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보여주는 詩, 말하는 詩

醉月 2011. 6. 25. 19:24
꿈에 세운 詩의 나라
조선 전기의 문인 심의가 지은 〈記夢〉은 〈大觀齋夢遊錄〉이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은이가 얼풋 잠이 들었다가 홀연 한 곳에 이르렀는데, 금빛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궁궐에는 천성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곳은 천상 선계에 자리잡은 시의 왕국이었다. 이 나라의 왕은 최치원이고 수상은 을지문덕이며, 이제현과 이규보가 좌우상을 맡고 있다. 그밖에 내로라 하는 역대의 쟁쟁한 시인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지위의 고하는 단지 시를 쓰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당대에 쟁쟁하던 선배인 서거정 성현 어숙권 등은 지방의 미관말직을 전전하고 있는데 반해, 현세에서 불우를 곰씹던 그는 자신이 꿈 속에 세운 가공의 시 왕국에서 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승승장구 한다. 다른 대신들이 손 못대는 문제도 척척 해결한다. 대개 현세의 불우에 대한 보상심리의 반영인 셈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문천군수 김시습의 반란 사건이 우리의 흥미를 끈다. 지은이가 시 왕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해 갈 무렵 난데 없이 김시습의 반란 소식이 전해진다. 천자 최치원이 당시풍만을 좋아하여 자기와 같이 송시풍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박대하여 등용치 않으므로 참을 수 없다는 사연이니, 참으로 시 왕국다운 반란의 이유다. 이에 이식의 천거로 토벌의 임무를 맡게 된 심의는 몇 만의 군대를 주겠다는 천자의 제의를 거절하고, 소영비술만으로 대적하겠다 하며 첨두노 몇을 데리고 일기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소영비술이란 천지의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피리부는 비술이니 다름 아닌 시를 말함이요, 첨두노란 머리가 뾰족한 하인이니 붓의 형용이다.

적진에 다다른 심의가 한 곡조 피리를 불자 반란군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지고 기운이 꺾이며, 두번 불자 그만 몇 겹의 포위를 풀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적장 김시습은 손을 뒤로 묶고는, "사단의 노장이신 심령공께서 이를 줄은 뜻하지 못했습니다" 하며 투항하고 만다. 반란군의 토벌치고는 싱겁기 짝이 없다.

 


이 작품은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심의의 시관과 역대 시인에 대한 평가가 잘 드러나 있고, 또 두보를 천자로 하는 중국의 시 왕국에 천자 최치원이 초청되어 두 나라의 시인들이 시로써 재주를 겨루는 내용 등 적잖은 흥미소가 가미되어 있다. 여기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김시습의 반란 사건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특히 화려하고 유미한 시풍으로 대표되는 만당 시기의 인물이니 그가 추구한 것이 당시풍일 것은 당연하다. 그가 천자가 된 이상, 그 밑에 신하들도 당시를 추구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김시습은 송시풍을 추구하여 여기에서 소외된 것이 불만스러웠고 아예 반란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당시풍과 송시풍은 도대체 어떤 시풍을 말하며 둘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반란을 일으켜 바로 잡으려 한 것으로 보아 두 시풍은 타협이나 공존이 어려울 듯 하다. 예전 시비평서를 읽다 보면 도처에서 당시에 핍진하다거나, 송시에 가깝다는 식의 평어와 만나게 된다. 또 이 두 가지가 함께 거론될 때면 대부분 으례 당시풍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 일반이다. 비평의 현장에서 당시니 송시니 하는 개념은 왕조 개념을 떠나 시의 취향 혹은 성향을 말하는 풍격 용어로 사용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당나라 시인의 시에서도 송시풍을 찾아볼 수 있고, 청나라 시인의 시에서도 당시풍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당시와 송시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왜 한시사에서 끊임 없는 논란을 빚어 왔던가? 이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약의 화려와 국화의 은은함

