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문학 잡아먹어?
문인이 술 잡아먹어?” 문인과 술, 그 불콰하면서도 들쭉날쭉한 포옹
문학이 있는 곳에 늘 술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살붙이는 그 술을 함께 마시는 문학 이야기다.
그 술과 함께 먹는 안주처럼 마구 씹히는 게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인들과 술. 그 오묘한 풍경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문인들은 술을 좀 더 좋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길목에 선 노리개쯤으로 여긴다. 문제는 그 술을 다루는 문인들 속내에 있다. 술을 기생오라비처럼 살살 잘 다루는 문인이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삭이지 못해 술에게 분풀이하는 문인도 있다.
한국문단을 이야기하자면 술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문인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문단이 지닌 속내를 더듬을 때 술이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처럼 꽤 서운한 까닭은 따로 있다. 문인들과 술에 얽힌, 그야말로 기절초풍을 몇 번이나 해도 모자랄 만큼 별의별 희한한 이야기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옛말에 술은 ‘술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 했다. 문학은 다르다. 문학작품 한 편을 쓸 때도 술처럼 그렇게 술술술 잘 써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문인들은 한 작품을 준비할 때 술처럼 술술술 나오기 바라면서 술을 술술술 마신다. 한 작품을 끝냈을 때는 술을 더욱 즐겁게 술술술 마신다.
술과 문학은 앙숙이자 살가운 벗이다. 술이 어떤 때는 문학과 문인을 통째 잡아먹기도 한다. 문학과 문인이 어떤 때는 술을 통해 이 세상을 깡그리 잡아먹기도 한다. 문학과 술, 문인과 술은 수없이 맞붙어도 언제나 무승부다.
술과 문학은 앙숙이자 살가운 벗
21세기 들어 젊은 문인들은 술을 ‘너무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멀리 해서도 안 된다’(不可近不可遠)며 술좌석에 은근슬쩍 끼었다가 약삭빠르게 잘도 빠진다. 지난 1980~90년대에 그런 약삭빠른 짓거리를 하다간 문단에서 살아남기(?) 꽤 어려웠다.
시대가 어두운 탓도 있었다. 먹고살기도 너무 빠듯했다. 문인들은 그때 술을 살가운 동무로 삼아 슬픈 절망을 이겨냈고, 술과 안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경남 하동 출신인 정규화(1949~ 2007) 시인이 오죽했으면 “서울에 가서 유명한 문인들을 만났더니 아침부터 술만 자꾸 사주더라. 나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말이야”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정 시인은 문학인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시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요금을 달라고 하자 마치 시인이 큰 벼슬이나 보증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나, 시인이여!”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그냥 가려 했다. 정 시인은 그 자리에서 파출소까지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술과 문학, 문인과 술. 이 둘 사이에는 배꼽을 잡고도 웃지 못 할 무슨 우스꽝스러운 일이 그리 많이 있었던 것일까. 술이 문학과 웃통을 벗고 죽자 사자 싸우고, 문학이 술에 온몸을 던져 싸운 까닭은 무엇일까. 원고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때, 그 가난한 문인들이 왜 남보다 술을 더 좋아했을까. 다음 술 이야기에 나오는 문인들이 ‘이 새X 이거 정말 미친놈 아냐?’라며 글쓴이 뺨따귀를 거세게 때릴지. 괜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술에 젖어서 산다
피에 젖어서
똥에 젖어서
사는 거보다
나은 일이다
한 말의
술을 마시고
한 말의 오줌을 싸면
나는 텅 빈다 -최명학 ‘술’ 모두
1970년대 끝자락. 내가 시인이 되는 꿈을 꾸며 열심히 시를 쓸 때 고향인 경남 창원에 있었다. 그때 자주 만난 문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환경시인 ‘독수대’를 쓴 이선관(1942~2005) 시인과 최명학(1952~2002) 시인이 있다. 이 시인은 한 살 때 백일해 약을 잘못 먹어 한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으나, 뇌성마비 2급 장애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강원도 홍천 출신인 최 시인은 군에서 제대한 뒤 곧바로 어머니를 따라 마산으로 이사를 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최 시인은 그때 마산 부림시장 주변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작고 허름한 대폿집에서 툭하면 글쓴이와 술벗을 삼았다. 그는 ‘탁주 반 되는 밥 한 그릇’이란 표어가 나붙은 그런 대폿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배가 너무 고프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나를 술벗으로 삼은 까닭도 사실은 배가 고파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였다. 글쓴이는 그래도 그곳이 아버지께서 논 서너 마지기를 짓고 있는 고향이었기에 가끔 마시는 막걸리 값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다.
