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박계숙(朴繼叔)과 금춘(今春)의 정담(情談)

醉月 2011. 7. 15. 06:24
박계숙(朴繼叔)과 금춘(今春)의 정담(情談)

박계숙(朴繼叔)은 자(字)를 승윤(丞胤), 호(號)를 반어헌(伴禦軒)이라 하며, 선조 2년에서 인조 24년까지 산 사람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 부훈련원정,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임란 때에 원종절신(原從切臣)이 되었다.
전란 때 일등 공신이 된 박홍춘의 아들로, 임진란 때 수훈을 세운 무관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취문(就文)은 자를 여장(汝章), 호를 만회당(晩晦堂)이라 하며, 갑신(1644)에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와 똑같은 훈련원부정을 지냈고, 금군장(禁軍將).부사(府使) 등을 재냈으며, 광해 9년(1617)에서 숙종 16년(1690)까지 산 사람이다.

 

이를 보면 이 집은 3대가 무과 출신으로 임란, 병란 양란에 활약한 집안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가히 자유 수호를 위해 공로가 지대한 '용사(勇士)의 집'이다.
그 어머니는 국가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한 말씀할 분이다.
요즈음처럼 군 출신이 곧 훌륭한 정치가, 실업가 등이 될 수 있는 때라면 정말 번성했을 집안이다.
3형제가 아니라 3代가 종사(從事)한 집안이니까.

 

박계숙과 그의 아들 취문이 변방에 부임하면서 쓴 일기가 곧 [부북일기(赴北日記)]인데, 이 책은 임란 후 울산병사 김응서와 판관 조성립을 수행하던 선전관 박계숙의 [부북(赴北, 함경도 회령 변방)日記]와 양란 후에 부북(赴北)한 그의 아들 취문의 일기를 합책한 필사본으로 후손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이수봉님이 발견하였고, 심재완님에 의해 [역대시조전서(歷代時調全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박계숙의 일기가 24장, 그의 아들 취문의 일기가 55장, 모두 79장으로 되어 있고, 부부하는 동안의 노정, 도중의 야사(野舍), 보급 상황, 감회, 이역풍경(異域風景) 등 주색으로 객수를 달래며 밤을 보내는 정경이 간간이 보인다. 이 일기 속에 한글로 기록된 시조 7수가 보이는데, 이 일기는 박계숙이 37세 되던 을사년 10월 15일부터 정미년 정월 2일까지 1년 2개월, 412일 간의 일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우국 충절의 풍모와 풍류 남아의 면모를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이제 [부북일기]에 기록된 시조를 중심으로 박계숙과 기생 금춘(今春)과의 정담(情談)을 살펴 보자.
[을사 11월 22일, 20리쯤 되는 곳에 연흉포(連凶浦)가 있는데, 일명 맥진(麥津)이라고도 한다. 겨울에는 다리로 건너고, 여름이면 배로 건너는데, 그 나루가 길고 험하여 물살이 급해서 건너기가 썩 어려웠다. 또 10리쯤 가서 신안역에 도착한 즉, 음식을 대접할 생각이 없는 듯하여, 역장을 불러 이야기하였으나 여전하였다. 겨우 허기를 면할 만큼 잡곡을 얻어 밥을 지으니 진수성찬과 같다. 눈 오고 춥고 먼 길에 이런 일을 겪으니, 집을 떠난 감회를 이길 수 없어 시를 쓰다.]

 

만리개산로(萬里開山路) 만리길 산길은 가도가도 끝없네.
동서문빙수(東西問憑誰) 동서 갈길을 누구에게 물어 보리.
설심사색료(雪深沙塞遼) 눈 깊고 모래 날려 갈 길을 막으니
풍설객수수(風雪客愁愁) 바람에 날리는 눈 나그네의 객수를 더하네.

