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박종기의 고려사 재발견

醉月 2013. 4. 9. 01:30

싸움꾼 왕건, 팔공산 전투 지고도 천하를 얻다

박종기 교수 j9922@kookmin.ac.kr

 

 고려 건국의 아버지 태조 왕건(877~945년)은 왕이 되기 전엔 백전노장, ‘천하의 싸움꾼’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왕건의 진면목과 고려왕조의 역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896년 스무 살의 왕건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궁예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20여 년간 싸움판을 전전하다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건국한다. 이것으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무려 18년 동안 견훤의 후백제, 통일신라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뤄 60세인 936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다. 69세까지 살았지만 싸움판을 오간 게 꼬박 40년이다.

왕건은 자신의 생애를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압축한 바 있다(『고려사』 권2 태조 17년(924) 5월조). 이 말은 『장자(莊子)』에서 유래했다. 글자 그대로 ‘바람 불면 머리 빗질을 하고, 비 오면 빗물로 목욕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왕건의 심정을 압축할 것이다. 싸움판 앞에서 그는 더욱 단단해졌고, 끝내 천하를 움켜쥐었다.

5000 군사 전멸하고 왕건 혼자 살아남아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유일한 패배가 927년(태조10) 11월의 대구 팔공산 전투였다. 백전노장인 왕건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다. 그보다 2년 전인 925년(태조8) 10월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 성주인 능문(能文)이라는 자가 왕건에게 귀부한다. 영천은 경주의 코앞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곳이다. 그곳 성주가 귀부한 것은 신라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내는 일이었다. 920년 이미 두 나라는 동맹을 맺은 터라, 왕건은 신라의 동요를 염려해 귀부를 거부한다. 수일 후 왕건과 견훤은 지금의 선산 부근인 조물군(曹物郡) 전투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해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한다. 왕건은 사촌동생을 인질로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 4월 견훤이 보낸 인질이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의 인질을 죽인다. 반년 만에 이 화의는 깨진다.

왕건상

고려·신라의 동맹사실을 안 견훤에게 화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두 나라의 동맹은 후백제의 고립을 뜻한다. 견훤은 이를 깨기 위해 먼저 약자인 신라를 공격한다. 927년(태조10) 9월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한 고울부를 공격하는 무력시위를 벌인다. 다급해진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해 11월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경주를 점령해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잔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곤 경순왕을 즉위시킨다. 왕건은 군사 5000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가다 대구 팔공산인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경주에서 북상하는 견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자신의 오른팔 격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전사하고, 군사 5000은 전멸한다. 왕건 혼자 겨우 살아남았을 정도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자세한 전투사실이 다음의 기록이다.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27년 태조가 견훤과 공산동수에서 싸웠는데,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했다. 그때 신숭겸이 대장이 되어 김락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태조는 애통하게 여겨,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에게 모두 원윤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했다.”(『고려사』 권92 신숭겸 열전)

전투의 중요성에 비해 내용은 밋밋하다. 오히려 수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이라는 TV드라마의 내용이 더 흥미진진한데, 이 전투에서 신숭겸은 태조를 탈출시킨 후 태조의 옷을 입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허구이지만 천년 후 재생된 신판 ‘도이장가’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원판 ‘도이장가(悼二將歌)’를 보자. 1120년(예종15) 10월 서경(평양)에서 열린 팔관회 행사 때 예종이 행사에 등장한 신숭겸과 김락의 우상을 보고 그들의 충절을 기린 노래이다.

“님(*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오오! 돌아보건대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양주동 박사 번역;『평산신씨 고려대(태)사 장절공 유사』 수록)

두 장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연민의 갈채일까? 아니면 최후의 승자인 왕건을 극적으로 미화하는 노래일까? 두 장수의 충절은 고려 500년 내내 칭송되었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도 신숭겸의 죽음은 ‘장절도(壯節圖)’란 그림으로 남아서 전한다. 그러나 이 노래에 담긴 팔공산 전투의 의미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 왕건은 패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오히려 승리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는 역설이다. 이해(927년) 12월 승리에 한껏 고무된 견훤이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날 신라 국상 김웅렴 등이 당신을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다. 이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부축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써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려사』 권1 태조10년 12월조 인용)

930년 고창군 전투도 후삼국 전쟁 분수령
신라 국상 김웅렴이 왕건을 경주로 불렀다는 표현은 두 나라 동맹을 깨기 위해 견훤이 전략적으로 신라를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작은 자라와 종달새에 불과한 고려가 큰 자라와 매인 신라의 품에 안기려 한다면서, 왕건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 후 펼쳐진 후삼국 전쟁에서 견훤이 도리어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공산 전투에서 정통왕조에 잔악한 행동을 한 견훤에게 여론의 따가운 화살이 쏟아진 것이다. 견훤은 내심 이 전투의 승리에 놀란 성주와 장군들이 두려워 그에게 붙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심상치 않았다. 그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 건, 자신의 신라 침공은 신라와 동맹한 왕건의 잘못 때문이라며 왕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였다.