하루는 어스름이 질 무렵 최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산 창동 골목에 있는 잔술집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때 마산 창동 골목에는 정종 한 잔(맥주컵)을 따뜻하게 데워 파는 잔술집이 꽤 많았다. 그 잔술집들은 1000원짜리 정종 한 잔만 시키면 안주가 10가지 넘게 공짜로 무한정 나왔다. 술시중을 드는 예쁘장한 아가씨들도 있었다. 그 아가씨들에게 술시중을 받으려면 정종을 한 잔 시켜줘야 했다. 아가씨들은 잠시 앉아 술시중을 들다가 순식간에 정종 한 잔을 쪼옥 빨아 마신 뒤 한 잔 더 시켜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시가 곧 술이고, 술이 곧 시야. 좋은 시를 쓰려면 이 술을 애인 삼아야 해. 한 잔 마셔. 왜 그리 술을 베어 마셔. 술값 땜에 그래? 걱정 마. 이 집은 내 단골이어서 외상을 달아놔도 돼.”
최 시인이 이때 한 말은 자기 이름으로 외상값을 달아놓을 테니 나더러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었다. 선배문인이 그렇게 말하니 무작정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머리를 번쩍 하고 스치는 게 있었다. 최 시인은 말술을 마시는 문인이어서 잔술을 마시다간 술값이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처럼 말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대병 한 병을 시키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더 싸고 많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히야~ 니도 간뎅이가 부었구먼. 시 한 편 건지는 건 양에 안 차니까 아예 시집 한 권을 건지자 이 말이네.”
“얼씨구!”
“절씨구!”
“가시나야, 수류탄 안전핀 다 뽑고 콱 죽어뿌자”
그날, 정종 대병 한 병을 시켜 주전자에 반쯤 따라 데워가며 이선관, 최명학 시인과 함께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를 외치며 잔을 수없이 부딪쳤다. 아가씨들도 신이 났던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우리 일행들 볼에 쪼옥~ 소리가 나도록 들이댔다. 볼록한 젖탱이를 어깨와 팔에 슬슬 문지르며 갖은 아양을 떠는 아가씨도 있었다.
“○○양! 니 가슴 양쪽에 단 그 멋진 수류탄(젖가슴) 안전핀을 뽑으려면 어떡해야 돼?”
“수류탄 하나에 대병 한 병씩이니까 두 병째 시키면 양쪽 안전핀을 다 뽑을 수도 있어예.”
“요 가시나들이 굉장히 못된 년들이네. 대가리 소똥도 제대로 안 벗어진 것들이 잔머리만 늘어가지고. 그래. 기왕 베린(버린) 몸, 한 병 더 가꼬 와뿌라 고마(가져와라). 올 가시나 너거캉 우리캉 수류탄 안전핀 다 뽑고 같이 콱 죽어뿌자.”
우리 일행은 아가씨들과 그렇게 제법 진한 농을 주고받으며 정종을 세 병 남짓 마신 뒤 밤 10시가 훨씬 넘어 그 술집을 나왔다. 아가씨들이 ‘수류탄 안전핀까지 뽑아놓고 그냥 가면 어떡하냐’는 소리를 귀로 흘리며.
나는 창동에 살고 있었던 이 시인을 부축해 집까지 모신 뒤 최 시인과 택시를 잡아탔다. 창원으로 가는 길목인 북마산에 살고 있었던 최 시인과 같이 타고 가다 내려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최 시인과 어떻게 헤어진 줄은 지금도 모른다. 택시를 타자마자 졸았기 때문에. 그렇게 비몽사몽 창원에 닿아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비척비척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어어~ 하는 순간 그대로 논둑 아래 물꼬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래도 시원했다. 잠시 그렇게 물꼬에 올챙이처럼 처박혀 있으니 술이 어느 정도 깨는 듯했다. 어떻게 집에 갔는지도 몰랐다. 그 다음날 새벽, 그야말로 온 집안이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저 아 저기 완전히 미쳐뿐 거 아이가. 간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온몸에 진흙탕을 잔뜩 덮어쓰고 오지 않나. 겨우 씻겨가꼬 재워놨더니 방 벽이 통시(화장실)인 줄 알고 오줌을 철철 갈기지를 않나.”
“‘수류탄! 수류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터진다’니…. 그기 무슨 말이고. 아무리 잠꼬대라 캐도 뜬금없이 수류탄이 웬 말이고. 지뢰밭에라도 댕겨왔나.”
마산과 창원, 진해 등지에 있는 문인들이 자주 가는 술집은 막걸리와 소주, 맥주 등을 골고루 파는 ‘고모령’과 소주와 맥주만 파는 ‘성미’였다. 그 다음으로 자주 찾은 곳은 부림시장 안에 있는 ‘독수대’(이선관 시인 시 제목을 따서 지었음)와 부림시장 난전, 고갈비(고등어구이) 집, 어시장 난전 등이었다.
