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역동 우탁(1263-1342)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부(卓夫)이며, 호는 단암(丹岩) 또는 백운당(白雲堂)이며 세칭 역동선생(易東先生)
주1) 趙穆의 『易東書院實記』에 의하면 역동이 入元時 중국학자 丁寬이 역동의 易學에 대한 博通함을 찬탄하여 "吾易, 東而已"라 하였던 것을 인용해서 퇴계선생이 易東書院이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이라 부른다. 단산현(丹山縣) 품달리(品達里) 신원(新院 ; 지금의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출생한 역동은 본관이 단양(丹陽)이며,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이고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추증(追贈)된 천규(天珪)의 아들로서, 사관(仕官)이 계속 이어진 명문 선정(先正)의 후예이다.
역동은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정전이해』(程傳理解), 『초학계몽』(初學啓蒙), 『가례요정』(家禮要情), 『사우도수』(師友徒酬), 『역론』(易論), 『역설』(易說) 등의 저서
주2)申賢, 『華海師全』 권3, 諸子敍述. "이 모든 저술들은 역동의 문인인 申賢의 筆削校正을 거쳐 그의 문집에 全帙로 편집하였는데 조선 초 禍亂에 의하여 소실되었으며, 易論의 初本은 역동의 孫 禹玄寶가 보관했는데, 귀양으로 인하여 종가에 의탁하였다가 流失되었다."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의 화란으로 인멸되어버렸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역동에 관한 일차자료로는 시 3수, 시조 2수, 서간문 1편, 기타 한 두 가지의 금석문 등
주3) 시 3편은 5언율시의 「殘月」, 7언율시의 「題瑛湖樓」, 首尾兩句가 빠진 7언율시의 「江行」이 있고, 「歎老歌」 등 시조 2수는 작자가 분명한 것으로서 국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간문인 「與或人書」는 61자로 된 짧은 글이며, 금석문으로서는 丹陽 舍人岩壁에 역동의 친필로 전해지는 글이 새겨져있다.
의 편린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역동사상에 대한 연구는 『고려사』 등의 사서
주4) 사서로서 그외에 『稗官史』, 『東國通鑑』,『東國遺事』,『東史列傳麗』,『史彙纂』 등이 있다.
와 『화해사전』(華海師全) 등의 개인문집들
주5) 개인문집으로서는 『稼亭文集』(李穀), 『牧隱文集』(李穡), 『耘谷拾遺』(元天錫), 『陽村集』(權近), 『退溪全書』(李滉) 등과 그외 『東國名賢錄』, 『東國文獻錄』, 『東賢師友錄』 등에 실려있다.
과 기타 사우록(師友錄)이나 읍지(邑誌), 세고(世稿) 등의 단편적인 2차자료들을 통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에 관한 문헌의 부족으로 인하여 한국유학사상사에 있어서 역동에 대한 평가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 유학자로 존숭하면서도,
주6) 현상윤, 『조선유학사』, 16쪽.
역동의 사상적 특징으로서의 구체적 내용으로서의 역학과 성리학 이해에 깊었다는 정도의 피상적 표현으로서 사상사의 한 단을 할애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비록 후손들에 의하여 산재되어 있는 역동관계의 단편자료들을 수집하여 편집하는
주7) 역동의 사적을 모은 목활자본의 『역동선생사적초』, 후손과 李象靖 등 龜溪사림들이 모은 『상현록』, 원천석의 『운곡십유』 등의 내용이 있는 『역동선생실기』, 1981년 배종호 등이 후손과 편집한 『역동우탁선생考實』 등이 있다(『역동우탁선생고실』은 아래에서 『고실』로 약칭함).
정성이 있었음에도 역동에 관한 연구 논문은 고작 몇 편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제한된 여건과 미량의 자료들을 가지고 역동사상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관견(菅見)의 우(愚)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동사상의 전모를 완전히 밝히겠다는 뜻보다는, 지금까지 통설적으로 이해하여 왔던 역동사상에 대하여 좀더 접근된 입장에서 그 사상적 특징과 의미 그리고 유학사상사에서의 그의 역할을 가능한 전체적 체계 속에서 고찰하고자 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글이 역동에 관한 새 문헌의 발굴 등으로 인하여 정심(精深)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의 초재(礎材)가 될 수 있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료 부족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이용할 수 있는 가능한의 모든 자료들을 방증적(傍證的)으로 원용(援用)하였으며 해석학적 방법으로 종합적 이해에 힘썼다.
2. 역동의 생애
역동은 17세인 1278년(충렬왕 4)에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으며, 곧 발탁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뒤 1290년(충렬왕 16)에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영해사록(寧海司錄: 지금의 경북 영덕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팔령(八鈴)이라는 요괴한 신사(神祠)에 백성들이 현혹하여 많은 폐해가 자행되므로 사(祠)를 부수어 바다에 던져버림으로써 음사(淫祠)를 끊어버렸다.
주7) 『고려사』, 「열전」22, 우탁조
그 뒤 구군(九郡)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도
주8) 李寧稙 「역동 우탁선생의 생애와 사상」, 『고실』, 360쪽.
계속 요괴숭배를 엄금하고 괴이한 신사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미신을 타파하고 음예(淫穢)한 풍속을 개혁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지나친 불사(佛事)의 폐단과 승려의 타락에도 제재를 가하였으며, 사찰의 남설(濫設)과 시주를 금지하는 등 척불운동
주9) 『고실』. "明宗朝敎曰 麗朝之末, 專尙佛業, 人倫紊亂, 道學全廢, 紀綱解弛, 禹倬特立乎其中, 斥祛佛敎, 扶興正學."
