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바다에 가려진 오지 계곡 세상의 소란이 쓸려간다

醉月 2022. 7. 23. 18:10

■ 발길 닿지 않은 ‘더위 탈출 명소’ 포항·영덕

경북 울진과 포항의 내륙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있는 계곡이 있습니다. 영덕과 포항이라면 다들 바다를 생각합니다만, 그건 도시의 앞쪽이고 뒷면에는 깊은 계곡과 숲이 있습니다. 도시가 바다로만 확장하는 사이에, 반대편 숲 그늘은 외려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지(奧地)가 사라져버린 시대’라고들 하지만, 여기 와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곳이야말로 아직 세상에 몸을 다 드러내지 않은, 오지 중의 오지니까요.

영덕과 포항의 경계쯤에 있는 옥계계곡에서 상옥·하옥계곡으로, 그리고 거기서 더 남쪽으로. 오지는 마치 그린벨트처럼 이어집니다. 울진과 포항의 분주하고 빛나는 바다에 밀려서 눈길과 발길이 미처 닿지 않았던 곳들입니다. 그 벨트를 끼고 진초록 솔숲의 덕동마을이 있고 그윽한 정자 분계정이 있으며 옛 선비들의 시 구절을 널어놓은 입암이 있습니다.

오지의 이야기를 ‘지금’ 꺼내놓는 이유는 본격적인 휴가 시즌이기 때문입니다. 절정의 휴가 시즌에는 아무리 오지라고 해도 적요할 리야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이곳 계곡에는 비포장길이 있고 물가로 내려서는 길조차 없는 구간이 있을 만큼 전인미답입니다. 피크 시즌을 슬쩍 비껴가기만 한다면 고즈넉하게 피서를 즐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울진과 포항의 뒷면, 깊고 아름다운 경관의 오지 계곡 이야기를 꺼내보겠습니다.

포항·영덕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영덕 옥계계곡, 곳곳 비포장도로
빼어난 경관에 비해 입소문 덜해
침수정서 내려다보는 경치 장관

하옥계곡 남쪽 자리한 덕동마을
수백년된 소나무숲·용계천 눈길


#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곳…옥계

오지 여정의 출발지점은 경북 영덕의 옥계계곡이다. 옥계(玉溪)는 청송의 무장산, 영덕의 팔각산, 포항의 동대산을 굽이굽이 흘러들어 오십천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다. 포항과 청송에서 각각 흘러들어온 두 개의 물줄기가 영덕 땅에서 합류한 곳이 옥계고, 이 물이 빚어낸 계곡을 일러 옥계계곡이라 부른다. 옥계계곡을 고유명사로 읽는다면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 있는 계곡의 지명이지만, 옥계계곡을 ‘옥계의 물길이 만든 계곡’으로 이해한다면 영덕의 옥계계곡은 물론이고 포항 하옥계곡과 물길을 거슬러 상옥리까지, 옥계의 물길이 만든 모든 계곡을 다 옥계계곡이라 할 수 있다.

포항의 하옥리는 한때 ‘옥계의 아래에 있다’고 해서 ‘하옥계(下玉溪)’라 불렀다. 하옥리는 포항이고 옥계는 영덕에 있으니, 영덕 땅의 이름을 빌려 포항의 마을 이름을 지은 셈이다.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경계가 분명한 지금,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예전에는 그랬다. 과거에는 옥계나 하옥리나 다 같은 지역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옥계의 물줄기와 계곡은 하나였다. 고려 때부터 내내 경주였다가 한때 포항으로 넘어갔고, 지금은 영덕의 땅이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경계가 그어지고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옥계계곡의 주인이 이리저리 옮겨간 셈이다.

옥계계곡이 마지막으로 영덕 땅이 된 건 1983년의 일이다. 그해 대통령령으로 영일군(지금의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하옥리를 영덕군 달산면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옥계계곡은 포항 땅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영덕의 것이 됐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얻게 된 땅이지만, 정작 영덕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옥계계곡 일대가 여태 오지 계곡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 꼭꼭 숨어있던 신선의 풍경

옥계계곡은 예로부터 명승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계곡의 경치나 물색은 지금 봐도 경탄이 나올 정도다. 훼손되지 않고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 접근성이 크게 떨어져서다. 전국 어디나 사통팔달로 도로가 놓인 지금도, 비포장길이 곳곳에 남아있는 오지로 꼽히는 곳이니 과거에는 오죽했을까. 교통편도 숙박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그러니 빼어난 경관에 비해 소문도 널리 나지 않았다. 어쩌다 소문을 들었다 해도 감히 이곳을 찾을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전국의 어떤 명소에 견줘도 모자라지 않는데 옥계계곡이 오랫동안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래서일까. 옥계계곡에서는 이런 명승지라면 어김없이 호명되는 당대 문사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경상 지역 동남부 일대의 선비와 경주 부윤, 청하현감, 영해부사, 영덕현령을 비롯한 낯선 이름의 지방 벼슬아치들만 찾아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왔다 해도 길이 워낙 험한 데다 숙소도 마땅찮았을 테니 그들도 큰맘 먹고 찾아온 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찾아온 선비들은 옥계계곡의 뛰어난 경관에 반해서 느낌표로 가득한 수많은 문장을 남겼다.