송대의 유명한 화가 곽희는 그의 《林泉高致》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짜 山水의 안개와 이내는 네 계절이 같지 않다. 봄 산은 담박하고 아름다와 마치 웃는듯 하고, 여름 산은 자욱이 푸르러 마치 물방울이 듣는듯 하며, 가을 산은 맑고 깨끗하여 단장한 듯 하고, 겨울 산은 어두침침하고 엷어 마치 잠자는 듯 하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날마다 그 모습을 바꾼다. 봄 산이 좋기는 하지만 여름 산의 짙푸름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가을 산의 조촐함과 겨울 산의 담박함은 또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다. 사람마다 기호가 같지 않으므로, 꼬집어 어느 산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 또한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당시를 두고 흔히 중국 고전시가의 꽃이라고 말하여 계절로 치면 봄에 해당한다고들 하고, 이에 반해 송시는 가을에 견주기도 한다. 또 백화난만한 고궁의 봄 뜰을 친구와 어울려 산책하는 정취를 당시의 세계에 견주고, 들국화 가득히 핀 가을 들판을 홀로 걸으면서 사색에 잠겨 보는 것으로 송시의 세계를 비유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당시는 호탕한 기개를 지닌 장부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고, 송시는 달밤에 호수에 배 띄우고 선비가 마주 앉아 학문을 논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당시와 송시의 차이는 보여주기와 말하기의 차이로도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시인은 시 속에서 자꾸 무엇인가를 말 하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시인은 가급 말하는 것을 절제하는 대신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이때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메세지의 전달을 뜻한다. 시인이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시는 이해가 쉬운 반면 자칫 식상감을 주거나 거부감을 일으키기 쉽다. 반면 보여주기만 하는 시는 추상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거나, 자칫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또 이 경우 시인의 의도는 단지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므로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가 요청된다. 말하는 시가 좋은지, 보여주는 시가 좋은지는 순전히 기호에 달린 것이므로 둘 사이의 우열을 갈라 말하기란 난처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가을 산이 가장 좋다는 사람에게 겨울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타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무월(繆鉞)은 〈논송시(論宋詩)〉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는 작약이나 해당처럼 짙은 꽃과 화려한 색채가 있다. 송시는 한매(寒梅)나 추국(秋菊)처럼 그윽한 운치와 서늘한 향기가 있다. 당시는 여지를 씹는 것처럼 한 알을 입 안에 넣으면 단맛과 향기가 양 볼에 가득 찬다. 송시는 감람을 먹는 것처럼 처음엔 떠름한 맛을 느끼지만 뒷맛이 빼어나고 오래 간다. 이것을 산수에 노는 것에 비유하면 당시는 곧 높은 봉우리에서 멀리 바라보아 의기가 호연한 것과 같고, 송시는 곧 그윽한 골찌기 냇물을 찾아 정경이 냉초한 것과 같다.
작약이나 해당화의 화려한 색채는 화려하게 성장한 미인의 우아한 자태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당시이다. 반면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나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의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는 화장도 하지 않고 소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의 얼음같은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이것은 송시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申景濬은 〈詩則〉이란 글에서 역대로 많은 시가 있어 왔지만, 시의 작법은 `影描`와 `鋪陳`,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唐人은 광경을 즐겨 서술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는 影描가 많다. 宋人은 의론 세움을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는 鋪陳이 많다. 대저 광경을 서술함은 國風의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자못 참되고 두터운 맛이 적다. 의론을 세움은 兩雅의 나머지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의 자취가 완전히 드러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인은 詩를 가지고 詩를 지었고, 송인은 文을 가지고 詩를 지었다고 생각하여 唐詩가 宋詩보다 훨씬 뛰어나 宋詩는 唐詩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는 唐詩에는 影描가 많고, 宋詩에는 鋪陳이 많은 까닭이다. 그러나 宋詩가 唐詩만 못한 것은 바로 氣格이 모두 밑도는 까닭이지 鋪陳이 影描만 못하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당시의 묘사적이고 서정적 경향과 송시의 사변적이고 說理的 경향을 갈라 대비한 것이다. 여기서 唐詩의 특징으로 거론한 影描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말 그대로 그림자일뿐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것을 어떻게 묘사해낸다는 말인가. 대상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시인의 感情은 실로 그림자와 같아서, 무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시는 그 무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언어로 옮겨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 鋪陳이라 함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진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어느 때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가. 議論을 세워 자신의 주의 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鋪陳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唐詩가 낭만적 감성적 취향이라면, 宋詩는 고전적 이성적 취향이다. 대개 감성의 욕구는 자칫 무절제로 흐르기 쉽고, 이성의 욕구는 흔히 논리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漢詩史의 전개에 있어서 唐詩風과 宋詩風의 변화 교체가 쟁점이 되어 온 것은 그 시대 문학의 풍격과 성향의 자연스런 변화와 관계된다. 錢鍾書는 《談藝錄》에서 "사람의 일생에서 소년시절에는 재기가 발랄하여 마침내 唐詩의 기풍을 띠게 되기 마련이고, 노년시절에 이르면 사려가 깊어져서 宋詩의 기풍을 띠게 되기 마련이다" 라고 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도 이럴진대, 문학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시풍의 변모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시인도 비슷하다. 젊은 시절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과 화려한 비유로 독자를 사로잡던 시인도 만년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담한 언어에 담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이로 보면 唐詩와 宋詩의 구분은 실제로는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되는 것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다음 이수광의 언급은 당시와 송시를 구분하는 한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芝峯類說》에 보인다.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르기를, "꽃 피자 나비들 가지에 가득터니, 꽃 시드니 나비는 다시금 안 보이네. 다만 저 옛 둥지의 제비만이 주인이 가난해도 돌아왔구나. 花開蝶滿枝, 花謝蝶還稀. 惟有舊巢燕, 主人貧亦歸"라 하였다. 또 송나라 사람이 길 가의 나무를 읊어 이르기를, "미친 바람 뽑아서 거꾸러 뜨리니, 나무는 거꾸러져 뿌리까지 드러났네. 그 위의 몇 가지 등나무 줄기, 푸릇푸릇 여태도 모르고 있네. 狂風拔倒樹, 樹倒根已露. 上有數枝藤, 靑靑猶未悟."라 하였다. 이 두 시는 句法이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와 송시의 구분 또한 뚜렷하다.
예로 든 두 시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알겠는가? 이것이 당시와 송시의 차이다.

