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ADD 무기개발 3총사의 핵·미사일 개발 비화

醉月 2008. 7. 30. 08:06
ADD 무기개발 3총사의 핵·미사일 개발 비화 “박정희 정권 핵 개발은 헛소문… 설계 도면만 그리다 말았다”
수경사 로켓포 분해해 역설계로 국산 로켓포 개발
박정희, 미국의 미사일 개발중단 압력에 굴하지 않아
美 무기회사 파견 때 옷 속에 자료 숨기고 나와 복사
美 감시 피하려 한강변 아파트서 미사일 연구
전두환, 대미관계 개선 위해 미사일 개발팀 해체

1978년 9월26일 한국 최초의 지대지(地對地)미사일 ‘백곰’의 시험발사를 지켜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북한의 대포동, 노동미사일에 온 국민이 떠는 걸 보며 미사일 개발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정말 착잡했습니다. 한국은 이미 1970년대에 사거리 180km짜리 미사일을 개발했어요. (1970년대에) 한국은 미사일 강국으로 떠오를 만한 잠재력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미사일 만드는 과학자를 그토록 많이 숙청하지만 않았어도, 수백만달러를 들여 외국에서 핵심기술을 배워온 인재를 1000명씩이나 잘라버리지만 않았어도…. 그들에게 계속 연구·개발하라고 했다면 오늘날 대포동미사일을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한국 미사일 개발의 산 증인인 구상회 박사의 탄식이다. 해군 출신인 그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요원으로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극비리에 추진돼 시험·발사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대지(地對地)미사일인 ‘백곰’의 시험평가를 책임졌던 연구원이다.

‘백곰’은 ADD가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NH) 미사일을 모체로 1974년 개발에 착수해 4년 만에 시험·발사에 성공한 한국형 중거리 유도탄이다. 나이키미사일을 모방하긴 했지만 외형만 같을 뿐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기체, 추진기관 등을 전면 개량해 개발한 것이 특징이다.

“미사일엔 크루즈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이 있어요. 크루즈미사일은 순항 미사일입니다. 로켓이 아니라 비행기 엔진을 사용하죠. 바다에선 해면을 따라, 육지에선 지면을 따라 저고도로 날아가는 미사일이에요. 반면 탄도미사일은 로켓의 추진력으로 대기권에서 탄도를 그리며 목표를 향해 날아가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사거리가 최단 5000km 이상인데, 메가톤급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죠. 북한의 대포동 2호가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속합니다.”

미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현재 북한은 사거리 1000~1500㎞인 노동미사일 200~300기, 사거리 300~ 500㎞인 스커드미사일 600여 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우리 군과 ADD는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정밀 타격할 수 있는 크루즈미사일 개발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사거리 500km에 이른다는 이 미사일의 이름은 ‘천룡(天龍)’. 이에 대해 미사일 전문가들은 “사거리 180km인 중거리 미사일 ‘백곰’을 개발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500km짜리 크루즈미사일을 개발한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미사일 개발뿐만 아니라 핵무기 제조 목적으로 고폭실험을 실시했다. 파키스탄의 핵 전문가 칸 박사의 밀거래 조직으로부터 핵탄두 설계기술을 넘겨받아 1990년대부터 핵탄두를 노동미사일에 장착하는 수준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이 일본 영토에 도달할 수 있는 중거리 노동미사일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넘겨받은 설계기술로 만든 핵탄두를 장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 박사는 “북한이 우리보다 늦게 유도탄 개발에 착수했음에도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미사일을 보유하게 된 건 국가의 절대적 지원 아래 꾸준히 개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33번째 가입국인 한국은 미사일 개발에 제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MTCR 가입국이 되면 탄두 무게 500kg, 사거리 300km 이상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없다. 한마디로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은 꿈도 꿀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 과학자들이 개발할 수 있는 미사일 종류는 과학연구용 발사체나 순항 미사일 정도다.

   

KIST 연구원 출신인 이경서 박사. 현 단암전자 회장.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공군장교 출신의 홍재학 박사. 핵물리학을 전공한 해군장교 출신의 구상회 박사.(외쪽부터 차례로)

구 박사는 “현대전의 승패는 미사일 보유 수준에 달렸다”면서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만큼 미사일 개발을 적극 지원한 대통령이 없다”고 박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미사일 개발이 지지부진한 것은 정권마다 안보관(觀)이 다르고 미국이 사거리를 제한하는 등 독자 개발을 막았기 때문이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방위산업 지원도 들쭉날쭉했다.