그중에서 고려 때 청송에 살던 권렴이라는 이가 있었다. 딸을 충숙왕에게 시집보내고 현복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옥계계곡을 다녀간 그가 남긴 시 한 구절이 지금의 감상과 한 치도 다를 게 없다. “…옥계의 진면목은 바로 신선이 사는 지경인데(玉溪眞面是仙區)/아깝게 되었네. 바닷가 한 귀퉁이에 숨겨져 있음이(爲惜沈淪海一隅)…” 바닷가 외진 구석에 있다는 게 아쉽다는 데는 백번 동의하지만, 숨겨진 곳이어서 아직도 호젓하고 고요하니 그게 ‘탓’인지, ‘덕’인지는 잘 모르겠다.

옥계계곡은 그때도 그랬지만, 최근까지도 사람들이 잘 알아봐 주지 않았다. 옥계계곡은 1983년에 기껏해야 경북도 지방기념물 45호로 지정됐을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39년 뒤인 지난 2월에 비로소 ‘명승(名勝)’으로 지정됐다. 명승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유적과 주변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지역을 국가 법률에 의해 지정하는 문화재다. 이제야 비로소 옥계계곡이 제대로 된 국가대표 대접을 받게 된 셈이다.



#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고

옥계계곡의 중심은 계곡을 가장 근사하게 내려다보는 자리에 세운 정자 침수정(枕漱亭)이다. 침수정은 지금으로부터 238년 전 조선 정조 8년인 1784년 손성을(孫星乙)이란 선비가 여생을 보내고자 지었다.

정자는 초록 숲으로 뒤덮인 벼랑을 뒤로 병풍처럼 두르고 맑은 계곡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가장 풍광이 빼어난 자리를 찾다 보니 자리가 좁아서 정자를 온전히 앉히지 못하고 앞쪽에다 기둥을 받쳐놓고 그 위에 얹었다. 정자가 앉은 자리에서 보는 경관도 근사하지만, 정자 현판 이름의 풍류도 못지않다. ‘베개 침(枕)’ 자에 ‘양치질할 수(漱)’ 자다. 중국의 역사서 진서 손초전에 등장하는 ‘침석수류(枕石漱流)’에서 따온 이름이다.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한다’는 뜻이다. 번잡한 세상을 버리고 칩거했거나, 세상이 받아주지 않아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맑은 정신이 깃들어있다. 침수정이 욕망으로 노니는 진득한 향락보다는, 담박하고 금욕적인 풍류가 훨씬 더 잘 어울릴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실제로 옥계계곡을 찾은 옛 선비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을 넘어 맑은 자연이 상징하는 심신 수양을 말하고 유교적 이념을 새겼다. ‘영남 팔문장’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선비 장사경. 그가 침수정이 지어지기 한참 전에 옥계계곡을 다녀와 남긴 글을 보자. “…계곡의 이름을 옥이라 한 것은 그 계곡이 옥(玉) 같아서다. 옥의 기운은 윤택하다. 윤택한 것은 덕(德)이 점점 나아감이다.…옥의 용모는 깨끗한 것이니, 깨끗함은 덕행이다. 물이 채워져 그 나쁨을 내치고 비워져서는 그 아름다움을 모으기 때문인가. 옥의 색은 엄하니 엄함은 덕스러운 모습을 가진다…” 그들에게 자연은 산수 감상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구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침수정 주인 손성을은 정자 뒤편의 병풍 같은 수직 바위벽에다 ‘산수주인 손성을(山水主人 孫星乙)’이란 글씨를 뚜렷하게 새겼다. 옥계 일대 자연의 주인임을 자처한 것인데, 숟가락을 얹으려는 다른 사람이 없었던 건 그곳이 오지 중의 오지였기 때문이리라. 산수의 주인이라면 마땅히 자연을 경영해야 하는 법. 그래서 그는 주변의 아름다운 37가지 경치에다 각각 이름을 짓고 시를 남겼는데, 이를 ‘옥계 37경’ 혹은 ‘팔각산 37경’이라고 부른다.

