종의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 의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금관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토기류는 29호분에서 최초의 도질토기가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주로 항아리류가 먼저 등장한 후, 4세기가 되면서 점차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출토된다. 철기류 또한 풍부하게 출토되는데 농공구, 무기, 갑옷, 마구 등이 보인다. 특히 덩이쇠가 다량으로 출토됨으로서 <삼국지>에서 이를 화폐처럼 사용한다는 기록의 사실성 또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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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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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무기들과 갑옷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이 시대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있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특히 갑옷자료 중에서 판갑들이 다수 출토되어 고대의 갑옷과 전술체계를 연구함에 있어서 큰 자료로 활용된다. 또한 마구류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당시 금관가야의 지배층에게는 기마를 이용하는 습속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덤이 커진다는 것은 무덤의 축조에 많은 인원과 물품을 동원함으로서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고, 또한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대규모 제례행사 등을 통하여 당시 지도자의 권위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영남지역에서는 3세기까지 각 지역별로 다수의 소국이 존재하였는데 3세기 후엽부터는 인접한 소국 사이에 서로간의 통합이나 연합이 이루어진다. 김해지역에서는 이를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전체적인 가야제국에서도 금관가야의 권력은 이를 대표할 정도로 이른다.
강대해진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권위 또한 과시할 필요가 있으며 일반인과의 차등을 두기 시작한다. 그게 고분으로 반영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내세관에 있어서도 이를 적용시켜 순장이라는 풍습이 널리 퍼지게 된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죽임으로서 저승에서도 피장자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한 것으로서, 이는 당시 사회의 확연한 계급차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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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경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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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이후의 가야무덤을 살펴보면 이른바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槨墓]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묘제는 당시 지배자들의 무덤이 된다. 김해지역에서는 두곡유적과 칠산동고분군, 내덕리고분군 등에서 이런 구덩식돌방무덤이 다수 확인되며, 또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리고 6세기 대에 들어서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 등장하여 널리 퍼지며 기존의 구덩식돌방무덤과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무덤은 김해지역에서도 여럿 보이지만, 고령이나 함안 등 주로 다른 지역에서 많이 보인다. 또한 가야가 멸망된 이후로도 굴식돌방무덤은 널리 쓰이는데 김해지역에서는 대표적으로 구산동고분군이 있다.
이처럼 가야에서는 다양한 무덤들이 있으며, 특히 김해에서는 주로 가야시대 전기에 관련이 깊은 무덤들이 많다. 그리고 이를 대성동고분군은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어 우리에게 당시 매장문화와 국가의 형성을 추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이를 타임캡슐로 여기고 열어봄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와 교류하는 창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가야를 흔히 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철기유물이 풍부하였으며, 또한 철을 통한 교역도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 철을 바탕으로 우수한 무기들을 많이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야의 갑옷의 존재는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무기와 갑옷 분야에서 학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하는 자료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들이다. 이 중에서 출토된 갑옷들 중 3/4정도는 옛 가야가 있던 곳에서 출토되었으며 다른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도 그 수가 압도적이다.
갑옷의 존재는 그 당시 발달되어 있던 군사문화를 잘 말해준다. 또한 갑옷의 생산은 철제품 중에서도 가장 고난이도의 작업이 필요하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그만큼 발달된 철제 가공능력과 과학이 필요하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갑옷들은 그런 점에서 당시의 뛰어난 과학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과학의 발달사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야의 갑옷들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부산 복천동고분군 등에서 널리 보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야는 이 갑옷과 무기들을 통하여 강대한 무력을 자랑하였고, 한때는 신라를 압박하는 수준까지 이를 정도로 강성 할 수 있었다.
그럼 그 가야 갑옷의 실체는 과연 어떨까? 가야가 자랑하는 철갑옷, 그 변천과정과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야 철갑옷의 등장, 그리고 종장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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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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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갑옷은 크게 판갑과 찰갑으로 나눠진다. 판갑(板甲)은 큰 철판 여러 매를 가지고 만든 갑옷을 말하며, 찰갑(札甲)은 여러 철판조각, 즉 소찰(小札)을 이용하여 만든 갑옷을 뜻한다. 흔히 가야는 판갑이 중심으로, 그리고 고구려는 찰갑이 중심으로 발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야도 5세기 이후부터는 판갑보다 찰갑이 더 많이 사용되며, 이는 한반도 전체적으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판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종장판갑(縱長板甲)이다. 이 이전엔 나무나 뼈, 가죽 등으로 갑옷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러한 갑옷의 형태를 바탕으로 철갑옷도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철갑옷의 등장으로 방어력이 올라가게 되며 이는 본격적인 정복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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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의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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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판갑은 주로 4세기 때 만들어졌으며 철판을 세로로 붙여서 만든 판갑이라는 뜻이다. 연결방법에 따라 가죽으로 연결한 형태와 납작한 못으로 고정한 형태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정결(釘結)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의 리베팅(Rivetting)과 유사하다. 리베팅은 철판과 철판을 맞춰 구멍을 뚫고 못을 집어넣은 다음 양쪽에서 두드려 압착시켜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가야의 판갑은 발생 초기부터 이미 도련판, 섶판, 무판 등을 갖추고 경갑과 측경판이 있는 등의 모습을 보여, 이전부터 갑옷의 존재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종장판갑의 윗부분에 부착된 목가리개[頸甲]는 이른 시기에는 작은 철판 여러 매를 부채꼴 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장방형의 철판 1~2매를 세로로 휘어서 만들었다. 이러한 목가리개가 주로 뒷목을 보호해준다면 옆 부분은 측경판으로 보호한다. 측경판(側頸板)은 반달모양으로 생긴 철판으로 어깨너머 앞가슴까지 세워 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고사리무늬나 새 무늬로 장식을 붙이기도 하여 미적 감각을 더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물로서는 부산 복천동 46호분과 57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김해 양동리 76호분, 울산 중산리 1A-74호분에서 출토된 게 있다. 특히 김해 양동리 76호분에서는 몽고발형투구와 함께 출토되어 서로가 세트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철갑옷의 변화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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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고고학연구소, 계명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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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종장판갑은 5세기까지도 계속 이용된다. 하지만 종장판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판갑이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삼각판갑, 횡장판갑, 장방판갑이 바로 그것이며 앞선 종장판갑보다 좀 더 실용적인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형태 중 가장 앞선 형태인 삼각판갑(三角板甲)은 종장판갑에 비해 몇 가지 부분에서 다른 점이 있다. 일단 철판의 수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개폐장치(開閉裝置)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그리고 가죽연결이 납작한 못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삼각판갑은 5세기 초에 해당되는 합천 옥전 68호분을 비롯하여 함안 도항리 13호분, 김해 두곡 43호분, 동래 복천동 4호분 등에서 출토 되었는데 이때까지는 입고 벗기 편리한 개폐장치가 없으며 가죽을 이용하여 갑옷을 결구시켰다. 그러나 이후에는 철판 구성은 동일하지만 연결방법을 납작한 못을 사용하며 함양 상백리, 부산 녹산동 가달 등에서 이런 양식의 갑옷들이 출토되었다. 옆구리 아래로 개폐장치를 달아 착용의 편리함을 도모하였는데 이들 개폐장치의 형태를 가지고 지역적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장방판갑(長方板甲)은 앞서 말한 삼각판갑과 마찬가지로 대금과 대금 사이의 지판 구성이 장방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장방판갑은 일본에서는 그 출토 예가 많으나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두곡 72호분, 돌래 연산동 8호분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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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 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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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장판갑(橫長板甲)은 종래의 판갑들이 여러 매의 삼각판을 이용하던 것을, 세장방형의 철판을 인체의 곡률에 맞게 구부려 가로로 대어 못으로 연결시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여러 판갑의 형식들 중 가장 나중에 나타나며 고도의 제작기술이 요구된다. 합천 옥전 28호분, 고령 지산동 32호분, 동래 복촌동 112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백제지역인 전남 장성과 충북 음성의 망이산성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갑옷이 5세기 중반의 것인 전(傳) 김해 퇴래리 갑옷이다. 등과 가슴 부분에 고사리무늬가 부착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명작이다. 철판을 가로와 세로로 맞춰 철 못을 이용하여 짜 맞추어 만들었다. 애초에는 측경판이 가슴 앞에 부착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렇게 복원되어 있었지만 2005년 7월부터 9개월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실시된 보존처리를 통하여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판갑을 보조하는 갑옷들, 그리고 찰갑으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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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의대학교박물관, 계명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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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판갑 외에도 부속적인 갑옷들도 여럿 있었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목가리개[頸甲]는 말 그대로 목을 보호하는 부속구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널리 보인다. 부산 복천동 11호분, 김해 양동 107호분 등에서 출토된 바가 있다.
그리고 어깨가리개[肩甲]라고 하여 5세기 때에 유행한 삼각판갑과 횡장판갑에 부속되어 사용되었다. 주인공의 어깨와 쇄골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입는 갑옷으로서 U자형으로 휜 세장방형의 철판으로 만들었는데 고령 지산리 32호분, 부산 복천동 112호분, 김해 가달고분군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팔뚝가리개[肱甲]의 경우 주인공의 팔꿈치 아래에서 손목 위까지를 보호하는 갑옷의 부속구이다. 2매로 된 철판을 원통형으로 맞대어 만든 것으로서 부산 복천동 11호분과 상주 신흥동 나지구 37호분에서 완전한 형태의 유물로 출토된 바 있다. 애초에 복천동 11호분에서 출토될 당시에는 정강이가리개로 인식되었지만 연구 결과 팔뚝가리개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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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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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투구와 마갑의 존재도 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해 주는 갑옷의 일종으로 가야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투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갑은 말을 보호해 주는 갑옷의 일종으로서 주로 중장기병의 말에 사용되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말을 방어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며 함안 마갑총에서 우수한 마갑이 출토되었고, 최근 경주 황오동 쪽샘지구에서도 완전한 형태의 마갑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판갑 중심이던 가야의 갑옷은 서서히 찰갑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찰갑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신라를 거쳐 가야에도 전래되었다. 판갑은 큰 철판을 이용해서 만들었기에 행동의 불편함과 제약이 있었던 반면에 찰갑은 행동이 좀 더 편하도록 작은 철판들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서 말한 보조갑옷들도 찰갑과 함께 같이 사용되어 방어에 취약한 부분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4세기 대의 찰갑은 동래 복천동 38호분과 64호분, 경산 임당의 1A-60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있지만 복원은 힘든 상태이다. 5세기대의 찰갑 역시 구체적인 복원은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준다. 찰갑은 판갑처럼 전체가 이어져서 출토되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래되는 게 적은 면도 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선 껴묻거리를 많이 묻던 풍습이 적게 묻는 풍습으로 변한다는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 가야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약한 존재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가야가 과연 그 당시에 약소국이라고만 보아야 하는지에 의문이 간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풍부한 갑옷과 무기들이며, 이들은 가야의 무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를 통하여 한반도 남부에서 가야의 세력은 한때 신라를 압도할 정도라고 보기도 하며, <삼국사기>에서도 그러한 기록들은 종종 보인다. 가야에 대한 편견은 이런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고, 당시 역사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극복이 가능하다.
<삼국지연의>나 삼국지와 관련된 게임 등을 하다보면 관우(關羽)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관우라는 인물은 유비의 의동생이면서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는데 붉은 몸체의 적토마를 타면서 초승달 모양의 커다란 칼인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휘두르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서 청룡언월도라는 무기는 사실 중국에서도 당나라 때에 등장하여 송나라 때 널리 사용되었으니, 삼국지의 배경인 삼국시대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명군이 일본군에 대적하는 것을 보고 도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백병전에서 조선의 환도는 일본의 칼에 비해 그 길이가 짧아 쉽게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이 언월도는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를 간소화 시켜 가볍고 쓰기 좋게 만든 무기가 협도(挾刀)이며,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에 보면 이와 비슷한 무기로 장검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기를 흔히 월도(月刀)라고 부른다. 혹은 대도(大刀)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주로 중국에서 이런 무기를 일컬을 때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고학 용어 중에서 환두대도나 소환두대도 같은 고대시대의 칼을 일컬을 때 대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다보니 일부러 서로 피해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이 월도라는 무기는 주로 적을 말 위에서 내리치면서 베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보병이 상대방을 베면서 공격할 때 쓰는 무기다.