에 앞장섰다.
이때 역임하였던 구군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정집』(稼亭集)을 보면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송우제주출수진주」(送禹祭酒出守晋州)에서
진주고을의 풍류는 영남에서 으뜸이요 晉邑風流冠嶺南
장원루 아래 흐르는 물은 더욱 푸르른데 壯元樓下水加藍
영기 앞세워 수령으로 나가심을 부러워하니 一麾出守猶堪羨
고을에는 아직도 박치암(박치암)이 머문 듯 하네. 按府如今有恥菴
라고 읊었으니, 이미 제주직(祭酒職)을 역임한 이후에 진주목사에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회(朝會)의 의례를 맡아보는 통사사인(通事舍人)에 임명되었으며, 이 사인 벼슬을 봉직하고 있을 때 자주 단양의 산수구곡(山水九曲: 지금의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리)을 찾아 사색하며 선유(船遊)하기도 하였다. 단산읍지(丹山邑誌)에 의하면,
팔곡(八曲)은 구곡(九曲) 2리 위에 서벽정(西壁亭)과 사선대(四仙臺)가 서로 보이며 물이 맑고 넓은 곳으로소 고려 때 역동선생이 사인 벼슬에 있을 당시 이곳에 와서 담수에 배를 띄워 놀았으므로 마을 이름을 사인암(舍人岩)이라고 한다.
주10) 『丹山邑誌』. "八曲在九曲上二里許, 西壁亭四仙臺相望盤桓, 而潭水澄長, 高麗時禹易東先生, 官舍人時來居, 維舟於潭水, 故村名舍人岩." 고 기술하였으며, 현전하는 역동의 시 중에서 「江行」(강행)은 당시 사인암의 풍경을 읊은 내용으로 알려져 왔다.
이슬맞은 단풍잎이 붉게 땅위에 떨어지며 楓葉露乘紅墜地
석담에 바람일어 흔들리는 푸른하늘. 石潭風動碧搖天
숲 사이 숨겨진 외로운 마을 아물거리며 林間隱暎孤村逈
구름밖 우뚝솟은 산봉우리 연이어 있네. 雲外參差遠岫連
수미 양구(首尾 兩句)가 빠진 이 시를 통하여 당시 역동의 심회와 사인암에서의 정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사인암리(舍人岩里)의 누벽 위에 새겨진 '탁이불군, 확호불발'(卓爾弗群, 確乎不拔)은 역동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벼슬이 거듭 올라서 시정을 논하고 백관을 감찰 탄핵하며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규정(監察糾正: 종 5품)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곡은 「기하우선생배규정」(寄賀禹先生拜糾正)이라는 시에서
소년의 높은 의리 공경(公卿)을 비루히 여기고 少年高義陋公卿
만년의 성쇠가 높은 이름 감추었네. 晩節浮沈晦盛名
늙은 새 어사를 모두 다루어 바라보며 白首爭看新御史
밝은 임금 바야흐로 노선생을 중용했네. 明君方用老先生
교룡이 어찌 연못 속의 동물이리오 蛟龍豈是池中物
기기는 반드시 땅 위서 달림을 알아야 하네. 騏驥須知地上行
내 일찍 여러 번 시 짓는 모임에 모시었으니 我昔屢倍詩酒社
좋은 소식 들릴 때마다 기쁜 정을 이기지 못하네. 時聞喜事不勝情
라고 하여 역동의 등용을 축하하였다. 이 시를 통하여 역동의 절의와 이 곡의 곡진한 정을 헤아릴 수 있다.
1308년 8월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10월 24일에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자행하자,
주11) 『고려사』, 세가 권33, 충선왕 1년조.
감찰규정이었던 역동은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비행을 직간한 역동의 충의와 절개에 근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주12) 같은 책, 「열전」, 우탁조.
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단(史斷)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우탁이 항소하여 감히 말하고 스스로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여 조금도 몸을 돌보는 마음이 없었으니 임금도 얼굴빛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었는바, 천년 뒤에도 그 사람을 상상하여 볼 수 있고, 그의 고충(孤忠)과 준절(峻節)은 우뚝하여 범인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주13) 『史斷』."倬抗疏敢言, 自分必死, 無一毫顧藉心, 王爲之動色, 左右亦震攝, 千載之下, 亦可想見其人, 而孤忠峻節, 卓乎不可及也."
이어서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인 단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그 뒤 진현관(進賢館)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고 또한 성균관 좨주(좨酒: 종3품)로 승진하였다. 이때 역동은 관학(館學)의 확립을 의논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하여 고려말기에서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신유학 진흥에 매우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성균관 재생(齋生)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읽는 뜻을 깨달아 도를 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말을 익히고 그 체(體)를 본받아서 마음에 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14) 이영직, 앞의 책, 376쪽.
라고 훈도하여 성리학의 이론적 바탕과 함께 실천적 태도를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인륜의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해이하여졌음을, 더욱 충렬왕대에는 원(元)과의 예속적 관계에서 그 여폐가 우리의 의복 등에까지 이르자, 역동은 정주의 의리학을 정연(精硏)하여 통달하였던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天道)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패관사』(稗官史)에 보면 그 상소문의 대강을 알 수 있으니, 그 구체적 내용이 "족혼(族婚)을 금하고, 상례(喪禮)를 정하고, 사학(四學)을 설치하며, 주현(主縣)에 학교를 세우는 것" 등이었다. 비록 이러한 역동의 상소가 가납되어 전부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1308년 11월에 양반의 종친들은 외종(外從), 제종(諸從)형제 간의 근친혼을 금한다는 충선왕의 교지가 반포
주15) 『고려사』, 세가 권33, 충선왕 1년조.
