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_05

醉月 2013. 12. 11. 09:19

제 2 부 카멜레온의 노래
- 끝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 -

제 1 장. 공중분해 되는 자본주의

□ 그대, 아직도 에덴(Eden)을 꿈꾸는가?

『성경』의 창세기에는 에덴(Eden)이 나옵니다. 에덴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위치는 대체로 현재 이라크(Iraq) 인근으로 추정됩니다. 에덴은 '기쁨(pleasure)' 그 자체로 그 곳에는 고통도 싸움도 없고, 아담과 이브에게는 항상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넘쳐나 마음대로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단 한 가지 명령을 어겼습니다. 교활한 뱀의 유혹을 받아 그들은 그 열매를 먹었던 것이죠. 그 징벌로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벌거벗은 채로 살았던 낙원에서 쫓겨났고 에덴의 문은 불칼을 든 천사가 막고 있어 다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 에덴에서의 추방(미켈란젤로 그림)

서양에서 말하는 인류의 최초의 세계인 이 에덴은 처절한 삶의 투쟁도 없고 아름다움과 풍성한 과일로 넘쳐나는 정말 신나는 곳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설령 그런 곳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두고서는 유지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토드 부크홀츠(Todd G. Buchholz)의 『러쉬(Rush)』가 한국에 출판되었습니다.(1) 이 책에서 저자는 "에덴은 어디에도 없다 … 태초부터 경쟁이 있었을 뿐."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한경쟁 멈춰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식의 달콤한 위로는 신기루라고 말합니다.

에덴주의자들은 '미친 무한경쟁을 중단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하면서, 현대인을 '쾌락의 러닝머신' 위에서 끝없이 질주하는 신세라 동정하고, 경쟁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라 질타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 에덴주의자의 생각들이 모두 낭만적인 허구이며 그 동안의 연구들을 보면, 야생은 비참했고 인류는 처절한 땅에서 인정사정없는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왔다고 합니다. 자연의 출발점은 가난이었고 경쟁은 삶의 숙명이자 조건이었다고 강변합니다. 에덴주의자들은 경쟁이 불평등을 낳았다고 하지만 경쟁 시대 이후에야 생필품 값은 사상 최저로 내려갔고 평균 수명은 지난 150년 사이 2배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팽팽한 경쟁과 긴장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데, 사랑과 새로운 지식, 부 등을 맹렬히 추구할 때 도파민(dopamine, 쾌락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야심이 없으면 뇌세포도 시들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창세기의 이야기는 어떤 상징일 수가 있겠지요. 아담과 이브가 먹은 '선악과(善惡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아담과 이브가 그 선악과를 먹기 전후의 사정들을 알아봐야겠죠. 이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나타난 드라마틱한 변화를 살펴봅시다.

아담과 이브는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 이브는 잉태하는 고통을 느끼게 되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자식을 낳아야 하고, 자신이 남편의 종이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아담은 땅의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땅을 종신토록 힘들게 경작하여야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이전에는 이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소나 돼지, 닭 등도 사람이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이어도 잘도 살아가지 않습니까? 만약 그들이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여 스스로 단결하고 집단으로 자살을 감행하거나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면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이 올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들은 그러지를 못합니다. 바로 자아관념(自我觀念, the sense of self)이 없기 때문이죠. 자기 자신을 철저히 하나의 객체(客體) 또는 대상(對象)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덴에서 추방된 것은 인간이 자아관념을 가지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에 자살(suicide)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아의식의 유무를 판단하는 가장 쉬운 척도는 본능이 아닌 '자신의 의지(will)에 따라 자살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아관념(自我觀念)을 왜 기독교에서는 죄(罪)라고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요지는 이 자아관념이 이기심과 욕망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강력히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타당한 말이기도 합니다. 종교는 개인적인 삶을 도덕적으로 영위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 국가인 어느 나라에서는 "남자가 40이 넘었는데도 종교가 없으면 위험한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도 한답니다. 남자가 40이면 돈도 많을 것이고 온갖 쾌락도 알만한 나이이니, 규제받지 않으면 그만큼 타락하기가 쉽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만약 인간이 가진 이 자아의식이 지나치게 규제된다면, 중세의 유럽과 같이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래도 탈 저래도 탈이지요.