그 술집에서 자주 만난 문인은 시인 정진업(1916~83), 박재호(1927~85), 황선하(1931~2001), 이광석, 정목일, 김태수, 김종석, 하길남 등이 었다. 이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즐겨 마셨지만 술주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 점잖은 문인들이었다.
대통령도 갖고 노는 대한민국 소설가
1980년대 허리춤께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문학을 제대로 하자는 야무진 꿈을 품고. 나는 그때 서울에서 살고 있는 고향 선배 정규화 시인을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정규화 시인을 만나면 뭔가 제대로 된 문학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나를 그런 문인들에게 소개할 것만 같았다.
그런 어느 날 하루는 정 시인을 만나기 위해 북한산으로 갔다. 정 시인이 북한산 계곡에서 문인 몇 명과 개를 한 마리 잡아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마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구파발에서 북한산 쪽으로 1㎞ 남짓 올라가면 왼편으로 민가가 몇 채 보이는 숲 속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날,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저만치 바위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쭈욱 내밀며 올라가자 소설가 박태순과 강승원, 안석강, 구중관, 시인 정규화, 출판인 김규철이 계곡에 개고기가 담긴 시커먼 솥단지를 걸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4홉들이 소주를 수십 병째 비우고 있었다. 그분들을 향해 일단 고개부터 꾸벅 숙인 뒤 가까이 다가가자 정 시인이 나를 소개했다.
“이소리라고, 시를 쓰는 친구입니다.”
“소리? 소리 아버지 쏘리, 소리 아들 쏘리, 소리 형도 쏘리….”
“그래? 잘 왔어. 앉어, 앉어.”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아들 짱구, 짱구 형도 짱구….”
소주에 거나하게 취해 ‘짱구타령’을 부르던 박태순 소설가가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내게 주더니 어서 마시라는 손짓을 했다. 소주를 한 잔 쭈욱 마신 뒤 박태순 소설가에게 잔을 건네자 이번에는 안석강 소설가가 개고기 한 점을 내 앞에 기세 좋게 내밀었다.
“선생님…전…개고기 못 먹습니다.”
“이 친구 이거 봐라. 경상도 촌놈이 이렇게 맛있고 몸에 좋은 개고기를 못 먹는다고? 이 친구 이거 웃기는 친구로구먼. ‘고향 앞으로’ 해서 개고기 먹는 법부터 배워가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되겠구먼.”
개고기를 앞에 놓고 먹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박태순 소설가가 측은하다는 듯이 한마디 툭 내던졌다.
“뭐 하러 서울까지 올라왔어. 그냥 고향에서 조용히 글을 쓰면 될 걸. 서울이라고 시골보다 별다른 게 있겠어. 입에 풀칠하기는 시골보다 조금 나을지 몰라도 서울살이는 인정사정, 피도 눈물도 없는 동네야. 규화야, 너가 이 친구 많이 도와줘.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아들 짱구, 짱구 형도 짱구….”
“….”
소설가 강승원과 구중관, 시인 정규화, 출판인 김규철은 박태순, 안석강 소설가가 하는 얘기에 빙긋 웃으며 개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만 계속 홀짝거렸다. 그렇게 30여 분쯤 지났을까. 입만 열었다 하면 청산유수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왕구라’에 목소리가 가장 센 안석강 소설가가 김규철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규철아! 너 지금 눈에 콩깍지 씌었냐? 소주가 또 다 떨어졌잖아. 어르신들이 몸소 개고기까지 삶아 젊은 넘 몸보신까지 시켜줬으면 이깟 소주 정도는 눈치껏 척척 조달해야 되지 않아.”
“이거 큰일이네요. 요 아래 가게에 있는 소주는 좀전에 떨이 해버렸거든요. 어쩌죠?”
“야 이 ××야! 그게 말이냐? 말똥덩어리냐? 저 아래 마을에 가서 사오든가 구파발까지 가서 사오든가 그건 네 자유야.”
“돈은요?”
“아, 북한산 산신령인 김규철이가 북한산 바닥에서 돈이 없어 소주 몇 박스 못 사온다고 하면 말이나 돼? 얼른 가서 나 팔고 아예 소주 10박스쯤 가져와.”
“이곳에 살지도 않으시는 선생님께서 여기 있는 가게주인들을 어찌 다 아십니까? 북한산 산신령인 저도 잘 모르는데요?”
