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미리가본 벚꽃명소'전남 영암'

醉月 2021. 3. 25. 19:49

전남 영암의 월출산은 근육질의 바위로 가득한 남성미 넘치는 산이다. 기기묘묘한 암봉과 아찔한 벼랑으로 가득하다. 사자봉 직벽을 등산객들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있다. 월출산은 선경을 감상하며 산행을 하는 것도, 거기 올라 영암의 들녘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멀찌감치 물러서서 수석을 감상하듯 월출산을 보는 맛도 좋다.


매화며 산수유가 분분히 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벚꽃을 만나는 가장 찬란한 봄의 시간이다. 봄꽃은 그게 어떤 것이든 다 좋긴 하지만, 화려하기로 벚꽃에 감히 견줄 만한 게 있을까. 줄지어 늘어선 벚나무 가지마다 꽃이 한꺼번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봄 풍경은 황홀하다. 봄날의 밤에 숨 막힐 듯 피어난 벚꽃의 정취는 또 어떤가. 계절이 오면 언제든 할 수 있었던 벚꽃놀이가 팬데믹 시대에는 꿈같은 로망이다. 마음 편히 바깥나들이 해보지 못한 게 벌써 두 해째. 벚꽃놀이에 대한 열망이 강력한 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려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 팬데믹 시대의 벚꽃놀이를 제안하다

이제부터의 제안은 ‘팬데믹 시대의 벚꽃놀이’다. 목적지는 전남 영암. 영암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 있다. 이 길을 두고 흔히 ‘100리 벚꽃길’이라 부른다. ‘100리(40㎞)’는 십중팔구 과장일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뭐 그리 터무니없는 허풍은 아니다. 실제 이어지는 벚꽃길의 거리를 재보니 30㎞ 남짓이다. 70리(28㎞)가 넘는다. 벚꽃을 따라서 샛길로 빠졌다가 에둘러서 간다면 100리짜리 코스는 쉽게 만들 수도 있겠다. 한동안 벚나무 가로수 심기 붐이 불어 전국에 벚꽃길이 드물지 않은데, 영암의 벚꽃길 앞에서는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다.

팬데믹 시대의 벚꽃놀이로 영암을 권하는 건 벚꽃길의 길이 때문이다. 영암에서는 차를 타고 벚꽃을 감상할 수 있을 만큼 벚꽃 가로수 길이 충분히 길다는 얘기다. 4차로와 2차로 도로를 바꿔가며 이어지는 영암의 벚꽃 가로수 길을 따라 차를 타고 느긋하게 꽃놀이를 겸해 달린다면 1시간은 족히 걸린다. 달리는 내내 차창 밖으로 길 양편의 흐드러진 벚꽃이 따라오는 건 물론이다. 저마다 제 차에 앉아 드라이브로 꽃을 즐기니, ‘거리두기’를 넘어선 ‘따로 있기’다. 흐드러진 봄꽃을 차 안에서 봐야 하는 처지가 아쉽지만, 길을 가다가 가장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꽃그늘 아래서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정도야 무슨 문제가 될까.


영암의 모정마을에서 모정 저수지 너머로 본 월출산. 수면에 산 그림자가 찍힌다.


