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노래가 있는 풍경

醉月 2015. 11. 17. 01:30

흐르는 것이 강물뿐이랴 추억도 세월 속에 야윈다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새 연재 ‘노래가 있는 풍경’은 우리 시대를 관통해 한국의 ‘허리 세대’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명곡을 찾아 탄생 배경과 의미, 이 땅의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 세월이 흘러 이즈음에 되돌아 보는 느낌 등을 담으려 한다. 선곡은 한국갤럽의 ‘한국인이 사랑하는 명곡’을 참고해 객관성을 유지할 것이다. 글은 언론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김동률 서강대 교수, 사진은 한국 문화와 역사를 향한 사진적 접근에 오래도록 관심을 가져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태균 신구대 교수가 맡는다.
한 시대의 삶을 노래를 통해 반추함으로써 같은 세대에게는 추억과 동질감을, 젊은 세대에겐 그 노래들이 ‘보통 한국인’에게 던지는 감동과 교훈을 교감시키고자 한다.

동해남부선은 말 그대로 한반도 남쪽 동해 바닷가를 달리는 기차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부산진역을 출발해서 포항까지 145.8km를 두 시간에 걸쳐 달리는, 열차 노선치고는 아주 짧은 단선 노선이다. 1930년 개통 당시의 출발역이었던 부산진역을 대신해 지금은 서면 로터리 인근 부전역에서 출발한다. 자동차 시대에 밀려 정거장도 많이 줄어드는 바람에 노선은 아주 단출하다. 그래서 동해남부선을 타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부 경남 지역 주민을 제외하고는 해운대, 송정, 기장, 일광을 거슬러 올라가는 빼어난 바닷가 절경을 보기 위해 낭만주의자들이 가끔 이용하는 그저 그런 노선이다.

속절없이 가버린 젊은 날

이 존재감이 없는 기차 노선은 훗날 이 땅의 중년 세대를 울리는 대중가요의 결정적인 모티프가 된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란 노랫말은 이 기찻간에서 탄생한다. 듣는 이에게 불현듯 아득한 옛 생각에 잠기게 하는 노랫말이다. 검은 교복, 얼룩무늬 교련복에 양은 도시락을 담은 김치 국물 밴 가방을 옆에 끼고 통학하던 그런 세월을 느닷없이 추억하게 한다. 속절없이 가버린 젊은 날을 반추하게 하는 그런 노래다.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는 바로 이 땅의 기성세대를 위무하기 위해 태어난 노래다. 기성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질곡에서 더러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대개는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온 세대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어울린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노래쯤이나 된다고 할까. 그래서 아마 이 노래를 듣는 중년들은 저마다의 옛 생각에 잠을 못 이룰지도 모르겠다.

낭만에 대하여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랑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진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는 동래군 일광면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론 부산이다. 부친은 29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국회의원(2대 민의원)에 당선된 최원봉이다. 1950년 최백호가 태어나던 바로 그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길을 걸었다. 6·25전쟁 중 북진하던 연합군(터키군) 트럭과 최원봉이 탄 지프가 충돌하는 사고가 났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정치적 암살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가족들은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광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유복자 격인 최백호를 홀로 키웠다. 그래서 일광역에서 동래를 거쳐 부산 서면을 오가던 동해남부선이 최백호에겐 청소년기의 기억을 몽땅 가지고 있는 존재다. 하지만 일광역 또한 흔적도 없다. 첫사랑 그 소녀를 만나는 설렘으로 기차에 올랐던 역 광장은 공설 주차장으로 변해 있고, 건널목에는 한 무리의 핏빛 칸나가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구한말인 1898년 개교한 동래중학. 일광에 살던 최백호가 기차로 통학하며 다녔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은 시절

그 시절, 이른 아침 일광역을 출발한 완행열차는 남부 동해 바닷가를 한참 달려 동래역, 부전역에 단발머리 소녀와 여드름이 가득한 10대들을 토해놓았을 것이다. 느릿느릿 달리는 통학길 완행열차에서 그는 첫사랑 그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박경희, 살아 있다면 그녀도 초로의 할머니가 되어 있을 터이다. 이 대목에서 최백호는 자신이 남몰래 혼자 좋아했고 또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흐른 까닭에 이제는 이름을 밝혀도 좋을 것이라고 껄껄 웃는다. 더구나 그녀는 아마 자신이 최백호의 첫사랑 대상인지조차 모를 것이라고 고백한다. 10대의 수줍음과 설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대목이다.

기차 통학생 최백호가 다니던 부산 서면과 동래 일대는 그의 신산한 삶의 한 시절을 차지한다. 동래중을 통학하던 그는 훗날 스무 살 나이에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결핵으로 군대에서조차 쫓겨난 20대 초반의 대책 없는 청년 최백호는 반거지 신세였다. 유일한 버팀대였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의 그 시절, 밥만 먹여준다면 뭐든 다 했다.

서면에 있던 동보극장에 들어가 극장 간판 그리는 일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간판도 그렸다. 그 시대 청춘의 로망이던 올리비아 허시가 나온 1968년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니노 로타가 작곡한 “what is a youth”로 시작하던 주제곡이 그 시절의 상징 음악이었던 바로 그 영화다. 고달픈 시절, 극장 간판을 그리던 솜씨는 그를 지금 꽤 잘나가는 아마추어 화가로 거듭나게 만든 계기가 된다.

동래시장. 최백호의 10대 시절이 오롯히 녹아 있다.

‘낭만에 대하여’ 노랫말에 등장하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부산 동래시장 입구에 있었다. 동래시장은 그가 가진 것이 없어 굶주릴 당시 청춘을 저주하며 자주 들락거리던 거리다. ‘궂은 비 내리는 날/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던 바로 그 거리다.

동래는 오랫동안 부산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이 일대를 다스리던 관헌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곳도 바로 동래다. 그러나 인근 대형 할인점에 밀린 동래시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좁은 골목길엔 이 지역 명물인 돼지국밥집만 빼곡하고 싸구려 잡화를 파는 가게들이 무심한 가을 햇볕에 졸고 있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흔적조차 없고, 시장 입구에 자리한 남루한 커피숍에는 초로의 신사 몇몇이 다방 마담과 수다를 떨고 있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스피커에서는 옛날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스피커 모퉁이에 ‘롯데 파이오니아’라는 로고가 선명하다. 맞다. 중년 세대에게 꽤나 익숙한 전축 상표가 아니던가. 갑자기 “When I was young/ I′d listened to the radio/ Waitin′ for my favorite songs…”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 가 불쑥 흘러나온다. 1970년대가 다방 안을 가득 채우더니 휘돌아 나가는 느낌이다.

 

Yesterday once more

“부산 동래에 다방이 하나 있어요. 내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우연히 갔던, 비가 억수로 오던 날, 우산도 없이 쑥 들어간 다방인데, 손님도 없고. 다방 구석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마신 거죠, 음악다방도 아닌 그냥 다방에서. 그때 색소폰 음악이 하나 들려오는데, 너무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여자 종업원에게 LP 재킷을 보여달라고 해서 보니까, 에이스 캐논의 ‘Laura’라는 연주곡이었어요. ‘바바밤~’ 이렇게 시작하는, 그걸 한 스무 번 이상은 들었을 거예요.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서 만든 노래예요.”

그는 오래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동래시장과의 추억을 이렇게 들려줬다.

밤늦은 항구도 동래시장과 함께 이 노래의 주요 배경이 된다. 부산항 제3부두 선착장이다. 그가 곤고했던 시절 광복동 일대 통기타집을 전전할 때 가끔씩 들르던 제3부두는 지금은 국제선 선착장이 되어 있다. 그는 그 시절, 한 일본인 친구를 그야말로 난생처음 배로 떠나보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사연이 노랫말이 된다.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라는 그의 권유는 항구를 모르는 내륙 사람들에게 아련한 그리움의 이미지를 그려 보인다.

‘낭만에 대하여’는, 일단은 슬픈 노래다. 젊은 시절 들어서는 노래가 주는 깊고도 유장한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중년들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노래다. 노래는 듣는 이에게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어서 생각하라고 속삭인다. 지나간 시절을 조용히 생각하니 그것이 첫사랑이었다는, 그런 말들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그렇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렀다. 세상 모두 우리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날아 가고팠고 뛰어들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던 숨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생각하게 하는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다. 뒤돌아보면 모두가 그립고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아쉬운 시간들이다. 돌아가고 싶은 그런 시절에 대해 추억해보라고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이 땅의 중년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을 어찌하겠는가. ‘Yesterday once more’는 노랫말에만 있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 아니다. 정도 흐르고 그리움도 흐른다. 낭만은 아득하고 추억마저 긴긴 세월 속에 야위어간다.

 

뒤돌아보면 그립고 생각해보면 아쉬운 시간이 누구에겐들 없으랴.
‘낭만에 대하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중년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을 추억해보라고 속삭인다.

 
▲ 가요 ‘낭만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동래시장 입구 나들이 커피숍. 1970년대 스타일이 오히려 낯설다.

1 돌아올 사랑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는 들어봐야 한다는 부산항 제3 부두.

2 동해남부선. 해안가 절경을 보고 싶은 젊음들이 삼삼오오 찾는 이른바 낭만 열차다.

3 일제 때인 1934년 건립된 동래역은 청기와를 얹은 지붕의 시각적인 아름다움 등이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고 최근 철도기념물로

   지정돼 영구 보존된다.

4 부산의 중심가인 충무동 앞바다. 가수 최백호는 20대 시절 이 일대 밤업소에서 노래를 불러 허기를 달랬다.

 

 

화려했던 청춘은 갔다 그 즈음 우린 무얼 했던가

김광석 ‘서른 즈음에’

 

서른을 많이 넘지 않은 이는 노랫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서른 즈음’의 사랑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은 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들은 그 슬프고도 시린 노랫말에 잠을 뒤척인다.
서른 즈음이 이토록 그립고 사무치는 건 황폐한 현실 때문일까.

그림 속 김광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인.

민주화란 말이 낯설었던 1990년대 초, 나는 신촌의 한 여자대학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최루탄 냄새가 여전히 매캐하고, 그로 인해 강요된 눈물이 멈추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날 결혼식의 가장 큰 이변은 축가였다. 초대된 소프라노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다. 칼날 같은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창살 앞에 네가 묶일 때 살아서 만나리라”로 끝나는 순간, 하객들은 숙연해졌다. 축가를 부른 소프라노는 아마도 ‘푸르른 솔’처럼 꿋꿋하게 결혼생활을 잘 하라는 의미로 그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결혼식 분위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나는 그 노래가 노래패 노찾사의 집단 창작곡이란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누가 만들고 불렀는지 알지 못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노찾사의 노래들은 내 기억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절절이 녹아드는 휴머니즘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왁자한 술자리에서 우연히 노찾사의 노래들을 다시 듣게 됐다. 그리고 ‘서른 즈음에’를 듣는 순간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궁금했다. 이처럼 기막힌 노랫말의 노래를 이다지도 유장하고 간절하게 부른 가수가 누군지를. 그는 바로 노찾사의 김광석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김광석이라는 요절 가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의 어머니 세대에게 매력적인 저음을 자랑하던 배호가 있었듯, 7080 또는 386 세대에게 광주 출신의 포크 가수 김정호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김광석의 등장과 사라짐은 배호나 김정호의 그것과는 분명 차별된다. 인터넷의 발달로 그의 죽음은 그의 팬들에게 동시대적인 리얼리티를 주고 있고, 엄청난 슬픔과 상실감을 안긴다. 그런 김광석이 이제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유튜브로, 수많은 블로그로, 그리고 현실공간에서는 대구 시내 김광석거리와 서울 대학로의 김광석 부조물에서 그는 살아 숨 쉰다.

김광석은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가객이지만 그런 그도 딱 한 가지 단점이 있다고 팬들은 말한다. 훌륭하지 않은 곡이 없다는 게 단점이라는 것이다. 그의 노래는 서정적이고 소박하고 인간미가 넘친다. 하지만 그는 가성이나 기교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시대정신에 뿌리를 둔 휴머니즘이 절절이 녹아든다.

벤치에 앉은 주름진 할머니의 서른 즈음은 어땠을까.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알려진 그는 1964년 1월 대구 신천변에 위치한 방천시장의 시장골목에서 태어나 시장통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대광고를 거쳐 명지대에 입학하며 노찾사 창단 멤버로, 또 ‘동물원’의 멤버로, 그리고 김민기와 음반 작업을 하면서 ‘가객’의 길에 들어섰다.

가수보다는 가객이란 말이 그에게는 더 어울린다. 164cm의 작은 키, 50kg을 넘지 않는 소박한 몸집에다 건강 또한 좋지 않았던 탓에 그는 ‘반토막’이나 ‘파김치’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는 그의 별명 파김치에서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담가본 사람이나 먹어본 사람은 안다. 빨간 양념에 버무려진 때깔 나는 파김치가 얼마나 빨리 싱싱함을 잃고 제풀에 지쳐 한순간 잦아드는지를. 가수 김광석은 강하지 않은 자아로 노래를 위해 살다가 상황이 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파김치가 그런 것처럼.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문을 연 대구 교동의 국일따로국밥. 먹을 것 변변치 않은 대구에서 꽤 유명한 먹거리다.

‘파김치’가 되어 들어보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대구 방천시장에 있는 ‘김광석거리’를 찾았다. 방천시장은 대구 중심가를 흐르는 신천의 방죽 옆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시장 입구에 내리면 허름한 골목 안에서부터 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대구 사람들이 그래도 적지 않은 공을 들여 조성한 거리다. 흐린 늦가을, 수많은 청춘이 그 어둡고 흐린 기다란 골목길을 재잘거리며 오간다.

거리 낙서판의 낙서가 질문하고 답한다. 누군가 ‘김현식이나 유재하처럼 폭발적인 가창력이나 짙은 호소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김광석의 매력은 무엇이냐’고 쓰니 다른 낙서판 평자가 이렇게 답을 달았다. ‘기분 좋을 때 들으면 그의 노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치고 피곤하고 그래서 슬프고 외로울 때, 몸과 마음이 모두 파김치가 되어 김광석의 노래를 들어보면 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눈시울을 적셔보면 김광석의 진가를 알게 된다’고.

한때는 대구 제일의 싸전(쌀전)이 있었다는 이 시장통은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 이제는 화려했던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길쭉하게 나 있는 ‘김광석거리’가 시장통을 힘겹게 받치고 있다. 여기저기 김광석을 엮어놓은 간판들이 시장 곳곳에 무성하다. 포장마차에서 만난 신범식 방천시장 상인회장의 자랑은 대단하다. “여름 휴가철이면 시장통이 꽉 막히도록 방문객이 철철 넘친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는 정작 김광석의 노래가 왜 좋은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칠순에 가까운 나이여서 그렇다며 미안스레 고백한다.

