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의 명풍경을 찾아서_월출산 기암봉

醉月 2011. 6. 18. 10:46

나는 산을 보고 산은 나를 보네
암봉의 추상미와 위험의 카타르시스


▲ 월출산은 영암의 너른 벌판에 땅속에서 갑자기 솟아난 듯이 우뚝 서 있다. 우뚝우뚝 솟은 기암봉들이 그려내는 하늘금은 날름날름 입맛을 다시는 화마(火魔)의 혓바닥처럼 보인다. 이 산에서 불의 모습을 연상한 것은 이중환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월출산은 한껏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火星)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다'라고 했다.《사진=정정현 차장》

영암의 너른 벌판에 수직의 암봉이 땅속에서 갑자기 솟아난 듯이 우뚝 서 있다. 마치 창해(蒼海)의 고도(孤島)처럼 보인다. 우뚝우뚝 솟은 기암봉들이 그려내는 하늘금은 날름날름 입맛을 다시는 화마(火魔)의 혓바닥처럼 보인다. 월출산이다. 이 산에서 불의 모습을 연상한 것은 이중환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월출산은 한껏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火星)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다’(이익성 역)라고 했다.

나는 5월의 초순, 월출산의 침봉들이 불꽃처럼 피어 있는 모습을 바람폭포에서 올려보고 있었다. 월출산의 천황사 지구 들머리에 있는 천황사 야영장에서 바람골을 따라 20여 분 걸어 들어온 곳이다. 칼끝처럼 날카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암봉들은 머리를 뒤로 젖혀 올려보아야 겨우 보인다.

보기에 좋은 산, 월출산

바람폭포에서 장군봉을 오른쪽으로 끼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한 30여 분 걸었을까. 거대한 바위 모롱이를 돌아서자 갑자기 시계가 툭 열렸다. 광암터일까. 지도를 꺼내 펼쳐본다. 남쪽에는 아까 바람폭포에서 보았던 사자봉과 매봉이 보였다.

동쪽으로 보이는 것이 장군봉이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우선 거칠게 다듬은 석상처럼 바위절벽이 다섯 개 서 있다. 건장한 장정들이 곧은 자세로 서 있는 듯하다. 이 직립한 바위의 형상에서 적진을 노려보고 있는 장군의 풍모를 연상한 것일까.

산은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보기에 좋은 산과 걸어 오르기에 좋은 산. 나는 월출산이 어느 편인가 하면 보기에 좋은 산이라고 생각한다. 월출산의 가파른 바위 경사와 매끈한 돌 피부는 걷는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물론 암봉을 타고 오르는 재미는 있을 터이지만, 그것보다는 월출산에서는 아무 데나 눈길을 주어도 갖은 모습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 월출산 북쪽 독립문바위. 월출산에서는 기이한 바위에 숨어 있는 만물의 형상을 찾는 즐거움을 내치기가 쉽지 않다. 이 무상(無相)의 바위산에서 이름을 좇아 그 형상을 찾는 것은 흰 화선지에 굵은 붓으로 단숨에 그린 한 덩이의 검은 물체를 석수도(石壽圖)라고 하고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것과 통하는 데가 있다. 《사진=허재성 기자》

걸음을 옮기다가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해서 뒤돌아보면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솜털 같은 구름을 쓴 예각의 바위 산봉우리가 우쭐거리듯이 서 있는 풍경이 이 산에는 아무렇게나 있다. 그러니 차라리 너럭바위에 앉아 그 산봉우리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듯하다. 아니면 영암의 평야에서 낙엽수 가지 사이나 밭두렁에 키 높이 자란 풀밭에 숨어 들판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이 산을 훔쳐보는 것을 어떨까.

이 산을 보기에 좋은 산이라고 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지만 매봉, 사자봉, 장군봉, 남근바위는 물론이거니와 귀뜰바위, 구멍바위, 발바위, 돼지바위, 칼바위, 탕건바위, 시루바위, 거북바위 등 이름이 붙여진 바위에는 그 사물들이 마법의 주술에 결박되어 있는 듯이 바위틈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모호한 윤곽선의 바위도 붙여진 이름이 부르는 대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월출산에서는 기이한 바위에 숨어 있는 만물의 형상을 찾는 즐거움을 내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무상(無相)의 바위산에서 이름을 좇아 그 형상을 찾는 것은 흰 화선지에 굵은 붓으로 단숨에 그린 한 덩이의 검은 물체를 석수도(石壽圖)라고 하고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것과 통하는 데가 있다. 추상의 형상에서 생생한 현실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돌의 미학