 


洪萬宗은 그의 〈詩話叢林證正〉에서
당을 존중하는 사람은 송을 배척하여 비루하여 배울 바 못된다 하고, 송을 배우는 사람은 당을 배척하여 나약하여 배울 것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모두 편벽된 언론이다. 당이 쇠퇴하였을 때에는 어찌 속된 작품이 없었겠으며, 송이 성할 때에는 또 어찌 고아한 작품이 없었겠는가.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라고 하여 당시나 송시 어느 일방에만 흐르는 편벽된 경향을 경계하고 있다.

 

唐音, 가슴으로 쓴 시
唐詩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宋詩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觀照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眺望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 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高遠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에서 서정함축을 중시하고 意興이 뛰어난 시를 `唐音`이라 하고,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며 幽玄한 맛을 풍기는 시를 `宋調`라고 일컬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풍격은 실제 작품 상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가. 먼저 당시풍의 시를 감상해보자. 李達은 조선 중기 三唐시인으로 일컬어진 사람이다. 다음은 그의 〈襄陽曲〉이다.
평호 긴 뚝 서편으로 해가 기울고
꽃 아래 노던 이들 취해 비틀거리네.
다시금 교방 남쪽 길로 나서려니
집집 골목마다 백동제 가락일세.

平湖日落大堤西 花下遊人醉欲迷
更出敎坊南畔路 家家門巷白銅 

 

平湖는 중국 남방에 있는 아득히 넓은 호수다. 호수가로 끝도 없이 긴 방죽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장엄한 봄 날의 하루 해가 저물고 있다. 꽃놀이 나온 벗님들은 벌써 술에 잔뜩 취하여 걸음조차 가누질 못한다. 아스라한 수면과 끝없이 긴 방죽, 호수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저녁 노을, 붉은 꽃과 불콰하게 취한 사람들. 그들은 다시 기생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교방 남쪽 길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고 있다. 거리 거리마다에선 흥겨운 노래 가락이 흘러 넘친다.

