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24

醉月 2014. 3. 9. 16:27

 

유랑객 공자, 호색녀를 만나더니…

추차동거

▲ 작자 미상, ‘추차동거’, 1904년, 2책, 목판에 채색, 27.6×37.8㎝, 장서각
남자친구 집에 인사하러 갔다. 오랫동안 사귀었으니 양가 부모만 허락한다면 결혼할 생각이었다.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어떤 선물을 사가지고 갈까. 시부모 될 분들을 처음 상견례하는 자리인 만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드디어 남자친구 집에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에 들어서니 내부가 잘 꾸며진 5성급 호텔 같았다. 화사하게 장식된 집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집안 분위기가 거북했다. 그 넓은 집 어디에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지만 낡고 편안한 우리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한동안은 낯섦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처음 가는 장소라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불편함의 정체는 식사시간에 밝혀졌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관심사를 얘기했다.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화에서 나를 배제함으로써 그들만의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노련한 처세술이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랬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얼마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어린 후배의 얘기다.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난 것은 기원전 497년이었다. 55세에 시작한 유랑생활이 14년이나 계속될 줄은 공자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자의 앞길에는 혹독한 시련과 쓰라린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위(衛)나라였다. 공자는 ‘노나라와 위나라가 형제 같은 사이’라고 말할 정도로 위나라를 친근하게 생각했다. 공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위나라 시조 강숙(康叔)과 노나라의 시조 주공(周公)이 같은 어머니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나라는 춘추시대 동안 가장 많은 인재와 능력자를 배출했다. 땅의 넓이나 재력에 있어서는 두 나라가 제(齊)나라를 능가하지 못했지만 문화에 있어서는 제나라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런 만큼 두 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공자가 위나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공(靈公)은 기뻐하며 교외까지 영접을 나왔다. 영공은 공자에게 노나라에서와 똑같은 수준의 봉록(俸祿)과 재상으로의 임명을 약속했다. 처음부터 잘 풀린다고 생각했던 공자는 한껏 고무됐다. 노나라에서는 펼치지 못한 정치적 포부를 위나라에서는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당시 심정은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하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구해 파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것을 팔아야지! 나는 상인을 기다릴 것이다.”

위나라에서라면 자신을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 같은 사이’도 잘나갈 때 얘기다. 상황이 바뀌면 관계는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 철석같이 믿었던 영공에게서는 열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영공의 미움을 살 지경에 이르렀다.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갔다. 진나라의 광(匡)이라는 지역에서 겪은 고난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여곡절 끝에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왔다. 공자는 거백옥(籧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거백옥은 위나라의 대부로 공자가 공경하고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었다.

공자는 다시 위나라 군주인 영공을 찾아갔다. 영공의 마음이 이미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영공과 공자 사이에 간략한 인사말이 오고갔다. 인사가 끝나자 영공이 공자에게 군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저는 예의에 관한 일은 일찍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만, 군사를 배치하고 운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영공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자는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군자일 뿐 군사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영공이 딴소리를 했다. 공자를 등용할 뜻이 없다는 외교적 표현이었다. 후배가 남자친구 집에서 무시당한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여기서도 다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가. 유랑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공자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남자(南子)를 만나볼까. 남자는 영공의 부인으로 나라의 모든 권력이 그녀의 치마폭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갈까 말까 주저하고 있을 때 남자에게 연락이 왔다. 공자는 ‘구슬 부딪치는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삼베 장막 안의 남자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공자가 남자를 만나고 오자 직설적인 제자 자로(子路)가 툴툴거렸다. 공자가 변명했다. “찾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예를 행해오니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변명에도 자로는 여전히 스승을 의심했다. 다시 공자가 변명했다. “내게 잘못된 행동이 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리라, 버리리라!”

스승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려던 자로가 왜 공자에게 불만을 가졌을까. 남자가 악명 높은 호색녀였기 때문이다. 영공은 소문난 바람둥이였는데 남자도 그에 못지않았다. 남자는 송(宋)나라의 제후가에서 영공에게 시집온 후 친정 오빠 송조(宋朝)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영공은 둘의 관계를 추궁하는 대신 오히려 남자의 오빠를 초청해 ‘부인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송나라 농부들은 남자의 애정행각을 다음과 같이 빗대 조롱했다. ‘새끼돼지를 얻으려는 일이 이미 마무리되었다면 수퇘지는 어찌 돌려보내지 않는가?’ 새끼돼지를 얻으려는 자는 남자를, 수퇘지는 송조를 의미했다. 한마디로 말해 남자(南子)는 ‘남자(男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로 손가락질당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강직한 성격의 자로가 스승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결과는 어땠을까. 별 효과가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공자는 여전히 영공 주위를 맴돌았다. 초조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맹자가 평하기를 “공자께서는 석 달 동안 임금을 모시지 못하면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조바심을 쳤으며, 다른 나라에 갈 때는 제후와의 접견에 대비해 선물을 꼭 준비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영공이 그의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유람을 나왔다. 그러면서 공자로 하여금 뒤의 마차를 타고 자기를 따르게 하고는 거리를 지나갔다. 공자는 이런 상황이 심히 부끄러웠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낀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훌륭한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구나!”

‘추차동거(醜次同車·수레를 타고 함께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다)’는 당시 상황을 그린 장면이다. 오른쪽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속에 영공과 남자가 앉아 있고 왼쪽에는 소박한 우차 앞에 공자 일행이 서 있다. 영공이 공자에게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방금 전에 얘기한 듯 공자는 아직 수레에 오르지 않았다. 화려한 영공 일행과 초라한 공자 일행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이곳은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을까. 결국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를 거쳐 송(宋)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사건이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 따로 없다. 행복 끝 고생 시작, 공자의 유랑생활이 계속된다.

