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자(老子)에 대하여...
노자는 공자와 함께 약 2500년전의 사람으로 동서양을 망라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동양인일 것이다.
그의 저술로 알려진 <도덕경 道德經>은 동양의 어느 책보다도 많이 서양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려향(려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성은 이(李), 이름(名)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諡號)는 담(聃)이라 하였다 한다.
노자는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라는 벼슬을 하다가,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자 서쪽으로 떠나가려 하였는데,
이때 함곡관(函谷關)에서 관령(關令) 윤희(尹喜)라는 사람이 간청하여 도덕(道德)의 뜻을 말하는 상하편(上下篇)
오천여언(五千餘言)의 책을 지어주고 떠났다고 한다.
<노자>에 대한 주요 저술로서는 하상공의 노자장구(河上公 老子章句), 왕필의 노자주(王弼 老子註),
부혁의 도덕경고본편(傅奕 道德經古本篇), 오징의 도덕진경주(吳澄 道德眞經注), 고형의 노자정고(高亨 老子正言古),
왕부지의 노자연(王夫之 老子衍) 들과 같은 글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옛부터 <노자>는 공자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노담(老聃)의 저술로 알려져 왔지만,
근래에는 노자라는 인물과 함께 저자와 저술연대 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노자>가 <순자>, <여씨춘추>, <장자>, <한비자> 들에 인용되고 있으니 춘추시대 말기에 저작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이며,
사마천의 <사기>에도 '<한비자>는 황제와 노자의 학문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노자와 함께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알려진 장자는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노자>의 사상을 부연하여 발전시겼다고 평가 되기도 한다.
▶ 道에 대하여...
그러면 이제 노자와 함께 길을 떠나보자. 우선 이제까지 노자를 풀이해 왔던 기존의 방식에 따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한번 둘러보자.
노자를 흔히 도덕경이라고도 부르니 먼저 道라는 부름말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에 대하여는 노자도 道를 말머리 삼아 첫 마당 첫 마디를 시작하고 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그런데 이에 대한 후대의 주석과 해석은 어떠한가?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도올 김용옥님과 구름 이경숙님의 풀이를 그대로 옮겨 본다.
[도올의 풀이]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 구름의 풀이 ♡
도(는 그 이름을 )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모두가 道는 고정된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32장에서도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라 하였고 이를 일반적으로 풀이하면,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樸처럼 작지만 천하도 신하로 부릴 수 없다.]와 같아 여전히 고정된 이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25장에서는 좀 아리송한 말씀을 하신다.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글자로 적어 이르니 도라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데 글자로는 나타낸다니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21장에서는 상반된 말을 하고 있다.
自古及今,其名不去,以閱終甫. 吾何以知終甫之然哉? 以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이름은 사라진 적이 없고, 그러므로 창조의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창조의 근원을 알겠는가? 바로 이 道 때문이다.]
노자는 여기에서 道란 이름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도 옛 근원을 터득하여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道란 이름은 옛부터 노자 당시까지 불려오던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도 변함없이 道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1장과 32장에서는 다른 말을 하고 있는가?
노자 할아버지께서 오락가락 하셨다는 말인가?
노자 할아버지를 횡설수설하는 노망들린 할배 취급하는 대목은 곳곳에 나타난다.
이곳저곳 좀 더 살펴 보겠다.
▶ 道를 아는 것과 말하는 것에 대하여...
知者不言,言者不知.[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이는 알지 못한다.]
56장에 나오는 이 말은 짤막한 경구처럼 널리 알려진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자.
이 말은 참이 될 수 없다. 허위에 가득찬 세상에나 어울리는 그 현실을 비꼬는 말에 불과하다.
만약 이 말대로라면 노자의 五千言은 엉터리가 되고 만다. 노자는 약 2500년간 인류를 속여온 엄청난 사기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노자의 횡설수설을 더 살펴보자.
앞에서 말한 21장의 경우처럼 노자는 창조의 이치를 터득하여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54장에서도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내가 어떻게 천하가 그런 줄 알겠나? 바로 이런 이치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노자는 道를 터득하고 그것을 자신있게 상대에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자.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이 어찌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어떻게 여기서는 이 말하고 저기서는 저 말하며 횡설수설할 수 있단 말인가?
70장을 보자. 吾言甚易知, 甚易行.[나의 말은 대단히 알기도 쉽고 실행하기도 쉽다.]
노자는 스스로 道를 터득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터득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는가?
▶ 仁과 智에 대하여...
仁은 유가의 최고 덕목이라 할 수 있겠는데 노자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니 유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해 온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대목은 5장에 나오는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루고,
성인도 어질지 않아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이다.