 


시인은 상상을 통해 멋진 한 폭 봄 날의 장면을 그려 보이고 있다. 무슨 심각한 주제의식이나 철학적 사변이 끼어들 틈은 아예 없다. 이 시를 읽고 감상하는 독자들의 정서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시인이 그려 보이고 있는 이국적 풍물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자신이 봄날의 흥취에 듬뿍 취해 교방 남반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되며, 술집에서 들려오는 농탕한 노래 가락을 듣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시인이 그려 보이고 있는 경물은 그 자체로 합목적적일 뿐 제 3의 의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엄하리만큼 아름다운 봄날의 풍광 속에 그려지는 젊음의 낭만은 곧 관념 속에 남아 있는 태평성대에의 열망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낭만적 상상은 일그러지고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자아를 멀찌감치 떼어 놓아 정서적 淨化와 逸脫을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달이 언어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은 서구 낭만주의 시들이 그려 보이고 있는 이국정서의 표출과 다를 것이 없다. 상상의 화면으로 그려낸 평호의 긴 뚝은 곧 저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湖島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박목월이 그려낸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눈에 비친, 南道 삼백리의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과도 본질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산 깊어 사립도 닫지를 않네.
닭 울어 앞 길을 묻노라니까
누런 잎만 날 향해 날려 오누나.

日入投孤店 山深不掩扉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李達 보다 조금 뒤진 시기의 걸출한 시인 權 의 〈途中〉이란 작품이다. 권필은 우리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 杜詩의 경지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당시풍에 정통한 시인이다.
시를 보면 깊은 산 속에 자리잡은 주막이 있고,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는 삶에 지친 나그네가 있다. `黃葉`이라 했으니 계절은 늦은 가을이다. 하루 종일 길을 걸은 나그네는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에야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은 주막에 들 수가 있었다. 2구에서 밤까지 열어 둔 사립문이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의 내면 깊숙히 자리 잡고 있는 불안과 초조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깊은 밤까지 도적 걱정 없이 문을 열어 둘 수 있는 편안함을 그는 부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자신을 내몬 부조리한 현실이 더 이상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멀어진 데 대한 안도감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닭이 우는 가을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나그네는 다시 쫓기듯 길을 재촉한다. 뼈를 저미는 추위.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을 묻는 나그네 앞에 들려오는 대답은 공허한 바람소리와 자신을 향해 날려오는 누르시든 낙엽 뿐이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갈 길은 있지도 않았다. 인생이란 결국 길을 찾아 헤매이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 아닌가. 길을 가로막고 달려드는 낙엽은 시인에게 인생은 이와 같이 덧없는 것이라고, 길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대개 20자에 불과하지만 길가는 나그네의 辛苦와 뼈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 드는 시이다.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흰 머리의 어버이 근심하실까 저어하여,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이가 천장인데
금년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말하네.

欲作家書說苦辛 恐敎愁殺白頭親
陰山積雪深千丈 却報今冬暖似春

 

선조 때 시인 李安訥의 〈寄家書〉란 작품이다. 이안눌은 평생에 杜甫의 시를 일만 삼천 번을 읽었다는 시인이다. 그가 함경도 북평사의 벼슬을 살러 북방에 가 있을 때 집에 편지를 보내면서 지은 시이다. 문집에 보면 편지를 받고 지은 시가 위 시 바로 앞에 실려 있다. 그 사연인 즉, 지난 해 집에서 보낸 편지와 겨울 옷을 해를 넘겨서야 받았는데, 집 식구는 남편이 변방에서 고생하느라 야윈 것도 모르고, 옷을 예전 입던 옷에 맞춰 보낸 까닭에 헐겁기 그지 없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위 시는 그 편지와 옷을 받고 보낸 답장이다. 따뜻한 남쪽 고향을 떠나 北風寒雪 휘몰아치는 낯선 변방에서 키를 넘게 쌓이는 눈과 혹독한 추위 속에 보낸 겨울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몸도 견디다 못해 예전 옷이 헐거울 정도로 야위었다. 이러한 괴로움을 편지에 쓰려 하니 안 그래도 변방에 자식을 보내 놓고 근심에 쌓여 계실 늙으신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도리어 `어머님! 이번 겨울은 마치 봄처럼 따뜻합니다`하는 거짓말을 적고 말았다는 것이다.

