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Ⅰ 미군, 북한 공격하던 날
이 탁 군사전문가 |
가능성이 낮은, 하지만 모두가 두려워하는 상황 전개가 바로 군사행동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을 전격 공격하기보다는, 2004년 열린 서머펄스 같은 항모전단 기동훈련이나 F-117 스텔스 전폭기, MOAB, JDAM, JSOW 등의 전진배치를 통해 대화 참여를 압박할 공산이 크다. 이른바 ‘2단계 접근법’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만으로도 한반도에는 극도의 긴장이 야기되는데다, 작은 불씨로도 충돌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
1년전만 해도 북한의 핵실험은 ‘현실 가능성이 상당히 낮은’ ‘북한이 꺼낼 수 있는 마지막 히든 카드’라는 인식이 대세였다. 7월의 미사일 발사 이후에도 ‘북한은 충분히 핵실험을 할 수 있는 국가’라는 주장은 일각에 국한돼 있었다. 따지고 보면 북한 핵 보유의 뿌리는 1956년 구 소련과 체결한 ‘원자력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50년의 시간 동안 애초에는 티끌만했던 가능성이 자라나 엄청난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마련한 대비책의 긴장도와 정교함이 그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는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인식과 진짜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든 자기최면에 집착한 결과이든 별 차이는 없다. 핵실험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밀쳐놓은 것은 소수의 행동이었지만,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은 온 국민의 몫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제재라는 상황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미래의 말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분석하는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갖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한반도 군사전략 수립에 참여한 전직 관리를 인용해 CNN이 보도한 “미국의 군사 대응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로 조성된 긴장상황 때문에 양측 간의 조그만 마찰에도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이 코멘트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 군사제재의 가능성은 낮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전개에 따라 불똥이 튀고 긴장의 수위가 급격하게 올라갈 수 있다는 함의다.
‘올가미 작전’의 가능성 북한에 대한 군사제재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전망하는 1차적인 이유는 관련국가들의 의견 불일치다. 한국의 경우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 군사적 수단의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 원칙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일각에는 군사적 수단을 써서라도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필자 역시 군사적 수단 사용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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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핵실험 이후 관련국 공조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온건대처 방식과 미국, 일본의 강경대처 방안이 새로운 갈등을 만들 가능성이다. 공조체제의 느슨함이 북한의 제2, 제3의 모험을 초래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한국-중국과 미국-일본이 보여주는 간극은 단순히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아니라 아예 다른 각도로 뻗어나가는 도로와 같다. 달리 말해 현 시점에서는 간극이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낮아 보이는 확률이 급격히 올라가도록 만들 복병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위기상황인 것이다. 먼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미국과 일본이 유엔 안보리 결의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행동에 나설 경우이다. 실효는 다소 떨어진다 해도 안보리 결의를 통해 명분을 축적하면서, 실질적인 압박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함으로써 북한이 그 반발로 제2, 제3의 도발을 일으키게 하고 이를 기화로 군사제재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올가미 작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상황은 그러한 가능성을 내포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10월13일 강력하고 독자적인 대북(對北) 추가제재 조치를 의결했다. 모든 북한 선박의 입항 금지, 북한으로부터의 모든 상품수입 금지, 북한 국적자의 원칙적인 입국금지 등 북-일 간의 인적·물적교류를 사실상 중단하는 강력한 카드를 기다렸다는 듯 던졌다. 향후 북한의 대응과 국제사회의 동향을 보면서 전면 수출금지 등 강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제재조치는 이튿날 발동됐으며 앞으로 6개월간 적용된다. 미국의 반응 역시 일본과 유사하다.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은 10월12일 “유엔안보리의 대북결의와 무관하게 북한의 핵확산을 막기 위한 확산방지구상(PSI) 활동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류젠차오 외무부 대변인의 브리핑에서 나타났듯 “제재조치는 징벌적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되며,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다. 한국도 이와 유사하다. 10월14일 만장일치로 채택된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의 수정 과정은 미국이 안보리 결의를 유효한 수단이라기보다 ‘명분의 우산’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초 결의안 초안에는 ‘유엔헌장 7장에 따라 행동한다’고 돼 있던 문구가 ‘유엔헌장 7장에 따라 행동하고, 7장(비군사적 제재를 규정한) 41조 아래서 조치를 강구한다’로 최종 합의된 대목은 향후 상황 전개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미국의 내심은 ‘어차피 실질적인 제재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필수적인 미국과 중국의 기본시각이 다르다면, 명분의 우산 밑에는 관련국가가 함께 서고 실질적 압박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면서 북한이 넘어설 것이라고 판단되는 군사제재의 레드라인을 새로 설정하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즉 미국과 일본의 독자적 조치로 압박수위를 높이면 북한은 반발할 것이므로, 중국과 한국은 내키지 않더라도 북한을 설득하는 데 당근만 고집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내적 압박으로 이중부담을 안고 있는 만큼 북한의 추후행동에 따라 적극적인 참여로 선회할 가능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김명철 조미평화센터 소장의 발언을 보면 강력한 경제제재나 봉쇄를 선전포고로 인식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본인이 북한 수뇌부와 교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 개인의 견해를 북한의 의사로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이 강력한 PSI 조치를 실시하고 일본이 급유를 포함한 지원역할로 공조체제를 갖출 때 북한이 느낄 압박은 기존의 금융제재와 비교할 수 없다. 관련국들의 공조압박이 미진할 경우 미국이 꺼낼 수 있는 또 다른 카드로는, 2004년 여름 실시한 서머펄스(Summer Pulse)와 같은 대규모 항모전단 훈련을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잇는 공해상에서 실시하는 방안을 들 수 있다. 이미 큰 갈등 없이 실시한 바 있을 뿐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훈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크게 비난하기도 어려워진다. 다만 이 훈련에 일본이 참가하고 훈련내용과 지역을 북한이 압박을 느끼도록 설정할 경우 분명 2004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기 위해 주변에서 위협적 군사행동을 벌인다는 미군의 작전계획 5030의 변형된 형태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북한은 이를 ‘심각한 무력도발’로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쟁점은 미국이 궁극적으로 군사공격을 염두에 둔 채 단순히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2단계 접근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군사제재라는 카드를 이용해 중국·한국과의 실질적 공조 수위를 급격하게 높임으로써 두 나라가 주장하는 외교적 해결의 가능성을 높이는 지렛대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즉 군사적 해결카드를 꺼내 들고 달려감으로써 급박하게 돌아가는 핵시계의 속도에 놀란 관련국을 협상장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즐겨 사용하던 벼랑끝 전술을 역으로 미국이 사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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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북한은 핵실험 카드로도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하고 한국과 중국까지 유엔 안보리 결의라는 명분의 대열에 합류해 압박만 가중된 상황을 탈피해야겠다는 욕구와 필요를 느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일본 영해에 근접한 공해상으로 미사일 발사실험이라도 한다면 ‘지극히 낮은 가능성의 영역’에 있던 미국의 대북 군사제재는 급물살을 타고 ‘가능성 있는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올 수 있다.
“한 손엔 외교, 다른 손엔 군사” 흔히 군사제재의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할 때의 ‘가능성’이란, 앞에서 설명한 상황 조성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합의도출이 성사되지 않아 미국이 역으로 구사한 벼랑끝 전술이 끝내 직접적 군사공격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물론 현재 상황이 그러한 고강도 충돌로 바로 가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고, 그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에서 예상하는 ‘미국의 군사 행동 2단계 접근 방안’이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예상해본 상황전개를 시나리오의 형태로 다시 한번 풀어보겠다.
핵실험 직후 원칙적 공조 의사에 합의했던 미국 중국 한국 일본은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 작성단계에서부터 선명한 견해 차이를 노출한다. 미국은 예측대로 현재 상황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기본적인 태도가 바뀔 수 없음을 확인하고, 공조 수위를 높이는 방안을 포기하는 대신 미약한 수준의 공조체제 확립에 비중을 두기로 결정한다. 일본은 미국이 놀라워할 정도로 신속한 독자제재 조치를 개시한다. 중국이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고 한국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사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자, 평양은 내심 핵실험이 대단히 성공적인 승부수였다고 자평한다. 군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핵실험은 선군정치의 위대한 업적”이라며 이미 발표한 대로 독자적 제재조치를 강행한 일본에 응분의 보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위원장은 핵실험 성공 여부에 대한 의혹을 불식하기 위한 2차 핵실험을 감행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일본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영해에 인접한 공해상으로 미사일을 실험발사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그 사이 미국과 일본의 독자적 제재조치는 북한을 공세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 사업과 금강산 관광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의 숫자는 점차 줄어든다. 민간단체의 지원은 명맥을 유지하지만 미국과의 양자회담 성사라는 애초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압박의 수위만 높아진 채 시간이 흘러가자 평양은 점차 초조해진다. 중국은 북한에 특사를 파견해 “북한이 중국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더 이상의 도발성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독자적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미국은 6자회담이라는 기존의 틀 대신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한 대북제재라는 틀로 북한을 가두어두려는 의지를 서서히 내비친다. 한국과 중국은 북한에 6자회담에 복귀하라고 주문하지만, 북한은 “현 상황은 선전포고에 의한 준전시 상황이지, 협상을 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에 따라 부시 미 대통령은 중국과 한국에 세부적인 공조사항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중국에는 연간 50만t을 상회하는 원유 공급 중단을, 한국에는 개성공단 사업과 금강산 관광의 중단을 요청한다. 민간단체의 지원도 직접분배 원칙을 준수해줄 것을 주문하면서 금전적 지원이 아니라 물자지원에 국한돼야 한다는 뜻을 밝힌다.