그럼 조선시대 이전엔 이런 월도가 사용된 바가 없을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예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견된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이러한 월도로 추정되는 철기유물이 발굴된 바 있으며, 이에 대해 곡도(曲刀)라고 부르고 있다. 곡도란 날이 휘어져 있는 칼을 말하는데, 이와 상반되는 개념이 곧은 날을 가진 직도(直刀)이며, 이러한 직도는 고대시대 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가야시대의 월도, 어디에서 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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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박물관 상설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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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늠름한 모습을 한 가야 기마무사의 위용이다. 검은색 투구와 찰갑으로 된 갑옷을 입고 말갑옷을 입은 말 위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러한 병사를 흔히 개마기병(鎧馬騎兵)이라고 부르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전쟁을 주름잡았던 이들은 고구려는 물론 가야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가야의 개마기병이 들고 있는 무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날을 가진 칼에 긴 자루가 달린 모습인데, 바로 앞서 말했던 월도를 들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이렇게 월도를 들고 있는 기마무사상을 복원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대성동고분군 23호분에서 월도의 모습을 한 곡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 복천동 38호분에서도 곡도가 발견되었기에, 가야시대에 쓰인 무기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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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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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하게 대성동 2호분과 13호분에서는 곡도자(曲刀子)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각각 크기가 17.7㎝와 16.2㎝이며 날이 크게 휘어져있기에 실전에 사용된 무기라기보다 의식에 사용된 유물로서 생각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대성동 23호분에서 출토된 곡도는 41.4㎝로서 제법 큰 편으로서 실전에 적합한 무기임을 알 수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당시 생활모습을 고증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앞서 말한 가야무사상이 대표적이며, 병사들의 복원모형에서도 월도를 사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월도가 생각만큼 널리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그 개체가 출토된 곳이 2곳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월도가 가야시대의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가야월도, 과연 어떤 무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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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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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가야월도는 과연 어떤 무기였을까? 그 모습을 보면 당시 전쟁에서 널리 쓰이고, 특히 기병들이 활용하면서 적들의 목을 베는데 쓰인 무서운 무기라는 짐작이 간다. 중국이나 조선시대에서도 이런 월도는 뛰어난 무장들이 사용하는 두려운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월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과연 가야시대에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왜 극히 소수의 유물만 발견되고, 그 존재가 적극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걸까?
이러한 의문에 앞서 당시의 무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무기들 중 창 류, 즉 장병기(長兵器)를 살펴보면 주로 투겁창[矛]이 쓰였으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창(槍)도 쓰였다.
투겁창, 즉 모와 창은 겉모습은 흡사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모는 창날 아래에 자루를 끼워 넣을 수 있는 공간, 즉 투겁을 만들어 놓은 게 특징이다. 이에 반해 창은 창날의 아래에 철심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슴베라고 부른다. 즉 슴베를 자루에 끼워 넣는 형식이다. 둘은 당대에 널리 사용된 무기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모가 선호되었다.
그럼 월도는 어떤 구조일까? 크게 봤을 때 월도 또한 슴베로 자루와 부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날의 아래 끝부분에 뒤로 돌출시켜 놓은 게 특징인데, 자루와는 직각으로 연결된다. 복원된 모습을 보면 월도에 있는 작은 구멍에 끈을 연결해서 자루에 더욱더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는 사실 다른 무기들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이다.
앞서 말한 모와 창은 주로 상대방을 찌르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 당시엔 이런 모와 창을 이용한 보병의 단체 접전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활과 함께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 월도는 그 공격이 찌르고 베는 게 가능하여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확실히 당시의 칼들에 비해서는 길이가 길기 때문에 훨씬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의문이 가는 문제가 있다. 바로 전쟁터에서 적들을 벨 때, 연결된 부분이 과연 얼마나 잘 버텨주느냐의 문제이다. 찌르기와는 달리 베기는 전면적으로 내리치면서 공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충격을 주며 상처도 깊게 크게 난다. 하지만 그만큼 무기 자체도 충격이 오기 때문에 결합 부분이 튼튼해야 한다.
하지만 가야 월도의 경우 투겁을 사용한 게 아닌 슴베를 측면에서 부착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구력은 떨어질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끈으로 자루와 연결하였지만 이 효과도 그렇게 크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가야 월도가 널리 사용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을 것이다. 효율적인 무기로 생산되었으나 사용할 때는 그 내구성이 생각보다 떨어져 전투 도중에 많이 못쓰고 망가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로 실전적인 무기로서 쓰이기보다 피장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의장용 무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월도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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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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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야월도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월도라는 무기를 살펴봄에 있어서, 그 기원이 칼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본래 월도 같은 대도류의 무기들은 손잡이가 짧고 날이 긴 칼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일부러 자루를 길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인하여 날의 무게를 늘여서 베는 것과 동시에 무거운 무게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가야월도의 경우엔 이런 절차가 없이 바로 만들어졌다는 게 주목된다. 가야월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류가 되는 무기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아마 철겸(鐵鎌), 즉 낫이 기원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2가지로 하나는 월도의 날이 반대쪽에 있을 경우 이는 낫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과 슴베쪽에 살짝 말려진 부분의 모습이 철겸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슴베 끝부분을 말려 자루에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부산 복천동 145호분과 123호분에서 출토된 철겸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뜬금없이 철겸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고대시대 이후로부터 낫은 훌륭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고대의 낫은 주로 상대방을 찍어 내리는 식으로 공격하였으며, 주로 기병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장병겸(長柄鎌)이라고 하여 주로 판옥선 위에서 적과 싸울 때 쓰던 무기가 있었다.
가야월도는 이러한 철검 기술을 바탕으로 반대쪽에 날을 세워보면서 만들어진 무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막상 사용해 보니 그 효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실전무기보다는 의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발이 이뤄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무기들은 그 모습도 매우 흥미롭고, 또한 조상들의 적극적인 과학 개발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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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스카이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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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대성동고분군을 둘러보고 난 뒤, 우리는 근처의 봉황동유적으로 향하였다. 내비게이션에 봉황동유적을 설정하고 이동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도착한 곳은 봉황동유적의 후문 쪽이었다. 그래도 후문 쪽이라고 하더라도 생각보다 잘 꾸며 놓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유적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로 하였다.
봉황동유적이란 김해 시내에 있는 유적으로서 사적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봉황대(鳳凰臺)라고 불리 우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유적이면서 생산유적이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회현리패총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다.
이 봉황대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다.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와 고상건물지, 그리고 방어시설과 우리나라 최대 깊이의 패총이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가야문화환경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정비가 이뤄졌는데, 가야시대의 주거지와 고상가옥, 망루와 접안시설, 그리고 선박 등을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수목(樹木)들을 우리나라 고유수종으로 교체하여 가야시대의 환경을 최대한 살라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그야말로 가야시대 마을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도심 속에 있기 때문에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김해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럼 봉황동유적을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봉황동유적의 중심엔 가야의 기마무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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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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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목책(木柵)이었다. 목책이란 나무를 이용하여 성벽처럼 마을 주위를 둘러놓은 것으로서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널리 활용하였다.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의 마을과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지만, 마을의 권역을 표시해주는 역할, 그리고 혹은 여러 겹으로 둘러서 종교시설로서의 권위와 신성함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의 초기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사용되곤 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 기사를 보더라도 방어를 목적으로 목책들이 더러 만들어지곤 한다. 이는 백제뿐만 아닌 당시 다른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였고, 봉황동유적도 이 점에 착안하여 이렇게 복원해 둔 것으로 보인다.
목책을 지나 위로 서서히 올라가니 황세바위라고 하는 큰 바위와 가락국천제단(駕洛國天祭壇)이라는 제단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황세바위는 김해에서 내려오는 전설인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설화'가 깃들어 있는 장소로서, 두 사람이 서로 내기를 하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충남 공주에도 이와 비슷하게 '황새바위'가 있는데 서로 매우 다른 설화의 전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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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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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언덕을 넘어 아래로 내려오면 동상이 하나 보인다. 기마무사상(騎馬武士像)이라고 하는 동상인데 온몸에 갑옷을 걸친 무사가 창을 들고 말 위에 앉아있는 모습니다. 말 또한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이다. 이 기마무사상은 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와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한 가야시대의 고분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 주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기마무사상은 대성동고분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가야무사상과 비슷한데, 서로 들고 있는 무기가 창과 월도라는 것만 차이점이다. 이 기마무사상의 화려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가야의 뛰어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1600년의 시간을 담은 가야의 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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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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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은 본래 지금의 시내지역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항구도시였다. 지금은 김해평야를 떠올리지만 당시엔 낙동강 하구로 활발한 무역이 이뤄지던 상업도시로, 오히려 평야지대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 중 하나가 바닷가의 조개들을 쌓아 만든 회현리패총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유적이 바로 이곳에 복원되어 있다.
봉황동유적에서 가장 볼만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가야시대의 항구와 마을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3개의 건물과 가야의 배를 복원해 놓아 그 당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에 복원된 건물들이 당시 사람들이 거주하던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의 건물들은 지상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올려 놓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고상식가옥(高床式家屋)이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굴립주건물(掘立柱建物)이라고도 한다.
이런 고상식가옥은 오늘날 동남아시아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김해 지역에서는 그러한 기능을 아울러 창고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도 부경(桴京)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만주지역을 답사하면 이와 비슷한 창고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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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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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고상식가옥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에 가야배라는 이름의 나룻배가 하나 띄워져 있어, 흡사 가야시대의 작은 마을에 온 착각마저 들게 한다. 가야배는 가야시대 토기를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아마 저런 배를 타고 물 위를 나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망루가 시설되어 있다. 망루는 당시 마을마다 있어서 적들이 쳐들어오는지, 혹은 외부에 어떤 소식이 들어오는지를 관찰하는 장소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하던 것으로서, 당시 이런 나루터에서는 배가 들락날락 거리는 것과 적들이 쳐들어오는 경우 등을 대비하여 필수적으로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망루는 가야시대의 건축기술을 최대한 고려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진 회현리 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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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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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면 가야주거군을 만날 수 있다. 가야주거군에는 앞서 살펴본 나루터의 고상가옥과 망루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가야인들이 살았던 가옥들도 복원되어 있다. 앞서 말했지만 당시의 고상가옥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도 주로 창고로서의 기능이 더 많았으며, 주로 주거지에서 여러 생활이 이뤄졌다. 이를 움집이라고도 부르는데,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거기에 기둥을 대어 올리는 형태이다.
앞서 가야주거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건물들이 있으며 시민들에게 가야인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쉼터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겉모습에 그칠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후속조처가 없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복원을 해놓으면 단순히 끝나는 게 아닌, 복원 이후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육과 추억의 장으로서도 활용 할 수 있을 텐데…. 이에 대한 방안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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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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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유적은 크게 봉황대와 회현리 패총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중에서 회현리패총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유명하다. 한 가지 아쉽다면 이 발굴조사는 우리의 손이 아닌, 일본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시기 때 이마니시류[今西龍] 등이 발굴하였는데, 대규모의 패총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패총은 당시의 생활유적으로서 조개를 쌓아놓은 것을 말하며, 그 때문에 흔히 조개무지라고 부른다. 조개를 쌓아 놓은 게 뭐 얼마나 신기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조개를 채취하는 시기 등을 파악하여 해안가의 생활 패턴 등을 분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동물과 어패류 등을 연구할 수 있다. 그 속에는 토기 같은 생활 쓰레기도 발견된다.
이런 회현리 패총은 가야시대 사람들도 먹고 남긴 조개껍질로 쌓아 만들었으며 그 높이가 굉장히 높다. 우리나라의 해안가에서는 이런 유적들이 종종 발견되어 중요한 학술 가치를 지닌다.
봉황동유적은 김해 시내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서 활용된다. 그리고 세밀한 복원을 통해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곤 한다. 사실 이런 유적은 다른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남다르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활용은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복원된 가옥들이 개방적이라기보다 비개방적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앞으로도 계속 보존하고 관리해,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는 문화재로 기억되길 바란다.
김해 봉황동유적은 김해시민들은 물론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야시대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된다. 가야시대 가옥과 배, 그리고 마을의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자그마한 공원으로 꾸며졌기 때문이다.
특히 복원 부분에서 많은 신경을 써놨기 때문에 여느 유적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는 유적의 보존을 우선시하여, 복원보다는 발굴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에 급급함에 비해, 봉황동유적은 복원을 우선시하였다는 점이 특징이자 강점이다.
사실 이런 유적은 봉황동유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 암사동유적이나 부여 송국리유적, 순천 고인돌공원 등에서도 이런 주거지 복원이 이뤄졌다. 일본 야요이시대의 요시노가리유적은 이런 복원된 마을의 대표적인 예이며, 중국 심양의 신락유적도 이런 식으로 복원되어 있다.
또한 부여에서 백제역사재현단지가 백제시대 주거지와 건물들을 다수 복원하여 개관할 예정이며, 김해에서도 가야역사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이런 주거지 복원 등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하니 여러모로 기대가 된다.
봉황동유적은 여러모로 신경 써서 복원한 느낌이 많이 들지만, 그래도 더러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이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차후에 약간의 보완을 하면 어떨까 싶다.
고상가옥, 무엇을 보고 복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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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귀, 철의 왕국 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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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유적에 복원되어 있는 고상가옥을 보면서 누구나 드는 의문은 과연 어떻게 복원하였을까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고려시대의 것임을 상기해 본다면, 1500년은 훨씬 넘긴 가야시대의 목조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가옥을 모습을 세밀히 복원하여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하려면 그에 따른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로 한다.
