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호화 빌라 녹천정의 초당마마 되어 조선 최고의 시를 읊다
<淚如雨>의 저자 이상국의 ‘미인별곡’5 | 운초 김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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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어떤 여인을 아름답다고 이르는가?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쉽게 답하기 어렵다. 미(美)는 분명 형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형상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미를 규정하는 보편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의 평균은 결코 아니다. 아름다운 신체 부위를 다 모아놓으면 미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물론 성적 매력을 빼놓을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매력 또한 중요하다.
성격과 자부심과 습관, 태어나면서 배운 태도와 행실, 취향과 학식, 그리고 가슴 속에 품은 꿈이 미(美)를 돋우는 것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평안도 성천의 조선여인 김부용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인물도 빼어났지만 학식도 뛰어나고 감수성도 남달랐다. 그를 가장 사랑스럽게 하는 것은 ‘귀여운 자기자랑’이었다.
부용은 집안이 가난해 기생이 되고 말았지만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그는 어느 시에서 아버지 ‘추당(秋堂)’이 지방관리를 지내다 퇴직해 누대(樓臺)에 앉아 책을 즐겨 읽는 모습을 그렸다. 어느 여름날의 비 갠 아침, 인근의 절에서 풍경소리가 들린다. 뜰에는 석류 알이 살짝 벌어졌고 등나무 아래에는 책상이 놓였는데 그 위에 책이 가득 쌓여있던 것을 부용은 기억한다.
그는 아버지가 속세를 초탈한 신선 같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추당은 부용이 10살쯤 되던 무렵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그는 작은 아버지인 ‘일화당(一和堂)’에게 맡겨진다. 하지만 일화당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3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고 하니 집안이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그는 어느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면서 기생이 된다. 예쁘고 머리가 좋은 부용은 열여섯이 될 무렵에는 성천에서는 비교할 이가 없는 명기(名妓)가 됐다. 이 무렵 그는 고을의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했다. <부용당에서 빗소리를 듣다>라는 시가 그의 데뷔작인 셈이다.
옥구슬 일만 알이
유리쟁반에 번갈아 담기네
알알이 동글동글
굴원이 아홉 번 굴린 알약인 듯
부용은 애향심 또한 대단해 성천의 곳곳을 찾아 다니며 시를 읊었다. 그곳의 신성강(新成江)변에 있는 사절정(四絶亭)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정자의 이름이 4절이라니 잘못됐다 싶네
4절이 아니라 5절이라야 마땅하네
산과 바람과 물과 달이 서로 어울리면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야 절세의 풍경이 되는 법
황진이는 자신이 ‘송도3절’에 속한다고 자찬했는데, 부용은 사절정에 올라 자신이 왔으니 오절정이 돼야 한다고 피력한다. 황진이를 뺨칠 만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5절을 말한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자연 속의 풍류에 잘 어울리는 존재라는 자의식도 숨어있었을 것이다.
부용은 ‘성천5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시재(詩才)를 지녔다. 조선의 시인 중에서 김부용의 생생한 언어감각과 빼어난 심상(心象)을 따를 사람은 남자들 가운데서도 찾기 어렵다. 향풍동 어귀에서 읊은 시가 유명하다.
끊어진 골짜기 숲그늘에는 옛 기슭이 무너져있고
허공에 뜬 절벽은 옥돌이 층층이 쌓인 듯
숲으로 난 길에는 3분의 1이 돌이고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은 2분의 1이 중일세
아래를 굽어보며 험준한 모양을 그리고 다시 위를 올려다보며 절벽에서 튀어나온 흰 돌을 묘사한다. 그 중간에 마을이 있다. 길도 험해 돌 투성이인데,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스님이다. 표현이 박진감 있고 3분의 1과 2분의 1이 재치에 넘치는 표현이다. 평양의 그네 뛰는 풍경을 그린 시도 재미있다.