이것은 그가 이가등정(離家登程)한 지 한 달 반이 지난 11월 하순에 2천리 북녘의 맥진에서 설원의 아름다움에 취하면서도 객수를 이기지 못한 날의 일기다.
그로부터 하루를 지난 24일에는 저 유명한 철령 고개를 넘어 안변 경계에 이르러, 어느 역졸의 집에 여장을 풀고 가진 쌀을 모으니 여덟 되, 이것을 술과 바꿔 마시며 2천리 노정을 새삼 감탄하면서, 다시 앞으로 천리가 남은 아득한 여정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한 장부로서의 감개를 시조로 읊는다.

갈 길은 험하구나
참으로 험하구나.
2천리 겨우 오니
또 앞에 천리나 남아,
나라에 충성키로
허락한 마음이니
먼 줄 몰라 하노라.

행로난(行路亂) 행로난(行路難) 바라보니 가이없다
이천리(二千里) 거의 오니 또 압피 천리 나매
충심이(忠心已) 허국(許國)하니 먼 줄 몰나 하노라
계속해서 2일을 지난 27일은 풍설 속에서 필마(匹馬)를 재촉하며,
새외호진(塞外胡塵)을 쓸어버릴 호방한 강개와 심회를 시조로 읊는다.

관산(關山) 눈바람 속에 가시는 저 친구야,
어디를 가노라고 필마를 재촉하느냐.
변방의 아득한 호진(胡塵)을 다 쓸어 내려 가노라.

관산(關山) 풍설리(風雪裡)예 가시는 벗님내야
어대를 가노라 필마(匹馬)를 뵈야는다.
새외(塞外)예 어득한 호진(胡塵)을 다 쓰로러 가노라
위의 두 시조는 변방에 부임하는 무인의 비장한 신고와 풍모를 보여 준 것이나, 서시(西施)나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할 만한 북국의 가인(佳人)들과 '심불정정(心不定情)'하는 애틋한 연정을 화답한 시조가 나온다.
우리의 문헌에는 기녀와의 정담을 노래한 풍류적인 내용의 작품이 많으나, 박계숙과 같이 천신만고하여 이역만리 변방에 부임, 세밑을 앞두고 '초심사석(初心似石)'이 '여금춘동침(與今春同寢)'으로까지 풀려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은 드물다. 또 그 작품의 제작경위와 일시, 장소까지 소상하게 밝혀져 있음은 희귀한 일이다. 그것이 임란 후 바로 쓰여진 것이요, 지금부터 370여 년 전의 일이니 더욱 소중한 일이다.

 

<화답가(和答歌)> 1.
비록 장부일지라도
간장이 쇠나 돌이겠는가.
뜰 앞의 예쁜 여인을 보면
옛 어른들의 경계 생각했더니
성중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니
잊을 수가 없구나.

 

이 시조가 을사년 12월 27일 세밑을 앞두고, 객사에서의 쓸쓸함을 참지 못하여 '처음에는 돌과 같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감을 토로한 작품이다. 이날의 일기를 보자.
[...어제 저녁 어둠을 틈타 와 본즉, '많은 손님들과 있어서 그냥 돌아갔나이다'라고 말하거늘, 더불어 이야기하며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남의 탕기(蕩氣)로 반년을 집을 떠나 있으니 어찌 춘정이 없겠는가.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잊고 춘정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붓을 들어 한 수를 지어 주다.]

비록 장부을(丈夫乙)지라도
간장(肝腸) 철석(鐵石)이랴.
당전(堂前) 홍분(紅粉)을
고계(古戒)를 사맛더니,
치성(治城)의 호치단진(皓齒丹唇)을
몯 니즐가 하노라
하룻밤의 여관방을 무사히 넘기지 못하는 남자들이 허다한데, 반년간이나 변방에서 지내는 무인의 몸으로, 더욱이 눈앞에 펼쳐진 설원의 선경, 그 속에서 북국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지녔던 결심이 아무리 굳다 해도 무너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화답가(和答歌)> 2.
당나라의 우미인(虞美人)을 친히 본 듯
한당송(漢唐宋)도 지내신 듯,
고금에 통달하고 이치 밝은
훌륭한 문인들을 다 어디 두고,
동서도 분별못하는
무인에게 사랑을 주어 무엇하겠는가!