일단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고고학적인 증거, 즉 유구의 모습이다. 고상가옥, 즉 굴립주식건물지의 유구를 보면 주로 동그라미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모습을 가지고 열을 맞춰 배치되어 있다. 이게 과연 고상식가옥의 흔적인가에 대해 갸우뚱거리는데, 당시 건물의 기둥이 있던 자리의 흔적이 그렇게 남은 것이다. 이를 토대로 건축학적으로 살펴보면 당시 고상가옥의 크기와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로서는 부족하다. 뭔가 그 당시 주거지의 모습을 알만한 확실한 유물은 없을까? 이에 대해서 주로 활용하는 자료는 고분벽화나 당시의 유물들, 혹은 민족지 자료가 있다. 이 중에서 가야의 고상가옥은 유물을 통하여 그 모습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로 집모양토기라고 하여 그 당시 집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토기들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토기들을 흔히 상형토기(像形土器)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집 모양 외에도 동물, 인물, 물건 등을 형상화한 토기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앞서 말한 가야 고상가옥을 복원하는데 참조한 자료는 바로 집모양토기[家形土器]이다. 집모양토기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 그리고 국립김해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집모양토기도 있는데,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봉황동유적의 고상가옥은 이를 참조하여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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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노가리 특별전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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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집모양토기는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집모양토기와도 비슷하다. 지붕과 문, 그리고 올라가는 계단과 기둥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한 게 특징으로서 이를 토대로 집과 나무 등을 이용해 복원하였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이 외의 자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방서판(防鼠板)이다. 방서판은 고상가옥 내부로 침입하는 쥐를 막는 판자라는 듯으로 고상가옥의 기둥과 집 아랫부분 사이에다가 두며 역경사로 달아놓았다. 사실 국내에서 출토되어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고대의 한국이나 일본은 공통점이 많았고, 일본에서는 이런 유물들이 풍부하기 때문에 봉황동유적의 복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굳이 주거지 입구에 자물쇠를 걸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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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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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유적에서는 복원된 가옥들로 공원을 조성하였고, 또한 이게 도심과 잘 어울리면서 진풍경을 자아낸다. 하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약간 아쉬운 부분이 더러 있다. 그 중에서도 고상가옥들이 단지 바라만 볼 수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점이 꽤 안타깝다.
봉황동유적의 고상가옥들은 현재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상태이다. 닫혀있다 못해서 아예 자물쇠로 단단하게 채워놓기까지 하였는데, 이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복원된 가옥은 그 당시 모습을 살펴보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지 건물의 내부를 볼 수 없다. 물론 내부가 과연 크게 대단할 것이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왕 고상가옥을 복원해 놓았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서 고상가옥 내에 문을 열고 그곳에 가야시대에 사용하였던 토기나 유물들을 진열해 놓아 그 용도를 쉬이 짐작할 수 있게 해 놓는 것이다. 혹은 주거지의 경우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내부에 비치해 두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사실 관리의 문제 때문에 자물쇠로 잠가놓아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다. 애초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복원 가옥들을 훼손하거나 화재를 일으킬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려면 감시요원 등을 배치하거나 카메라를 설치해야하지만 이를 낭비로 보는 경향도 있다는 점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하지만 문화재 지킴이처럼 자원봉사자를 통하여 이곳을 둘러보면서 관광객들에게 소개를 하고, 또한 관리에도 신경을 쓰는 방식은 어떨까싶다. 가야시대의 복식을 최대한 재현하여 이를 입고서 봉황동유적을 소개한다면 이 또한 김해시로서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관광 자원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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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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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사례는 봉황동유적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여러 복원 가옥들이나 문화재들의 경우 입구를 막아 놓아 관광객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 많다. 이 또한 관리상의 문제 때문에 그런 것으로서 시각적으로 살펴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서 체험 위주 방식이 늘고 있다. 예전엔 박물관들이 과거에는 유물을 전시 하는 데에 국한되었으나, 최근엔 거의 모든 박물관들이 나름의 체험시설을 마련해 놓아 어린이 관람객이나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에게 추억과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참고하여 봉황동유적도 적극적인 활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설사 이런 방식을 항상 유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주말마다 개방하여 구경할 수 있게 하는 식의 절충안 또한 있을 수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자물쇠는 가급적 떼어버리는 게 어떨까? 가야시대의 자물쇠도 아닐뿐더러 폐쇄적인 느낌을 주어 관광객들이 보기에 눈살이 찌푸리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봉황동유적 외에 다른 전통가옥이나 문화재에서도 문을 굳게 닫아 놓거나 내부를 개방 안한 경우, 괜한 호기심 때문에 이를 훼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관광객의 의식도 문제이지만 무조건 폐쇄가 꼭 최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문화재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물론 곳곳에 안내문을 설치하여 이해를 도모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방서판의 경우 그에 따른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 또한 표시를 해 줌으로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도모한다면 더욱더 교육적인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봉황동유적의 경우 다른 유적이나 문화재가 갖고 있지 않는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를 현상 유지만 할 것이 아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봉황대는 조선시대 후기의 김해부사였던 정현석이 구릉의 생김새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도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곳은 본래 가야시대의 집단취락과 조개무지 등이 있던 곳이다.
봉황동유적에는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산재해 있다. 가야시대 나루터를 현대로 옮겨놓은 듯이 복원해 놓은 작은 나루터와 고상가옥의 모습이나, 멀리 배나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던 망루 등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회현리패총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 옛 기억을 담은 사적들이 즐비한데, 그 중에서도 언덕의 위쪽에는 바위 하나엔 깊은 사연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바위를 황세바위라고 부른다. 이 황세바위는 김해지역에서 전해지는 가야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바위로서, 두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름만 들어서는 충남 공주의 황새바위가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주의 황새바위는 종교탄압에 저항하던 천주교인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는 점에서 그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봉황대에 깃든 가야시대 러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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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들문화예술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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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0여 년 전, 당시 가락국의 왕은 9대왕인 숙왕(肅王)이었으며 그 당시의 일이다. 지금의 대성동인 북대사동(北大寺洞)에는 황정승이, 남대사동(南大寺洞)에는 출정승이 있었는데, 둘은 절친한 사이로서 서로가 사돈이 되기로 약조하였었다.
이후 황정승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세(洗)'로 하였으며, 출정승은 딸을 낳아 이름을 '여의(如意)'라 지었다. 하지만 돈이 많고 세력이 강했던 출정승은 막상 딸이 생기고 나니, 가난한 황정승에게 자신의 딸을 주기 아까워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오랜 신의가 있던 황정승과의 의리를 저버리기는 어려워 일부러 여의를 어릴 적부터 남장을 시켰다고 한다. 황정승과 출정승이 절친한 사이였기에 황세와 여의 또한 절친하게 지냈고, 같이 서당을 지내며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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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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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황세는 왠지 여의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남자의 옷을 입고 있지만 여자 같다는 생각에 같이 서당 근처의 개라바위로 데려갔다. 황세는 이곳에서 서로 오줌을 멀리 누는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고 먼저 시원하게 오줌을 쏴 올렸다. 이에 당황한 여의는 재빨리 바위 뒤쪽으로 돌아가 궁리하였는데, 마침 그곳의 근처에 있던 삼대를 이용하여 오줌을 누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개라바위엔 오줌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황세는 오해를 풀고 다시 여의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어느 여름, 황세는 이번엔 멱을 감으러 거북내, 즉 지금의 해반천에 가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더 이상 자신이 여자임을 숨길 수 없던 여의는 숨겨왔던 사실을 황세에게 밝히게 된다.
이로 인하여 여의는 학동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더 이상 서당에 나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일찍이 여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던 황세는 출정승댁 앞에서 배회하며 기다리게 된다. 이를 안 출부인은 출정승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결국 출정승은 둘의 교제를 허락한다. 황세와 여의는 기쁜 마음으로 개라바위의 북편에서 약혼을 하게 되며 결혼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뤄지지 못한 간절한 그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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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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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당시 가야는 신라가 한없이 쳐들어오고, 이를 막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황세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 출정하게 되고, 여러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를 숙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내리고, 자신의 외동딸인 유민공주와 혼례를 치르도록 한다.
이에 황세장군은 약혼녀가 있다고 말하지만 되려 숙왕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숙왕은 가야의 명운이 위태하던 시절이었기에 뛰어난 장군인 황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숙왕의 명령을 거절 할 수 없던 황세장군은 유민공주와 강제적으로 혼례를 올리게 되고 숙왕의 부마가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의낭자와의 약혼은 무효가 된다.
이를 안 출부인은 병을 얻게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여의낭자도 크게 상심하게 된다. 이미 황세장군에게 마음을 주었기에 다른 이에게 시집가길 거절하였고 홀로 지내다가 스물 네 살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황세장군도 마음에 없는 결혼생활을 하며지내다가, 여의낭자의 죽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결국 황세장군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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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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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슬퍼하였다고 하며, 둘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어린 시절 자주 뛰어놀던 개라바위가 작은 바위를 얹어놓아 황세돌,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개라바위가 봉황대에 있는 황세바위이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이 1975년 여의낭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여의각(如意閣)이라는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 여의각은 현재 봉황동유적 내의 가야주거군 뒤편에 위치해 있다.
사실 이 설화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바로 숙왕의 딸인 유민공주이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아버지인 숙왕의 명에 따라 시집을 가게 되었으나 늘 다른 여자만을 그리워하는 황세장군과의 혼인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황세장군이 결국 죽게 되고, 이에 유민공주는 크게 슬퍼하면서 세상이 덧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여의낭자와 황세장군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임호산에 들어가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런 공주의 이름을 따서 유민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전설 속의 가야, 그리고 역사 속의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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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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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에 등장하는 숙왕은 가야 9대왕인 겸지왕(鉗知王)으로서 금경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설화 속에는 자녀가 유민공주만 등장하나 사실 구형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이 구형이 바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다. 이 당시 가야의 명운은 점차 퇴락하던 시기로 신라의 갖은 압박이 가해지던 때였다. 전설의 배경이 이때로 설정된 것은 그러한 가야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이 전설은 당시에 있던 완전한 사실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설화에 나오는 황정승과 출정승이 실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락국기>에 의하면 겸지왕의 왕비가 바로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인 숙(淑)이라고 한다. 출정승이라는 인물은 바로 이 출충이라는 인물을 가리키거나 혹은 그 모티브로 보인다.
가야 멸망기를 배경으로 한 이 설화에서는 불교의 존재가 심심찮게 보인다. 유민공주가 황세장군이 죽자 출가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인데 이 사실성에 대해서는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사실 이 당시에 불교가 들어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겸지왕의 바로 전대왕이었던 질지왕(銍知王) 때에 수로왕의 왕비였던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들이 결혼하던 곳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물증은 아직 없으며, 대가야에서도 불교가 전래된 흔적은 일부자료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의문의 소지가 있다. 이 설화에서 나오는 불교는 가야 당시의 상황이라고 보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설화의 비애감을 더욱 강조하고, 김해 곳곳의 사적들에 대한 유래를 꾸미기 위해 덧붙여진 내용으로 보인다.
이 전설은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져 내려오고 있다. 마당극이나 애니메이션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 설화를 전하고 있으며, 봉황대유적이나 임호산, 흥부암 같이 설화와 관련된 주요 장소들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매년 5월 5일 단오날에 여의각에서는 여의낭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동제를 지내고 있는 등 문화의 보존이 이뤄지고 있다.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설화는 완벽한 당시의 사실을 말해준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그 배경이 가야의 멸망기라는 점은 김해에 살고 지내던 이들이 그만큼 가야를 그리워하였고 또한 동경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만큼 가야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아름답고도 슬픈 이 설화가 지금까지 내려와 회자되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한국 최초의 발굴조사는 어디에서 이뤄졌을까? 고고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자주 내는 퀴즈 중 하나지만 이에 대해 쉽게 대답하는 이는 몇 없다. 사실 이 문제의 답은 2개다. 하나는 김해 회현리패총,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경주 호우총이다.
김해 회현리패총 발굴조사는 대한제국 시기에 이뤄졌다. 하지만 말이 대한제국이지,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이었다. 1907년 일본인인 이마니시 류가 처음 발견하여 조사하였고 이게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경주 호우총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난 뒤에 처음으로 발굴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46년 5월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과 마지막 조선총독부박물관장이었던 아리미쓰 교이치에 의하여 발굴된 호우총은 신라 무덤에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담긴 청동그릇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정답은 2개지만 두 발굴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이 중에서도 회현리패총은 비록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발굴되었고, 이후 일본인들의 잦은 조사가 있었지만 한국 고고학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 땅에서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패총 유적의 발굴로 1~4세기 당시 생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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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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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마니시 류가 조사를 한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조사가 되었다. 1914년 도리이 류조, 1915년에 구로이타 가쓰미에 의해 각각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1920년에 하마다 고사쿠와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하여 조사가 이뤄진다.