군자와 소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재진절양

▲ 작자 미상, ‘재진절양’ 공자성적도,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3×54㎝, 국립중앙박물관
이상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사람. 누군가는 그를 낭만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눈보라 치는 날 양식은 떨어져 가는데 수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을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유랑은 결코 낭만도 멋도 아니다. 그저 가야만 하니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가는 길이 고달파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없다. 어떤 난관이 가로막더라도 무조건 돌파해야 한다. 명분 때문에 떠나온 만큼 명분이 생겨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유랑생활은 낭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은 성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공자가 위(衛)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향할 때였다.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아래 앉아 예법(禮法)에 대해 문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송나라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무를 부러뜨리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막무가내로 공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당시 송나라에서 한창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사마(司馬) 환퇴(桓魋)의 수하들이었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공자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황한 제자들과는 달리 공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큰 덕을 내리셨는데, 환퇴 따위가 감히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환퇴가 무슨 이유로 공자를 죽이려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사건은 공자의 방랑생활이 상당히 고달팠음을 말해줄 뿐이다. 공자가 나무 아래서 환퇴의 수하들에게 수난당한 이야기는 ‘공자성적도’에 ‘송인벌목(宋人伐木)’이라는 제목으로 생생하게 실려 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러 광(匡)이라는 지역을 지날 때였다. 공자를 양호(陽虎)로 착각한 광 지역 사람들이 공자 일행을 급습해 행패를 부렸다. 공자의 생김새가 양호와 비슷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광 사람들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양호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당시 광 지역은 노나라 군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포악한 양호가 노나라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로 보낸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 사람들은 양호를 보기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양호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광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양호로 오인한 공자를 죽이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공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왕(文王)께서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문화의 전통이 내게 지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이 전통을 없애려 했다면 후손들은 이 문화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아직 이 문화를 버리지 않았으니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논어’ 자한 편에 나오는 얘기다. 공자 자신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주(周)나라 문왕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자존감과 당당함이 들어 있는 발언이다. 이 사건 역시 ‘광인해위(匡人解圍)’라는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실려 있다. 학자들은 ‘송인벌목’과 ‘광인해위’가 같은 사건인데 달리 표현되었다고 해석한다. 공자를 신격화하려는 후대의 유학자들이 지어낸 ‘공자 신화’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신화든 사실이든 두 이야기 속에는 여러 나라를 유랑해야 하는 공자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공자의 수난은 위의 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불행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온다.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 한 번 올 때 결단을 내려는 듯 파도처럼 밀려온다. 가차 없고 냉정하다. 정처 없는 나그네에게는 더 빈번하게 찾아온다.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위(衛)나라로 가기 위해 포(蒲) 지역을 지날 때였다. 위나라의 반란군인 공숙씨(公叔氏)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들은 공자 일행을 가로막고 그곳을 지나지 못하게 했다. 그때 마침 공양유(公良孺)라는 제자가 자기 수레 다섯 채를 끌고 나타났다. 공양유는 용감하게 반란군과 맞서 싸우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내가 스승님을 따라 광 지역에 갔을 때 환란을 당했는데 지금 다시 이곳에서 이런 환란을 당하니 이것이 내 운명인 것 같다. 내가 스승님을 모시고 두 번이나 이런 환란을 당하느니 차라리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길을 뚫고 나갔다. 이에 겁먹은 포 지역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공자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습 또한 ‘오승종유(五乘從遊)’라는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실려 있다.

공자가 수난당한 이야기의 절정은 ‘재진절양(在陳絶糧·진나라에서 식량이 떨어지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초빙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초나라를 가려면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지나가야만 했다. 진나라와 채나라는 공자가 초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어 강국이 되면 인접한 두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사를 보내 공자 일행을 포위했다. 시간이 흐르자 식량이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제자들 중에 병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공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한 모습으로 시를 읊고 거문고를 연주했다. ‘재진절양’은 그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제자들에 둘러싸인 공자가 땅바닥에 앉아 있다. 공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에게 수업을 하고 있다. 공자가 시를 읊자 제자들이 진지한 자세로 듣는다. 그들을 포위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저 한가롭게 소풍 나온 사람들의 야유회 장면을 그린 것 같다. ‘재진절양’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운명을 향해 고개 숙이는 일이 없는 철학자의 평정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공자를 제자라고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위기에 처해서도 한가롭기만 한 스승을 보고 화가 난 자로(子路)가 공자께 툴툴거렸다.

“군자도 곤궁해질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곤궁함을 굳게 버티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아무 짓이나 한다.”

‘논어’ 위평공 편에 나오는 얘기다. 이 상황에 대해 ‘여씨춘추’에는 좀 더 자세히 묘사돼 있다. 자로와 자공(子貢)이 곤궁함에 대해 불평하자 공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곤궁함은 ‘쌀밥이 떨어지고 명아주국을 끓일 쌀가루가 없는 것’이 아니라 ‘군자가 도에 궁색해진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지금 공자가 ‘인의(仁義)의 도를 껴안음으로써 안으로는 자신을 살펴봐서 도에 꺼림칙한 것이 없고 어려운 일을 당해 덕을 잃지 않았으니’ 지금의 상황은 결코 곤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자공은 지금까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도 몰랐고, 땅이 얼마나 깊은지도 몰랐다’는 얘기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결국 이때의 수난은 자공이 초나라에 알림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은 공자가 69세에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공자는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봉건적인 예악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과 목적은 이상적인 봉건질서의 주창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 여겼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공자는 끊임없이 성군(聖君)을 찾아다녔고 정치적 출구를 모색했다. 공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이것은 공자가 유랑 중에 견뎌야만 했던 또 다른 환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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