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소백산 아래 비밀스러운 계곡과 숲… 백로 찾아드는 도피처로 떠나볼까

醉月 2022. 7. 15. 13:09

■ 사소한 것 따라 ‘자세히 본’ 영주


정감록 십승지 첫째 ‘금계마을’
“전쟁에도 안전한 곳”으로 불려

별천지 금선계곡 뒤 ‘금양정사’
퇴계가 죽은 제자 위해 지은 집
솔숲에 둘러싸여 운치 빼어나



화려한 나무 문살 가진 ‘성혈사’
국보·보물 하나씩 품은‘흑석사’
죽계구곡 상류의 ‘초암사’ 눈길

명소 ‘부석사’ 들렀다 가는길엔
망원경 갖춘 백로 도래지 있어


영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한 지역에 이만큼 다양한 명소가 흩뿌려진 곳이 또 있을까요. 경북 영주 이야기입니다. 영주로 가는 여행은 ‘종합 선물세트’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소백산과 죽계구곡 등의 자연경관부터 부석사로 대표되는 사찰, 죽령 옛길과 소백산 둘레길 등의 걷기길, 서정적 강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무섬마을, 소수서원과 선비촌의 유교문화, 단종복위 운동의 자취로 남은 역사. 그리고 영주가 철도교통의 중심이던 시절 근대의 공간까지 다 있습니다. 그냥 대충대충 본다고 해도 영주를 한 번의 여행으로 다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단언하건대 영주 여행의 진면목은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도참비기’(圖讖秘記) 사상가들이
‘능히 난리를 피할 곳’으로 예언한 십승지 중 으뜸이 영주에 있고, 퇴계가 가장 아꼈던 제자의 자취가, 또 퇴계의 유일한
천민 제자의 흔적이 소백산 아래 있습니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나무 문살의 절집도 있고, 200년 넘게 백로가 찾아드는 소박한 마을도 있습니다. ‘구멍가게’란 간판을 내건 진짜 구멍가게도 만났습니다. 되도록 덜 알려졌거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따라간 여정. 이번 주는 ‘자세히 본’ 영주 이야기입니다.


# 풍기 인견, 차가운 여름을 나는 법

경북 영주시 풍기읍은 일찌감치 인견으로 이름났다. 인견은 하늘하늘하고 살에 닿으면 차가운 느낌이 드는 천이다. 유행도 지나고, 찾는 사람도 줄어서 이제는 ‘철 지난 유행가’ 같은 느낌이지만, 여름철 인견의 인기는 한때 하늘을 찔렀다. 인견이란 ‘인조 견직물’의 줄임말이다. 견직물이란 비단을 말하니까, 인견은 ‘인조 비단’이다. ‘인조’라는 말 때문에 뭔가 실험실에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인견은 천연재료로 만든 섬유다. 정제된 낙엽송의 목재펄프와 면 씨앗에서 분리한 면섬유가 원재료다.

인견의 특징은 수분감과 냉감이다. 인견은 젖어 있는 듯 차갑다. 가볍고 시원하고 몸에 붙지 않아 인견으로 여름 이불이나 여름옷을 만든다. 오로지 여름만을 위한 섬유다. 딱 한 계절만 팔리는 상품이니 다른 특산물보다는 시장도, 유통 규모도 작다. ‘풍기 인견’이 이름났다 해도 여름에만 눈에 띄는 이유다. 여름에 풍기 인견 이불을 덮으면, 희한하게도 이불을 덮지 않는 것보다 서늘하다. 인견 이불 하나만 있으면,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밤을 좀 쉽게 넘길 수 있다.