낮이 노루 꼬리만큼 짧아지는 초겨울, 흐린 해가 나가떨어지고 저녁이 되자 시장통 여기저기에 가설무대가 들어선다. 조악한 네온사인 불을 머리에 이고 김광석을 좋아하는 청춘들이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거리 선술집의 메뉴도 노래 제목들이다. 보리비빔밥 ‘이등병의 편지’는 3000원, 순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한 접시는 5000원이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음식 삼아 자신의 몸 안에 꾸역꾸역 쑤셔 넣고 취해서 돌아간다. 왁자지껄한 거리, 그러나 잠시 정적이 찾아온 ‘김광석거리’에 ‘서른 즈음에’가 고요히 울려 퍼진다. 서른을 많이 넘지 않은 사람들은 노랫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서른 즈음에 사랑에 내동댕이쳐져 뜨거운 순대국밥을 허겁지겁 먹어본 사람은 안다. 그리고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들은 ‘서른 즈음에’가 주는 그 슬프고도 시린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노래를 듣기 전에는 치기 어린 사랑 투정이라 지레짐작했을 그 노래가 얼마나 가슴을 치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떠나간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간다’고 그는 살아생전 예감했다. 하지만 ‘일어나’란 제목의 이 데카당스한 노래를 불러본 사람들은 대개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노래 끝 대목에 가서는 갑자기 합창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폭탄주에 취해 횡설수설하거나, 술에 못 이겨 쭈그린 채 졸던 사람들도 홀연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노래는 말미에서 절망에서 희망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지만, 그러나 돌아오지 못할 길을 그는 서른을 갓 넘겨 스스로, 그리고 서둘러 떠났다. 그런 그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서른 즈음에’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 서른 즈음이 그립고 사무치는 것은, 지금의 시절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때문이고, 청춘이 화려했다는 것은 그 좋은 시절이 다 가버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올해도 다 갔다. 마음은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머물고 싶은데 시간은 어김없이 한 해 끝자락에 우리를 야멸치게 세워두고 있다. 살아 한 시절, 김광석은 불교방송에서 ‘밤의 창가에서’란 음악 프로를 진행했다. 그는 꼭 “행복하세요”라는 말로 마무리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그의 노래는 아프고 쓸쓸하고 서늘하다. 그의 노래에선 고단한 삶의 냄새가 난다. 나이 들어 쓴 소주 한잔 입에 털어 넣고 들어본 사람은 안다. 늦가을, 그의 노래가 얼마나 가슴을 진저리치게 하는지를.

거리의 악사가 저 혼자 노래 부르고 있다.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그는 떠났고 살아남은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서른 즈음에’ 잔치는 끝났다.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서른을 고비로 점점 더 빨리 돌아간다. 생각할수록 김광석(1964.1~1996.1)이 그립다.

 

기분 좋을 땐 알 수 없다. 김광석의 노래는 지치고 피곤하고, 그래서 슬프고 외로울 때 들어야 한다. 노래를 듣고 눈시울을 적셔봐야 그의 진가를 알게 된다.
 

1 대구 김광석거리에서 찰칵 셀카를 찍어본다.

2 1km 남짓한 김광석거리에 밤이 찾아왔다.

3 타지에서 온 연인이 김광석 그림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다.

1 김광석을 추억하며 벽화거리를 찾은 여행객들.

2 이름하여 ‘김광석 카페’, 메뉴도 김광석 노래 제목으로 달았다.

3 서울 동숭동 대학로 ‘학전’ 앞의 김광석 부조. 2008년 세워졌다.

4 돈 많이 벌어 마흔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 하나 사서 세계일주하고 싶다던 그는 서른을 갓 넘겨 우리 곁을 떠났다.

 

 

서울 간 ‘오빠’가 감옥 갇힌 ‘임’으로

박태준 ‘오빠 생각’

 

열두 살 최순애는 서울 가서 소식 없는 오빠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오빠 생각’을 어린이 잡지에 투고했다. 이 시에 감동받은 이원수가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냈다. 10년간의 연애편지 교환 끝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이원수는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과 동시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오빠 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은 생전에 최순애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만년의 최순애와 이원수 부부. 최순애는 ‘오빠 생각’을, 이원수는 ‘고향의 봄’이란 국민노래를 탄생시켰다.

늦가을, 쓸쓸해진 사람들의 가슴을 사로잡는 노래가 있다. “가을에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로 시작하는 노래가 우선 떠오른다. 고은의 시에다 김민기가 멜로디를 붙인 ‘가을편지’다. ‘낙엽이 쌓이는 날에는 외로운 여자가 아름답다’는 노랫말에 먹먹해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젊은 사람에게는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라며 윤도현이 부른 ‘가을 우체국 앞에서’란 노래도 있다. 또 누구는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을 떠올리겠다. 좀 고상하거나 고상한 척하는 사람은 이브 몽탕의 샹송 ‘고엽’이나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노래를 뛰어넘는, 이른바 한국인의 가을 노래가 있다. ‘오빠 생각’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이 노래보다 한국인의 가을을 절절하게 읊은 노래가 있을까. 딱 잘라 말해 없다고 봐야 한다. 노래는 ‘비단구두’ ‘말 타고 서울 가시고’ ‘뜸부기’ 등 토속적인 말과 더불어 우리 민족 서러움의 감성을 ‘오빠’라는 아늑한 이미지로 대변한다. 그래서 반세기가 넘도록 많은 사람이 애창했다.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

10대 소녀들이 대중스타에게 무조건 갖다 붙이는 ‘오빠’와는 전혀 다른 이 노래 속의 ‘오빠’는 누구일까. 가장 한국적인 비애와 그리움의 표상이 오빠가 된다. 그래서 노래는 동요로 출발했지만 조용필, 송창식, 이선희, 구준엽을 비롯해 소프라노 조수미 등 수많은 쟁쟁한 가수가 저마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불렀다. 이는 ‘오빠 생각’이 곧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애국가’나 ‘고향의 봄’ 못지않게 대중적인 인지도와 호소력을 가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노래 속의 오빠는 과연 무엇 때문에 서울로 갔을까. 일제에 논밭을 빼앗긴 농촌의 젊은이가 어린 누이동생을 두고 돈 벌러 갔을까, 아니면 공부하러 갔던 것일까, 또는 독립 투쟁하러 만주로 떠났을까. 돌아올 기약 없는 오빠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이의 가슴속에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지는’ 이 노래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렇듯 슬프게 작곡됐을까.

그러나 노래의 풍경은 상상은 가지만 구체적으로 그려내기는 어렵다. 특히 1925년이라는 작사 연도가 나타내듯 이 노래의 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기록으로 보면 가사는 아동문학가 최순애 선생이 만들었고 멜로디는 박태준 선생이 붙였다. 1990년대 말 타계한 최순애 선생은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고(故) 이원수 선생의 부인이다. 1925년 늦가을, 최순애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시 방정환 선생이 펴내던 잡지 ‘어린이’에 한 편의 동시를 투고했다.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시작(詩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당시 나에게는 오빠 한 분이 있었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따라다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그런 오빠를 그리며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보면서 울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쓴 시가 바로 ‘오빠 생각’이었다.”

동시 ‘오빠 생각’을 지은 최순애가 살던 수원 장안문 근처. 수원성 복원사업으로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박태준의 노래비 앞 탐방객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오빠 생각’을 유장하게 그리고 구성지게 불렀다.

 

최씨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증언했지만, 오빠 최영주가 광복 직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제는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최순애와 아동문학가 이원수 간의 로맨스다. 이듬해 가을 ‘어린이’지에 게재된 이 시를 읽고 이원수가 감동을 받았다. 이원수는 요즈음 말로 ‘필이 꽂혀’ 열세 살 소녀에게 편지를 띄우기 시작한다. 당시 수원에 살던 최순애와 멀고 먼 지리산 골짜기 경남 함안에 있던 이원수의 편지 교환은 차츰 열기를 띠게 되고 드디어 결혼을 기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0여 년간 연애편지를 교환한 끝에 1935년 첫 대면을 약속한 날 이원수는 문학 서클의 독서회 사건으로 일본 고등계 형사에 체포당해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최씨는 이 대목에서 “서울에 간 오빠를 기다리며 부르던 노래 ‘오빠 생각’이 옥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노래로 변해, 남몰래 부르며 울었다”고 회고했다. 요즈음 말로 고무신을 바꿔 신지 않고 오매불망 일편단심 기다린 것이다. 시 발표 이후 10여 년 동안의 ‘오빠 생각’이 ‘임 생각’으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과수원 집 딸인 최씨는 유난히 코스모스를 좋아해 과수원 언덕에 가득 심어놓고 이원수의 출옥을 기다렸고 1년 뒤 이씨가 석방되자마자 결혼했다. 요즈음 세대에게는 믿기지 않을 순애보다.

작곡의 기본도 모르고 만든 노래?

노래를 만든 이는 박태준이다. 박태준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로 시작되는 이은상의 시에 곡조를 붙인 ‘동무생각(사우·思友)’의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음악의 개척자다. ‘오빠 생각’은 시로 발표된 바로 그해 박태준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박태준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 문예교사로 있었다. 그는 ‘오빠 생각’을 작곡한 후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기로 결심,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를 졸업한 뒤 26년간 연세대에 재직했다. 그 어렵던 시절, 선교사 덕분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박태준은 2년 후배인 현제명과 더불어 근대 음악계의 선구자쯤으로 인정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현제명과 박태준이 같은 대구 출신에다 계성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이어 연세대 교수까지 함께 한 기이한 인연을 가졌다는 점이다. 박태준의 음악 활동은 동요에서 비롯된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에 이어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가곡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오빠 생각’을 비롯해 ‘사우’ ‘책상 위의 오뚝이’ 등은 작곡의 기본도 몰랐던 20대 초반에 지은 것들이다.

노래 ‘오빠 생각’은 유장한 곡조에다 비장미까지 갖춰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오빠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겨레의 마음으로 제각각 해석되며 퍼져나갔다. 가사의 서정성과 토속성, 그리고 한국인의 한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사랑받던 동시는 노래로 불려지면서 그야말로 국민가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요를 국민가요쯤으로 불리게 한 두 사람, 박태준과 최순애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박태준의 부인 김봉렬이 증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루는 그 양반이 어린이 잡지를 한 권 들고 와 ‘뜸북뜸북 뜸북새’ 하며 읽더니 곡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시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더니 결국 그날 밤 노래로 만들더군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요.”

최순애도 박태준 선생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며, 방송국을 통해 기별이 있었지만 어떤 급한 사정으로 만남이 이뤄지지 않아 끝내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오빠 생각’의 흔적은 찾기가 쉽지 않다. 최순애의 고향 수원 북수동 생가터 격인 과수원은 수원성 복원사업으로 인해 아무런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최순애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향 수원을 떠나 서울 관악구 남현동에 살았다. 그래서 말년에 살던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이웃들이 최순애의 행적을 간간이 증언해 준다. 그는 한동네 살던 미당 서정주와 내왕이 잦았다고 한다. 서정주가 장난스레 붙인 닉네임이 ‘뜸부기 할머니’다. 이런 연유로 오랫동안 최순애는 ‘뜸부기 할머니’로 불리다가 1998년 조용히 타계했다.

 

대구 사람들의 사랑

그래서 그런지 ‘오빠 생각’의 흔적은 작곡자의 고향인 대구에 주로 나타난다. 대구시가 공을 들여 만든 대구 근대 문화골목에 들어서면 박태준의 흔적이 곳곳에 등장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비도 있고, TV방송 드라마로 안방극장 전파를 타 널리 알려진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도 등장한다.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박태준에 관한 기록과 흔적이다. 그 속에는 ‘오빠 생각’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대구 근대 문화골목을 걷노라면 대구 사람들은 ‘오빠 생각’을 자기 고장의 노래로 여기는 듯한 느낌이 문득 든다. 그래서 해마다 ‘오빠 생각’ 노래 콘테스트도 열리고 대구 시내 곳곳에 ‘오빠 생각’ 노래비도 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빠 생각’은 인구에 회자되는 클래식 포크 같은 노래이지만, 오늘날 생각하면 가사 내용이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노래다. 노래는 일제강점기 어린 소녀의 의식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이었나를 짐작게 한다. 8분의 6박자의 노랫가락에 나타난 애상조의 멜로디는 결코 잊히지 않으면서 오늘날에도 만인의 노래로 애창된다. 뜸북뜸북 뜸북새가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우는 깊은 가을, 누구는 노래 ‘오빠 생각’을 가만히 부르며 눈시울을 적실지도 모르겠다.

한 해가 간다. 마음은 아직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서성거리는데 시간은 어김없이 한 해 맨 끝자락에 사람들을 야멸치게 세워둔다. 떠나보내지 못할 미련과 안타까움이 남았지만 우리는 ‘나뭇잎이 우수수수 떨어지는’ 이 가을을 뒤로하고 떠나는 한 해를 보낼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12월, 저마다 가야 할 먼 길이 남아 있는 한 해의 끝자락이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박태준도 최순애도 가고 없다. 올해가 최순애 선생(1914~1998) 탄생 100주년이다.

노래는 수많은 그림으로 그려졌다. 노래 ‘오빠 생각’을 형상화한 그림.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이 노래보다 한국인의 가을을 절절하게 읊은 노래가 있을까. 노래는 ‘비단구두’ ‘뜸부기’ 같은 토속적인 말과 더불어 우리네 서러움의 감성을 ‘오빠’라는 아늑한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래서 반세기 넘도록 많은 이가 부르고 또 불렀다.

1 1920년 숭실전문에 재학 중인 대구 계성학교 출신들, 앞줄 중앙이 박태준, 맨 왼쪽이 현제명이다.

2 박태준이 다닌 대구 계성학교 본관, 1906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애덤스가 설립했다. 김동리, 박목월, 현제명 등도 이 학교를 다녔다.

1 대구 계산동 청라언덕의 박태준 노래비.

2 이은상의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 속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 애덤스의 고풍스러운 옛 저택.

3 1915년 계성중학 재학생과 교직원. 1911년에 입학한 박태준과 1913년 입학한 현제명이 사진 속에 있지만 확인해줄 사람이 모두 타계해 알아

   보기 힘들다.