견훤은 편지의 다른 구절에서,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하고 의리에 충실하고, 신라에 대해 우정과 의리가 깊다’라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쇠잔한 신라를 만만하게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정통왕조라는 상징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건은 928년 1월 견훤에게 보낸 답신에서, ‘서울(경주)을 곤경에 빠뜨리고 신라 대왕을 크게 놀라게 했다. 정의에 입각하여 신라 왕실을 높여야 하는데, 그대는 기회를 엿보아 신라를 뒤엎으려 했고, 지극히 높은 신라왕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강요했다’(『고려사』 권1 태조 11년 1월)고 비난한다. 왕건 역시 여론을 의식해 신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 최고의 역사가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고려는 정통왕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견훤의 경주 침입 3년 후인 930년 고창군(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 한다. 여기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존왕(尊王)주의를 내세워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3년 후 고창군 전투는 이런 신뢰를 확인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돼 천하 대권을 놓치는 자충수를 두었다.

 

왕건, 변방 장수가 전쟁 영웅으로 … 궁예 이어 2인자

 

나주에 출정한 왕건이 샘터에서 빨래하던 장화왕후에게 물을 얻어 마시는 장면을 형상화한 나주시 송월동의 조형물. 나주=프리랜서 오종찬

 

927년의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향방을 가른 육전(陸戰)의 대표적 전투라면, 나주전투는 당시 해전(海戰)의 대표였다. 903년부터 935년까지 왕건은 나주를 놓고 견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한 지역을 두고 이렇게 긴 공방을 벌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주는 후삼국 전쟁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고려 건국 이전 왕건의 행적을 기록한 『고려사』 가운데 ‘태조 총서’의 대부분은 나주전투로 장식돼 있다. 하이라이트는 왕건이 고려국을 건국하기 8년 전인 910년의 전투다. ‘태조 총서’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德眞浦: 지금의 영암 해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생략) 견훤의 정예군을 꺾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에 삼한의 땅을 궁예가 태반이나 차지하였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000명으로 903년에 빼앗긴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10여 일간 포위한다. 견훤의 반격을 당한 궁예는 왕건에게 정주(貞州: 개성 풍덕)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2500명 군사로 공격하게 한다. 왕건은 먼저 배후인 진도와 고이도(皐夷島: 신안 高耳島)를 공격해 나주를 고립시킨 후, 견훤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다. 이게 위의 기록이다.
이어 왕건은 견훤의 잔당으로 해전에 능하여 ‘수달’로 불린 능창(能昌)을 사로잡아, 나주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910년에 시작된 전투는 2년 만인 912년에 끝났다.(『삼국사기』권 50 견훤 열전) 나주전투는 이같이 견훤과 궁예의 대리인이 자웅을 겨룬 전투로서, 승리를 거둔 궁예의 태봉국이 견훤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고려 개방정책을 잉태하다
이 전투의 지휘자 왕건은 단숨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 그는 궁예 휘하의 변방 장수에 불과했다. 나주전투 승리 당시 왕건은 36세였다. 왕건보다 10년 위인 견훤(867∼936년)은 26세 때인 892년 이미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후백제의 군주를 자처했다. 더욱이 나주전투 때 견훤은 후백제 군주였다. 왕건은 당시까지만 해도 견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존재였다. 왕건은 27세 때인 903년(궁예 재위 3년)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錦城郡)을 정벌하고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은 뒤 금성을 지금의 이름인 나주로 바꿨다. 견훤과의 첫 전투였다. 견훤이 다시 나주를 장악하자, 910년 궁예는 왕건을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견훤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승리한다. 변방의 장수 왕건은 이를 계기로 태봉국의 2인자인 시중으로 승진하고, 마침내 궁예를 몰아낸 뒤 고려국을 건설한다. 반면에 후백제의 견훤은 근거지 나주를 점령당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앞서 뒷문 단속부터 해야 했다. 근거지 나주의 상실은 견훤의 천하통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후삼국 최대 해전 나주전투의 실리는 결국 전투의 종결자 왕건의 몫이 되었다. 나주는 견훤에겐 기억하기조차 싫은 곳이지만, 왕건에겐 천하대권을 꿈꾸게 한 꿈의 무대가 되었다. 뒷날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 선택한 첫 망명지가 나주란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대체 나주는 어떤 가치를 지닌 곳일까?