풍기읍은 한때 골목마다 인견 공장이었다. 풍기읍내 어디서나 직조기의 철커덕거리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인견을 만든 건 풍기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평안도 출신 이주자들이 인견을 짰다. 1930년대 초 평안도 출신들이 대거 풍기로 내려와 자리를 잡으면서 고향에서 비단을 짜던 기술을 발휘해 인견을 짜기 시작한 것이었다. 풍기 최초의 명주직조 공장은 1934년 풍기읍에 수직기 15대로 세워진 ‘풍기방적’이었다. 풍기방적은 2년 만에 ‘풍기직물’로 상호를 변경하고 인견을 짜기 시작했다. 그게 풍기 인견의 시작이었다.

# 정감록의 십승지, 그리고 인삼과 냉면

이야기하려던 건 인견이 아니라,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0년대 평안도 사람들이 왜 영주시 풍기읍으로 내려왔는지다. 답은 풍기가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소백산 아래 풍기는 예언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十勝地) 중 제1 승지다. 정감록에서는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십승지’를 꼽았는데, 그 첫 번째가 영주시 풍기읍 금계마을이었다.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는 격암 남사고도 풍기의 지세를 높이 쳤다. 그는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했고, 소백산 아래 풍기를 두고 “두 산 그늘에 산수가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고 썼다.

평안도 사람과 황해도 사람들은 정감록의 예언 하나만 믿고 풍기로 내려왔다. 풍기를 흉년과 병란, 전염병이 없는 땅으로 믿었다. 정감록의 비결을 따라 십승지를 찾아 내려왔지만, 그들을 풍기로 떠민 건 도탄과 실의였으리라. 그래서 이들이 품었던 희망도 힘차거나 밝은 것이 아니라, 측은하고 안쓰러운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풍기 인견은 굶주림과 전쟁을 피해 여기까지 떠밀려 온 이들이 만든 것이었다. 인견뿐만 아니라 풍기 인삼도 마찬가지였다. 개성의 인삼 재배 기술을 익히고 내려온 이북 사람들이 풍기에서 인삼 농사를 지으면서 풍기 인삼은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됐다. 50년 넘는 내력의 평양냉면집 ‘서부 냉면’의 문을 연 이도 십승지를 찾아 내려왔던 평안북도 영변 출신이었다.

난세를 피해 풍기까지 내려온 이들은 자식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풍기로 내려온 정감록 이주민 출신의 후손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많은 이유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인 김계원도, 국회의원만 네 번을 한 박용만도, KBS 이사장을 지낸 송지영도 모두 풍기로 내려온 정감록 이주민 출신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정감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사는 게 고단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 퇴계의 제자 잃은 슬픔…금양정사

십승지 중 첫 번째라는 금계마을 깊숙한 곳에 아름드리 솔숲으로 둘러싸인 금선계곡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계곡 안쪽의 운치와 경관이 주변 풍경과 사뭇 달라 별천지처럼 느껴지는 계곡이다. 그 계곡에는 물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세운 근사한 정자 ‘금선정’(錦仙亭)이 있다. 노송 아래로 기암괴석이 있고, 그 사이를 계곡 물이 굽이쳐 흐른다. 정자 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거나 물가에서 탁족이라도 하면 딱 좋은 아담한 계곡이다.

금선정의 주인은 500년 전쯤의 선비 금계 황준량이다. 스물네 살에 문과에 급제한 뒤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낸 그는 진심으로 백성의 안위를 살핀 목민관이었다. 그 증거가 단양군수 재임 중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에 있다. 그는 과중한 세금과 부역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호소했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속에서 살고, 승냥이,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미처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이 상소문이 명문으로 평가되는 건 읽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황준량의 상소문을 읽은 명종은 단양에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 주라 명했다. 이로써 과중한 공물을 바치느라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던 백성들은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황준량은 퇴계의 제자였지만, 마흔일곱의 나이에 스승보다 먼저 타계했다. 20여 년 벼슬길에도 죽은 뒤 염습에 쓸 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전한다. 퇴계는 제자의 죽음이 애통했다. 행장을 짓고, 지방을 붙이고, 곡을 했다. 추모사에서 퇴계는 열여섯 살이나 어린 황준량을 ‘선생’이라 적기도 했다. 퇴계는 황준량이 남기고 간 글을 모아서 문집을 출간하고, 황준량이 생전에 터를 잡고 지으려 했던 서당 겸 거처인 금양정사를 짓도록 했다. 금선계곡과 금선정에 갔다면 계곡 뒤쪽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어 금양정사에 가 보길 권한다.


