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깨달음(覺)에 이르기 위한 남방선의 접근 방법

醉月 2011. 9. 18. 09:12
깨달음(覺)에 이르기 위한 남방선의 접근 방법
- Suan Mokkh의 명상수행 코스를 중심으로 -
황미향

Ⅰ. 연구의 배경
Ⅱ. 수안목(Suan Mokkh)의 수행 프로그램
     1. 수안목과 붓다다사(Buddhadasa)
     2. 수행 프로그램
     3. 프로그램의 목적
     4. 수행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근거
Ⅲ. 깨달음(覺)에 대한 인간의 욕구로서의 수행
    1. 욕구의 두 가지 종류
    2. 고(苦)
Ⅳ. 깨달음(覺)의 접근 구조
    1. 깨달음의 대상
    2. 남방선의 수행양상
Ⅴ. 결론

 

Ⅰ. 연구의 배경

수안목(Suan Mokkh)은 태국 수라타니(Surat Thani)의 차이야(Chaiya)에 위치한 남방수행의 대표적 수행센터이다. 수라타니는 남부의 한적한 시골마을로 태국불교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있는 방콕에서 기차로 약 8시간 거리에 있다.
태국불교는 두 가지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 면은 불법(佛法)의 소중함을 화려한 보석으로 찬란하게 장식하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한 면은 보리수 아래서 풀을 깔고 수행하던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관광의 차원에서 잘 유지되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 진지한 구도자의 발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본 논고의 목적은 2001년 7월에 있었던 수안목의 여름 우기철(Rainy Retreat) 명상수련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통해 첫째, 남방의 선이 어떻게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둘째, 실제 이 남방선의 구체적인 운영체계의 핵심은 무엇이며 셋째, 남방의 선이 부처님 당시의 경전을 그대로 모체로 삼아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데 있다.

 


Ⅱ. 수안목의 수행 프로그램
1. 수안목과 붓다다사(Buddhadasa)
Suan Mokkh을 영역하면 'The Garden of Liberation' 즉 자유의 정원이다. 아찬 붓다다사(Ajahn Buddhadasa, 1906~1993, Slave of the Buddha)에 의해 창설된 수행센터로 처음 이 수행원은 위파싸나(Vipassana) 수행을 위한 작은 숲 속의 명상센터였으나, 지금은 남방불교에 있어 매우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수행센터로 잘 알려져 있다.

 수안목은 1985년부터 아찬 포(Ajahn Poh)의 지도 아래 외국인들에게 정규적인 수행코스가 제공되고 있다. 수안목의 창시자 붓다다사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희망찬 도전을 하였다. 또한 시간을 초월한 붓다의 메시지를 현재 세계에 영향력 있는 힘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다.


수안목이라는 장소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단지 정신적이고 영적인 훈련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수행하는 각각의 사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끔 그러한 장소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택하였다. 교리공부와 명상수행 그리고 기타에 부과되는 일상의 일은 모두 인간의 삶 속에 다 포함되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곧 교리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본질(本質)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이다. 즉 스며들어가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空)',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 이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며 모든 것이 '나', '내 것'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작업인 것이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준다. 이는 선지식의 조건이기도 하다. 타인의 마음을 맑히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이 먼저 맑아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붓다다사는 스스로의 맑음을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맑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선지식이다. 수안목에서 만난 모든 스님들 그들에게서 느껴졌던 것은 곧 '생동감'과 '진실함' 그리고 '진지함'이었다.


수안목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많은 선남선녀가 각기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곳에 온 것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담마(Dhamma; 法)인 것이다. 이러한 법을 알게 되면 우리의 생에 있어 중요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본질을 알고자 하는 그 '마음'이 수안목에서의 힘든 수행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움과 가까워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부와 수행은 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수안목에서는 '간단하고 단순한 생활방식'을 통해 법(法)의 본성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한다. 수안목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코코넛, 그 코코넛의 생주멸(生 住 滅)을 보면서 우리는 법을 알게 된다. 또한 저 멀리 보이는 야자수 나무의 흔들림을 보면서 사마타(samatha)에 들어갈 수도 있고 더불어 위파싸나(Vipassana)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를 하고 있다.


수안목에서의 '명상지도'는 훈련체계에 초점을 맞추어 붓다가 가르친 바를 최대한 따르게 한다. 예를 들어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 호흡관)가 우리의 삶에 있어 얼마나 가치로운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게 하는 것과 더불어 이것에 대한 직접적인 수행을 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상의 특별한 기술을 배움과 동시에 일상에서의 명상 목적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수행 프로그램은 어떠한지 살펴보겠다.