되는 등 이풍(夷風)의 사회적 풍속이 점차 미풍양속으로 변하게 되었다.
여러 번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 뜻이 없었던 역동은, 특히 당시 상황에서 정도 구현이 어려운 때임을 알고 벼슬을 그만둔 뒤에 복주(福州)의 예안현(禮安縣: 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선양동)에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忠肅王)이 역동의 충의를 높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 (충혜왕 3)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쳤다.
높은 학덕과 의리의 실천으로 일관한 역동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만년에 머물렀던 선양동은 역동의 삼대덕(三大德)으로서 도학, 예의, 절조 등을 추모하여 후인들이 지삼의(知三宜)
주16) 『遺虛碑銘』."里號知三, 自先生也, 道學禮義節操三者是已."
라 불러오는데, 사문(斯文) 창도(倡道)의 큰 공덕을 짐작할 수 있겠다. 공민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목은 이색이 청하여 문희공(文僖公)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지극히 흠모하였던 퇴계 이황이 주창하여 구택 근처에 역동서원(易東書院)
주17) 『퇴계전서(二)』 권12, 「역동서원기」. 퇴계의 문인 조목, 김부필 등이 주관하여 1567년 가을 祠宇 등을 완성하고, 1570년 8월에 낙성식을 가졌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복역되어 현재 안동대학 구내에 보존되어 있다.
을 창건하였다. 그 뒤 역도의 본향인 단양의 단암서원(丹岩書院), 최초의 사관지(仕官地)였던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그리고 안동의 구계사원(龜溪書院), 대구의 낙동서원(洛東書院) 둥에 향사(享祀)되었다. 뿐만 아니라 1810년(순조 5) 팔도 유생들이 문묘 종배를 청하는 상소가 있었으며, 삼소(三疏)까지 이어졌으나 종파와 편당(偏黨)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역동의 학행을 숭상하는 기풍이 조선조 유림들에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은 『상현록』(尙賢錄) 서문에서
강의(剛毅)한 성품을 타고난 좨주(좨酒) 우선생은 성정(誠正)의 학문을 익혔으며, 부(符)를 차고 군(郡)에 부임하여서는 음예한 풍속을 일신하고, 홀(笏)을 차고 조정에 서서는 간악한 풍속을 바로잡으니 그 곧은 도와 굳은 절개가 이미 일세에 빛났다. 뜻을 거두어 은둔하여서는 학문을 닦아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고, 더욱 『주역』에 조예가 깊어 정밀하게 본체를 밝혀주었다. 생도들을 가르쳐 의리의 학문을 비로소 세상에 행하게 하니 비록 그 문헌이 없어 그 높은 사상을 만분의 일도 고증할 수 없으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이 실로 선생에게서 비롯되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3.학문적 연원과 주자학 수용
역동은 어려서부터 당시 주자학을 전래하고 유교 중흥의 선도적 역할을 한 회헌 안향(1243-130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을 보면 회헌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이 모두 수백 명에 이르나, 그 중에서 정도를 깨닫고 학통을 이어받은 선비로는 역동을 비롯하여 덕재 신천(德齋 辛 ), 상당 백이전(上黨 白 正), 국재 권보(菊齋 權溥) 등 4인이라고 하였다. 또한 안인식(安寅植)이 쓴 『회헌안문성공략사』(晦軒安文成公略史)에서는 회헌의 적전(嫡傳)으로서 위 4인 외에 동암 이진(東菴 李 ),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을 추가하여 6군자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자가 역동이었으며, 회헌도 역동의 학행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회헌은 임종의 병석에서 백이정, 권보 등의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나는 심술(心術)의 은미(隱微)함이나 습지(習知)와 관견(貫見)이 모두 그대들만 못하였다. 그대들은 연상이나 동년배라고 하여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우탁을 나와 똑같이 스승으로 섬기라.
주18) 『華海師全』 권3, 諸子 述
회헌이 죽은 뒤에 제공(諸公)이 그 유명(遺命)에 따라 연령에 관계없이 모두 역동을 스승으로 섬겼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치암 박충좌(恥菴 朴忠佐), 겸재 안목(謙齋 安牧) 등 24인과 권보의 문인이었던 가정 이곡(稼亭 李穀), 담암 백문보(澹菴 白文寶), 졸옹 최해(拙翁 崔瀣) 등 19인 등이 모두 역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원나라의 학자 주공천(朱公遷), 허겸(許謙), 왕위(王褘), 유경(劉憬), 선진(鮮縉), 유기(劉基) 등은 벗할 수 있었음에도 모두 스승의 예로써 역동을 공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회헌이 역동을 후계자로 추천하였고, 또한 당시의 제공(諸公)들이 모두 사우(師友)의 예(禮)로써 역동을 섬기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동의 학문과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제공들은, "문성공이 우리들을 우선생에게 귀탁시킨 것은 그 덕이 높았기 때문이며, 지금 선생이 이 사람 대하기를 사우와 같이 예우하는 것은 이 또한 도의 완성과 덕의 확립이 뛰어난 때문이다" 라고 서로 말하였으며, 역동에 대하여 사장(師長)과 우형(友兄)으로 공경하는 것이 곧 문 성공의 뜻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이 열복(悅服)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제공들 가운데에서 역동의 도학과 인덕이 얼마나 고매하였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역동은 제공들에게 또한 극진한 예의로써 대하였으며, 당시 역동의 어진 벗으로는 한희유(韓希愈), 최유엄(崔有 ), 장일(張鎰), 홍자번(洪子藩), 유천우(兪千遇), 신현(申賢) 등 6인이 있었으며,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는 신현
주19) 고려 개국공신 申崇謙의 후예로서, 본관은 平山, 자는 信敬이다. 당시 원에 가서 朱公遷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하여 큰 학자가 되었다. 원 명제가 師禮로 대하고 不 齋라는 호를 내렸다. 그 외에 雲月齋라는 호가 있고, 시호는 文貞이다.