# 자세히 봐야 보이는 작은 절집 세 곳

영주에서 절집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부석사다. 워낙 압도적이어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영주에 부석사만 있는 건 아니다. 부석사나 희방사처럼 알려진 절집 말고, 작지만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작은 절집도 있다. 하나하나 꼽아 본다면 세 곳이다. 그중 하나가 성혈사다. 10년 전만 해도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작은 절집이었는데 근래에 불사가 이뤄져 이제는 법당 건물이 제법 빼곡하다. 작은 절집이 당당하게 몸집을 불릴 수 있었던 건 딱 하나, 보물로 지정된 나한전 덕분이다.

나한전의 진가는 전적으로 여섯 짝의 아름다운 문살에 있다. 나무 문살에 정교하게 새겨진 연꽃과 두루미, 물고기, 게, 삿대를 젓는 동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나한전은 1555년에 처음 지어졌고, 1634년에 고쳐 지었다. 그러나 나무 문살은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독창적인 나무 문살을 누가, 얼마나 깊은 불심으로 깎아낸 것일까.

또 한 곳 절집이 초암사다. 초암사는 절집보다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자리’와 절집 옆으로 흘러내리는 죽계천을 따라 이어진 ‘죽계구곡’(竹溪九曲)의 정취에 눈이 먼저 간다. 죽계구곡은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경관이 빼어난 아홉 곳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 명소. 구곡을 정한 건 두 사람이었다. 퇴계와 영조 때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 퇴계는 하류에서 상류의 순서로, 신필하는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곡의 순서를 정했다. 결과는 신필하의 승(勝). 죽계구곡은 신필하가 정한 대로 계곡의 상류 초암사 부근에 제1곡이 있고, 그 아래로 쭉 구곡이 이어진다.

죽계구곡은 규모도 크지 않고, 물도 그리 많지 않지만, 요즘 같은 장마 뒤끝에는 수정 같은 계곡 물이 흘러넘친다. 지금이 죽계구곡을 찾아갈 가장 좋은 때라는 얘기다. 비 온 뒤 죽계구곡 숲의 초록은 촉촉한 습기로 짙어지고, 밀려드는 운무가 숲을 가렸다 드러냈다를 반복하는데, 바위에 부딪힌 계곡 물이 부챗살처럼, 혹은 치마처럼 펼쳐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 퇴계의 유일한 천민 제자 대장장이

마지막 세 번째 작은 절집이 이산면의 흑석사다. 주변 바위가 검은색이라고 해 흑석(黑石)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절집인데도 국보 하나, 보물 하나를 갖고 있다. 국보는 극락전 안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조선 세조 때 왕실과 종친의 시주로 만든 삼존상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본래 ‘정암산 법천사’에 있던 것이라는데 그곳이 지금 어딘지, 어떻게 여기까지 옮겨 왔는지도 알 수 없다. 법당 뒤편 언덕에는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마애삼존불을 배경으로 두고 앉은 돌부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법당을 굽어보고 있다.

절집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국보와 보물을 하나씩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절집의 위세가 사뭇 당당할 텐데, 영주에서는 어림도 없다. 부석사의 압도적인 위세 탓이다. 부석사 경내에는 국보와 보물이 각각 다섯 개씩 있다.