프로그램 일정
2. 수행 프로그램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수안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행은 한 마디로 매우 집중적이고 체계적이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끊임없는 수행 일정이 이어지고 있다. 수행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새벽좌선과 Yoga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깊은 고요 속에 좌선을 하고, 간단한 운동으로 yoga를 하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대부분의 수행이 모두 지혜(慧)를 일으키게 하는 내용들이다. 즉 수행은 실재를 보는 데 있어 작게는 무언가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크게는 사물의 하나하나를 관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수행이 무르익게 되면 마치 우리가 즐겁게 춤을 추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여여함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좌선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좌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하게 해준다. 완전히 눈을 감고 수행을 하다가는 더운 날씨에 못 이겨 금세 잠에 떨어지게 된다. 좌선 중 눈을 살짝 뜨고 멀리 있는 보리수를 관찰하는 것은 잠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보리수 잎이 쉴새없이 왼쪽 오른쪽 위 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현상의 무상함을 여지없이 깨닫게 된다. 또한 무상한 현상 속에서도 법과 진리는 항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더불어 무아와 고통을 함께 숙고할 수 있게 된다. 즉 지(止)와 관(觀)수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좌선 중에 뒷등 즉 척추로 호흡을 하면서 수식관을 하는 것 역시 맑은 정신을 놓치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며 잠깐 일어나서 행선(行禪)을 하거나 주선(住禪)을 하는 것 역시 수행을 오래 유지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행선
수안목에서는 행선의 시간이 하루 2~3시간 정도 된다. 수행시간에 맞추어 좌선 도중 잠깐씩 경행을 번갈아 하며 맑은 정신을 놓치지 않게 한다. 경행을 하는 방법은 왼쪽 발 오른쪽 발을 번갈아 땅에 놓으면서 '알아차림'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낮의 좌선수행 중에는 잠에 떨어질 때가 많기 때문에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서 한 20분 정도 경행을 하고 나면 몸이 가뿐해질 뿐만 아니라 정신도 뚜렷해진다. 경행 이후에 좌선을 하게 되면 보다 깊은 정(定)을 맛보게 된다. 이같이 경행과 좌선의 조화는 수행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염불
팔리(Pali)어로 된 책을 매일 40분씩 염불한다. 주로 계에 대한 내용과 불법승에 대한 귀의, 부처님의 말씀 등에 대한 내용을 염한다. 다함께 독송을 하면서 하루의 수행시간을 가다듬기도 한다. 해질 무렵 염불을 통해 마음을 보게 되고 큰 소리로 염불을 하게 되면 깊은 동체감이 생기게 된다. 염불이 끝나면 바로 자비관 수행이 이어지게 된다.

 

담마 토크(Dhamma talk)
명상수행 코스에 참여하는 동안, 두 가지 상관되는 주제에 대한 것을 최대한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법(Dhamma)과 수행(Meditation)이 그것이다. 담마 토크(dhamma talk) 시간에는 스리랑카 외 남방의 여러 곳에서 오신 훌륭한 선지식들의 법문이 이어진다. 좌선시간과는 달리 담마 토크시간에는 상당한 영어실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간혹 비유를 들어 법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는 청취의 실력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언어는 곧 법을 전달(communica-tion)하는 매개물이다. 그러기에 언어는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 매우 필수적인 요소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안목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 영어권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무난한 일이었다고 본다. 밤에 하는 담마 토크는 고요한 정적 속에 자신을 반조하게 하는 좋은 시간이 되며, 부처님의 법에 대한 깊은 숙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즉 법수념이 저절로 발현되면서 정(定)과 혜(慧)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자심관(慈心觀; Metta Kammatthana)
넓은 명상홀(Meditation Hall)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넓은 하늘을 보면서 자비관법이 시작된다. 마음은 더 없이 넓어지고 편안해지게 된다. 자비관은 성스럽고 숭고한 마음 상태를 계발시키는 수행방법 중 하나로 현재 남방불교국가에서 가장 널리 수행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수안목에서는 자비관 수행을 해가 질 무렵 매일 저녁에 40분 가량 한다. 자(慈)' 범주처(梵住處;Brahama vihara) 계발은 자심(慈心)을 체계적인 정(定) 수행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마음을 통해 선(禪)의 상태에까지 이르는 것이 이 수행의 목적이다. 즉 고결한 마음상태, 브라흐만과 같은 거주처〔梵住處〕에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게 머무는 것이다. 자심(慈心)을 계발(啓發;Metta Kammatthana)시킬 때 제일 먼저 자(慈)의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즉 자심수행의 대상은 자신에 대한 자심을 먼저 시작하여 점점 그 자심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자심계발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
자신에 대한 자심(慈心)을 주고
다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음은 가족과 친척에게
다음은 이 부근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다음은 이 지방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은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은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심을 뻗친다.
이와 같이 차별의 마음을 완전히 없애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뻗치게 되면
사상(似相;Patibhaga nimitta)이 처음에 나타나게 되며
그 다음은 근접삼매에 이르게 되며
마침내 몰두적 삼매인 초선(初禪)에까지 이를 수 있다.

즉 각각의 경계 내의 사람들에 대한 자심(慈心)을 계발해야 하며, 그들을 향해서 "행복해지고 모든 고(苦)로부터 해방되기를…"澾箚 하면서 자(慈)를 수습(修習)한다. 실제로 수안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비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숙고를 하며 깊은 자애로움〔慈心〕을 보낸다.
2. 그 다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심(慈心)을 보낸다.
3.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 자심(慈心)을 보낸다.
4. 스승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자심(慈心)을 보낸다.
5.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심(慈心)을 보낸다.
6. 수라타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온을 바라며
자심(慈心)을 보낸다.
7. 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평온을 바라며
자심(慈心)을 방사한다.
8.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자심(慈心)을 방사한다.
9. 아시아 전체의 사람들을 향해 자심(慈心)을 방사한다.
10.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편안하기를 바라면서
자심(慈心)을 보낸다.
이와 같은 순서로 자비관을 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붓다의 중생교화 내용을 살펴볼 때 분명 부처님께서는 자비관을 통해 중생에 대한 교화를 결심하게 된 내용을 찾을 수가 있다.
이 부분은 자비관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내용이며 실제 현대 남방에서는 이 자비관 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소승불교라고 하는 남방 상좌부불교는 곧 자기만의 깨달음에 매여 스스로 깨달음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중생구제에 참여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미 남방의 선지식들은 자비관의 사상처럼 '나'만이 아니라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다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수행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비관 수행을 하다 보면 좀 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결국 수행은 '고통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작업인데 이 수행은 매우 이득이 있다. 사무량심 수행을 통해 '고(苦)'로부터 벗어나 더 행복해지고 곧 이어 정(定)에 들고 이어서 더 높은 혜(慧)를 계발할 수 있게 된다.