4 박태준 노래비 근처에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 고택.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김민기 ‘아침이슬’

 

서울대 미대 1학년생이 히피처럼 시간만 축내며 복학을 기다리다 ‘그냥 그저 작곡’한 노래.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그런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는 1970~80년대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고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노래로 남았다. 대중에게 사랑받은 최초의 혁명가인 셈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씀이다. 특히 노래는 그렇다. 노래는 인간의 삶 깊숙이 배어 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인간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인간은 저항할 때도 노래를 부른다. 대상은 주로 군림하는 세력이다. 왜냐하면 노래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빨리 상징적인 의미를 전파하거나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무왕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는 ‘서동요’, 1894년 동학혁명 때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나라 뺏긴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아리랑’까지, 노래는 힘이 세다. 대중의 애환, 저항적 이데올로기를 담은 노랫말은 때때로 지배세력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저항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특정 세력으로부터는 절대적인 사랑을 받지만 대중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저항의 노래이면서도 운동권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노래, 바로 ‘아침이슬’이다.

‘아침이슬’은 386에게는 하나의 상징 노래쯤 된다. 그 시절 강촌이나 대성리 등 단골 엠티 장소에서는 해가 중천에 있어도 ‘아침이슬’의 가락은 마르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당국의 금지조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래는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그렇게 불렸다.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침이슬’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아침이슬’을 부르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때론 뭔가 불끈하는 것이 솟아오름을 느끼게 된다. 종국에는 목이 메는 특이한 노래다. 이른바 비장미의 극치다.

그러나 노래는 오랫동안 방송 금지곡으로 묶였다. 가사 중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부분이 염세적이란 이유였다. 일부에서는 붉은 태양이 북한 김일성을 연상케 한다는 식으로 의미를 확장하기도 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맘 여린 여학생들이 흐느끼곤 하던 그런 노래다.

지난 시절, 저항 노래의 상징처럼 돼버린 ‘아침이슬’은 치열한 운동성과 역사성에 비해 의외로 단순한 동기에서 만들어졌다. 지난 30여 년 동안 숱한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행진가로, 때로는 진혼곡으로 불리며 이 땅의 고통 받는 많은 이를 위로했던 노래의 탄생은 지나치게 맨송맨송하다. 1970년 봄 경기고를 거쳐 당시 서울대 미대 회화과 1학년에 다니던 김민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낙제를 당해 하릴없이 히피처럼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지금은 대학로로 불리는 동숭동 일대를 맨발로 배회하며 기행을 일삼던 그는 그 시절 풍미했던 실존철학에 빠져 들었다. 그런 그가 새 학기의 복학을 기다리다가 ‘그냥 그저 작곡’(그의 표현대로)한 것이 ‘아침이슬’이다.

해방구가 된 대학로의 주말 밤 풍경, 도로 전체가 인파로 넘쳐난다.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굴절과 왜곡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노래의 탄생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당시 갖가지 화제를 뿌렸던 김민기는 지금도 본격적인 작곡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재미 삼아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굳이 덧붙인다면 자신이 전공하던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꿨을 정도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제 이 말은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노래 ‘아침이슬’을 듣거나 함께 부르노라면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이 하나의 풍경화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노래는 작곡도 중요하지만 누가 불렀느냐도 중요하다. ‘아침이슬’은 김민기 자신이 녹음한 데 이어 그의 서울 재동국민학교 동창생인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로 녹음된다. 음울하고 저항적인 가사와는 대조적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곧바로 1970년대 우울한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 ‘아침이슬’은 기성세대에게 데모, 휴학, 대학문화, 동숭동, 학림다방 등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구제품 군복을 입고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를 고민하며 부르던 그 시절의 대표 노래였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얼마 뒤 10월 유신을 맞아 금지곡으로 묶여 제도권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다시 들리게 된 것은 1987년 이른바 ‘6·29 선언’ 이후다. ‘아침이슬’의 방송금지 사태는 참으로 희화적이다. 가사 맨 처음 등장하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이 1970년대 당시의 유신정권을 의미한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 금지 이유였다.

서울 재동초등학교.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작곡해 자신의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에게 부르게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침이슬’은 1970년에 발표됐고, 유신은 1972년 10월에 선포됐다. 금지하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황당한 이유쯤 되겠다. 하지만 이 같은 공백기 속에서도 ‘아침이슬’을 비롯해 김민기가 만든 많은 노래는 1970년대를 관통한다. 민중의 사랑과 보호 속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활화산처럼 번져나갔다. 금지곡으로 묶인 덕분에 오히려 그의 음반은 천정부지의 고가로 팔렸다. 또 공장의 야유회나 대학가의 캠프에서 자동적으로 불리던 통과의례의 노래였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음악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곡’으로 찬사를 받던 그의 노래는 발표되는 족족 방송 금지되고 판금됐다. 이런 이유로 그가 만든 많은 노래는 일단 ‘김민기’라는 이름 때문에 오랫동안 발표될 수 없었다. 자연히 그는 자신의 곡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보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 발표 이래 1980년대 중반까지 17년 동안 노래 때문에 연행과 활동금지를 되풀이당해왔다. 그의 노래 뒤에는 늘 폭압적인 정권의 탄압과 그에 맞서는 민중의 사랑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농촌으로, 또 폐허가 된 탄광촌으로 자리를 옮기며 노래를 만들어왔다.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꽃피우는 아이’ ‘해방가’ ‘우리 승리하리라’ 때문에 이튿날 새벽 일찍 동대문경찰서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거치른 벌판의 푸르른 솔잎처럼’도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금지됐다.

특히 보병 제12사단에 소총수로 복무할 당시 정년 2개월을 남겨놓은 늙은 탄약 담당 선임하사의 시름을 노래로 옮긴 ‘늙은 군인의 노래’는 슬픈 노랫말과 비감 어린 곡조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로 부상했다.

 

만드는 족족 금지곡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군 생활이 워낙 험난해 ‘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알려진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군 생활을 할 때 탄생한 노래다. 정년을 앞둔 선임하사가 막걸리 두 말을 내고 의뢰해 만든 곡. 30여 년 군 생활을 마감하는 노병이 토로한 국방색 제복의 서러움에서 모티프를 얻어 노랫말과 곡을 붙였다고 한다. 병영에서 암암리에 애창되던 이 노래도 곧 금지곡으로 지정됐지만 오히려 일반인에게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음울하고 어려웠던 시대, 강남 룸살롱 숙녀들까지 애창, 졸부들의 호화 주석(酒席)에 무언의 반항을 했으며 민주화에 목마른 동남아 국가들에 수출되기도 했다.

군 사기 저하와 군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금지됐지만, 노래는 서정성,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는 보기 드문 애잔한 멜로디로 대학가, 재야 운동가, 노동계의 큰 호응을 얻으며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다. 기이하게도 금지 조치가 혹독할수록 그의 노래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갔다. 비록 방송에서 퇴출되고 음반 발매는 금지됐지만, 이 노래는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좋은 시절에는 잊혔다가 삶이 고통스럽고 시대가 암울하면 먹먹한 가슴으로 부르는 기구한 운명의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였다. 지금의 잠깐 유행하는 걸 그룹의 댄스 음악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군인 대신 교사, 농민,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불리면서 민초의 삶의 현장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얼마 전 KBS ‘불후의 명곡’에서 가수 홍경민이 대형 중창단과 함께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날 이후 김민기의 구닥다리 노래들이 연달아 유튜브에 오르는 등 신세대에게도 리바이벌 붐을 일으켰다.

또 다른 전설적인 노래는 ‘공장의 불빛’이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악명 높은 동일방직 똥물테러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공장의 불빛’은 당국의 눈을 피해 은밀히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됐지만 곧바로 압수당했다. 김민기의 노래는 이처럼 늘 통제를 받았다. 노래를 통제해야 할 필요성은 지배세력의 통치 정당성이 떨어질 때 더욱 커진다. 우리 노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5공 신군부 시절 노래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금지곡의 역사를 훑는 게 곧 우리 사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동숭동 시절 서울대 본관 건물, 무성한 마로니에가 제 무게에 겨운 듯 넓은 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럼에도 김민기는 남들에게 그러한 일들을 설명하고 또 변명하는 데 완강하게 반발한다. “노래라는 것은 만들어지면 부르는 사람이 임자지, 작곡자는 철저히 제3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다 못해 혐오한다. 정작 도가(道家)의 도인 같은 초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아침이슬’도 정작 자신은 이한열 군 장례식 때 듣고 비로소 그 노래가 가진 엄청난 위력과 역사성을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운구가 시작되면서 수십만이 핏발선 눈빛으로 노래를 부를 때 “소름 끼치고 온몸이 떨려와 귀를 막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민기, 그리고 ‘아침이슬’은 1970~80년대 우리 시대의 아픔을 대표하는 무한한 의미를 지닌 이름이고 노래다. 197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기성세대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는 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노래를 만들었다지만, 그가 만든 노래는 가장 의미 있는 노래가 되어 우리 시대를 관통한다.

 

 

‘아침이슬’을 부르노라면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떠오른다. 이 노래는 작곡가만큼이나 가수가 중요했다. 김민기는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에게 노래를 맡겼다. 음울하고 저항적인 가사와는 대조적인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 목소리 덕에 ‘아침이슬’은 1970년대 우울한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1 6월 민주항쟁 당시의 광화문 풍경, 거대한 시위대와 중무장 경찰 장갑차가 대치하고 있는 긴장된 순간이다.

2 이한열 군 장례식, ‘아침이슬’이 장송곡의 하나로 불려졌다.

1 대학로.

2 학림다방 실내의 낡은 마룻바닥. 세월의 흔적이다.

3 학림다방 벽의 낙서, 서울대 문리대의 축제인 학림제가 이 다방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당시 문리대생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4 6 1980년대 대학로.

5 민주화 이후 대학로의 풍경, 홍대 앞이 뜨기 전에는 서울의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였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삼등열차 타고 떠나자

송창식 ‘고래사냥’

 

‘고래사냥’은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안개 같은 시대에,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타임지를 꽂고 다니던 그 시절의 청춘들을 들뜨게 한 국민가요다.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외로움과 슬픔만이 가득 차는 올가을, 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동해바다로 떠나볼까.

동해 바닷가를 옆에 끼고 나란히 난 철도와 국도에 기차와 트럭이 엇갈리며 달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차 노선이고 국도라고 한다.

“안인숙 예쁜 젖꼭지 본 사람, 손들어봐.”

까까머리 10대 시절 국어 시간, 선생님이 느닷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순간 교실 안엔 와~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 선생님은 “아니, 소설은 입시 땜에 못 읽으니 영화라도 형님 옷 빌려 입고 봐야지”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랬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갔다가 학생 주임 선생에게 귓바퀴 잡힌 채 끌려 나오던 그 시절, 나는 영화 여주인공 안인숙의 중요 부위는 보질 못했지만, 선생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이 그 시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소설은 당연히 곧바로 읽었지만 영화는 극장에선 보지 못하고 스무 살이 넘어 어찌어찌해서 비디오로 본 기억이 남아 있다.

20대, 내가 가장 떨리는 가슴으로 읽은 소설은 역시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였다. 1984년 어느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은 대학생이던 나와 주인공들의 세대가 맞물리면서 묘한 동질감을 안겨줬다. 우울했던 1980년대 중반 늦은 밤, 하숙집 길목 가판에 있던 신문을 사 들고 읽노라면 나의 고통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 흠뻑 빠져들었다. 살벌하던 시대, 휘둘린 청춘 남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소설은 보도블록을 깨어 던지거나,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 시대와는 정말 무관한 얘기들.

하지만 사회면을 장식하던 핏빛 활자들을 보란 듯이 무시한 소설은 나를 현실과 전혀 다른 달콤한 세계로 밀어넣었다.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으로/ 남몰래 고민하던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함’도 소설을 읽는 순간만큼은 없었다. 초창기 최인호가 보여준 번득이는 감수성, 세련된 문체 등은 평범한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적합한 관형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386세대의 삶의 일부가 됐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사로잡은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였다.

소설가 최인호의 유산

그러나 격동의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그리고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 이후부터 나는 최인호의 문학에 깊은 절망을 느꼈고 그에 대한 열정은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프다고, 견딜 수 없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가끔은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문학은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 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고 한다. 험악하던 시대, 현실의 모순을 문학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점도 이해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의 글들이 몹시 서운했다. 그의 글을 열정적으로 읽으면서도 나는 점차 불편해져 갔다.

그래서 정작 지난해 이맘때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에도 그의 작가적 이력을 긍정적으로 보기엔 맘이 내키지 않았다. 당시 모든 언론이 저마다 그와의 귀한 인연을 들이대며 상찬을 늘어놓았다. ‘한국문학의 큰 별’이니, ‘청년문화의 기수’니, ‘감수성의 천재’니 하면서 이른바 저명인사들이 앞다투어 쏟아내는 그에 대한 엄청난 찬양 속에 냉정한 비판의 소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려웠던 시대, 함께 살아내지 못한 시대의 인물을 무작정 비난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죽음 앞에 일방적인 찬사를 쏟아내는 것은 부박하다. 한 시대를 같이 고민하고 풍미했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러나 한순간도 그를 존경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한 일간지 칼럼에다 작가 최인호를 냉정하게 몰아붙인 바 있다.

그럼에도 최인호가 이 땅의 386들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는 이른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유신 시절 ‘청년문화선언’(1974)에서 “전에는 침묵의 대중을 몇몇 엘리트들이 정의 내리며 주도하고 이끌었지만,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엘리트를 인정치 않는다.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문화인 것이다”라며 기성세대가 청년문화를 저질·퇴폐로 몰아붙이는 데 반박하며 이른바 통기타·블루진·생맥주 문화를 옹호했다.

그가 주장하는 청년문화의 정점에 있는 노래가 ‘고래사냥’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끈 노래다. 노래는 곧 비슷한 성격의 청춘영화의 주제곡으로 삽입되면서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이다. 일간 스포츠에 연재된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요절한 하길종이 감독했다. 영화에는 ‘고래사냥’ ‘왜 불러’가 전편에 흐르면서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 심리를 대변했으며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이 그 시절 젊음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그렸다. 장발 단속, 음주문화, 미팅, 무기한 휴강, 입대 등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에서 노래는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고래사냥, 바보들의 행진

뭐라 딱히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상황,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안개 같은 시대였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 등 상실감과 비애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노래 ‘고래사냥’은 그래서 국민가요쯤으로 여겨진다. 아직은 희소성이 있고 풋풋했던 대학가였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존재감조차 희미해졌지만 당시 고연전의 막판에서는 모두가 악에 받쳐 고래고래 함께 부르던 청춘의 노래였다.

그러나 ‘고래사냥’이 ‘왜 불러’와 함께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단골로 불리자 공윤(공연예술윤리위원회)이 금지곡으로 판정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노래를 삽입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 또한 무려 다섯 차례의 검열을 통해 술집에서 병태가 일본인과 싸우는 장면, 경찰서에서 여자의 옷을 벗기는 장면, 데모 장면 등 30분 분량이 잘려나갔다(‘한국영화 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년).

 

영화 ‘고래사냥’ 촬영지인 동해 현남항의 풍경.