(1) 대변혁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의 많은 이론가들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그 사상들은 이미 1980년대에 한국에서도 충분히 거론되었고 사회주의 국가군도 몰락했기 때문에 이제는 보다 자유로운 통찰력을 가진 저술가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말의 기원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자본(capital)이라는 말은 현대에서는 종자돈 즉 '돈놀이를 해서 돈을 벌게 해주는 돈 (money making money)'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원래는 라틴어의 카피탈레(capitale)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머리(head)를 뜻하는 프로토 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인 카풑(caput)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가축(cattle)이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유물(chattel) 등의 말도 이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원래 소나 가축 또는 노예 등을 의미하는 말이 현대에 와서는 오로지 돈(money)의 의미만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13세기 이후부터 자본(capital)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고, 17세기에는 자본가(capitalist)라는 말이 등장하였지만,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말 자체가 씌여진 최초의 책은 영국의 대문호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가 쓴『뉴컴 일가(The Newcomes, 1854)』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는 『공산당 선언』이 출간된 바로 직후이기 때문에 1850년대를 기점으로 자본주의라는 말이 크게 확산이 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습니다.

폴라니(Karl Polany,1886∼1964)는 자신의 주저인 『대변혁(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자본주의를 '시장(market)'과 '사회(society)'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분석합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경제가 국민국가에서 요구되는 사회복지(social welfare)와는 근본적으로 함께 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졌다고 합니다.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절대명제인 '시장의 마술(the magic of the market)'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인간의 역사에서 완전히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는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경우(historically unique)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조절이 안 되는 자본주의란 결국 파시즘(Fascism)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전혀 통제되지 않으면 파시즘으로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 독일의 파시즘(나치스 정치집회 광경)

마치 『공산당 선언』에 보이는 "현대의 부르조아 사회는 자기가 주문으로 불러낸 지옥의 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할 수가 없는 마법사와 같다(Modern bourgeoisie society is like the sorcerer who is no longer able to control the power of the nether world whom he has called up by his spell.)."라는 문장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도 같습니다.

폴라니 이론은 매우 어렵지만 간단하게 그의 이론을 요약해봅시다.

우리가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시장(market)은 원래 '사회(society)' 조직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capitalism)가 등장하면서 시장이 사회로부터 분리해 나오더니 사회와 대립하며 결국 사회를 집어 삼켜서 사회를 시장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말았습니다. 즉 사회의 조직의 일부로서 기능을 해야 할 시장이 사회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히려 사회를 지배하는 현상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폴라니의 말은 결국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기조절의 기능을 상실하여 제국주의(imperialism)가 나타나고 이것은 세계대전(World War)로 귀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 제국주의에 이르는 '시장사회(market society)'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하고 심각한 도전이라는 말입니다.

폴라니는 시장이 항시 자기 조절적 기능을 다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오히려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본주의 경제학 전체를 뒤흔드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우아함이 바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폴라니는 사회 내부의 조직으로 존재하던 시장(the existence of markets in society)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히려 사회를 지배하는 시장사회(the existence of market society)가 되어버린 것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지적하였습니다.

폴라니의 생각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ideologue)인 아담 스미스와도 다르고 반자본주의 패러다임의 기수인 마르크스와도 다른 독특하고 대담한 이론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소위 근대경제학자들은 모두 외면했지만 폴라니의 견해는 앞으로 자본주의의 향방을 알게 하는 주요한 암시들을 하고 있습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세계시장의 붕괴가 제국주의, 파시즘, 세계대전을 초래하는 데서 보듯이 '시장사회'가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이 경제적 착취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폴라니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인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거부하고 경제(economy)를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hip)에 굴복시키는 인간의 역사적 능력을 중시하였습니다. 즉 인간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은 자유방임의 시장 논리보다는 사회의 전체적 구조 하에서 경제가 제 구실을 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국가나 사회가 시장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설령 한국이 시장을 사회라는 큰 조직 안에 둔다고 해도 다른 나라에서 시장이 독립적으로 활개를 치면 국제화된 환경 속에서 한국의 시장을 운영하는 주체(기업)들이 외국의 기업들을 이기기가 힘든 상황이 됩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딜레마(dilemma)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포(르)노 그라피 산업들입니다. 국내에서 아무리 규제를 해도 국경이 의미가 없는 인터넷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면서 자동차나 선박 반도체, IT 제품들을 수출해서 포(르)노 그라피 시장에 들이붓고 말게 되기도 합니다. 특히 섹스산업 자체가 원천적으로 금지된 이슬람 국가들은 한국보다 훨씬 열악합니다. 인터넷은 종교를 가리지 않죠.