1 신안선 모형도. 2 보존 처리 중인 신안선 구조물.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7일간 기도 끝에 불어 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해 유비의 촉나라를 건국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2000년에 방영된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드라마 작가는 왕건의 군사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乘風縱火)’는 ‘태조 총서’의 기록에 착안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통속 드라마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물론 왕건이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숨은 공신이 있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 원나라 선적의 ‘신안선’이 발굴되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자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발굴이 시작된 고려 선박 ‘마도선’까지 중국과 고려 선박 16척이 산동반도와 한반도 서해안에서 출토, 발굴됐다. 특히 2005년 중국 산동성 봉래시에서 발굴된 2척의 선박은 고려의 원양 항해용 선박이다. 고려 당시 서해안 일대에 성행했던 해상교류의 모습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다. 고려는 어느 왕조보다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왕조다. 당시 해상교류는 황해(서해)를 중심으로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축으로 이뤄졌는데, 어떤 학자는 황해를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물류의 거점지역이자,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나주전투는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해상의 경제 전쟁이었다. 세 영웅이 사활을 건 것은 이 때문이다.

완사천. 프리랜서 오종찬

 

바다상인(海商)의 후예, 왕건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개성에 근거를 두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바다상인(海商) 출신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을 알아야 왕건이 승리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조상들이 바다상인으로서 축적한 자본과 인맥이 전투의 승리, 나아가 고려 건국의 밑천이 됐다. 왕건의 집안과 해상 교역을 통해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온 서해안 일대 해상세력은 왕건이 나주로 출정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즉 같은 해상세력이라는 친연성이 왕건의 군사와 연대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왕건은 그들의 협조를 얻어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왕건은 각 지역의 유력한 세력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고, 그들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아 전쟁을 치러 나갔다. 그러다 보니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 뒷날 분란을 염려해 그는 부인의 서열을 매겨, 제1비에서 6비까지가 낳은 소생자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했다. 제1비는 정주(貞州: 지금의 개풍군) 출신의 신혜(神惠)왕후이며, 제2비는 나주 출신의 장화(莊和)왕후다. 1비 사이에 소생이 없어, 2비 소생인 혜종이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정도로 부인의 서열은 매우 중요하다. 주목되는 것은 서열이 가장 높은 두 부인이 모두 서남해 해상세력의 딸로서, 나주전투를 전후해 왕건과 혼인했다는 사실이다.

첫째 부인의 아버지는 정주 출신의 유천궁(柳天弓)이다. 정주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합류하고, 강화도를 마주하는 황해 중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다. 왕건의 근거지 개경과 인접해 있다. 유천궁은 이곳을 근거지로 한 해상세력이다. 왕건은 909년과 914년 각각 2500명과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에서 출발하여 나주로 향한다. 914년 70여 척의 군함을 이곳에서 수리한다. 당시 정주는 왕건이 거느린 해군의 발진기지였다. 유천궁은 왕건의 군사에게 식량을 제공할 정도로 왕건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왕건이 궁예를 섬겨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고목 밑에서 말을 휴식시키는데, 왕후가 길가 냇가에 있었다. 왕건은 그녀가 덕을 갖춘 모습을 보고, 이 집에 유숙했다. 천궁은 자기 집에서 모든 군사를 풍족하게 먹이고, 딸에게 태조를 모시게 했다. 왕건은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신혜왕후 열전’).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신혜왕후는 머뭇거리는 왕건에게 갑옷을 입히고 궁예를 몰아내게 한 내조의 여인이다. 한편 제2비(장화왕후)는 서남해의 거점지역인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吳多憐)의 딸이다.
“왕후는 일찍이 (나주)포구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얼마 후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시냇가 위에 오색구름의 기운이 있어 그곳으로 가 보았다.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함께했다. 뒤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혜종이다”(『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장화왕후 열전’).
꿈속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장화왕후가 뒤에 왕건과 결합한 사실은 곧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과 왕건이 연맹을 맺은 사실을 상징한다. 이같이 해상세력의 딸들이 왕건의 부인으로 가장 높은 서열의 제 1비와 2비가 된 계기는 나주전투였다. 나주전투 승리는 왕건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은 서남해 해상세력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들은 나주전투의 또 다른 숨은 공로자였다.