노래와 영화(소설)는 모두 현실에서 찾아보기 불가능한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주제가 된다. 철학과에 재학 중인 병태는 미팅에서 영자라는 불문과 여대생을 만나 사귀게 된다. 얼마 후 영자는 병태가 돈도 없고 전망도 없다는 이유로 절교를 선언한다.

병태의 친구인 부잣집 외아들 영철은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생활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전국적으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갈 곳이 없는 대학생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데, 술만 마시면 동해바다로 고래사냥을 가고 싶다고 말하던 영철은 어느 날 정말로 동해바다로 떠나 자살을 하고 병태는 군대를 선택한다. 병태를 태운 입영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영자가 나타나 열차의 창문에 매달린 채 병태에게 입맞춤을 한다. 흥행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또 다른 오브제는 기차다. 지금의 KTX 급이 아니라 삼등삼등 완행열차가 노래의 또 다른 주인공쯤 된다.

당시 완행열차는 당연히 ‘비둘기호’다. 적자를 이유로 한 경영논리에 의해 강제 퇴출된 지 오래다. 역이란 역은 모두 멈춰 서는 완행열차. 믿기지 않겠지만 속도가 워낙 느려 간혹 날쌘 청년들은 커브 길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거나 올라타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 열차는 고급인 통일호나 새마을호를 만나면 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역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싼 운임 내고 탄 설움을 톡톡히 지불했다. 비록 느리고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열차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열차에는 인근 도시 학교로 통학하던 청소년들의 재잘거림,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는 대학생들의 설렘이 담겼다. 삶은 달걀과 푸성귀를 담은 광주리를 이고 아들 딸 집으로 가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있었고, 5일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담은 봇짐을 들고 새벽 첫차를 탄 장꾼들이 있었다. 비둘기호의 단골 승객은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였다.

그러나 비둘기호의 추억은 이제 너무 아득하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통일호나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야 했다. 그러던 가운데 통일호마저 없어졌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새마을호보다 훨씬 빠른 KTX가 나타났다.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 KTX를 이용한다. 그러나 모두가 KTX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기름과 찹쌀 자루를 걸머진 할머니나 지방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꾼은 비싼 요금을 감당할 수가 없다. 깨끗하고 쾌적한 KTX가 완행열차를 타고 고래사냥을 간다는 386세대의 추억마저 고스란히 앗아간 셈이다.

복고주의 열풍

노래 ‘고래사냥’의 주체할 수 없는 대중적 인기는 동명의 영화 ‘고래사냥’을 탄생시킨다. 역시 최인호 소설이 원작으로 1984년 배창호가 감독했다. 지금은 사라진 피카디리극장에서 상영돼 서울에서만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 그해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안성기, 이미숙, 가수 김수철이 등장하는 영화는 신군부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를 무대로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은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주제가 ‘고래사냥’은 당시 대학가가 안았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면서 특히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거지 역에 안성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왜소한 병태 역에 음악을 담당한 가수 김수철이 직접 출연했고 이미숙의 풋풋한 벙어리 연기가 관객의 호감을 샀다. 노래의 인기는 뮤지컬도 만들어냈다. 1996년에 극단 환퍼포먼스가 이윤택 연출로 9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같은 내용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다. 그러나 ‘고래사냥’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술집 뒷골목에서 술 취한 386들에 의해 이따금 불려지던 노래는 최근의 복고풍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이은 ‘응답하라 1997’ 등으로 상징되는 복고주의 열풍은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해 있던 불멸의 노래들을 다시 등장시켰다.

사실 지금의 1970년대 복고바람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세시봉’으로 상징되는 통기타 가수들과 ‘불후의 명곡’에 송창식, 신중현 등이 등장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부모 세대와 다른 정체성이 형성된 그 시절에 대한 애잔함이 아직도 호소력을 발휘하는 데 있을 것이다. 7월 5일 KBS ‘불후의 명곡’에서 정동하 · 딕펑스가 부르는 ‘고래사냥’을 보셨는가? 관중석에 앉은 중년 세대들이 악을 쓰고 절규하듯 따라 부르다 마침내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 TV를 보던 나는 무한한 슬픔을 느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타임이나 뉴스위크지를 꽂고 다니며 종로통을 방황하던 바로 그들이다. 노래 ‘고래사냥’의 배경은 당연히 가상공간이지만 현실 공간에도 엄연히 무대가 존재한다. 강원도 남애 해안에 가면 ‘고래사냥’의 무대가 있다. 미시령 터널 덕분에 서울에서 불과 두 시간 반이면 동해 바닷가다. 대관령 굽이굽이 옛길을 상상하던 나는 너무나 편리해진 터널 길에 말을 잊는다.

‘고래사냥’의 무대 남애 해변은 저 유명한 정동진역에서 조금만 올라오면 있다. 노래나 영화에 등장하는 것 못지않은 총천연색 관광열차가 해안가 파도를 내려다보며 달린다. 당연히 완행열차다. 바로 영화 속에 등장했던 그런 열차다. ‘고래사냥’의 유명세에 힘입어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만든 인공적인 장소, 하지만 사시사철 노래 ‘고래사냥’을 그리워하는 386세대의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펜션 이름도 고래사냥이고 횟집 이름도 고래사냥이다. 늦여름, 여전히 피서철임에도 인근 경포대나 속초에 비해 한적하다 못해 고적하기까지 한 남애 바다는 송창식의 또 다른 노래 ‘철 지난 바닷가’가 딱 어울릴 법한 쓸쓸한 풍경이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든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우리는 떠나야 한다.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고래사냥’은 우리더러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떠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고래는 삶에 찌든 저마다의 가슴에 숨 쉰다. 가을이다. 이 가을에는 사라지는 모든 것을 위해 한 번쯤 고개를 숙여봐야겠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지만‘고래사냥’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술집 뒷골목에서 술 취한 386들이 부르던 이 노래가 스멀스멀 살아난다. 단순한 복고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중년의 그들이 악을 쓰고 눈물 흘리며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1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떼 넘나드는 동해의 저녁, 어부들의 일손이 황혼에 더욱 바빠진다.

2 남애항 저 멀리 고기잡이배에서 조업 중인 어부들.

3 영화‘고래사냥’과 ‘바보들의 행진’의 또 다른 무대쯤 되는 묵호항의 새벽 풍경.

4 ‘고래사냥’은 386들에겐 국민가요와 같은 노래다. 남애항에선 눈에 띄는 게 고래사냥을 간판으로 한 펜션이고 노래방이다.

5 영화‘고래사냥’촬영을 기리는 표석. 동해 현남항에 있다. 사시사철 기념촬영하러 오는 386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90년대 샐러리맨 애창곡 절규하며 부른 고향의 노래

조운파 ‘칠갑산’

 

노래 ‘칠갑산’에는 한국인만의 근원적이고 숙명적인 한(恨)이 담겼다. ‘너만이라도 배곯지 말라’며 어린 딸의 손을 놓는 어머니의 비원, 단장의 슬픔이다. 대중가요와 국악가곡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노래는 1990년대 샐러리맨의 고달픈 인생을 대변하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세대를 뛰어넘었다.
이 풍진 세상에, 배고팠던 그 시절이 과거가 된다는 건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칠갑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장곡사. 좁고 깊은 계곡에 자리 잡았다

“칠갑산을 즐겨 부르고 웃음도 많고 그림도 잘 그리던 소녀 같은 분인데….”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6월 초 한 일간지에 소개된 부음 기사다. 주인공은 위안부 피해자인 배춘희 할머니. 그는 91세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세의 꽃 같은 나이에 일본군 정신대에 자원했다. 정신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배곯지 않는다는 말에 혹했다. 이후 중국 만주로 끌려가 끔찍한 위안소 생활을 겪었다.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왔으나 주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다시 일본행을 택했다. 일본에서는 아마추어 엔카(일본 대중가요) 가수로 지내다 1980년대 초반 예순이 되어 귀국했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다 6월 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위안부 할머니의 노래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배춘희 할머니가 오랜 세월 홀로 ‘칠갑산’을 즐겨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사연 많고 한 많은 할머니가 왜 유독 노래 ‘칠갑산’을 즐겨 불렀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노래 칠갑산을 한번 들어보거나 불러보는 방법밖에는 없겠다. 기성세대에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5월 KBS2 TV 방송 ‘불후의 명곡’에서 조성모가 불러 젊은 세대에도 알려지게 된다. 검은 정장 차림의 조성모는 이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위중하다며 ‘칠갑산’을 부른 이유가 아버지의 애창곡이기 때문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해 노래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칠갑산’은 지금의 세대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락과 정서가 있다. 한(恨)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인만의 근원적이고 숙명적인 슬픔을 한이라고 한다. 영어를 비롯한 나라 밖 말로는 도대체 번역은 물론이고 설명조차 잘 안 되는 이 말은 한국인의 정서를 관통한다. 한국인의 눈물, 체념, 원망 등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특히 이 말은 적극적이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의 업보와 분수로 여기며 삭여버린 분노, 체념해버린 슬픔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지금의 아이돌 그룹이 부르는 노래는 대개 경쾌한 발라드풍이거나 댄스 음악이 주류이지만, 한 시절 한국의 대중가요에는 이처럼 한 맺힌, 한 많은 노래가 풍미했다. 조용필이 리바이벌해서 부른 민요 ‘한 오백년’을 비롯해 장사익이 부른 대부분의 노래 근저에도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노래들 가운데 구전민요가 아닌 창작곡으로 한국인의 한을 절창의 가락으로 묘사해 주목받은 노래가 바로 칠갑산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의 베적삼이 땀에 젖고 눈물과 함께 김을 맨다”는 노랫말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노래는 오랜 세월 한민족과 함께한 간난(艱難)과 이에 따르는 숙명적인 슬픔을 유현(幽玄)하게 표현한다.

노래의 무대가 되는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정산면·장평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아득한 시절, 지리 시간에 듣고 배운 차령산맥에 속하며 산정에서 방사상으로 뻗은 능선이 면계(面界)를 이룬다. 계곡이 워낙 깊고 사면은 급한 데다 산세가 거칠고 험준해 충남의 알프스로 불리기도 한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칠갑산이 청양군을 동서로 쫙 갈라놓은 지형적 장애였고 한티고개로 불리는 대치(大峙)는 중요한 교통로이지만 워낙 험준해 지금도 겨울철에는 단절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 옛날 절해고도의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산은 옆구리에 유서 깊은 장곡사를 끼고 있다.

1978년 만들어져 90년대 히트

칠갑산 입구에서 길을 나선 할머니. 험한 밭일에 허리가 성치 않다고 한다.

노래를 풀이하자면 이렇다. 한적한,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깊은 계곡에 화전민 모녀가 찾아온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들은 하루 먹을 양식과 최소한으로 몸을 가릴 작은 삼베 조각을 얻기도 힘들다. 송홧가루 날리는 어느 여름날, 마침내 어머니는 아직은 귀밑머리가 풋풋한 어린 딸에게 시집갈 것을 권한다. ‘너만이라도 배곯지 말고 살아달라’는 어머니의 비원. 홀어머니에 떠밀려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는 어린 딸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 나마저 떠나면 남겨진 홀어머니가 굶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어린 소녀의 단장의 슬픔을 노래는 곡진하게 대변하는 것이다.

노래를 짓고 만든 이는 원로 음악인 조운파 선생이다. 운파(雲坡)는 호다. 구름 운, 언덕 파쯤 되니 상당히 낭만적인 분으로 짐작된다. 시인이기도 한 조운파는 테너 박인수가 부른 ‘달빛’ 등 여러 편의 창작 가곡도 발표하는 등 아직도 현역으로 맹활약한다. 386세대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 ‘연안부두’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옥경이’ 등도 그의 작품이다. 조씨는 칠갑산의 노랫말과 관련해 “논이 아닌 산비탈 밭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콩밭은 우리 민족의 곤곤했던 삶의 터전이며 포기마다 눈물 심는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한을, 슬픔을 갈무리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지금의 세대가 누리는 풍요 저 뒤편에 자리한 처절한 아버지 세대의 삶의 쓰라린 고통을 풍경화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특히 노랫말을 관통하는 ‘시집가는 어린 딸’은 민며느리 관습을 떠올리게 한다. 까까머리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고대 부족 국가 옥저에서 횡행했다는 결혼 풍습을 떠올리면 되겠다. 한자로 예부(豫婦)라 불리는 이 제도는 나이 어린 여자가 남자 집에 미리 가서 살다가 성장하면 결혼하는 제도. 대개 여자 나이 열 살을 넘기면 약혼하고 신랑집에서 머물다가 성인이 되면 결혼했다. 여성 노동력 확보가 목적으로, 고구려에 있었던 데릴사위제 풍습의 반대쯤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 같은 풍습이 나타난 가장 큰 원인이 가난이라는 데 있다. 당연히 이 관습은 상류 계층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가난한 기층 민중 사이에서 흔적을 남겨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민며느리제도가 일종의 매매혼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비례론이 대두되었음에도 하층 민중 사이에서 꽤 넓은 범위에 걸쳐 행해졌다고 기록은 전한다.

따라서 노래 칠갑산에 등장하는 홀어머니와 어린 소녀는 특별한 누구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들었던 세월 저편의 우리 어머니와 누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궁상각치우 5음계에다 일부에 양악 7음계를 접해 모두 12음계로 만든 노래는 그에 따른 반음계가 주는 유장함이 그 절절함을 배가시킨다. 1978년에 만들어진 노래는 발표 당시 일반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 대학가에 입소문으로 퍼지다가 1990년 초부터 일반인에게 알려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낸 샐러리맨이 노래방에 가면 앞다투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칠갑산이다. 처음에는 평온하게 시작했다가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다’는 후반부에 가면 모두가 절규하듯 악을 쓰듯 같이 부르던 슬픔의 노래, 고향의 노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추계예술학교 출신인 주병선이 부른 이후 국악인 김영동, 조용필 등 수많은 가수가 앞다투어 불렀고 지금도 불린다. 칠갑산은 순수 가곡과 대중가요의 어정쩡한 경계에 있다. 일부에서는 대중가요로 분류하지만 또 다른 일부에서는 국악가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서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작곡가 조운파는 이 대목에서 ‘대중가요로서는 가사가 주는 주제의식이 너무 무겁고 멜로디가 전통가락에서 따왔기 때문에 당연히 국악가곡’이라며 순수 예술 가곡임을 주장한다. 하기야 오늘날과 같은 탈장르, 융합, 통섭의 시대에 이 같은 자리매김이 덧없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칠갑산은 청양고추와 함께 충남 청양군의 상징쯤 된다. 그래서 군 전체에는 빨간 고추와 칠갑산 노랫말과 관련된 조형물이 넘친다. 매운 고추의 대명사쯤 되는 청양고추는 이제 힘을 잃어간다. 고추로 유명한 경북 청송과 영양에서 자기네 마을 이름의 머리글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워낙 경상도 음식이 맵고 짠 탓에 설득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노래 칠갑산이 청양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인정받는다. 군내 여기저기 ‘콩밭 매는 아낙네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조형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길 없는 조악한 형상물이 대부분이다. 어떤 기준도 없어 여기저기 세워진, 모습과 표정이 각기 다른 ‘콩밭 매는 아낙네상’은 찾는 이들을 실망케 하기에 충분하다. 완전히 따로국밥 조각상에 다름 아니다. 절창 가락에 걸맞은 조각상을 기대했다면 아예 찾아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그나마 노래 칠갑산을 받치는 것은 유서 깊은 사찰 장곡사(長谷寺)다. 장곡사는 이름만큼이나 오래된 절이다. 850년(통일 신라 문성왕 12)에 보조국사가 창건했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웅전 가람 배치는 2개나 있는 아주 특이한 사찰이다. 두 곳의 대웅전이 특별하다. 상·하 대웅전 건물은 두 사찰이 합쳐진 것인지, 전각이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다. 방향까지 완전히 달리하는 두 법당은 각기 소중한 불교 유물을 간직한 보물 창고다.