 

음식관
먼저 수안목의 음식관 내용을 살펴보겠다.
수안목에서는 하루 식사를 두 번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으며 매번 식사를 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함께 읽고 숙고한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Food reflection
With wise reflection I eat this food
Not for play Not for intoxication Not for fattening Not for beautification only to maintain this body
To Say alive and healthy To Support the spiritual way of life
Thus I let go of unpleasant feelings and do not stir up new ones.
Thereby the process of life goes on blameless, at ease and in peace.

위와 같이 수안목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음식관을 하게 된다.
즉 지혜롭게 생각한 다음 음식을 취하는 것이다.
즐기거나 자만하거나 몸을 윤택하게 만들거나 또는 몸을 가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 몸을 유지, 지탱하기 위해서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음식을 취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묵은 고통을 피하고 새로운 고통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먹는 음식의 균형을 알게 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음식은 수행에 있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 번 먹게 되는 식사를 한 번이라도 거르게 되었을 때 우선 신체적으로 건강이 약한 사람의 경우 저녁 늦게까지 수행을 끊임없이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적절한 음식은 수행상의 집중력을 강하게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적당하게 취하면서 고통의 종식에 이르는 길을 계발하기 위한 충분한 힘을 가져야 하겠다.
음식관에 대해서는 경전에 이미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는 식염상(食厭想;Ahare Patikkula sanna) 수습법(修習法)2)으로 음식에 대해 혐오스러움을 일으키는 생각을 관(觀)하는 수행이다.
여기서 식(食;ahara)이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동사 a-hr(가져오다, 일으키다)에서 나왔으며,
또한 아하라(ahara)는 곧 아하라티(aharati;brings on, 기르다. ~에게 자양분을 주다. 키우다)에서 나온 말로,
즉 보존하고 유지하여서 장래에 무엇을 오게 하는 음식, 자양물, 양육을 뜻한다. 즉 가져오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여기서 식(食)이란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깨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식염상(食厭想)의 수습법에 대한 내용 역시 경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수행자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업처를 잘 파지하고 선사(禪思)하면서,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깨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음식에 대해 자세히 그 혐오함을 관찰한다. 즉 누누이 생각〔念〕하고, 마음에 두고 생각〔作意〕하고, 파들어가 생각〔觀察〕하며, 특별하게 택한 생각을 도려내듯이 거듭거듭 생각〔思擇思惟〕한다. 이렇게 잘 숙고한 자에게는 모든 장애가 사라지게 되면서 염(念)은 주립(住立)되며, 초기의 옅은 선정〔近行定〕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식염상을 수습한 수행자는, 맛에 대한 애착〔味愛〕에 대해서 마음이 멀어지게 된다.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만 음식을 먹는다. 즉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그는 음식에 대한 욕망이 제거됨과 동시에 차츰 더 모든 갈망으로부터 분리된다. 수행자는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수행자는 몸을 피곤하지 않게 하는 음식에 대해 적절한 구분을 통해 취하기 때문에 오욕의 탐착심에 대해서도 두루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오욕을 두루 알기 때문에 몸〔身〕에 대해서도 두루 잘 알게 된다. 따라서 그는 몸의 동작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완성하게 된다.

 

'Let go' 방하착 수행
수안목에서는 'Let go' 수행을 자주 권장한다. 즉 손을 앞뒤로 터는 듯한 동작을 100번씩 하는 것이다. '앞으로 뒤로' '앞으로 뒤로' 하면서 이것을 'Let go' 수행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Let go'는 '방하착'의 개념과 비슷하며 앞뒤로 손을 흔들면서 몸 안에 있던 게으름의 요소를 밖으로 던져버린다. 또한 좌선 중의 졸음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에 있던 욕망과 번뇌가 이 수행을 통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즉 '버림' '놓아버림' 수행이다.

3. 프로그램의 목적
'마음 개혁'과 '좀 더 자유롭게 됨', 이것이 본 수행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마음에 개혁을 일으킨다는 것은 평범하게 망상을 좇아 움직이던 마음을 본래 청정한 마음으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내가 더럽혀 놓은 물건들을 정리함으로써 원래 깨끗하던 사각 방이 다시 깨끗해지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수안목 명상 프로그램의 목적은 '좀 더 자유롭게 됨'이다. '좀 더 자유로워짐'은 곧 열반의 세계로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어 망상, 당황함, 두려움, 무지함 등에 지혜의 힘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수안목에서는 명상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은 크고 넓게 열리게 되며 자연스럽게 더욱 더 자유로움이 느껴지게 된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흥미있게 생각되면서 살 수 있다. 무엇이 생(生)하고 멸(滅)하는가에 대해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게 된다. 감정을 느끼면서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사마타(samatha; 止) 위파싸나(vipassana; 觀) 수행은 무척이나 가치 있다. 또한 사마타(samatha; 止) 위파싸나(vipassana; 觀)는 두 가지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는 곧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타(samatha; 止) 업처와 위파싸나(vipassana; 觀) 업처를 따로 분리하여 구분을 명확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만약 지(止)와 관(觀)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이는 마치 두 가지 일을 하는 것과 같이 그 계발의 속도가 더 느릴 것이다.
그러나 지(止)와 관(觀)이 하나의 것으로 통합될 때 한 가지 일을 동시에 같이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지(止)와 관(觀)은 동시에 계발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한 곳에 잘 머무르게 하면서 각각의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봄에 있어 진실된 특성을 지혜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굳이 두 가지로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 수행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의 수행에 변화가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이는 교학적으로 배웠던 수행이론의 여러 가지에 대한 실제적 경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수안목의 수행 프로그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4. 수행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근거
수안목에서 주로 강조하고 있는 수행은 안반념(安般念; Anapanasati)이다. 안반념은 중부(中部;Majjhima-nikaya) 118경 『출입식념경(出入息念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태국의 동북, 북부, 남부 각 곳에서 실제 수행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는 아찬 문(Ajahn Mun, 1870~1949) 전통을 이은 아찬 마하부와(Ajahn Maha Boowa,1914~) 등의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수안목(Suan Mokkh)에서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켰던 아찬 붓다다사 역시 출입식념수행법을 가르쳤다. 현재에도 붓다다사의 뒤를 이어 출입식념수행이 성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호흡관 수행을 꾸준히 함에 의해 수행자는 사마타(sama-tha; 止) 위파싸나(vipassana; 觀)를 거쳐 점차적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도를 얻게 되고 성스러운 과(果)를 얻게 된다. 처음 호흡관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 팔리 경전의 가르침처럼 '길게 …짧게…'浪H資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보충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호흡에 이끌게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면 이것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수식관(mental counting of the breaths)이다.
즉 inhale(count) one exhale(count) one
two two
five five
다음은 6까지, 다음은 7까지, 다음은 8까지, 9까지, 10까지, 체계적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다. 호흡을 세는 기술은 수행의 결과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개인의 수행에 적절하게 조정될 수 있다. 또한 호흡 수식관이 자신의 수행주제라면 숨을 '들이 마시면서' 각지(覺支; bodhi factor)를 계발해야 한다. 또한 니미타(nimitta; 相)에 숙련되어야 한다. 니미타(nimitta)란 곧 싱글(single) 포인트(point) 마크(mark)로 수행시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마치 이는 버스의 정류장과도 같고, 나무를 자를 때 그 한 지점을 대고 계속 톱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흡을 함에 있어서도 그 한 지점을 니미타(nimitta)로 보고 그것을 통해 전 수행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호흡을 할 때 니미타는 두 곳이며 이것을 통해 전체의 호흡을 경험할 수 있다. 호흡은 마음의 집중과 고요함을 더욱 더 강화시킨다. 수안목에서는 수행자들에게 호흡관에 대한 많은 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호흡수행을 권장하고 있다.