윈터펄스 2007 럼스펠드 장관은 “왼손에는 외교적 타결의 선물이 있고 오른손에는 군사적 옵션이 여전히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급거 한·중·일 3국을 방문해 유엔 헌장 7장 42조가 포함된 새로운 결의안 도출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상황이 장기화하는데도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은 ‘윈터펄스 2007(Winter Pulse 2007)’을 발표하고 6개 항모전단을 동북아 인접해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괌에서는 한 척에 무장한 1개 여단 병력을 실은 초고속 수송선 HSV-2 4척이 24시간 만에 포항에 도착하는 제원산출 훈련을 강행한다. 한국과 중국은 북한을 자극하는 훈련 실시가 내키지 않지만, ‘윈터펄스 2007’은 공해상 훈련인데다 고속 수송선 이동훈련은 이미 실시한 바 있기 때문에 결국 예정대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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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미국이 벌이는 일련의 군사훈련이 엄중한 도발이며, 상황을 더 진전시킬 경우 “진정한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경고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정기적인 훈련일 뿐이라며 북한의 비난을 일축하고, 디에고 가르시아와 괌을 중심으로 B-2 스텔스 폭격기 및 B-52의 훈련 비행횟수를 두 배로 늘리는 조치를 단행한다. 특히 ‘윈터펄스 2007’ 훈련에 참가 중인 항모전단은 B-2 운용에 필수적인 적 방공망 제압(SEAD) 및 전자전 패키지 훈련을 실시하라고 명한다. 훈련 내용은 공식 논평을 통해 언론에 유포되고,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훈련량 증가가 이란을 의식한 것인지 북한을 의식한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북한 핵 문제가 잠잠해지면 이란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오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대상황이 연출되는 시소게임 현상이 잠시 혼란에 빠지면서 미국은 물론 이란과 북한도 고민에 빠진다. 그 사이 부시 대통령은 럼스펠드 장관에게 “만일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한국에 주문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고 북한이 지속적으로 도발할 경우 이라크의 혼란, 이란 제재, 북한 제재라는 체스판에서 어떤 말부터 움직여야 할지 재검토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럼스펠드 장관은 “이라크는 이미 연방제로 틀이 굳어졌으며, 이란 압박의 수위를 올리는 것보다는 일단 동북아에서 고리를 끊고 중동으로 가야 한다”는 수정보고서를 제출한다. 라이스 장관의 국무부 역시 럼스펠드 장관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러나 ‘고리를 끊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고민은 이어진다.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과 수뇌부를 마비 혹은 제거하는 ‘단두 전략(Decapitation Stra-tegy)’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지만, 양쪽 다 성공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핵실험이 감행되기 이전에 ‘영변 외에 얼마나 많은 핵 시설이나 핵 물질 보관소가 있는지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전역에 산개한 특각에 은거할 경우 추적이 쉽지 않다’는 정보당국의 보고가 있었다.
제2의 도발 이에 따라 국방부와 국무부에는 ‘제3의 길’을 찾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군사적 긴장 수위를 높여 중국과 한국을 움직인다는 ‘미국판 벼랑끝 전술’의 개념이 완성되자, 그 구체적인 방안이 속속 검토되기 시작한다. 우선 검토된 한국 영토 내의 핵 재배치는 한국 정부의 요청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대신 “핵을 보유한 국가나 단체에는 예방조치가 불가피할 경우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핵전략을 재확인한 뒤 항모전단에 배치된 전술핵의 내역과 숫자를 언론에 흘리는 방안이 거론된다. F-117 스텔스 전폭기를 일본에 추가 배치해 GBU-27 벙커버스터 장착훈련을 함으로써 공포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 최신예 전투기 F-22 랩터를 한반도 인근에 배치하는 방안 등 전력 전진배치도 대안으로 보고된다. 이라크전에서 사용했던 MOAB(공중폭발대형폭탄)과 이를 투하할 C-130 수송기, JDAM(통합정밀직격탄)과 JSOW(통합원거리용 무기) 같은 GPS 유도폭탄 등을 배치해 실험하는 방안도 포함된다. 국무부는 이러한 방안이 과연 어떤 정치적 결과를 낳을지 검토한다. 국무부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한국 내의 반미감정이 고조될 수 있지만, 워싱턴의 의도가 분명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서울의 자본시장이 먼저 요동칠 것이다. 이 경우 한국 정부도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제재에 동참하라는 우리측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역내 긴장이 높아질수록 중국은 더욱 공세적으로 북한을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반응은 국무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기대했던 휴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대북 유류지원 조치는 가시화하지 않고, 이란 역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김 위원장의 초조함은 마침내 선을 넘는다. 강화된 미국의 PSI 조치로 내부결속마저 흔들리자 김 위원장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추가 핵실험 대신 일본 동부 공해상으로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다. 미사일 발사가 확인된 직후, 부시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라온 ‘군사적 대안’ 보고서는 전진배치된 전력을 바탕으로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을 감행하는 내용을 담는다. 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국(DIA), 국가안보국(NSA) 등은 핵실험 이후 총력을 다해 추가로 수집해온 핵 시설 위치 및 김정일 위원장의 피신루트 추적 자료를 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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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에서 현실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자는 미국이 군사적 긴장 수위를 높임으로써 이에 따로 주변국의 공조체제 강화를 추구하는 ‘2단계 접근’을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제네바 협상의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장이 최근 밝힌 것처럼 “1994년에는 하나만 폭격해도 해결됐을 테지만 이제는 어디를 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이 이라크전에서와 같이 북한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상황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라크에 발이 묶여 있는 미국은 이러한 작전을 수행할 군사자산도 부족할뿐더러,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도 필요하다.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은 우선 한국과 중국으로 하여금 군사적 압박이 현실화됐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군사적 충돌만은 막아야 한다는 거센 압력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협상장으로 이끌어내는 힘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의 협조 분위기나 한미 간의 동맹정신은 어느 정도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단기적인 경제 혼란은 매우 커질 것이다. 군사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테이블이 ‘해결되기 전에는 아무도 떠나지 못한다’는 절박함을 만들어내기를 미국은 기대할 것이다. 동북아와 중동이라는 쌍둥이 핵 위협의 부담을 지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이를 시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전쟁의 역사가 그러하듯 인위적으로 조성된 긴장은 한쪽의 작은 판단착오만으로도 예기치 않은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점이다. 2단계 접근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 경우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 압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상승할 것이고, 이미 조성된 분위기는 급속도로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긴장조성’을 위해 전진 배치한 무기체계들은 고스란히 ‘힘에 의한 북한 핵 능력 제거’나 ‘평양 수뇌부 제거’라는 목표를 위해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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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현 북한군사문제 연구가 |
평양 내부의 권력투쟁 징후와 핵실험 이후 고조되는 워싱턴의 강경 분위기는 김정일 정권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광복 이래 60여 년 동안 강권통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려면 어떤 조건이 마련돼야 하는가. 1950년대 남로당파의 김일성 제거 움직임과 5·16군사정변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평양에서의 쿠데타를 가상한 글을 소개한다. 쿠데타 이후의 상황전개를 예측하고, 이를 제약하는 북한의 제도적·지형적 특성,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검토한 이 글은 평양의 후계자 논의와 쿠데타 발발 가능성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분석한다. 필자(이 글에서는 필명 사용)는 현재 국내의 관련 전문기관에 재직하고 있다. |
이글은 북한의 미래에 대한 한 가지 전망으로 북한에서의 군사쿠데타에 필요한 군사적 고려 사항과 성공 조건을 검토한 것이다. 이는 향후 김정일 정권의 통치능력이 현저히 약해져 권력투쟁이나 민중봉기 발생 등 내부 혼란이 가시화할 경우, 북한지역의 조기 안정화를 위해 군사쿠데타를 추진하는 것이 오히려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안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려하기 위한 작업이다. 북한에서의 군사쿠데타를 가정하고 그 성공조건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1952년 11월 남조선노동당 출신 박헌영 일파의 김일성 정권 전복 계획을 살펴보고, 박정희의 1961년 5·16 군사정변 사례를 북한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북한측 자료에 따르면, 1952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계 인사들은 미군이 평양을 공격하는 시점을 이용해 김일성 정권을 무력화하고 반소·친미 정권을 수립하려 모의했다. 당중앙위 연락부를 쿠데타의 지휘부로, 대남 게릴라 양성학교인 금강정치학원 수강생과 연락부 요원 4000여 명으로 구성한 무장부대를 쿠데타 세력의 근간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요는 북한측 공식설명에 따른 것이므로 세부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측이 공식적으로 밝힌, 외부(미국) 세력과 연계된 북한 내 최초의 무장쿠데타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한 5·16 군사정변의 초기 계획은 4·19혁명 1주년을 기해 거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울시내 시위진압을 전담하는 제6관구사령부를 지휘부로 하고 예하 예비사단들이 시위진압을 명분으로 서울로 출동해 정부를 접수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울 북방 제6포병단과 해병대, 공수단 등 4500여 명의 병력이 주축이 되어 육군본부 접수 등 서울 점령을 실행했다. 이러한 두 가지 사례를 경험적 자료로 활용해 북한에서의 군사쿠데타 계획·실행·성공의 일반적인 전개과정을 예측, 구성해보기로 하자. 이와 함께 쿠데타 발생을 근본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북한 수뇌부가 설정한 다양한 군사적 요인도 규명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북한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어떠한 군사적 사항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북한 쿠데타의 3단계 전개 일반적으로 군사쿠데타란, 기존 정권 지배세력의 일부인 군이 비합법적인 폭력을 통해 상위의 유력자 및 지배그룹으로부터 정치권력을 탈취하는 계획적이고 기습적인 군사행동을 의미한다. 반면 친위쿠데타는 기존의 지배세력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세력이나 저항하는 피지배 계급을 무력으로 제거함으로써 기존 통치계급의 권력을 강화하는 군사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는 피지배 계층이 폭력을 사용해 기존질서에 대한 전면적 체제변화를 시도하는 혁명과 구분된다. 쿠데타의 진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보안유지와 치밀한 계획작성을 골간으로 하는 모의단계 ▲군사행동 및 주요시설 점령이 진행되는 실행단계 ▲정권을 장악하고 지지를 획득하는 성공단계가 그것이다.