칠갑산 받치는 장곡사

 

장곡사 공양간에 나란히 자리한 무쇠솥.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특이한 것은 대웅전만 아니다. 뒤편 대웅전의 바닥은 나무가 아니라 8판 연화문 벽돌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보물 162호로 지정됐다.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하겠지만 엄동설한, 스님들이 냉기가 도는 벽돌 바닥에서 참선을 하고 예불을 했을 상상을 하면 한여름에도 문득 한기가 돈다. 위편 대웅전은 전각이 비좁은 느낌이 들 정도로 세 분의 부처님을 한꺼번에 모신다. 화려한 광배가 부처님을 더욱 빛나게 하는 좌상은 비로자나불과 약사불로 모두 고려시대의 철불. 고려 전통의 선명한 석조대좌 위에 자리하는 철조약사불이 한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탐방객을 지켜본다.

섬세한 조각으로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광배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국보급 문화재도 많다. 위편 대웅전의 철조 약사불은 국보 58호이고 철조 비로자나불은 보물 174호다. 아래 대웅전은 법당 자체가 보물 181호이고 법당 안 고려시대 금동약사불은 보물 337호다. 무려 국보가 둘, 보물이 4개다. 귀중한 국가문화재가 넘치도록 가득하다. 그러나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스님들조차 콩밭 매는 아낙네 못지않게 살기가 힘들었나보다. 깊은 계곡 안 한 뼘 공간에 자리 잡은 절은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장곡사를 허리에 끼고 있는 칠갑산에 뻐꾸기 울음소리가 쏴아 왔다가 아득히 사라져 간다. 길고 긴 여름날, 노래 속에 등장하는 땀에 젖은 베적삼을 걸치고 콩밭 매던 아낙네는 우리의 어머니였다. 포기 포기마다 눈물을 심던 이 땅의 어머니는 이제 할머니가 되고 하나둘 이승을 떠난다. 그래서 노래 ‘칠갑산’은 배고픔을 경험한 이 땅의 장년세대에게 어린 날의 초상과 같은 추억이 된다. 그런 시절들이 과거로 포장된 채 빛바래 간다는 것은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이 풍진 세상에 말이다.

홀어머니에 떠밀려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는 어린 딸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 나마저 떠나면 남겨진 홀어머니가 굶어 죽지나 않을까, 어린 소녀가 느끼는 단장의 슬픔이 노랫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휴게소에 위치한 칠갑산 노래비. 군내 곳곳에는 노래비가 넘친다.

2 천장호수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이 칠갑산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워낙 험해 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1 노래 칠갑산에 등장하는 콩밭 매는 아낙네상. 국내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의 표정이나 얼굴이 하나같이 달라 찾는 이를 실망케 한다.

2 장곡사 윗대웅전. 국내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대웅전이 있는 절이다.

3 밭 매는 아주머니.

4 칠갑산은 장승으로도 유명하다. 산 입구에 한 무리의 장승이 늘어서 있다.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곤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안성현 ‘부용산’

 

1947년 목포 항도여중 교사 박기동이 24세에 요절한 누이를 추모해 시를 지었다. 여기에 같은 학교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 달 밝은 밤, 빨치산들이 부르던 노래, 그래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노래. 벌교 사람들은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이 노래 ‘부용산’을 살려냈다.

부용산 자락에서 내려다 본 벌교읍내 전경. 한적한 포구였지만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개발해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몇 년 전으로 돌려보자. 부엉이바위의 비극이 발생하기 22일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고, 한나라당이 재선거에서 전패한 2009년 4월 30일 밤이다.

서울 종로구 운현궁 뒤켠 주점 ‘낭만’에 애절한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부르는 목소리는 각기 달랐으나 노래는 딱 한 가지, 대중에게는 낯선 단 한 곡의 노래를 번갈아 가며 정성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정·관계, 문화계를 움직이던 쟁쟁한 인사들.

이들이 이날 이 허름한 주점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참석자 저마다 노래 ‘부용산’을 돌아가며 부르고 또 듣기 위한 것이었다. 딱 한 곡을 두고 40여 명이 젖 먹던 내공까지 다해 노래를 부르는 해괴한 풍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술자리는 점차 숙연해져 비장감마저 넘쳐흘렀다. 부르는 이마다 제각기 간절함을 더해 각기 다른 가락으로 뽑아낸다. 어떤 이는 남도 민요조로, 또 어떤 이는 엄숙한 성악풍으로, 저마다 노래에 사연을 녹여내 ‘부용산’을 불렀고 한쪽 구석에서는 숨죽여 훌쩍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사연이 있고 무슨 까닭이 있기에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단 한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고 또 불렀던 것일까? 거슬러 본 사연은 노랫가락만큼이나 기구하고 애절하다. 한때 이 땅에서 ‘부용산’을 부르면 곧바로 당국에 끌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뒷골목 술집에서 주위를 살피며 숨죽여 노래를 불렀다. 단장이 끊어질 듯한 노래는 오랜 시절 금지곡으로 묶여 박제화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더불어 햇빛을 보고 조금씩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게 된다.

악보 없는 노래

서울 종로 운현궁 뒤켠 허름한 골목길에 위치한 낭만식당. 노래 ‘부용산’ 부르기 경연대회가 열린 바로 그 공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론인이었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서상섭 전 국회의원, 김도현 전 문화부 차관 등이 ‘부용산’을 흥얼거리다 ‘(악보가 없어) 사람마다 곡조가 다르니 누구 노래가 더 나은지 한번 겨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를 들은 이두엽 교수(군산대)가 이날 행사를 기획, 진행하게 된다. 악보마저 금지되어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온 연유로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인 노래이지만, 이참에 마음 터놓고 한번 불러보자며 ‘작당’한 것이 바로 이날 노래 한마당이었다. 이날 노래자랑은 한겨레신문에 이같이 소개되면서 알려진다.


이날 노래자랑에는 김도현씨가 심사위원장, 소리꾼 임진택씨는 사회를 맡았다. 더벅머리의 송상욱 시인. 기타의 트로트풍 선율에 맞춰 나긋한 음색으로 ‘부용산’ 가사를 곱씹었고 지역 대표라는 벌교의 쪽물 염색 장인 한광석씨는 시원시원하면서도 구슬픈 여음 남는 목소리로 박수를 받았다. 감옥에서 노래를 익혔다는 운동권 출신의 서상섭 전 의원은 낭랑한 저음을 깔았다.“…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한국전쟁 때 낙오한 인민군 장교에게 가락을 처음 들었다는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은 아코디언으로 애달픈 선율의 ‘부용산’을 들려주었고, 연주는 곧 합창으로 바뀌었다.


누가 누가 잘하나. 인사동 주점 ‘소설’의 주인인 ‘재야가수’ 염기정 씨의 차례에서 노래 마당의 흥은 절정에 올랐다. 문인들이 읊조린 노래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외웠다는 그는 매혹적인 탁성으로 고즈넉하게 ‘부용산’을 불러 열광적인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분위기가 이슥해지자 김도현 씨가 불콰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은 진보, 보수 모두 실패한 날, 누구도 이기지 못한 날입니다. 노래를 들으며 좌절과 절망을 추억하고, 희망과 낙관을 떠올려봅시다.”

이날 심사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밤늦도록 술잔 기울이며 ‘부용산’과 자기네 삶에 얽힌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용산’이 엮어낸 애잔한 풍류의 밤이었다는 게 한겨레신문이 전한 내용이다.

‘부용산’은 슬픈 노래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그 비장미에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당초 출발은 한 요절한 누이를 추모하는 현대판 ‘제망매가’쯤 되는 노래였지만 세월을 잘못 만나 1960~80년대에는 저항가요로 한 시대를 장식한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60년 묵은 구전가요 ‘부용산’은 이렇게 시작된다.

 

‘부용산’은 본디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인 박기동(1917~2004)이 24세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은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였다. 여기에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고 전한다. 우연히 두 여자의 죽음이 겹친 것이다.

작곡가 안성현은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음악가다. 그러나 그가 김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저 유명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했던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가 일반에게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교과서와 노래집에는 김소월 시, 작곡가 미상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6·25 당시 월북했으며 북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냈다고 전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노래 ‘부용산’의 작곡자는 지난 권위주의 시대,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작곡자 이름은 백지로 남게 된다.

1960~80년대 저항가요

그러나 노래는 해방 공간의 폐허가 된 시대적 정서에 맞물려 호남 전역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인기를 끌며 퍼져 나갔다. 특히 전라남도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에게는 자신들의 군가처럼 받들어지며 애창된다. 실제로 지리산, 회문산 일대 골짜기의 달 밝은 밤이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빨치산들이 워낙 구슬프게 불러대는 바람에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애초 이념과는 무관했던 이 곡이 금지곡이 된 데에는 이처럼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가 한몫한다. 사실 빨치산들도 노래에 이념성을 넣어서 불렀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가 고달파서 불렀겠지만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노래는 당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이 여파는 작곡자 안성현에게 옮겨져 1949년 안성현은 면직처분을 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해버렸다. 난데없이 유탄을 맞게 된 박기동 시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부용산’의 작사자임을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가택 수색, 연금 등을 피해 호주로 이민 가게 된다. 이 같은 연유로 지하로 깊숙이 숨었던 노래는 1960~80년대 운동권, 진보 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 저항가요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권위주의 시대, 극히 일부에게 전해지며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계기로 드디어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그 뒤 가수 안치환이 음반을 낸 것을 기점으로 한영애, 윤선애, 이동원, 국소남 등 여러 가수가 경쟁하듯 불렀지만 실체를 아는 일반인은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호남인의 애창곡인 ‘부용산’의 실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연고를 주장하는 지역 간 갈등의 씨앗이 되는 또 다른 기이한 운명을 만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래는 목포 항도여중 음악교사 안성현이 당시 사랑에 빠졌던 미모의 여제자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작곡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따라 한동안 목포의 노래로 인정받게 된다. 당연히 목포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늦게 벌교번영회가 중심이 된 열혈 벌교 주민들이 이에 반발,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노래 한 곡을 두고 두 지역이 ‘원수’가 된 상황이다. 벌교 주민들의 정성은 뻗쳤다. 목포에 빼앗긴 노래를 되찾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성금을 모아 호주로 떠난다. 호주로 이민 간 작사자 박기동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박기동 시인의 증언으로 폐병으로 사망한 누이동생을 벌교의 뒷산 부용산 자락에 묻고 오며 시를 지었고 항도여중 재직 당시 동료 교사 안성현이 노랫가락을 붙였다는 실체적 진실을 확보한 벌교 주민들은 마침내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그 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 등 크고 작은 벌교 행사에는 반드시 노래 ‘부용산’을 의무적으로 부르도록 했다. 박 시인은 1987년 ‘부용산’이 해금되고 그 뒤 노래 ‘부용산’이 재조명되자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고 노래가 벌교의 노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이후 2003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2004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 씨. 장좌리 별신굿 보존회장이기도 한 그는 부용산을 되찾기 위해 호주까지 쳐들어 갔다 온 열혈 부용산 노래 지킴이다.

벌교 주민들의 ‘부용산’에 대한 사랑은 용광로보다 뜨겁다. 노랫말이 1절밖에 없어 아쉬운 나머지 박 시인에게 청을 넣어 2절 노랫말까지 근사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지금의 2절 가사는 원곡보다 수십 년 뒤에 추가로 지어진 것이다. 주민은 성금을 걷어 벌교 뒷산 부용산 오솔길에 큼지막하게 화강암으로 노래비를 세우고 내친김에 산책로까지 조성했다.

그러나 벌교는 노래 ‘부용산’보다는 소설 ‘태백산맥’으로 친숙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가 벌교이다 보니 벌교 곳곳에는 ‘태백산맥’의 흔적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토벌대가 공짜로 머물던 남도여관(당시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나 지역 계엄사령관의 취임식 때마다 열병과 분열식이 벌어졌던 벌교 남초등학교 등이 여전히 역사를 증거한다. 남도여관을 뒤로하고 자그마하게 서 있는 산이 부용산이다. 말이 산이지 해발 192m에 불과한 동네 뒷산이다. 그렇지만 벌교 사람들에게 부용산은 정신적인 지주다. 행정관청과 번영회가 힘을 합쳐 조성해 놓은 ‘부용산 시오리 오솔길’을 오르다보면 부용산 노래비가 찾는 이를 반긴다. 이쯤 되면 외지인들은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에서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65) 씨는 “목포는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도 있고 ‘목포는 항구다’도 있는데 왜 벌교의 노래 ‘부용산’까지 탐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안씨는 지역 국회의원이자 경원대, 호남대 총장을 역임한 이대순(82) 씨와 더불어 20여 년 전 호주까지 ‘쳐들어가’ 박기동 시인으로부터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구술 증언을 확보해온 ‘부용산’의 열혈 지킴이다.

벌교의 노래 ‘부용산’

이쯤해서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은 유튜브나 스마트폰을 통해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vXq3x4hz9gM) 노래는 지나치게 처연하고 넘치게 아름답다. 애상이 가슴을 꾹꾹 찌르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격조를 유지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슬프지만 겉으로는 결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남루하지 않다. 일찍이 소월이 자신의 시 ‘진달래꽃’에서 강조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면 된다.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여수에서는 돈 자랑,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고는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무섭다는 벌교 주먹이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이다. 그래서 슬픈 노래 ‘부용산’을 들으면 여름은 더욱 외롭다. 맞다, 그리움 강이 되어 맴돌아 흐르고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꿈도 간 데 없다. 벌교 부용산 저 멀리엔 재를 넘는 석양만이 홀로 섰고 병든 장미는 뙤약볕에 시들어간다.