 

먼 변방 산은 길고 길은 험하니
서울에 닿을 제면 한 해도 늦었겠지.
봄날 올린 편지에 가을 날자 적은 뜻은
근래 부친 편지로 여기시라 함일세.
塞遠山長道路難 蕃人入洛歲應 
春天寄信題秋日 要遣家親作近看

 

이어지는 둘째 수이다. 아득한 변방, 험한 길, 인편을 구해 편지를 보낸대도 이 편지는 년말이 다 되어서야 서울에 닿을 것이다. 그래서 봄날 쓰는 편지에 가을 날짜를 적었다. 조금이라도 날짜가 가까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까닭이다. 봄날 보낸 편지를 겨울에야 받는다면 또 그 상심은 오죽하시겠는가.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붉은 마음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와 같이 唐詩는 가슴으로 전해오는 정감의 세계를 노래한다. 때로 들뜬 어감으로, 간혹 슬픔에 젖어 노래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는 법은 좀체 없다. 이런 까닭에 唐詩風의 시는 이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 보다는 감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즐겨 불리워 진다. 당시풍과 송시풍이 詩史의 전개에서 반복 교체의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宋調, 머리로 쓴 詩
당시풍에 대비되는 송시풍의 특징을 일괄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禪宗과 性理學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철리적 성향이 강하고, 쓸데 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상에 있어서는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짐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에 따라 시의 공용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표현은 다분히 산문적이고 서술적이 되어, 정감이 풍부하고 유려한 당시에 비해 송시는 이지적이고 심원한 풍격을 갖추게 되었다. 또 宋代에 발달한 詞文學은 詩에 비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세계를 노래하여, 宋代에는 詩와 詞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종일 짚신 신고 발길 따라 가노라니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푸르도다.
마음에 생각 없으니 어찌 형상에 부림 당하며
道는 본시 無名하니 어찌 거짓 이룰까.
간 밤 이슬 마르지 않아 산 새는 지저귀고
봄 바람 끝나지 않았는데 들 꽃은 피었구나.
지팡이 짚고 돌아갈 때 천봉이 고요터니
푸른 절벽 어지런 안개에 저녁 햇살 비쳐드네.
終日芒鞋信脚行 一山行盡一山靑
心非有想奚形役 道本無名豈假成
宿露未晞山鳥語 春風不盡野花明
短공歸去千峯靜 翠壁亂烟生晩晴

 

우선 앞서 송시풍을 대우해 주지 않는다며 반란을 일으켰던 金時習의 〈無題〉라는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앞서 본 세 작품과는 우선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가 판이하다. 무언가 그냥 읽기만 해서는 의미가 명료하게 잡히지도 않는다. 3.4구로 보아 시인은 지금 무엇인가 묵직한 주제를 말하고 있는듯 한데 그것은 무엇일까?

 


1구에는 짚신을 신고 하루 종일 길을 가는 나그네가 나온다. 그의 생각에 눈 앞에 있는 저 산만 넘어가면 길이 끝나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산은 산에 연하여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1.2구는 옛 시에 "저 들판 끝난 곳이 바로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금 청산 밖에 있도다. 平蕪盡處是靑山, 行人更在靑山外"라 한 탄식을 일깨운다.

