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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한(朴俊漢)과 송이(松伊)의 비연(悲戀)

醉月 2011. 7. 16. 07:30
박준한(朴俊漢)과 송이(松伊)의 비연(悲戀)

헤어지기 어려운 사람,
그는 정녕 그리운 임이 아니겠는가.
회자정리(會者定離). 이 말은 누구나 가 만나면 헤어진다는 불교의 용어다.
그러나 그 헤어짐은 다시 만날 것을 언약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시적인 이별의 아픔을 다시 만나는 희열을 생각하며 참고 견딘다.
그런 속에서 속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 영원히 만나지 못할 헤어지는 아픔을, 그칠 줄 모르는 끝없는 하소연이 있다.
한량 박준한과 송이와의 비연이 그것이다.

박준한(朴俊漢)은 선조조 때 해주의 유생(儒生)이나, 그의 행장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병와가곡집]에 시조 한 수가 전할뿐이다.
그가 과시(科試)를 보러 한양에 올라오다가 강화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객사에 머무는 동안에 주모로부터 송이(松伊)란 정절이 뛰어난 기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이란 기생이 얼마나 정절이 뛰어났나 하는 호기심에서 청하여 술자리를 같이 했다.

술이 거나해진 박준한은
"송이라 했지?
내 너를 위해 시(詩) 한 수를 읊을 테니 들어 보겠는냐?"
"네, 불러 보옵소서."
요금횡포발섬가(瑤琴橫抱發纖歌) 거문고 빗기 안고 가늘게 부르는 노래.
숙석경성가최다(宿昔京城價最多) 옛날엔 서울서도 성가가 드높더니
춘색역조란경리(春色易調鸞鏡裏) 봄빛이 거울 속에 꽃 이울 듯 사라져,
백두유락야인가(白頭流落野人家) 지금은 흰머리로 야인 집에 떨어졌네.]

"어떠냐? 네가 화창을 해야지?"
"네, 그러나 저는 화창을 못하겠사옵니다."
"그래,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네, 송구스럽사오나 지금 부르신 노래는
서방님의 노래가 아니옵니다."
"뭐, 내 노래가 아니라구..."
"네, 그 노래는
전조(前朝)의 진원부원군 고산(孤山) 유근(柳根)님의 노래인 줄 아옵니다."
"그래 너는 뛰어난 시재를 가진 애로구나.
그러면 그 노래는 누구에게 준 노래냐?"
"예, [증송도기(贈松都妓)]이옵니다."
"정말 놀랐구나.
내 시재가 뛰어난 너와
하룻밤 정을 나누고 싶구나."
"서방님, 제가 노래 하나 부르겠사옵니다."
"그래라. 어디 들어 보자."

소나무 소나무라 하니
무슨 소나무로만 여겼는가.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절벽 위에
사시장철 푸른 낙락장송이
바로 나입니다.
길 아래로 지나는 더벅머리
나뭇꾼의 작은 낫으로는
걸어 볼 수도 없습니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삼 솔만 너겨더니
천심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졉낫시야
걸어 볼 줄 이시랴.

 

뛰어난 표현이다.
'솔이'는 자기 이름 '송이(松伊)'를 음차(音借)한 것이요,
'낙락장송(落落長松)'은 '절개가 굳은 자신'을 비유한 것이며,
'초동(樵童)의 졉낫'은 '돈푼이나 있고 세도께나 있다고 기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덤벼드는 한량' 또는 치한을 비유한 표현으로, '비록 몸은 기생일망정 아무에게나 정을 줄 수는 없노라'는 명백한 거절의 표시다.
"음, 나와 같은 무명의 빈한사(貧寒士)는
넘겨다 보지도 말고 잠자코 물러가란 말이구나."
"송구스럽사옵니다. 그런 뜻만은 아니옵니다."
"그럼, 무슨 다른 뜻이 있다는 게냐?"
"네 서방님께옵서는
지금 과시(科試)를 보러 가시는 길이오니, 중도에 객줏집에 빠져서 과시에 게을리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는 뜻이옵니다."
"오, 고마운 말이로구나.
내 과거를 보고 오는 길에 다시 내려와도 되겠느냐?"
"네, 내려오실 때는
서방님 뜻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었다.
송이(松伊)는 그 행장이 없다.