조선 최고 상인 宋商의 등장에 기여
이외에도 혜성군(慧城郡: 지금의 당진) 출신의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도 해상세력 출신이다. 복지겸은 궁예가 횡포하여 민심을 잃자, 배현경·신숭겸·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고려를 세운 공신이다. 박술희는 936년 후백제 신검군과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943년 왕건이 죽을 때, 그에게 군국대사를 맡기고 훈요십조를 전했다. 그는 왕건의 최측근이자 뒤이어 즉위한 왕건의 맏이 혜종의 후견인이다.

고려왕조는 어느 왕조보다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상업과 해상무역을 통해 길러진 바다상인 특유의 개방성을 지닌 왕건 집안의 내력에다, 나주전투를 비롯한 왕건의 정벌사업에 협조했던 해상세력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상업과 무역의 장려, 적극적인 선진문물의 수용 등 고려 개방정책의 전통이 남아 있던 개성에서 뒷날 조선 최고의 상인집단인 송상(松商)이 등장한다.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왕건은 나주전투를 통해 천하 평정의 꿈을 잉태할 수 있었고, 해상세력의 협조를 얻으면서 개방정책이라는 천하 경영의 싹을 심을 수 있었다.

이상주의 군주 궁예, ‘실사구시’ 왕건에 무너지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는 서사시 『동명왕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을 영웅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후삼국시대에도 주몽에 버금가는 영웅들이 역사의 무대를 빛냈다. 궁예, 견훤, 왕건이 그들이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궁예와 견훤을 선악의 도덕적 잣대로 평가해 영웅적인 면모를 잃게 했다.
“신라는 그 운이 다하여 도의가 땅에 떨어지자, 온갖 도적들이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일어났다.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다. 궁예는 신라 왕자이면서 신라를 원수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수도 경주를 공격해 임금과 신하 베기를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다. 두 사람은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다. 궁예는 신하에게 버림받았고 견훤은 아들에게 화를 입었다. 모두 스스로 자초한 짓이다. (생략) 흉악한 두 사람이 어찌 왕건에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왕건을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사람에 불과했다.”(『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1145년 김부식이 세 영웅을 평가한 내용이다. 뒷날 대부분의 역사서가 베껴 쓸 정도로 김부식의 평가는 모범 답안이 되었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왕건)의 기록이라지만 지나친 편견이다.

오다ㆍ도요토미ㆍ도쿠가와에 비유
혹자는 이 세 영웅을 일본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와 비교하기도 한다. 최후 승자는 도쿠가와지만, 일본인들은 오다나 도요토미를 도덕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즉 ‘오다가 떡쌀을 찧고, 도요토미가 반죽을 한 천하를 힘 안 들이고 먹은 사람이 도쿠가와’라고 평가한다. 이에 비춰보면 견훤은 오다, 궁예는 도요토미, 왕건은 도쿠가와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이재범 『슬픈 궁예』)
필자는 도덕의 잣대를 거두고, 왕건의 쿠데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패자(敗者) 궁예의 진면목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 한다.
918년 6월 왕건은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즉위 조서를 반포한다. 그 첫머리에 전왕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전왕은 사방이 무너질 때 도적을 없애고,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폭정과 간사함, 협박으로 세금을 무겁게 하여 백성은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도를 넘는 궁궐 공사로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 연호를 훔쳐 왕이라 칭했다. 부인과 자식을 죽여 천지가 용서하지 않았고, 귀신과 사람의 원망을 함께 받아 왕조가 무너졌으니, 경계할 일이다.”(『고려사』권1 태조 1년 6월)
왕건에게 찾아가 쿠데타를 권유한 심복들도 왕건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 왕건의 심복인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은 “삼한이 분열하여 도둑 떼가 다투어 일어나자 지금 왕(궁예)이 그들을 무찌르고 한반도의 땅을 3분하여, 그 반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2기(二紀·24년)가 넘었으나 통일을 못한 채, 처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잔학한 짓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고려사』권92 홍유 열전)라면서 궁예를 제거할 것을 권유했다. 궁예 폐위의 이유로 통일의 대의명분을 저버린 점을 든 건 주목할 대목이다. 도덕의 잣대로 궁예를 비판한 김부식의 평가와는 다르다.
궁예는 18년간 왕으로 재위했는데, 24년이 지나도록 삼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얘기인가? 쿠데타 당시를 기준으로 24년 전은 894년이다. 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영월 울진을 점령(942년)한 데 이어,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한다. 궁예는 이때 자신을 따른 군사가 3500명에 달하자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독립 세력이 되었다. 세달사(世達寺·강원 영월) 소속 승려 신분을 벗어던지고 죽주(안성 죽산) 호족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간 지 3년 만에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홍유·배현경 등의 비판은 궁예가 이 시점을 기준으로 24년이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896년 궁예는 개성 왕건 부자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철원을 도읍지로 삼아 사실상 왕조를 건국한다. 삼한 통합을 공언한 건 이 무렵으로 보인다. 901년 고려를 건국한 궁예의 즉위 일성(一聲)은 의미심장하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여,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덮였다.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신라 말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918)가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그해 7월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 [중앙포토]