성인도 어질지 않다면 대체 누가 어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질다는 말과 그 가치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인가?
3장을 보니 不尙賢 使民不爭.[어진 것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서로 다투지 않게 할 수 있다.] 라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어질다는 것이 잘못된 가치인 것 같다.
그리고 19장에 이르러서는 絶仁棄義 民復慈孝.[仁을 끊고 義를 버리면 백성은 효도와 자애로 돌아간다.]라 하면서
仁과 義를 아예 버려야 할 것으로 규정하였고, 20장에서는 絶學無憂.[배우기를 그만두면 근심도 없을 것이다.]라 하니 갈수록 산이다.
그 뿐이랴! 급기야는 19장에 絶聖棄智 民利百倍.[聖과 智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로움이 백배나 된다.]라고 하여
聖과 智마저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자 전체를 망라하여 볼 때 성인은 道를 터득하고 실천한 노자의 이상형으로 나타나는데, 이 대목에서는 갑자기 추방의 대상이 되어버렸으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노자는 약 30여 군데에서 성인을 말하면서 존숭의 대상으로 여겼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18장에 大道廢 有仁義.[대도가 무너지고나서 인의가 생겨났다.]라 하였으니 대도가 무너진데 대한 절망감에서 한 번 해본 소리인가?
38장에도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으며, 인을 잃은 후에 義가 있다.]라 하니 아무래도 道가 사라진데 대한 상실감이 큰 것도 같다.
그러나 아무래도 석연치 못하다. 무엇인가 꼬인듯한 생각이 갈수록 깊어진다.
▶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라!
이번에는 3장과 65장을 살펴보자.
常使民無志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항상 백성들이 지식과 욕심이 없게 한다. 지혜로운 자들이 감히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한다.]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옛날에 도를 잘 행한 사람은 백성을 밝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몽매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들의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적이지만, 지혜로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라! 아마 이 말을 듣는 독자는 펄쩍 뛸 것이다. 그리고 당장 노자를 던져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이 어찌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만 가당찮은 소리로 들리겠는가! 옛 사람들이라고 어리석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해괴한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이 말이 번역된대로라면 이제 노자 할아버지께서 망녕이 들어 독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물론 이제까지 주석자나 해설자들은 여기에 쓰인 智를 교묘한 꾀라고 둘러대며 노자를 변호?해 왔다. 다스리는 사람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교묘한 꾀를 쓰지 말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36장을 펼치면 그것이 전혀 아니다.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중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무너뜨리려면 반드시 먼저 일으켜 세우고,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라.
(중략) 나라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노자께서 다스리는 사람에게 내리신 거룩한 가르치심이다.
이거야말로 얄팍한 잔꾀가 아닌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 섞어가며, 가식적인 냄새를 풍기는 仁도 義도 聖도 智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도인께서 이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신가!
갑자기 어디 영상자리라도 낙점을 받고 들뜬 마음에 헛소리 한 번 해보았다는 말씀인가?
만약 이 말대로라면 노자는 간교한 우민주의자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아니다! 분명 무엇인가 잘못 꼬아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지켜보자.
▶ 沖과 빈그릇에 대하여...
이번에는 4장에서 沖이 어떻게 풀이되는가를 살펴보자.
道沖 而用之或不盈.
[도올의 풀이 : 도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구름의 풀이 :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쓸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보다시피 문제의 沖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단옥재가 沖을 中+皿으로 풀이하여 빈그릇이라고 주석하면서 왜곡되기 시작한 탓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텅 빈 곳에서 무엇을 퍼내어 쓴다는 말인가? 만약 퍼내어 쓸 수 있다면 무엇인가가 차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충만하여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沖은 充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빈그릇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빈! 빈이 들어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그냥 비어있지 않고 무엇인가는 차 있다는 설명을 하려는 것이다.
빛의 이치로 설명하자면 빛의 파동이 충만해 있다는 것이니 위에서 대답한 빈은 彬이 적당할 것 같다.
또는 그릇 임자가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생각을 담아 두기도 하는데 이 때는 바람이나 욕망, 욕심이란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빈그릇 타령은 11장으로 계속 이어진다.
三十輻 共一穀[좌변하부車], 當其無 有車之用.
延[좌변土]直[좌변土]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도올의 풀이]
서른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인다. 그 바퀴통 속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 구름의 풀이 ♡
서른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살통으로 모아 바퀴를 만든다.