나는 바위틈으로 난 좁은 길을 일러 부르는 통천문을 지나 몇 개의 철 계단을 오르고 난 후 천황봉 정상에 섰다. 천황봉을 기점으로 칼날 같이 날카로운 바위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동쪽으로 사자봉과 그것보다 조금 더 높은 암봉이 용립(聳立)해 있다. 그 뒤로 영암의 들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산정으로 불어왔다. 나는 산정에서 한참 동안 암봉이 수묵화처럼 솟아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 월출산 정상 동쪽 조망. '무미(無味)한 속에서 최상의 미(味)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돌의 미학과 통해 있다

골산(骨山)인 월출산오대산이나 지리산과 같은 육산(肉山)에 비하여 생명감 넘치는 산은 아니다. 꺼칠한 암석과 그 위에 퇴적된 얕은 토양에는 교목이 자라지 못한다. 이 산의 식생이란 것이 고작해야 키 낮은 관목이 산주름을 겨우 가릴 정도다. 대형 포유류도 거의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산이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왜일까.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풍상에 깎여 마른 가지처럼 앙칼진 암봉에서 찾고 싶다. 그 암봉의 아름다움을 조지훈의 말로 대신한다.

‘무미(無味)한 속에서 최상의 미(味)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돌의 미학과 통해 있다.’(돌의 미학에서)

이런 고도의 정신성이 골산을 그지없이 사랑하는 바탕이 된다. 또 조지훈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다’라는 문장도 월출산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나는 산정에서 바람재 안부와 향로봉을 바라보면서 가쁜 숨을 가라앉혔다. 시원하던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자 하산을 서둘렀다. 바람폭포에서 올려다본 구름다리를 직접 건너보고 싶었다.

안전한 위험이 주는 미적 쾌감

눈앞에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은 마치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매봉과 사자봉이다. 굵은 직선의 선분이 그 두 봉우리를 이어주고 있다. 구름다리다.

지상에서 120m 높이에 설치된 그 다리를 두어 명의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양손으로 난간을 움켜쥐고 천천히 걷는 모습이 위태롭다. 그것을 보고 있는 이쪽도 덩달아 아슬아슬해진다.

월출산은 보기에 위태로운 산이다. 수직으로 직립한 거친 암석지반은 쉽게 등정하기 힘든 산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바위가 손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굴러 떨어질 듯이 벼랑 끝에 얹혀 있는 모습이나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정도로 좁은 바위꼭대기는 이 산을 등정할 엄두도 못 내게 한다.

그런데도 이 산이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런 가파르고 위험한 암봉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뾰족하게 서 있는 암봉에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구름다리나 사다리 계단이 이 산을 매력적이게 한다. 그것들이 야생의 자연을 인기척 가득 찬 풍경으로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턱없이 높은 계단참은 산행을 짜증나게 하지만, 그래도 철계단의 난간을 꼭 잡고 암봉의 총석림(叢石林)을 발 아래로 보는 짜릿한 쾌감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월출산의 풍경체험이다.

위험한 경관은 불안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을 담보하고 있을 때에는 즐거움이 된다. 제이 애플톤도 그의 저서 '경관의 경험'에서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우리는 위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을 더 좋아한다’라고 말할 정도다.

층암기봉(層巖奇峰)의 아슬아슬한 장관을 피부에 육박하도록 느끼려면 역시 산속에 들어와야 한다. 결국 월출산을 보기에 좋은 산이라고 한 것이 거짓이 된 셈이다. 하기야 보기에만 좋은 산이 어디에 있으랴.

보고 보여지는 시선의 교향(交響)

▲ 월출산 구름다리.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구치듯이 서 있는 기암봉이 사방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 바위 봉우리를 하나하나 바라본다. 바로 그 때, 흰 암봉의 산들이 도리어 구름다리 한 가운데에서 서 있는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아, 그렇다. 산도 나를 시치미를 뚝 떼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이충우 기자》

드디어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리의 폭은 한 사람이 지나가면 꼭 맞을 정도의 너비다. 양손으로 난간을 꼭 잡고 조심스레 건너간다. 앞만 보면서 가면 그리 무섭지도 않다. 한 발 두 발 앞으로 나아간다. 중간쯤 나아갔을 때다.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골을 따라 찬바람이 솟구쳐 올라왔다. 순간 싸늘한 느낌이 발 아래에서 온 몸으로 전해왔다. 나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내가 깊이를 짐작도 할 수 없이 깊은 골짜기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짜릿한 느낌에 똥끝이 탔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구치듯이 서 있는 기암봉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 바위 봉우리를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바로 그 때였다. 흰 암봉의 산들이 도리어 구름다리 한 가운데에서 서 있는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그들은 무서움 많은 나를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아아, 그렇다. 오늘 온종일 산을 보고 다녔지만 보고 있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산도 그런 나를 시치미를 뚝 떼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ㆍ기고자:강영조 동아대학교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 yjkang@mail.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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