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계절, 가을의 초입에 강원 횡성에서 저물어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맞닥뜨렸습니다. 횡성호에서는 수몰마을의 자취와 계천 물길의 상류에서 황홀하게 피어오르던 새벽 물안개와 마주쳤고, 옛 42번 국도의 고갯길인 문재에서는 울울한 솔숲과 이른 단풍으로 붉게 타오르는 길을 만났습니다. 사라진 옛 마을이나 지워져 가는 옛길 위에 서서 뒤를 돌아봅니다. 지나온 시간과 걸어온 길을 자주 돌아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가을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는 횡성에서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매혹적인 풍경들을 단풍잎처럼 주워보았습니다. # 다시 모습 드러낸 15년 전의 마을 강원 횡성이란 지명은 ‘횡천(橫川)’에서 왔다. 횡성 땅의 하천이 남북이 아닌 동서로 빗겨 흐른다 해서 ‘가로 횡(橫)’자를 쓴 게 고구려 때부터다. 가로로 흐르는 물. 태기산에서 발원한 계천의 물길도 그렇게 흐른다. 계천의 맑은 물은 어답산 아래 횡성호에 담긴다. 횡성호는 어답산의 산 그림자와 하늘의 구름을 그대로 받아내는 수면도, 갓 피어난 억새꽃이 흔들리는 수변 풍경도 가을과 썩 잘 어울린다. 호수 주위를 도는 도보코스 ‘둘레길’은 이런 경관을 보며 걷는 길이다. 둘레길은 모두 6개 코스가 있다. 그중 추천할만한 것이 타박타박 흙길을 밟으며 걷는 5코스다. 뒤로는 어답산을 두르고 물가를 따라 코스모스와 억새가 어우러진 수변을 걷는 맛이 훌륭한 길이다. 지금은 호수의 풍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횡성호에서는 먼저 사람들이 떠났다. 횡성댐이 세워진 건 지난 2000년. 담수가 시작되면서 253가구의 938명의 주민들은 수몰을 앞둔 고향마을을 떠났다. 중금리, 부동리, 화전리, 구방리, 포동리…. 이렇게 다섯 개 마을의 대부분이 횡성호의 물 아래로 잠겼다. 계천을 건너던 섶다리도, 전설이 깃든 장독 바위도, 바쁘게 돌아갔을 정미소도, 술익는 내음으로 가득했던 양조장도 모두 수몰됐다. 거짓말처럼 다섯 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물에 잠겼던 마을이 15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오랜 가뭄으로 횡성호가 담수이래 최저수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위가 내려가면서 수몰마을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도로가 드러났고, 집터며 논과 밭 자리도 물 밖으로 나왔다. 제가 떠나온 고향이 물 위로 다시 드러나는 모습을 보는 실향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수몰민들을 위해 세운 ‘망향의 동산’의 정자에 나와앉은 마을 노인 몇몇이 환한 가을볕 아래서 제 살던 집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몰 지역의 마을 구방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건충(79) 씨. 그는 구방리 양조장에서 빚어내던 술 ‘의인인주’가 사라진 것을 특히 아쉬워했다. 의인인주는 중금리 일대의 너른 들에서 난 쌀로 빚은, 입에 착착 감기던 약주였다고 했다. “술맛이 부드러운 게 기가 막혔지. 그만한 술은 또 없어.” 그런데 양조장 주인이 고향을 떠나자마자 타계하는 바람에 그만 술빚기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고 했다. 이 씨는 또 계천의 물가에서 천렵을 하던 때의 이야기며 장날에 털털거리며 드나들던 완행버스를 타고 읍으로 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라져 버려서, 물에 잠겨버려서 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수몰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한 번씩 이런 추억을 나누기 위해 모인다. 수몰돼 없어진 화성초등학교의 동창회 겸 망향제를 여는 것이다. 올해 행사는 오는 18일로 예정돼있다. 