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17

醉月 2013. 9. 24. 00:57

공자,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
야합·니산치도

▲ ‘야합’ 작자 미상, 사천성 성도 신룡향 출토 한나라 화상전
밝은 대낮에 두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다. 문 닫힌 방 안이 아니라 야외의 우거진 나무 아래서다. 차분하게 준비한 만남인 듯 벗은 옷은 가지런히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뜨거운 피가 끓는 두 남녀는 이내 한 몸처럼 뒤엉켰다. 바구니를 내팽개친 여인은 누운 채 두 다리를 벌려 남자의 어깨에 걸쳤다. 무릎 꿇은 남자는 발기된 성기를 여인에게 삽입하기 직전이다. 은밀해야 할 장소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남자 뒤에서 키 작은 남자가 두 손으로 성교하는 남자의 엉덩이를 밀고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남자가 서 있다. 키 작은 남자나 서 있는 남자나 모두 발기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원숭이 두 마리가 꽥꽥거려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주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사천성 성도에서 출토된 한(漢)나라 때 화상전(畵像塼)의 모습으로 그림의 제목은 ‘야합(野合)’이다.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리거나 서로 정을 통하는 행위’를 야합이라 한다.

성스러운 성인(聖人) 공자의 탄생과 관련해 ‘야합’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는 이 문제가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야합’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저서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서 공자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했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라고 한다. 방숙이 백하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은 안씨(顔氏) 딸과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으니, 니구(尼丘)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은 것이다. 노나라 양공 22년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 정수리가 낮고 사방이 높아 이로 인해 이름을 구(丘)라 했다. 그의 자는 중니(仲尼)고 성은 공씨(孔氏)다.’

사마천은 위대한 성인 공자의 탄생을 ‘야합’이라는 아리송한 단어로 표현하면서 일체의 설명을 생략했다. 그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갖가지 추측과 항변으로 공자의 탄생에 대한 설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야합’은 문자 그대로 ‘야합’일 뿐이다. ‘야외(野)에서 결합(合)한다’는 뜻이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의 ‘야합’은 지금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의적이고 생산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가뭄이나 홍수를 막기 위해 남녀가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 연애와 성행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나무는 주술적인 제의가 이루어지는 사당과 비슷한 신성성을 지닌다. 즉 남자(양)와 여자(음)의 결합이 천지의 교감을 얻어 비를 내리게 하고 홍수를 멈추게 한다고 믿었다. 신령스러운 나무 아래서 성스러운 행위를 하는 것이 제지되기보다는 오히려 장려되었다. 그래서 강물의 얼음이 풀리는 ‘중춘 때에는 남녀들이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이때에는 남녀가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고 ‘주례’의 ‘지관, 매씨’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 풍습이 사마천(BC 145년~BC 85년경)이 살던 한(漢)대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성스러운 분의 탄생을 언급하면서 ‘야합’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 것은 결코 공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정치적 야합’이니 ‘담합’이니 할 때의 부정적인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나면 ‘숙량흘이 안씨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사마천의 문장에 민감하게 반응한 ‘공자가어’의 변명이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진다. 즉 ‘공자의 부모가 나이 차가 많이 나 정식으로 혼인을 치르지 못하고 절차도 제대로 다 밟지 못한 것으로 믿고 싶어한’ 강박관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림으로 읽는 공자의 생애를 기록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는 ‘행교도’ 다음으로 ‘니산치도’가 실려 있다.

‘니산치도(尼山致禱·니구산에서 기도하다)’를 살펴보자. 곱게 단장한 여인이 신령스러운 산 앞에 서 있다. 산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하강하듯 걸려 있다. 여인은 향을 피우려는지 탁자 위에 놓인 향로에 손을 내민다. 그녀 뒤로 시중드는 여인과 쌍상투(雙髻)를 한 동자 두 명이 합장한 채 서 있다. 언덕 곁에는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와 꽃들이 조심스럽게 피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림 속의 계절도 봄이다. 만물이 생명을 향해 피어나는 봄날, 여인은 자신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 ‘니산치도’ 작자 미상, 1904년, 목판에 채색, 27.6×37.8㎝ 장서각

여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탁자다. 시중드는 여인이 들고 있는 제기도 붉은 천에 받쳤다. 화가가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받침대를 가장 중요한 듯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붉은색이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을 쫓아낸다고 믿었다. 궁전과 사당에 유난히 붉은색을 많이 쓰는 이유도 그런 목적 때문이다.