 

슬픈 노래 ‘부용산’을 들으면 여름이 외로워진다. 그리움이 강이 되어 맴돌아 흐르고, 백합처럼 향기롭던 꿈도 간 데 없다. 벌교 부용산 저 멀리엔 재를 넘는 석양만이 홀로 섰고 병든 장미는 뙤약볕에 시들어간다.

1 노래 ‘부용산’의 실제 무대인 벌교읍 뒤편의 부용산 원근 풍경이다.

2 벌교 뒤편 부용산에 위치한 부용산 노래비. 목포와 연고를 다투던 노래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1 녹음이 짙은 부용산 시오리길. 회오리바람이 쏴아 하고 지나간다.

2 부용산에 위치한 ‘망향’ 작곡자 채동선(1901~1953) 묘비. 박화목 시에 곡을 붙인 망향은 한국인의 애창 가곡이다.

3 벌교는 노래 ‘부용산’보다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으로 더 유명하다. 벌교 마을 초입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

4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벌교 김범우 집의 모델이 된 고택. 소설의 사실감을 더해주는 주요한 오브제로 작용한다.

5 보물 제304호로 조선 영조 4년 축조한 벌교 홍교. 순천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와 함께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홍교는 교각을

   무지개처럼 반원형으로 쌓은 다리를 말한다.

 

배운 것 없고 배고팠던 그 시절 공순이들에 바친다

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랫말엔 고향을 떠나온 이의 애끓는 마음이 담겼다.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낙엽이 쌓이고 흰 눈이 내려도 미싱을 잡아야 했던, ‘공순이’나 ‘식모’로 불린 수많은 소녀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기념비다.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마을 초입에 있다.

강인이라는 대중음악 평론가가 있다. 당초 사계(斯界)에만 알려졌으나 지난 몇 년간 몰아닥친 방송의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을 도맡아 하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강인은 광복 후 한국 트로트의 금자탑으로 딱 한 곡을 꼽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물레방아 도는데’다. 사람에 따라 남진의 ‘님과 함께’나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이미자의 수많은 노래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강인은 ‘물레방아 도는데’야말로 나훈아를 한국 트로트의 황제로 추대하는 곡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1972년 정두수의 노랫말에 박춘석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이농(離農) 현상으로 도시로 몰려든 어린 노동자들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절절한 슬픔을 형상화했다. 도시로 몰려든 그 시절 가난한 한국인에게 전대미문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통해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쓰라린 슬픔을 노래했다.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 다 가도록 소식조차 없는’ 떠난 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온다. 너무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노래 밑바닥에 녹아 있는 것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는 남진의 ‘님과 함께’와는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다’는 ‘님과 함께’는 고향을 떠나온 어린 노동자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자신들의 꿈과 이상향을 노래했다. 산업화 시대에 불가능한 꿈을 노래로나마 불렀던 것이다. 힘든 야간작업을 마친 지친 노동자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로 노동 현장에서 겪는 고통과 향수를 노래하고 ‘님과 함께’를 통해 불가능할지 모르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 틀림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무했던 것이다.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평론가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두고 한국 트로트 역사에서 혁명적인 노래쯤으로 평가한다. 일본 엔카가 가진 섬세하고 유약한 여성적인 발성의 틀에서 벗어나 다이내믹한 ‘뒤집기와 꺾음’을 통해 강인한 남성상을 극적으로 구현하는, 이른바 대륙적인 울림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기실 ‘물레방아 도는데’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기러기아빠’ ‘섬마을 선생님’을 번갈아 들어보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창법도 창법이지만 노래는 슬프고도 짠한, 그래서 종국에는 가슴 쓰리게 하는 노랫말로 개발시대 한국인들로부터 상상을 뛰어넘은 사랑을 받게 된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로 시작하는 가사는 ‘공순이’나 ‘식모’로 불렸던 이 땅의 수많은 어린 소녀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았다.

‘공순이’는 서러웠다. 가난하니 못 배웠고, 못 배웠으니 무식했다. 어린 여성 노동자 대부분은 가부장적이고도 ‘남존여비’의 유산 속에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떠난다. 속옷에다 작은 돈주머니를 달아주던 어머니를 눈물 속에 뒤로하고 서울로 온 그들이다. 이런 까닭에 1970년대의 여공들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은 화려한 구로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한 그 시절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여공은 국졸 혹은 국교 중퇴가 대부분. 영어로 된 라벨을 다는 것은 한글도 모르는 소녀들에게는 고역이었고 M과 W를 혼동해 작업반장에게 따귀를 맞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촌향도(離村向都) 정서를 담은 노래는 역시 나훈아가 부른 ‘고향역’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 ‘물레방아 도는데’가 떠난 이의 노스탤지어라면 ‘코스모스 피어 있고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는 고향역’은 명절을 맞아 찾은 고향에 대한 짧은 순간의 환희를 노래한 것쯤으로 이해된다. ‘흰머리 휘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이란 노랫말은 곧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는 슬프고 비장감이 살아 숨 쉬는 노래다. 그 시절의 분노와 슬픔이 구석구석에 꾹꾹 숨어 있다. 이 노래에 3년 앞서 1969년 패티 김이 발표한 ‘서울의 찬가’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의 노래가 즐거운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는 노래는 그 시절의 정서로 봐서는 가식적인 노래일 뿐이다.

명절날 서울에서 한아름 선물을 안고 고향에 내려온 이 땅의 공순이들의 얼굴은 하얘져 있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졸음을 바늘로 찔러가며 참아내고 공장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시달린 전쟁과 같은 밤샘근무 때문에 몰라보게 하얘졌던 것이다. 이는 곧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여도,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어도, 하얀 불빛 아래에서 새하얀 얼굴이 되더라도 미싱을 돌려야 한다’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풍경 그대로다.

 

‘물레방아 도는데’의 작사가 정두수 씨가 자란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옛집. 지금 귀농한 도회인이 살고 있는 옛집에는 박태기나무에 꽃이 한창이다.

어린 ‘공순이’와 ‘식모’를 위한 노래

그러나 이같이 떠밀려 고향을 떠난 ‘이촌향도의 한국인을 위로했던 노래의 탄생 계기는 조금 다르다. ‘물레방아 도는데’의 작사자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정두수(77) 선생이다. 노래가 탄생한 1972년은 작사자 정두수 역시 이촌향도의 거대한 물결 속에 서울에 온 지 6년째 되던 해. 하동 출생으로 부산 동래고와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다. 6년 전 작고한 시인 정공채 선생의 동생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는 일제강점기 학병으로 끌려간 삼촌을 그리는 조부의 마음을 생각하며 붙인 노랫말이다. 동경 유학생이던 집안의 기대주 삼촌은 학병이라는 띠를 두르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쉬워하며/ 징검다리 건너갈 땐 손을 흔들며’ 떠났지만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다. 감꽃이 떨어지던 날, 하얀 천에 휘감긴 상자로 돌아온 삼촌을 보고 울음을 삼키던 조부를 회상하며 지은 노래다.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지리적 배경은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마을 주민 대부분이 하동 정씨다. 금오산 자락에 안긴 성평리는 주교천이 휘감아 흐르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물레방아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어린 정공채, 정두채(정두수의 아명) 형제가 뒹굴던 그 옛날의 집은 지금도 건재하다. 박태기나무에는 붉은 꽃이 만발하고 넓은 마당에는 작약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정강채(83) 할아버지는 공채, 두채 형제의 먼 친척, 아득한 그 시절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아름답기로 치면 하동 포구를 따라올 데가 조선 천지에는 없다”는 그는 지금은 주교천(舟橋川)으로 불리는 배다리까지 ‘왜정 때에는’ 섬진강을 끼고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물산이 풍부한 하동 포구에 사람이 몰렸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빼어난 풍광 덕분에 공채, 두채 형제가 이름을 날리게 됐다는 것이 강채 할아버지 나름의 분석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하동 정씨라 살아생전에 가끔 찾아왔지만 작고한 이후에는 현대그룹 사람들의 발길이 딱 끊어졌다”고 서운함을 내비친다.

그러나 노래의 주인공쯤 되는 물레방아는 없고 흔적만 남았다. 옛날 자리에서 옮겨져 복원된 물레방아는 마을 입구 조그만 기념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언덕 밑을 감아 흐르는 배다리천 징검다리는 그 시절 노랫말에 등장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다. 때마침 고전초등학교에는 봄철 부락 대항 운동회가 열렸다. 황토 운동장에는 솜사탕 기계가 돌아가고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인다. 아, 얼마 만에 보는 만국기이던가! 만국기 아래 고전면 일대 마을 대표들이 윷놀이에, 줄다리기에 열심이다. 선수래야 육칠십대 노인이 대부분이고 젊은이는 이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득한 시절, 이곳 초등학교에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입학했던 코흘리개 그들이 60, 70년이 지난 오늘,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다시 운동회를 하는 모습에 묘한 기분이다. 가슴이 울컥해진다.

물레방아 도는데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 봄이 오기 전에 잊어 버렸나

고향에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두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하며

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이 다가도록 소식도 없네

고향에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작사가 정두채(두수) 선생의 친척인 정강채 할아버지(83). 여든 넘은 나이지만 손수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나들이를 할 만큼 젊음을 자랑한다(왼쪽). 손수건을 달고 입학했던 코흘리개 아이들이 칠팔십 노인이 되어 운동회에 참석했다. 1929년 개교한 하동군 고전면 고전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물레방아 도는데’는 그래서 지난 산업화 시대에는 국민가요쯤으로 여겼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일진대 산업화 측면에서 가장 도드라진 시대정신을 담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업화의 진정한 주역은 그 시절의 공화국을 담당했던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도, 경제정책 입안자도, 몇몇 이름난 민주화 운동가도 아니다. 인간에게 배고픔만큼 잊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대물림 가난이 싫어 서울로 떠난, 공순이 공돌이란 이름 아래 사라져간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산업화의 빛나는 공은 마땅히 헌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시절을 떠받쳤던 가녀린 ‘공순이’들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삶이 당연히 그 주인공이 됨직하다.

경남 하동군의 ‘물레방아’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내가 세상에 나와 그때까지 봤던 것 중에 제일 높은 것. …거대한 짐승으로 보이는 대우빌딩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 …여명 속의 거대한 짐승 같은 대우빌딩을 두려움에 찬 눈길로 쳐다본다.”

작가 신경숙의 말이다. 작가 신경숙은 열여섯 살에 처음 서울을 경험했다. 1970년대 중반 전북 정읍에서 상경한 시골 소녀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 맨 처음 본 건 거대한 갈색 빌딩. 들판만 보고 자란 소녀에게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은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작가는 그때의 충격을 자전적 소설 ‘외딴 방’에서 이와 같이 묘사했다.

나는 일면식도 없지만 신경숙을 좋아한다. 그가 가진 그 시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얼마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금이 있는 자리’ 등 그의 초기 작품을 읽노라면 이 땅의 가녀린 어린 딸들이 지난 시절, 이촌향도의 거센 풍랑 속에 얼마나 곤고한 삶을 살아왔는지 상상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에게 억누를 수 없는 송구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나의 마음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들으며 가짜 풍요가 넘치고 넘치는 오늘 문득 비감해진다. 그러나 고향의 물레방아는 더 이상 돌지 않는다. 열아홉 시절은 갔다.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 천리타향 멀리 간 뒤 소식 없는 그 사람…. 노래의 배경이 된 물레방아는 없지만, 작사가의 체취가 담긴 옛집은 온전히 남아 손님을 맞는다.

기념공원에 자리 잡은 물레방아다. 노랫말을 기려 복원됐다(왼쪽).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배경이 되는 징검다리. 일제강점기의 형태 그대로라고 한다.

1. 밭을 가는 주민들 뒤로 멀리 소나무 아래 보이는 돌담이 일제강점기 물레방아 있던 터다.

2.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던 바로 그 돌담길이다.

3. 산업화 시대의 국민 가요 ‘고향역’의 무대인 익산역. 고향역은 이촌향도의 정서를 읊은 노래 중 정점을 찍은 노래쯤 된다.

4. 작사자 정두수 선생이 즐겨 찾았다는 성평리마을 옛 구멍가게.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5. 성평리 뒷산 금오산을 배경으로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첫 키스는 왜 골목길에서만 이뤄졌을까

김현식 ‘골목길’

 

‘골목길’은 1989년 김현식이 ‘신촌블루스’ 2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며 대중에게 선보인 노래다. 유난히 음악과 술을 사랑했던 김현식, 그는 1990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개척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흘렀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꾸준히 전파를 탄다. 갈라지고 탁한, 거칠게 토해내는 듯한 특유의 음색이 돋보이는 ‘골목길’은 포크, 팝, 솔, 록, 블루스, 발라드, 펑크에 이르는 다채로운 사운드를 구사한 싱어 송 라이터 김현식이 레전드리 피겨(전설적 인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세월은 사람과 함께 간다. 1990년 11월 1일 나는 김현식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또 한 시대가 간다는 생각을 했다. 내 젊음의 빛이 스러지는 것을 느꼈고 얼마 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이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20대만 가질 수 있는 설렘과 뜨거움, 무모함 등과 함께 김현식은 이 땅의 기성세대, 특히 386세대에게 그런 존재다.

1958년생이니 안타깝게도 고작 서른을 조금 더 살다 갔다. 김광석과 마찬가지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이 거칠고 삐딱한 젊은 가객을 우리는 정녕 잊지 못한다. 그래서 김장훈, 김정민, JK김동욱, 김범수, 임재범, 싸이(Psy), 라디(Ra.D), 박효신, 바비킴, 김조한, 윤종신, 이은미 등 수많은 후배 가수가 그의 노래를 불렀고, 지금도 부른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병실에서 음악을 놓지 않고 끝까지 노래한 그다. 김.현.식.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땅 위에 가왕 조용필이 있다면 땅 밑에는 가객 김현식이 있다”라고. 이 경우 땅 밑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의미가 된다.

김현식이 활동한 1980년대는 민주화가 완성된 시기다. 386세대가 시대의 주류로 진입했고 예전의 순수했던 운동이 언제부터인가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교정엔 늘 운동권의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김현식의 노래를 듣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곤 했다. 대중가요를 듣는 것이 사치로 치부되던 그런 시대, 상처 입은 짐승의 목소리로 세상의 모든 고독과 울분을 저 혼자 짊어진 것 같은 노래들이 그로부터 터져 나왔다. 저항적이고 불온한 그의 노래는 민주화 과정에서 상처가 많았던 386들을 위무했다. 김광석, 들국화와 더불어 김현식의 음악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땅 밑의 가객’ 김현식

알려진 대로 김현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밴드부 활동을 하며 명지고등학교를 다녔으나 1975년 자퇴한 뒤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얻게 된다. 1982년에 결혼,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린 그는 인근에 피자 가게를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준 행복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음악은 그를 평범한 일상에 놔두지 않았다. 아내 몰래 밤무대 활동을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1987년 11월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다. 1988년 2월 삭발을 한 채 오른 재기 콘서트에서 용기를 얻고, 이후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라이브 무대의 황제쯤으로 인정받았다.