“난 북한산 산신령보다 훨씬 더 높은 대한민국 소설가야, 소설가! 대한민국 소설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게 똥종이지, 어디 사람 ××야. 별것 아닌 봉이 김선달이도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는데, 명색이 대통령도 당선시켰다 떨어뜨렸다, 그날 기분에 따라 맘대로 갖고 노는 대한민국 소설가가 소주 몇 박스에 좌지우지하면 되겠어.”
술잔 때문에 단골 술집 바꾼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귀천’ 몇 토막)라는 시를 남기고 정말 하늘로 돌아간 시인 천상병(1930~93). 젊은 날에는 소주, 맥주 등 닥치지 않고 마구 마셨던 그도 말년에는 막걸리를 즐겼다.
그가 경기도 의정부에 살 때 자주 가던 단골 막걸리집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천 시인이 갑자기 단골 막걸리집을 버리고 다른 막걸리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천 시인 부인 목순옥 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요즘 새로 가는 막걸리집 주모가 아주 예쁜가 보죠?”
“문디 가시나 아이가. 그 막걸리집은 예전에 다니는 그 집보다 술잔이 훨씬 더 크다 아이가.”
시인 천상병에 얽힌 이야기는 이외에도 참 많다. 한국문단에는 시인 천상병에 얽힌 여러 이야기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어이가 없는 일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터진다.
내가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한국작가회의)에서 총무 간사를 맡아 일할 때도 그랬다. 시 ‘국토’로 널리 알려진 조태일(1941∼99)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을 1988년 들머리께 있었던 ‘양주 오바이트 사건’도 그랬다.
시인 조태일은 생맥주를 참 좋아했다. 대낮이든 저녁이든 밤이든 그는 생맥주집에 들어가 앉으면 500cc 생맥주를 10잔 이상 연거푸 마시곤 했다. 안주도 잘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것은, 그는 아무리 생맥주를 많이 마셔도 화장실에 한 번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넘들이 그기가 왜 그리 짧아! 그렇게 파닥거려서야 제대로 된 시나 소설을 쓸 수 있겠어. 술도 문학과 쌍둥이인데, 느긋하게 발효를 시킬 줄 알아야지.”
“선생님! 그 비법 좀 알려주십시오.”
“비법은 없어. 시인이 타고나는 것처럼 술꾼도 타고나야 하는 거야.”
조 시인은 일주일에 두어 번씩 아침 일찍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로 나왔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생맥주를 마실 때만 빼곤 거의 입에 문 채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말도 별로 없었다. 꼭 해야 할 말만 했기 때문에 그가 지닌 속내를 읽으려면 얼굴표정을 보면서 눈치껏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침에 나왔다가 점심 때가 지나 오후 3~4시쯤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데리고 가까운 ‘아현생맥주’ 집으로 자주 가곤 했다. 그날도 오후 3시쯤 조 시인을 따라 아현생맥주 집으로 갔다. 그는 그날따라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지 생맥주 500cc를 열 잔 넘게 연거푸 마시더니 꽤 이른 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맥주 500cc 10잔이 기본인 조태일 시인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선생님, 좀 취하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걱정 마. 이깟 생맥주 몇 잔에 무너질 내가 아니야. 택시 잡아, 택시!”
죽형(竹兄) 조태일 시인은 키가 180㎝에 달할 정도로 컸고, 덩치도 아주 좋아 문단에서는 ‘거구’로 불렸다. 그런 그가 생맥주집을 나서면서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얼른 팔짱을 끼었으나 너무 힘에 부쳐 택시를 잡기 위해 서 있다 몇 번이나 같이 길바닥에 나뒹굴곤 했다. 택시 또한 슬며시 다가왔다가 그가 약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곤 그대로 쌩 달아났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그와 택시와 씨름을 하다가 겨우 택시를 잡았다.
“방배동 쪽으로 가주세요.”
그는 택시에 타자마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문제는 택시가 그가 살고 있는 방배동 가까이 닿았을 때였다. 운전기사가 물었다.
“방배동 어디쯤이세요?”
나는 서둘러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동안 한번도 그가 사는 집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는 집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몰랐다. 그렇게 그와 2~3분쯤 실랑이를 한 끝에 그가 부스스 눈을 뜨면서 말했다.
“운전기사가 알아서 해.”
“뭐라고요?”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할 수 없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부축해서 택시에서 내리자 그는 저기 보이는 포장마차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혀가 약간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그만 드세요. 댁이 어디세요?”
“마누라한테 전화해서 여기 포장마차로 나오라고 그래.”
“네.”
그는 포장마차에서도 잠시 졸더니 사모님이 오자 어느새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총무간사가 말이야, 상임이사 집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조 시인 집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에 있는 방이 그가 쓰는 서재였다.
“여보! 여기 술상 좀 차려!”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그냥 과일이나 드세요. 이 시인은 오늘 우리 집에 첨 오셨는데 미안해요.”
