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봄이 머무는 '인문의 풍경' 청산도

醉月 2021. 4. 24. 20:02
청산도 당리 마을 언덕을 따라 ‘청산도 슬로길’을 걷던 관광객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청산도의 낭만적인 봄 풍경은 가득 피어난 노란 유채꽃과 구들장 논의 초록 보리밭, 그리고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가장 아름다운 봄 풍경을 가진 섬, 전남 완도의 청산도에 다녀왔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섬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피어난 노란 유채꽃밭과 물결치는 청보리밭의 푸르름은 여전하더군요. 한적한 봄날의 청산도에서는 몸도 마음도 느긋해졌습니다.

여유가 주어지자 바삐 다닐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게 된 것이 청산도의 ‘구들장 논’이었습니다. 미처 몰랐습니다만, 청산도의 유채꽃도, 청보리도 다 구들장 논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고래를 만들고 구들장을 놓듯 하나하나 돌을 쌓아 400년 전부터 만들었다는 구들장 논은 여태 어떻게 지켜져 온 것일까요. 그리고 구들장 논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섬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영화가 찾아낸 섬의 풍경

먼바다의 한 점 낙도였던 청산도를 하루아침에 이름난 섬으로 만든 건 이론의 여지 없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다. 1993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단관 극장에서 개봉됐음에도 1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 복합상영관 시대에는 1000만 관객 영화도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100만 관객’은 사상 초유의 기념비적인 흥행기록이었다. 그때 관객 100만은 지금의 1000만 관객 이상이었다. ‘서편제가 한국영화사를 다시 썼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영화 ‘서편제’에는 한국영화사에 손꼽히는 명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의 배경이 바로 청산도다. 아버지 유봉(김명곤)이 아들 동호(김규철)의 장단에 맞춰 부르는 송화(오정해)의 진도 아리랑 가락에 덩실덩실 춤을 추던 장면의 배경이 청산도의 보리밭 돌담길이었다. 영화는 청산도를 인문적 배경이 아니라 회화적 배경으로 가져다 썼지만, 출렁이는 보리밭 사이로 굽이굽이 굽은 돌담길에 우리 가락을 얹은 이 장면은 단순히 ‘좋은 화면’이나 ‘훌륭한 경치’ 차원을 넘었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일찍이 느껴본 적 없었던 한국적 미감이 주는 감동을 느꼈다. 지금이야 영화 제작 이전부터 홍보 효과를 노린 지자체의 장소 협찬이나 금전적 지원이 이뤄지고,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 촬영지에 관광객이 몰리는 게 당연한 일이 됐지만, 그때만 해도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을 때였다. 그럼에도 영화 속 청산도의 기억은 강렬했다.

청산도를 세상에 알린 게 ‘서편제’였다면, 봄이면 행락객들이 찾아드는 관광 명소로 거듭나게 된 계기를 만든 게 2006년 방영된 TV 드라마 ‘봄의 왈츠’였다. 방송사에서는 본래 만재도에다 오픈세트장을 지으려 했는데, 배 시간이 길고 결항이 잦아 곤란을 겪다가 완도군의 제안으로 세트장을 청산도로 옮겼다. 떠들썩한 화제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서정적 영상미가 듬뿍 담긴 드라마가 방영되자 청산도에 대한 관심도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듬해 청산도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됐고, 그해 아시아에서 최초로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섬 곳곳에 꽃길이 놓이고, 걷는 길이 만들어지고, 조형물이 세워졌으며 청산도는 내로라하는 여행지가 됐다. 봄이면 청산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기 위해 행락객들이 줄을 섰고, 섬은 아예 버스째 배를 타고 들어온 단체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인구 2000명이 겨우 넘는 섬에 한 해 37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왔다. 여기까지가 2년 전, 그러니까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얘기다.


구들돌을 놓듯 수로 위에다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만든 청산도의 구들장 논. 사진 위는 계단식으로 만든 양지리의 구들장 논이고, 아래는 찰랑거리는 물결무늬처럼 지은 상서리의 구들장 논이다.