<호흡수행의 장점>
① 업처 취득의 편리함
호흡관은 '호흡'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명상수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도과(magga-phala;道果)를 이루고 해탈에 이르는 데 완벽한 작용을 한다. 다른 수행에 비하여 들이쉬고 내쉬는 '흡(吸)'과 '호(呼)' 단지 이것만이 수행의 업처가 된다. 무엇을 따로 장치하거나 움직이고 변화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호흡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현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호흡관은 수행을 하는 데 있어 내가 수행하기로 결심을 함과 동시에 '바로 지금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디를 가든 호흡은 수행자와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호흡관 수행자는 늘 수행의 업처를 쥐고 다니는 것이다.

 

② 위해(危害)함이 없음
호흡관은 극히 정교하고 정련된 명상주제이기 때문에 수행 도중 어떠한 두려움도 흥분감 또는 혼동 감등을 느끼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시체관을 하였을 때 오게 되는 두려움 같은 것이 호흡관에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도중 호흡관 수행이 잘 계발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한 사항 외에는 별다른 위험이 없다. 그래서 팔리 경전에서 붓다가 말씀하신 대로 호흡관은 수행업처 중 가장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호흡수행을 하기 전 준비사항>
① 마음 깊은 귀의
성공적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佛)·법(法)·승(僧)에 대한 완전한 귀의가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마음은 수행자 자신으로 보아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심이 없는 자에게는 수행의 성취보다 장애가 더 많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명확한 지혜를 가지고 계를 지키고 염불을 하게 된다면 수행자의 노력에 보다 더 큰 힘을 갖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수안목에서는 염불 시간을 통해 계를 지키는 의미와 불법에 귀의하는 깊은 마음을 하루에 한 번씩 가지게 한다.

 

② 건강함과 위의(威儀)
일반적으로 좋은 건강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건강은 곧 언제라도 수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건강은 가장 이상적인 수행의 준비물이라 할 수 있다. 수안목에서는 하루에 한 시간씩 요가 수행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힘이 되고 있다. 또한 위의(威儀) 역시 중요한데, 전통적인 연꽃좌가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의 자세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사람의 경우 연꽃좌는 똑바로 가장 오랫동안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자세이다. 그러나 수안목에서 수행하고 있는 서양사람들은 이러한 자세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반가부좌나 작은 의자 사이에 다리를 넣고 수행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③ 호흡 수행 중의 제장애
다리가 아프거나 모기나 개미가 와서 몸을 자꾸 물게 되면 자연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실제로 수안목에는 개미와 벌레들이 무척 많아서 몸의 여기저기가 불그스레하다. 이러한 제장애를 그냥 무시하면서 수행을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숙고는 좋은 지침이 된다. 즉 '모든 현상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라고 하는 인과적 본성에 대한 숙고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고통이 일어났다' 또는 '이 고통은 큰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일어난 고통은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숙고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숙고를 자주하게 되면 점차로 고통이 사라지게 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곧바로 호흡에 대한 관법으로 마음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④ 수행의 시간과 길이
호흡수행의 '적당한 시간'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호흡 수행을 하게 되면서 이 수행은 하루의 다양한 시간 속에서 어느 때든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차를 타고 가는 도중이든 일을 하는 도중이든 호흡수행은 가능하다. 또한 오랜 시간 수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선정력과 지혜의 힘이 점점 더 예리해지고 명료해짐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걸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호흡수행이 진행됨을 알게 됨으로써 좌선에서의 호흡수행뿐만아니라 다른 여러 위의(威儀)에서도 수행이 진행됨을 알게 될 것이다. 수행의 시간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 단지 시작해라. 지금 여기서, 수행이 계발됨에 따라, 수행의 시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⑤ 수행의 장소
팔리 경전에는 숲 속, 또는 고요하고 조용한 장소를 수행의 장소라 한다. 고요한 곳에서 수행을 할 수 있을 때 그 이득은 무척이나 크다. 그러나 사실상 수행은 바쁘고 시끄러운 시장 그 어디에서도 수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다만 시작의 단계에서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곳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