이 가장 우뚝하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으며 특히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에 힘썼다. 신현은 역동의 저술들을 첨삭 및 교정하여 편집하였으나 불행히 소실되었고, 다만 역동의 학문적 사적(事蹟)에 관하여 비교적 많이 담고 있는 『화해사전』(華海師全)
주20) 1852년(철종 3) 호서의 孔氏家에서 고려말 학자 范世東이 짓고 원천석 등이 편집한 『活動人物叢記』가 나왔는데, 여기에 신현의 행장과 사적 등이 담긴 『화해사전』이 들어 있었다. 1920년에 후손에 의해 印書되었으며, 1932년 重刊했다. 이 책의 진위문제에 이설이 있다.
만이 현존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역동은 신현과의 「성경문답」(誠敬問答)에서 신현의 높은 수준에 감탄하여 자신이 학문성취가 늙어서 100배나 얻었다고 칭찬하였으며, 정주(程朱)의 뒤를 이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현의 문인으로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운곡 원천석, 간재 신용의(簡齋 申用義: 신현의 아들) 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화해사전』의 끝에 첨부되어 있는 「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
주21) 범세동의 『할동인물총기』에서 나온 것인데, 『화해사전』의 권3으로 편집되었다.
에서는 나려대(羅麗代)의 도학 연원과 도통(道統) 관계를 설총(薛聰) →최충(崔沖) →김양감(金良鑑) →안향(安珦) →우탁(禹倬) →신현(申賢)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지금까지 대부분 해동도학(海東道學)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서 정몽주를 꼽거나
주22) 『퇴계전서』 하,「언행록」."嘗言吾東方理學, 以鄭圃隱爲祖."
포은의 사승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었는 데 비하여 포은의 스승으로 신현을 제시하였으며, 도통의 연원을 신라의 설총까지 소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통의 개념이나 성격은 충효의 실전과 대의명분론으로 할 수도 있으며, 사제의 전승관계 또는 문묘배향의 계보 등을 분별하여 그 정맥(正脈)을 설정할 수 있는바, 그 시비를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난점이 있다. 다만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무엇보다도 주자학의 전래와 보급에 힘썼던 회헌의 적통으로 이어진 역동의 학문적 성격이 주자학에 있다는 사실이다.
4. 역동사상의 이학적 기조
역동에 관한 문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역동의 역학에 밝았으며, 성리학 이해가 깊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역동의 학문적 바탕, 특히 이학적(理學的) 기조를 고찰할 수 있는 자료들을 섭렵하여 역학과 성리학 이해의 특징을 나누어서 고찰하고자 한다.
1) 역학 연구
이학의 개념이 상당히 넓은 의미로 쓰여지기도 하나 철학적인 추구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때, 좀더 좁혀서 보면 인간의 심성을 분석하는 인리학(人理學)으로서의 성리학을 일컫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논하는 주요 과제가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의 문제로서, 그 천인간의 매개점을 구명하는 데 중요한 경전이 『주역』과 사서(四書)라고 하겠다. 특히 역이란 이학의 추뉴(樞紐)가 되기 때문에 송대 이학에서 역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역을 알아야 한다. 『고려사』 「본전」(本傳)에서
우탁은 경서와 역사서에 통하였으며, 더욱 역학에 깊어 복서(卜筮)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정자의 역전(易傳)이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왔을 때 능히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동안 연구하여 생도들에게 가르치니 이학이 비로소 행하여졌다.
라고 하였으니, 역동이 경사(經史)뿐만 아니라 역학에 능통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정전역(程傳易)에 대한 연구가 깊었음을 밝히고 있다. 역동의 역학 관계 저서인 「정전이해」, 「역론」(易論), 「역설」(易設) 등이 전하여지지 않으므로 그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역동이 중요시 여기었던 의리역(義理易) 또는 정전역 등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역동이 추구하였던 역학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역이란 천도의 변화를 담고 있는 괘효의 상(象)을 통하여 인사의 길흉을 판단하는 것으로서 본래 복서(卜筮)의 책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십익(十翼)에 의하여 길흉의 원리, 즉 소이연과 소당연의 이(理)를 체찰하고 체득하는 의리역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에는 경학가들에 의한 의리역과 복서가(卜筮家)들에 의한 상수역(象數易)이 있는데, 한대에는 비록 왕필(王弼)이 노장의 입장에서 의리역으로 해석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괘효사(卦爻辭)를 중심으로 하는 상수역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후인들이 복서만 알고 이학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송대의 정이(程 )가 다시 공자의 십익에 근거하여 의리역의 입장에서 역학을 구명하였으니, 곧 정자의 『역전』(易傳)인 것이다. 당시 소옹(邵雍)은 상수역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주희(朱熹)는 정자와 소옹의 역학을 집성하여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저술하였으나 역시 상수역의 입장이 더 강조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역경』의 전래는 이미 오래되어 삼국시대 이상으로 소급할 수 있으며, 신라의 국학(國學)에서는 『주역』을 최고급의 교과로 교수하기도 하였다.