북한 군부의 일부 세력이 쿠데타를 모의할 경우 그 계획단계에만 대략 1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①쿠데타 필요성에 의기투합하고 당과 군부의 광범위한 지지 분위기를 확신하는 군부 내 특정한 소수(3~5명)가 핵심 주도세력을 형성하면 ②이들이 비밀 결사조직을 결성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각자의 역할을 할당해 조직체계(총무, 정보, 인사, 경제, 작전, 대민, 대외담당 등)를 구성한다. 이들은 동조자를 포섭해 조직규모를 확대해 나가는 동시에 ③세부 실행계획 작성반을 조직하고, 쿠데타 주력 지휘부를 지정하며, 쿠데타의 구체적인 시기를 결정한다. ④특히 군사행동을 직접 담당할 지휘관과 부대를 선정하고, 출동 부대별 점령대상 및 김정일 위원장 등 요인을 체포할 부대를 선정할 것이다. ⑤또한 심리전을 담당하는 특수 작전조를 선정해 관련 유인물을 사전에 인쇄하고, 각종 정보수집 및 쿠데타 지지여론 확대공작을 어떻게 펼칠지도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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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세운 쿠데타 계획을 정해진 시간에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계획상의 점령대상과 목표를 물리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북한군 수개 사단, 즉 군단급 이상의 부대가 김 위원장의 승인 없이 이동할 수 있는지가 핵심관건이 된다. 그 실행단계는 다음과 같다.
①사전계획된 ○월 ○일 ○시에 평양과 주요 지방도시(원산, 신의주, 순천, 사리원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군사행동에 돌입하고 ②저격여단과 육전여단, 기계화여단, 정규사단, 공군무력 등으로 구성된 쿠데타군 주력이 평양으로 진입한다. 점령대상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해기계화여단을 비롯한 정규사단 무력은 평양 북쪽 모란봉에서 평양 중구역으로 진입해야 한다. 한편 저격여단과 육전여단은 평양 남쪽 대동강변의 주요 다리를 장악해 평양으로 진입, 주요 점령대상인 김정일 서기실, 노동당사 및 3호청사, 호위사령부 및 호위사령부 탱크여단 본부, 인민무력부, 국가보위부, 인민보안성, 순안공항, 중앙통신사, 노동신문사, 최고인민회의·내각 청사, 중앙당 고위간부 사택과 아파트를 포위하려 시도할 것이다. ③주요시설에 진입해 김정일을 포함한 요인의 신병을 확보하고, 이들 시설로 향하는 도로와 교량을 통제한다.
외교적 승인→쿠데타 성공 이 과정에서 신병을 확보할 대상은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해 당중앙군사위원, 당정치국원, 당조직지도부 부부장, 국방위원, 내각부서·국가보위부·사회안전부 책임자 등 당·정·(군) 주요 인사를 총망라한다. 쿠데타 지휘부의 주축이 북한군 수뇌부 인사들이냐 참모장급(소장·대좌급 간부들)이냐에 따라 신병 확보의 폭은 달라진다. 이와 함께 주요 고위급 호위군관, 평양방어사령부 지휘관, 3군단장 등 저항이 예상되는 당 무력기관의 지휘관들을 제거하거나 무력화함으로써 평양 점령은 궤도에 오른다. 끝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지지를 획득하는 쿠데타 성공단계에서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은 군부세력의 저항이나 진압의지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내외적으로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만들면서 새로운 비상 정권기구를 수립하고 지지여론을 확대해 나가는 단계로 정의할 수 있다.
①우선 쿠데타군은 평양 점령과 정권 장악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쿠데타 성공을 조기선언하고 비상 정권기구로 ‘인민군혁명위원회(가칭)’ 등을 구성할 것이다. ②입법·사법·행정 3권(權)을 장악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평양과 국내 주요도시의 질서회복에 주력하는 한편, 경제·사회·행정조치 차원에서 금융 동결, 항구와 공항 폐쇄, 조기 통행금지,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법 일부의 효력정지와 새로운 법률의 시행, 대남·대외관계의 일시적 전면중지를 발표할 것이다. ③동시에 당·정·군 주요 인사들이나 북한 주민의 지지여론을 획득하는 포섭공작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노동당 주요인사와 기관들이 비상 정권기구인 ‘인민군혁명위원회’의 정당성을 인정하거나 지지하는 선언을 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또한 ‘인민군혁명위원회’를 ‘공화국군사위원회’ 등의 이름으로 공식기구화하고, 평양을 점령한 쿠데타군과 기존의 평양방어사령부를 수도방어사령부로 확대 개편해 통치무력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④마지막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김정일 위원장을 대신하는 북한 정권의 실체를 내세워 주변국가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완료되면 쿠데타는 사실상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쿠데타가 현실화하려면 다양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북한 정권은 쿠데타 발발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제도적·군사적 장치를 만들어놓았다. 이 가운데 북한의 통치계층이 사실상 공동운명체 성격을 갖고 있어 군부의 동요가 원천봉쇄돼 있다거나, 정권을 대체할 만한 세력이 조직화되지 못한 점 등의 쿠데타 억제요인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체제적 요인 못지않게 군사적 요인도 강하고 치밀하다. 군사쿠데타의 잠재적 실행주체인 군지휘관들이 다음과 같은 군사적·지형적 억제요인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북한군의 조밀한 내부 감시체제는 쿠데타 계획의 보안유지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북한군 장교단은 정치·군사·보위 지휘관으로 그 권위가 분화되어 있다. 이 세 종류의 지휘관은 한 부대 안에서도 서로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쿠데타를 위해 부대 이동명령을 내리려면 해당 부대의 정치·군사·보위 지휘관 세 명이 모두 참여해야 가능한 구조다. 따라서 행동통일이나 보안유지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실행단계 직전에 적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52년 11월 남로당파의 김일성 제거 계획도 거사 직전에 발각됐으며, 5·16의 경우에도 거사 하루 전에 정부군이 쿠데타 계획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평양의 ‘호리병’ 지형 쿠데타를 어렵게 만드는 북한군의 또 다른 특징은 군단급 부대 편성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군은 지상군의 4~5개 군단을 묶어 2개의 집단군(集團軍·Army)으로 편성했다. 김일성 최고사령관이 2개 집단군 사령관과 사령부를 통제·관리하고, 집단군 이하 군단급이나 특수부대 등 하위 무력부대는 집단군 사령부가 관리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들 하위 무력부대를 당중앙이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구조에선 쿠데타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일자, 김일성 당시 수상은 집단군을 규모가 작은 10여 개 군단급으로 쪼개고 이들을 당중앙이 직접 통제하는 구조로 재편성했다. 군단급 부대가 서로 견제함으로써 쿠데타를 방지하는 효과를 갖도록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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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쿠데타 진압을 전담하는 당 무력기관의 존재다. 군부 중심의 쿠데타가 발생하더라도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지 않거나 전차 혹은 공군부대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최신 장비로 무장한 채 쿠데타 진압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105탱크사단 등 호위사령부 소속 평양방어사령부 전력에 의해 쉽게 진압될 수밖에 없다. 넷째, 북한군 내에 사(私)조직이나 파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군사쿠데타의 발생을 어렵게 한다. 1969년 민족보위상 김창봉과 총정치국장 허봉학을 중심으로 600여 명을 제거한 이른바 ‘군사파’ 숙청 이후, 북한군 내에는 서방국가처럼 지연·학연·혈연에 의한 사조직이나 파벌이 사라졌다는 게 정설이다. 사적 모임을 결성하는 행위 자체가 반혁명으로 규정돼 숙청된다. 다섯째, 북한군의 장령급(장성급) 이상 수뇌부 보직은 임기제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주요 당·군 수뇌부는 최근 10여년 동안 거의 직책 변동 없이 임무를 수행해왔으며, 그만큼 조직 장악력이 강하고 김정일 정권과 일체화해 있다.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현철해 총정치국 상무부총국장, 박기서 평양방어사령관 등은 김정일 위원장에 의해 승진 임명된 후 10년 가까이 같은 보직을 수행하고 있다. 여섯째, 북한군의 각 부대에는 충성의 수준에 따라 지원이나 혜택이 차별적으로 제공된다. 북한군의 금성친위운동, 7연대칭호쟁취운동, 붉은기칭호수여운동 등을 통해 각 부대를 정예·충성 부대와 비정예·비충성 부대로 구별한다. 평양방어사령부 등 대표적인 충성부대에는 각종 장비와 혜택을 제공해 김 위원장에 절대적인 충성부대로 육성하지만, 후방군단이나 군사건설국, 인민경비대 등은 비정예·비충성의 ‘서민군’으로 차별하는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비충성 부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한다 해도 좋은 장비와 각종 혜택을 제공받은 정예·충성부대에 쉽게 진압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군부에 대한 분할통치(devide · rule) 전술인 셈이다. 이와 함께 평양의 지형적 특징은 쿠데타를 억제하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다. 주요 권력기관이 밀집한 평양 점령은 쿠데타의 필수요소지만, 평양의 중심지인 중구역과 모란봉구역은 사실상 대동강에 둘러싸인 호리병 모양 지형이다. 쿠데타군의 전차나 대규모 병력이 이 지역을 점령하려면 그 진입로는 호리병의 목에 해당하는 칠성문거리, 안상택거리, 승리거리뿐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이들 길목에 호위사령부와 평양방어사령부(서성구역) 무력을 배치했다. 이들 길목을 피해 주요지역에 진입하려면 대동강의 5개 다리 가운데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소규모 특전부대는 진입할 수 있겠지만, 전차나 대규모 병력의 진입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평양은 쿠데타군이 진입하기 매우 어려운 동시에 진압군인 평양방어사령부가 방어하기 쉬운 요새 지형이다. 설사 쿠데타군이 평양을 일시적으로 점령한다 해도 진압군이 평양 외곽에서 포위작전을 구사할 경우 쿠데타군은 고립되어 고사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5·16군사정변 당시 주한미군사령관과 한국군 1군사령부는 5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싸움 없이 쿠데타군의 항복을 유도한다는 작전계획을 검토한 바 있다.