때마침 한 일간지에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가 실렸다. 박 전 대통령이 은밀히 추진하던 핵무기 프로그램을 신군부가 이끄는 보안사령부가 폐기했다는 내용이다.

‘1979년 12월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바로 이틀 전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은 갑자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전 대덕으로 향했다. 대덕의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말기에 한미간 갈등의 불씨가 됐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의 산실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끌던 국군보안사령부가 국방과학연구소측에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갑작스러운 요구로 혼란에 빠져 있던 연구원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의 이런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며칠 뒤 12·12 쿠데타 성공 이후 보안사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던 핵무기 관련 자료와 장비를 모두 가져가 폐기하고 말았다.’(‘동아일보’ 2006년 10월23일자)

“중공업 육성하면 탱크 만들 수 있다”

기자는 수소문 끝에 ‘그때 그 시절’ 얘기를 소상하게 아는 세 명의 과학자를 만났다. 1970년대 ADD 3총사로 불리던 이경서(70), 홍재학(74), 구상회(71) 박사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시한 긴급 무기개발사업 ‘번개’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다.

홍재학 박사는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공군장교 출신, 이경서 박사는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원, 구상회 박사는 핵물리학을 전공한 해군장교 출신이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1970년대 초 ADD가 설립됐기 때문. ADD는 1970년 8월6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탄생한 국립 연구기관이다. 당시 ADD의 설립 배경과 상황에 대해 구상회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정책’을 실현하자는 취지였어요. 1960년대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해 군비(軍備)를 증강했습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같은 해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죠. 북한의 무력도발이 격해지던 시기였어요. 1970년에는 닉슨 독트린 발표 후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이런 국내외 정세에 ‘아차’ 싶었던 거죠.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겁니다. 자주국방이란 게 입으로 부르짖는다고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당시 우리 군에는 지대지유도탄이 단 한 발도 없었어요. 쏘면 포탄처럼 날아가는 비(非)유도 로켓탄인 어니스트 존(Honest John) 1개 대대가 배치돼 있을 정도로 비참했어요. 우리 기술로는 소총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절이었죠.”

‘번개사업’으로 이름붙여진 ADD의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에는 이경서 구상회 홍재학 박사 외에도 군 출신 공학박사와 민간 과학자가 많이 참여했다.

당시 ‘백곰’ 미사일 개발의 총괄책임자이던 이경서 박사는 군수산업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무기 국산화 의지가 대단했어요. 제가 KIST에 있을 때 박 대통령이 상공부 장관에게 ‘기계공업을 육성하라’고 지시했어요. 상공부 장관은 이 프로젝트를 KIST에 내려보냈고, 제가 ‘기계공업 육성방안’을 작성해 청와대에 들어가 브리핑을 했어요. 그때 제가 ‘조선(造船)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브리핑 차트 마지막에 ‘중공업=군수산업’이라고 썼어요. 순간, 박 대통령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라고요. 제가 중공업을 육성하면 탱크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비료공장에서 화약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요.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OK했어요.”

   

포병 출신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1978년 10월1일 건군 30돌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한국형 중거리 미사일의 위용을 과시하며 시가행진을 하는 국군장병들.

무기 국산화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ADD는 연구부서를 총포, 기동, 탄약, 함정, 로켓 분야로 나누고 무기개발에 착수해 소총, 기관총, 수류탄, 지뢰, 60㎜ 박격포, 나아가 중거리 유도탄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올렸다. 박 대통령은 ADD에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19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긴급 지시한 중차대한 사업인 만큼 청와대에서 직접 감독하고 통제했다. 당시 오원철 제2경제수석비서관이 수시로 개발실을 방문해 사업 진행상황을 청와대에 직접 보고했다. ‘매일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는 청와대의 독촉에 과학자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 쫓기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초창기 로켓포 개발을 책임진 구상회 박사는 당시 기술낙후의 실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70년 초엔 우리나라에 기계공업이란 게 아예 없었어요. 농기계를 겨우 생산하는 수준이었어요. 공업이라고 해봐야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못 만들던 시절이었죠. 미국의 지원으로 경남 양산에 짓고 있던 M-16소총 공장도 언제 완공될지 미지수였어요. 박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라 로켓포, 유도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어요. 하지만 유도탄은 노하우와 시설과 인원이 다 갖춰져 있어도 만드는 데 7년 이상 걸립니다. 그때 우리나라엔 로켓을 연구하는 곳이 두 곳 있었어요. 공군사관학교와 KIST였습니다. 지름 25cm에 길이 4~5m인 로켓을 쏘았죠.