 


3.4구에서는 1.2구의 체험이 이끌어낸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하루 종일 몸을 피곤하게 길을 걸었던 것은 저 산의 끝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내 마음의 집착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마음에서 걷어내 轉迷開悟하고 나면 공연히 육신을 괴롭힐 이유가 없다. 4구에 가서야 시인은 의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난데 없이 道는 본래 無名한 것인데 이것을 어찌 이루고 말고 하는 이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道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망, 즉 成道 成佛에의 욕망은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막아 서듯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 빚어낸 허망한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1.2구의 언술은 求道의 行脚에 나선 구도승의 수행 과정을 비유하고 있고, 3.4구는 그 과정 끝에 도달한 어떤 깨달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5.6구에 오면 시적 화자는 숨고 사물의 세계를 노래한다. 간 밤의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새들은 어느 새 날이 샌 것을 알고 광명을 노래한다. 봄 바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꽃들은 망울을 터뜨린다. 누가 알려 주었는가. 아무도 알려준 사람은 없다. 알려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알아 지저귀고 망울 부프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求道의 깨달음도 이와 같아서 누가 알려주어서 관념으로 깨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洞然自得, 豁然貫通 해야 한다.

 


이제 먼 데 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화자는 다시금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온다. 7구에서 `千峯이 고요하다`고 한 것은 사실 앞서의 깨달음이 가져온 내면의 고요, 내면의 平靜을 말하려 함이다. 돌아온다는 것은 밖을 향해 있던 집착에서 놓여나 본래의 자신에게로 返本함을 뜻한다. 8구의 `푸른 절벽 어지런 안개`는 무슨 말인가. 절벽은 아득한 높이로 사람의 길을 막는다. 앞선 행각의 길에서 이 절벽은 無門의 關門처럼 앞길을 막았고, 어지러운 안개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끔 혼란을 가중시켰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迷妄을 던져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늦저녁의 햇살`이 비쳐들어 이전 나를 괴롭히던 妄執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볼 때 위 시는 자연 속을 서성이는 나그네의 노래 쯤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의미를 하나 하나 따져 보면 뜻밖에 이같이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어느 高僧의 上乘法文과 접하고 난 느낌마져 든다. 흔히 큰 사찰의 대웅전 둘레에 그려진 尋牛圖의 이치를 詩로 표현한다면 이 보다 적절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김시습의 위 시는 宋나라 어느 女尼가 지은 〈悟道詩〉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悟道詩란 도를 깨달은 순간의 法悅을 노래한 시이다.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은 보지 못했네
짚신 신고 산 머리 구름 위까지 가 보았지.
돌아올 때 우연히 매화 향기 맡으니
봄은 가지 위에 벌써 와 있었네.

終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嶺頭雲
歸來偶把梅花臭 春在枝上已十分

 

그녀는 봄을 찾기 위하여 하루 종일 온 산을 찾아 헤매이고 있다. 산 꼭대기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그녀는 봄을 찾지는 못하였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이제 봄을 찾으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코 끝에는 매화의 향기가 스쳐오는 것이 아닌가. 정작 봄은 자기 집 뜰 매화가지 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봄을 찾으려고 온 산을 헤매이는 것은 道를 깨달으려고 求道의 행각에 나섬을 뜻한다. 그녀는 온갖 고행을 무릅쓰며 일념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온 산 어디에도 없는 봄처럼, 道의 실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지친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메텔링크의 파랑새 이야기를 떠올려 준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파랑새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매이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파랑새는 정작 자기 집 마당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우리나라에 있어 송시풍은 흔히 濂洛風의 哲理的 내용을 노래한 시풍을 지칭하는 의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즉 자연물을 통해 物我一體의 溫柔敦厚하고 沖澹蕭散한 경지를 노래함으로써 吟詠性情 하는 시풍으로 대표된다. 퇴계의 시를 한 수 보기로 하자.

 

이슬 젖은 풀잎은 물 가를 둘러 있고
조그마한 연못 맑고 깨끗해, 모래도 없네.
구름 날고 새 지남은 어쩔 수 없다지만
때때로 제비 와서 물결 찰까 두려워라.