구름 밖의 계수나무꽃은 달이 떨어졌나 놀라고
바람 속의 제비들은 신선이 승천하나 겁먹네
머리를 맞댄 소년들은 서로 엿보려고 싸우다
늘어진 수양버들 그늘 가에 망연히 주저앉았네
계수나무꽃은 달에 피어있는 것이니, 달이 떨어지면 큰일이다. 여인이 그네를 타고 솟구쳤다 뚝 떨어지는 것을 달이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다 다시 그네를 밀어 하늘로 올라가니 이번에는 제비들이 보고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인 줄 알고 놀란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멋지게 묘사돼 있다.
아래 2행은 두 소년을 들러리로 출연시켜 감흥을 고조시킨다. 처음에는 서로 보려고 싸우던 아이들은 하늘에 오른 멋진 모습을 보고는 넋을 잃은 듯 주저앉아버렸다.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 한 컷을 보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부용이 쓴 성천시편 중 가장 빼어난 것은 <묘향산에 들다>가 아닐까 한다. 그는 말을 타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길잡이 스님이 앞장섰다.
야윈 말이어서 오히려 푸른 소나무 장벽을 잘 뚫네
작은 다리가 있는 서쪽 언덕에 싸늘한 종이 서있네
구름과 노을의 통로 속에 절집이 열리네
녹색 비단 꽉 찬 가운데 푸른 봉우리 우뚝하네
절로 돌아가는 스님이 낙엽을 스락 스락 밟네
기생은 가을꽃 꽂고는 예쁜 티를 내네
만 겹의 계곡과 산이 가는 길을 헷갈리게 하네
이 길로 돌아올 때는 신선 발자국 밟는 것 같겠구나
예쁜 기생을 맞아 길 안내를 하는 스님이 제 풀에 긴장해 낙엽을 조심조심 밟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데 기생은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말 위에서 가을꽃을 꺾어 꽂고는 방싯방싯 웃는다. 깊은 산중의 험준한 풍경과, 두 사람의 표정이 어우러지며 지금 막 묘향산에 오르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 귀엽고 재기 넘치는 기생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성천 사람이 아니라 멀리 함경도에 부임한 관찰사였다. 연천공 김이양(金履陽·1755~1845)은 당시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의 핵심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던 행복한 남자였다. 세도의 핵심이던 김조순의 숙부 뻘이며 정조·순조·헌종 3대에 걸쳐 권력의 노른자위에서 놀던 인물이다.
예조·이조·호조·병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한성판윤을 무려 네 번이나 역임했다. 홍문관 제학·판의금부사·좌참찬을 지내고 마지막으로는 예조판서로 있다 은퇴한다. 이렇게 경력은 화려했지만 집안은 좀 쓸쓸했던 것 같다.
그는 아들이 없어 김이고의 아들인 김한순을 양자로 데려왔다.
자식을 낳지 못한 아내 원산 이씨는 밖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남편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먼 지방으로 발령나면 무척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체격 좋고 인물 훤하며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김이양은 기생들과 염문도 당연히 많았다. 하지만 국경지대인 함경도 변경에서야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 시골에 반반한 계집이 있다고 해봤자 한양 땅에서 놀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랴.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그런데 사단(事端)은 엉뚱하게 시작된다. 함경감사 김이양이 어느 날 평양의 잔치에 초대받아 갔다 평양 동쪽에 있는 성천 출신 기생 김부용을 만난 것이다.
그 뒤로 국경이 아닌 도경(道境)을 넘나드는 사랑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함경도와 평안도 경계 부근에서 애틋한 미팅을 한다. 김이양이 관찰사를 지낸 때는 1812년 이후다.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그 무렵 부용은 몇 살이었을까? 부용의 생년은 정확하지 않지만, 시에서 나온 연도들을 추정해보면 1790년께 태어난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부용의 나이는 22세였다. 57세의 잘나가는 권력남과 22세의 예쁜 여류시인이 만났다. 초로의 사내는 흰 수염을 쓸어 내리며 앉았고, 햇살에 막 피어난 부용화처럼 새초롬한 얼굴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홍안의 시인은 가야금 줄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 몰래 살핀다.
