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山水가 아름다운 곳 경북 청도

醉月 2021. 4. 10. 13:17
나른한 봄날 오후의 선암서원 풍경. 동창천의 물길을 끼고 있는 선암서원은,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랑채와 안채까지 갖춘 그윽한 한옥 고택이다. 서원은 500년 전 청도의 두 선비,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기린다.



맑은 기운 품은 선암서원, 복사꽃이 절정

정자 삼족대 오르면 동창천이 훤히 내려다보여


6·25때 이승만 묵은 여든여덟칸 운강고택

조선 궁중 내시 가문 이어온 운림고택

신라 화랑의 세속오계 시작된 운문사까지 느긋이 산책


한가지 소원만큼은 들어준다는 속설

운문사 사리암 1008개 계단 발길 끊이지 않아


한재골 봄 미나리 전국에서 인기 폭발

부드러우며 아삭아삭… 은은한 향 일품

100여 농가 농사… 비닐하우스 바다처럼 보여



# 맑은 풍경으로 가득하다…청도

경북 청도. 우리와 한자어 음이 같은 중국 칭다오(靑島)의 지명을 가져다 쓴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자가 다르다.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이고, ‘섬 도(島)’가 아니라 ‘길 도(道)’다. 청도의 지명은 중국의 칭다오가 아니라 ‘산천청려 대도사통(山川淸麗 大道四通)’에서 왔다. ‘산과 물이 맑고 아름다우며, 큰길이 사방으로 통한다’. 이 문장은 400여 년 전에 펴낸 청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지에 나온다. ‘큰길’까지는 몰라도, 청도의 ‘산수가 맑다’는 데는 십분 동의한다. 그때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청도는 맑다.

청도에서 ‘맑은 기운’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명소 두 곳이 있다. 두 곳 모두 동창천 물길 곁에서 맑은 기운을 품고 있는 곳이다. 한 곳이 선암서원이고, 다른 하나는 정자 삼족대다. 먼저 선암서원 얘기부터. 동창천 변의 선암서원은 청도의 선비 박하담이 일대의 빼어난 경관 아홉 곳을 ‘운문구곡(雲門九谷)’이라 이름했던 자리에 세워진 서원이다. 박하담은 동창천 변에 집을 지어 ‘소요당(消謠堂)’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그걸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소요(消謠)란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닌다’는 뜻. 방점은 ‘돌아다닌다’가 아니라 ‘자유롭게’에 찍힌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평생을 은거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박하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거닐며 소요하던 자리에 세워진 게 바로 선암서원이다.


# ‘절친’인 두 선비가 남기고 간 자취

▲ 청도 운문사의 산내 암자 사리암. 소위 ‘기도발’ 잘 받는다는 소문이 나서 가파른 산길을 30분쯤 걸어 올라야 하는데도 이른 아침부터 신도들이 몰려든다. 사리암 아래로 실타래에서 풀린 실처럼, 길이 이어져 있다.


청도에서 박하담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이 삼족당 김대유다. 동갑내기인 박하담과 김대유는 평생 벗으로 지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이른바 ‘절친’이었던 셈이다. 박하담이 철저히 은거한 선비였다면, 두루 벼슬을 하고 현감 자리까지 올랐다가 기묘사화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 청도로 돌아온 김대유는 낙향한 선비였다. 둘은 고향 땅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의기투합해 가난한 이를 위해 가뭄과 기근을 대비하는 곡식 창고를 짓기도 했다.

이들이 구휼을 위해 지은 창고는 관아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창(東倉)’이라 불렸는데, 선암서원을 끼고 흐르는 물길에 붙여진 ‘동창천’이란 이름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박하담과 김대유가 살다간 지 500년 뒤에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선명한 건, 이들이 음풍농월의 풍류와 뒷짐 진 소요를 넘어 학문으로, 혹은 곡식으로 이웃에 베풀며 다른 사람의 삶까지 살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선암서원은 박하담 문중 소유지만, 서원은 박하담과 김대유를 함께 기린다. 사실 봄나들이에 나선 여행자의 눈높이에서는 선암서원이 누구를 배향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봄볕으로 환한 동창천 변의 선암서원 담장을 끼고 오솔길로 들어서는 순간, 수묵채색으로 그려낸 듯한 주변 경관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고, 그 풍경만으로도 단숨에 반할 것이니 말이다.