# 벚꽃 터널 속으로 10㎞를 달리는 맛

영암의 벚꽃길로 가는 ‘드라이브 벚꽃놀이’가 한결 마음이 편한 건, 다른 봄꽃 명소에 대면 현지 주민들의 경계가 좀 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봄에는 섬진강 변을 비롯해 이름난 봄꽃 명소마다 행락객이 적잖았는데, ‘여행 자제’나 ‘관광객 거부’ 등의 현수막을 내 건 마을이 많았다. 외지인들에게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주민들도 있었다. 하지만 영암에서는 그렇지 않다. 벚꽃이 어디 한 곳에 집중적으로 피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 피니 관광객이 한데 모이지 않아 외지인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면 영암에서 드라이브로 벚꽃을 즐기려면 어디서 출발해 어떻게 가야 할까. 출발지점은 영암읍사무소다. 코스는 다음과 같다. 영암읍∼회문리∼녹암마을∼군서면 주암마을∼과수원모텔∼월산마을(군서면사무소)∼당산나무(신목)∼구림마을∼왕인박사 유적지∼학산면 용산리 신복천∼화소마을(김완 장군 유적지)∼송정∼독천∼삼호읍. 전체 코스 중에서 길 양옆의 벚나무 가지가 서로 손을 맞잡듯 자라서 말 그대로 ‘벚꽃터널’을 이루는 하이라이트 구간이 과수원모텔 삼거리에서 구도로를 타고 월산마을∼구림마을∼화소마을까지다. 똑같은 코스로 왕복 4차로와 2차로가 있는데, 2차로로 가야 한다. 4차로의 벚나무는 아직 어리다. 가로수 꽃길은 길이 좁을수록 꽃이 좋은 건 당연한 이치다. 벚꽃터널은 10㎞ 남짓 이어지는데, 월출산 자락을 끼고 가는 이 길 위에는 곳곳에 볼 만한 문화 유적지들이 있다.

사실 지난 주말에 영암의 100리 벚꽃길에는 아직 꽃이 없었다. 마을 담장 안의 벚꽃은 더러 피기 시작했는데, 길 위의 벚꽃이 봄볕 아래서 이제 막 간질간질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꽃이 더 핀 뒤에 다시 다녀와서 소개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늦는다. 영암 100리 벚꽃길의 절정은, 단언하건대 이번 주말 시작해서 내주 한 주다. 올봄은 차 안에서라도 벚꽃놀이를 즐기고 싶다면 놓치지 말자.


월출산 도갑사 뒤편 숲속의 도선수미비각. 도선국사와 수미왕사를 기리는 비석과 건물이다.


# 영암 땅에 남아 있는 시골 마을 정서

‘숙성 퇴비 5t짜리 한 차. 배달 OK.’ 노래자랑에 걸린 상품이 상상을 초월한다. 영암 군서면의 모정마을에서 추석마다 열리는 ‘콩쿨대회’의 협찬상품 중에는 ‘숙성 퇴비’가 있다. 상품은 ‘숙성 퇴비를 5t트럭에 싣고 수상자의 논이나 밭에다 넣을 수 있도록 배달까지 해준다’는 뜻이다. 오리 두 마리, 배 한 상자, 메밀 베개, 사골 세트…. 이런 상품을 걸고 해마다 모정마을에서는 콩쿨대회가 열린다.

모정마을 콩쿨대회는 1980년대 초에 사라졌다가 35년 만에 부활한 마을 행사다. ‘콩쿨’이라지만 경연이라기보다는 이웃 마을 동호리, 양장리, 구림리 주민들까지 참여하는 잔치에 가깝다. 콩쿨대회는 추석 전날, 그러니까 너른 들의 논이 누렇게 익어가고 출향한 이들이 다들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때에 맞춰 열린다. 부활 첫해의 콩쿨대회 대상은 당시 모정중학교 3학년이었던 풍동댁 손자가 받았다. 추첨으로 주어진 숙성 퇴비 상품은 모정마을 부암댁이 받았는데, 이듬해 퇴비를 풍성하게 넣어 지은 부암댁의 농사가 풍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숙성 퇴비 한 차’를 시가로 치자면 대략 15만 원 안팎. 하지만 부활한 콩쿨대회와 이런 소박한 상품은, 그 가치를 돈으로 셀 수 없는 농촌 마을 공동체의 복원을 보여준다.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열리지 않았던 모정마을의 콩쿨 얘기를 꺼내는 건, 영암의 마을 중에서 모정마을처럼 농촌공동체가 살아 있는 곳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모정마을에서도, 이웃 엄길마을에서도 밥 시간에 이웃과 마주치면 소매를 끌어 자기 집 밥상 앞에 앉히는 일쯤은 예사다. 마을 어귀에 하나쯤 있는 정자에 슬쩍 끼어들어 주민들이 나누는 얘기만 잠깐 들어봐도,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따듯하게 사는지 금세 알 수 있다.