# 밭담이 보여주는 곡선의 풍경

청산도의 매력이라면 보리밭과 유채꽃이 어우러지는 봄날의 섬 경관이다. 청산도 도청항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면 버스를 타든, 배에 싣고 온 차를 운전해서든 도락리를 거쳐 당리마을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 구간에 노란 유채꽃과 초록의 청보리밭이 가득 펼쳐진다. 밭둑을 따라 이어지는 유채꽃과 청보리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선물 같은 봄 풍경은 가슴이 두근두근해질 정도로 근사하다. 대개 이름난 관광지는 사진으로 보는 경관이 훨씬 더 훌륭해 실제로 가서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청산도만큼은 그렇지 않다. 사진보다 직접 가서 보는 경관이 오히려 더 근사하다. 시야를 꽉 채우는 풍경의 규모 때문이다. 이즈음에는 코로나19로 섬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훨씬 더 한가롭게 섬을 거닐며 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청산도 여행의 중심은 단연 도락리와 당리마을 사이의 구릉이다. 발아래로 유채꽃과 청보리가 물결치고 그 너머로 도락리 해안가의 소나무가 늘어서 있으며, 그 뒤로는 푸른 바다와 일대의 섬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구릉의 청보리밭에서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이 탄생했고, 드라마 ‘봄의 왈츠’의 세트장이 지어졌다.

희한한 건 이곳의 풍경이 ‘서편제’의 진도 아리랑 곡조와도, ‘봄의 왈츠’의 이국적인 서정과도 더없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 이쪽에서 보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 저쪽에서 보면 가장 이국적인 풍경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여기에 서면 모든 것이 비정형의 곡선이다. 집과 집의, 혹은 집과 길의 경계로 쌓은 돌담도, 밭과 길의 경계인 밭담도 모두 유려한 곡선이다. 직선이 효율이라면 곡선의 경관은 이야기를 품는다. 청산도의 여유 있는 곡선이 마음을 붙잡는 건 우리가 직선과 효율의 생활공간에 길들어졌기 때문이리라. 청산도의 아름다운 경관 사이로 구불구불 흘러가는 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살아가는 방식이나 태도, 혹은 속도까지 생각하게 된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청산도에 가면 우리가 가진 삶의 원형 같은 게 만져지는 까닭이다. 그저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 것. 청산도의 매력이 거기에 있다. 코로나19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해진 청산도에서는 이런 것들이 보인다.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지정된 상서리에는 돌담을 외벽으로 삼은 집이 여럿이다.


# 고되고 고된 섬에서의 삶

청산도의 이름은 본래 ‘선산도’였다. 선산(仙山). 곧 ‘신선의 산’이란 뜻이다. 경관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과거 청산도에서의 삶은 신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산도는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출몰하는 왜구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섬을 지키기 위해 섬사람들은 왜적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섬사람들이 왜적에게 늘 지기만 했던 건 아니다. 맨손에 돌팔매만으로 적을 크게 물리친 적도 있었다. 청산도 보적산의 ‘피내리고랑’이란 지명과 얽힌 이야기 한 토막. 왜적이 약탈을 위해 청산도로 대거 밀려오자, 섬사람들은 갯돌을 미리 보적산에 가져다 놓고 왜적을 산으로 유인한 뒤 섬멸했다. 그때 왜적의 피가 보적산 아래 계곡을 따라 고랑을 이루며 흘러내렸단다. ‘피내리고랑’이란 땅이름은 그때의 승전으로 새겨진 것이다.