사단 1개당 감시군관 250명 그렇다면 평양에서의 군사쿠데타를 기획하는 이들은 어떠한 사항을 중점적으로 검토해야 할까. 사실 쿠데타 성공의 핵심은 군사적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안을 유지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규모 부대이동을 가능케 하며, 어떻게 평양을 점령하고 정권획득을 기정사실화할 것이냐의 문제다. 앞서 살펴본 다양한 제약을 전제로 북한에서의 쿠데타 성공을 위해 사전에 고려돼야 할 몇 가지 조건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첫째, 무엇보다 김정일 위원장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의 무력기관 책임자들은 김 위원장에 의해 조직적·인적·기능적으로 분리되어 통제되고 있으며, 출신지나 학연, 경력별로 나뉘어 있다. 호위사령부나 평양방어사령부, 당 작전부 등 당 무력기관 계열의 군사지휘관들과 정규군 수뇌부 및 전연 담당 지휘관들, 후방의 군단급 지휘관들, 준군사조직 지휘관 등으로 나뉜 이들에 대해 김 위원장은 보직의 상호이직을 되도록 억제하고 상호 경쟁체제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이들 세력 중 하나가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킬 경우 김 위원장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다른 무력기관 수뇌그룹의 극심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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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규모 부대이동을 실행할 능력의 확보다. 정규 명령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사실상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다. 현재 북한에서는 규모가 큰 부대의 경우 인민무력부장이나 총참모장도 이동명령을 내릴 수 없다. 오직 당중앙군사위원회와 최고사령관만이 이를 명령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예컨대 북한군 사단급 부대가 은밀히 이동하기 위해서는 사단사령부로부터 예하 64개 중대에 이르기까지 배치된 250여 명의 정치·보위군관의 감시의 눈을 제거하거나 혹은 포섭해야 한다. 각 부대에 배속된 정치군관과 보위군관을 제거했다 할지라도 적지 않은 수의 (당원) 병사가 이탈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실행에 참가하는 무장병력은 상당 규모가 축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평양·지방 동시행동 이뤄져야 셋째, 평양과 지방에서 동시 다발적인 군사행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쿠데타군이 평양이든 지방이든 한 지역에서만 거사할 경우에는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우선 지방에 주둔한 부대가 쿠데타군의 주력이 될 때를 가정해보자. 신의주나 청진 등지에서 평양까지(거리 150~250km)는 차량을 이용해 아무런 방해 없이 도착한다 해도 물리적으로 12~22시간이 소요된다. 5·16군사정변 당시 제6포병단 5개 대대 2200여 병력은 50여 대의 차량에 분산 탑승해 아무런 제지 없이 서울 육군본부(거리 30km)에 도착하기까지 약 2시간40분이 소요됐다. 쿠데타군의 부대이동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면 당연히 기습은 어려워진다. 이러한 이유로 1952년 11월 남로당파가 김일성 제거계획을 세웠을 당시에는 쿠데타 발생 이전에 은밀하게 4000여 명의 무장폭동 부대를 미리 평양 근교에 집결시키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따라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출발한 쿠데타군 주력이 평양으로 이동하는 동안, 진압군은 평양방어사령부와 전연 815기계화군단, 820전차군단의 예하전력을 동원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게 된다. 심지어 평양방어사령부의 예하부대가 쿠데타군의 주력이 되어 손쉽게 평양을 점령하는 경우에도 진압군측 병력이 4만~5만명만 된다면 전투 없이 평양을 포위하고 쿠데타군 진압에 돌입할 수 있다. 따라서 평양 점령과 주요 지방도시 통제, 평양 외곽방어를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사전에 동원하는 동시다발적 군사행동만이 쿠데타 성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네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쿠데타 세력 포섭으로 연결된다. 인민군 후방군단 소속의 수십개 사단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해도, 군단급 규모인 평양방어사령부의 전력에 의해 쉽게 무력화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평양방어사령부의 주요 지휘관 포섭을 1차 목표로 삼아야 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이들을 무력해질 수 있는 광범위한 쿠데타 세력의 포섭이 필요하다.
한국군 움직임이 성패 가를 수도 다섯째, 정규 사단 이외에 기계화·육전·공군부대가 쿠데타군에 합류해야 한다. 평양 점령을 위해 군사작전을 감행하거나 진압군과 대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경우를 상정한다면 쿠데타군은 정규사단 이외에도 다양한 전력을 반드시 포섭해야 한다. 현대전에서 공군의 합세는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 요소다. 1991년 8월18일 구 소련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가 실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쿠데타군에 공군부대가 포함되지 못함으로써 진압군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여섯째, 호위사령부 소속 주요 호위군관의 포섭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김 위원장을 호위하는 호위사령부 제2처 1500명 안팎의 병력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 쿠데타군에 저항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김 위원장의 일정이나 활동계획 자체가 비밀이므로 그의 신병을 확보하려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호위사령부 내 호위군관들을 쿠데타 동조자로 포섭하는 것이 긴요하다. 이들을 쿠데타군에 동참시키려면 쿠데타 세력의 지휘부와 규모가 최소한 군단급 이상은 돼야 할 것이다. 일곱째, 전연군단의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는 전연군단(4, 2, 5, 1군단)과 820전차군단, 815와 806기계화군단 등이다. 후방에 위치한 부대를 중심으로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 서부전선에 위치한 4, 2 전연군단과 820 전차군단, 815기계화군단이 쿠데타군과 진압군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가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것이다. 반면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전연군단은 평양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 해도 섣불리 상황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5·16군사정변 당시에도 한국군 주력부대가 4000여 명에 불과한 쿠데타군을 진압하지 못한 것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군끼리의 교전이 매우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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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전연군단이 쿠데타 진압에 개입한다 해도 휴전선 유지에 이상이 없을 정도의 소규모 개입만이 가능할 것이므로, 쿠데타 발생 즉시 전연군단이 중립을 지키도록 유도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쿠데타 성공에 필수적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에서의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이와 시점을 맞춰 한국군이 적절하게 움직여 전연군단의 발을 묶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여덟째, 국외세력과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고 지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비용을 조달하는 데도 긴요하지만, 쿠데타 정권을 기정사실화하는 데도 중요하다. 국제기구나 주변 국가들의 조기승인을 얻으려면 외부 세력과의 연계나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대안’ 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은 쿠데타 억제를 위해 다양한 제도적·군사적 장치를 설치했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 쿠데타의 발생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쿠데타는 이를 억제하는 다양한 요인에도 불구하고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꾸준히 시도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쿠데타와 관련된 한 연구에 따르면 1945년부터 1978년 사이에 전세계에서 발발한 쿠데타 시도는 총 282회에 달한다. 이 중 131회는 실패하고 151회는 성공해 실패율은 46.5%다. 북한에서의 쿠데타 시도를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북한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만한 시기는 여느 군사쿠데타 발생 사례에서 보듯 북한 정권의 결집력이 가장 약할 때라고 추정할 수 있다. 북한 현대사에서는 우선 남로당파가 김일성 정권에 대한 쿠데타 계획을 세웠던 6·25전쟁 시기가 첫 번째였고, 당·정·군 핵심인사들에 대한 사상최대의 숙청이 이뤄진 1960년대 말 김정일을 후계자로 옹립하던 시기가 두 번째였다. 따라서 향후 김정일 정권이 분열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는 그의 후계자가 가시화하는 시점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북한군 내의 다양한 그룹이 숙청과 권력장악의 기로에서 각자 다양한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다른 정치적 선택’을 꿈꾸는 그룹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될 때 쿠데타의 성공을 확신하고 행동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첫째, 쿠데타군 지휘부는 최소한 군단장급 이상의 군사 작전통을 지도자로 삼고, 각 군종·병종별로 사단장급 정치·군사 지휘관 일부와 당 무력기관의 고급 지휘관들의 연합세력이어야 한다. 둘째, 쿠데타군의 잠재전력이 정규사단·기계화·육전·공군부대 등을 포괄하는 군단급 규모로 최악의 경우 진압군을 무력화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보유해야 한다. 셋째, 새로 세워질 정권을 즉각 승인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해줄 외부세력과의 밀접한 연계가 전제돼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향후 김정일 정권의 통치능력이 현저히 약해져 민중봉기나 권력투쟁 발생 등 북한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가시화한다면 차라리 인위적이고 계획적인 북한 내부의 군사쿠데타 움직임을 지원하는 것이 의미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오히려 그 편이 최소한의 비용과 희생을 치르고 한반도 상황을 안정화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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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현 북한군사문제 연구가 |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북한 급변의 결정적인 고비는 평양 내부의 정변이나 미국의 제한적 군사행동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는 순간이다. 이 시점에 권력층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북한은 조기에 안정을 되찾을 수도, 급격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북한의 비상대응체계 분석을 통해 평시와 전시로 나누어 권력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모델링해 보았다. |
바로 지금 김정일 위원장이 유고(有故)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김 위원장의 유고는 국방위원장의 유고일 뿐 아니라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최고사령관 등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을 통치해온 ‘단일지도’ 통치권력의 소멸을 의미한다. 이 경우 북한은 통치 시스템이 마비돼 즉시 비상사태에 돌입할 것이다. 이후 북한권력의 향방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론적으로 볼 때 김정일 유고가 체제 붕괴 등 급변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반면 ‘김정일 없는 북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개연성 또한 마찬가지로 높다. ‘김정일 없는 북한’에서 누가, 어떤 기관이 권력을 대체할 것이며 100만 북한군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것인지의 문제는 곧 북한의 비상시 대비체계의 정상적인 가동 여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오늘날 북한의 김정일이 향유하는 ‘단일지도’ 통치권력은 크게 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당 중앙위에서 선출하는 당 총비서는 북한을 당적(黨的)으로 통제하며, 최고인민회의에서 뽑는 국방위원장은 북한을 국가적으로 통제하고,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최고사령관은 북한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식이다. 북한의 통치체계는 ‘단일권력’인 이들 3자 간의 역할분담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평시와 비상시에 따라 이들 3자간 역할관계의 비중이 달라진다. 평시 통치체계와 비상시 통치체계의 차이는 이 세 가지 역할의 상대적 비중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북한의 비상시 체계란 ‘일체 무력의 지휘통솔’ 권한을 가진 최고사령관의 역할을 당과 국방위원장이 지원하는 ‘최고사령관 중심체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평시 체계란 당적인 통제와 국가적 통제를 담당하는 당 총비서와 국방위원장의 역할이 최고사령관의 군사적 통제보다 강조되는 당-국가 중심체계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비상시기로 규정하는 경우로는 다음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우선 전쟁 등이 발발해 최고사령관이 비상시기임을 선포하고 이와 관련해 작전명령을 발동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비상사태를 규정하는 최고사령관 자신이 유고된 경우다.