마을 주민들은 떠나간 이웃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횡성호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습지가 된 상류 쪽에는 버드나무와 억새들이 자라서 하루하루 가을볕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가을날, 습지에는 아침마다 안개가 피어올라 유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횡성읍에서 갑천면사무소로 이어지는 19번 국도의 다리 구방교. 그 다리가 건너는 횡성호 상류의 물길 위쪽에는 가을이면 아침마다 안개가 가둬져 출렁거린다. 아직 채 수확하지 않은 수수밭과 깨밭의 구릉 너머로 펼쳐지는 습지의 경관은 인상파 화가가 그려낸 유화를 연상케 한다. 날마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마침 그곳을 찾은 날에 만난 이른 아침 풍경의 안개 낀 습지의 모습은 가히 황홀할 정도였다. # 버려진 길이 숲으로 아름다워지다 횡성에는 기억의 자물쇠로 닫힌 곳이 또 한곳 있다. 옛 42번 국도가 넘어가던 ‘문재’ 고갯길이다. 횡성호의 수몰 마을이 물에 잠겨 잊힌 곳이라면, 백덕산의 낮은 목을 넘어 평창으로 가는 문재 고갯길은 버려져 잊힌 곳이다. 문재는 제법 너른 흙길로 길게 이어지는 기막힌 숲길이다. 비포장 흙길을 따라 일제강점기 무렵에 심었다는 80년생의 낙엽송과 붉은 둥치의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해있고, 그 아래로 가을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길 너머의 숲은 원시림이라 할 만큼 깊고 짙다. 문재를 찾아가는 길은 까다롭다. 길의 초입을 알리는 표지판조차 하나 없다. 불편함에 앞서 횡성 사람들이 ‘이 좋은 길’을 몰라본다는 서운함이 앞선다. 지도로 찾기도 쉽지 않고 내비게이션도 별무소용이니 집중해서 읽고 순서대로 찾아가자. 먼저 횡성의 방림에서 안흥 쪽으로 42번 국도를 따라 달린다. 운교1리 마을회관에서 운교치안센터 쪽으로 넘어가는 자그마한 다리인 운교를 건너 국도로 1.9㎞쯤 간다. 그쯤 해서 갑자기 나타나는 n자로 휘어진 갈림길에서 우회전하면 거기가 문재로 이어지는 들머리다.
들머리에서 문재까지는 걸어도 좋고, 차로 가도 좋다. 비포장 흙길이긴 하지만 길이 순해서 승용차로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길 초입에서 시작되는 건 흰 수피의 자작나무들의 사열. 곧이어 길섶의 가을 야생화가 마중 나온다. 쑥부쟁이, 참취, 산감채, 미역취…. 그 뒤로 소나무와 참나무의 도열이 기다린다. 유연하게 굽은 흙길은 왼쪽으로는 내내 벼랑을 끼고 이어진다. 나무들 사이로 가을 색으로 바뀌어가는 건너편 산의 능선이 환하다. 이렇게 들머리에서 문재 고개까지는 5㎞ 남짓이다. 오르막이긴 하지만 경사는 부드러워 왕복 서너 시간쯤이면 여유 있게 걸을 수 있다. 이 정도로는 너무 짧다면 아예 임도를 다 붙여서 길게 걸을 수도 있다. 문재 정상쯤에서 ‘상안임도’ 표지판을 따라가면 거진 25㎞를 더 가서 42번 국도로 내려오게 된다. 차로 가도 1시간이 더 걸리니, 두 발로 걷는다면 하루를 꼬박 다 걸어도 쉽잖은 거리다. 이 길 위에는 수시로 멧돼지떼가 출몰하기도 한다. 일찌감치 불붙은 단풍도 만날 수 있고,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청정한 숲의 기운도 맛볼 수 있다. 문재로 오르는 길가에는 간간이 길 안쪽 숲으로 들어가는 나무덱이 놓여있다. 산림청에서 ‘명품숲’이란 이름으로 숲 깊숙이 걷기 코스를 놓으면서 조성해둔 것이다. 그나마 이 숲을 알아본 것이 산림청이었던 셈이다. 한데 산림청이 세워둔 안내판 지도가 어찌나 불친절한지 도무지 코스를 알아볼 수 없다. 길을 만들기는 했으되, 관리도 홍보도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은 것이, 어느 길로 들어서든 숲은 좋고 길은 간명하기 때문이다. 굳이 산림청이 정해준 코스를 따르지 않아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숲의 향기를 맡으며 숲 속을 걸으면 그뿐이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참나무 숲에는 바스락거리는 이른 낙엽 아래에서 수런거리며 버섯이 피어나고 있었다.
