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호흡

도화재의 신비체험에 관해서

醉月 2008. 11. 30. 17:05

이젠 홀가분하게 완전히 판을 떠나면서 석문호흡을 계속하지만 혼란스러운 몇몇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없애지않은 원고라고 합니다. 

-글쓴이 일사 민**- 

 

 또 하나의 대표적인 체험은 바로 영적인 체험입니다.

많은 수련자들이 영계를 경험하고, 도계를 경험하고, 선계를 경험합니다.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든지 간에, 현실이 아닌 또 다른 경계를 넘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와의 소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강렬한 자극입니다.
그 때문에, 참으로 많은 수행자들이 영계, 도계, 선계 등을 경험하기 위해 삶 그 자체를 투자합니다.
이로인한 부작용이 너무도 많기에 조금더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중에는 신선이나 이미 세상을 떠난 옛 성현들과의 대화를 나눈다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각자의 말들이 다 다릅니다. 왜 다른가를 물어보면,
무엇이 옳다 그르다, 무엇이 더 차원이 높다 낮다라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가령 저 곳에서 이야기하는 어떠한 계는 차원이 낮은 계이며,
우리가 이야기하는 계는 고차원이다라는 식입니다.
저사람은 마에 빠져서헛것을 보는 것이고, 내가 보는 것은 진실되다라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세계는 실제이기도 하지만, 비실제이기도 합니다.
즉, 개인의 내면에 비춰지는 전체의 부분이기에,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개인의 내면경험일 뿐입니다.

 어떤이가 보고 온 신선들이 사는 동네가 또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보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에고가 가지고 있는 내면세계가 다르기에, 그들의 경험 또한 다릅니다.
가령, 철수라는 인물이 신선이 되어 예수를 만나 대화를 했고,
영희라는 인물도 마찬가지 경험을 합니다.
이들이 만난 예수는 경험자에게는 실제하는 예수이지만,
각자가 다른 예수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 두 경험자가 동일한 공간에서 약속을 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공간에 각자가 생각하는 상대방의 상을 창조해놓고,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그 역시 좋습니다.

 그런데, 간단하게 이런 실험을 한번 해 보십시오.
선계를 오가는 사람 두 명이, 주제는 정하지 않고 장소만 정해놓고 만나서 이야기를 한 뒤,
무엇을 이야기했는가를 검증해 보기 바랍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거부할 테니까요.
이런 단체의 수행자들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들이나 채널링을 하는 이들,
퇴마사 등등의 직업을 가진 이 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 장소에 처녀귀신이 한명 서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그곳에 채널링 전문가 두사람이 와 있다면,
두사람이 동시에 이 처녀귀신을 지목하고 정확하게 표현해 낼 활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또 살아있는 사람들의 영을 불러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현재 생존한 유명한 물리학자를 불러서 물리학논문을 저술할 수 있을까요?
서로 상반된 두 인물을 불러 토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분명 안되는 것인데 이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가능하지만, 검증을 요구하면 거부합니다.
실제로 이들이 보는 영상과 언어는 지나치게 생명력이 있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체험을 하는 이의 내면속에서 그것은 참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 호환은 절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모든 개체는 부분이면서 전체이기도 합니다.
명상을 통한 의식의 확장이 가능한 이유도 온 우주안에 한 개체인 모든 만물이, 전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한 이야기와 같습니다.
겨자씨에는 겨자나무가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이 겨자씨가 발아가 되면 종국에는 겨자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또한 그러합니다. 거짓자아라는 에고안에 갇혀서 에고만을 보고 살아가지만,
그 에고를 초월한 전체의식(참진아)은 내면에 고스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 무명이 걷히고, 진아가 빛을 발하게 되면 이제 그 의식은 개인의 의식이 아닌 전체의식으로 변용이 됩니다.
 이 전체의식의 본질은 창조성입니다.

 따라서, 에고의 작용에 의한 수많은 창조활동이 내면에서는 벌어집니다.
사실,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과정 자체, 머리속에서 모의실험을 하는 자체가 창조행위입니다.
물질계인 현실세계에서는 머리속의 생각이 실제 물질로 표현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면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즉시, 창조하는 즉시! 모든것이 가능해집니다.
 스스로 자만심이 있는, 남보다 잘나고자 하는 이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그는 필시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자칭 재림예수, 자칭 조물주가 그리도 많은 것입니다.
이는 나와 연결된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는 차원중의 어느 하나를 통해 에고가 작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연결되는 차원이 서로 다르기에 서로의 경험은 호환이 되지 않습니다.
현실세계보다 더 또렷한 생명력있는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내면의 세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실세계 또한 그러합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이는 커피향만 맡아도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은 커피향만 맡아도 탁하다며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똑같은 커피를 놓고도 이렇게 반응은 다릅니다. 커피 자체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에고가 자신의 틀안에서 제 멋대로 판단합니다. 수련자가 겪는 영적인 체험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에고가 어떤 틀에 묶여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영적인 체험 또한 에고의 틀안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에고에서 자유로와진, 에고를 벗어난 삼매에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고, 그 어떤 개체도 없습니다.
모든 명상가들이 삼매의 순간에 침묵하는 이유는 침묵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하리쉬가 침묵의 성자로 불리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수련자 스스로가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궁극의 실체로 오인하고, 일반화시켜버리게 되면,
자신을 남들과는 다른 대단히 숭고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자칭 조물주 자칭 상제가 되버리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전체의식에 머무르는 삼매는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 안에서 수련자는 에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에고에 묶여 살아온 사람이 이 에고를 벗어난 궁극의 진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명상의 지향점입니다. 따라서, 수련중에 그 어떤 체험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말고
그저 경험하는 그 자체에 머무르십시오.
영화를 보면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경험은 하되 그 실체를 알아 빠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궁극의 진아에 도달한 명상가는, 전체의식과 에고 사이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명상가는 이 두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체의식에 대해서 에고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명상가는 에고가 소멸된 존재가 아닙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에서 자유로와 집니다.
벗어나고 싶거나 머무르고 싶거나..그 또한 자유로운 선택으로 남습니다.

올챙이는 꼬리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물 속에서만 삽니다.
그러나, 꼬리가 떨어지면 곧 땅으로 뛰어 오릅니다.
꼬리가 떨어져 개구리가 되면 물 속에서도 살 수 있고,
육지에 올라와서도 살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지의 꼬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이 세상의 물 속에 빠져 그 곳에서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지의 꼬리가 떨어져 지혜가 열리게 되면 자유롭게 땅위를 걸어 다닐 수 있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이 세상의 물 속에 들어가 살 수도 있습니다. 명상가의 삶은 이와 같습니다.

'석문호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련요결_05_道의 장_문답편  (0) 2009.09.09
석문호흡_행공도  (0) 2009.01.05
행공의 효과정리  (0) 2008.11.30
은봉 서효순 구도 체험기  (0) 2008.08.23
호월 권진홍 구도 체험기  (0) 2008.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