‘선한 눈매에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동안(童顔)이 남아있는 얼굴. 풍채는 당당하고 웃음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이 있구나. 정말 듣던 대로 천하의 선비로고. 목소리는 나직하되 힘이 있어.’ ‘얼굴이 작고 갸름하지만 하관이 느려지면서 연꽃 잎처럼 벙근 얼굴. 가히 절세의 미색이로다. 입술은 부드럽게 다물었는데 콧날과 인중에서 고집이 느껴지는군.’
소설가 정비석은 이때의 대화를 이렇게 펼쳐놓는다. 술잔이 몇 순배 돈 뒤 함경감사가 따뜻한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늙은 신랑, 어린 신부(老郞幼婦)’라는 노래를 아느냐?”
“예. 패설(성수패설)에 나오는 유행가인 줄로 아옵니다.”
“한번 불러줄 수 있겠느냐?”
“예. 나으리.”
열여섯 신부에 일흔둘 신랑
쑥대머리 백발이 붉은 연지와 마주했네
갑자기 하룻밤 봄바람이 이니
배꽃을 불어 날려 해당화를 누르네
노래가 끝나자 김이양은 웃으며 말한다.
“나는 말이다. 저 늙은 신랑보다 열 다섯 살이나 젊도다.”
그러자 부용이 말을 받는다.
“어머나. 소첩은 이팔가인보다 여섯 살이나 많사옵니다.”
“허어. 붉은 꽃이 흰 꽃의 부끄러움을 잊게 하는도다.”
“대감. 붉은 꽃이나 흰 꽃이나 봄날 피는 것은 매 한가지 아닌지요?”
“허허. 부질없는 노욕을 세상이 비웃지 않겠느냐?”
“마음이 같다면 나이가 무슨 벽이겠습니까? 세상에는 30객 노인도 있고 80객 청년도 있지 않사옵니까?”
이렇게 두 사람은 몸과 마음의 문을 연다. 김이양은 쓸쓸했던 사랑의 이력서에서 가장 잊지 못할 밤을 만난다. 야한 시화(詩話)가 오간다. 도연명의 <사시(四時)> 한 구절을 김이양이 먼저 읊는다.
“너를 만져보니 벌써 ‘봄날 물이 연못에 가득 찼구나(春水滿四澤)’.”
그러자 부용이 나직이 받는다.
“대감도 만져보니 벌써 ‘여름날 구름이 삐쭉삐쭉 솟았습니다(夏雲多奇峰)’.”
35년의 나이 차이는 처음에는 커 보였지만 서로 익숙하게 되면서 그것을 잊어버렸다. 남자는 그를 기생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공주’처럼 대했고, 친구처럼 말을 걸었다. 처음 만난 날 그의 데뷔작인 <부용당에서 빗소리를 듣다>를 외워 그를 기쁘게 하기도 했다.
부용의 언어를 좋아했고 부용의 가야금과 춤과 노래를 좋아했다. 남자의 너그러운 품성과 따뜻한 음성은 부용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객지로 나온 사내가 한때 부리는 부질없는 객기일지니 속지 말자고 마음먹었지만, 갈수록 이 남자가 좋아졌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접경지역에 있는 개천이었다. 평안남도 끝에 있는 도시로 함경도와 가깝다. 그곳의 무진대(無盡臺)는 단골 데이트 장소였다. 부용은 무진대를 다녀온 뒤 이렇게 읊었다.
가을호수 십리에 산들이 둘러서 있네
한 곡조 맑은 노래는 고운 난간에 기댔네
그러나 아무래도 먼 거리인 만큼 만남이 그리 여의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른 봄에 만나서는 가을에 성천 근처의 향풍산 단풍을 꼭 같이 보자고 했지만, 부용이 병이 나 가지 못한다. 그렇게 애태우며 시절을 보냈다. 1815년 봄. 김이양은 예조판서로 발령받는다. 3년간의 사랑이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부용은 마음을 졸이며 마지막으로 김이양을 만나러 간다. 그때 김이양은 이렇게 말한다.
“작첩하고 올라가기에는 아무래도 남세스러우니 너는 여기서 조금 더 기다려라. 내가 곧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가리라.”
“나으리….”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너를 곧 부르리라.”