 

다만 [해동가요]의 '작가제씨(作家諸氏)'항에 '명기구인(名妓九人)'이라 하여 '진이(眞伊), 홍장, 소춘풍, 소백주(小栢舟), 한우(寒雨), 구지(求之), 송이, 매화, 다복(多福)'등을 들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으로만 적혀 있고, 전혀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가곡원류]에는
'고지명기(古之名妓)'라고만 전해진다.
'송이(松伊)'는
시조 문헌에 나타난 29명의 기녀작가 중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여인이다.
심재완님의 [역대시조전서]에는 그녀의 작품으로 14수가 있다고 하였으나, 다른 작가의 작품과 혼동된 것을 빼면 7수가 되는데,
이 7수만 하더라도 가장 많은 작품량이다.

 

헤어진 박준한이 다시 강화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어느 초겨울이었다.
진사시에 급제한 박준한는 떳떳한 모습으로 송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뜨거운 정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그 밤의 기쁨을 송이는 이렇게 읊었다.

닭아 울지 마라
일찍 울 수 있노라고
자랑하지 말아라
한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도망쳤던 맹상군(孟嘗君)이 아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임께서 오신 밤이니
제발 울지 않으면 어떻겠느냐?

닭아 우지 마라
일 우노라 자랑 마라
반야(半夜) 주관(奏關)에
맹상군(孟嘗君) 아니로다.
오늘은 님 오신 날이니
아니 우다 엇더리
그러나 박준한은 떠나야 했다. 그가 떠날 때 송이는 화전지에 시조 한 수를 적어 주며 말없이 눈물로 보냈다.

내 사랑(思郞) 남 주지 말고
남의 사랑(思郞) 탐치 마라
우리 두 사랑(思郞)의 행여
잡사랑(雜思郞) 섯길셰라.
일생에 이 사랑 가지고
괴야 살녀 하노라
그로부터 송이는 일체의 생활을 청산하고 수절하면서 박준한이 약속대로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6개월이 가고 1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송이는 그 그리움을 이렇게 달랬다.

남은 다 자는 밤에
나는 어이 잠 못 들고
홀로 깨어서,
화려한 침실 깊은 곳에서
단잠을 주무시는 임을 생각하는가.
임과 떨어진 천리 밖에서
만날 길 없는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남은 다 쟈는 밤에
내 어이 홀로 깨야
옥장(玉帳) 깊푼 곳에
쟈는 님 생각는고.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은하에 물이 지니
오작교가 물에 떠내려 갔단 말인가.
소를 이끈 선랑(仙郞, 사랑하는 박준한)이
못 건너 온단 말인가.
직녀(송이 자신)의 애가 타서,
가뜩이 조금 남은 간장이
봄바람에 눈 녹듯 하는구나.]

은하(銀河)에 물이 지니
오작교 뜨단 말가.
쇼 잇근 선랑(仙郞)이
못 건너 오단 말가.
직녀(織女)의 촌(寸)만한 간장이
봄눈 스듯 하여라
그러나 기다리는 박준한에게선 일자 소식도 없다. 그러나 송이는 그의 굳은 약속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지 못하는 절박한 사연이 있으려니
하고 참고 기다렸다.
다음 시조에 송이의 그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리하여 날 속이고
저리하여 나를 속이니,
원수의 이 임을
이제는 잊을만도 하다마는,
떠날 때 언약이 굳으니
그를 못 잊겠구나.]

이리하야 날 속이고
져리하야 날 속이니
원수(怨讐) 이 님을
이졈즉 하다마는
전전(前前)에 언약이 중하니
못 이즐가 하노라}
그러나 기다림도 참음에도 한계가 있던가.
아니면 박준한의 언약을 불신하게 되었는가.
다음 시조에는
송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변의 상황이 그녀의 마음을 변하게 했는가.