주23) 『삼국사기』 권38, 職官上, 國學條.
또한 고려 선종(宣宗) 8년에 이자의(李資義) 등이 송에서 귀국하면서 『순상주역』(荀爽周易) 10권, 『경방주역』(京房周易) 10권 등 역에 관한 책 수십 권을 들여왔는데
주24) 『고려사』, 宣宗 8년 6월조.
이들은 한대의 상수역인 것이다. 예종과 인종 연간에는 경전강학의 풍이 크게 일어나 보문각(寶文閣), 숭문전(崇文殿) 등에서 역학 강의와 문난(問難)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당시 윤언이(尹彦 )는 역학에 정통하여 역에 관한 저술이 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의 역학 연구는 대단히 정심하게 이루어져 왔으나 역시 상수역이 중심이었는데, 고려말에 이르러서 정자의 『역전』과 주자의 『본의』 등 성리학적 역학이 새롭게 수용된 것이다. 당시 역동의 역학 이해 또한 종래의 상수역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본전」에서 "복서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새로 전래된 정전역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문을 닫고 한 달 동안 연구"하여 깨우칠 수 있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동국유사』(東國遺史)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동이 입원(入元)하여 순제(順帝)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에 역이 없습니다" 하니, 천자(天子)가 "그대는 역리에 통달하였는가?"라고 하여, 역동이 아뢰기를 "비록 박통한 군자라 할지라도 어찌 역리에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역은 이학의 두뇌이니 한번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천자가 역을 주니 역동이 옥하관(玉河關)에서 하룻밤을 읽고, 이튿날 순제 앞에서 배송(背誦)하는데 두루 외워 막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순제가 경찬하여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정말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두기가 아깝도다. 주부자(朱夫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도다"라고 하였다. 역동이 귀국하여 외운 것을 시송하니 조금 의심나는 곳이 있어 문을 닫고 한달쯤 연구하여 이에 해득하고 이듬해 중국에 보내어 본역(本易)과 대조하니 한 자도 착오가 없었다.
여기서 우리나라에 역이 없었다고 한 것은 『주역』이 아니라 새로운 정전역이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25) 이완재,「역동우탁선생의 학문과 인품」,『안동문화』, 안동학회, 1973. 위 인용문 중 無易의 易을 『周易』 자체로 이해하면 불합리하거나, 假托에 의한 허구적 일화로 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역동이 원에서 귀국한 후에 정전의 역리에 깊은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주역의 주자주석에 대하여서도 자득의 경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역동이 깊이 해득한 역의나 역리에 대하여는 그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의 특징을 고찰함으로써 역동이 정전에 심취하였던 개략적 범주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천역학(伊川易學)의 기본 사상은 역리의 구명에 있음이 특징이다. 역의 대의(大義)는 변역(變易)이 주(主)가 된다. 일변일동(一變一動)은 무시무단(無始無端)이므로 천지가 이에 의지하여 항구(恒久)할 수 있는바, 음양은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천지 사이의 음양변화는 그 속에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게 하는 '이'(理)가 있다. 정이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은 이 '이'가 있으므로 상(象)이 있고, 그 뒤에 수(數)가 있는 것이다. '이'는 무형이고 상은 유형인바, 상으로 말미암아 '이'를 밝혀야 하며 '이'는 사(辭)에 나타나므로 사에 의하여 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리를 알아야 지천(知天)할 수 있다.
주26) 『周易傳義大全』 易說綱領.
역에는 대대(對待)의 '이'가 있으므로 천지간의 만물은 모두 상대적인 특성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음양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록 상반되는 면이 있으면서도 실제는 상수(相須)관계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 즉 만물은 이 음양의 교감화합(交感和合)으로 생성가능한 것이다. 천인간에도 상응의 '이'가 있으므로 천인의 합덕(合德)을 구하는 것이 '이'의 자연스러운 양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지의 도를 본받고 따르려 하는 것인바, 그 구체적 매개점이 인간에 내재된 천덕으로서 성(性)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인합일'은 그 행동이 인간에 달려있으므로 인간 스스로가 성정(性情)을 닦아 천덕에 되돌아가는 것이 도에 합치되는 것이라
주27) 胡自逢,『伊川易學之基本思想』, 중화학원, 38쪽.
그런데 역의 중심은 변역(變易)에 있으므로 이 변동에 의하여 천지가 항구할 수 있게 되고, 이 항구는 곧 천지의 상성(常性)인 것이다. 역에서는 변하면서도 상(常)이 있는 천지의 중도를 가장 숭상하며, 인간은 천도를 본받아 시중(時中)으로서 변화에 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근(權近)은 그의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역은 변역으로서, 천도의 변역은 성(誠)이며, 인도의 변역은 중(中)이다. 성은 항구성이 있으면서도 쉼이 없는 '이'이며, 중은 변화하면서도 도를 따르는 의(義)로서 이것이 역의 체용(體用)이다.
주28) 權近, 『周易淺見錄』 上經. "易者變易也. 蓋天道之變易者性也, 人道之變易者中也, 誠則恒而無息之理, 中則變而從道之義也, 此易之體用也."