바퀴의 살들이 만든 빈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바퀴가 능히 수레를 지고 돌 수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지는대로 모양이 잡히는 찰흙의 성질이 만들어내는 움푹 들어간 빈자리에서그릇의 쓰임이 나온다.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문을 달기 위해 벽에 뚫은 구멍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서의 쓰임이 가능하다.
無를 빈그릇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앞에서 예를 든 4장의 沖이란 글자를 곡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한번 생각해보자.
[찻잔이 있다 > 차를 따라 잔을 채운다 > 차를 마신다]
여기에서 쓰임이란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찻잔에는 녹차든 홍삼차든 차가 차 있어야 그 쓰임이 가능하지 빈잔은 무의미한 것이다.
방도 마찬가지이다. 방을 사용하는 또는 사용할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그 방의 쓸모가 있는 것이지 빈방만 덜렁 있다면
그 방은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無를 비유적적으로 설명하려는 말이었지만 자칫 속기 쉬운 함정이었다.
조그만 착오로 빠져 들어간 함정이 약 2천년간이나 겨레와 인류를 빈그릇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 질곡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단언컨대 우주의 어느곳에도 비어있는 곳은 없다.
이론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근자에 발견된다는 블랙홀마저도 비어있는 공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가 차 있어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공간에는 바늘끝만큼도 비어있는 곳은 없다.
그렇다! 그러므로 필자는 겨레가 이 빈그릇의 질곡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만을 갈망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 不과 非와 無에 대하여...
널리 알려진대로 不과 非와 無는 부정을 위한 말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노자 5000言 중에는 500여회나 無, 不, 非, 未, 莫 등의 부정사(否定辭) 들과 何, 惡乎 등의 회의사(懷疑辭)를 사용하고 있으니,
전체 글자중 부정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퍼센트도 넘는다.
뿐만 아니라 글자 하나가 3-5 글자를 문장으로 물고 들어간다고 보면 노자 오천언의 절반에 가까운 내용이 부정문이 되고 만다.
대체 진실을 말한다는 경전에 웬 부정문을 그렇게 많이 깔아 놓았단 말인가?
이것은 좀 심하다거나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노자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부정문으로 노자를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해괴한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不과 非와 無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 노자를 제대로 풀어내야 한다.
첫째, 不은 불이요 뿌리이다!
不은 불[火]이다. 발음 그대로다. 여기에서 밝, 밝은, 밝게, 밝다, 밝히다 들과 같은 말들이 파생된다.
不을 불[火]로 사용한 용례는 우리 배달겨레를 달리 표현한 불함[不咸]과 백두산의 다른 이름인 불함산[不咸山]이다.
배달 = 밝달 = 不[밝] + 咸[다] = 불함 과 같이 모두 우리 겨레를 표현하는 말이다.
不은 뿌리이다. 글자의 모양새가 뿌리를 본뜬 것이다.
뿌리를 고어에서 불휘라 하였는데 不煇로 쓸 수 있고,
뿌리가 나는 것을 發根이라 하고 不根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뿌리는 이어이어 뻗어가니 不而이다.
그런데 우리말 불[火]은 뿌리와 같은 이치로 생겨난 말이다. 불은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불의 뿌리를 찾아보면 빛으로 돌아간다. 노자에서는 빛의 알갱이를 '불, 밝'이라 하였으며,
이것은 삼라만상의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고로 뿌리는 不二요 하나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보는 우주는 하나이다.
불함[不咸]에서도 이 이치가 드러난다.
不은 불이요 뿌리이며, 咸은 모두 라는 뜻이니 '모두의 뿌리 = 뿌리는 하나다'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더 자세한 이치는 노자를 모두 읽고나면 저절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둘째, 非는 빛이요 화백이다!
非는 빛이다. 이것도 발음 그대로다. 글자의 모양새로 보면 갈래이다.
그러므로 빛갈이란 말이 살아 있다.
非는 빛이되 빛이 갈래갈래 갈라진 것을 뜻하는 글자로 생겨났다.
햇님은 빛을 아주 섬세하게 갈라내어 베풀으니 우리는 그 무게도 느끼지 못 할 정도이며,
차등없이 고루고루 그 베풀음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빛의 이치를 이용한 노동의 방식도 있었으니 바로 가래삽질이다.
가래삽질은 힘든 노동을 분산시켜서 쉽고 가볍게 해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집단에서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을 기를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고안된 놀이가 줄다리기이다.