이때 조사된 바에 의하면 패총의 조개껍데기 퇴적은 상층과 하층의 구별이 뚜렷하였지만 출토된 유물의 내용 면에서는 특별한 차이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개껍데기의 종류는 굴, 백합 등 34종과 4종의 갑각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1933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김해 회현리 패총'이라는 정식 이름이 붙여진다. 그리고 또다시 1934년과 1935년에 가야모토 노리토에 의하여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져 유적의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이때는 주로 무덤들을 발굴하였는데, 고인돌 1기, 돌널무덤 5기, 독무덤 3기와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발굴방법에 문제가 있어 층위에 따른 유물의 성격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방식은 계단식조사방법인데 층위를 게단식으로 드러내어 조사한 방법이다. 이 경우 위의 층위은 후대의 것, 아래의 층위은 선대의 것이라고 전제하고 연구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로서는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서 본다면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바로 자연층위의 특수성을 무시하거나 층위의 교란 등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이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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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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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사적 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반해 봉황대구릉은 1983년 경남문화재자료 8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경남고고학연구소 등에서 수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2001년 2월 5일 회현리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회현리패총은 지금의 봉황동유적에 포함되어 있으며, 유적의 규모는 동서 길이가 130m, 남북 너비가 약 30m쯤 되며 퇴적층의 높이는 6~7m 정도가 된다. 조개껍데기는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집중적으로 두껍게 쌓여있는 반면, 동쪽과 북쪽 정상부는 얇게 깔려있다. 이곳은 낙동강 하류의 충적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인데,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이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고, 조개채취도 용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원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대표하는 김해식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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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역사문화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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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리패총에서는 수많은 조개껍데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크게 나누어보면 토기, 골각패제품, 중국계유물, 일본계유물 등이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생활풍습이나 자연 환경 등을 규명할 수 있다.
일단 식생활자료로는 조가비와 짐승뼈, 그리고 불탄쌀이 발견되었다. 이중 어류로는 상어, 돔, 고래, 거북이 등이 발견되었으며 조류로는 기러기, 오리, 꿩, 닭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육상동물로서는 멧돼지, 사슴, 노루, 개, 소, 말 등이 발견되었으며, 조개류로는 굴, 꼬막, 담치, 홍합, 소라, 고등, 백합, 다슬기 등이 발견되었다. 불탄쌀의 경우 조가비층 아래에서 나왔는데 낱알의 생김새는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를 보아 당시도 오늘날처럼 다양한 생물들을 섭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들도 여럿 발견되었는데 주로 취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골각패제품, 즉 뼈나 뿔, 조개 등을 이용하여 만든 제품으로 복골, 골촉, 침, 소형칼자루, 장신구 등도 발견되었다. 또한 국제교류와 관련한 중국계유물도 발견되었는데 화천, 청동경이 있다. 그리고 흔히 일본계유물로 알려진 야요이토기와 하지키 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 외에도 각종 철기나 유리옥, 석기, 가락바퀴 등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당시엔 다양한 자연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생활풍습과 자연환경 등의 해명에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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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고학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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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소위 '김해토기'라고 불리는 '김해식토기'이다. 김해식토기는 한강 이남지역에서 서기 1~3세기를 대표하는 토기인데, 그 토기의 빛깔이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띈다. 토기의 형태로는 항아리, 독,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잔 등이 있는데 주로 경질로 구워진 것이다. 토기를 만들 때는 권상법이나 윤적법을 사용하여 만든다. 여기에서 권상법(捲上法)은 점토가락을 길게 돌려가며 쌓아서 그릇 벽을 만드는 수법이며, 윤적법(輪積法)은 점토로 된 태를 한단씩 쌓아 올려 그릇 벽을 만드는 수법이다.
그렇게 토기를 만들고 난 후엔 표면에 물손질하여 문지르거나, 판자나 실 같은 막대기로 두드리기, 대칼 같은 기구를 이용하여 깎아내기 등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표현엔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다. 이러한 김해식토기는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토기의 중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토기들이 뒤에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엔 쓰레기, 오늘날에는 귀중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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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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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리패총은 앞서 말했듯이 봉황동유적 중에서 한쪽에 치우쳐져있다. 현재 이곳은 전시관이라고 하여 당시 조개무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자그마한 건물인 전시관을 자동문으로 열고 들어가면 회현리패총의 단면을 볼 수 있다. 6~7m에 달하는 조개무지가 위아래로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인데, 이는 고대인들이 그만큼 많은 조개들을 섭취하고 또 이를 모아 놓았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패총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유적들이 있으며 주로 해안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내륙에서도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창녕 비봉리패총이다. 이 경우는 당시 내륙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증거로 보고 있으며, 해안가에 발견되는 예에 비해서는 소수이다. 하지만 이를 통하여 당시 해수면의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크다.
패총은 생활유적이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던져버린 쓰레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퇴적된 것인데, 그 중에서 조개껍데기가 다수이기 때문에 패총, 즉 조개무지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 수많은 유물들은 이 패총 속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당시에는 무심코 버린 쓰레기들이 오늘날 와서는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받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패총은 단순한 쓰레기더미라고만 볼 수 없다. 상노대도, 욕지도, 연대도 등지에서 발견된 패총의 경우에는 인골이 남아있는 무덤이 출토된다. 이러한 예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지만, 이런 식으로 패총에는 당시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의미부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회현리패총은 그 유적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못하여 아쉬운 면을 남긴다. 아무래도 고고학 관련의 인사들 외엔 그렇게까지 크게 관심이 있지 않고, 봉황동유적에서도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보니 다소 외면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유적의 중요성을 널리 홍보하고, 또 자세하고 풍부한 설명과 여러 실물자료들을 보여주면 답사객들에게 김해의 중요 코스 중 하나로 인식 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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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유적을 지나 김해 답사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할 분산성으로 떠났다. 김해유적을 다니면서 여러 유적들을 보았었는데, 그 중에서도 늘 눈에 들어왔던 유적이 있다. 그 유적이 바로 분산성. 수로왕비릉, 구지봉, 수로왕릉, 구산동고분군, 대성동고분군, 봉황동유적에 가서 주위를 조망 할 때면 언제나 분산성이 보였다. 가까이 있는듯 하면서도 멀고, 먼듯하면서도 가까운 분산성. 김해답사를 마무리하는 코스로 우리는 분산성을 선택하였다.
분산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자동차가 있어서 망정이었지 걸어서 올라가기는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하게 한창 이어진 길을 계속 따라가고 나서야 분산성 임시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난 뒤, 우리는 간단하게 채비를 하고 천천히 분산성을 향해 올라갔다. 분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자그마하게 나 있는 산길이었는데, 등산이라는 느낌보다 산책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였다. 등산로도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진 못하였다.
이윽고 분산성에서 도착하였고 우리는 거대하고 높은 성벽과 맞닥뜨렸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가는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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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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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성(盆山城)은 김해시내에 있는 분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분산(盆山)은 해발 330m로 산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긴 타원형을 이루는 석성(石城)이다. 분산산성이라고도하며 사적 제 66호로 지정되어있다. 분산성은 산봉우리를 감싸듯이 성벽을 둘렀는데, 이를 고고학에서는 테뫼식산성이라고 부른다. 테뫼식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요 특징으로 보고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 분산성을 가야시대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현재 시내 쪽으로 900m정도 되는 성벽이 남아있으며, 성 안에서 몇 개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시대나 신라시대의 토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곳에 세워진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績碑)>에 의하면 이 산성은 고려 말에 김해부사 박위(朴葳)가 왜구를 막기 위해서 옛 산성에 의거하여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허물어졌던 것을 고종 8년, 즉 1871년에 부사 정현석이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분산성의 성벽을 올라가고자 하여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는 여름인지라 곳곳에 수풀이 우거져 있어서 다짜고짜 성벽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입구를 찾아보았다. 그래도 잘 보이지 않자 한쪽에 성벽이 조금 무너진 곳으로 타고 올라갔다. 나중에 올라가고 나서 안 것이지만 그 옆쪽에 성문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북문으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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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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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으로 올라오니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마치 뱀처럼 스멀스멀 설벽이 기어가는 듯 하였다. 분산성의 성벽은 말끔하게 복원시켜 놓았는데 그 때문인지 2가지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 보기 좋다는 것과, 또 다른 것은 너무 깔끔하게 해 놓음으로서 옛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벽을 오늘날에 와서 복원하는 예가 많은데, 이는 관광지로 활용하기 위한 정리 차원과 관광객의 안전 차원 등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옛 모습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일은 없어야겠다.
성벽은 특이하게도 2~3줄로 되어 있었다. 다른 성벽의 경우 일정하게 하나의 성벽이 쭉 이어지는 반면에 분산성은 2줄의 성벽이 군데군데 이어지는 모습이라 꽤 특이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양식을 층단형식(層段形式)이라고 부른다. 층단형식은 성벽을 축조하기 어려운 지역에 석축시설을 쌓은 다음, 그 상부에 성벽을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보축(補築)과 층단(層段)이 생기게 된다.
분산성의 특이한 성벽은 바로 이런 예에 해당한다. 특히 앞선 시기의 성벽을 보축으로 이용하고 후대에 층단을 쌓아 올린 예로서 다른 지역에서 쉽게 보기 힘든 일례이기도 한다. 전쟁 시에는 보축에서도 목제 여장을 설치하여 적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장대에 올라 가야를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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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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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성의 성벽은 잘 정비되어 산봉우리 아래를 휘감듯이 돌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이용하다보니 직선적이지 않고 곡선적이다. 분산성은 그러한 우리나라 성벽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자연과의 어울림으로 인하여 기막힌 장관을 자랑한다. 외국의 성곽과는 또 다른 느낌의 매력이라 하겠다.
성벽 위로 걸어가다 보면 동문을 보게 된다. 성벽에서 바라본 동문의 모습은 돌을 섬세하게 쌓아 올렸다. 성문 옆쪽으로 성벽이 돌출되어 있어서 방어에 더 용이하게 되어 있다. 옹성을 쌓아 성문을 막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 정도의 시설을 설치 할 만큼 부지가 넓지 않아서 간단하게 치를 약간 돌출 시킨 정도에서 마무리 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이 좁아서 암문(暗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적들로서는 이런 성을 넘어와서 공격하기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으리라.
성벽을 보면 곳곳에 자연 바위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지형지세를 이용한 곳이 많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산성으로 쳐들어오는 적들로서는 분산성의 견고한 지세와 굳건한 성벽의 모습 때문에 쉬이 공격해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이 분산성은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방어성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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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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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만장대라고 하는 봉수대가 보인다. 김해 시민들이 분산성을 만장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장대(萬丈臺)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99년에 봉수대가 다시 복원되었는데, 그 근처 바위에는 만장대라고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다.
만장대에 올라서 주변을 둘러보면 김해시내는 물론 낙동강과 남해안, 심지어 부산까지도 보인다. 날이 더 좋은 날이라면 그 시야가 매우 넓게 펼쳐졌을 텐데, 이렇게 전망이 트여있기 때문에 적들의 움직임을 보고, 또 그에 따른 대비를 할 수 있었으리라. 특히 봉수대가 있다는 것은 주변 지역에 적들의 침입을 재빠르게 알릴 수 있는 정교한 체제가 갖추어져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김해는 예로부터 활발한 대외교역을 통하여 성장하였기 때문에 분산성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다. 어떠한 상단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혹은 수상한 집단은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적들의 움직임 등을 살펴보는데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야 또한 자신들의 세력을 보호하기에 현재의 김해 시내는 한정된 공간이고, 또한 적극적인 대응의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분산성 같은 방어시설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분산성 옆에서 들리는 포클레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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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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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대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산성을 내려가기로 하였다. 산성 내에 보이는 작은 길을 따라서 내려가는데 중간쯤에 작은 절이 하나 보였다. 해은사(海恩寺)라고 하는 절인데,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고 전하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하였었다고 한다.
해은사를 지나 다시 우리가 올라왔던 성문 쪽으로 갔다. 이번엔 앞서 올라 올 때처럼 엉뚱한 길이 아닌 제대로 나 있는 길로 내려가는데 옆에 표지판이 하나 보였다.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었는데 멀리서 포클레인 등 중장비가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산중에 무슨 공사인가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내려왔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야역사테마파크 조성공사 현장이었다. 가야역사테마파크는 김해시에서 경주 신라밀레니엄파크나 부여 백제역사재현단지처럼 가야라는 테마를 가지고 당시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도록 만든 관광단지이다. 얼마 전인 26일에 이곳에 세운 가락왕궁 상량식이 열렸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조성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의 보도에 따르면 MBC에서 드라마 <가야>를 촬영하기로 하고, 여기에 김해시가 적극 협조하기로 하였다. 가야역사테마파크를 드라마 촬영 장소로 허가해주고, 동시에 이를 통하여 가야역사테마파크를 홍보할 계획으로 보인다.