사모님이 사과와 배, 딸기가 수북이 담긴 접시를 2층 서재에 올려놓고 내려가자 조 시인이 빙긋 웃었다.
“이소리, 걱정 마! 내 그럴 줄 알고 여기 양주 몇 병을 숨겨두었지.”
조 시인이 큰 글라스에 양주를 가득 따르더니 쭈욱 마시라고 했다. 그렇게 몇 잔 연거푸 마시자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조 시인이 내려간 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아차! 여기가 조태일 선생님 댁이지’라는 생각에 후다닥 일어났다. 겨우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려던 나는 기겁을 했다. 자다가 나도 모르게 이부자리에 ‘오바이트’를 하고 만 것이었다.
큰일이다. 이를 어쩌나. 서둘러 이부자리에 쏟아놓은 내용물을 휴지로 대충 치우려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조태일 시인이 또다시 크게 불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부자리 위에 휴지를 둘둘 말아 덮은 뒤 이부자리를 한곳으로 대충 밀쳐놓고 1층으로 내려가 조태일 시인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혀가 까끌까끌한 게 밥알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과 함께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2주일이 흘렀다. 조 시인은 그동안 사무실에 몇 번이나 왔다가 나와 함께 생맥주를 마시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문인이 내게 직격탄을 던졌다.
“이 시인, 그대가 최근 ‘양오사’를 세게 터뜨렸다며?”
“‘양오사’(양주 오바이트 사건) 그게 무슨 말이죠? 그리고 누가 그래요?”
“소문에 따르면 이 시인이 조태일 선생 댁에 가서 비싼 양주 마시고 자다가 이불에 오바이트를 한 뒤 치우지도 않고 도망쳤다던데?”
“입이 천금처럼 몹시 무거운 조태일 선생님이 문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을 텐데….”
“글쎄?”
“술과 문학은 한 몸이여”
한국 문단 5대 구라, 개 물어뜯은 천승세, 대선배 뺨 때린 최영미…
문학이 있는 곳에 항상 술은 따라붙는다. 따라붙은 술은 문인들에게 해학과 익살을 건넨다. 새내기 최영미가 대선배 송기원의 뺨을 때리고, 천승세는 개의 목을 물어뜯는다. 심호택은 뺨 맞고 김준태와 말을 텄고, 만취한 고은은 강연 청중에게 술을 먹이는 ‘고주부 소주사건’을 만들어낸다. 자, 이제 입 호미로 문인들과 술, 그 뒷얘기를 슬슬 긁어보자.
한국 문단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인들이 벌이는 술판. 그 술판에서 있었던 배꼽을 잡는 이야기 가운데 천승세 소설가와 박몽구 시인 이야기를 빼놓으면 멀쩡한 이가 하나 빠진 것처럼 꽤 서운하다. 여기에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뽀뽀로 뽀뽀뽀~ 찌찌리 찌찌찌~’를 기막히게 잘 부르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강형철(숭의여대 교수), 500cc 호프 잔을 들고 길거리와 지하철 안에서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전기철(숭의여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천승세 소설가와 박몽구 시인 이야기부터 입 호미로 슬슬 긁어보자. 그해가 몇 년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5·18 행사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한 여관에서 문인들이 밤새 술을 나눠 마시며 남북 이야기, 꼴사나운 정치 이야기, 허리 휘게 하는 경제 이야기,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을 것이다.
천승세 소설가, 김준태 시인, 곽재구 시인 등 10여 명이 맥주를 나눠 마시며 입에 거품을 물고 세상타령을 하고 있을 때. 저만치 떨어져 조용..
한국 문단의 ‘5대 구라파’
지금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를 맡고 있는 전기철 시인은 조태일 시인만큼이나 생맥주를 참 좋아했다. 그는 생맥주 집에서 500cc 생맥주를 연거푸 마시다가 술값을 모두 계산하고 술좌석이 파해도 계산대에 서서 잘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 500cc 맥주잔 이거 얼마에 팔아요?”
“아니, 왜 그러세요?”
“이 맥주잔에 생맥주를 가득 채워 집에 가면서 마시려고요.”
“….”
전 시인은 술을 마실 때마다 그렇게 생맥주를 가득 채운 500cc 잔을 사서 거리를 걸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홀짝홀짝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기를 꽤 즐겼다. 그는 길거리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거나 ‘저 사람 정신이 약간 나간 거 아냐?’라는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생맥주를 즐겁게 마시며 마구 떠들었다. 그는 지금도 술을 마시다 취하면 나이가 많이 들었든 직책이 높든 낮든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쌍욕을 마구 내뱉기로 아주 유명하다.