선암서원은 기왕의 서원과는 건물의 배치나 느낌이 전혀 다르다. 강학 공간 뒤에 사당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 방식이 아니라, 격식을 잘 갖춘 고택에 가깝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가 있다. 격조 있는 서당 건물은 뒷마당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거기 서원의 현판을 내걸었다. 우아한 서당채 건물은 선암서원을 한결 근사하고 운치 넘치는 별서(別墅)로 느끼게 만든다.

선암서원이 보여주는 그윽한 아름다움의 절반 이상은 눈부신 자연과의 협업으로 이뤄진 것이다. 봄볕 따스한 고택의 마루와 아름드리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 만개한 봄꽃들, 여기다가 유연하게 휘돌아 나가는 동창천의 물길이 어우러진다. 자연과 조화된 풍경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다. 지금 청도는 복사꽃과 신록으로 가장 아름다운 때이니, 선암서원도 절정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 무엇으로 만족해야 할 것인가

선암서원을 끼고 흐르는 동창천을 따라 더 내려가면 물가에 정자 삼족대가 있다. 선암서원이 박하담의 것이라면, 삼족대는 김대유의 것이다. 김대유는 천변에 딱 붙은 벼랑에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정자를 세웠다. 물을 앞에 두고 벼랑에 올라앉은 자세가 기품이 넘치지만, 방 두 칸과 ㄱ자 마루 하나가 전부인 소박한 정자다. 정자 마루에 앉으면 동창천의 푸른 물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삼족(三足)’이란 정자의 이름은 ‘세 가지가 족하다’는 뜻이다. 본래 삼족은 유교 경전 ‘예기(禮記)’에 나온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漁), 땔감이 충분하고(樵), 양식을 구할 밭이 충분하니(耕) 이 세 가지로 족하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김대유는 이걸 본떠 육십을 넘긴 나이가 족하고(壽),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냈으니 영예가 족하고(譽), 아침저녁으로 고기반찬이 끊이질 않으니 먹을 것(食) 또한 족하다고 했다. 이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족대로 삼았고, 자신의 호도 삼족당이라 했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개혁을 꿈꾸다가 사화에 휘말려서 낙향한 선비가 고작 일신의 안위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절친 박하담의 문집에 나온다. 다음은 박하담의 질문에 김대유가 내놓은 진짜 삼족에 대한 설명이다.

“시대에 어리석어서 영광과 치욕이 내 몸에 미치지 않아 몸을 보전함에 만족하고, 일에 어리석어서 헐뜯고 칭찬하는 것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마음을 기르는 데 만족한다. 또 욕심에 어리석어서 힘쓰는 것이 분수를 넘지 않으니 분수에 만족한다.”

찬찬히 새겨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만족이란, 영욕과 성취,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얻어진 것들이다. 그걸 내려놓게 된 연유를 자기가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한껏 낮췄다. 그렇다면 그가 나이와 벼슬, 음식을 들어 삼족이라 일컬었던 건 스스로 어리석음을 가장하고자 한 것이었으리라.


선암서원 담장을 끼고 이어지는 오솔길. 동창천 물길을 끼고 있는 서원 주변은 아름드리 소나무의 푸르름과 만개한 산수유 꽃으로 담을 두르다시피 했다.



# 동창천 물길 따라 걷는 느긋한 산책

이제 선암서원과 삼족대 주변에서 함께 봐두면 좋을 곳들의 이야기를 주워 담아보자.