가야역사테마파크는 앞서 살펴본 분산성과 근거리에 위치해있다. 분산성 또한 가야시대의 중요한 유적으로서 그 모습을 잘 복원해 놓았기에, 가야역사테마파크가 조성된다면 이 둘을 김해시의 유용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보인다. 다만 입지가 조금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이에 따른 교통편을 늘리고 다양한 볼거리를 조성하며, 적극적인 가야사 조명 등 여러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도 김해시와 김해시민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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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지(金官志)』를 살펴보면, 공(公)은 홍무(洪武) 기묘년(우왕 1, 1375년)에 김해부사(金海府事)에 제수(除授)되어 여러 차례 왜적(倭賊)을 물리치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큰 공(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김해 산성(金海山城)에서 왜구(倭寇)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포은(圃隱) 정공(鄭公)이 지은 '김해산성기문(金海山城記文)'의 대략(大略)에, "김해(金海)는 왜적이 출몰하는 요충지(要衝地)로 비록 명성(名聲)이 있는 자라도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다. 이에 밤낮으로 정신이 지치도록 생각을 다하여 계획을 세워 임금의 은덕(恩德)을 미루어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자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하였고, 고통에 신음하는 자로 하여금 태평한 세상을 노래하도록 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장대하게 집을 짓게 하여 한 달 사이에 온갖 폐단(弊端)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오히려 얼굴에 근심을 띠며 말하기를, '경내(境內)가 물로 둘러싸여 있는 바닷가의 고을은 만약 요새화(要塞化) 하지 않으면 왜적을 당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이에 옛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확대(擴大)하였다. 역사(役事)를 마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천 길 높이로 벽처럼 우뚝 서서 한 사람이 관문(關文)을 막더라도 만 명이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장차 새로 쌓은 산성 위에서 술잔을 들어 공이 성공을 거둔 치적(治績)에 대해 축하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아! 공의 풍부한 공로(功勞)와 두터운 은택은 천 년이 지난 뒷일지라도 경탄(敬歎)할 만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이후로 성이 무너져서 폐하여졌는데 지금 내가 조정(朝廷)의 명령을 받들어 개축(改築)하였다. 공의 후손과 김해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치적을 기록하니, 내가 세대를 뛰어넘어 추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를 서술하여 기록하였다.
때는 성상(聖上) 9년 신미년(고종 8, 1871년) 3월이고, 부사(府使) 정현석(鄭顯奭)이 기록하다.
按金官志▨公於 洪武己卯除金海府使屢却倭賊擊對馬島建大功築▨ 山山城寇戢民安圃隱鄭公爲之記其畧曰金海倭衝也雖有智者難爲治▨ 乃日夜疲精竭思設計推恩使凍餒者飽煗呻吟者謳歌煨燼者奐輪旬月▨ 間百廢擧矣猶憂形於色曰海曲之邑水環其境苟非施險無以爲也於是▨ 古山城擴而大之功旣訖自下望之壁立千仞雖使一夫當關万夫莫能開▨ 將擧酒於新城之上以賀政績之有成也噫 公之豊功厚澤雖在千載之▨ 可敬也已自壬燹以後城圯而廢今余承 朝命改築之公之雲仍與邑人▨ 立石紀公績余不禁曠感之思遂述此以識之時 聖上九年辛未三月也 府使鄭顯奭記
※ 참고문헌 조동원 편저,『한국금석문대계』4,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후반 신라의 선덕여왕과 당시 신라 정치계의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김유신, 김춘추, 비담 등이 등장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역시 김유신으로, 김유신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야왕족 출신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명장이자 정치가였다.
그런 그에 대하여 때 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드라마 상에서 나오는 가상 단체인 복야회가 그것이다. 복야회의 '월야'라는 인물과 김유신을 상호 비교함으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과 친일파의 모습이 보인다는 식의 비교가 올라오고, 이에 대해 누리꾼들 간에 서로 다른 의견을 오갔다.
사실 이 문제는 드라마 상에서의 인물에 대한 문제일 뿐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약간의 역사적 해석을 해본다고 할 때, 대가야왕족의 후손인 월야와 금관가야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을 직접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히 가야에 대해서 김유신은 과연 어떻게 인식하였을지에 대해서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관가야의 멸망, 그리고 대가야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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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선덕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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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신라에 버금가는 국력으로 신라를 위협하기도 하였던 가야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남정을 계기로 세력판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금관가야는 광개토태왕의 공격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고, 이후 대성동고분군 축조가 더뎌지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대가야는 가야제국(伽倻諸國)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게 되며 후기가야연맹체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금관가야와 대가야는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법흥왕 때 항복하여 역사에서 사라지며,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이렇게 항복과 정복이라는 다른 과정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데, 이는 두 나라 출신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하게 됨으로서 귀족들은 그들의 권한을 인정받게 된다. 신라 진골귀족에 편입되어 활동을 하게 되는데, 골품제의 신라로선 정통 진골이 아니었기에 배척을 당한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하위귀족들에 비해서는 대접을 받으면서 그들의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된다.
이에 반하여 대가야는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하여 정복당한다. 대가야의 수도를 사다함이 이끄는 5천의 기병이 전단문이라는 문으로 들어가 흰 기를 꽂고, 이사부도 진격해 옴으로서 정복당하게 된다. 대가야의 귀족들은 금관가야의 귀족처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죽죽이나 강수 등 소수의 인물들이 약간의 활약을 펼칠 뿐이다. 반면 금관가야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그들의 권한을 인정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이는 신라의 정책에 의한 것이다.
월야는 가상인물이지만, 그의 입장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금관가야계인 김유신과는 다른 의미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유신과 신라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흐르는 피, 즉 혈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김유신은 스스로를 가야인으로 생각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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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선덕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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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우리는 이 때문에 김유신이 가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그랬을까?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일단 김유신의 혈연관계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는 김무력이며, 아버지는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입종갈문왕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하였다. 입종갈문왕은 진흥왕의 아버지이자 법흥왕의 아우로서 신라 왕족의 일원이었다. 즉 김유신으로서는 신라인 어머니의 아래에서 자란 셈이며, 그의 부인인 지소부인 또한 김춘추의 딸로 신라왕족의 일원이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세 번째 아들이다. 가야가 멸망 할 때 아버지와 형들과 같이 항복하고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서현도 마찬가지로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이는 김유신도 마찬가지였다. 즉 가야 후손 3세대인 김유신으로서는 가야인으로서의 자각보단 신라인으로서의 자각이 더 컸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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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선덕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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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김유신은 과연 얼마나 자신을 가야인이라고 자각하였을까? 아마 가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긍정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그와 상반된 부분에서의 자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계 진골귀족들은 신라 중앙 정계에 쉽게 융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유신이 역사에 그 이름을 비친 첫 사례는 629년 고구려와의 낭비성전투 때이다. 이때의 활약 이후 642년에 이르러서야 역사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때 김유신의 나이가 47세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다른 이에 비해 그 본격적인 활약이 꽤 늦은 시기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사다함의 경우 15세에 대가야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가 된다.
김유신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김춘추와의 정치적 연계를 통해서이다. 애초에 김유신의 청년시절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은, 사료의 부족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야 출신으로서 정계에서 제대로 활약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금관가야인과 다른 대우를 받은 대가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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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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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에서 대가야인들을 잠시 살펴보자. 금관가야 출신의 가야 후손들은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함을 알 수 있지만, 정작 대가야 후손들은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가야 출신으로 신라인으로 활약한 사람은 크게 3명이 있는데 우륵, 죽죽, 그리고 강수이다. 우륵의 경우 대가야 멸망 이전에 신라에 항복했기에 논외로 친다면 죽죽과 강수가 대가야인들의 후손이라 하겠다.
죽죽과 강수는 역사에서 몇 번 이름을 비추지만 그렇게 큰 비중은 없는 편이다. 죽죽은 대야성전투에서 활약하였는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무장이다. 이로 인하여 나중에 신라 조정에 의해 급찬으로 추증된다. 급찬은 신라 17등 관계 중 9번째에 해당하며 6두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강수는 신라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머리가 뾰족하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석체의 경우 17등 관계 중 11번째인 나마에 해당하며 이는 5두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그리고 강수는 나중에 실력을 인정받아 사찬의 작위를 받는데 이는 8번째로서 6두품에 해당한다.
이렇게 죽죽과 강수를 보면 그 벼슬이 진골에 이르지 못하고 5두품과 6두품에서 머무르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금관가야의 후손들이 진골귀족으로 활약했던 점과 대비되는 점이다.
애초에 이는 금관가야와 대가야 멸망 시 신라에 우호적이었는지, 적대적이었는지에 따른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많은데 극렬히 대항하다가 투항한 경우 그에 따른 철저한 차별대가를 치르게 하였었다.
드라마 상에서 나온 김유신과 월야의 대화나 관련 내용들은 가상의 내용이지만, 역사적 상황에 미루어 보았을 때엔 서로 다른 입장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지만 겉돌았던 금관가야인들, 그리고 신라의 귀족에선 배제되고 개인의 능력으로 6두품 정도로 활약한 대가야인들로선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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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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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멸망 이후 수로왕에 대한 제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정기적으로 제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는 김유신의 활약으로 신라가 융성해지고, 또한 그의 여동생이 신라 왕실과 혼인함으로서 외척가문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김유신은 이러한 노력을 행하였고 결국 그 결실로서 가야의 시조와 가문에 대한 대우를 향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 금관가야인과 대가야인의 후손은 서로의 입장이 다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망국의 후예라는 점에서 신라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유신은 비록 혈통적으로서는 가야인의 피에 신라인의 피가 섞여있어 가야인으로서 정체성을 크게 느끼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진골귀족 내부에서 차별대우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김유신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에 대한 보상의 하나로서 수로왕의 능묘와 제사가 복구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가 가야인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우리에게 가야의 왕자로 알려진 인물들은 크게 2명이 있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월광태자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김무력이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으며 같은 가야의 왕자라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둘의 인생을 살펴보면 여러모로 차이점이 많다. 대표적으로 월광태자는 가야의 마지막 왕자로 비운의 인물로서 알려져 있지만, 김무력은 신라의 장군으로 더 이름이 높다.
월광태자의 경우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으로도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반해 김무력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아들로서 신라에 항복하였었다. 그리고 신라의 장군으로서 활약을 하였다.
이 김무력의 아들이 김서현 그리고 손자가 바로 김유신이다. 삼국통일을 이끈 명장의 할아버지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김무력. 그에 따른 기록은 많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가야 마지막 왕자이자 신라의 장군으로 지내야 했던 그의 자취를 돌아보도록 하자.
가야의 마지막 왕자, 신라에게 항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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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현의 표준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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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여러 개의 소국이 서로간의 이해에 따라 다양한 구심점을 가지는데, 주로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를 중심으로 뭉쳤었다. 초기에는 금관가야가 바로 그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로서 한때는 신라의 강한 경쟁국가, 혹은 이를 넘어 신라를 압박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이러한 금관가야의 영광도 광개토태왕의 남정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후부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맹주자리 또한 대가야가 차지하게 되며 소국의 하나로서 쓸쓸하게 연명하게 된다. 또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나라, 그리고 전기 가야연맹체를 이끌었던 영광은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게 된다.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신라는 재기의 기반을 다지고 서서히 세력을 키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경쟁자였던 가야와 맞붙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결국 가야는 신라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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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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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구형왕은 왕비 및 세 아들과 함께 항복하게 된다. 그 세 아들 중 첫째가 노종(奴宗), 둘째가 무덕(武德), 그리고 막내가 무력(武力)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이들을 예에 맞게 대우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며,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김무력은 더 이상 왕자로서의 신분이 아닌, 신라 장군으로서 그 삶을 보내게 된다.
가야 왕자에서 신라의 장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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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현의 표준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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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무력에 대한 기사는 드문드문 보인다. <단양신라적성비>를 보면 '무력지 아간지(武力智阿干支)'라 기록되어 있다. 아간지란 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인 아찬(阿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로 알려져 있다. 단양신라적성비 축조연대는 진흥왕 6~11년(545~550)으로 보고 있는데, 이를 보아 당시 김무력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사기>를 보면 진흥왕 14년, 즉 553년에 신주 군주로 임명된다. 신주(新州)는 같은 해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만든 곳으로서 지금의 한강유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김무력을 신주 군주로 임명한 것은 그에 대해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부러 김해와 먼 지역으로 보내어 지방 세력과 멀게 하고 그의 충심을 살펴보는 한편, 그를 전쟁에 적극적으로 기용하겠다는 진흥왕의 의지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김무력에게 뜻밖의 기회가 1년 뒤에 찾아온다. 바로 백제가 대가야, 왜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진격해 온 것이다. 신라에서도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서 싸웠는데 불리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보면 이 당시 관산성이 백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전하니, 당시 신라군이 얼마나 최악의 상황이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신주의 군주로 있던 김무력은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오게 된다. 이 당시 백제군을 이끌고 있던 자는 부여창(扶餘昌), 즉 후대의 위덕왕(威德王)이다.
부여창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왕자로서 백합야전투에서는 고구려의 장수에 맞서 대결을 펼쳐 적장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던 자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관산성에 있는 부여창을 걱정하여 군사를 이끌고 간다. <삼국사기>에는 이 당시 50여명의 소수 인원만 대동하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일어났다. 김무력군에 속해 있던 고간 도도(高干都刀)가 성왕 일행을 재빨리 공격하여 생포하게 된다. 성왕은 결국 도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관산성의 백제군들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기세를 몰아 김무력은 백제군을 공격하게 되고, 백제군은 결국 패배하게 된다.