(박 대통령이) ‘로켓포를 국산화하라’고 했지만 연구원 중에 경험자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교과서에서만 봤지 실제로 만든 적은 없던 거죠. 도면과 기술 자료가 전혀 없었어요. 로켓포 도면을 구할 길이 없어 육군 수경사(현 수방사)에서 M20 A1, M20 B1포를 1문씩 빌려와 분해해 부품을 스케치하고 치수를 정밀 측정해 도면을 작성했어요. 역(逆)설계를 한 거죠.”

한편 1972년 ADD엔 두 가지 희망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미 국방부가 기술지원팀을 파견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군 출신이 소장직에서 물러나고 과학자 출신이 소장에 임명된 것.

KIST 소장이던 심문택 박사가 ADD 소장에 임명되자 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KIST 핵심 연구원 이경서 박사를 비롯해 국내외 우수한 과학자들이 KIST에서 나와 ADD 무기개발팀에 합류했다. 미사일 개발의 인프라가 구색을 갖추게 된 것이다.

꿈은 결코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구상회 박사는 “(연구원들의) 열의가 대단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기술력으로 미사일 개발은 도저히 불가능했다”면서 미국 정부를 힘들게 설득해 기술을 배워온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유도탄은 추진기관, 비행체, 유도조종장치, 탄두로 나뉩니다. 우리가 모방하려던 나이키 허큘리스 유도탄을 개발한 제조회사가 미국의 맥도널 더글러스(MD)사였어요. 그땐 한국에 유도탄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죠. 미사일의 성격이라도 알아야 하는데 알 길이 없었어요. MD사에서 기술을 도입하려면 미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어요.

당시 이경서 박사가 맥도널 더글러스와 교섭해 미 정부의 승인을 받는다는 전제로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허큘리스 유도탄의 성능을 개량하는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연구하자’는 취지였죠. 그런데 이를 미 정부가 알아채고 주한미군사령관과 미 국방부 안보담당차관보까지 나서서 개발중단을 요구하더군요. 박 대통령도 상당한 압력을 받았어요. 하지만 (박 대통령은) 미국의 중단 압력에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백곰’ 개발은 기적”

구 박사는 미국 정부의 반대를 극복한 우리측 논리를 설명했다.

“우리측은 미 정부에 ‘허큘리스 유도탄을 개량해 쓰겠다. 향후 한국군이 허큘리스 유도탄을 정비하고 성능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기술 습득이 절대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득했어요. 박 대통령이 강력하게 밀고 나갔죠. 당시 미국은 허큘리스를 신형 유도탄인 패트리어트(Patriot)로 대체하려는 분위기였어요. 우리가 개량해 쓰겠다는 말이 씨알이 먹힌 거죠.

   

1975년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사열하는 박정희 대통령. 옆은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영부인 노릇을 하던 박근혜씨. 박 대통령은 국산 미사일 개발에 대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 정부는 ‘한국군이 보유한 허큘리스 유도탄의 사거리를 180km로 제한하고 탄두 무게 1000파운드(453.6kg)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해한다’는 의견을 주한미군사령관 명의로 ADD에 보내왔더라고요. 하지만 한국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미 정부의 거부감이 완강해 각종 시험에 필요한 장비를 미국에서 도입하기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당시 맥도널 더글러스사와의 교섭을 도맡았던 이경서 박사는 “‘백곰’을 개발한 건 미라클(miracle·기적)이었다”면서 “여기엔 운이 따랐다”고 회고했다.

“운이 좋았어요. 1970년대 초 미국의 방위산업이 하향곡선을 그렸어요. 평화가 오래 지속돼 미국의 수많은 군수산업체가 부도를 냈죠. 맥도널 더글러스사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한국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한 거죠. 덕분에 우리측 과학자들이 6개월 동안 현지에서 기술을 배워올 수 있었어요. 기술도 습득하고 자료도 많이 챙겨왔어요. 이제야 말인데, (MD사에 있을 때) 밤에 숙소로 돌아올 때 자료를 속옷 속에 숨겨 나와 복사해놓고 다음날 갖다놓는 식으로 기술을 훔치다시피 했어요(웃음).”