‘전시’와 ‘평시’를 나누는 이유 북한에서 ‘비상시기’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사안이 발생했을 때 그 위협의 정도에 따라 최고사령관이 비상사태 관련 작전명령을 발동함으로써 성립한다. 물론 여기에는 교전상태를 의미하는 ‘전시’가 포함된다. 이에 대한 최고사령관 명령은 ‘노동신문’이나 ‘조선인민군’ 신문을 통해 공개될 수 있지만,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와 같이 내부적으로만 행해질 뿐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최고사령관의 비상사태 작전명령에 따라 규정되는 북한의 비상시기는 다음의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5단계-전투경계태세 명령, 4단계-전투동원준비태세 명령, 3단계-전투동원태세 명령, 2단계-준(準)전시상태 명령, 1단계-전시상태 명령이다. 이 가운데 5단계 전투경계태세 명령은 인민무력부장이 예비군을 제외한 정규군만을 대상으로 발동한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와 한국의 6·3한일회담반대운동 시기,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 그리고 1985년에 발령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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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사령관이 3단계 전투동원태세 이상의 작전명령을 발동하면 최고사령관은 북한 내 ‘일체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 권한을 행사하고 북한의 당, 국가기관, 무력기관, 사회단체의 업무는 최고사령관을 지원하는 비상체제로 전환한다. 민간무력인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 조직도 동원태세를 갖추며 모든 무력기관의 외출, 휴가가 전면 금지된다. 전연군단 등은 즉각 완전한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한다. 후방에 있는 부대들 가운데 공군부대, 반항공부대(방공부대), 고사포부대, 인민경비대 부대도 전투준비를 끝내고 내무반을 지상에서 지하갱도로 이동하여 완전한 전투 준비태세를 갖춘다. 2단계 준전시상태 선포시에는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 민간무력에 대한 비상소집령이 발동된다. 북한 내 라디오와 TV의 정규 프로그램은 모두 중단된 채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전시가요 연곡’과 전쟁영화만을 내보낸다. 전국적 범위에서 청년학생들이 인민군대 입대를 탄원해 나서기도 한다. 한미연합군의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이 열릴 때마다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대응군사훈련 등을 실시해왔다. 준전시상태가 전시상태와 다른 점은 실제 교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며, ‘전시 대비상태’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북한군 최고사령관의 비상사태 관련 명령은 단순히 당의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최고사령관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으로, 그 기간이 한정돼 있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북한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위는 6·25전쟁 시기 긴박한 전황에 맞게 당의 ‘집체적 지도’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일지도 형태의 ‘전시비상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신설된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 최고사령관 개인에게 북한 내 일체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권이 부여됐고, 당 중앙위와 국가기구들은 전쟁 승리를 위해 최고사령관이 일체 무력을 통한 군사작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시를 포함한 북한의 비상시기에 최고사령관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예외적인 ‘비상시’가 존재한다. 예컨대 비상사태를 관리하는 김정일 최고사령관 본인의 유고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김정일의 유고는 그 자체로 북한을 비상사태에 돌입케 할 것이다. 이 경우 ‘김정일 없는 북한’이 처할 비상시기를 전시상황과 전시가 아닌 상황으로 구분하고, 이에 대처하는 비상대비체계를 ‘당 중앙군사위 중심체계’와 ‘최고사령관 대행체계’로 설정해 검토해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김정일 유고시 예상되는 북한의 비상체계 통치형태와 향후 권력의 향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유일한 실체, 당 중앙군사위원회 바로 지금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를 가정할 경우, ‘김정일 없는 북한’이 직면하는 최초의 난제는 비상사태 선포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비상사태를 규정하는 최고사령관의 유고 상황이므로 과연 누가, 어떤 기관이 비상사태의 수준을 결정하고 어떤 형식으로 선포하는지가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김정일 이후 정국의 주도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므로 매우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우선 이론적으로 살펴보자. 김정일 유고에 따른 비상사태 선포는 조선노동당규약 24조에 규정된 것처럼 당 중앙위 정치국에서 관련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당 중앙위 정치국은 1983년 2월1일 한미 양국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당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으며, 1994년 7월8일 김일성 사망 당일에도 비상 정치국 회의를 개최한 것으로 보아 당 중앙위 정치국이 비공개로 비상사태 선포를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후 김정일 위원장 시대 들어 당 중앙위 정치국은 비상사태와 같은 주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개최된 사실이 알려진 바 없을 뿐 아니라, 자연적 감소에 따른 결원조차 충원하지 않는 등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언급했듯이 북한은 당 비서국에 의해 실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 유고 상황에서 당 중앙위가 비상사태 선포와 관련한 주체가 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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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구인 국방위원회 역시 제도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간 당-국가체제에서 상상하기 힘든 당 중앙위와 국방위원회의 공동결정 발표가 종종 있었지만, 이는 김정일 총비서가 국방위원장을 겸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 내각수상이 ‘석탄공업을 가일층 발전시킬 데 대하여’(1964년 1월8일)와 같은 주요 사안을 당 중앙위와 내각의 공동결정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례는 북한에서는 직책의 중요성이 직책 자체보다는 누가 그 직책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돼왔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다. 따라서 ‘김정일 없는 북한’에서 국방위원회의 위상은 여타 국가기구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전히 ‘국가는 당이 만든 당의 강령을 실행하는 제도적 기관’일 뿐이다. 비록 헌법상 국방위원장 유고시 대비차원에서 존재하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국방위원장 직을 대리할 수 있겠지만, 조명록 국방위원장 대행이 기존 국방위원장인 김정일이 가졌던 ‘일체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권한’을 행사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은 어디까지나 국방위원장을 수석으로 보좌하는 직책일 뿐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승계하는 직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김정일의 ‘일체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 권한은 단지 국방위원장뿐 아니라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사령관을 모두 포함하는 단일권한이라다. 더구나 국방위원장의 권한은 엄밀히 말해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의 지도나 위임에 의해 행사된다. 따라서 조명록의 위상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서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도와 결정을 받아 집행기관으로서 국방위원장을 대행하고 국방위원회를 주도해 나가는 역할에 한정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황장엽 등 북한의 고위 탈북자들은, 장성택 전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같은 당 관료 중 특정인이 김정일 유고 이후 조직지도부장 직을 대리하면서 ‘단일지도’ 형태의 권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그 실현가능성은 점차 불투명해지고 있다. 당내 2인자로 일컬어지며 ‘포스트 김정일’ 후보 1순위로 거론됐던 장성택의 경우 가택연금설과 복귀설, 당내 알력설 등 그 위상이 극히 불안정한데다, 최근에는 권력투쟁 음모설에 휩싸여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김 위원장 유고시에 당이 장성택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할지조차 미지수다.