서로서로 힘을 기르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놀이인데 안타깝게도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서로 승부를 겨루는 외형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 갈라놓고 보니 본래 의도와 다른 일이 자꾸 생겨나 이게 아니다싶어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고,
본래의 '갈라서 가볍게하다'는 [가를비=非+己]와 [가벼울비=非+子]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뿌리를 잊고 마냥 갈라져 나아가다 보면 하늘그물(天網)에 걸리게 되는데,
하늘그물은 빛의 그물이니 빛[非] + 그물[四] = 죄[罪] 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라져 나아가는 모든 것은 근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들이 하늘그물에 걸리기 전에 되돌려 모두를 하나로 엮어내는 것을 우리 겨레는 화백[和白]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백은 德이다!
德을 분해하면 [人人十四一心]이다.
人은 생명, 十은 완성의 새알, 四은 그물망, 一은 한, 心은 마음 또는 강[弓弓]이니,
알알이 새알들을 그물망에 엮어내어 누에고치처럼 하나로 생생하게 하는 것이다.
德은 삼라만상을 하나로 엮어내어 생생하게 하는 그물망[하늘그물]이니 햇님의 가없는 은총이다.
그러므로 德은 떡이다!
설날 떡국을 끓여내는 가래떡은 화백의 이치로 만들어진 德이요 떡이다.
옛날에는 구름판에 떡쌀[해알]을 올려놓고 메로 찧어내어 손으로 가래떡[해알꾸러미]을 빚어냈다.
알알이 새난 해알[쌀]을 메로 쳐서 해알을 산산이 부숴 골고루 섞어내어 새로 해알꾸러미를 뽑아내니
이것이 화백의 이치로 만들어진 가래떡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동글동글 잘라내어 끓여낸 것이 설날 차례상에 올리는 떡국이다.
가래떡뿐만 아니라 인절미나 시루떡 들도 모두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행사때마다 떡을 하여 하늘 땅 생명과 조상님들께 감사하고
이웃과 고루고루 나눠 먹으면서 화합의 마음을 길러내고 엮어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갈래갈래 갈라서 고루고루 베푸는 빛의 이치와, 모두를 하나로 엮어내는 화백의 이치,
德과 떡의 이치는 모두 뿌리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겨레 모두의 생활속에 체화되어 있는 화백의 원리를 되살려내어
겨레가 하나로 화합하는 상생의 새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셋째, 無는 물이요 母이다!
無는 물[水]이다. 발음 그대로다. 물은 無의 이치를 나타내는 비유적 수단이다.
노자는 2장에서 有無相生[有와 無는 서로 상생한다.]라 하고,
1장에서는 此兩者 同出而異名[有와 無 둘은 나온곳은 같으나 이름을 달리 한다.]라 하였으니,
이 이치에 따라 無와 有를 물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물이 가득찬 항아리가 있다. 온도를 적당히 떨어뜨리면 물의 일부가 얼어서 얼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로 돌아간다.
물은 無요 얼음은 有이니, 無와 有는 이처럼 근본은 같으나 나툼을 달리할 뿐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
물[無]이 가득찬 항아리가 있다. 그리고 보름달이 떠올라 항아리에 印을 쳤다.
물이 달을 품어 달을 나투니 달님도장[天符月印]이요 有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항아리가 비어 있지 않고 물[無]이 차 있기 때문에 달이 항아리에 印을 치고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無는 어미母이다.
이것도 발음 그대로다.
그런데 母는 바다에서 일출하는 것을 본뜬 글자이니, 가운데 획은 수평선이고 위는 하늘 바다요 아래는 물의 바다,
그리고 위의 점은 솟아오른 태양이요 아래 점은 해인[海印]이다.
해인이 바로 햇님도장[天符日印]이요 無의 바다이며 어미母인 것이다.
母위에 ㅅ을 얹으면 매양每가 되는데,
하나하나의 개체[每]로 독립하려면 햇님의 분신이라는 신표, 즉 햇님도장을 찍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해인은 누가 찍어주는가?
어머니[母]! 당연히 어머니시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을 통해서 백억년간 빛이 진화해온 유전자 도장을 배꼽에 찍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삼라만상은 모두가 無의 바다에서 햇님도장을 찍고 유일독립개체인 有로 모습을 나투는 것이다.
매양每에 다시 水를 붙이면 바다海가 되는데,
본래 無를 상징하는 바다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바다의 고어는 바랄로 '발=밝'이니 바다의 뿌리도 不과 같은 것이다.
우주[無]는 빈그릇이 아니라 빛의 파동과 묘용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無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有로 나투면 生이라 하고,
有에서 無로 돌아가면 滅이나 死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生과 死는 같은 뿌리이며,
無의 바다는 온 우주를 하나로 싸안아 장구하게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