이상과 같은 역리를 통투(通透)하였기 때문에 역동 역시 천안의 매개점을 성으로 파악하였고, 성인의 경지인 성에 도달하기 위한 수양덕목으로서 경(敬)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역학에 대하여 이와 같은 역동의 의리학적 이해는 종래의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점술의 입장을 지양하고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사유의 입장으로 전환시켰다는 데에 역동 역사상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전역 연구의 선하(先河)를 이루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의 역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주29) 곽신환,「주역천견록과 양촌 권근의 역학」,『정신문화연구』,1984 여름호, 84쪽.
이학적 사색의 시초를 이루었음에 역동 역학의 사상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2) 성리학 연구
역동의 성리학적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단서는 극히 일부분이나마 『화해사전』의 「비모」(備耗)편에 보인다. 이 편은 문인인 신현에게 명하여 송대 군현(群賢)들의 문집 속에서 성(誠)과 경(敬)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해서 늙어 잊음에 대비하도록 한 글이다.
주30) 『華海師全』 권1,「備耗錄」."易東先生......盡屬之曰, 予輯誠敬所以然之妙與迹, 裁編一度, 備蕙老朽之耗忘."
이는 마치 선현들이 명(銘)을 만들어 일일신(日日新)의 잠(箴)으로 한 뜻과 같은 것으로서, 역동이 얼마나 성경을 중시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비모」편 중산에 신현과의 성경문답이 있으므로 역동이 강조하고자 하였던 성리학적 특징의 개요를 추출할 수 있다.
먼저 역동은 천도와 인도를 구분하여서 선천적으로 완성된 성인의 경지를 곧 천도라 하였고, 후천적 노력을 요구하는 현인 이하의 입장을 인도에 배속하였으며, 그 천도와 인도의 연결점을 성(誠)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도에서 강조되는 경은 어떻게 천도와 연결될 수 있으며, 경의 본체는 천도의 어느 자리에 확보될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시하여, "경은 인도에 있어서 마땅히 행하고 말미암는 것이라 함은 옳은 것이나, 천도에 있어서는 무엇으로 경체(敬體)를 지적할 수 있는가"
주31) 앞과 같음. "敬於人道也, 當行所由則然矣, 於天道, 以何指的底敬體歟." 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의 실천적 덕목으로 제시되는 경의 소이연을 명확히 분석하여 도덕적 실천의 근거를 확보하고 더 나아가 성과 경의 유기적 관계성을 해득하고자 하는 뜻이 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신현은 '진실무망'(眞實無妄) 그 자체는 성이요, '진실무망하려는 것'은 경이라고 하여 '성지'(誠之)의 구체적 내용이 곧 경이라고 하였다. '경체'(敬體)에 대하여서도 "도(道)가 유행하여 변화되는 묘가 성에 의한 것이고, 도가 유행하여 변화되는 구체적 나타남이 곧 경의 체(體)가 된다"
주32) 앞과 같음. "道之流行而化之妙, 是誠而然, 道之流行裡化之著, 是敬之體也."고 하였다.
즉 천도로 볼 때, 말하지 않아도 변화하는 바탕이 성지묘(誠之妙)라고 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변화하는 실체가 곧 경의 나타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역동은 또 심성의 이기 문제에 대해 "심이란 허영(虛靈)한 활물(活物)로서 추기(樞機)의 기(器)이며, 성정사어(性情思語)가 모두 심의 일이다" 라고 하여 일심(一心)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만사가 심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한 주자와 같이 심을 이기의 합으로 보고, 군자는 이에 따르기 때문에 덕을 보존할 수 있으나, 상인(常人)은 기를 따르기 때문에 어그러지게 되는 것임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생각하는 바는 오직 성과 경뿐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성인과 현인의 '성지'(誠之)공부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니, 신현은 기질의 작용으로 국한되어 진취가 다름을 설명하고 그 실례로서 『중용』에 성인으로서의 '지성'(至誠)과 현인이하로서의 '치곡'(致曲)을 들었다.
그런데 '치곡'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신현은 주자주(朱子注)인 "곡일편야"(曲一偏也)를 인용하여 '일(一)'의 의미는 주일(主一)이 아니라 전일(全一)의 뜻이요, '편'(偏)은 편벽(偏僻)이나 미혹(迷惑)으로서의 치우침의 뜻이 아니라 주력하는 바(所主)의 뜻이므로, '치곡'의 해석은 즉 "힘써 주력하는 바에 전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역동은
"치곡은 그 선단(善端)이 발현하는 편단(偏端)으로부터 모두 미루어 극진하게 하여서 각각 그 극처(極處)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주자주를 인용하여, 주자의 '발현'은 선단이 발하는 첫머리의 뜻이고, 신현이 말한 '소주'(所主)는 선단이 발하여 이미 선택된 것 같은 맛이 있다.
"又曰朱子言發見, 而君則言所主, 以愚見發見似善端初頭味, 所主似善端已擇底味."고 하여 '곡'(曲)에 대한 주자와 신현의 해석상 차이점을 예리하게 분변하고 있다. 이를 보면 역동의 주자주를 바탕으로 한 『중용』 이해는 매우 치밀한 데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동은 '성'(誠)으로서의 성인보다는 '성지'(誠之)로서의 범인(凡人)에 깊은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일일신의 자세로 노력하는 성실한 인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극히 강조하고 있다.