이 박사의 얘기가 계속됐다.

“두 번째 행운이 추진체였죠. 추진체 개발이 불가능했어요. 추진제 만드는 미국 회사와 접촉해 기술을 사려 했지만 국무성의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요. 유도탄 개발에서 가장 힘든 게 추진체 만드는 기계를 확보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프랑스와 접촉했어요. 기술과 기계를 구입하는 데 2000만~3000만달러를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던 차에 미국 LA의 오퍼상을 통해 미국에 있는 꽤 큰 추진체 공장이 폐쇄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공대공(空對空)유도탄을 만드는 공장이었어요. 공장주가 ‘기술은 이전해주지 않는 조건으로 팔겠다’고 해서 사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백곰’ 미사일은 완성됐다. 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수석의 회고록에는 박 대통령이 ‘백곰’의 시험발사 성공에 대해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전했다.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시험장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 유도무기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된 지 불과 4년 동안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해 금일 역사적인 시험발사가 있었다. 대전차 로켓, 다연장 로켓, 중거리 로켓, 장거리 유도탄 네 종목이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의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1978년 9월26일)’

홍재학, 이경서, 구상회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백곰’을 개발할 당시 대미(對美) 보안 문제로 가족과 헤어져 생활했고 사생활이 제한됐다. 연구는 안가(安家)에서 진행됐는데, 한강변에 위치한 평범한 아파트였다.

‘절대로 커튼 열지 말라’

“보안사에서 마련해줬어요. 당시 심문택 박사(ADD 소장)는 유도탄 개발계획이 나오자 과학자 아내들을 불러놓고 ‘여러분의 남편들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해외출장을 떠나는데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 일절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가족한테 거짓말을 한 거죠. (과학자들은) 이산가족이 돼서 살 수밖에 없었어요. 보안 때문에 밤에 보따리를 싸서 안가로 이동해야 했어요. 아파트에 도착하니 보안사 직원이 기다렸다가 주의사항을 말해주더군요.”

보안사 직원이 당부한 주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24시간 창문을 닫고 있을 것. 절대 커튼을 열어젖히지 말 것. 낮에 바깥출입을 하지 말 것, 전화는 업무에 국한돼 지정한 사람만 쓸 것.’

안가에서는 구상회, 이경서, 홍재학 박사 외에 현재 ADD 소장인 안동만 박사가 같이 생활했다. 구상회 박사는 안가생활에 대해 “여름엔 더위 탓에 다들 땀띠가 나서 무척 고생했다”면서 “미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당시 미국의 첩보위성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수립된 키홀(keyhole) 프로그램에 따라 144개 위성을 발사해 소련, 중국, 쿠바 등 적성국가 상공에서 80만종의 사진을 촬영했고, 1970년대엔 러시아와 중국이 보유한 대륙간 탄도탄과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DSP(방어지원 프로그램)에 적외선 센서를 장착했을 정도였다.

   

홍 박사는 “(박 대통령은) 무기개발 과학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고 회고했다.

“특별한 대우였어요. 대학교수의 3배가 넘는 월급을 줬고, 사택으로 아파트도 무상 지원했어요. 선임연구원이면 부교수급인데, 차량에 군 장성 차량과 동일하게 세제 혜택을 부여했죠. 젊은 과학자들에겐 병역특혜를 줬습니다. 당시 병역특혜는 KIST와 국과연에서 일하는 과학자에게만 주어졌어요. 외국으로 출장 갈 때도 까다롭게 심의를 받지 않았어요. 비밀작업을 수행하려면 군사비밀 취급인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과학자가 외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이 없었어요. 일반인도 신원조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는데, 주민등록증 없는 사람을 신원 조회하려니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까. 그런데 초고속으로 비밀취급 인가를 받게 해줬어요.”

미국이 한국의 유도탄 개발을 그토록 반대한 것은 핵무기 개발 가능성 때문이었다. 장거리 유도탄 개발은 곧 핵탄두 개발을 뜻한다. 군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사거리 100km가 넘는 유도탄의 경우 핵이나 화학탄두를 장착하지 않으면 비용·효과면에서 의미가 없다”는 견해가 많다.