한국 문단에는 문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독자가 웃음꽃을 활짝 피우게 하는 일명 ‘구라파’ 문인이 수두룩하다. ‘한국 문단 5대 구라’라고 하면 시인이자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시인 김지하, 소설가 천승세, 송기숙, 황석영을 꼽을 수 있다.
시인 백기완이 ‘손바닥만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만주벌판…’으로 시작되는 구라, 시인 김지하가 풀어내는 졸도(?)할 정도로 웃기는 구라, 개를 물어뜯은 소설가 천승세의 구라, 서울역에서 아가씨를 슬슬 꼬드겨 여관으로 직행했다는 소설가 송기숙 구라, 술만 마셨다 하면 ‘18번’으로 통하는 소설가 황석영이 풀어내는 닭과 염소에 얽힌 구라 등이 ‘문단판 구라’를 이끄는 대표주자라 하겠다.
개를 물어뜯은 천승세 시인
백기완, 김지하, 송기숙, 황석영 구라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 우선 접어두고, 여기서는 문인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잘 모르는 소설가 천승세 구라를 풀기로 한다.
소설가 천승세 구라는 크게 3가지다. 빨치산 이야기와 주먹자랑 이야기, 자기를 보고 자꾸 짖는 개를 물어뜯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빨치산 이야기는 “어린 승세 소년이 조국해방이란 부푼 꿈을 품고 지리산에 들어가 총을 들고 토벌군과 싸우다가 우연하게 어린 여자 빨치산을 만났다. 그 여자 빨치산이 지금 있는 내 마누라다”는 내용으로 거짓말이다.
이 가운데 가장 재미난 ‘구라’는 개의 목을 물어뜯은 이야기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구라’가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루는 하동 천승세가 서울에서 여러 작가와 함께 소설가 이문구를 만나러 갔다. 하동과 작가들은 그날 이문구의 집에서 해가 저물도록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때 저만치 골목에서 송아지만한 셰퍼드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오면서 자꾸 짖어댔다.
그 개를 볼썽사납게 여긴 작가들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자 금세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동도 그 개에게 다가갔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그 개가 하동을 보더니 물어뜯을 듯이 마구 짖었다.
“아! 하필이면 그놈이 나만 보고 짖지 않겠나. 아마 그놈이 내 험상궂은 인상을 보고 나를 다른 종류의 개인 줄 알았나봐. 그래서 같은 개끼리 붙어보자 싶어서 내가 먼저 달려들어 그 개의 목을 마구 물어뜯어버렸지. 그랬더니 글쎄, 그놈이 깨갱 깨갱….”
요즈음도 문단에서 술판이 벌어지면 가끔 하동이 개 목을 물어뜯은 이야기가 은근슬쩍 떠돈다. 나는 그때마다 그 이야기가 혹 천승세 소설가가 쓴 ‘황구의 비명’이란 소설의 뿌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새색시’ 신경림, 도종환
한국 문단이 이처럼 ‘구라’와 술로만 얼룩져 있는 것은 아니다.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아주 점잖은 문인도 꽤 많다. 시인 신경림,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은 술을 마셔도 새색시처럼 말수가 적은 편에 속한다.
시인 고정희, 소설가 윤정모, 이경자, 유시춘은 1980년대 허리춤께부터 2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우리 문단에서 ‘누님’으로 통하는 여성 문인이다. 이 가운데 1991년 6월9일, 안타깝게도 불혹의 나이에 지리산에 취재를 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시인 고정희, ‘절반의 실패’를 쓴 작가 이경자, 그리고 작가 윤정모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월 15만원이란 활동비를 받으며 총무간사 일을 하고 있던 나를 특별히 아꼈다.
하루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구속 문인 석방을 위한 문학의 밤’이란 행사가 끝난 뒤 세 분을 모시고 서울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나눠 마실 때였다. 그때 소설가 이경자는 우이동에 살고 있었고, 나는 노원구 중계동에 살고 있었다.
“소리야! 저년들하고 너무 가까이 놀지 마라. 우린 강북에 있는 북한산 주변에서 같이 사는 이웃사촌이잖아. 자! 저년들이 주는 술 받지 말고 내가 주는 술만 받아 마셔.”(이경자)
“저년이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소리를 독차지하려고 하네. 소리야! 저년 말 듣지 말고 우리 고향 사람끼리 같이 놀자. 됐나? 됐다.”(윤정모)
민족 현실과 분단, 사회 대립과 갈등을 소재로 다루는 소설가 윤정모는 1946년 경주 바깥인 나원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고, 나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저년들이 그래도 소설가라고 소리를 주인공 삼아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네. 소리야! 소설 쓰는 저런 년들하고 같이 놀지 마. 우리는 시인이잖아. 시인이 시인들끼리 놀아야지, 왜 소설 따위나 쓰는 저런 년들하고 놀아.”(고정희)
“….”