 

⑥ 스승
좋은 스승과 선우를 만남은 수행에 있어 매우 큰 이득을 가져온다. 좋은 친구는 법을 지지해주고 행복을 가져다주며 수행을 같이하고 서로에게 차분한 마음과 지혜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친구를 알게 된다는 것은 곧 법을 알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정(定)을 계발하는 좋은 친구가 서로에게 되어야 하며, 우선 먼저 내가 밝은 수행에 빛을 모아야만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계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스승은 바로 수행 그 자체이다. 이는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같다. 아무리 스승이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 주더라도 본인이 직접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안 되는 것이다. 즉 자전거를 움직이는 실제적인 움직임이 곧 스승인 것이다. 명상에서도 실제로 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곧 스승인 것이다.

 

(7) 무아(anatta)
붓다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 즉 무아(無我)에 대한 숙고를 통해 수행은 점점 더 성숙해지게 된다. 즉 '하는 자' '명상 자' '아는 자'는 곧 '마음'인 것이지 '아(我)'가 아니고, 내가 아닌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더 깊은 경험이 진행됨에 따라 수행의 깊이는 더 깊어지게 된다.

 

Ⅲ. '깨달음'에 대한 인간의 욕구로서의 수행

우리는 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가? 왜 어려운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접근하고자 하는가? 이는 바로 '고통스러움'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苦)'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苦)'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바로 수행인 것이며, 이러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첫째 욕구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해 살펴보고, 둘째 고통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욕구의 두 가지 종류 chanda와 tanha3)
인간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욕구가 있으며, 이를 chanda와 tanha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보겠다.
① Tanha
먼저 보다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욕구인 Tanha에 대해 살펴보면, 이것의 특징은 '잠복적인 성향?)과 '산만함'이다. 또한 Tanha의 세 가지 종류는 다음과 같다.5)
첫째 Kama-tanha로 이는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욕구이며, 둘째 Bhava-tanha로 이는 존재에 대한 욕구이다. 셋째는 Vibhava-tanha 즉 비 존재에 대한 욕구 즉 자아 적멸(自我 寂滅)에 대한 욕구가 이것이다. 이러한 Tanha는 정신적인 산만함의 총칭인 Papanca 중의 한 가지로 Papanca에는 tanha, Ditthi, Mana가 있다.6)
즉 Ditthi는 잘못된 견해(邪見)7)이며 Mana는 자만심, 독단 등을 의미한다. Tanha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受) 즉 느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을 향해 간다. 둘째 자신에게 흥미를 가져오는 대상에 대해서만 갈구를 하게 된다. 셋째 무명(無明)과 무지(無知)에 의해 자라나고 영향을 받는다. 넷째 욕망에 눈먼 마음은 점점 더 그 힘이 약해진다. 다섯째 우리 자신의 욕구와 이득에 대해 투쟁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② Chanda
Tanha에 비해 chanda는 갈망은 갈망이되, 열반성취의 길을 위한 의지이다.
이는 첫째는 열망, 포부, 향상심을 뜻하며8) 둘째는 정진력(Viriya) 즉 에너지가 가득 찬 노력을 동반한 향상심이고, 셋째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능동적인 의욕감'을 뜻한다. 즉 이같이 Chanda는 자아의 선(善)을 증진시키려 하는 욕구라 하겠다. 그리하여 '진실로 행복하기 위한 욕망'을 dha-mma chanda와 kusala chanda로 구분할 수 있다.9) 첫째 dhamma cha-nda는 올바른 무언가를 향한 욕망이며, 욕망의 대상이 '진리(眞理)'이고 둘째 kusala chanda는 기술적인 향상을 위한 욕망으로, 욕망의 대상이 '선(善)'이다. '진리(眞理)'와 '선(善)'은 정진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동함'을 낳게 되며 무언가를 구하게 된다. 즉 chanda는 진리와 선(善)을 낳고 이는 정진을 통해 얻으며 곧 '행동'하게 하고 '구(求)함'을 갈구하게 된다. chanda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익(有益)한 것을 향해 간다. 둘째 노력과 행동을 따르게 하며 지적인 숙고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셋째 지혜(智慧)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넷째 점점 더 우세하고 강력한 힘으로 자라난다. 다섯째 우리의 욕구에 대해 보다 더 조화로운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여섯째 갈망에 대해 지적인 숙고로 인해 이는 행복해지는 것을 깨닫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상을 살펴보았을 때 chanda와 tanha의 공통점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차이점은 chanda는 지적인 숙고를 통해 일어나는 욕구인 반면, tanha는 무지에 대한 반작용의 습관적인 한 부분으로 생겨나는 욕구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가지 비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더 계발시켜야 하고 무엇이 보다 더 나은 욕망인지 바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행의 장애가 되는 욕망이란 위의 Kama-tanha로,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자극으로써 마음에 입력되어 쾌감이라는 결과를 낳고,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을 감각대상에 얽매이게 만드는 감각적 대상에 기인하는 욕망(kama)을 뜻한다. 또한 우리가 수행을 하려고 하는 욕구라든가 불법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 등은 모두 chanda로 이러한 욕구계발이 곧 수행의 실천을 낳게 하며 용맹정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이와는 반대로 또한 우리에게 수행을 하고 싶게 하는 심리적 자극으로는 곧 고(苦)에 대한 경험을 들 수 있다. 즉 고에서 벗어나고 고를 사라지게 하는 길을 알기 위해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고(苦)
인간은 누구나 오온(五蘊)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오온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결국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대 소승을 막론하고 중요한 하나의 테마인 것이다. 본 글에서는 '고(苦)'의 종류를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즉 '필연적인 고(苦)'와 '마음에서 만들어낸 고(苦)'이다. 즉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갈 수 있는 고통이 있다는 것인데 그 각각에 대해 살펴보겠다.
① 필연적인 고(苦)를 위한 관법(觀法)