‘장성택 후계론’의 함정 또한 장성택 제1부부장의 담당영역이 사법, 검찰, 공안기관 등 비정규군 영역에 한정됐기 때문에 그동안 북한군 인사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도 한계다. 과거부터 빨치산 계열 군부 인사들과의 인적 연관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도 적다. 군부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될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신정권’을 당 관료가 ‘단일지도’ 권력 형태로 통제, 지도해 나갈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사실상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당총비서, 국방위원장, 최고사령관 등 ‘단일지도’ 형태의 통치권력 선호는 보편적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비상시에 한정된 권력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일의 유고는 한정적인 ‘단일지도’ 형태 통치권력의 소멸을 의미하며, 교전상황 등 전시상태를 제외한다면 북한의 통치형태는 일정기간 집단지도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놓고 보면 김정일 유고시 북한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할 주체와 형태의 윤곽이 드러난다. 현재 상태에서 최고지도자의 유고가 발생한다면 비상사태 선포는 당 중앙위·중앙군사위 공동명의 형식으로 발표되거나, 당 중앙위, 당 중앙군사위, 국방위, 인민보안성, 국가보위부 등이 구성하는 비상 정권연합기구를 통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들 기구 가운데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기구는 당 중앙군사위원회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당규약 제27조 규정에 의거해 북한 내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할 수 있는 만큼, 최고사령관을 대신해 비상사태 관련 결정을 내리는 형식상 주체가 되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비상사태 선포권을 가진 북한군 최고사령관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소속기구일 뿐 아니라, 김일성 사망 이후 당 중앙위(정치국)가 사실상 정지된 후에도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비서국과 함께 그나마 그 권한과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징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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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 나온 전국 요새화 구축과 관련한 명령이나 수차례 나온 인민군 원수급 군사칭호 수여 명령은 모두 당 중앙위원회 명의였다. 최근에 공개된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 00015호 ‘무기, 탄약들에 대한 장악과 통제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2004년 3월10일)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지시문 002호 ‘전시사업세칙을 내옴에 대하여’(2004년 4월7일)의 발행번호를 보면,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최소한 2개월에 한 번가량은 정기회의나 임시회의를 개최해 주요 국방 현안을 결정해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들 명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앙군사위원회는 전쟁에 대비하는 준비 및 국방정책의 심의와 행정기관의 국방과 관련된 업무를 집중적으로 장악해 신속한 진행을 도모하는 ‘비상시 대비기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쟁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김정일 유고시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전투동원태세’ 비상사태 작전명령을 북한 전역에 선포하는 ‘결정’을 행하고 다음으로 이를 공개 혹은 비공개할 것인지, 단독명의로 할 것인지 공동명의로 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주관하는 국방위원회로 하여금 이의 집행을 담당케 함으로써 비상시 북한을 관리해 나갈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고 사건’ 누가 수사하나 이렇듯 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의해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나면 북한 당·정·군의 모든 업무는 당 중앙군사위원회로 집중되는 비상체제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단일 권력주체를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김정일 위원장만이 향유했던 당 총비서나 최고사령관,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 위원장을 새로 뽑거나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여 국방위원장을 새로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도 얘기했듯 거의 10년 동안 개최되지 않은 당 중앙위 전원회의나 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를 개최하는 작업이 조속히 진행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크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공식절차가 안정적으로 완료될 때까지의 과도기간에는 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최고사령관 등 단일지도 권력을 대신해 당 중앙군사위원회나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집단지도’의 형식으로 정책결정의 중심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무적으로는 당 비서국 전문부서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비상 통치하는 형식이다. 대내외적으로는 국방위원회가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상시기 정책결정을 집행하는 기구 기능을 할 것이다(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비상사태의 수준이 전시상황이라면 통치 주체는 달라질 수 있다). 비상사태 선포 이후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직면할 첫째 문제는 김정일 유고 관련 수사다.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당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자격으로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었던 한성룡에게 김 주석의 시신을 해부하라고 지시하고 해부소견을 제시토록 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당 총비서인 김 위원장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사인(死因)규명 등에 대한 수사는 엄밀히 말해 당 중앙위 소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북한 내 일체 무력을 장악하는 상황전개를 가정하면, 김정일 유고와 관련한 수사 혹은 부검의 주체기관도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될 것이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을 선정해 김정일의 사망이 독살인지, 사고사인지, 병사인지를 규명토록 하고 유고와 관련한 대내외적인 절차를 마무리하도록 지시하는 형식이 예상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단지도 형태인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전면에 등장해 주요 정책결정 기구로서 권한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다면, 이후 통치권력의 실체는 오극렬 당 작전부장과 친(親)오극렬 계열의 군사파 인물들이 장악할 것으로 관측된다. 오극렬 작전부장이 막후통치 역할을 담당하고 당 중앙군사위 위원인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명국 108기계화 군단장 등이 정책결정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오극렬 당 작전부장이 총참모장에 재임하던 1979년부터 1988년 사이에 승승장구한 유학파 군사지휘관들로서, 당시 오극렬 총참모장의 북한군 현대화·정규화 비전을 공유한 인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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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지도’ 불가피한 전시상황 더욱이 군사지휘관 출신인 조명록의 총정치국장 기용이나 작전국장 및 전연 군단장들에 대한 우대, 해군사령관의 인민무력부장 기용 등은 모두 오극렬의 머리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일 시대 북한군 수뇌부 인사의 면면은 그의 군사지휘관 중심의 강군(强軍) 구상이 김정일 위원장에 의해 수용된 형태에 가깝다. 김 위원장의 유고 이후 군부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성립한다면 그 막후 중심에 오극렬 작전부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까지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 유고시 북한권력의 향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부터 살펴볼 내용은 전시상황에서 김 위원장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에 관한 것이다. 이는 최고지도자의 유고라는 상황에 전시라는 또 하나의 상황이 얹혀진 이중의 비상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는 집단지도 형태의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유고 이후 상황을 관리해 나갈 공산이 크지만, 전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시상황은 필연적으로 ‘최고사령관’이라는 단일지도 형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유사시 최고사령관을 대행하는 체계를 예측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김정일 위원장 유고 상황에서 북한이 어느 일방과 교전상태에 들어갈 경우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준전시전투동원태세 작전명령보다 한 단계 높은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국에 전시동원령을 하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성립되는 북한의 전시 비상체계는 6·25전쟁 당시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지휘체계와 김정일 위원장의 생존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전시사업세칙’(2004년 4월7일)을 통해 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생존한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비상 대비체계의 핵심은 당연히 당과 국방위원회가 최고사령관을 지원하는 ‘최고사령관 중심체계’가 된다. 우선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위임에 따라 ‘전시상태 때 정치, 군사, 경제, 외교 등 나라의 모든 사업은 국방위원회에 집중’되도록 규정돼 있다. 전시 북한의 일체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 권한은 최고사령관 개인에게 귀속되며, 오로지 전쟁 승리를 위해 당·정·군의 모든 업무가 최고사령관 지원체계로 일원화한다. 즉 전시 최고사령관 중심체계는 명실상부한 단일지도 형태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김 위원장 유고 상황에서는 과연 누가 최고사령관을 대행할 자격이 있는지로 귀결된다. 북한군 역사를 통틀어 최고사령관 궐석시 그를 대리하는 ‘제1대리인’은 공식적으로 세 명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6·25전쟁 시기의 김책 전선사령관이다. 당시 최고사령부 부사령관 겸 민족보위상은 최용건이었지만, 김일성 수상은 전선사령관 김책이 최고사령관의 제1대리인이라고 언급했다. 두 번째로는 1986년 6월 유엔사령부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최고사령관 제1대리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끝으로는 1991년 12월24일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기 직전의 김정일 당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있다.