여성 문인들 가운데 소설가 박완서(1931~2010), 이남희, 시인 차정미, 신동원 등은 술을 손님 다루듯이 귀하게 여겼다. 여성 문인들 가운데 시인 최영미는 꽤 성깔 있는 여자다. 술을 마시다가 자신에게 누군가 해코지를 하거나 은근슬쩍 손을 잡는 등 이상한 수작(?)을 부리면 그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톡톡 튀었다.
하루는 탑골공원 옆에 있는 주점 ‘탑골(대표 한복희)’에서 시인 고은, 이시영, 정희성, 김사인, 강형철, 이재무, 박철, 소설가 황석영, 김성동, 송기원 등 수많은 문인과 문학행사를 마치고 맥주를 나눠 마실 때였다. 탑골은 그때 문인들이 하루를 건너뛰면 서운하게 여길 정도로 자주 들락거렸던 술집이다.
소설가 송기원이 그때 창작과비평(창비)으로 갓 등단한 최영미 등 여러 문인과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은근슬쩍 시인 최영미 뺨에 입술을 댔던 모양이었다.
“철썩!”
“어어어~ 쟤가 ‘천하의 송기원’한테 왜 저래?”
대선배 뺨 때린 새내기 최영미
새내기 시인 최영미가 이를 참지 못하고 소설가 송기원 뺨을 세게 후려친 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설가 송기원은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96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밤에’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회복기의 노래’, ‘중앙일보’에 소설 ‘다시 월문리에서’가 당선된 유명한 작가였다. 시인 최영미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2년 창비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신출내기였다. 그랬으니, 문인들 입이 절로 벌어질 수밖에.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김사인이가 왔었고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새로 막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천둥소리 속에 밖에서 누가 희미하게 나무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설연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송기원과 나의 처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세등등 들이닥치고 있었다.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바로 그때였다.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 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시영 시 ‘김사인의 흰 고무신’ 모두
1980년대 허리춤께부터 90년대 끝자락 탑골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술집에는 시인 김지하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이 들락거렸다. 문인들의 단골술집이었다. 시인 이시영이 시를 남길 정도로 탑골에서 술을 마시다가 일어났던 일도 숱하다. ‘탑골’ 하면 그 시대 그 자리에서 얼굴 벌겋게 술을 마시는 문인들 얼굴이 절로 떠오를 정도다.
시인 안상학과 고재종이 서로 농민시를 잘 쓴다며 맥주병을 던지며 싸운 일, 시인 이재무가 “죽은 종철이 산 세동을 쫓아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정치인 장세동을 술좌석에서 쫓아낸 일, 술만 마셨다 하면 옷을 홀랑 벗는 시인 강세환, 술 마시고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시인 박철, 술과 연애하는 시인 이흔복 등.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장미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오 리 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모두
문인들은 탑골에서 술만 잘 마신 것이 아니라 노래도 참 잘 불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래가 ‘부용산’이다. 부용산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부르는 사람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르고, 가락도 조금씩 다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황석영 부용산’과 소설가 ‘방영웅 부용산’, 소설가 ‘송영 부용산’이다.
문인가수로 불리는 시인 박선욱은 술좌석이 벌어질 때마다 문인들이 불러 세워 ‘그리운 금강산’을 주로 불렀다. 나는 소설가 현기영과 시인 이시영이 좋아하는 ‘한라산’을 자주 불렀다. 그밖에 시인 강형철, 박철, 이흔복 등이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렀다.
술과 문학, 문인과 술. 시인 신경림은 원고료를 받는 날마다 문인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던 일이 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회고한다. 그렇다면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 조정래는 술을 어떻게 대했을까.
1990년대, 내가 한길사에서 일할 때 소설가 조정래와 시인 김초혜를 가끔 만났다. 조정래는 사실 술을 많이 마시는 문인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한길사 김언호 대표와 문학평론가 임헌영 등과 저녁식사를 할 때 아내 김초혜 시인과 함께 술을 몇 잔 마신 뒤 스스로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내에게 꼭 확인을 시키곤 했다.
“여보! 내가 앞에서 걸어갈 테니까 비틀거리는 건지 아닌지 좀 봐줘.”
소설가 조정래가 마치 훈련병처럼 차렷 자세를 한 채 앞으로 씩씩하게 걸으면 시인 김초혜는 손짓으로 취했다 안 취했다 표시를 했다. 나는 그때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색이 ‘태백산맥’이란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쓴 큰 작가가 아내 앞에서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걷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뺨 몇 대 맞고 말 트는 게 낫지 않은가”
“어이~ 김준태 시인! 나 요즈음 이시영 시인과 말 트기로 했네. 김 시인도 나랑 나이가 같으니, 오늘부터 말 트기로 하세나.”