성경(誠敬)은 바로 성분상의 것이며, 마음에 본래부터 갖고 있는 '소이지묘'(所以之妙)와 '소이지실'(所以之實)로서 현우(賢愚)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갖추어진 것인바, 하우(下愚)도 또한 성경이 있으면서 군자가 되지 못함은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분명히 그 까닭을 말하여 자포자기하는 자가 깨달아 그렇게 됨을 알 수 있도록 하여 만약 돌이킬 수만 있다면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 보면 역동은 비록 하우(下愚)일지라고 자기 고유의 가치를 자각하여 주체성을 확립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의 중요성과 그 구체적
덕목이 곧 경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天)과 성(聖)의 도가 어찌 이 경(敬)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일(主一)과 무욕(無慾)과 담연(湛然)과 함양(涵養)은 천(天)과 성(聖)의 경(敬)이요, 이것을 배우는 것은 모두 인도(人道)로서 현자의 일이니 곧 성인을 갈망하고, 천(天)을 갈구하는 자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비록 후대의 성리학에서와 같이 깊은 철학적 이론이 보이지는 않으나, 이 단편적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역동의 성리학적 특징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겠다. 먼저 중용을 중심으로 한 역동의 성리학적 바탕이 주자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성리학 이론의 정밀한 분석은 윤리적 도학의 실천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을 목표로 하여 끊임없이 성과 경의 기질변화(氣質變化)에 치중하였음이 그 특징적 요소라고 하겠다.
5. 도학적 실천과 후대에 끼친 영향
객관적 입장에서 물(物)을 중심으로 볼 때는 이(理)라고 할 수 있으나, 주관적 입장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는 의(義)라고 할 수 있는 바, 천(天)으로부터 부여된 성(性)을 통하여 보편적이며 내재적 원리로서의 '이'가 실현되는 마땅한 삶의 길이 곧 의라고 하겠다. 역동은 이학적 측면보다는 이러한 의리실천의 도학적 측면이 더 강하게 현양(顯揚)된 생애를 보냈다. 역동 스스로가 자탄하여 이르기를,
나의 학문이 경전을 통하여 그 원칙을 취하고 동정어묵(動靜語默)에 있어서는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들이 이미 정해놓은 법도로써 결단함은 능히 할 수 있으며, 대사(大事)의 의논에 있어서도 의리로서 판단할 수 있지만, 성리학의 정미한 극처에 있어서는 늙고 혼몽하여 능히 해내지 못한다.
주33) 『華海師全』 권3, 諸子敍述. "每常自歎曰, 吾學自經術取則......然至精極處, 精神委老 , 心常昏耗, 故不能而門."
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역시 경전과 선현의 가르침에 의하여 의리 실천 가능성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불의와 비행에 대항할 수 있는 강한 도학적 절의가 역동적 힘을 갖고 실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충선왕의 패덕(悖德)을 면전에서 분변하고 굳센 의기로 당시 아첨하는 대신들을 노성으로 꾸짖었던 기개와 충의사상은 곧 도학적 실천의 참된 구현을 의미한다. 역동은 당시 올린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여 날마다 유신(濡臣)과 더불어 경사를 토론하여 정치의 토론하여 정치의 이치를 묻고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터인데, 만고(萬古)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습니다.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키소서.
이는 곧 성리학적 기조 위에서 역동의 도학사상이 전개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학사상에서 인과 의는 철학적 인식의 바탕이 될 수도 있지만, 행위판단과 가치기준으로서의 근거도 된다. 그러므로 공자가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論語』,「里仁 16」.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하여 군자로서의 의를 매우 중요시하는 것이다.
의(義)의 개념에는 보편적 원리로서의 의미와 당위성으로서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러므로 가치선택으로서의 의보다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 하는 가치판단으로서의 의가 매우 어렵고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의리의 분변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면 "위함이 없는 행위가 의이며, 위하는 바가 있어서 행하면 이가 되어"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극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와 비의(非義)의 판단은 주관성을 바탕으로 한 판단이기 때문에 시중(時中)의 도를 잃기 쉬운 것이므로 명분적 가치판단의 근거가 항상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서와 시의(時宜)에 있어서, 가변되는 변화의 상황성에 대한 부단한 통찰력이 요구되는 것이라 하겠다. 자칫 현실과 유리되어 일면에 집착한다면 이미 보수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역동은 역학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고려사』 「본전」에서 "복서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여 복서역에 뛰어났음을 지적하였다. 변역을 중심으로 하는 복서역에 대한 깊은 이해는 곧 현실적 변화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컸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출처대의에 있어서도 항상 이러한 복서로서 결정하였던 것이다.「유허비」(遺虛碑)에 의하면, 역동은 당시 고려말의 시대상황을 명이괘(明夷卦)의 대란시로 규정하고, 둔괘(遯卦)의 물러나 정지(正志)로서 대의를 지키는 도리로서 처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과괘(大過卦)의 "군자는 홀로 서서도 두려워 아니하고,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실천에 옮겼으며, 사인암 석벽(石壁)에 새길 만큼 강한 신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 통찰의 혜안을 갖고 있는 역동의 의리사상은 당시 고려말의 인순고식(因循姑息)으로서의 폐풍에 대하여서도 과감한 개혁으로서 실무에 힘쓸 수 있는 선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무책으로서 족혼의 금지, 관복의 숙정(肅正), 상례의 제정, 학교의 설립 등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족혼 문제에 있어서, 고려는 신라의 계급적 내혼제(內婚制)를 답습하여 왕족간의 근친혼이 성행하였다. 역동은 이와 같은 근친혼이 인륜과 도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혈통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외종(外從)과 이종(姨從)형제 및 오복(五服)이내의 동성간에는 모두 통혼금지를 하여야 함을 여러 번 상소하였던 것이다.