이경서 박사는 “1970년대에 박 대통령의 지시로 비밀리에 핵무기 연구에 착수했지만, 성과는 없었다”며 핵 개발에 대해 부정적인 고백을 했다.

“핵 개발, 우리 현실에선 참 힘들어요. 비밀리에 해야 하고 극히 몇 사람만 알아야 하잖아요. 또 검증할 방법이 없어요. ADD에서도 했지만 내놓을 만한 결과가 없었어요. (핵 개발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하드웨어가 없었어요. 플루토늄 농축액을 만드는 기폭장치 설계가 참 어려워요. 서류상으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이 모르게) 숨어서 해야 하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예산만 축내고 성과 전혀 없어”

이 박사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의 핵 개발은 세간의 추측이나 소문과 달리 실체가 없는 셈이다. 설계도면만 그리다 끝냈다는 것이다.

“핵 개발 사기꾼이 참 많았어요. 미국에서 만들어주겠다고 연락하는 사람들, 다 사기꾼이었어요. 우라늄을 농축하려면 원심분리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밀실에서 만듭니까. 또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어디서 합니까. 위에서 하라고 하니 모양만 갖추고 예산만 축냈어요. 결실이 전혀 없었어요.”

이 박사의 얘기가 계속됐다.

“핵무기 만드는 거, 대통령들은 다 관심 있었어요. 이승만 대통령 땐 ‘제주도를 팔아서라도 핵무기를 개발하라’고 해서 한때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어요. 또 한 과학자가 일본에서 핵무기 설계도를 구했다며 진해 앞바다 섬에서 모의실험을 한 적도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배터리 설계도면이었대요. 핵실험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사막지대라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박 대통령에게 ‘핵 개발하겠다’면서 돈만 받아썼지, 성과는 전혀 없었어요.”

이 박사는 “핵 개발 시도로 미국과 갈등이 증폭된 건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미국은 박 대통령을 보면서 ‘한국도 북한처럼 (외부와) 차단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나라’라고 간주했어요. 당시만 해도 미국이 맘만 먹으면 한국을 얼마든지 고립시킬 수 있었거든요. 전쟁이 끝나고 남쪽은 정말 가난했잖아요. 1960년대만 해도 북한에 전기가 더 풍부했어요. (한국은) 전쟁 전까지 압록강댐 수력발전소에 전력의 60~70%를 의존했습니다. 전쟁 후 전기 공급이 끊기자 촛불 켜고 다시 일어난 거예요.”

홍재학, 이경서, 구상회 박사는 1980년대를 기억하면서 “한순간 영웅이 됐다가 한순간 죄인이 됐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백곰’보다 나은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꿈이 전두환 정권 출범 후 불어닥친 과학자 숙청바람에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는 한국의 미사일 개발사(史)에 크나큰 획을 그었다. 특히 ADD의 유도탄 개발팀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이유는, 전두환 정권의 전력증강정책이 무기 개발보다는 무기 도입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던 방위산업을 국방부와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에 위임했고, 방위산업을 이끌던 청와대 제2경제비서실을 폐지했다. 때마침 발생한 석유파동은 방위산업체 정리의 계기가 됐다. 유도탄 개발팀은 조직이 크게 축소돼 서울의 연구소 본부와 서울사업단이 폐쇄되고 대전기계창으로 통합됐다. 또한 지대지유도탄 개발이 중단되고 백곰의 후속사업인 K2, K3, K5유도탄 개발계획이 전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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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미사일 주권’ 포기

아울러 두 차례에 걸쳐 ADD 소속 과학자 1000여 명이 숙청됐는데, 제일 먼저 숙청된 과학자는 당시 대전기계창장 이경서 박사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딱 군인이었어요. 그분과 12시간을 같이 지내봤는데 보안사령관으로 발령받자마자 ADD를 방문했어요. 박 대통령이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이니 한번 와본 거죠. ‘유도탄 개발,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더군요. 그러다 12·12사건 후 국방부 장관과 같이 왔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전두환 사령관 뒤에 권총을 양쪽에 찬 부관이 버티고 서 있던 광경입니다. 국방부 장관은 혼자고요. 또 기계창장과 소장이 국방부 장관한테만 보고하는 사안이 있었는데, 전두환 사령관이 듣기를 원했어요. 그때도 부관이 권총을 거두지 않았어요. 장관이 별 두 개한테 꾸벅꾸벅하면서 쩔쩔매는 걸 보니 참 우습더군요.”