생(生)과 사(死), 현재의 늙어감(老)은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인 고(苦)로, 이에 대해 바로 관(觀)하는 것 이것이 곧 고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이에 대한 바른 관법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첫째 명색(名色;nama-rupa)에 대해 명확한 관찰을 한다. 둘째 과거에 있어서 나의 처음 시작인 '생(生;jati)'에 대해 관찰을 하라. 셋째 계속되는 나의 성장과 변화를 관찰하라. 즉 지금까지 나를 계발시키고 변화시키는 그 과정을 살펴보라. 넷째 미래의 변화는 마침내 이 명색(名色;nama-rupa)이 다 분해되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계속되는 변화인 노(老;jara)와 종국의 사라짐인 사(死;marana)에 대해 바르게 관(觀)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관(觀)은 우리의 마지막 변화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언젠가는 죽게 된다.?0)
즉 죽음은 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죽음에 이르는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관(觀)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법을 한 수행자는 삿된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 등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때로 이러한 관법은 죽어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진리에 대한 문제 접근에 있어서 잘못된 두려움만 증대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형식에 대해 정확하고 적당하게 관찰하는 것만이 이것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멈출 수가 있다.
위와 같이 사물의 피할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올바른 통찰과 인식은 생(生) 노(老) 사(死)에 대한 진리를 자기 자신의 진리로 통합시킬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진리는 '시작' '중간' '마지막'이라고 하는 내면의 관찰을 통해 현재 이 곳에서도 관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의 눈이 열리자마자 그는 어떠한 것의 전체를 볼 수 있다. '그 무언가'를 봄에 있어 전체의 상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사건의 전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관찰하게 된다. 즉 태어남은 시작〔生〕이며, 나이 먹고 노화됨은 곧 그 중간〔老〕이며, 사라짐 죽음은 곧 그 마지막〔死〕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현재에서 볼 수 있으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만이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전체의 진리(시작&중간&마지막)를 관통할 수 있게 한다. 그러기에 수행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러한 전체성의 색(色)과 명(名)을 정확하게 보게 되면 곧 '이러한 조건(生 老 死)'에 대한 어떠한 혐오 또는 두려움이 멈추게 될 것이며, 이미 이러한 진리가 너무도 정상적인 과정이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것도 더 강하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특별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떠한 것도 굳이 좋아하거나 혐오하고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고(苦)'가 바로 우리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종류인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은 통찰력 있는 수행을 통해 그리고 계속된 수념(隨念)을 통해 원만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② 피할 수 있는 고(苦)를 위한 관(觀法)
이는 마음으로 만든 고통스러움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며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얼마든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고통의 종류이다. 곧 피할 수 없는 고통인 '태어남〔生〕·늙어감〔老〕·병듦〔病〕·죽음〔死〕'과는 달리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는 고통인 것이다. 우리가 바깥경계〔外境〕에 마음의 초점이 모아지게 되면 곧 명(名;nama)이 형성된다. 그러기 때문에 색·성·향·미·촉 등에 마음이 이끌리기 전에 바른 념(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외경(外境)에 마음이 집착되게 되면 고(苦)의 프로그램이 시작되게 된다. 그리하여 고통스러운 감정인 슬픔(Soka)이라든지 고통스럽다는 생각의 과정이 계속적으로, 급격하게 진행됨에 따라 비탄감(Parideva) 등이 생기게 되고 고(苦)가 점점 계속 퍼지게 된다. 또한 외적인 환경의 어려움이 계속될 때 사람은 곧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경직되고 억압된 감정 속에서는 어떠한 행복감도 일어나지 않게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사람은 안간힘을 다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때때로 고통은 직접적으로 마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몸이 아플 때 역시 생겨난다. 이것을 신체적인 아픔이라 한다. 이러한 육체의 고통이 때로는 마음의 고통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즉 신체가 약해지면 곧 마음은 걱정에 빠지게 되며 자신의 회복 등에 대한 불안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히게 되며 정신적인 혼란과 후회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일러 마음의 고통이라 한다. 이상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고통의 종류들로 올바른 관법을 통해 줄어들게 될 것이며 점차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관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즉 다음과 같다. 만약 고통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바로 보고 이해하라.
"이는 어떠한 사건이나 다른 무엇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다른 무엇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곧 내 안에 있는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온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마음은 계속적으로 '이름' '의식되고 있는 것' '감정' 등의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의해 이끌리기 마련이고 이것이 곧 고통과 슬픔을 일어나게 한다. 이러한 마음을 잘 단속하게 되면 결코 '고(苦)'의 종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에 대한 정확한 앎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생긴 고통은 점점 더 줄어들 수가 있다.
이상으로 피할 수 있는 고통과 피해갈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바른 관법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점차로 고(苦)에 대해 바른 인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Ⅳ. 깨달음의 접근 구조