이 관산성전투에서 보여준 김무력의 활약은 그에 걸맞게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척경비>에는 '무력지 잡간(武力智迊干)'으로 적어놓고 있는데, 잡간은 17관등 중 세 번째 등위에 해당한다. 대가야 마지막 왕으로 보이는 도설지(道設智)의 경우 그 등위가 <단양신라적성비>에서는 급간지로 9등위, <창녕진흥왕척경비>에서는 사척간으로 8등위임에 비하면 김무력의 승진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김무력의 등위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도 그대로 잡간으로 나와 등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후 김무력에 대한 기사는 나오지 않지만 위의 자료들만 보더라도 그가 신라인으로서 얼마나 큰 활약을 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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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드라마 <선덕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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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걸맞은 사례가 바로 김무력의 후손인 김서현과 김유신이다. 김무력의 아들은 김서현이다. 김서현도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하였는데 양주총관으로서 백제와 싸워 전공을 세웠었다. 그리고 진평왕 51년, 즉 629년에 낭비성전투에 김용춘, 김유신과 함께 참전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김서현의 아들은 삼국통일을 이끈 당대의 명장인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처럼 김무력 이후 금관가야 왕족의 가문은 크게 부흥하였고, 또한 그만큼의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김유신 이후에도 신라 조정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었다. 이처럼 망국의 후예인 가야의 왕족들이 신라에서도 명문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무력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관산성전투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 포착된다. 바로 백제가 당시 대가야, 왜와 연합해서 신라와 전투를 치렀으며, 신라에서는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무력이 지휘를 함으로써 맞서 싸웠다는 점이다. 이를 보고 대가야의 입장에서는 금관가야의 후손이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 대가야의 경우 백제에 의해 동원된 느낌도 적잖이 있다.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자신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백제의 편에 들어 군사를 보내 도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산성전투 이후 대가야는 신라에게 잠식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점을 보고 김무력을 동족을 배반하였다고 비판할 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야는 생각보다 서로간의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상황에 따라, 혹은 시세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했다. 가야제국 내부에서 서로의 이득을 위해 싸우기도 하였으며 세력의 강약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야에게 오늘날처럼 동족관념을 부여하여 해석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김무력은 자신의 환경 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다 하였다고 평가해야 한다. 이에 대해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 입장에만 맞춰서 생각하는 것으로써 가장 중요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간과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가야를 어떻게 기억할까. 최근 언론이 가야를 자주 다루고, 문화유적으로 개발된 곳이 많아 예전보다 인식이 많아 나아졌지만, 아직도 백제나 신라에 비해 힘이 약한 약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혹은 자료가 많지 않기에 신비의 왕국으로 여겨지곤 한다.
사실 가야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국경을 넘은 사랑 이야기와 사다함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진 대가야, 그리고 가야 후손 김유신 정도뿐이다. 이 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게 태반이고, 교과서에서도 짧게 언급하고 끝나는 수준이다.
그럼 과연 가야는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도 될 역사일까? 우리 역사에 있어서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반복하였고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다. 전체 흐름에 있어서 가야는 작은 국가였을지 몰라도,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야의 존재는 생각보다도 크고, 또한 강한 국가였다는 점에서 인식의 궤를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압박하던 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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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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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약소국으로 알려졌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가야는 신라와 낙동강을 동서로 두고 자웅을 겨루던 사이로서, 신라는 가야와의 싸움을 생각보다 힘겹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사료에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기사를 보면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신라왕에게 찾아와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한 기사가 있다. 이에 파사이사금은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여 초청하여 이 문제를 물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음집벌국 편을 들어주어 결정이 나자 신라에선 귀족들로 이뤄진 6부에서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6부 중 5부에서 이찬(伊湌 : 신라 17관등 중 둘째 등급)을 우두머리로 보내었는데, 한기부만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보냈다. 이에 수로왕이 노하여 부하인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돌아갔다. 하지만 신라는 이에 대해 가야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오히려 음집벌국만 공격하고 말았다. 이를 보면 신라와 가야간의 관계에서 가야가 좀 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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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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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가 이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교역을 통한 재화의 확보를 들 수 있다. 회현리패총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김해지역은 지금처럼 평야지대가 아니라 시내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다 보니 애초에 농사로 국가를 운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막강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양동리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교역물품들을 보면 당시 활발한 무역이 이뤄졌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교역 대상은 주로 낙랑군과 왜였다. 중계교역은 물론이거니와 철을 교역품으로 사용해 번성할 수 있었다. 특히 철은 고대시대에 화폐처럼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제 무기나 갑옷, 농기구를 만드는 중요한 원료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금관가야는 이런 활발한 교역과 뛰어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할 만큼 강한 국가일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말발굽에 역사의 뒤안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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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현의 표준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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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와 신라의 경쟁은 국제 경쟁으로 번지게 된다. 낙동강 서안의 가야가 낙동강 동안의 신라를 압박하고 공격하였고, 이에 백제와 왜도 가세하게 된다. 이 때문에 신라는 매우 시달린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가야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변수가 개입한다. 그 변수는 바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이다.
그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백제와 고구려는 낙랑군을 몰아냄으로서 그 국경이 맞닿게 되었고, 이후부터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한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정복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넓히며 강국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고구려와도 전쟁을 치렀다. 북방의 강자로서 막강한 힘을 가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백제는 고구려 왕인 고국원왕의 목을 베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원수 사이가 되고, 고구려는 힘을 키우면서 백제와 전쟁을 준비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즉위하여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로 출정한다. 광개토태왕은 맹공을 퍼부으며 백제를 공격하고, 결국 백제는 고구려에게 잠깐 항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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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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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백제는 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구원 요청을 하게 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이러한 신라의 부름에 응하여 보병과 기병 도합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의 왜군을 비롯한 연합군들을 격퇴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가야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러 항복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금관가야는 고구려에게 직접 공격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성동고분군의 축조가 더뎌지고 수장 급 무덤들이 더 이상 조성되지 않는다. 이는 금관가야가 쉽게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때부터 가야와 신라의 주도권이 신라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진다.
대가야의 부흥과 백제·신라의 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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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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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피해를 덜 받은 다른 가야 소국들은 재기를 꾀하며 서서히 국력을 키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보다 좀 더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바로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으로서, 이 중 대가야는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대가야는 반파국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경북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고령군 일대는 예로부터 안정적인 농업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야로지역에서 철산지가 확인되는 등 철기문화를 위한 기반이 있었다는 점이 지역연맹체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며 이곳에서 거대한 고총고분들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고분들 외형도 클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금동관 같은 최고 지배층들이 쓴 위세품들이 다수 출토되어, 당시 대가야인들이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가야는 고령 일대에만 머물지 않고 섬진강유역으로 진출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순천 운평리고분군이나 남원 월산리고분군, 장수 삼봉리고분군 등 전남이나 전북 일대에서도 대가야 고분군이 발견된다. 이 점은 대가야가 활발한 정복과 진출을 한 구체적인 증거로 볼 수 있으며, 하동까지 진출하여 남해안까지 그 영향권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가야는 신라 및 백제나 왜와의 물자교역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성장하기에 이르지만 아직 주변 소국들을 정복할 만한 능력은 갖추진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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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드라마 <선덕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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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후기가야연맹체 맹주로서 군림하며 강력한 왕권을 보인다. 이는 지산동 44호분에서 순장유골이 22구나 나오는 것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가야의 번성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이미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춰 따라잡기엔 힘들 정도로 강한 국력을 지닌 백제나 신라가 꾸준히 압박했기 때문이다.
대가야는 당시 국제 상황에 맞추어 친백제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친신라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는 가야제국 내 경쟁 대상이었던 아라가야를 다소 의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산성전투를 계기로 백제가 신라에게 패배하자 가야의 외교 노선은 흔들리게 되고, 결국 신라의 이사부와 사다함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가야는 당시 활발한 국제교역과 철 생산, 농업 등을 통하여 번성하였고 발전하였다. 그래서 한때는 신라와 경쟁하고, 오히려 압박할 정도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 상황이나 고대국가로의 진입이 쉽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절대 강자가 없이 서로간 이해에 따라 움직임을 달리했다는 점 등이 한계로 작용하여 결국 멸망하게 된다. 국가의 흥망성쇠야 당연한 것이지만, 가야는 그 자료의 부족과 무관심으로 인하여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적극적인 연구가 덜 된 측면이 많다. 하지만 가야는 결코 약소국에 불과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하여 가야를 역사의 한 축으로서 활동하였다고 볼 필요가 있다.
작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활발한 국제교역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듯이, 멸망이라는 역사적 종결은 역시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수로왕의 나라로 한때는 신라와 경쟁을 하던 강국 가야는 세월의 흐름 앞에 쇠퇴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야는 6세기에 이르러 종언을 하게 된다. 가야제국 중 그 멸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나라는 금관가야와 대가야이다. 특히 금관가야의 경우 <삼국사기>와 <가락국기>에서 그 멸망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럼 금관가야는 과연 어떻게 멸망하였고, 마지막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당시 가야의 멸망은 무엇을 의미하였고, 가야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멸망으로 치닫는 금관가야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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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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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는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광개토태왕의 군대는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고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의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신라로 온다. 그리고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며 종벌성에 이르러 항복을 받게 된다.
이 사건 등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고구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백제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함으로써 경쟁구도에서 더 뒤처지게 된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간접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고, 문화 전파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성장할 만한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가야제국의 상황은 또 달랐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금관가야는 쉽게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후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여기에서 철산지와 농경지를 확보한 대가야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나중엔 가야제국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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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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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황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금관가야의 유적지들을 살펴보면 그동안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왕과 귀족 등의 지배층의 묘가 조성되며, 번성하였던 당대 문화들을 반영하는 유물들도 출토된다. 하지만 5세기 초 이후로는 대형 고분군의 축조가 단절되었으며 김해 능동 고분군이나 덕정고분군, 두곡고분군, 예안리고분군 등이 조성된다. 이들의 규모는 대성동고분군에서 보이는 고총고분이 아닌 축소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정황들은 사실 기록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가락국기>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하지만 구전설화에 의하면 이 당시 신라와 잦은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황세와 여의 설화의 배경은 겸지왕 때로서, 겸지왕은 가야 9번째 왕으로 구형왕의 아버지가 된다. 황세는 이 당시 활약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활약을 한다고 할지라도 달처럼 기우는 가야의 운명마저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관가야는 군사적 충돌 없이 항복으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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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현의 표준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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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서 흔히 가야가 무력적으로 대항한 것이 아닌, 왕과 왕자들의 자진 항복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신라 귀족 중 진골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있다.
19년, 금관국주 김 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법흥왕 19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김구해, 즉 구형왕과 세 아들이 금관국, 즉 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는 내용이다. 법흥왕은 이에 기뻐하면서 직위와 식읍을 내려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사실 그동안 이 기록이 중시되어왔기에, 우리는 흔히 가야가 군사적 충돌 없이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락국기>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전승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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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에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를 보면 구형왕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법흥왕의 군대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금관가야와 신라의 국력차이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힘을 떨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그 첫 대상으로 가야를 선정한 것이었다.
반면 광개토태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금관가야로서는 이러한 신라에 섣불리 대응하기엔 그 힘이 미력하였다. 수로왕이 세운 나라이자 과거 전기가야연맹체의 맹주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였고, 이미 그러한 맹주의 지위는 대가야로 넘어 간지 오래였다. 이렇게 금관가야는 신라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깨닫는다. 그리고는 스스로 멸망을 준비하게 된다.
금관가야멸망, 그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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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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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구형왕은 탈지이질금을 본국으로 보낸다. 여기에서 탈지이질금을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당시 가야의 멸망을 가야제국들의 연합군으로 막으려고 하였지만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고 스스로의 영토를 지키려는 데에 더 중점을 두게 된 상황을 반영한다.
동맹국까지 모두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금관가야의 구형왕과 그의 가족들은 항복을 위한 준비를 했으리라. 사실 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당시의 항복의례가 어떠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구형왕과 가족들, 그리고 신하들은 당시의 항복 의례에 맞춰 준비하였을 것이고 신라로서는 크게 싸우지 않고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의 세력은 대가야나 아라가야에 비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 신라가 이득을 취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명분 상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확이었다. 가야제국을 대표하던 금관가야의 항복은 다른 소국들에게도 알려졌으며, 신라의 강성함을 드러낼 만한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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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경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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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라도 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들에게 특별히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진흥왕은 그에 맞춰 예를 갖추었고,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한다. 또한 마지막 왕자인 막내아들 김무력 또한 가야 땅을 벗어나, 당시 최전선이었던 한강유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는 김무력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기회를 준 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무력의 고향에서 멀리 떨쳐냄으로써 김해 토착세력과의 연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이로서 금관가야의 짧지 않은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조성된 구산동고분군에서는 더 이상 가야의 유물들이 나오는 게 아닌, 신라의 유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변화상을 직접 볼 수 있다. 달이 기울고 차는 것과 같은 게 국가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역사적 수순을 밟고, 결국 역사가 된 셈이다.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에게 사실상 항복하면서 망하게 되고, 이후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다.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대가야와는 달리 신라에게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에 이르는 가야계 진골귀족 가문이 안정적으로 정립되는 기틀이 된다.