선암서원이 있는 금천면 신지리에는 박하담의 후손들이 여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마을에는 운치 있는 고택이 여럿 있는데, 그중 빼어난 집이 6·25전쟁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묵어갔다는 여든여덟 칸 운강고택과 고택에 딸린 정자 만화정(萬和亭)이다. 선암서원에서 천천히 걸어서 10분이면 넉넉한 자리에 운강고택이 있다. 동창천을 끼고 너른 누마루를 두르고 있는 만화정에 올라 신록으로 물든 천변의 버드나무 정취를 즐기기 딱 좋을 시기인데, 아쉽게도 정자 지붕을 보수하는 중이어서 드나들 수 없다.

금천면 임당리에 있는 운림고택도 들러볼 만하다. 조선시대 궁중의 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 관직까지 오른 이가 말년에 낙향해 직접 지은 집이다. 임당리는 400년 동안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의 가계가 이어져 온 독특한 내력의 마을. 내시 가문은 부인을 들인 뒤 입양한 양자를 다시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 생활을 하도록 하면서 대를 이었다. 도둑이 많았던 시절에도 운림고택에서는 맷돌 하나 훔쳐가는 이가 없었다는데, ‘내시의 물건을 훔치면 그 자손이 내시가 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었단다. 고택의 주인은 이런 편견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운림고택의 담장이 유독 높은 것도 편견과 호기심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일 텐데, 청도군의 관광해설사는 ‘내시 부인이 외간 남자와 접촉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해설한다. 그 해설을 다 믿는다면 고택의 주인은 담장을 높이 쌓고 집안 곳곳에다 구멍을 뚫어 거기 눈을 대고서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신경증 환자나 다름없다. 편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 운문사, 화랑정신이 시작된 자리

너무 잘 알려진 곳이라 뒤로 미뤄 뒀지만, 청도를 대표하는 곳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절집 운문사다.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집답잖게 운문사는 뭐든 큼직큼직하다. 들머리의 우람한 솔숲도, 웅장한 대웅보전도, 사방이 열린 단층 누각 만세루도 죄다 크다. 건축은 장대하지만, 격식을 맞춰 지어진 건물은 화려하지 않고 맑고 단정하다.

운문사에는 제법 볼 게 많다.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붙잡는 거대한 처진 소나무부터 세월과 기품이 느껴지는 만세루, 마당의 거북 형상 바위도 그렇다. 대웅전 뒤쪽에 잘 가꿔놓은 정원도 볼 만하다. 정원 한쪽에는 거대한 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에 새겨진 게 ‘세속오계’다. 세속오계는 신라 때 화랑이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계율. 기억나지 않는가.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학창 시절, 시험문제에 단골로 나왔다.

세속오계가 여기 운문사에 있는 연유는 이렇다. 신라는 경주에서 가깝고 산세가 험준한 운문산 일대를 화랑도의 수련도장이자 전략적 군사요충지로 삼았고 ‘오갑사(五甲寺)’를 창건해 비밀 훈련장소 혹은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오갑사는 다섯 곳의 절을 뜻하는데, 중앙의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가슬갑사, 남쪽에는 천문갑사, 서쪽에는 소작갑사, 북쪽에는 소보갑사를 뒀다. 다섯 개의 절집 중에서 남은 건 두 곳이다. 중앙의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고, 금천면의 절집 대비사가 소작갑사였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수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운문사, 그러니까 대작갑사에 머물고 있었던 당대의 고승 원광법사에게 두 명의 화랑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원광법사는 화랑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내려줬다. 불가에서 지키는 계율을 세속에서는 다 지킬 수 없으니, 화랑이 지켜야 할 덕목 다섯 가지만을 추려서 일러줬던 게 바로 세속오계였다. 지금은 이토록 고요한 비구니 절집이, 신라 때는 화랑의 뜨거운 숨결로 가득했던 수련장이었다는 것이다.


아삭거리며 은은한 향이 나는 ‘한재 미나리’로 이름난 청도읍 한재골의 거대한 미나리밭. 한재골에는 미나리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어찌나 많은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해마다 봄이면, 삼겹살에다 미나리를 곁들여 파는 한재골의 식당에 처음 수확한 여린 미나리 맛을 보려는 행락객들이 몰려든다.