복제(服制)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가 비록 원의 속국이 되었으나 엄연히 국경이 있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풍속이나 관습이 원과 다르므로 원의 복제에 따라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주체성을 갖고 자주적인 의복 착용의 시행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상례에 있어서도, 고려에서는 백일로서 상기(喪期)를 마치고, 대부분 불교의식을 따르는 경향이 컸으므로 역동은 상례의 제정을 상소로 청하였으며, 스스로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상혼례를 연구하고 『가례요정』(家禮要精)을 저술하여 예학을 창도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설립 등을 상소하고 후학 양성에 혈성(血誠)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시의(時宜)로서 창조적인 현실개혁을 선도할 수 있었음을 무엇보다도 복서역을 바탕으로 정전역인 의리역에 정통하여 이학적 인식과 함께 도학적 가치판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색이 이르기를, "우선생은 일찍이 경사를 통하여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집에 거처할 때도 조정에 서 있는 것과 같이하여 행동과 처사에 있어서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華海師全』 권3, 諸子敍述. "牧翁曰, 易東禹先生, 嘗博通經史, 無不涉獵, 居家自如立朝, 動容周旋, 無不中律."
고 하였으니, 역동의 도학적 실천은 생애 전체에 일관되고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겠다.
1811년(순조 11)에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역동의 문묘종사를 청한 글에 이르기를,
도학을 논하면 경사에 널리 통하였고 역리에 깊이 잠심(潛心)하여 정주학을 이었으며, 업적을 논하면 학교를 세워 예의를 일으키고 제도를 정하였고 미개한 풍속을 개혁하여 예성(禮聖)의 나라로 만들었으며, 그 실천적 충절을 보면 군왕의 비행을 죽음으로 직간하여 탁월한 지조는 늠름하다. 고 하여 학문으로서의 도학과 공효(功效)로서의 업적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충절 등을 열거하여 역동의 전모를 밝혔다. 순수 사변적 지식에만 치우치거나 학문적 바탕이 없는 행위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며, 성리학의 궁극적 목적인 지행합일로서 이학과 도학이 겸비하였기 때문에 후대의 사표(師表)로서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학파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정몽주는 1367년(공민왕 16)에 역동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드는 상소를 올렸으며, 『易東先生實記』, 恭愍王 16년.
점필재 김종직은 예안(禮安)을 지나면서 지은 「추감시」(追感詩)에서 역동의 충절은 송의 당개(唐介)에 비교하고, 학문은 후한의 정현(鄭玄)에 대비하여 그 학덕을 칭송하였으며, 『고실』, 341쪽.
1591년(선조 24) 일본 사신이 내왕하자 지부상소를 올렸던 조헌(1544-1592)은 "우리나라가 군신과 부자의 도리를 알게 한 것은 우탁이 소학과 가례를 講明하였기 때문에 문명을 계승하게 되었다"하였다. 같은책, 383쪽.
그러나 역동을 가장 존숭한 사람은 퇴계로서, 서원을 창건하고, 친필로 현판과 액자 등을 명명(命名)하여 적었으며, 사우(祠宇)의 대지(垈地) 선정시 그 지명인 오담의 오(烏) 자는 대부분 기휘(忌諱)하는 글자라고 하여 별(鱉) 자로 개명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이같이 퇴계와 역동을 경모한 근본적 이유는 충의대절과 경학에 밝음과 진퇴의 정당함에 있었음을 그의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액서 자술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역동의 학행을 숭상하는 기풍이 조선초에 매우 높았음은 많은 문헌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6. 맺음말
유학사상의 특징은 이론과 실천의 합일에 있다. 그러므로 주자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성리학적 탐구는 참다운 인격의 완성과 실천을 위한 학리적 추구이며, 도학적 실천은 의리학적 근거와 그 논리적 체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비록 관계 문헌의 부족으로 인하여 역동사상의 본질을 구명하거나 실증의 기반이 미약할 수밖에 없는 제약이 있으나, 역동의 이학과 도학의 특징과 한국 유학사상사에서의 기능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이학적 측면에서 볼 때 새로 전래한 주자학에 있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었으며, 특히 『주역』과 『중용』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주역』은 복서 중심의 상수역을 通透한 바탕 위에서 의리역인 정전역을 수용하여 역리를 추구함으로써 역의에 정통하였다. 『중용』에서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였고 특히 기질변화의 실천덕목으로서 경을 강조하였다.
둘째, 도학적 측면에서 볼 때, 성과 경을 바탕으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역동의 의리사상은 국가에 대한 충의정신으로 실천되었다. 정이천의 의리역 연구로 인하여 주체적 인간자아의 확립과 함께 합리적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고려말에 비합리적이고 미신적 풍속을 교화하여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실천적 의리사상은 생애 전체에 일관되었으며, 특히 상수역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므로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 시의(時宜)에 접근할 수 있었다.
셋째, 역동의 학문과 절의 겸비는 조선 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조선 도학파의 종사인 퇴계에게 그 영향을 미치어 안동 지역의 문화창달에 기여하였다.
이상으로 볼 때 한국 유학사상사에서 사상적 전환점에 위치하였던 역동은 신유학의 수용과정에서 이학적 사고의 계기가 되고 여말선초 성리학파 형성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그의 학문과 실천의 겸비는 도학의 조종이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러한 역동의 실천적 의리사상은 물질 중심의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확보하여주는 중요한 핵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출처 : <한국인물유학사편찬위원회,『한국인물유학사』,한길사, 1996.6.5, 143-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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