이경서 박사는 “전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수차례 ‘1978년 9월26일 공개 시험한 ‘백곰’ 유도탄은 국산이 아니라 미제 NH유도탄을 페인트칠로 위장한 것이다. ADD는 만들지도 못할 유도탄을 개발하면서 수천억원의 예산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기만했다’고 했다”면서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면 무기를 개발해야 하고, 특히 유도탄 개발은 정밀무기체계의 핵심인데,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아침에 미사일 개발을 중단했다”고 개탄했다.

이 박사는 “미사일 개발팀을 해체한 후 1년도 안 돼 아웅산 사건이 터지자 유도탄 개발을 다시 하기 위해 인재를 모으려 했지만, 이미 상당수 과학자가 한국을 떠났거나 대학으로 간 상태였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구상회 박사만 ADD에 남았고, 홍재학 박사는 단국대 교수로, 이경서 박사는 단암전자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곰’ 미사일의 실전형인 ‘현무’가 탄생한 것은 이로부터 4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의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방위산업을 맡았던 오원철씨는 ‘신동아’ 1996년 1월호 인터뷰를 통해 ‘유도탄 개발, 전두환과 미국이 막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80년 초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미사일 개발에 대해 ‘항복선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미국측에 넘겼다는 것. 그러다 북한이 스커드와 노동미사일 등을 실전배치한 1990년대에 이르러 미국과 다시 협상해 ‘사거리 300km, 탄두 무게 500kg 이하’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미사일 주권’을 갖고 있지 못한 셈이다.

“무기 만들어야 힘 있는 나라”

이 박사는 당시 박 대통령의 무기개발에 대한 소신을 이렇게 회고했다.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에 대한 철학이 분명했어요. ADD에서는 일반 무기를 만들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전쟁을 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라는 뜻이었죠. ‘전쟁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무기는 급하니까 빨리 사 와라. ADD는 살 수 없는 무기만 개발하라’고 했죠. ‘남이 주지 않는 것’ ‘전쟁 억제하는 것’만 개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간혹 소장이 이것도 저것도 개발하겠다고 적어서 보고하면 사인을 하면서 야단을 쳤어요. 야단을 쳐놓고는 미안해하면서 ‘이건 내가 봤다는 사인이야’ 하고 사인해주던 분이에요.”

이경서, 구상회, 홍재학 세 사람은 저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공통된 회고 중 하나.

“1969년에 350만명의 향토예비군을 만들었잖아요. (향토예비군을) 무장시키려 하자 미국에서 난리가 났어요. 미국은 남한의 군사력이 세지는 것을 견제했거든요.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무기를 사오든가 무상으로 받아오든가 해야 했는데, 박 대통령은 ‘미제 무기로 무장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는 무기를 국산화하자고 주창했어요.

북한은 이미 1960년대에 자동소총을 만들었어요. 탱크를 만들고 대포도 만드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도 미국이 한국에 대해 ‘방위산업, 육성할 필요 없다. 무기는 주는 것만 쓰라’고 하니 박 대통령이 열 받은 거죠. 우리가 좀더 센 무기를 갖고 싶다고 하면 미국은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미국에서 주는 무기는 다 구닥다리라 자주국방하려면 우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ADD 초대 소장 신응균 장군은 박 대통령의 군 선배였어요. (박 대통령으로부터) ‘무기를 국산화하라’는 지시를 받은 신 소장이 모 대학 교수와 얘기해보고는 ‘기관총 만드는 데 10년 걸린다’고 보고했다가 날벼락을 맞았어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박 대통령의 질책에 충격을 받은 신 소장은 입원까지 했어요. 신경성으로 이가 다 빠져버렸죠.

박 대통령은 틈날 때마다 ADD를 방문했어요. 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죠. 또 시험장, 기계창 건설현장을 둘러볼 땐 일꾼들이 먹는 임시식당에 들러 ‘밥 한 그릇 부탁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가져오세요’라고 했어요. 대통령이 불쑥 들어와서 밥 달라고 하니 다들 기절초풍했지요. 그분은 밥 한 그릇에 숭늉을 뚝딱 비우면서 그저 ‘무기 만들어야 힘 있는 나라가 된다’고만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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