그럼 가야 멸망 이후 김해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해는 신라의 일부로서,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일부로서 존속하였으며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멸망 이후에는 금관소경으로 불렀지만, 그 이후부터는 주로 김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 나라의 중심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중요성이 떨어져서 잊혀버린 도시, 혹은 과거의 영광에 비해서는 축소되어 볼품없는 도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김해 또한 이러한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김해의 중요성은 인정되었고, 이는 향토사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수로왕이 터를 닦았던 금관가야의 수도 김해, 가야 멸망 이후의 사적을 잠시 살펴본다.
신라 5소경 중 하나, 금관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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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경대학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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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멸망 이후 김해에 있던 왕족들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형왕은 상등의 직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구형왕 이후의 가야왕족들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남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서서히 김해와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무력이 한강유역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주 군주로 임명된 사실이나, 김유신이 만노군, 즉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하였다는 점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또한 <가락국기>에서도 멸망 이후 제사가 간혹 빠뜨려지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통해서도 실추된 김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문무왕의 즉위로 인하여 변화하게 된다. 가야계 진골이자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에게서 태어난 문무왕은 김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묘와 제사를 복원시킨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680년에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때부터 김해를 다시 중요시 여기기 시작한다.
신라에서 소경(小京)이란 특수한 행정구역으로서 오늘날의 광역시와 비교된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동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보니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5군데의 도시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이는 문무왕~신문왕 때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북원소경(北原小京 : 지금의 원주), 중원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주), 서원소경(西原小京 : 지금의 청주), 남원소경(南原小京 : 지금의 남원), 그리고 금관소경이 그것이다.
소경이 설치된 지역은 신라의 영토 중 과거의 변방이었거나 다른 나라의 주요 도시였던 곳들로 이루어져있다. 김해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관가야의 수도였고 남쪽에 있던 주요 도시였기에 소경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무왕의 외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소경과는 달리 방위에 따라 작명되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김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김인광과 김율희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있는 진례산성(進禮山城)을 근거에 두고 김해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이 되어 지방호족으로서 활약하였다. 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금관소경을 김해부(金海府)로 낮추는데, 이를 보아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김해부에서 안동도호부로 변모한 대왜교역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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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이후 금관소경에서 김해부로 낮춘 것은 행정구역에서 사실상 강등조치를 행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김해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고, 이는 그에 따른 명칭변화로 살펴 볼 수 있다. 김해부로 낮춰진 이후 또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춰졌다가, 다시 임해군(臨海郡)으로 올려졌다. 그리고 광종 22년(971)에 다시 김해부로 복귀되고 성종 14년(995)에 10도를 정하면서 영동부의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크게 승격된다.
그리고 목종 3년(1000)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두었다가, 12년 뒤인 현종 3년에 금주(金州)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로 강등되었다. 이후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원종 11년(1270)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충렬왕 19년(1293)에 금녕현(金寧縣)으로 강등되었다. 충선왕 1년(1309)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되었지만 다시 2년 뒤인 충선왕 3년에 김해부로 고쳐지게 된다.
그럼 고려시대의 김해는 왜 이리 행정구역의 변천이 많았을까? 그 이유로 고려의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연관되어 보거나, 행정구역이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신종 3년(1200)의 농민항쟁과 충렬왕(1293) 19년에 있었던 폭동이 있다. 특히 충렬왕 19년의 폭동은 임대, 허반, 김언이 일으켰는데, 이로 인하여 금주목에서 금주현으로 강등 당한 바 있다.
김해는 일본과의 외교교섭의 창구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문종 3년(1049)에 쓰시마 관청이 표류해갔던 고려인 김효 등 20명을 데리고 금주에 도착하였으며, 문종 10년(1056)에는 일본의 사신들이 금주의 관에서 묵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종 30년(1243) 금주 방어관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면서 표류해갔던 고려인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와 일본 사이에서 수많은 사신들이 오갔던 곳이 김해라는 점은 꽤 의의가 깊은 사실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김해는 왜구와의 잦은 싸움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김해가 남해 해운의 중심지이기 때문이었는데, 몰려드는 물산을 노려 왜구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왜구와의 싸움이 자주 벌어졌으며, 이 와중에 활약한 이가 김해부사였던 박위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분산성도 적극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왜구의 방어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당시 출발 전에 주둔하고 준비하였던 곳이 김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임진왜란의 김해성전투와 사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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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김해는 태종 13년(1413)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었다. 그리고 세조 5년(1459)에는 김해진관(金海鎭管)을 설치하였다. 이때 웅천과 완포 2현이 행정적으로, 창원, 칠원 등을 군사적으로 김해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중종 5년(1510)에 한반도 남부에서는 이른바 삼포왜란이 일어난다. 일본거류민들이 쓰시마도주와 통하여 일으킨 난리로서 이때 김해부사 성수재(成秀才)는 현감 한윤과 협력하여 웅천성을 구하게 된다. 이때 왜적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던 부대가 돌팔매를 특기로 하는 석전군(石戰軍)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매년 4월 8일이 되면 아동들이 읍성 남쪽에 모여 석전을 연습하고, 단오날에는 청장년들이 좌우로 나뉘어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돌을 던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석전군이 실제로도 전투에 투입되어 큰 활약을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김해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엿새 만에 화마에 휩싸이게 되었다. 1592년 4월 18일 일본군이 다대포를 건너 죽도에 진출하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이들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19일 새벽부터 김해성전투가 벌어지며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투에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이 참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하지만 경상우병사 조대곤이 원병을 보내지 않고, 왜군이 저녁에 허수아비를 성안에 던져 넣어 소란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초계군수 이유검과 서예원이 도망가자 김해성은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20일에 성이 함락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사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사충신으로서 훗날 송담사(松潭寺)와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송담서원이 철폐되었고, 대신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해부사 정현석이 표충사를 건립하였다.
김해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낙동강 하류의 중심도시로서 큰 역할을 하였지만, 위의 예처럼 지리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주요 전투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도 그 지리적 이점을 인정받아 수운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금관가야의 멸망 이후 김해는 여러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따라 그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으며, 지리적인 특색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기도, 왜구의 침탈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김해를 위해서, 그리고 고려나 조선을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또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김해를 떠올리면 주로 가야를 생각하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라는 점에서 한번 쯤 살펴보고 김해의 색다른 면을 진지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가야문화권 답사 둘째날, 우리는 아침을 먹기도 전에 길을 서둘렀다. 김해유적들을 둘러보고 난 후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창녕으로 가기 전, 한 군데를 더 둘러보고 가자고 하였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 태어났던 봉하마을 말이다.
우리가 찾아간 때는 2009년 6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의 49제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해는 봉화산 정토원에 안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봉하마을을 들르는 김에 정토원 또한 방문하기로 하였다.
아침에 찾아간 봉하마을은 조용하면서도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 7시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묘역 준비공사가 한창이었고, 또 자원봉사자들은 일찍부터 분향소에 나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분향소에 찾아가서 참배를 한 후 부엉이바위를 바라보며 천천히 봉화산을 올라갔다.
봉화산 중턱에서 마애불을 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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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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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작은 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올라가고 또한 산책한 곳이며, 돌아가시는 그 마지막 날에도 이곳을 올라갔다고 한다. 유년 시절부터 이곳에서 뛰어놀았을 그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봉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간단한 등산로를 정비해 놓아서 부담 없이 올라갈 수 있다.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던 중턱 즈음에서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가로뉘어져 있던 석불(石佛). 투박해 보이며 조형성 또한 뛰어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뭔가 다르게 보였다.
이 마애불은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으며 앉아 있는 석불이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발견 당시 산중턱 바위틈에 끼여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석공이 마애불을 조각하다가 실수를 하였던지,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양손의 일부와 왼쪽 어깨 부분이 조금 훼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조금 훼손된 이유는 발견 당시 암반에 끼어 있어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민머리에 상투가 올라가 있는 형태로 그 모양이 다소 크게 표현되었고 둥그스름해 보인다. 목에는 이른바 삼도(三道)라고 하는 3개의 주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부처님을 나타내는 주요 특징 중 하나다.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풍만하여 복스럽다는 느낌까지 주는데, 눈은 지그시 감고 있으며 입은 자그마하고 약간 마모되었다.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서 몸을 옆으로 뉘인 채로 잠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U자형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으로 보인다. 즉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을 풀어주고, 왼손은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이러한 수인은 삼국시대에 주로 나타나는데 서산의 마애삼존불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있으며 그 모습이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다. 아랫부분은 풍화작용으로 인해서인지 마모되어 흐릿하지만 전체적인 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정돈되고 깔끔한 그 모습이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균형이 잘 잡히고 세련된 모습을 보아 도공의 정성이 가득 들어있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모습이 오히려 더 고고하게 생각된다.
봉화산 마애불에 얽힌 전설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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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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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을 자암산(紫岩山)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봉화산 마애불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암산 마애불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애불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전설의 배경은 신라시대로, 당나라 황실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나라 황제에겐 어여쁜 황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황후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몸이 허약해져갔다. 황제는 훌륭한 의사와 약을 써도 황후의 병이 차도가 없자 크게 근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후가 헛소리를 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재빨리 황후를 깨워 진정시키고, 왜 그런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잠이 들면 꿈에서 한 청년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황제는 이를 듣고 여러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면서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도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두 승려가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황제는 그 두 승려에서 신비한 느낌을 받아 서서히 따라갔다고 한다. 얼마쯤 가니 남쪽에 산이 하나 나오고, 그 산에서는 황후의 꿈에서 나오던 청년이 두 승려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두 승려 중 한 승려가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네 이놈! 너는 불법을 어기고 당나라 황후를 밤마다 괴롭힌 놈이로다. 내 너를 가둬 그 버릇을 고쳐 주겠다. 백년이고 천년이고 네가 죄를 뉘우치는 날 다시 구해주리라."
라고 하며, 그 청년을 바위 틈에 넣고 두 승려는 가던 길로 떠나갔다. 꿈에서 깬 황제는 사람들을 시켜 그러한 산과 바위를 찾도록 신하들에게 시켰다. 하지만 당나라 어디에도 그 산과 바위가 보이지 않아, 다른 나라까지 뒤져보게 되었다.
마침내 신하들은 신라의 김해에 당도하고 자암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가 말한 바와 같은 모습의 청년과 꼭 같이 생긴 석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가서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후부터 차츰 황후의 병이 차도가 생기더니 결국 완쾌되었다. 하지만 석불 속의 청년은 황후를 연모하는 마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여 아직도 바위틈에서 고뇌를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사실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볼 수 있다. 전남 고흥의 팔영산에서도 중국 황제의 세숫대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쳐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신하들을 시켜 찾게 하였더니 바로 고흥의 팔영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설들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의 산천보다 해동의 산천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던 선조들의 자랑 섞인 기개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구한 마애불의 인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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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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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마애불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화순 운주사의 와불 이야기가 떠오른다. 화순 운주사의 와불은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있는 미완성된 불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이 와서 세상이 평화로워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봉화산 마애불의 청년 또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앞서 자신을 가둔 신승(神僧)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설은 그럴지라도 불상 조성 이후의 일반인들의 마음은 또 달랐을 것이다. 매일처럼 산에 올라 이 마애불에게 기도를 하고 절을 올리면서 자신들의 소원을 빌고, 또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마애불의 미소를 보면서 부처님의 가호가 자신들을 감싸주길 기대하였고, 그렇게 하루를, 일 년을, 그리고 일생을 보냈으리라.
또한 지나가던 아이들도 장난을 멈추고 불상 앞에 와서는 경건하게 고사리 손을 모아 합장을 했을지 모른다. 부처님이 제대로 앉아있지 못하고 옆으로 뉘어 있는 모습이 자못 의아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온화한 미소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마애불의 운명을 생각해보니 어찌 보면 참 기구하다. 고려시대의 한 이름 없는 석공의 손에서 만들어졌지만, 석공의 실수인지, 하늘의 조화인지 무너져버려 누워있는 불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마애불에 대한 과거의 경건한 믿음은 중국 황후에게 몹쓸 짓을 한 청년의 설화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눕혀져서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이 마애불의 존재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에서 잊힌 문화재의 경우 그 보존과 관리가 다소 부실해 질 수도 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에 정토원에서는 물론 김해시 차원에서도 지속적인 보존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 묻힌 한 사람과 함께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는 잊히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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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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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하마을을 마지막으로 두고 우리는 창녕으로 이동하였다. 창녕은 6가야 중의 하나인 비화가야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화가야는 다른 가야소국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진 않았지만 신라와 경계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고, 이는 토기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창녕에는 이런 비화가야와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둘러보기 이전에 이왕 왔으니 창녕과 관련하여 다른 시대의 유적들도 살펴보기로 하였다. 창녕에는 생각보다도 많은 유적지들이 있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와중에 같이 답사에 나선 오은석군이 강력하게 비봉리패총을 방문할 것을 주장하였다. 어차피 답사 코스에서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었기에 봉하마을을 떠나 바로 비봉리패총으로 향하였다.