1. 깨달음의 대상
종교적인 삶의 근저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행위의 정당성을 유지시켜 주는 진실 즉 '가르침'이 있다. 이렇게 '교법' '진실'이라 표현될 수 있는 것이 담마(法, dhamma)이며, 담마는 '지탱하고 유지시켜 준다'라고 하는 용어 자체의 의미처럼 인간을 보다 참된 존재로 유지시켜 준다. 여기서는 깨달음의 대상을 '법'으로 총칭하여 살펴보겠다. 그렇다면 법은 무엇인가? 법(法; dha-mma)은 매우 중요하고도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의 하나로, 열반에 이르기 위한 제반의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법(法)을 통해 모든 번뇌를 다 포기하게 되고 갈애를 뽑아버림으로 인해 수행자의 마음은 어떠한 것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고요하게 된다. 더불어 정신적인 요소들을 점점 더 높은 수준에 이르게 해준다. 현대 남방선지식인 U Pandita Sayadow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첫째 법은 잠겨져 있는 뜻을 꺼내, 이론과 실제 수행을 접목시키는 것이다.
하게 된다. 더불어 정신적인 요소들을 점점 더 높은 수준에 이르게 해준다. 현대 남방선지식인 U Pandita Sayadow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첫째 법은 잠겨져 있는 뜻을 꺼내, 이론과 실제 수행을 접목시키는 것이다.
둘째 법에는 to carry to convey(something)' 즉 이끌어 주다'는 의미가 있다.
셋째 법은 적(敵)으로부터 지켜 주도록, 자신의 삶의 질을 높여 주도록, 보호해주도록 이끌어 준다는의미가 있다. 또한 Payutto는 dhamma를곧 자연의 법칙' 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는 물질적, 비물질적인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불교에서 전적으로 디루고 있는 주요한 주제는 '지금 이것이 일어나고 있는 까닭' 그 원인에 대한 것과 상호 의존성'에 대한 것이다. 사물이 보여주고 있는 자연적인 과정, 이것을 자연의 법칙 이라 하며 이를 곧 niyana라고 정의한다. 자연의 법칙이 언제나 확실하며 필연적이듯이 법 (法;dhamma) 역시 그러함을 의미한다. 주석서에 의거하여 payutto는 niyama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다.
첫째 Utuniyama 이는 기후 또는 낮에는 피고 밤에는 지는 꽃의 현상 또는 물과 양분이 나무를 자라게끔 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환경에 맞게 변화하는 제 현상들을 말한다. 이는 열이나 온도에 의해 초래되는 변화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둘째 Bijaniyama로 이는 형질, 유전에 관계되는 자연의 법칙을 의미한다. 이 법칙에 가장 적합한 표현 하나는 즉 뿌린 대로 거둔다' 이다. 셋째 Cittaniyzma로 이는 마음의 작용과 관련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한다. 즉 감각기관의 인식과정과 그것에 대한 정신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넷째는 Dhammani-yama로 이는 모든 것의 상호작용과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즉 모든 것은 일어나고, 존재하고, 그리고 멈춘다. 모든 조건지워전 것은 곧 변화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것에는 나라고 할 것도 없다. 이것은 하나의 규범이고 법칙인 것이다. 이상을 정리해 보았을 때 1,2,3의 niyama는 모두 4의 범위 안에 속하고 있다.
즉 아래의 3가지는 4번째 niyama의 범위를 세분한 것이다."11) 이와 같이 법의 본성 안에는 사물의 모든 법칙이 들어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이상의 법12)에 대한 숙고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대상을 발견할 수 있게 되며 직접적인 수행의 대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은 엄격하고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며 법은 추측과 사량분별의 결과가 아니다. 또한 법은 개인적인 깨달음의 완성 결과이고 법은 어떠한 것, 어떠한 곳에서도 다 귀중하다. 그리고 법은 붓다에 의해 발전된 선정의 기술을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생산해내고 동시에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준다.
즉 법은 고통이 되는 원인을 제거해 줌과 동시에 고통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게 한다. 지금 수행한 결과 지금 바로 이익을 얻는다. 이같이 법을 통해 우리는 담겨 있는 진리를 깨달고 이에 대한 체험을 하여 참다운 수행의 의미를 알게 되며 또한 점점 더 깊고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사물 일체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된다. '임지자성(任持自性) 궤생물해(軌生物解)' 라 하는 법의 성질처럼 그자체의 본질을유지하면서항상규범이되고사물에대한이해를 발생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으로 법(法)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2. 남방선의 수행 양상
선(禪)은 깨달음을 얻어 자유의 몸이 되고자 하는 데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지름길을 택하는 데에는 몇 가지 다른 길이 있다. 현재 남방에서는 이와 같이 깨달음을 얻고자 원하는 몇 부류의 수행자가 있다.이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Foresty monks로 이는 숲 속에서 매우 심도 깊게 수행을 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Samatha(止)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며, 전문적인 수행 테크닉을 가지고있다. 그래서 모든것을오직 'Calm mind' 즉고요한 마음을 얻기 위해 방하착한다. 즉 다 내려 놓고 '하는자 없는 함(Doing without doer)' 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수행업처를 계발시킨다. Foresty Monks는 Suan Mokkh의 곳곳에서도 발견할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쿠티(KUti)'라고하는 작은 오두막에 거처하면서 오직 수행만을 하고 있다. 몸 동작 하나하나에 사마디 수행을 싣고 움직이는 그 모습은 진정한 수행자의 상인 듯했다. '
둘째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수행을 하는 부류로, 이들은 Vipa-ssana(觀) 수행을 통해 진리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 즉 Samatha 수행주제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을 끊임없이 쥐어잡고 정진하면서 우선적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그와 함께 Vipassana 수행을 통해 모든 감각(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 감각)과 육체적인 몸을 키우는 데 포함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하는 자(Doer)' 의 자유를 얻고 그것을 깨닫기 위해 계속 수행하는 것이다. 명학한 바라봄을 통해 일상의 삶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감과 동시에 사물을 관통하는 예리한 시각으로 자유의 길이 되는 모든 것을 수습한다. 남방의 선에 대해 우리는 보 통 Vipassana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 Vipassana(觀)는 일상의 삶 속에서 활동선(活動禪)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수행법이다.
수안목에서는 'Breathing-In & Out' 즉, '호흡'을 Vipassana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라 보고 있다. 또한 'Anapanasati method' 를 통해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우리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수행에는 반드시 지적(知的)인 지성(知性)' 이 요구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계속적으로 'In & Out' 하면서 호흡이 하나로 곧게 모아질 때까지 산란심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 자연스러운 집중과 주의깊음에 대한 명상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일상의 일을 자연스렵게 하면서도, 또한 부딪치는 삶의 문제에 대해 분석을 함과 더불어 무상함에 대한 숙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수행법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 특별한 행복을 제공해 줌과 동시에 유동적인 지성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더 높은 사고의 개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며 일상의 일을 성취하면서도 점점 더 '행하는 이'로서 자유를 얻게 된다. 이상 수행법상의 차이에 따라 남방의 선을 2가지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수행을 하고 있는 주체에 따른 2가지 부류도 있다. 즉 일상인의 수행과 출가자의 수행이 그것이다. 첫째, 일상인이 하는 수행은 때론 기술적인 수행과 때론 기술적이지 못한 수행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상의 사람에게 적합한 수행이다. 다음 출가자의 수행이란 자연에 대한 본연의 진리 또는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연구를 하는 것이다. 이는 선(善;kusala)과 악 (惡;akusala), 이중의 것을 초월한 그 무엇에 대한 진지한 연구이다. 또한 이는 불교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는 범위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상으로 남방선의 여러 양상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V. 결론
수안목에서의 수행코스는 명상수행을 아직 해보지 못한 초보자의 경우 매우 독특한 자아경험을 실현하게 할 것이며, 수행을 해본 이에게는 보다 더 깊은 수행의 세계를 열게 해줄 것이다. 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지하면서도 체계적인 수행은 첫째 번뇌를 일으키는 자신의 습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해주며, 더불어 습성의 발견을 퉁해 자유로움을 가로막고 있는 요소들을 철저하게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samatha와 vipassana를 통한 행주좌와(行住坐臥) 각각의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게 됨으로 인해 자신에게 적합한 수행의 자세를 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수행의 세계가 보다 넓어지고 명확해 짐을 알게 될 것이다.
명상수행은 곧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험이다. 즉 마음이 얼마나 광대하고 깊은 지 그리고 때때로 그마음이 얼마나 복잡한 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탐험 '은 때론 아름다운 순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어려운 작업이다. 보다 더 깊게 스스로의 마음에 도전해야 한다. '시도' 하는 그것 자체가 곧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 이 될 것이며 분명 명상 이전의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평화에 대한 맛을 알게 됨으로써 초월적이고 더 깊은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명상수행은 자기 자신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즉, 나의 주위와 모든 것을 명상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 이상으로 수안목의 여름우기철 명상수련에 대해 첫째는 남방의 선이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세계의 구도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며, 둘째는 남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제 수행법의 근거는 Pali 경전이며 이를 적절하게 음용하여 수행법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방의 여러 선지식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동남아시아 곳곳에 많은 명상센터가 건립되었다. 매달 풍부한 수행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면서 불도(佛道)의 전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그들이 있기에 세대를 거쳐 불법의 향기는 끊임없이 세계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수행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본 글을 마친다.
"좀 더 행복해라, 좀 더 평화로운 세계가 곧 열리게 될 것이다."