문재의 정상쯤에는 ‘방림 18㎞’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이정표에서 버려진 길의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왜 버려졌을까. 지금부터는 이 길이 버려지게 된 내력이다. 문재는 해발고도 1350m의 백덕산 가장 낮은 목을 넘어 횡성과 평창을 잇는 고갯길이다. 지금은 횡성에서 평창, 혹은 평창에서 횡성을 오가는 차들은 죄다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고, 혹여 42번 국도로 올라온 차들도 백덕산 허리춤의 터널로 단숨에 지나간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옛 42번 국도는 헐떡거리며 비포장 고갯길인 문재를 느릿느릿 넘어갔다. 속도에 뒤처진 길. 고속도로보다, 터널보다 느린 길이었던 문재는 이렇게 잊혔던 것이다. 영동과 영서를 잇는 장돌뱅이들과 부임지로 오고 가는 벼슬아치들이 넘나들던 문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문헌에 자주 등장할 만큼 주요한 교통로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중종 때 공조, 이조, 형조, 병조판서를 두루 지내고 우찬성 자리까지 오른 횡성 출신의 고형산이란 인물이 강원관찰사로 내려와 사재를 털어 이 길을 넓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한데 길을 넓힌 게 당시로는 ‘업적’이 아니라 ‘과오’였다.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들이 삽시간에 물밀 듯이 내려올 수 있었던 게 고형산이 도로를 정비했기 때문이라며 인조는 죽은 지 110년이 된 고형산의 무덤을 파내서 시신을 부관참시할 것을 지시했다. 무덤가에 세워둔 문인석의 목을 남김없이 잘라가 버리기도 했다. 치욕스러운 병자호란 패전의 원인을 놓고 외교에 대한 무지와 안이했던 국방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도로를 정비한 관리에게서 패전의 원인을 찾았다.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부관참시 이후에도 이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동고속도로가 놓이기 전인 1970년대 중반 무렵, 이 길은 전성기를 누렸다. 화물트럭이며 완행버스들이 문재의 고갯길을 줄지어 넘어갔다. 서울에서 강릉을 가려면 문재를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개가 서울∼강릉을 오가는 길의 딱 중간쯤이었다. 그래서 화물차나 완행버스들은 문재를 넘기 직전인 안흥에다 차를 세웠다. 안흥에서 반쯤 왔다는 안도의 휴식을 취하거나 나머지 절반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지금이야 찐빵의 명성에 기대고 사는 안흥은 당시만 해도 문재를 앞두고 쉬어가는 이들을 위한 여관과 여인숙, 술집들로 흥청거리는 대처였다. 안흥찐빵의 명성도 안흥의 이런 입지에서 시작됐다. 문재의 고갯길을 앞둔 주머니 가벼운 이들이 찐빵 몇 개로 겨우 허기를 달래곤 다시 고개를 넘어갔던 것이다. 한때 흥청거리던 고갯길이 버려진 지 20년. 그러나 이 고갯길은 지금 자연으로, 숲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울울한 숲이 뒤덮은 이 길은, 아마도 지금이 처음 놓인 이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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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하면 그 뒤에 착 달라붙는 말이 ‘한우’다. 이즈음 이곳저곳 지자체마다 한우를 특산물로 내세우고 있지만, 횡성한우야말로 그중에서도 ‘형님’ 격이다. 이름나기도 그렇고, 사육 두수도 그렇고, 맛에서도 그렇다. 저마다 제 지역 한우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지자체들도 ‘횡성한우’ 앞에서는 꼬리를 내린다. 사실 ‘같은 한우라면 어느 지역에서 자라든지 맛이야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흔히 한우가 맛있다는 근거로 ‘해발고도가 높다’거나 ‘물이 좋다’는 등의 이유를 들지만, 사실 횡성 한우의 맛의 출발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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