당우(唐虞)도 친히 본 듯
한당송(漢唐宋)도 지내신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
명철인(明哲人)을 어대 두고
동서(東西)도 미분(未分)한
정부(征夫)를 거러 므삼 하리

 

기녀 금춘(今春)이 화답한 노래다. 훌륭한 한량,재사,문인 들이 다투어 정을 주겠다는데, 동서도 사리도 분별 못하는 무인에게 정을 줄까보냐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그 무인 박계숙의 늠름한 가슴이 못내 그리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러면 박계숙의 그날의 일기를 보자.

 

[...이날 아침 애춘(愛春)이란 애가 아름다운 금춘(今春)을 데리고 방에 들어오니, 그 아름다움이 옛날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이요, 왕소군의 절색이라. 비단 옷을 입은 모습은 가을 구름에 숨은 달과 같고, 푸른 버들가지에 눈이 돋은 듯하며, 봄 연못에 비친 연꽃과 같았다. 금춘의 자(字)는 월아(月娥), 노래를 잘하며 바둑도 둘 줄 알아 모르는 것이 없었고, 또 거문고와 가야금에 능했다. 저녁이 맞도록 이야기하니, 어찌 능히 춘정이 없겠는가. 처음에 먹었던 돌과 같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 가다.....]

 

애춘(愛春)이란 애가 아름다운 금춘(今春)을 데려와서 방에 들어오니, 그 아름다움은 옛날 서시(西施)의 용모요, 왕소군의 절색이었다. 비단옷을 입은 모습이 가는 구름에 숨은 달과 같았다. 더구나 금춘은 노래고 잘하고, 또 거문고와 가야금이 능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흥겨워지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박계숙은 이렇게 읊는다.

 

<화답가(和答歌)> 3.

나도 이렇게 근엄한 척하지마는
낙양 성동의 벌나비로다.
바람에 불려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변방의 어여쁜 꽃가지를 보니
앉아 보고 싶구나!]

나도 이러하나
낙양성동(洛陽城東) 호접(蝴蝶)이로다.
왕풍(枉風)의 지불려
여긔져기 단니더니,
새외(塞外)예 명화일지(名花一枝)예
안자 보랴 하노라.}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고백이 아닌가. 이 어찌 자연스런 정감의 유로(流露)가 아닌가? 이런 때 체면이 뭐가 필요하며 의식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이에 금춘도 저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이렇게 본심을 말한다.

 

<화답가(和答歌)> 4

아녀자의 짐짓 농담의 말을
장부는 믿지 마오.
문무가 일체임을
소견 좁은 저도 잘 안다오.
하물며 늠름한 대장부에게
정 주지 않고 뉘에게 주리가.

아녀(兒女) 희중사(戱中辭)를
대장부 신청(信廳) 마오.
문무일체를
나도 잠깐 아노이다.
하물며 늠름무부를
아니 걸고 엇지리.

 

동서도 분별 못하는 무인에게 정을 줄까보냐던 말을 믿지 마시오. 그건 당신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한 아녀자의 소견머리 없는 말이었습니다. 문신이면 어떻고 무신이면 어떻습니까. 정말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신다면 한 여자로서는 만족한 것입니다. 체면이 어떻고 양반이 어떻고를 따지는 골샌님보다는 솔직하고 우직한 정부(征夫)의 그 넓은 가슴이 진정으로 그리운 한낱 아녀자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뜨거운 하소연이다. 이날밤 양인은 어찌 되었을까? 그날의 일기를 보자.

 

[이날밤 나는 금춘과 더불어 벼개를 같이 잤다. 서로를 사랑하는 정이 깊었다. 김공(金公)은 평소에는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이날밤에는 애춘(愛春)이와 함께 사랑을 불태웠다.]