지명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청산도 곳곳의 지명에서 섬사람들의 작명 센스가 돋보인다. 지형이 도끼 머리를 닮았다는 ‘도치머리’나 문의 형상을 한 ‘문바위’ 식의 지명이야 다른 데도 흔한 것. 그렇다면 이런 지명은 어떤가. ‘연애바탕’ ‘수철내강정’ ‘개빠진짝지’…. 연애바탕은 남녀가 연애하기 좋은 해안이고, 수철내강정은 수철이네가 빠져 죽은 곳이며, 개빠진짝지는 개가 빠져 죽은 해안이다. 지형이나 쓸모로 땅이름을 짓다가 그마저도 없으면 주민들의 이름이나 에피소드, 심지어 불의의 사고까지 가져다 지명으로 썼다. ‘복철네집’ ‘선이네강정’ ‘검수네넙’…. 이런 지명들이 다 그렇게 지어진 것들이다. 땅과 삶이 구분되지 않은 소박했던 낙도 시절의 이야기다.

청산도 사람들에게 땅은 섬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를 말해주는 징표 같은 것이다. 청산도에서 쌀 한 줌을 거두기 위해 바쳐야 하는 고된 노동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청산도에는 ‘구들장 논’이 있다. 말 그대로 ‘구들을 놓듯이’ 만들어낸 논이다.

청산도 땅은 온통 돌밭인 데다 비가 와도 금세 물이 빠진다. 그래서 만든 게 바로 구들장 논이다. 구들장 논은 겉으로 보면 산비탈에 일군 다랑논과 별다를 게 없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구들장 논은 바닥에 돌을 깔고 흙으로 다진 뒤 수로를 놓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고 흙으로 덮어 만든다. 수로를 만들고 그 위에다 구들돌을 올리고 흙을 채운 게 구들장 논이다. 돌을 깔고 그 위를 30㎝쯤 흙으로 덮어 마치 거대한 화분처럼 만든 논에다 농사를 짓는다는 얘기다.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 돌 투성 땅이라 물이 쉽게 빠져나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비탈져 흙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막았다. 논에 스민 물은 구들장 아래 수로를 따라서 아래 논으로, 그리고 더 아래 논으로 흐르도록 했다. 귀한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서로 나눠 쓰려는 지혜다.


양지리의 구들장 논에서 자라고 있는 맥주보리.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근사하다.


# 숙명의 노동으로 쌓은 구들장 논

청산도에서 구들장 논을 보려면 당리마을에서 읍리를 지나 ‘큰재’를 넘으면 된다. 지명만 그렇지, 실제로는 ‘작은 재’에 가까운 큰재 너머는 사방을 산으로 둘러치고 있는 거대한 분지 지형이 뚜렷하다. 여기 신풍리와 부흥리, 양지리, 청계리, 중흥리 일대에 거대한 구들장 논이 있다. 마을로 내려오는 이쪽저쪽 산자락의 아랫도리가 죄다 돌로 지은 구들장 논이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청산도 선착장이 있는 도청리에서 가까운 당리마을을 들러 유채꽃의 화려한 풍경만 보고 돌아가지만, 그건 청산도 구들장 논의 가치를 몰라봐서 그렇다. 화려함이야 떨어질지 몰라도, 고된 노동으로 이룬 거대한 풍경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오히려 이곳이 한 수 위다. 구들장 논은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청산도 사람의 삶의 애환과 애착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청산도 구들장 논에는 지금 맥주보리와 컬러보리가 봄바람에 물결치며 한창 익어가고 있다. 이런 풍경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양지리와 부흥리, 그리고 상서리다. 이 중 돌담마을로 이름난 상서리는 돌담의 정취도 좋고, 마을의 매봉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구들장 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마을이다. 마을 위쪽의 옛 집터는 청산도에서 최초의 마을의 흔적인데, 이쪽에 구들장 논이 집중돼 있다.

청산도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400여 년 전. 그때부터 지어진 구들장 논은 1940년대까지 만들어졌다. 변변한 갯벌조차 없어 농사로 생계를 이어야 했으니, 섬사람들은 모두 구들장 논 만들기에 나섰으리라. 맨손으로 산자락을 개간해 손바닥만 한 논 하나를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소요됐다. 청산도 사람들은 평생 끝나지 않는 노동처럼 구들장 논을 만들며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게 청산도 사람들의 오랜 숙명이었다.