‘골목길’은 1989년 ‘신촌블루스’ 2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며 대중에게 선보인 노래다. 그러나 유난히 음악과 술을 사랑했던 그는 1990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신혼의 둥지를 틀었던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또 하나의 명곡이 된 ‘내 사랑 내 곁에’는 사후 발표된 노래다.

이런저런 이유로 김현식은 1980년대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개척한 인물이자 종결자쯤으로 자리매김된다. 그 시절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았어도 이미 언더그라운드의 황제였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흘렀지만 그의 노래는 꾸준히 전파를 탄다.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은 자타가 공인하는 발라드 음악의 보석이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노래가 바로 ‘골목길’이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로 시작되는 노래는 묘한 상상과 함께 사내들의 술자리에서, 대학생들의 동아리 모임에서,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를 끝내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밤늦은 귀가길에서 가만히 터져 나온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 수줍은 너의 얼굴이 창을 열고 볼 것만 같아 / 마음을 조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 만나면 아무 말 못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가면서 후회를 하네 / (하략)”(신촌블루스 ‘골목길’, 1989, 서판석 작사, 엄인호 작곡)

고즈넉한 골목길 풍경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포효하듯 묘사했던 가객 김현식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노래다. 갈라지고 탁한, 거칠게 토해내는 듯한 특유의 음색이 돋보이는 ‘골목길’은 포크, 팝, 솔, 록, 블루스, 발라드, 펑크에 이르는 다채로운 사운드를 구사한 싱어 송 라이터 김현식이 이른바 레전드리 피겨(전설적 인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왜 골목길이 노래의 배경이 되었을까. 왜 그럴까. 사랑에 빠진 남녀가 만남 후 헤어지는 공간적인 무대는 도회의 경우 대개 골목길이 된다. 남자는 기회를 포착해 한번 포옹해본다든지 아니면 입술을 훔쳐볼 수 있는 절호의 공간인 셈이다. 물론 그러다가 여자친구의 부모에게 들켜 혼나기도 하겠지만, 골목길은 그런 장소다. 어쨌든 남자들에게 골목길은 이 같은 욕망의 공간이 된다. 묘한 상상을 하며 여자친구의 방 창밖을 서성이거나, 아니면 여자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골목길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끊임없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신촌 명물골목에 위치한 미네르바 다방. 대학로의 학림다방과 함께 1975년 개업 이래 오랜 세월을 간신히 견뎌오고 있다.

 

김현식과 신촌블루스

 

신촌로터리에 위치한 어느 결혼식장. 한때 장안의 선남선녀가 몰려들었던, 딕패밀리가 운영했던 나이트클럽 ‘우산속’이 있던 자리다.

‘골목길’탄생에는 신촌블루스가 있다. 1986년 4월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엄인호(기타·노래), 이정선(기타·하모니카·노래), 김현식(노래), 한영애(노래)가 신촌블루스를 결성했다. 이후 많은 보컬이 거쳐갔지만 김현식은 노래 ‘골목길’을 계기로 단연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데다 신촌에서 하숙 생활을 한 나는 지금도 실내장식이 엄청 기괴하고 퇴폐적 느낌이 풍겼던 술집 ‘레드 제플린’을 잊지 못한다. 지금의 명물골목 초입에 위치한 카페 ‘레드 제플린’은 ‘러시’와 함께 그 시절 히피의 아지트였다. 신촌 일대에서 카페나 소극장을 꾸려가던 낭만 히피들은 영업시간이 끝난 뒤인 새벽 2시쯤이면 ‘레드 제플린’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맥주를 마셨으며 누군가는 구석에 숨어 대마초를 돌려가며 피우던 혼돈스러운 주점이었다. 아래층에는 ‘감격시대’라는 또 다른 주점이 있었고 옆에는 ‘미선옥’이라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외에 ‘크로스 아이’ ‘장밋빛 인생’ ‘판’ ‘레지스탕스’ ‘추바스코’ ‘섬’ ‘고박사 냉면’ 등등 1980년대 신촌을 주름잡았던 명소는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시절 신촌 일대를 방황하던 젊음이 또렷이 기억하는 글귀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지금은 없어진 카페 ‘섬’에 가면 볼 수 있었던 흰 광목천에 검은 묵필로 커다랗게 쓴 정현종의 시 ‘섬’이다.

1980년 문을 열어 자리를 서너 번 옮긴 끝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러시’는 그 시절 불량한(?) 대학생들이 가장 열광했던 록 카페였다. 엄동설한 러시에 몰려든 젊음들은 벽난로 가득 활활 타는 통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청춘을 노래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연세춘추에 “신촌의 겨울은 러시 담 옆에 쌓여가는 장작더미에서 시작되며 그 장작이 사라질 때쯤이면 봄이 온 것을 안다”는 내용의 에세이를 기고한 적도 있다. 그런 술자리에서 가끔 전인권, 김현식, 남궁옥분, 정미조 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뿐인가. 꽃다운 젊음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는 그 시절 신촌에서 곧잘 조우한 젊은 시인이었다. 신촌의 골목길은 그런 곳이다. 골목길 곳곳에는 숨은 술집이 있고 만화방이 있고‘장미여관’ ‘은하수 여관’이 있었다. 김현식의 ‘골목길’은 바로 그런 풍경을 고스란히 상상하게 해주는 마력을 지닌 노래다.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그 시절 신촌 골목길들은 이른바 1980년대 낭만 히피들의 ‘나와바리(영역)’였던 셈이다.

그래서 김현식, 신촌블루스의 무대는 신촌이 제격이라고 한다. 지난해 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응답하라 1994’도 ‘신촌 하숙’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의 서울 생활과 순정을 다루었다. 비록 김현식이 술로 외로움을 달래던 그 시절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만 1980년대 신촌의 풍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신촌은 신촌이다. 나도 그랬지만 신촌 하숙생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가까이 있는 이화여대생을 한번 꾀어보려는 음흉한 목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신촌 하숙집에는 이대생이 없었다. 그들은 여학생 전용 하숙집에 있거나 아니면 친척집에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386세대에게는 하숙집을 매개로 한 결혼도 많고 모임도 많다.

신촌구락부라는 모임도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면 “신촌 밤무대를 주름잡는 건달들의 모임”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나온다. 언뜻 들으면 무슨 조폭단체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1980년대 초입 대학 시절, 신촌 언덕배미, 같은 하숙방에서 나뒹굴던 나의 하숙집 친구들의 모임이다. 하기야 친구 부친상에 ‘신촌구락부’ 이름으로 조화를 보냈더니 그동안 괴롭히던 직장 상사가 “조직”의 일원인 줄 알고 놀라 고분고분해졌다는 실제 상황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름만 거창한, 하숙친구 모임일 뿐이다.

천박한 소비 문화의 각축장

요즘 세대에게는 생경하겠지만 하숙이란 말은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속옷 바꿔 입기는 보통이고, 고향에서 꿀이라도 올라오면 하루 밤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지금의 세대가 소·돼지고기를 칭하던 육군, 달걀과 닭고기를 칭하던 공군, 생선을 칭하던 해군의 속뜻을 알기나 하겠는가. 모두가 곤고했던 시대, 반찬으로 육군을 요구하다 하숙집 아줌마에게 손이 닳도록 살살 빌고 쫓겨나지 않은 하숙집 풍경은 이제는 빛바랜 전설이 된 지 오래다.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이 없어’ 방황하던 김현식 시대의 신촌은 가고 없고 지금의 신촌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다. 한때 이 땅에서 ‘젊음의 거리’ 또는 ‘해방구’쯤으로 인정되던 신촌은 2000년대 이후 홍대입구에 밀려 완연히 사양길이다. 신촌시장 자리에는 현대백화점이 우뚝 서 있고 그 많던 하숙집도 대부분 사라졌다.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은 2005년에 문을 닫았다가 지난해 1월 인테리어를 새롭게 바꾸고 다시 문을 열었다.

이른바 신촌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 2000년대 이후 신촌은 더는 대학 문화가 숨 쉬는 공간이 아니다. 혼잡하고 몰개성한 거리로 천박한 소비문화의 천박한 각축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3050세대 ‘기쁜 우리 젊은 날’ 추억의 장소는 왜 항상 신촌이고 첫 키스는 왜 늘상 골목길에서만 이루어졌을까. 김현식의 노래에 그 답이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히피들이 들끓던 신촌, 그곳엔 김현식처럼 방황하던 젊음이 넘쳐났다.

 

1 마광수 연세대 교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의 무대이던 장미여관은 지금은 찜질방으로 변했다. 한때는 스페이스란 이름의 나이트클럽으로 제법 명성을 날렸다.

2 신촌로터리 입구의 홍익문고, 1960년 문을 연 이래 반세기 동안 신촌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3 2005년 문을 닫았다가 지난해 초 재개업한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으로 신촌 일대 대학 문화의 상징쯤 된다.

4 신촌에 밤이 깊었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젊음들이 서성거린다.

5, 6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유일한 록 카페인 우드스탁, 기성세대 격인 이른바 386들이 단골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묵직한 그리움에 떠오르는 얼굴들

박인희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얼굴’ 등을 쓴 시인 박인환은 서른 남짓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생머리를 곱게 묶고 나타난 가수 박인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박인희가 부른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흘러간 사랑을 추억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일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데, 그건 우리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가로수 옷을 벗으면 떨어지는 잎새 위에 어리는 얼굴’로 시작되는 노래 ‘끝이 없는 길’이 생각나는 쓸쓸한 겨울 풍경.

열아홉 시절, 지금의 수능시험 격인 예비고사를 앞두고 잠깐 가출을 했다.

 

무작정 서울로 가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둘기호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떠난 가출은 대전역에서 가락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해 11월은 몹시도 추웠다. 부실한 옷차림으로 낡은 열차의 창틈으로 들어오는 냉기에 몸서리를 치며 돌아오는 길, 나는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군인 아저씨의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노래를 듣게 된다.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로 시작되는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이다. 양말을 신었는데 새끼발가락은 무척 시렸고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조차 꽁꽁 얼었던 11월 중순의 깊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노래가 그리 유명한지도 또 누가 부르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렇게 맑은 목소리가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만 가졌을 뿐.

대학에 들어갔다. 어려웠던 권위주의 시대, 대학은 진저리 나도록 싫었고 현실에서의 탈출 또는 일탈만을 꿈꾸던 철없던 그 시절, 여름 농촌 봉사활동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낙이자 젊음의 해방구였다. 그 시절 봉사활동은 대개 여러 대학이 합동으로 했다. 그래야 선남선녀들이 봉사활동 외에 그 무엇을 기대하지 않겠는가. 설렘과 뒷얘기에 가슴을 떨던 그런 시절이었다. 피임교육과 기생충 치료를 하는 의대생과 간호대생들이 주축이고 나를 비롯한 비(非)의대생들은 논길 넓히기 등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맡았다.

함초롬한 이미지, 곱게 묶은 생머리

박인희

그런 여름 봉사활동의 피날레는 당연히 마지막 날 밤이다. 내일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청춘들이 열흘간의 만남을 끝으로 저마다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떠나게 된다. 금빛으로 빛나던 청춘의 한 시절, 이십대 초반의 젊음이 만난 만큼 아쉬움 또한 엄청났다.

마지막 밤의 캠프파이어로 아쉬움을 달랬다.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둥그렇게 둘러앉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져간 모닥불 같은 것….” 맞다 그랬다. 그때 우리들의 얘기는 밤하늘에 올라가 별이 됐고 중년이 된 지금 이 순간 곰곰 생각해보니 ‘인생은 말없이 사라져가는 모닥불 같다’는 노랫말이 새삼 실감난다.

‘세월이 가면’ ‘모닥불’ 두 노래는 모두 가수 박인희가 불렀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누구나 한 번쯤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가수다. 함초롬한 이미지에 생머리를 곱게 묶은 그녀는 어느 순간 나타났다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울행 발걸음을 딱 끊어 이제 그녀의 근황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미국 LA인근에서 방송 활동을 한다더라 정도의 소문만 흘러 들려올 뿐, 복고풍에 힘입어 웬만한 옛날 가수들이 TV에 다시 얼굴을 비추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 언론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가수 박인희의 출발은 ‘뚜아 에 무아’다.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그저 경복궁 옆 알리앙스 프랑세스나 남산의 괴테 하우스에 가서 이국 정서를 맛보던 시절, ‘뚜아 에 무아’라는, 당시로는 생경한 보컬 이름을 들고 나타난 그녀다. ‘뚜아 에 무아’는 불어로 ‘너와 나(Toi et Moi)’라는 뜻인데 영어가 아닌 불어로 팀명을 짓는다는 것부터 남달랐다. 아마 영어를 한수 아래쯤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 시대를 풍미했던 샹송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때는 사실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불문과 여대생이 곧잘 등장했다. 1968년 가을 타이거스라는 록그룹의 리더로 활약하던 이필원과 당시 록음악의 메카였던 미도파 살롱의 인기 DJ이자 숙명여대 불문과 재학생이던 박인희가 만나서 결성했다. 우연히 함께 부른 에벌리 브라더스의 ‘렛 잇 비 미’를 계기로 듀엣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뚜아 에 무아’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포크 명곡을 남기며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초창기에는 ‘스카브로우의 추억’이나 ‘썸머 와인’등 번안곡을 주로 불렀으며 ‘그리운 사람끼리 두 손을 잡고/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어가는 길’로 시작되는 ‘그리운 사람끼리’를 비롯해 ‘약속’ ‘님이 오는 소리’ 등 맑은 노래를 적잖이 남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노래를 일컬어 ‘영혼에 호소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전하는 가장 맑은 노래’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그래서 지금도 유튜브에서 관련 단어를 치면 그들을 그리워하는 온갖 상찬과 노래가 빼곡하다. 어쩌면 이처럼 고운 노래를 깨끗한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느냐는 글이 많다.

박인희의 진가는 천상의 화음이라던 듀엣이 깨지고 솔로로 독립한 뒤 더욱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세월이 가면’이 있다. 이 노래의 탄생 과정이나 의미, 파급 영향 등은 새삼 재론의 여지가 필요치 않을 정도다. 지금도 유튜브나 인터넷 공간에는 그녀에 대한 기성세대의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 엄청나게 올라온다.