“저는 기적(妓籍)에 얹힌 몸이라 나으리가 떠나시면….”
“음. 그것이 문제로구나. 예방(禮房)의 관속에게 말해 너를 기적에서 빼주리라. 아예 너를 나의 부실(副室)로 삼아두고 올라가리라.”
“망극하오이다.”
이렇게 김이양은 떠났다. 부용은 김이양이 마련해준 평양의 관아 한쪽 버들가지가 늘어진 저택에서 지냈다. “곧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가리라”던 그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그런데 18년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부용의 절망과 불안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부용은 꽃다운 시절을 다 보내고 마흔세 살이 됐다. 기생의 나이로 보자면 이미 한 물이 아니라 몇 물 가고도 남은 퇴물이 됐다. 남자의 말 한마디만 믿고 먼 동구 밖 길에 스멀거리는 헛것만 보다 늙어버린 여인.
1825년 부용이 기다리다 못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곧 돌아오고 만다. 김이양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해 여름 김이양은 헌릉벌목사건에 연루돼 출송조치를 당한 죄인이 돼 있었다. 봄날에는 봄날대로 그립다.
봄바람이 갑자기 휘익 부네
산 위의 해는 또 황혼이네
역시나 끝내 오지 않았네
그래도 혼자 문 닫기 아쉽네
가을에는 또 가을대로 서럽다.
주렴 밖에는 때때로 바람이 저절로 이는 소리 들려
몇 번이나 속았던가, 그 사람이 오는가 싶어
그러다 부용은 일생일대의 보탑시(寶塔詩) 한 편을 짓는다. 2행마다 한 글자씩 늘어나 18자까지 되는 36행의 문자탑이다. <부용상사곡>이라고 불리는 이 시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출세작이기도 하다.
한 글자 한 글자를 고르며 공든 탑을 쌓아가는 부용의 마음을 생각해보라. 형식의 제약을 지켜가며 속에 터질 듯 출렁이는 마음을 곱게 다져 넣는 그 침착한 솜씨는 18년을 인내하게 한 그의 내공이 아닐까 싶다.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羅巾有淚
紈扇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倚孤枕驚殘夢
望歸雲?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헊
容貌憔悴對鏡下淚
歌聲烏咽對人含悲
提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昨不來今不來郎何無信
朝遠望夕遠望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騎來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別時多見時少世情無人可測
惡緣長好緣端天意有誰能知
雲雨巫山行人絶仙女之夢在某
月下鳳臺簫聲斷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頻倚牡丹峰每傷緣?衰
獨守空房淚縱如雨三生佳約焉有變
孤處深閨頭雖欲雪百年定心自不移
罷晝眠開紗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挽香衣送歌舞同春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如是耶
三時出門望出門望哀哉賤妾苦心果如何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孤魂月中泣長隨
헤어져
그립고
길은 멀고
소식 늦어
맘은 거기 있고
몸은 여기 있고
비단수건은 눈물 젖고
비단부채는 기약 없고
향각서 종소리 우는 이 밤
연광정에 달이 뜨는 이 때
악몽에 놀라 외롭게 베개 껴안을 때
오는 구름을 보며 먼 이별 슬퍼하네
날마다 만날 날 그리며 근심스레 손꼽고
새벽에는 러브레터 펼쳐보며 턱 괴고 우네
얼굴은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이 주루룩
목소리는 울음 잠겨 사람을 대하니 슬픔 베어 문 듯
은장도를 들어 약한 창자 끊기는 어려운 일 아니도다
비단신을 끌며 먼 눈길 보내니 또 온갖 의심만 들끓고
어제도 안 오고 오늘도 안 오니 그대 어찌 그리 신의가 없죠
아침에도 멀리 보고 저녁에도 멀리 보니 나 혼자 보면서 속네
대동강이 평지 된 뒤에야 채찍 휘두르며 말을 타고 오시려는지요
큰 숲이 넓은 바다 변하면 그때야 배 타고 건너 오시려는지요
떨어져 있는 때는 많고 만난 때는 적으니 사랑을 잴 사람 아무도 없네