주색을 삼간 연후에
틀림없이 백년을 산다는 보장만 있다면
아무리 미인인 서시(西施)인들
관계할 리가 있으며,
아무리 좋은 천일주라
하더라도 마시겠느냐?
아마도 참고 참다가,
두 가지를 다 잃고
허송 세월을 할까 걱정이 되누나.

주색(酒色)을 삼간 후에
일정백년(一定百年)을 살쟉시면
주시(酒施)ㅣ 들 관계하며
천일주 ㅣ 를 마실소냐.
아마도 참고 참다가
양실(兩失)할가 하노라}
박준한을 기다리다
아까운 젊음만 허송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가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일까?

옥같이 어여쁘던
한(漢)의 궁녀
왕소군(王昭君)도,
오랑캐의 첩이 되어
한 줌 티끌로 화하였고,
유명한 미인 양귀비도
마외역(馬嵬驛)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너의 한때의 아름다움을
굳이 아껴 두어 무엇하겠느냐.]

玉 갓튼 한궁녀(漢宮女)도
호지(胡地)에 진토(塵土)되고
해어화(解語花) 양귀비도
역로(驛路)에 바렷나니
각씨(閣氏)내 일시화용(一時花容)을
앗겨 무삼 하리오.}
이럴 즈음에 박준한에게서 인편이 왔다.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송이에게
하인은 서찰 한 통을 내어 놓는다.
급히 뜯어 보니 한 수 시만 적혀져 있고
아무 말도 없었다.

달빛 아래 약속한 임이
닭이 울도록 아니 온다.
새 임을 만났는지
옛정든 임에게에 잡혔는지,
아무리 한 때의 인연인들
이렇게 속일 수가 있을까]

월황혼(月黃昏) 기약을 두고
닭 우도록 아니온다.
새님을 만낫는지
구정(舊情)의 잡히인지
아모리 일시(一時) 인연인들
이대도록 소기랴.

 

시를 받아 든 송이의 눈에는 눈물만 흘렀다.
그토록 그리워 나를 야속하게 생각했단 말인가!
일찍이 소식을 주었으면 천리라도 한달음에 달려 갔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그리워하면서도 소식을 못 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인의 말을 종합하면,
과시에 급제하고 돌아온 박준한은 그 길로 이름모를 병으로 자리에 누워 앓았다.
백약이 무효였다.
늙은 홀어머니의 극진한 정성도 효험이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송이에 대한 그리움을 수 없이 보였다.
끝내 일어나지 못한 그는 늙은 노모 한 분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병석에서 써 놓은 한 수 시가 그의 문집 갈피 속에 끼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것을 발견한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 전해 온 것이란다.
그리고 노모는 자식의 장례를 치른 후 입산하여 불도에 귀의하였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송이는 가슴을 져미는 아픔으로 통곡하였다.
박준한의 넋을 위해 울었다.
노경에 입산한 그의 늙은 노모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후 송이는 마음을 진정한 다음, 주변을 정리하고 박준한의 노모가 계시다는 황해도의 어느 작은 암자에 들어가 자신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입산하기 전(이승의 인연에서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 하나 있다.

꽃 보고 좋아 춤추는 나비와,
나비 보고 방싯방싯 웃는 꽃과
저 둘의 사랑은 때가 되면
다시 잊지 않고 돌아오건마는,
어찌하여 우리의 사랑은
한 번 가고는 영영 오지 못하는가.

꽃 보고 춤추는 나뷔와 나뷔 보고 당싯 웃는 곳과 져 둘의 사랑은 절절(節節)이 오건마는 엇더타 우리의 사랑은 가고 아니 오나니.
이렇게 기다리던 박준한을 송이는 영영 못 만나게 된 것이다.
아니 불연(佛緣)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면벽송경(面壁誦經)하는 송이를 박준한은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