청산도 구들장 논은 독특한 조성방법과 함께 인문적 가치를 평가받아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로 지정됐고, 2014년에는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서 주관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에도 등재됐다. 그럼에도 청산도의 구들장 논은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섬 전체 농토의 휴경비율이 전체 농토의 42.5%에 달할 정도다. 섬 주민의 노령화로 농사가 줄어든 탓도 있고, 작은 구들장 논에는 농기계가 못 들어간다는 이유도 있다. 이렇게 사라져 가고 있는 구들장 논을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보존회를 만들어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형편이다.


# 섬사람들이 구들장 논을 지키는 이유


“구들장 논에 농사를 짓지 않아 해마다 휴경지가 늘어나고 있어요. 오랜 휴경으로 구들장 논이 덤불에 휘감겨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든 지켜보자고 주민들이 모였습니다. 모두 구들장 논의 땀과 역사를 기억하는 ‘늙은이’들이지요.”

박근호(65) 청산도 구들장논보존협의회장은 ‘구들장 논을 지키는 게 곧 고향인 청산도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보존협의회는 사라져 가는 청산도 구들장 논을 되살려 내 작물을 심고, 인문적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해오고 있다.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청산도 구들장 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무렵에는 회원 수가 100명을 넘기기도 했지만, 지금 회원 수는 18명이다.

협의회원들은 오래 묵어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구들장 논을 살려내고, 땅 주인을 설득해 빈 구들장 논에다 공동경작으로 보리나 밀을 심고 있다. 오래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구들장 논과 수로의 옛 형태를 복원한다. 이들이 꼽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청산도 땅을 매입한 외지인 소유의 구들장 논이다. 슬로시티 지정을 전후해 외지인들이 청산도 땅을 적잖게 사들였는데, 사놓기만 하고 농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외지인 소유 땅이 죄다 폐허처럼 돼가고 있다.

“도시에 사는 땅임자는 연락처도 알기도 쉽잖은데, 어찌어찌 알아내서 ‘농사해 수확물을 나눠 줄 테니 빈 땅으로 놔두지 말고 경작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열에 아홉, 아니 열에 열은 ‘손끝 하나 대지 말라’는 답이 되돌아옵니다.”

허물어져 가는 구들장 논을 갖은 노고 끝에 복원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그제야 땅 주인이 ‘되돌려 달라’고 할 때도 있단다. 좀 서운하긴 하지만 그래도 땅 주인이 다시 농사를 짓는다면 결과적으로 구들장 논을 보존하는 것이어서 마음이 뿌듯해지는데, 되돌려 받은 논을 다시 방치해 물길이 막히고 논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회원들은 묵묵히 묵은 논을 찾아내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 2007년 문체부의 ‘가고 싶은 섬’ 사업을 시작으로 청산도에서 다양한 부처의 지원사업을 진행해 온 황길식 명소IMC 대표는 “보존협의회가 살려내고자 하는 건 구들장 논뿐만 아니라 청산도의 지속가능 가치”라며 “축제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소득을 증대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섬 고유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게 ‘청산도 만들기’의 더 큰 목표”라고 했다. 청산도의 아름다운 경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청산도 사람들의 삶이고, 공동체성이 회복된 삶의 모습이 관광객들을 다시 청산도로 불러들일 것이라는 게 황 대표의 믿음이자 보존협의회의 희망이다. 코로나19로 1년 넘게 섬이 비워지다시피 한 지금, 청산도는 영화와 드라마로 시작됐던 여행이 다시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 청산도를 둘러보는 방법

청산도를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카페리호에 차를 싣고 들어가 손수 운전하면서 섬을 샅샅이 돌아볼 수도 있고, 섬 안에서 택시를 3만 원에 2시간 동안 대절하는 방법도 있다. 일반버스(요금 1000원)를 타고 다닐 수도 있다. 지난해까지 순환버스를 운행했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이 감소하면서 운행을 정지한 상황. 대신 주말이나 휴일에 인파가 몰릴 때마다 투어 버스를 긴급 투입하고 있는데, 4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투어 버스 요금은 순환버스의 2배인 1만 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