나쁜 인연은 길고 좋은 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으리
운우의 정 나누던 무산에 오시는 발길 끊기니 선녀의 꿈은 어디에 있는지요
달빛 젖은 봉대에 피리소리 끊기니 옥을 희롱하던 마음은 누구에게 갔는지요
잊어버리자 잊을 수 없어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아깝도다 홍안은 늙어만 가고
생각말자 생각이 절로 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상했구려
홀로 지키는 빈 방에 눈물이 비처럼 주룩주룩 흘러도 삼생의 가약 어찌 변할 수 있을까요
외로운 곳 쓸쓸한 안방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져도 백 년의 정심 어찌 움직일 수 있을까요
낮잠에서 깨어나 사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보아도 모두 마음에 없는 나그네일 뿐이고요
옥베개 밀고 향기 나는 옷 끌며 봄날 어울려 춤도 추어 보았지만 모두 미운 녀석들뿐이고요
천리 있는 사람 기다리기 어렵네 사람 기다리기 이리 어려워요 군자의 박정함이 어찌 이다지 심한가요
삼시에 문밖에 나가 멀리 보네 문밖을 나가 바라보니 슬프지요 천첩의 괴로운 마음 과연 어떠할지요
오직 바라옵건대 너그럽고 인자한 대장부여 결심하고 강을 건너 옛 인연 촛불 아래 기쁨으로 날 만나주셔서
약한 여인이 슬픔을 머금은 채 저승으로 돌아가 외로운 영혼 달 속에서 내내 울며 따라다니지 않도록 하소서
1831년 그토록 기다리던 기별이 온다.
“내년 봄에 서울로 올라오너라.”
그 무렵 김이양은 벼슬에서 은퇴해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직을 제수받았다. 국가 의식이 있을 때 조복을 입고 참여할 수 있도록 국가원로로 예우한 것이다. 마침내 서울로 올라가면서 부용은 시를 쓴다.
한식 날 봄바람 불 때 고향을 떠나네
산을 보고 물을 보니 꽃 시절이 애틋하네
얕은 재주로 감히 기생첩이 되었으니
폐에 병이 든 것이 술 마신 탓은 아니로다
이처럼 넓은 모래밭 천겁의 헛된 것
어찌 뜬 세상에 등불 하나가 그리 바빴나
조금 아는 것으로 평소 품은 것이 가련하도다
밝은 달이 나를 따라 한양으로 간다
한양으로 온 부용은 하인이 말을 세운 곳을 보고 깜짝 놀란다. 연천대감이 사는 북촌(요즘 청와대 오른쪽인 삼청동 지역에 안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다)이 아니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한 자락(옛 정보부 자리)에 자리 잡은 50칸의 별서였다. 부용을 애태우던 시간에는 저 집을 짓는 시간도 포함돼 있었다.
김이양은 은퇴 이후의 노후 설계를 치밀하게 하고 있었다. 별서의 이름은 녹천정(祿泉亭)이었다. 벼슬이 샘솟는 집이라는 의미다. 이미 벼슬에서 은퇴한 김이양이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어린 시절이 불우해 기생이 되어 고단하게 살아온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빌라의 주인이 된 부용은 당대의 시인묵객들과 어울리며 교유했고 ‘초당마마’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초당은 녹천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부용의 호인 ‘운초당’의 약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연천이 있는 곳에는 운초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녹천정은 당시 예인들이 모여드는 예술 클럽 같은 곳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오는지라 술은 ‘셀프’였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술통을 들고 몰려든다.
손님 중에는 옥호(玉壺) 김조순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보면 초당은 당시 조정을 쥐락펴락하던 권문의 결속을 다지고 소통을 활발히 하는 아지트의 역할도 했던 듯하다. 부용은 김조순의 집인 북악산 자락의 옥호산방에도 놀러 간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이었다.