 

“너무 보고 싶어요, 인희 씨”

“텅 빈 가슴을 음악으로 채워 넣었던 시절. 당신의 음악은 너무 사랑스럽고 그리워 눈물이 납니다. 어려운 시대에 정말정말 좋은 음악으로 위로해줬던 우리 시대의 가수 박인희 님. 잘 계시지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있는 곳만 알면 달려가서 만나고 싶습니다. 어디에 계시나요.”

“세월은 가도 역시 그 아름다운 시에 그 곱고 그리운 목소리 잊을 수 없구려. 박인희는 가수인지 시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참으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었지요. 많이 궁금하고 보고 싶구려.”

“그리운 박인희! 너무 사랑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잊지 못할 그리운 그 목소리,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노래 ‘세월이 가면’은 알려진 대로 고 박인환의 시에 극작가이자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이진섭이 곡을 붙여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태어나 6·25전쟁 3년 뒤인 1956년 3월 고작 서른 남짓한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 시인 박인환의 존재를 한국인에게 각인해준 노래다. 불안했던 시대, 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페이소스 짙은 낭만적 노래가 있어야만 했는가 보다. 그래서 명동의 어느 초라한 주점에서 가난한 시인은 이토록 애틋한 회상의 시를 토했고, 그의 벗 이진섭은 즉흥적으로 곡을 붙였다는 것이 탄생설화다.

그러나 노래가 세상에 나온 지 꼭 일주일 만에 이 불행했던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시단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 시는 애상적인 노래 곡조에 힘입어 한국인에게 메가톤급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세월이 가면’은 술집 상호로, TV 드라마 제목으로, 그림 제목으로 등장했으며 실제로 후배 가수들에 의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불려왔다. 연전에 EBS가 특집 다큐멘터리로 재조명하기도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박인환’의 시들이 ‘박인희’의 노래 덕분에 더욱 빛을 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얼굴’ 역시 박인희의 낭송과 노래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래서 가수 박인희가 박인환의 친척이라고 잘못 알고 있거나 억지로 우기는 사람도 주변에 더러 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름이 너무 닮아 오누이쯤으로 착각하게 할 뿐 그 어디에도 연결고리는 없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 출신에다 고작 서른에 세상을 떠났고, 박인희는 해방둥이로 1945년생이다. 따라서 박인환이 작고했을 당시 초등생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동기동창인 이해인 수녀와 같이 수다를 떨던 풍문여중 학생일 뿐이다. 그러니까 죽은 시인 박인환을 이 세상에 유명하게 한 가수 박인희는 묘하게 이름만 비슷할 뿐 전혀 인연이 없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박인환의 고향 인제읍에 세워진 기념 문학관에도 박인희의 노래로 유명해진 그의 시들이 전면에 등장해 찾는 이들을 반긴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박인희의 노래들이 나직이 흘러나온다. ‘세월이 가면’이 작곡될 당시의 명동거리가 재현돼 있으며 박인희 앨범 재킷이 진열되어 있다. 전쟁이 할퀴고 간 황량한 명동의 풍경을 재현해 놓은 주점에서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탄생되는 순간이 조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박인환문학관의 외관 풍경. 잘생긴 동상의 주인공이 댄디 보이 시인 박인환이다. 이 멋쟁이 낭만파 시인은 폼을 내어 옷을 차려 입을 수 없는 여름이 싫다고 했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사실 ‘세월이 가면’은 좀 특별한 노래고 시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신파조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지만, 사람들은 ‘세월이 가면’이 던지는 인간이 지니는 숙명적인 의미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흘러간 사랑을 추억한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사랑이 무르익던 여름날 호숫가, 가을날의 낙엽 지던 공원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연상하고 가버린 젊음과 사랑을 추억하며 묵직한 그리움에 젖게 된다. 노래 ‘세월이 가면’은 시인 박인환을 다시 보게 하는 기제가 되고 노래로 인해 박인환/인희 두 사람은 가상의 오누이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망우리 공원묘지 박인환의 묘비에도 ‘세월이 가면’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가끔씩 박인희의 이 노래를 두고 기막히다고 표현한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싸늘한 가슴에 있네”로 끝나는 노래를 듣노라면 진하디진한 그리움에 숨이 턱 막혀온다고 한다. 센티멘털이나 낭만이라는 단어는 애써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온 젊은 시절과 달리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스스로가 늙어간다고 느낄수록 ‘세월이 가면’을 가만히 부르고 듣게 된다. 마치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일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들으며 상념에 젖는 사람은 이제 더는 청춘이 아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면 안 되는데 하는 사이에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세월은 너무 빨리 갔고, 그 여름 봉사활동이 끝나는 밤, 사위어가는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세월이 가면’을 같이 불렀던,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들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코끝이 찡해진다. 그리고 노래 속에는 모닥불 피워놓고 젊은 눈빛을 반짝이던 스물 몇 살의 내가 있다.

 

‘세월이 가면’은 특별한 노래고 시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누구라도 고개를 숙이게 하는 숙명적 의미를 담았다. 사랑이 무르익던 여름날 호숫가, 가을날의 낙엽 지던 공원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연상하고 가버린 젊음과 사랑을 추억하며 묵직한 그리움에 젖게 만든다.

1 강원도 인제읍 초입거리에 있는 박인환 시비. 박인환의 시들은 박인희의 노래로 유명해지고 또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2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망우리 공동묘지 박인환의 묘비에는 ‘세월이 가면’첫 구절이 새겨져 있다.

3 박인희의 노래는 쓸쓸하다 못해 스산하다. ‘물새도 가버린 겨울 바다에 옛 모습 그리면서 홀로 왔어라’로 시작되는 노래 ‘겨울바다’의 무대

   격인 한겨울 동해.

4 노래 ‘세월이 가면’의 탄생지 명동 예술극장 옆골목. 가난했던 1956년의 겨울과 달리 지금 이 거리는 관광객과 젊음으로 활기가 넘친다.

5 망우리 공동묘지 앞에 있는 박인환 시비.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져 묘지에 이르는 계단도 최근 새로 설치했다고 한다.

 

혁명가가 부르는 시대의 노래 어둠이 지나면 새벽이 온다

정태춘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을 불렀던 음유시인은 1980년대,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거칠어지지 않았다. 묵직한 시대정신을 담아냈지만, 생경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의 노래에서 깊은 산사의 풍경 소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노래를 통해 말했다. ‘언젠가 이 어둠이 지나면 그토록 목말라하던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테이프를 집어넣고 피아노 건반처럼 생긴 버튼을 꾸~욱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책 크기만한 기계가 있었다. 카세트 리코더다. 30여 년 전 얘기. 브랜드는 당연히 소니였고, 서너 시간을 계속해 들으면 열로 인해 모터를 돌리는 줄이 늘어나는 바람에 고운 노래가 갑자기 외계인의 음성처럼 들리던 그런 기계였다. 원하는 노래를 콕 집어서, 그것도 깜찍한 스마트폰을 통해 듣는 지금 시대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얘기다.

나는 그때 한 가수의 노래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노래가 주는 그윽하고 깊은 울림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는 정태춘이었고 그때 들은 노래가 ‘시인의 마을’과 ‘촛불’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그의 초기 노래들은 차라리 한 편의 시에 가까웠다. 인간의 심장을 위무하는 묵직한 메시지가 있었다. 지난해 타계한 조르주 무스타키가 인기를 누리던 당시 이 땅에도 ‘음유시인’ ‘노래하는 철학자’ 같은 말이 유행했고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이 같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나는 정태춘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나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음유시인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특별한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여백과 울림이 있는 그런 노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정태춘의 노래에 익숙한 지금의 기성세대 대부분이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그 시절, 막 대학생이 된 나는 정태춘이 부르는 묘한 분위기의 노래를 듣는 밤이면 왠지 외롭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숙집 선반에 숨겨져 있던 소주를 한잔 마시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서정에서 운동으로

정태춘은 1954년생이다. 경기도 평택에서 농부의 5남3녀 중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고 평택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독학으로 기타를 배울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음대 진학에는 실패했다. 이후 한동안 방황하던 그는 군에서 전역한 후 그간 습작했던 자작곡을 모아 첫 앨범 ‘시인의 마을’(1978)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한다. 이 앨범에 수록된 ‘시인의 마을’ ‘촛불’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 등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그의 노래들은 짙은 서정성, 시적인 가사로 기성가수들과 차별됐다. 하지만 격동의 1980년대를 맞으면서 그의 노래는 큰 변화를 겪는다.

1980년대 후반, 어느 순간부터 정태춘의 노래는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변혁기였던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그는 사회 현실에 대해 한층 직접적인 비판을 담은 노래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노래 곳곳에 묵직한 시대정신이 담기면서 노래에는 깊고 그윽한 서정 대신 아픈 비명이 자리 잡는다. TV 화면에서 사라졌으며 소용돌이치는 현장에서 운동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교조 모임, 파업 현장, 사전검열 철폐 집회, 미군부대 이전 반대 시위 현장 등에서, 가수가 아니라 활동가의 모습으로 그는 등장했다. 가수보다는 문화운동가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대중이 감탄했던 웅혼한 감성과 시적 노랫말이 있던 자리에는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단어들이 대신한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레퍼토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나는 노래들이다. 그래서 이른바 ‘오지리널’ 그의 노래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속상해하고 안타까워했고, 조급한 이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공허한 서정성은 필요 없다”는 주장과 함께 점점 더 거친 저항의 노래를 불렀고 그런 그를 어색해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바꾸는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지금과는 달리 대중가수의 사회참여가 아주 낯설었고 더러는 진정성조차 의심받기도 하던 그 시절, 정태춘은 무소의 뿔처럼 고난의 행군을 저 혼자 계속했다. 각종 대중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북을 치면서 노래하기도 했다. 데뷔 시절 만나 결혼한 가수 박은옥은 훌륭한 지원자였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노래가 ‘북한강에서’다. 금강산 자락에서 시작된 북한강은 남녘을 향해 쉼 없이 흘러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에서 끝난다. 강은 여기서 남한강과 합쳐져 한강이 된다. 북한강은 팔당호를 비롯해 청평, 의암, 춘천, 소양, 파로호 등 댐이 만들어낸 호수들을 품고 있다. 송창식 등 강변의 풍광을 좋아하는 예인들이 강기슭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래서 강 양안에는 크고 작은 갤러리가 산재한다. 그러나 노래 ‘북한강에서’는 이런 낭만적인 풍광과는 거리가 있다. 노래에는 낭만을 넘어선 깊은 비감, 대도시에서 오는 비극적 서정 같은 것이 담겨있다.

개구리복과 ‘북한강에서’

30대 어느 날 새벽, 그는 예비군 동원훈련에 소집된다. 서울 근교 초등학교 운동장에 소집당한 개구리복의 30대 예비군 아저씨들은 지금은 없어진 대한통운 트럭에 짐짝으로 던져졌다. 호로도 없는 트럭은 새벽 강 안개를 뚫고 동원훈련장이 있던 북한강변을 쉴 새 없이 달렸고 감수성이 빼어난 낭만적인 30대 아저씨는 개구리복을 입은 그 순간에도 노랫말을 메모하고 콩나물 대가리를 열심히 그려댔다.

그해 예비군 동원훈련을 마치고 발표한 노래가 바로 ‘북한강에서’였다. 한때 시인협회가 선정한 우리 시대 최고의 노래가 아이러니하게도 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이 땅에서 군복을 입으면 누구나 개가 된다는 속설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개구리복 속에서 우울하고 무거운 비극적 서정을, 그러나 몹시도 결이 고운 노래를 뽑아냈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하략)’

음울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부르는 정태춘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이 강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게 된다. 노래는 8년 앞서 발표된 정희성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준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창작과비평사, 1977)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삶의 고단함을 반추하는 중년 노동자의 모습을 통해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노래와 시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다. 노래 ‘북한강에서’는 절제된 감정과 차분한 어조로 우리 시대의 현실과 핍박받으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슬픔을 노래했다고 한다. 자신의 목소리와 신념을 드러내 강조하지 않고 새벽 강변의 안개 낀 풍경을 통해 삶의 현장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참여 노래의 한계를 극복해낸 점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시대를 거쳐오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혼란스럽다. 어둠의 시대, 새벽을 알리는 깊은 울림이라는 상찬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사회변혁운동에 몸담아온 데 대한 안타까운 비판의 소리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노래가 갖는 짙은 서정성과 아름다운 선율, 호소력 짙은 잘 발효된 음색 등을 부정하기 어렵다.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그래서 그의 노래들은 그 시절 어둠의 공간에서 불렸던 다른 운동권 노래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권위주의 시대를 관통한 수많은 저항가요의 경우 대개 분노, 저항 등을 날것으로 품고 있었지만 정작 정태춘의 노래에선 거칠고 생경한 대목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가 사회변혁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배경 설명을 사전에 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고 서정성 짙은 한 편의 시와 같은 가요로 들을 뿐이다. 누군가는 깊은 산사에서 듣는 풍경 소리와 같다고도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어둠의 시대가 끝나고 그토록 목말라하던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희망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지금 북한강은 정태춘이 노래했던 30년 전 그 시절 강은 아니다. 이른바 4대강 개발 사업으로 강은 콘크리트 옷으로 완전히 갈아입었다. 소박하고 고즈넉했던 강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인공의 흔적이 강 전체를 뒤덮고 있다. 끝없이 늘어선 음식점과 카페, 러브호텔이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던’ 노랫말의 낭만을 깡그리 지워버린다. 장어구이, 청국장, 갈치조림, 토종닭, 참붕어찜, 설렁탕, 김치말이국수, 올갱이국, 우렁 쌈밥집 사이로 에메랄드, 텔레파시, 힐타운, 베네치아, 알프스, 잉카 등이 둥지를 틀고 있다. 점령군처럼 우뚝 선 강변의 러브호텔들이다.

그 옛날의 북한강 풍경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이제 가수 정태춘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가고 오는 세월 속에 사람들이 그의 노래가 던지는 깊은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지금, 그러나 ‘한국의 보브 딜런’이란 비유가 외려 부족한 느낌의 그는 이제 대중의 곁을 떠나 점점 더 은둔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스스로 ‘일몰의 고갯길을 걸어가는 고행의 방랑자’가 되고 있다.

  누구보다 신념이 강했지만, 거칠게 드러내지 않은 사람. 그는 새벽 강변의 안개 낀 풍경에서 삶의 고단함을 생각했다. 도시인의 삶을, 중년 노동자의 인생을. 그러나 정태춘이 노래하던 그 북한강은 이제 없다. 카페, 러브호텔 같은 인공의 흔적이 강변을 뒤덮은 지 오래다. 그가, 그의 노래가 새삼 그립다.

1, 2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데….’ 노래 ‘서해에서’의 도입 부분이다. 정태춘은 이토록 서정적인 노래를 전경으로 복무하던

       초병 시절 서해안에서 만들었다.

3 북한강변의 철로

4 북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