여인이 서 있는 곳은 사당이나 궁궐이 아니다. 귀족의 집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 밑이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이곳이 사당만큼 신성한 장소다.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아들로 점지해달라고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표상은 탁자뿐만이 아니다. 구름과 아이들도 특별하다.

구름은 여기가 꼭 높은 곳에 위치한 장소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대 회화에서 구름은 상서로움의 표현이다. 구름은 봉황과 기린, 사슴과 학처럼 하늘이 그 존재를 축복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할 때 등장한다.

쌍상투를 한 아이들도 치밀한 계산에서 그려 넣은 것이다. 동자들은 기도하는 여인의 하인으로 따라온 것이 아니다. 신선계에 사는 선동(仙童)이다. 쌍상투를 한 선동은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도(壽星圖)’나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백자도(百子圖)’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기원과 축복으로 성인 공자가 탄생했다. 그림 위쪽 빈 공간에는 ‘니산치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주나라 영왕 19년, 노나라 양공 20년에 성모 안씨는 노나라 니구산에서 기도했다. 이듬해에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의 정수리 부분이 움푹 파인 것이 니구산과 닮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 하고 자(字)를 중니(仲尼)라 했다.’(周靈王之十九年, 實魯襄公之二十年, 是年聖母顔氏禱於魯尼丘山, 明年乃生孔子, 旣生首上圩頂象尼丘, 因名丘, 字仲尼)

니구산은 산동성 곡부현 동남쪽에 있다. 원래는 니구산인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기 때문에 피휘(避諱)하여 ‘니산(尼山)’이라 불렀다. 주 영왕 19년은 BC 553년이다. 공자가 탄생한 해가 주 영왕 21년 BC 551년이니까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한 지 2년 만에 공자를 낳았다. 오랜 기도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귀한 아들은 귀하게 자라지 못하고 어렵게 자랐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어 ‘방산’이라는 곳에 매장했는데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지 않았다.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합’으로 얻은 아들에게 떳떳하게 남편의 존재를 알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야합’이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였다 해도 야합은 야합이었다. 평범한 결혼생활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프다. 공자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다

 

공자는 무녀의 아들이었다?
조두예용

▲ 김진여의 ‘조두예용’, 1700년, 비단에 색, 32×57㎝ 국립전주박물관
사마천의 저서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는 공자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적혀 있다. “공자는 어려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이를 할 때 항상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제례를 흉내 내며 놀았다.(孔子爲兒嬉戱,常陳俎豆設禮容)”

이 문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공자성적도’의 ‘조두예용(俎豆禮容)’이다. ‘조두(俎豆)’에서 조(俎)와 두(豆)는 제물을 담는 그릇이다. 조(俎)는 나무에 칠을 하거나 청동으로 만든 것이고, 두(豆)는 보통 나무로 만들지만 토기나 청동으로 만들기도 한다. 모두 제기로 사용하는 그릇이다. 김진여(金振汝·조선 후기)가 그린 ‘조두예용’은 공자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갈한 건물 앞에서 6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들 앞에는 탁자 위에 제기가 놓여 있다. 아이들은 제례를 흉내 내며 노는 중이다. 돗자리 위에 선 공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인 듯 모자를 쓰고 예복을 입었다. 그런데 공자의 몸집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얼굴빛도 검다. 이것은 옛 그림에서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실제로 공자는 유난히 키가 크고 짱구머리에 얼굴도 못생겼다고 전한다. 마당에는 괴석이 담긴 화분이 있고 그 곁에 학 한 마리가 서 있다. 이곳이 상서로운 공간임을 암시한다.

많은 학자가 공자가 제례를 흉내 내며 놀았다는 사실을 들어 어머니 안징재(顔徵在)가 무녀라고 추정한다. 무녀의 역할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인 만큼 그 모습을 본 공자가 어머니의 행동을 흉내 내며 놀았다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살았기 때문에 공자의 제례 놀이는 어머니의 행동을 따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징재가 무녀였으리라는 가정은 많은 후대 학자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를 해서 공자를 낳았다는 이야기 자체가 그녀가 무녀였으리라는 사실에 무게가 실린다.