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파時時燕蹴波

 

퇴계가 연곡리라는 곳에 갔다가 맑은 못을 보고 느낌이 있어 지었다는 시이다.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연못 가에는 여리디 여린 풀잎이 이슬에 함초롬히 젖어 있다. 연못의 물은 어찌나 맑은지 모래조차 보이질 않는다. 그 위로 이따금 지나가던 구름이 와서 쉬고 새가 날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거울 같이 매끄러운 그 수면 위로 제비가 날아와 물결을 차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제비가 물결을 차면 수면의 평정이 깨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연못 가에 홀로 엎드려 맑고 잔잔한 수면 위를 바라보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퇴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 자체의 세계가 아니다. 맑고 일렁임이 없는 못은 사실은 일체의 삿됨이 개재됨 없는 純粹無垢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를 두고 제자인 金富倫은 "천리가 유행함에 인욕이 여기에 끼어듦을 두려워 한 것이다. 天理流行而恐人欲間之"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純善하여 맑고 깨끗하기가 이슬 머금은 풀잎이나 물결 없는 수면과도 같다. 그러나 그 위로는 변화하는 구름과 새들이 지나감으로써 그 고요와 평정을 위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타고난 그대로의 純善한 본성을 지키려 해도 언제나 人欲이 여기에 끼어들어 순수를 잃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제비가 물결을 차고 지나감을 두려워 하듯 혹 자신의 삶 속에 인욕이 개입되어 본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시인은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인이 표층에서 묘사하고 있는 외물은 시인이 전달코자 하는 내용의 표피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깊고 幽遠한 사변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

 


송시풍의 시는 이와 같이 담담한 가운데 깊이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당시가 대상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레 시인의 情意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데 반해, 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情意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배 속에 넣은 먹물
에이브럼즈는 《거울과 등불》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이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先知者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시인은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춰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당시와 송시도 거울과 등불이라는 문학의 두 기능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다만 `나는 당시풍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송시풍의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내가 빨간색을 좋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파란색을 좋아하면 안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갖추지 못한 작품을 두고는 이러한 논쟁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 때 우리 시단에서도 참여시니 순수시니 하는 이름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편에서는 암흑의 시대에 거울만 닦고 있는 시인을 향해, 창 밖에서 천둥 번개가 치든 말든 안방에서 내방가사나 읊고 있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라고 매도하고, 또 한켠에선 등불을 높이 들고 무조건 따라오라고만 외치는 시인을 향해 시가 무슨 혁명의 도구냐고 항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시의 겉모양을 갖추었다 해도 선동가의 연설이나 삐라를 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슴을 저미는 감미로운 유행가의 가사도 시와는 구별되는 법이다.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好惡의 판단이 있을 뿐 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詩歌 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은 한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堆積場이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惑世誣民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다시 沈義의 〈記夢〉으로 돌아가보자. 꿈 속의 詩 왕국에서 현세에서는 누려보지 못한 得意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沈義에게 群臣들의 시샘에서 비롯된 탄핵이 올라오고, 이에 천자는 마지 못해 다시 塵世로 복귀할 것을 명한다. 이러한 결구는 대개 覺夢을 위한 장치인데, 복귀에 앞서 李穡은 沈義를 깨끗히 목욕시키고 칼로 배를 갈라 먹물 몇 말을 붓는다. 그리고는 40년 뒤에 다시 만나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홀연 배가 칼로 찌르듯 아파, 놀라 깨어보니 배는 북처럼 불러 있고, 殘燈은 꺼질듯 가물거리며, 병든 아내는 곁에 누워 끙끙대고 있을 뿐이었다. 꿈 속에서의 환상이 급전직하 티끌세상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沈義는 복수가 차서 배가 부른 것을 李穡이 앞으로 살 40년 동안 인간 세상에서 써 먹으라고 넣어준 먹물로 치부하는 오만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리.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 소리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 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 지도 모르겠다. 天上의 白玉樓가 준공되었으나 上樑文을 지을 사람이 없어 옥황상제가 唐나라의 유명한 시인 李賀를 하늘 나라로 불러 갔던 것처럼, 티끌 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배 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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