이번에는 절집으로 가는 길 얘기다. 성혈사와 초암사는 둘 다 소백산 아래에 있다. 두 절집으로 가는 길은 배점마을에서 갈라진다. ‘배점’(裵店)이란 마을 이름은 배순이 하던 대장간에서 왔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배순은 천민 출신이라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도 10리 길을 걸어 소수서원의 강학당까지 가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퇴계가 서당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배순은 퇴계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됐다. 천민이라 대장장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글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주민들로부터 존중받았다. 퇴계가 세상을 뜨자 배순은 3년 동안 상복을 입었으며, 선조가 승하하자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음식을 들고 뒷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곡을 하면서 제사를 3년 동안이나 지냈다. 이게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는 배순을 충신이라 칭하며 정려문을 내렸다. 배점마을 입구에는 수령 600년 남짓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활개 치듯 서 있는데, 거기에 배순의 정려각이 있다. 성혈사나 초암사를 오가는 길에 슬쩍 들여다보고 가자. 금선정의 황준량과 함께 또 한 명의 퇴계 제자 이야기다.



# 봉황을 붙잡아 둘 무기는 ‘봉황 알’

영주시 순흥면에는 800년 넘는 역사가 깃든 누각 ‘봉서루’(鳳棲樓)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인데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어 늘 적막하다. 봉서루는 면사무소 남쪽 허허벌판에 저 홀로 뚝 떨어져 있다. 거기가 과거 순흥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봉서루는 처음 이곳에 지어졌다가 곁에 있던 소학교가 화재로 탄 뒤에 1935년 사무소 앞뜰로 옮겨 지어졌다. 그러다 지난 2007년에 본디 제자리였던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봉황새 봉(鳳)’에 ‘살 서(棲)’ 자를 쓰니 봉서루란 ‘봉황이 살고 있는 누각’이란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건 소백산 앞쪽 비봉산의 기운 때문이다. 산의 이름이 봉황이 난다는 뜻의 ‘비봉’(飛鳳)이다. 그래서 누각 정면에 봉황이 깃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봉서루’란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누각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봉루’(迎鳳樓)란 현판을 걸었다.

옛 풍수가들은 비봉산의 풍수를 ‘봉황이 날아갈 지세’로 읽었다. 봉황이 날아가 버리고 나면 순흥 땅이 쇠퇴를 면치 못할 것이라 근심하다가 묘안을 떠올렸다. 봉서루 앞에다 커다란 둥근 바위 13개를 모아 놓은 것. 매끈한 바위는 봉황이 낳은 알을 상징한다. 아무리 봉황이라도 알을 두고는 날아가지 않을 테니 알로 붙잡아 두겠다는 옛사람들의 상상력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 백로와 주민, 함께 수백 년을 살다

봉황 얘기가 나온 김에 새 얘기 하나 더. 부석사에 들렀다 가는 길에 지나게 되는 부석면 상석리 마을에 백로 도래지가 있다. 마을 안쪽 아름드리 소나무 두 그루에 1000여 마리의 중대백로가 서식한다. 백로는 해마다 1월 초에 와서 가을이 오기 전에 날아가는 여름 철새다. 백로 숫자가 가장 많을 때는 새끼들이 알을 까고 나오는 7월 말부터 8월 초 무렵. 그러니 백로 도래지가 가장 장관인 때가 딱 지금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상석 보건진료소 앞에 망원경까지 갖춘 전망대가 있고, 마을 안쪽에도 경로당 옆에다 목조로 지어 놓은 전망대가 있다. 마을 안쪽의 전망대 이름이 ‘학수고대’다.

백로는 언제부터 이 마을에 날아들었을까. 마을 주민 김재수(82) 씨는 “스물두 살에 이 마을로 시집왔는데, 그때도 백로가 있었다”고 했다. 그 무렵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로 미뤄 보면 백로가 날아든 게 200년쯤은 된 것 같다는 설명이다. 상석리 마을 안쪽에는 조선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 등을 지낸 이가 400여 년 전에 지었다는 작은 집 ‘매학당’(梅鶴堂)이 있다. ‘매화(梅)’와 ‘학(鶴)’을 이름으로 삼은 걸 보면 혹시 400년 전에도 마을에 백로가 날아들었던 건 아닐까.