▲ 월출산 등반을 마친 등산객이 도갑사 경내로 들어서고 있다. 2층으로 지어진 대웅보전이 웅장하다.


이름난 관광지에서 벗어나 영암의 마을 안으로 여행한다는 건, 아직 농촌공동체가 작동하는 따스한 마을과 주민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절대로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빠지지는 않는다. 영암에는 이름 없고 작고 소박하지만, 크고 이름난 것들보다 오히려 몇 배쯤 더 좋은 곳이 곳곳에 있다. 절대로 빈말이 아니다.


# 월출산을 보는 최고의 자리

영암이라면 단연 ‘월출산’이다. 월출산은 남도의 너른 평야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다른 산에 능선을 기대지 않고 저 홀로 서서 뜨거운 화염, 혹은 거친 파도 같은 화강암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월출산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 산에 들어 창처럼 솟은 암봉과 직벽을 오르는 게 한 가지. 다른 하나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거대한 수반 위에 놓은 기기묘묘한 수석’과 같은 산세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요즘 같은 봄날이면 아침마다 월출산 아랫도리를 안개가 휘감아 수묵화 같은 풍경을 빚어낸다. 월출산 산행을 잠깐 미뤄두고, 뒤로 물러나서 마을에서 보는 산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월출산을 먼발치에서 보는 명당자리가 모정마을에 있다. 자그마한 저수지를 끼고 있는 모정마을의 정자 ‘원풍정(願豊亭)’이다. 정자는 ‘원풍(願豊)’ 그러니까, ‘풍년을 바란다’는 이름을 현판으로 매달고 있다. 글깨나 읽은 선비들이 낙향해 지은 정자는 대개 이름난 문장가의 글에서 뜻을 빌려다가 ‘음풍농월’식의 이름을 짓게 마련인데, 모정마을 정자가 바라보고 있는 건 문장이나 풍류가 아니라 ‘농사’다. 그건 바로 이 정자를, 글깨나 읽은 선비가 아니라 농사에 생계를 대고 있는 모정마을 주민들이 지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름 ‘모정(茅亭)’은 ‘띠풀로 지붕을 이은 정자’를 뜻하는데, 500여 년 전쯤 이 마을에 있었다는 세도가 집안의 별서(별장) 정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가세가 기울자 세도가 가문에서 모정마을 정자를 이웃 마을에 팔아넘겼는데, 그게 한이 됐을까. 모정마을 주민들의 정자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데가 있다. 주민들은 마을 정자 원풍정을 손수 짓기 위해 울력을 나가 받은 품삯을 한두 푼씩 모았고 산에서 나무를 해서 목도로 운반해 정자를 짓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은 정자 원풍정의 반질반질한 마루에 앉으면 정자를 끼고 있는 자그마한 모정 저수지 뒤로 월출산이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월출산, 오른쪽은 주지봉, 그리고 이 두 개의 산줄기를 잇는 억새밭 미왕재 풍경이 저수지 수면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찍힌다. 산 아래 안개가 감기는 봄날 이른 아침의 풍경은 황홀하기 이를 데 없다. 원풍정에서는 월출산 뒤쪽에서 뜨는 해와 달을 다 볼 수 있다. 요즘 같은 봄날의 보름밤이면 월출산과 주지봉 사이의 미왕재에서 둥실 떠오른 달이 저수지 수면에서 반짝인다.


영암 엄길마을 어귀의 천년수(千年樹). 실제로는 800년 남짓 수령의 느티나무다. 주변이 온통 보리밭의 초록이다.



# 영암에서 떠나는 마을 여행

모정마을에서 가까운 엄길리도 작은 마을이지만 볼 게 여간 많은 게 아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노거수. 주민들은 ‘천년목’이라 부르는데, 1000년은 아니어도 수령 800년이 족히 넘는다. 키 20m, 둘레가 8m가 넘는, 위엄으로 가득한 당산나무는 마을이 건너온 시간을 말해준다. 하지만 엄길마을에서는 800년 전쯤은, 옛날도 아니다. 마을 안쪽에 흔히 ‘고인돌’이라 부르는 지석묘군이 있는데, 이건 자그마치 2000년이 훌쩍 넘는 기원전 시대의 유물이다.