포항서 가장 멀리 떨어진 죽장면
강서 20m 솟은 바위 ‘입암’ 유명
높은 결기 서려…‘입탁암’ 불려

기계면‘분옥정’ 앞은 평범하지만
뒤쪽 기암 계곡 웅장한 자태 뽐내


# 경계를 넘나드는 옥계 37경

손성을의 ‘옥계 37경’은 영덕 옥계리와 포항 죽장면 하옥리와 상옥리, 청송 주왕산면 항리에 걸쳐있다. 1개 시(市·포항시)와 2개 군(郡·영덕군과 청송군)에 걸쳐 있는 셈이다. 활짝 열어두고 경관을 나눴으면 좋으련만, 옥계 37경의 중심인 침수정은 담장을 두른 채 문이 굳게 잠겨있다.

옥계 37경은 처음에는 넓은 화각으로 잡은 장면으로 시작해서 하나하나 세밀하게 좁혀 들어간다. 광각으로 넓게 피사체를 잡은 뒤에 하나하나 ‘줌인’하는 영상 촬영 기법과 닮았다. 37경의 제1경은 침수정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짝 비낀 해월산의 정상 일월봉이다. 달이 뜨고 해가 돋는 자리라 ‘옥계의 시작과 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위산이지만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됐을 만큼 숲이 울창해 산세가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제2경은 팔각봉이다. 팔각봉은 침수정 등 뒤에 있는 팔각산의 다른 이름. 8개의 봉우리가 뿔처럼 솟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져 있고 곳곳에 암벽이 솟아 있는 거친 산이다. 여러모로 대조적인 772개의 큰 산을 각각 1경과 2경으로 삼은 뒤, 3경부터는 침수정 아래 경관을 줌인해서 훑는다.

3경은 복룡담(伏龍潭).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침수정 바로 아래 굽이치는 물길이 ‘용이 누워있는 연못’의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고사에 담긴 뜻으로 새기면 복룡(伏龍)이란 와룡(臥龍)과 봉추(鳳雛)를 뜻한다. 와룡은 엎드려 때를 기다렸던 제갈공명을, 봉추는 천하를 경영한 원대한 꿈을 가졌던 방통이다. 그러니 복룡담은 제갈공명과 방통 같은 인물이 때를 기다리며 은거하는 곳이란 뜻도 있다. 이곳의 정기를 이어받은 뛰어난 인물이 나길 기다리는 희망 섞인 작명인 셈이다.

정자 왼쪽 아래에는 깊은 소에 세 마리 거북이가 물 밖으로 기어 나오는 형상의 ‘삼귀암’이 있고, 그 앞으로는 촛대처럼 생긴 ‘촛대봉’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경관들이 계곡을 오르내리며 흩뿌려놓은 듯 펼쳐져 있다. 봉황 벼슬처럼 생긴 ‘봉관암’, 마고 할미가 중국에 가져가려던 ‘진주암’, 물에 떠 있는 듯한 ‘부암’, 갓끈을 씻어 세속을 초월한다는 뜻의 ‘탁영담’,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 같은 ‘향로봉’,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학소봉’…. 37경의 이름을 받아 들어도 어디가 어딘지 다 알 수는 없다.



# 먹으로 찍어 그린 솔숲…덕동마을

하옥계곡에서 상옥리를 지나 남쪽으로 구불구불 성법령을 넘어가면 소나무에 둘러싸인 덕동마을이 있다.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비학산과 침곡산, 운주산 등 해발 700m를 넘나드는 산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자그마한 분지에 들어선 마을이다.

덕동마을의 본디 지명은 ‘소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해서 ‘송을곡(松乙谷)’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가 식솔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송(松) 자가 든 땅에서는 왜병이 패전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정문부는 모든 재산을 손녀사위인 이강에게 넘겨주고 마을을 떠났다. 이강은 경주 안강마을에서 독락당을 짓고 은거했던 회재 이언적의 동생인 이언괄의 4대손이다. 이때부터 여강 이씨의 후손이 대를 이어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덕동마을의 명소는 수백 년 된 소나무숲이다. 덕동마을에는 군데군데 솔숲이 있는데, 마을 앞 솔숲을 계(契)를 묻은 숲이라 해서 ‘송계(松契)숲’이라 부른다. 마을 문중에서는 재물이 빠져나가는 풍수상 지세를 바꾸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고, 이 숲에다 논 두 마지기와 밭 여섯 마지기를 떼어줬다. 이렇게 숲 앞으로 마을 사람들은 솔숲 소유의 논과 밭을 경작한 수익으로 숲을 관리하되 남은 돈을 마을 어른들의 회갑연이나 동네의 여러 일에 쓰고 있다. 오래된 숲의 품이 이리도 넓고 깊다.