백로들이 소나무 가지에 가득 앉은 모습이 보기는 좋지만, 사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백로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시끄럽기도 하고 냄새도 많이 난다. 백로의 분변에 소나무 노거수가 말라 죽는 것도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서롭다는 백로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마을 주민과 백로가 수백 년을 함께 살고 있다.



# ‘구멍가게’를 간판으로 내건 가게 이야기

백로 도래지가 있는 상석리 못미처 감곡리에는 ‘구멍가게’가 있다. 구멍가게란 가게의 형태를 일컫는 말이지 상호로 쓰지는 않는 법. 구멍가게라고 불리는 상점들도 대부분 ‘상회’니 ‘수퍼마?’으로 간판을 단다. 그런데 여기는 대놓고 간판을 ‘구멍가게’라고 달았다. 이것도 아예 간판 없이 30년 넘게 가게를 해오다가 5∼6년 전쯤에 큰 맘 먹고 단 것이라고 했다.

구멍가게 안에 들어가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쯤으로 돌아간 것 같다. 누추한 가게 진열대에는 과자 따위가 널려 있는데, 물건이 두서없다. 초코파이 옆에 양파가 있고, 새우깡 옆에는 김이, 그 옆에는 파리채가 있다. 어찌나 어수선한지 진열이라기보다는 당장 내일이라도 이사 갈 집처럼 보인다. 인상적이었던 건 가게 앞 평상에 놓인 농산물이었다. 인근 주민들이 팔아 달라고 가져온 오이며 가지, 청국장 따위를 놓았는데, 지나던 이들이 가게 앞에서 물건을 사 들고 갔다. 이 물건을 팔아 번 돈은 가게 주인이 수수료 한 푼 챙기지 않고 맡긴 이에게 전부 내줬다.

구멍가게는 본래 막걸리를 빚는 술도가로 지은 건물이었다. 구멍가게 주인 강유순(64) 씨는 “50년 전쯤 이 자리에서 술도가를 하던 첫 주인이 10년을 못 버티고 나갔다”고 했다. 인근에 양조장이 여기밖에 없었던 데다 술맛 좋다고 외지까지 소문이 나서 장사가 꽤 잘됐는데, 외상을 깔아 놓고 제때 갚지 않는 이들 때문에 자금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폐업했다는 얘기다. 망한 술도가 건물을 사들인 강 씨의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열어 35년쯤 했고, 지금은 구순이 넘은 어머니에게서 가게를 이어받은 강 씨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강 씨는 가게 한구석에서 잠을 잔다.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담배. 가게에 딸린 살림방도 있지만, 담배를 행여 누가 도둑질이라도 해갈까 싶어 가게를 비우지 못한다. 그 덕에 구멍가게는 오전 1시에도 2시에도 손님이 오면 문을 열어 준다. 늦은 밤 담배가 떨어졌거나,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한 이들에게는 적잖이 고마운 가게다. 강 씨는 가게가 가장 붐빌 때는 한겨울 폭설이 쏟아져서 버스가 너운티 고개를 넘지 못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면 마을 주민들이 걸어서 고개를 넘는데, 그때 함박눈을 맞으며 고개를 넘어온 이들이 다들 가게에 들러서 몸을 녹이고 간다고 했다. 동화 속에서 봤음 직한 풍경이다.

영주 시내에는 100년 된 정미소와 80년 된 이발소, 60년 된 서점이 남아 있다. 그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 전쟁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는

경북 영주 풍기의 금계마을이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이 꼽은 십승지 중 첫 번째라면, 나머지는 아홉 곳은 어디일까. 금계마을 뒤로 꼽힌 십승지는 경북 봉화 춘양이다. 이어 충북 보은 속리산, 전북 남원 운봉, 경북 예천 금당실, 충남 공주 유구, 강원 영월 동쪽, 전북 무주 무풍, 전북 부안 변산이 뒤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꼽힌 곳은 경남 합천의 가야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