‘최고사령관 제1대리인’이 없다 ‘북한군 최고사령관 제1대리인’으로 언급된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군사지휘관이나 국가 최고위직이 아닌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급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인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할 경우, 논리적으로 북한에서는 최고사령관을 대행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쉽게 말해 현재의 북한에서는 김 위원장을 대신해 최고사령관을 맡을 수 있는 2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유사시 북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게 만드는 한 요소다. 앞서도 말했듯 전시상황이 아니라면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집단지도로도 비상관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전시라면 당의 ‘집체적 지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신속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일지도 형식의 특수기관이 필수적이다. 사실상 ‘최고사령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전시의 경우 부대지휘는 당 위원회가 아니라 군사지휘관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단독 명령에 의해 통솔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상황에서 북한이 타국과 교전상태에 놓일 경우에는, 전시상황의 특성에 맞게 특정한 한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일체 무력의 지휘통솔권을 부여하는 ‘단일지도 형태의 최고사령관 대행’이 절실하다. 그렇다면 최고사령관 대행은 현실적으로 당 중앙군사위원회와 전시 북한군 최고사령부의 수뇌부를 구성하는 인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맡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모든 권력의 집결지 전시 최고사령부에는 정규군인 조선인민군뿐 아니라 인민보안성 소속의 인민경비대와 노농적위대를 비롯한 민간무력, 호위사령부 병력, 당원과 사회단체원 등 북한 내의 모든 병력과 군사자산이 휘하로 편성된다. 전쟁 승리를 위해 북한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하나의 거대한 최고사령부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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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시 최고사령부의 유일한 전례는 6·25전쟁 때였다.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내각수상이던 김일성이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인 최용건이 최고사령부 부사령관과 서해안방어사령관을 겸임했다. 최고사령부 전선사령관은 당 중앙위 정치위원이자 내각 부수상인 김책이, 전선사령부 참모장은 북한군 총참모장인 강건이 겸임했다. 최고사령부 작전지휘회의에는 이들을 비롯해 작전국장, 각 군종병종 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앞서 말했듯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할 경우 북한에는 최고사령관을 대신할 자격이 있는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시 최고사령관 대행은 당 관료보다는 전시상황에 맞게 최고사령부를 구성하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에서 선출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군사작전에 대한 능력을 갖춘 인물은 더욱 유리한 위치에서 최고사령관 대행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 정규군의 규모는 20만명 안팎에 불과했다. 현재의 북한군이 100만명 이상임을 감안하면 유사시 전시 최고사령부의 구성은 6·25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다. 예컨대 1950년에는 하나뿐이던 전선사령부의 경우 동부·중부·서부·후방·동해안·서해안 등 6개로 나뉘어 구성될 것이다. 각 전선사령부는 몇 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어 그중 선임군단장이 전선사령관이 된다. 최고사령부 수뇌부의 핵심적인 임무는 바로 이들 전선사령부를 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현재의 인민군 체계가 그대로 최고사령부 체계로 반영될 경우 최고사령관 대행은 조명록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겸 총정치국장이, 부사령관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최고사령부 총참모장은 김영춘 총참모장이 맡아야 한다. 여기에 각 군종병종 사령관과 작전국장, 통신국장 등이 최고사령부의 수뇌부를 구성하고, 미사일지도국이 최고사령부 직속으로 편성될 것이다. 특히 김영춘 총참모장 예하에는 정규군인 조선인민군뿐 아니라 인민보안성의 조선인민경비대와 민간무력인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인민유격대가 편제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군사적 효율성’ 따라서 북한의 전시 대비체계의 핵심인 최고사령관을 대행할 만한 북한군 인사는 군내 서열 2위이자 총정치국장인 조명록이다. 그러나 조명록에게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우선 고령의 나이와 건강이상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를 더 이상 수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각종 기념대회에 참석하더라도 연설을 하지 않으며 평양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업무를 관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결국 현실적으로 최고사령관의 임무와 권한·역할을 대행할 수 있는 인물은 100만 북한군의 군사작전을 실무적으로 지도해온 김영춘 인민군 총참모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군사적 효율성 문제가 크게 작용한다. 북한군은 지상군 중심의 군대로, 해공군이나 평양방어사령부, 특수부대나 민간무력조차 지상군 작전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직 미사일훈련지도국만이 전략부대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어 그 운용을 최고사령부 작전지휘회의에서 결정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군사작전을 감당하는 역할을 수행해온 사람은 김정일 위원장을 제외하면 당중앙군사위원회를 통틀어 김영춘 총참모장 한 사람뿐이다.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김 위원장 유고의 경우 그가 최고사령관 대행으로 옹립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당 중앙군사위원회에는 이외에도 실력자가 여럿 존재한다. 그러나 이을설 호위사령관이나 박기서 평양방어사령관 등은 정규군의 명령·지휘체계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 김정일 위원장의 예비부대 성격이 강한 부대를 이끌어왔다. 이들로서는 정규군 군사지휘관인 최고사령관을 대행하기 어렵다. 김 위원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김명국 전 작전국장 등 비교적 젊은 군부 지도자들은 현재 일개 기계화 군단장에 불과하므로 최고사령관 직위를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간 북한의 해군사령부는 일개 군단장급에 불과했기 때문에 해군사령관 출신인 그가 1998년 인민무력부장에 기용된 일 자체가 일종의 파격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 상황에서 100만 지상군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직 대행의 권한을 행사하려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더욱이 북한 인민무력부는 부대를 지휘하거나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극렬의 한계 앞서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는 오극렬 당 작전부장이 막후권력의 핵심에 설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전시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군이 아니라 당 인사인 오극렬이 인민군 최고사령관 대행직을 수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군사작전에 능한 그는 현재 북한군 수뇌부 인사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막후역할을 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최고사령관 대행이 되려면 매우 큰 부담을 져야 한다. 우선 기존의 빨치산 출신 군 원로들과 갈등관계에 있을뿐더러, 현재는 군을 예편한 상태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나 국방위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극렬이 정권 전면에 나서려면 명분상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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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
평양에서의 정변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고 이후 북한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면, 주변국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이러한 시도를 차단하고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려면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북한 급변사태를 공개 논의하는 작업은 중단되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1997년 통일정책연구소 내부 학술지인 ‘북한조사연구’에 실린 이기동 당시 연구위원의 ‘북한 급변사태시 외부세력 개입 가능성’은 그 구체적인 준비방안을 점검한 사실상의 최근 논문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현실성이 높은 주요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
1990년대 들어 북한에서의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은 주변국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주제였다. 주변국들은 북한 급변사태를 동북아 질서의 안정을 위협하는 뇌관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착수했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확보는 항상 주변국의 국가이익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이 지역에서 ‘힘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변국들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단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주변국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확보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물론 주변국들간의 주도권 경쟁은 탈법적이고 무원칙적인 경쟁이 아니라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이 명시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해석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정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북한 급변사태 발생에 따른 외부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한국의 대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북한의 급변사태란 정권과 체제의 정상적 운영이 마비된 상황, 즉 무정부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에 사회적 대혼란이 일어나더라도 김정일 정권의 사회통제력이 건재하다면 이를 급변사태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이 남한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하는 상황, 나아가서 주변국의 국가이익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들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을 뜻한다. 즉 북한의 급변사태란 ‘남한 및 주변국에 중대한 안보위협으로 작용할 만한 무정부상태’를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국제법에서는 무정부상태를 불완전 무정부상태와 완전 무정부상태로 나누어 취급하고 있다. 불완전 무정부상태란 기존 정부가 중앙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이에 대항하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반도(叛徒)단체가 기존 정부와 투쟁하는 내란 상태에 있는 경우, 혹은 기존 정부는 붕괴됐으나 이를 대체하기 위한 둘 이상의 반도단체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상호 투쟁하는 내란 상태를 말한다. 이에 비해 완전 무정부 상태는 기존 정부가 중앙 통제력을 상실하고 이에 대항하는 반도단체가 전무하거나, 기존의 정부가 붕괴됐으나 이를 대체하기 위한 반도단체 상호간의 투쟁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남한의 독자적 개입 가능할까? 원칙적으로 국제법상 모든 국가는 불완전 무정부 상태일 경우에는 개입할 수 없다. ‘국내문제 불개입 원칙’을 준수해야 하므로 내전에 개입할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즉 ‘일국의 내란에 대한 자위적 개입’, ‘정통정부의 요청에 의한 개입’, ‘국제연합에 의한 제재를 위한 개입’은 적법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경우 개입의 정도와 방법이 어디까지인지는 모호하지만 실질적인 개입의 폭은 국제법의 틀 안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완전 무정부상태는, 그나마 불완전한 정부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국가의 부재’ 또는 ‘국가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주변국들 또한 붕괴된 국가의 영역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없어지게 된다. 완전 무정부상태에 있는 지역에 대한 주변국 등 외부세력의 개입은 국제법상 아무런 저촉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외부세력의 개입은 이를 완전 무정부상태로 볼 것이냐 불완전 무정부상태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개입을 원하는 측은 완전 붕괴로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측은 불완전 붕괴로 규정할 것이다. 중앙적인 판단권자가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로 볼 때 완전 붕괴냐 불완전 붕괴냐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강대국 중심의 파워게임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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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가 여기까지 전개되면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당연히 한국 정부가 배타적인 개입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역사적 당위성과 지리적 인접성 등 다양한 근거와 함께 한반도와 주변 도서를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또한 이러한 맥락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제법적 측면으로 살펴볼 때 이 같은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전적인 지지를 얻어 공인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우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이해관계, 나아가서 남북간 법적 관계가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형식적으로 보면 남북한은 현재 각각 유엔 회원국이며 국제적으로 별도로 공인된 주권국가다. 남북한 관계 또한 국제법상 국가간 관계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북한 급변사태에 따른 한국의 개입은 주변국들의 개입과 국제법적으로 변별성을 갖기 어렵다. 즉 불완전 무정부상태이면 일국의 내란에 대한 타국의 불간섭 의무에 따라 개입이 불가능하고, 완전 무정부상태일 때만 개입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은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제2조의 규정에 따라 북한의 내부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고 있다. 또한 남북한 모두 유엔 회원국이므로 유엔헌장 제2조 4항의 영토보존 원칙과 무력불사용 원칙에 의거해 한국 정부는 북한의 급변사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가 없다. 북한의 불완전 무정부상태에서 합법적 개입이 가능한 세 가지 예외적인 경우(북한 당국이 한국군에 개입을 요청하는 경우, 북한의 무력공격에 대한 한국군의 개입, 유엔에 의한 개입)나 북한이 완전 무정부상태로 규정되는 경우에도 남한의 독자적 군사개입은 불가능하다. 현재 남북한이 처한 상황이 평화상태가 아니라 정전상태이며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전시 작전통제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엔군의 일원으로 개입할 수 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방위가 목적이므로 북한의 선제공격이 없는 상황에서 한미연합군이 북한에 진출하는 데는 법적인 문제가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조약으로 북한이 완전 무정부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국이 앞서 설명한 제약을 극복하고 단독으로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전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개입한다는 명분을 축적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 남한 근로자의 북한 주재를 적극 추진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북한이 무력도발하지 않는 상황에서 남한의 개입이 가능한 경우는 인도적인 차원의 개입과 자국민 보호 차원의 개입뿐이다. 이 가운데 인도적인 개입은 오히려 주변국들의 개입을 부추길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외국민의 주재 비율이 낮은 북한의 현실을 감안하면, 남한 근로자를 다수 주재하도록 함으로써 북한 거주 외국인들 가운데 한국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경우, 자국민 보호 차원의 개입과 관련해 비교적 배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오래 전부터 북한 유사시 자국민 소개방안을 신중히 모색해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정부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또한 북한의 급변사태는 한민족의 문제이므로 민족자결권에 입각해 한국의 단독 개입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적극 전개해나갈 필요가 있다. 유엔과의 관계에서는 각각 독립된 주권국가지만 남북한 양자관계에서는 상호 독립주권국가로 승인한 적이 없으므로 국가간 관계가 아니라는 논지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남북한 사이에 각종 협정이 체결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투자보장협정과 같은 문서를 체결할 경우 이를 ‘남북기본합의서’에 기초한 부속합의서 형태로 체결하는 한편, 동시에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침으로써 ‘동서독 통일조약’과 같이 국제법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한은 양자의 관계를 ‘특수한 내부관계(special interim relationship)’로 규정한 바 있지만, 이 특수관계의 성격에 대해서는 명백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과 경제교류는 민족 내부간의 거래라는 점은 분명히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 남북관계는 한민족 차원의 관계라는 점을 인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한국 정부가 ‘남북기본합의서’를 조약화하려는 태도를 보일 경우 북한의 적극적인 반대할지라도 남한은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침으로써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북한을 조약화에 찬성하는 쪽으로 유도할 수 있다면 한국 정부의 민족자결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동시에 민족자결권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조약으로 인정하면 오히려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견해도 있다. 만약 조약으로 인정된다면 국제법에 선행하기 때문에 남한은 남북기본합의서 제2조의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에 따라 북한의 완전 무정부상태에도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 무정부상태가 조약체결 당사자인 국가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논리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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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행작업이 성사된다 해도 국제사회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한국 정부의 독자적 개입권을 인정할지는 미지수다. 북한의 변화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각국 입장에 따라 한국의 독자 개입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남한의 독자적 개입이 끝내 관철되지 못할 경우 주변국들의 개입은 어떻게 이뤄질 것이며, 그에 대비해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는 무엇일까.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주변국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보자. 최근 동북아지역에 대한 미국 중심의 단극 질서가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한계에 부딪치고 있음을 감안하면,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각국은 힘에 기초한 경쟁적 또는 일방적 개입보다 각국 사이의 협조적 개입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국제정치적 측면만 살펴볼 때 이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미국과 중국의 협조적 개입이다. 일본의 경우 미일동맹의 틀에 묶여 있어 북한의 급변사태에 제한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유럽 확대와 국내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동북아지역의 새로운 세력균형질서는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축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다른 축으로 형성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대한 유일한 견제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국은 북한의 급변사태에 미국의 독자적 개입을 제약할 것이다. 사실 북한의 급변사태는 동북아지역의 안정을 저해하고 미중간의 세력균형을 깰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너무나 첨예하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의 급변사태라는 ‘뜨거운 감자’ 앞에서 각국은 어느 일방이 먼저 손을 대기보다 상호협조를 통해 ‘식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중국의 일방적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급변사태를 맞은 북한 당국이 전통적 우호국가인 중국의 독자적인 개입을 요청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견제로 중국의 대규모 군사 개입은 어렵겠지만 합법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중간의 협조적 개입이 이뤄지려면 개입의 성격, 범위, 기간을 둘러싸고 흥정과 타협을 통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또한 양국 군대의 위상과 성향에서 나타나는 극명한 차이로 인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접경지역에 미군이 진주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중간의 협조적 개입은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는 가능한 유형으로 상정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제약요인이 많다.