각주
1) 자비관 수습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
{Digha-nikaya} ⅱ, 49 : {Dhammapada} 184, 399 {Sanyutta-nikaya} ⅰ , 222 : {Anguttaranikaya} ⅱ, 345
2) {Sanyutta-nikaya}. 197
3) {Buddhist Economics} P.A. Payutto, BUDDHADHAMMA FOUNDAYION BANGKOK THAILAND, 1998, p. 40 中
4) D.Ⅲ, 254, 282
5) A.Ⅲ, 445, Vbh. 365
6) S.Ⅲ, 97 中
7) 인간의 행동에 어떠한 효능도 없다는 견해. 또는 因果가 없다는 견해. 또는 허무주의 등.
8) D.Ⅲ, 221, Vbh, 216
9) {Buddhist Economics} P.A. Payutto, BUDDHADHAMMA FOUNDAYION BANGKOK THAILAND, 1998, p. 33~34 中
10) S.ⅱ, 194; MA. ⅰ, 115
11) {Buddhist Economics} P.A. Payutto, BUDDHADHAMMA FOUNDAYION BANGKOK THAILAND, 1998, p. 1~3 中
12) 法(dhamma)은 'what-can-be-remembered' 또는 'what-can-be-bornne-in-min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첫째로 법칙, 우주의 법칙 등과 같이 being subject to or having the nature of 로서의 법이 있으며, 둘째는 'something known or thought of'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법을 현상(phenomenon)으로보기도 한다. 이 외에도 법에 대한 정의가 여러 경전에 보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DA. i 99에는 ①guna(moral meritorious special qualty) ②desana(preaching of the Law) ③pariyatti(scripture) ④nissattatta(no-livingbeing-ness) 또한 Dhs A. 38에는 ①pariyatti(scripture) ②hetu(cause of effect as law) ③]guna(moral meritoious special quality) ④nissattata-nijjivata(no-livingbeing-ness and soullessness) MA. I, 17에는 ①pariyatti (scripture or mastery A. iii, 86) ②sacca(truth Nin, I, 12) ③samadhi(concentration D, ii, 54) ④panna(understanding J, I, 280) ⑤pakati(nature M, I, 162) ⑥sabhava(individual essence Dhs. 1) ⑦sunnata(voidness Dhs. 25) ⑧punna(merit Sn.182) ⑨patti(offence Vin, iii, 187) ⑩neyya (what is knowable Ps. ii,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