좀 춥지만 떨치고 고개 숙여 가마 밖 나오니
곡우 직전 풀의 새싹들이 앞다퉈 돋네
꽃이 피면 화사한 날이 분명히 머무르겠네
몇 그루 뜨락의 나무를 정겹게 눈도장 찍어 두네
녹천정 단골 중에는 당대의 최고 시인인 자하(紫霞) 신위도 끼어 있었다. 그에게 부용이 차운한 시는 상대를 의식한 까닭인지 기발한 표현이 넘친다.
시 쓰고 싶은 마음이 몰래 동하니 솔바람이 운을 띄워주네
사람의 말소리 희미하게 들리니 물소리 건너편일세
낮술이 깨니 슬픔의 영토가 커져가고
수레를 세워 고개 돌리니 저녁안개 가득
솔바람이 운을 띄운다는 표현도 멋지고, 사람 말소리 사이에 물소리를 흘려 넣는 센스도 놀랍다. 당대의 많은 남자가 부용을 좋아한 까닭은 그가 술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시기 때문인 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술에 취했다는 표현이 그의 시에서는 흔하다.
아마도 자하와도 낮술을 진하게 마신 모양이다. 당시 한강변에는 부용과 비슷한 처지의 시인들이 빌라 하나씩 꿰차고 살았다. 원주의 기녀 출신인 금원(김덕희의 소실)은 삼호정에 살았다. 또 문화 출신인 경산(이정신의 소실)은 일벽정에 살았다. 금원은 부용과 어울리며 삼호정 시클럽을 이끈다.
죽서·경춘(금원의 동생)·경산 등도 함께 어울렸다. 금원은 이 시사(詩社)를 이렇게 소개한다. “때때로 읊조리고 좇아 시를 주고받는 사람이 넷이다…. 서로 어울려 노니 비단 같은 글 두루마리가 상 위에 가득하고, 뛰어난 말과 아름다운 글귀는 선반 위에 가득하다. 때때로 이를 낭독하면 낭랑하기가 금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하였다.”
1832년 부용이 서울로 올라오던 마흔세 살부터 11년간 부용은 녹천정의 초당마마로 황금시대를 보냈다. 1843년 봄날은 그에게 찾아온 감격시대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김이양 대감이 3월 회방연(回榜宴)을 치렀다. 과거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였다. 정부인 원산 이씨는 몇 년 전 돌아가고 없었기에 부인의 자격으로 대감과 함께 가마를 타고 홍주와 결성, 천안을 돌며 행차한다.
가난으로 기생이 되어 인생 초·중반을 헤매다 마침내 대감의 부인이 된 것이다. 부용은 광덕리 태화산에 있는 본부인 원산 이씨의 묘소에도 들른다. 그런데 이날따라 해가 삐딱하게 비추는 가운데 바람이 들이닥치며 비를 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부인은 죽어서도 기생첩이 남편의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누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게 회오리 바람을 데려와 오랫동안 속 끓인 생의 눈물 한 줄기를 뿌려 보였던 것일까? 이날의 기분이 찜찜했던 부용은 밤새 술을 마셨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천공은 그렇게 아내를 면회하고 난 지 1년 뒤 가벼운 감기에 걸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이듬해 봄날 눈을 감는다.
태화산 여우비가 그를 데려간 것일까? 김이양 나이 90세, 부용의 나이 55세였다. 봉조하 대감은 부인 원산 이씨와 합장했다. 부용은 그 뒤 16년을 더 살다 71세가 되던 해 돌아갔다. 그녀는 유언으로 “나를 대감이 있는 태화산 아래 묻어달라”고 했다.
이후 가문이 몰락하는 바람에 부용의 무덤은 잊혀진 채 태화산에 내리쬐는 사계절의 햇살 아래 평토(平土)가 되었다 소설가 정비석 씨에 의해 복원됐다. 부용의 시 하나가 마음에 맴돈다.
기생 시절이 이미 멀어져 전생의 꿈이니
때로 한가한 밤에 옛 시를 읊어보네
고향 가는 편지를 급히 쓰니 글씨가 어지럽고
처마의 새소리 게을리 듣느라 옷 개는 일 느려지네
아하, 하며 시 읊는 일 부인이 할 일은 아니지만
다만 시를 사랑하는 대감을 위해서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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