유엔 다국적군 파견 가능성 높아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한국의 단독개입이 좌절될 경우 가장 유력한 국제사회의 개입 시나리오는 유엔에 의한 개입이다. 실제로 유엔은 소말리아, 르완다 등에서 발발한 내전에 개입해왔으며, 유엔헌장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폭넓게 해석하고 활동하는 추세에 있다. 더욱이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유엔의 개입은 미중간의 협조적 개입이 가진 문제점을 보완한다. 우선 유엔은 평화유지활동(PKO·Peace-Keeping Operations)과 같은 제도화된 개입방식과 개입규범을 보유해 별다른 장애물 없이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다. 더욱이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모든 회원국에 개방돼 있고, 유엔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미군의 주둔에 대한 중국의 반대나 미군 주둔에 따른 중국군과의 마찰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러나 평화유지군(PKF·Peace-Keeping Forces)의 파견은 국제법상 분쟁지역 정부나 지역내 관련 당사자(the other parties involved)의 요청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유엔이 무력을 동원해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인 다국적군은 평화유지군과 달리 분쟁지역 정부나 관련 당사자의 공식적인 요청이 없더라도 개입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는 6·25전쟁이나 이라크사태처럼 ‘선제공격’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유엔 안보리가 북한이 보유한 대량살상무기 통제불능상태의 국제적 위험성을 주목해 군사적인 강제조치로 다국적군 파견을 결정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다. 유엔에서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동북아지역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의 참여가 관건이다. 다국적군의 지휘책임을 미군이 담당할 경우 중국이 반대할 가능성이 있지만, 유엔 차원의 개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전개가 한국 입장에서 그리 반가운 것이 못 된다는 점이다. 주변국들이 북한 급변사태를 완전 무정부상태로 규정할 경우 이는 주변국의 개입을 국제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가 주변국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또한 완전 무정부상태로 규정돼 유엔이 개입할 경우 신탁통치체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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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난방 개입’ 막으려면 따라서 한국 정부는 북한에서 특정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국제사회가 이 상황을 완전 무정부상태로 규정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일차적으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불완전 무정부상태에서는 정통 정부가 명백히 존재하므로 국가 소멸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은 여전히 유엔 회원국의 자격을 보유하게 되어 신탁통치 적용 대상이 될 수 없다. 우선 주변국이 유엔을 거치지 않고 개입하는 경우와 관련한 대책을 살펴보자. 이 경우 정부는 무엇보다 미국과 사전협의를 통해 ‘북한 급변사태시 가이드라인’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미연합사의 역할과 기능 등을 포함하는 한미공조의 지침서로 활용돼야 한다. 이를 통해 미국이 독자적으로 북한에 개입하는 상황을 방지함으로써 미국의 개입을 빌미로 중국이 개입할 명분을 제거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이 개입할 때는 반드시 한국과 사전협의를 거치고 한국이 필히 동참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킴으로써 한국 배제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적 대책과 더불어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해 주변국들이 이를 완전 무정부상태가 아닌 불완전 무정부상태로 규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북한지역에 기존 정부에 대적하는 조직적인 당국이 존재(existence of rival organized authorities)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명백히 인식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3국을 통해 특정 반도단체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도단체에 대한 지원은 국제법에 저촉되는 사안이므로 공식화할 수는 없으며, 특히 1개 반도단체만을 지원하기보다는 만약을 대비해 복수의 반도단체를 선택해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북한 당국의 요청으로 중국이 개입할 경우에 대비해 정부는 북한의 대중(對中) 식량 및 원유의존도를 떨어뜨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북 식량 및 유휴 에너지 지원을 증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이 중국 외교정책의 핵심사안인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이미 지지했음을 강조해 중국도 ‘하나의 한국’ 원칙을 지지해줄 것을 중국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만약 북한 급변사태시 중국의 개입이 기정사실이 될 경우 북한지역의 시장경제화가 중국에 경제적 이익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북한지역 재건 프로그램’을 미리 중국 정부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유엔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이러한 상황전개는 분명 주변국의 일방적 혹은 협조적 개입 시나리오보다 한반도 통일에 유리하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단독 개입 징후가 나타날 경우 한국 정부는 유엔에 의한 개입으로 방향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은 5개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적절히 활용해서 미국의 단독 개입이 예상될 경우에는 중국의 견제를 부추기고, 중국의 단독 개입이 예상될 경우에는 미국의 견제를 요청함으로써 결국 유엔의 개입에 의한 해결이 관련 당사국들에게 공동의 이익이 있음을 주지시켜야 한다.
유엔이 북한에 개입한다면 또한 안보리의 결정이 지연되거나 교착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는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안(국제연합군의 북진 인가)에 의거해 안보리의 새로운 결의가 없어도 북한의 내란에 개입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현재의 국제연합군은 사실상 한미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국과 러시아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므로 이들을 연합군에 동참시키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자위대의 직접 군사활동을 배제한 후방 지원 차원에서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엔이 강대국의 주도권 아래 놓여 있음을 감안하면 유엔 차원의 개입이 결정된 이후에도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해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우선 다국적군과 평화유지군 가운데 어느 형태로 개입할 것이냐의 문제를 보면, 한국 입장에서는 평화유지군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평화유지활동은 유엔의 직접적인 명령을 통해 수행되지만 다국적군의 활동은 대개 일국의 주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칫 일국의 영향력이 극대화하거나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분쟁지역 정부나 관련 당사자의 요청이 전제돼야 한다. 따라서 북한지역에 친(親)남한 혹은 친서방적 반도단체를 미리 수립하거나 기존의 단체를 이러한 성향으로 유도해뒀다가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유엔에 평화유지군을 요청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작업도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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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업이 효과를 거둬 안보리가 북한지역에 대한 평화유지군 파견을 결의하면 한국 정부는 이에 적극 참여의사를 밝혀야 하며, 인원과 장비제공에서 가능한 한 중심역할을 맡아야 한다. 특히 유엔 평화유지단의 기능 중에는 분쟁지역의 자유로운 선거 실시와 관계 있는 지원(Electoral Assistance)이 포함돼 있다. 이 선거는 향후 북한의 민주화나 남북한의 정치통합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선거감시단에 최대한 한국인들을 많이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선거법에 대한 자문, 선거조직, 선거감시 등에도 한국 자문단과 감시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선거제도와 이질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중 견제할 레버리지 급변사태를 관리하는 문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안의 성격이 급박한 만큼 그 처리 역시 신속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북한의 급변사태 발생에 대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라는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로 유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국들이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이나 현실상의 국제정치 논리는 보여주고 있다. 둘째, 이러한 노력이 배타적이거나 고립적으로 이뤄지면 오히려 주변국들의 개입을 부추기는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한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 나라가 독자적이고 주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기존 한미공조체제의 틀 속에서 대비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현실적인 영향력을 감안하여 중국과의 관계강화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미국이나 중국이 독자적으로 사태를 주도하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는 레버리지(leverage)를 확보해야 한다. 셋째,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이를 장차 한반도 통일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국제법이 국제정치를 규정하는 틀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국제법을 이용해 한반도 통일에 불리한 주변국의 개입을 제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법의 틈을 이용해 한반도 통일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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