 

이날밤 결국은 금춘과 동침하였는데, 그 사랑이 북국의 영하(零下)의 찬 바람도 뜨거웠을 것이다. 거기 곁다리로 기회를 얻어 애춘과 잠자리를 같이 한 김공의 정은 더욱 뜨거웠을 것이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북극의 촌락, 뜨듯한 온돌의 적당한 온기, 마음이 통하는 두 남녀의 애정의 거친 호흡은 차가운 북녘의 눈바람도 멎게 했을 것이다.

 

세밑의 암울한 거리, 명멸하는 네온, 광란의 서울거리는 모두가 낯선 이국의 풍경일 것이다. 불경기에 찌든 소시민의 근심은 아랑곳없이, 끝도 모르고 치닫는 물가고, 불길한 뉴우스의 홍수 속에서 '배운 대로 가르칠 수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란 텅빈 백지 광고란. 사회의 소용돌이를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어서 카아바이트로 만든 막걸리와 석회가루를 섞는 줄 번연히 알고 있는 두부 조각으로 소주를 마시고, 술김에 찾아간 여인에게서는

 

[낙하산 감으로 만든 브래지어 밖으로 비져 나온 육중한 젖통이 나를 압박했다. 창부는 직업적 교태도 부리지 않고 알맞게 나를 수용해 주었다. 그녀의 굵은 머리카락에선 싸구려 향수가 시큼한 땀냄새와 함께 내 코를 찔렀다. 내가 허리의 힘을 풀고 포식한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허우적거리자, 그녀는 짧고 굵직한 목을 비틀어 일으키며 머리맡에 접어 둔 기저귀를 집고 "끝났음 비키세요." 다른 팔로는 나의 가슴을 떠밀었다.

 

<서기원의 '이 성숙한 밤의 포옹'에서>
이렇게 쫓겨 나오는 오늘의 '불세출의 호탕한 남자'들에게는 박계숙과 금춘의 하룻밤이 한없이 부러운 밤일 것이다.
남편의 얇아져 가는 월급 봉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어제가 옛날 같이 극성스럽게 뛰는 물가고 때문에, 아무리 묘안을 짜내도 적자 투성이의 만신창이가 된 가계부와 씨름을 하다가 지쳐 한숨 쉬던 눈길이, 골아 떨어진 남편의 초췌한 얼굴을 지켜보는 아내들에게는 무척이나 부러운 밤일 것이다.

 

이제 박계숙이 [부북일기(赴北日記)]를 쓴 지 40년 후에 그의 아들 취문이 아버지가 지났던 똑같은 길을 지나면서 쓴 일기 속의 작품을 소개한다. 즉, 을유년(1645) 2월 1일에 문고개(門古介)를 지나며 읊은 작품인데, 부자가 수십 년을 격하여 같은 수천리 이역 변방의 같은 길을 지나면서 시조를 읊고, 그것이 분명한 기록과 함께 남아 전한다는 것은 기이하고도 보배스런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을유(乙酉) 2월 1일 눈덮인 길을 걸어 문고개(門古介)를 넘어 수중대(水重臺)를 지나니, 대(臺) 아래는 만경창파요 대(臺)의 주변은 천길 낙락장송이 있어, 거길 오르니 꼭 봉도(蓬島)에 드는 것 같았다. 노래를 짓다.

 

뭇노라 수중대(水重臺)야
네가 난 지 몇 천년이냐?
고금(古今)의 호걸들이
몇 사람이나 지났더냐?
이후에 너에게 또 묻는 사람이 있거든,
내가 여길 지났노라 일러라.

뭇노라 수중대야
너 나건지 몃 천년(千年)고.
고금 호걸이
몃 몃치나 지나더니.
이후의 뭇나니
잇거든 날 왓더라 닐러라.}
무인의 늠름한 기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변방을 지키는 군인으로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썼음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훌륭한 작품을 남겨 시조문학의 유산을 살찌개 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