마을 안쪽으로는 용계천 계곡이 흐르고 계곡 물길 바로 옆에는 3대에 걸쳐 지었다는 정자 용계정이 있다. 용계정은 본래 서원인 세덕사에 딸린 강당이었다는데, 고종 시절 서원철폐령이 떨어져 세덕사를 허물 수밖에 없게 되자 하룻밤 사이 서원과 용계정을 가르는 담장을 쌓았다고 전한다. 용계정을 서원의 부속건물이 아닌 것처럼 해서 화를 면했다는 얘기다.

용계정 옆에는 작은 연못을 끼고 있는 ‘도송(島松·섬솔밭)’이 있다. 계곡과 연못 사이에 있어 마치 섬처럼 보이는 자리다.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한창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후드득 소나기가 지나가면서 연못 위 연잎에 빗방울이 굴렀다. 먼 산에 안개가 깔리고 비에 젖은 아름드리 노거수 소나무가 먹을 찍어 그린 수묵화처럼 보였다.

# 우뚝 선 바위와 고고한 누각

포항 도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죽장면은 면 전체가 태백산맥의 등줄기를 이뤄 곳곳에 오지가 많다. 옥계천으로 흘러드는 하옥계곡과 상옥리 일대 오지도 모두 죽장면에 속한다. 죽장면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가 입암리에 있는 ‘입암(立巖)’이다. 입암은 가사천 물길 곁에서 이름처럼 불쑥 솟은 바위다. 강바닥에서 바로 20m쯤 솟은 바위는 발 디딜 곳이 없어서 사람이 오를 수 없다. 그 결기를 높이 쳐서 그랬는지, 입암에는 언제부터인가 ‘높을 탁(卓)’이란 존칭이 붙여졌다. 그냥 입암이 아니라, 존중을 얹어 ‘입탁암(立卓巖)’이라 부른 것이다.

입탁암 옆 개울가에는 높은 다리를 세워 지은 일제당이 있다. 입암서원의 부속건물인 일제당은 기암을 등지고 개울가에 높은 다리를 세워 지은 누각이다. 개울가의 우뚝한 바위와 그 바위를 바라보는 자리에 세운 고고한 자태의 누각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입탁암이 있는 입암마을은 조선 중엽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는 입암을 중심으로 빼어난 경치를 골라 ‘입암 28경’을 정하고, 이상향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를 지었다.

장현광은 입암을 주역으로 풀었다. 입암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동서남북 네 구역을 7개로 정해 모두 28수가 되도록 했다. 이렇게 주변의 산과 시냇물, 골짜기 등의 명승 28곳 하나하나에 이름을 부여했다. 즉 북극성을 입암으로, 북극성 주변 28곳을 28수의 별자리에 견준 것이었다. 조선 시대 때 별자리는 곧 인간사회의 질서를 상징했다. 입암에 시는 차고 넘친다. 가사 문학의 대가 노계 박인로도 이곳에 왔다가 입탁암의 절경에 취해 시조 ‘입암가’ 29수와 가사 ‘입암 별곡’을 남겼다.

# 어지러운 소식에 귀를 씻다

입암 28경은 죽장 면소재지 남쪽 세이담에서 동쪽 산지령에 이르기까지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반경 2㎞ 안에 흩어져 있다. 28경의 풍경은 그러나, 시에 나오는 찬탄의 문장에 못 미친다. 개발로 훼손되고 세월 속에서 흐려진 탓이다. 28경 중 하나인 ‘야연림(惹烟林)’ 숲은 농지가 돼서 자취도 없고, 가사천과 자옥천이 만나는 자리에 있던 ‘합류대(合流臺)’도 도로를 놓으면서 파손돼 자옥천 쪽 일부의 모습만 남았다. 달빛이 근사했다던 여울 ‘조월탄(釣月灘)’은 매립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입암마을에서 전해지는 시가와 남은 풍경만으로도 옛 선비들이 경관을 대하던 태도나 자세를 능히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곳 포항 북구 기계면의 ‘분옥정’ 이야기를 보탠다. 분옥정은 조선 숙종 때 문신 김계영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쯤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분옥정의 가장 특별한 점은 앞과 뒤가 극적으로 다르다는 것. 앞쪽에서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뒤쪽으로는 기암의 계곡 위에 자못 웅장하게 올라 서 있다. 주변도 잘 다듬어져 있고 노거수들도 곳곳에 있어 제법 볼만하다.

정자 뒤쪽 계곡 위쪽 물가의 바위에 ‘세이탄(洗耳灘)’이란 글씨가 있다. 어지러운 소식에 귀를 씻는다는 뜻이다. 온갖 음해와 모략이 난무하는 당파싸움을 뒤로하고 자연에 묻혀 지내며 학문으로 일생을 마친 선비들의 정신을 드러낸 글이다. 포항과 영덕 뒤쪽 오지의 아름다운 자연이 물러앉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돼줬던 것이다. 옥계계곡도, 덕동마을도, 입암마을도, 그리고 여기 분옥정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