“….”
“왜 그러는가? 내 말이 불편한가?”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문인들이 벌이는 술판에서는 별의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똥지게’ 등 우리 민중의 삶을 시로 잘 녹여냈던 심호택(1947~2010·원광대 불문학과 교수) 시인과 김준태 시인 사이에도 재미난 일화가 있다.
김준태 시인과 심호택 시인 등 문인들이 5·18 행사를 마치고 허름한 술집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단에 늦깎이로 나온 심호택 시인이 ‘또래인 이시영 시인과 얼마 전부터 말을 트기로 했다’며 기세 좋게 또래인 김준태 시인에게 말을 트자고 덤벼들었다. 문단에서는 원로급 위치에 있었던 김준태 시인은 ‘엊그제 갓 등단한 새까만 문단 후배’가 그동안 선생님이라 부르다가 갑자기 말을 트자고 하니 기가 막혔다. 김준태 시인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묵묵히 막걸리만 마시며 ‘저 물건을 어찌해야 할꼬?’라는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심호택 너 일어나!’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심호택 시인 양 뺨을 그야말로 ‘종 치듯이’(이승철 시인의 표현) 마구 때렸다.
심호택 시인은 하도 억울해서 그 술집에서 나와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집이 있는 전주까지 달리며 서울에 사는 이시영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
“어이~ 시영이 자네! 나 억울해서 정말 못살겠네.”
“왜 그래?”
“나, 광주에 가서 김준태 시인에게 말 트자고 하다가 뺨을 수없이 맞아버렸네. 이 일을 어쨌으면 쓰것는가?”
“잘됐네. 김준태 시인한테 그렇게 뺨 몇 대 맞고 말 트는 게 낫지, 그럼 김준태를 평생 선생님으로 모시려 했는가.”
“….”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시인 고은과 관련된 술좌석 일화도 수없이 많다. 1990년 내가 갓 결혼을 한 뒤 여러 문인에게 아내를 소개하기 위해 술좌석에 데리고 갔을 때, 고은 시인이 내 아내 뺨을 문질러 아내는 물론 나까지 당황했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은 2002년 가을, 경남도민일보가 주최한 ‘제1회 청소년문학상’에서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고은 시인이 소주를 마시며 강연을 할 때 일어났다. 포복절도할 일이다.
시인 고은의 ‘고주부 소주사건’
문화관광부에서 은관문화훈장까지 받은 고은 시인은 김춘복 경남작가회의 회장 안내로 경남도민일보와 경남작가회의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청소년문학상 심사를 한 뒤 그날 저녁 6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문학과 언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고은 시인과 김춘복 소설가는 청소년문학상 심사를 한 뒤 강연시간을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고은 시인은 이날 저녁 6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지역 문학예술인과 학생, 주부, 일반인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연장으로 들어섰다. 고은 시인은 탁자에 올려놓은 생수를 물리고 소주와 김치 한 보시를 시킨 뒤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연 내내 소주를 마시며 김치 씹는 소리를 그대로 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강연을 계속하다 보니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흐리는 등 횡설수설했다. 그 때문에 강연시간인 1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독자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가 강연할 때 마시던 소주를 들고 내려와 맨 앞줄에 앉아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던 주부 4∼5명에게 다가가 입을 억지로 벌려 소주를 들이붓는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고은 시인은 강연 뒤 이어진 ‘철부지’ 공연에서도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이미 취한 경남작가회의 회장 김춘복 소설가도 무대에 올랐다. 소설가 김춘복은 공연 주최자인 고승하 작곡가에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마이크를 빼앗아 ‘가을편지’란 노래를 부르며 고은 시인과 함께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강연을 듣고 있던 주부에게 소주를 먹인 이른바 ‘고주부 소주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고은 시인은 외국에 나가 강연을 하면서도 술 마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였다. ‘술과 문학은 한 몸’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는 요즘도 문인들과 술좌석에 앉으면 소주를 즐겨 마시며 이런 말을 툭툭 내던지곤 한다.
“요놈, 요놈 요게 참 좋은 것이여.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여. 이게 없었다면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삭막하고 서글펐을꼬.”
*시인 이소리는 1959년 창원에서 태어나 1980년 월간 ‘씨의 소리’에 ‘개마고원’ ‘13월의 바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9월부터 1990년 2월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간사를 맡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학인과 상상을 벗어나는 희한한 술자리를 함께했다. 시집으로 ‘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미륵딸’, 편역서 ‘미륵경’, 간추린 막걸리백과사전 ‘막걸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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