비봉리패총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이고, 최근에 발굴됐는데 그 성과가 언론에 공개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내륙에서 최초로 발견된 패총, 즉 조개무지이고, 국내 최초의 신석기시대 배, 동물이 새겨진 토기 등 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륙에서 발견된 첫 조개무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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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비봉리유적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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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리패총으로 가는 길은 상쾌하였다. 날씨가 쾌청하여 하늘도 맑고 바로 옆에 하천이 흘러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시원해 보였다. 내비게이션에는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아 대강 추측해서 갔었는데, 처음에 도달한 장소는 잘못 본 곳이었다. 두 번째에 내린 장소에서 비로소 유적을 찾을 수 있었다.
비봉리패총은 생각보다 찾기 어렵지 않았다. 비봉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양배수장이 있는데, 그 양배수장의 바로 옆이 비봉리패총이다. 비봉리패총은 양배수장 신축공사 도중에 발견되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04년 양배수장 신축공사를 하면서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창녕군은 이를 국립김해박물관에 의뢰하여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시굴조사를 하면서 신석기시대의 유구와 유물들이 발견되었음은 물론 저습지의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추가적인 조사, 즉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저습지유적은 다른 경우에 비해 발굴이 어렵지만, 그만큼 중요한 성격을 지닌다. 저습지에선 오랜 세월 동안 유물들이 보존될 수 있는데, 이로 인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유기물의 경우는 짧은 세월에도 부식되기 쉬운데, 이런 유기물마저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식생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이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결정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으며, 실제로 발굴을 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료가 쏟아져 나와 관련 연구자들을 흥분시켰다.
또한 이 유적이 패총유적이라는 점도 큰 의의가 있다. 패총, 즉 조개무지는 당시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버린 게 지속적으로 퇴적되면서 생성된 유적을 말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이른바 쓰레기장이다. 하지만 보통 쓰레기장이 아니기에, 패총을 구성하는 조개들과 생활폐기물 등을 분석하여 당시 사람들이 살던 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특이할만한 점은 조개무지는 주로 해안가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내륙에 속하는 창녕 비봉리에서 이러한 조개무지가 보인다는 점이다. 비봉리패총이 가장 가까운 해안가인 마산만까지의 거리가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20㎞가 넘으며, 낙동강을 따라 낙동강하구까지의 거리를 재보면 70㎞를 웃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조개무지가 내륙에서 발견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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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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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된다는 점,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우선 내륙에서 발견된 조개무지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어떤 점들을 살펴보아야 할까? 일단 조개무지를 구성하고 있는 조개들의 종류를 살펴보아야 한다. 비봉리패총을 구성하는 조가비들을 살펴보면 다수가 민물조개인 재첩이지만 간혹 굴 껍데기도 발견된다. 지금같이 내륙 깊숙한 곳에 굴이 들어오려면 해안가와 교역을 통하는 방법이 있지만, 해안선의 변화라는 점 또한 염두해 둘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해안선과 당시의 해안선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이 바로 조개무지들이다. 조개무지들은 주로 해안가를 따라 생성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하여 당시 해안가를 유추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여러 자료들의 검토가 필요하다. 김해지역에서 발견된 회현리패총의 예를 보더라도 오늘날의 김해 시내가 당시에는 해안가였고, 김해는 이러한 해안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과 마찬가지로 비봉리패총은 그 당시 해안선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해주는데, 이 근처에서는 다른 조개무지들도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밀양시 하남읍 방면이나 창원시 동읍의 주남저수지 방면에서도 조개무지들이 발견된다. 하남읍 방면에서는 외산리패총, 양동리 환산패총, 양동리패총, 수산리 동촌패총, 귀영리패총, 금포리 환산패총, 금포리 모래들패총 등이 발견되며 주남저수지 방면에서는 합산패총과 용산리패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은 유적이 생성되던 당시의 지형, 즉 지금의 청도천이 그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청도천은 낙동강의 한 지류로서 비봉리패총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다. 지금은 그 사이를 도로가 막고 있지만 도로가 생기기 전엔 이 비봉리패총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때문에 이런 조개무지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6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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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비봉리유적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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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바다와 육지의 분포나 지형, 기후, 식생, 생물의 분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고지리학(古地理學 : Paloegeography)이라고 부른다. 고고학에서도 과거의 모습을 복원할 때 이 고지리학을 통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다. 비봉리패총 또한 고지리학에서 중요한 유적이기에 이를 분석해 놓은 연구가 있으며, 이는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6800여 년 전, 즉 기원전 4800년 전의 비봉리패총과 그 주위의 환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낙동강 하류 쪽은 모두 바닷물로 채워져 있었으며, 이곳은 만(灣 : bay)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비봉만이라고 부르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면 이렇다. 당시 비봉리에 살던 주민들은 배를 이용하여 교류하였으며, 그 교류의 대상은 인근 지역 뿐만이 아니라 남해안에 살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비봉리와 인근 해안에는 어류와 굴과 같은 조개류가 서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6100년 전인, 기원전 4100년 전 경에는 이전에 비해 수심이 다소 얕아졌지만, 여전히 깊은 해역이 유지되고 있었다. 비봉리에서 검출된 규조를 보면 염수규조가 90% 이상 검출되고, 담수규조와 기수규조가 5% 정도 검출된다. 규조(硅藻)란 돌말이라고도 하는 플랑크톤의 일종으로 밀물과 바닷물에 널리 분포하는데 이게 퇴적되면 규조토가 된다. 이들을 통해 당시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염분이 높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에도 이곳은 바다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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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비봉리유적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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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0년경의 해수면을 살펴보면 해발고도 1.5m로, 그로부터 1100년 전의 해발고도가 0.4m라는 점과 비교하면 고도가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낙동강 하상과 범람원이 분포하는 공간에 지난 세월 동안 상류에서 공급된 퇴적물들로 인해 수심이 상당히 얕아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 낙동강은 아직도 염수(鹽水)로 채워져 있었으며, 비봉리 부근은 기수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수(汽水)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있는 곳을 말하며, 여기에 재첩들이 서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석기 말기인 기원전 1500년 전의 이른바 비봉만의 입구는 상당히 많이 좁혀져 있었으며 수심도 얕아졌다. 낙동강 유역은 여전히 염수가 우세한 환경이지만 수심은 많이 얕아지고 이에 따라 비봉만의 염분 농도는 전체적으로 이전에 비해 낮아져 있었다. 비봉리유적의 근처엔 당시 삼각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는 재첩이 서식하고 비봉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갈대가 빼곡하게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500년경의 환경을 살펴보면 이렇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해수면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오늘날의 모습과 가깝게 변화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봉만은 서서히 퇴적물이 쌓이고 염분 농도가 낮아지면서 거의 담수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봉리패총은 이때 들어서는 담수지역이 되어 생성 당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을 보여줬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해수면의 변화와 이로 인한 환경의 변화를 간단히 알아보았다. 우리는 흔히 현재의 환경이 과거와 똑같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유적 또한 그 유적이 생기는 시점과 지금의 환경이 다르며,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과거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비봉리패총은 우리에게 유용하고도 다양한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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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비봉리패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내륙의 패총유적일 뿐 아니라 저습지유적이기도 하다. 저습지유적의 특징은 유기물들이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이러한 유물들을 수습함으로서 당시의 식생이나 환경, 혹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복원함으로서 그 당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비봉리패총에서는 흥미로운 유물이 여럿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구자들과 언론에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게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배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는 8~9세기경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배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발굴된 배는 무려 8천 년 전의 것이다. 이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도 희소성이 있는 유물로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 외에도 여러 유기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도토리나 가래 같은 식물은 물론, 개머리뻐나 멧돼지이빨 같은 동물유체, 그리고 망태기까지 발견되었다. 망태기 같은 유물은 매우 썩기 쉬워서 발굴되는 예가 극히 드문데, 신석기시대의 그것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 최초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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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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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타는 큰 배나 보트 정도를 떠올린다. 역사상의 배를 떠올린다고 한다면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이나 판옥선 등을 생각한다. 이들은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만든 배이고, 우리들은 흔히 이러한 배들을 일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보다 훨씬 이전의 배, 즉 선사시대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선사시대의 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카누와 그 생김새가 비슷하다. 비봉리패총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선사시대의 배의 모습을 주로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를 통해서 유추하곤 하였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는 신석기시대, 혹은 청동기시대의 생활 모습을 벽에다가 새겨 놓은 유적이다. 여기에서도 배에 사람이 탄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동안은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당시의 배의 모습을 대강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배는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썩기가 쉽고 보존이 어렵다. 이러한 배가 보존이 되려면 습지나 물 속에 장시간 노출되면서 부식을 막아야 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배들은 모두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 외국 또한 이렇게 썩기 쉬운 배가 발견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으로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키리키(伊木力) 유적 출토 배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비봉리패총보다 시대가 2천 여 년 정도 떨어진다. 중국의 과호교유적(跨湖橋遺蹟)에서도 8천 여 년 전의 배가 발견된 바가 있는데, 비봉리패총도 이와 비슷한 곳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등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8천년의 잠을 깬 신석기시대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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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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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리패총에서는 총 2척의 배가 발굴되었다. 1호는 현장설명회 당시에 그 존재를 발표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2호는 그 후에 또다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과거의 배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야했었는데 선사시대의 경우는 앞서 말한 반구대암각화와 서포항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고래 뼈로 만든 노(櫓)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 발견으로 통해 그동안의 자료들을 넘어 당시 바닷가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시해준다.
일단 1호부터 살펴보자. 1호는 현장설명회 때 공개되었으며, 언론에도 중점적으로 보도되었었다. 신석기시대 토층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최대 길이는 310㎝, 최대 폭은 62㎝, 그리고 두께는 2~5㎝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모습으로서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역시 부식된 부분이 많다.
통나무를 파내어 만들었는데, 원래의 길이는 4m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제작 당시 군데군데 불을 태워 가공의 효율성을 높인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석기로 깎기 쉽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배가 완성된 후 방충해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의 재료는 수령 200년의 소나무로 밝혀졌다.
2호는 현장설명회 이후에 발견되었으며 출토된 토층을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1호에 비해서 부식이 많이 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엔 어렵다. 잔존길이는 64㎝이며, 잔존 너비는 22㎝이다. 그리고 두께는 1.2~1.7㎝로서 앞서 살펴본 1호에 비해서는 더 작은 편에 속한다. 수령이 많은 소나무를 이용하여 속을 U자형으로 파내고 비교적 두께를 얇게 조정하여 만들었다. 내부와 외부에는 폭 2㎝ 이상의 석부에 의한 가공흔적이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제작 시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그슬린 흔적도 남아 있다.
비봉리패총의 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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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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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비봉리패총의 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일단 당시의 배 모습과 이를 통하여 대략적인 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비봉리패총의 배는 통나무배인데,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널리 쓰인 배 중 하나이며 또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최근까지도 남아있기도 하였는데, 대동강과 한강에서 주로 사용되던 '마상이'가 그것이다. 마상이는 한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조그마한 통나무배로서,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형태를 말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형태가 무덤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비봉리패총과는 시대적으로 꽤 떨어져 있긴 하지만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역시 통나무의 속을 파서 이를 관으로 만든 게 발견되었다. 바로 다호리 1호분이 그것인데, 이 외에도 시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유물들을 이와 비슷하게 통나무를 파서 만들곤 하였다. 이는 가장 만들기 손쉬우면서도 효율성이 낫다는 점에 착안 한 것으로 보인다.
배의 경우 나중에 가서는 이보다 좀 더 발달하여 여러 쪽의 통나무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게 되었다. 같은 통나무배라고 하더라도 외쪽배, 쌍쪽배, 두쪽배, 세쪽배 등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분을 하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배로 보이는 안압지 통나무배의 경우엔 3개의 나무를 잇대어 만들어졌다. 이는 내구성을 좀 더 강하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배에 더 많은 인원들을 타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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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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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에서 보이는 통나무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다. 고래잡이를 하는 용도로 보이는 배에는 무려 18명이나 타고 있으며 11명이 타고 있는 배도 보인다. 이러한 점은 반구대암각화가 조성될 시절에 이르러서는 바다에서 고래잡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의 규모가 더 커진 것을 의미하며 현재까지 많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과거 조상들의 조선기술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많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 배들은 원양까지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용도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당시 비봉리 패총이 있던 지역은 비봉만이라고 하여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동시에 밀물과 썰물이 들락날락 거리는 환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상황에 맞춰서 물고기나 조개를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들을 채취하는데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이 외에도 '떼배'라고 하여 뗏목배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떼배는 여러개의 가는 통나무를 평탄하게 펴놓고 서로 묶어 만든 것으로서 현재 동해안의 정동진을 비롯한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남해안 일대 등에서는 갯벌에서 움직일 수 있는 뻘썰매 같은 작은 배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용도로 배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2점의 유물만을 가지고 당시의 어로생활을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점은 무리가 따른다. 당시에도 좀 더 큰 규모의 배들이 마을 간의 교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발견이 안됐거나 부식되었을 뿐이지, 그러한 가능성까지 모두 배제할 수는 없다. 발굴을 통해 발견되는 이러한 작은 사항 하나 하나는 과거 사람들의 모습을 복원해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비봉리패총은 그러한 단서들을 상상 이상으로 제공해주며, 이러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다른 발굴보다 몇 배나 힘든 저습지발굴을 행하였던 고고학자들의 노고 또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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