엄길마을 뒷산인 철암산에는 ‘보물’이 있다. 바위에 새긴 ‘매향암각비’다. ‘매향(埋香)’이란 바닷가 주변에 향나무를 묻고 다음 생은 미륵의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불교 의식을 말한다. 관리들의 학정과 왜구들의 잦은 침략에 어지러웠던 고려 말 조선 초에 백성들은, 매향 의식에 동참한 이들의 이름을 새겨두고 미륵 세상을 기다렸는데, 매향암각은 그 흔적이다. 매향 의식의 기록은 따로 돌을 깎아 비석으로 세우는 게 보통인데, 여기 엄길리는 철암산 자연석에 글을 새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엄길마을에서 뒷산 오솔길로 10분쯤 오르면 닿는 바위지대에 매향암각비가 있다. 암각명이 새겨진 바위 위로 굴러떨어진 돌이 지붕 역할을 해서 비바람을 막은 덕에 고려 충목왕 때이던 1344년에 새긴 글씨가 한눈에 읽을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 매향비라는 게 밝혀지기 전까지 뒷산 바위에 새겨진 글을 두고 마을 주민들은 보물을 숨긴 지점을 적어둔 글이라고 여겼다. 글을 해독하면 엄청난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기야 그 시절의 구원이 ‘미륵’이었다면, 지금의 구원은, 미륵이 아니라 돈이나 보물일 수도 있겠다.

엄길리를 찾은 이들은 대부분 암각명만 보고 돌아가지만, 여기서 5분쯤 더 걸으면 거대한 하나의 바위로 이뤄진 철암산 정상 위에 서게 된다. 철암산 정상에서 보는 월출산과 그 아래 서호강과 평야 지대 경관이 가히 일품이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평야는 하춘화의 노래 ‘영암아리랑’의 가사 ‘서호강 몽해뜰에 풍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몽해뜰’이다. 이 일대의 평야는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일궈진 것. 당대 최고의 갑부로 꼽혔던 현준호가 주도한 간척사업은 1943년에 시작해 1961년까지 계속돼, 바다를 메워 만든 땅이 자그마치 892만㎡였다.

철암산에서 내려다본 온통 보리밭의 초록으로 물든 끝 간 데 없는 간척지 평야의 경관은 근사했고, 간척 당시의 얘기부터 마지막 소작쟁의까지 풀려나오는 이야기가 한 타래가 넘었다. 이야기는 흥미진진했지만, 그보다 간척 이전의 경관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너른 평야가 바다였던 시절, 바다와 어우러진 월출산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수면 위로 수석과 같은 월출산의 기암이 비치는 모습은 얼마나 풍류가 넘쳤을까. 또 월출산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바다와 어우러지는 장면은 또 얼마나 근사했을까.

사라지고 없는 풍경은, 늘 그립다. 이제는 몽해뜰이 바다였던 시절의 월출산도, 농촌 마을의 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 모정마을의 콩쿨대회도, 매향비를 새기고 미륵을 기다리던 간절한 소망도…. 그리고 이제 곧 만개하는 영암의 ‘백리 벚꽃’도 분분히 져서 누군가의 그리운 기억으로 오래 남아 있으리라.


■ 새바위와 철바위

매향암각비가 있는 영암의 엄길리 마을 뒷산은 철암산이다. 어찌 된 일인지 일대에서 쇠가 난 적이 없는데도 ‘쇠 철(鐵)’ 자를 쓴다. 엄길리 주민들은 예로부터 마을 앞 들판을 황새가 날아든다 해서 ‘새뜰’이라고 불렀고, 바위산을 ‘새바우’라 불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지명 정비 과정에서 어처구니없게 ‘새(鳥)’가 ‘쇠(鐵)’로 됐단다. ‘새바위’가 ‘철바위’가 된 내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