 

궁예, 고려ㆍ마진ㆍ태봉으로 국호 개명
궁예는 옛 고구려의 역사와 영광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삼한 통합을 천명하여 정통 왕조 신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신라 헌안왕(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왕족의 핏줄은 그의 성장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궁예를 죽이게 하였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궁예를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궁예를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10여 세 되어도 놀기만 하자, 유모가 나무랐다. 궁예가 울면서 ‘그렇다면 어머니를 떠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세달사로 가서 중이 되었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왕족으로 태어난 이유로 궁예는 죽을 고비를 맞았고, 겨우 왕궁을 탈출하여 유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런 고난이 자신의 뿌리인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 영웅의 자질을 기를 수 있게 했다. 바다 상인의 후예로 풍요롭게 성장했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궁예에게 의탁한 왕건과는 다른 헝그리 정신이 궁예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의 국가 경영 의지는 국호에 잘 나타나 있다. 901년 건국 후 918년 왕건에게 쫓겨나기까지 궁예는 국호를 고려(901년),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세 번이나 바꾼다. 18년짜리 나라에서 국호가 이렇게 바뀐 예는 이례적이다.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한 사찰 도피안사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궁예의 미륵불, 혁명적 변화 염원 반영
첫 번째 국호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뜻이다. 6세기 무렵 이미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 불렀다.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겠다는 궁예의 취임 일성이 고려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이다. 건국 당시 궁예가 지배한 지역은 지금의 강원도와 송악(개성)·강화·김포·양주(서울)·충주·패강진 등 대부분 옛 고구려의 영토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국했기 때문에 이곳 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국호를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 국호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이다. 마하는 ‘크다’, 진단은 동방을 뜻하여, 마진은 ‘대동방국’의 뜻이다.(이병도, 『진단변(震檀辨)』)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면서, 도읍을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의 1000호를 이주시킨다. 공주의 호족 홍기도 이때 궁예에게 의탁한다. 그 1년 전인 903년, 궁예는 왕건을 통해 후백제의 근거지 나주를 점령한다. 청주·공주·나주는 옛 백제의 전통이 남아 있는 친백제 성향 도시다. 또 상주와 경북 북부 등 신라의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면서 특정 국가를 계승하는 통일 정책을 버리고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우르는 ‘대동방국’ 건설이란 새로운 통일 정책으로 전환한다. 국호 마진에는 그런 상징성이 담겨 있다.
세 번째 국호 태봉(泰封)의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봉’은 봉토, 즉 영토다.(이병도, 『삼국사기 역주』) 즉 ‘태봉’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울러 조화를 이룬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궁예의 이상이 담겨 있다.
궁예는 어려서부터 하층민으로서 세파를 겪으면서 성장했다. 난세의 하층민은 천지개벽의 혁명적 변화를 갈구한다. 현세를 말세로 인식하고 새 세계의 도래를 갈구하는 의식 속에서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꿈꾸게 된다.
궁예의 근거지 철원에 도피안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865년 제작된 금박을 입힌 쇠로 만든 비로자나불이 있다. 이 불상 뒷면에 새겨진 글 속에, 석가불 입적 후 천년이 지나면 말세가 오는 것을 슬퍼하며 이를 구제할 미륵불의 도래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약 1세대 전이다. 궁예가 이곳 철원을 도읍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염원을 갈구한 이 지역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었다.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로 삼아, 외출할 때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했다. 소년·소녀에게 깃발, 일산과 향내 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승려 200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하층민의 염원을 알던 궁예는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미륵의 이상향 용화세계를 태봉이라는 국호에 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에 불과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지한 송악의 왕건을 비롯한 옛 고구려 지역 출신 현실주의자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궁예는 그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상주의 군주였던 궁예의 꿈은 현실의 기득권 연합세력에 산산조각 났다. “통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폭정과 인륜을 저버렸다”는 평가는 현실주의자들의 매서운 반격을 담은 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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