# 영험한 기도로 찾아가는 암자

운문사 경내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지룡산(666m) 정상 암봉 아래 들어선 암자, 북대암이 올려다보인다. 운문사에 닿기 전에 왼쪽 샛길로 빠져 거칠고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차로 오르면 거기 북대암이 있다. 북대암에 오르면 그곳에서 운문사와 운문사를 발치에 품은 일대의 경관을 다 내려다볼 수 있는데 여기서보면 운문사가 연꽃의 꽃술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운문사의 암자 중에서 북대암보다 더 이름난 곳이 사리암이다. 운문사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차로 사뭇 더 들어가면 사리암 주차장이 나오는데, 사리암은 여기서 갈 지(之)자로 이어지는 산길을 30분쯤 걸어 올라야 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이른 새벽부터 해 질 무렵까지 가파른 길을 따라 놓인 1008개 계단을 신도들이 줄지어 오르는 이유는, 사리암에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만큼은 들어준다는 속설 때문이다.

사리암은 한국불교에서만 숭상하는 ‘나반존자’를 모신 기도처다. 나반존자는 홀로 이치를 깨우쳐 도를 이룬 성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륵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운 이다.


# 새마을과 낡은 마을, 그리고 미나리

 

청도에는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이 있다. 사실 그 자체로 의미 깊게 기려도 좋을 새마을운동은 정권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정권의 향방에 따라 사회 분위기에 맞춰 관광객이 몰려들기도 했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새마을운동을 기념한다면서 주민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조명을 맞추고 있어서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던 시골 마을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협동과 울력으로 펼쳤던 잘살기 운동을 조명하기보다는 ‘통치자의 결단’을 칭송하는 방식으로 새마을운동을 기리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청도가 화양읍 신도 1리에 새마을운동발상지 공원을 세운 건 1969년 8월 경남 지역 수해복구 현장 시찰에 나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에서 출발한다. 당시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신도리 앞을 지나던 박 전 대통령은 주민들이 스스로 지붕과 담장을 개량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듬해인 1970년 4월 열린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신도 1리의 예를 들어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의 태동이었다.

새마을운동발상지 공원에는 ‘새마을 테마파크’가 있다. 어려웠던 시절의 새마을운동 모습을 세트장과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마을 뒤 언덕을 끼고 초가집, 슬레이트집, 기와집, 구판장, 왕대포집,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고 시설도 허름하지만, 잘 만들어놓은 말끔한 시설과는 다른 감회가 있다.

청도에서 누추했던 시절 추억의 모습은, 굳이 새마을공원을 찾아갈 것 없이 청도의 소읍 골목에도 남아 있다.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 남매의 생가가 있는 청도읍 유호리는 극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해 영화 촬영 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줄잡아 90년쯤 됐다는 낡은 방앗간 영신정미소와 나무로 짠 진열장이 늘어선 상가거리는 1970년대쯤으로 시간을 되돌린 듯하다.

봄날에 청도를 간 길이라면, 한재골로 불리는 청도읍 평양리 일대에서 생산되는 미나리 맛을 놓칠 수 없다. 화악산과 남산, 철마산이 에워싸고 있는 분지인 한재골은 유호리에서 멀지 않다. 한재 미나리는 아삭거리면서도 부드러운 데다 향이 은은하다. 한재 미나리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재골 일대 초현리와 평양리, 상리, 음지리 등의 100여 농가가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는데,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어찌나 많은지 입이 딱 벌어진다. 계곡을 따라 비닐하우스가 가득 차 있어 마치 바다처럼 보일 정도다.


■ 운문사의 악착보살

운문사의 비로전에 들면 서쪽 천장에 매달아놓은 작은 목각 동자상이 눈길을 끈다. 동자상은 나무로 깎은 ‘반야용선’에 매달려 있다. 반야용선이란 중생이 극락정토에 갈 때 타고 간다는, 지혜로 나아가는 배다. 동자상이 반야용선에 승선하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고 해서 ‘악착보살’이란 이름을 얻었다. 엄숙한 법당 안에다가 쉼표를 찍듯이 새겨놓은 유머다. 이런 유머 덕에 비로전은 한결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