위대한 성인 공자가 출생이 불분명한 것도 모자라 무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야합’만큼이나 유가(儒家)의 후계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사기’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조두예용’의 일화가 ‘논어’와 ‘공자가어’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부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제사 놀이를 하는 것이 자칫 무녀의 아들이라는 ‘야사’를 ‘사실’로 인정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해석이 압권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부터 제례 놀이를 할 정도로 예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유가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렸을 때 의사 놀이를 한 사람은 커서 의사가 될 확률이 높다는 식으로 침소봉대한 것인데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의 어린 시절까지 굳이 ‘세탁’해야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야말로 공자가 가장 경계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일생을 여러 장면으로 제작한 ‘공자성적도’는 원(元)대 이후 여러 종류가 제작됐는데 책에 따라 10폭에서 112폭까지 다양한 장면이 들어있다. ‘조두예용’은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인식된 듯 어떤 판본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즉 ‘공자성적도’의 첫 번째 장면에는 항상 ‘선성소상(先聖小像)’이 등장하고 다음에는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한 ‘니산치도’가 배치된다. 이어 ‘인토옥서(麟吐玉書·기린이 공자 탄신일에 옥서를 토하다)’, ‘이룡오로(二龍五老·두 마리의 용과 다섯 신선이 공자 탄신일에 집으로 내려오다)’, ‘균천강성(鈞天降聖·공자의 어머니가 공자가 태어날 때 천상의 음악을 듣다)’이 뒤를 잇고 ‘조두예용’이 그 다음이다.

김진여의 ‘조두예용’은 중국 원대 왕진붕(王振鵬·1280~1329)이 그린 성적도를 모방한 작품이다. 왕진붕의 ‘공자성적도’는 모두 10폭인데 인물 표현과 색채 묘사가 그 어떤 성적도보다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김진여가 그린 ‘공자성적도’는 판화가 아닌 필사본으로 왕진붕의 작품과 똑같이 10점이다. 조선에서 제작된 공자성적도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작품인데 화원화가 김진여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김진여가 모델로 삼은 왕진붕의 작품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김진여 자체가 인물화나 초상화에 발군의 솜씨를 발휘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김진여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화원화가로 평양 출신이다. 1708년(숙종 34년)에 왕명으로 ‘곤여만국지도(坤輿萬國地圖)’를 제작했으며 1713년에는 진재해(秦再奚)와 함께 숙종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또한 1720년에는 박동보(朴東普)·장득만(張得萬)·허숙(許淑) 등과 함께 ‘기사계첩(耆社契帖)’(보물 제638호) 제작에 참여했다.

평양에서 활동한 그에 대한 정보는 중국 가는 사신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12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연행일기’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1712년 11월 11일에 ‘평양 화사(畫師) 김진여가 자기가 그린 이여백(李如栢)의 화상을 보여 주었다’로 기록되어 있어 그가 평양에서 이름 있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진여는 김창업이 청나라에서 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만난다. 1713년 3월 21일자 ‘연행록’에는 ‘기성(箕城·평양 옛 지명) 사람 계운방(桂雲芳), 정찬술(鄭贊述), 김진여 등이 여기에 와서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쓴 ‘한수재집(寒水齋集)’에는 1719년 3월에 ‘김진여가 화상(畫像)을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진여가 평양과 한양을 오가며 화필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두예용’은 아이들의 눈동자까지 방향을 달리해서 그릴 만큼 섬세하게 표현한 가작이다. 이것은 김진여의 ‘공자성적도’가 개인의 주문이 아닌 궁궐이나 국가기관의 의뢰로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고증에 대한 고민이 철저하지 못한 점이 옥에 티다. 건물 안에 있는 탁자 위의 책이 그렇다. 공자(BC 551~BC 479)는 춘추시대 사람이다. 종이는 105년에 동한(東漢)의 채륜(蔡倫)이 발명했다. 공자가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종이 대신 죽간을 썼다. 화가는 그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죽간 대신 책을 올려놓은 것은 공자가 컴퓨터를 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오류다. 어린 공자가 학문과 예의범절을 배우며 자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공부하는 분위기를 생각한 것까지는 좋은데 공자가 살았던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이래저래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물을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공자에 대한 대립된 해석이 가능한 것도 그런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조두예용’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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