통제력을 상실한 자본주의가 가는 길은 너무 뻔한 일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원의 낭비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보는 밤의 위성사진에는 미국이나 일본, 한국, 유럽 등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는데 그 만큼 지구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걸프전(Gulf War)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2) 위대한 사람들이 만든 타락한 국가

마하트마 간디(M. K. Gandhi)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국민은 영국인이고, 가강 싫어하는 국가는 영국"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긴 영국은 좀 특이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마을마다 토론문화가 발달해있었고 이것이 의회주의의 기반이 된 나라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향상을 위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온 청교도 순례자들(pilgrim fathers, 미국인의 선조 아버지들)도 영국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은 너무나 영국인 같아 ! (God is so much English !)"(2)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Revolutionary War)이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지적과 같이 '보다 올바른 영국'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비렉(Peter Viereck)이나 로시터(Rossiter) 등의 유명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3), 팝콕(Popcock)은 미국 독립을 위한 전쟁(revolutionary war)은 "과거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영국의) 원래의 원칙으로 돌아가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4)
▲ 미국의 독립전쟁 기록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빛나는 의회민주주의(Parliamentary Democracy)의 전통을 가진 영국과 그 사촌(cousin)인 미국인들은 세계 최초의 공화정(Republic)을 만들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굳건한 기초를 닦았습니다. 미국의 건국은 로크(John Locke)의 『시민 정부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과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에 입각한 것이었고, 인간의 합리적 이성(reason)에 의해 구성된 자유민주주의의 이론들을 기초로 정치체제를 구축한 최초의 나라였습니다.

나아가 최초의 근대 경제학 원론인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되던 바로 그 해 7월 미국은 건국됩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입니다(우리는 미국을 역사도 200여년 밖에 안 된 신생국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아니죠. 적어도 자유 민주주의 정치나 자본주의와 관련해서 보면, 미국은 가장 오래된 나라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대에 맞지 않는 낡은 제도들도 많이 고수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은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원대한 야심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에도 물론이고 지금도 미국은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위대한 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은 국가라는 의식을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는 마치 로마 제국의 원로원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상원의원도 로마시대의 원로원(元老院, senate)의 호칭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민족의 나라들이 아편전쟁(Opium War, 1840)을 일으키고,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는 전쟁"인 베트남전쟁(Vietnam War)을 일으켰습니다.

아편전쟁은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습니다. 중국과의 무역 적자가 생기자 마약을 팔아서 무역수지를 개선하려고 했고 중국이 마약을 금지하자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다니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마약 갱들보다도 더 흉악한 일입니다. 베블렌(Veblen)이 말하는 영업정치(Business politics)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당시 영국의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 의원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그 기원을 놓고 볼 때 이 전쟁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A war more unjust in its origin, a war more calculated to cover this country with permanent disgrace, I do not know.) … (중략) … 우리 국기가 부끄러운 아편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연안에 나부끼고 있습니다. 자랑스런 우리 국기를 볼 때마다 느꼈던 벅찬 감동을 앞으로 다시 느낄 수 없게 될 것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 아편전쟁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의회에서 9표 차로 전쟁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동양사회에 유럽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고착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양인들은 자기에게 이익만 되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야만인들이었든 것이죠.

당시에 세계를 주도하던 패권 국가가 동양을 무분별하게 도발한 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불안정한 성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적어도 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서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해서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이 되는 구조였습니다. 마치 바퀴벌레가 생존의 위기가 오면 서로 잡아먹으면서 버텨내듯이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야만적 사고방식을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동양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블락(Fred Block)의 견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블락은 자신의 주저인 『국제 경제 무질서의 기원(The origin of international economic disorder)』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 미국은 서유럽 사회에 만연한 국민 자본주의(national capitalism)를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는 물리력이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매우 강하므로 보다 국제화된 환경만이 자국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자나 호랑이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에 갇힌 것보다는 풀어주면 훨씬 더 힘이 강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세계의 경찰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 수호 차원에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블락은 냉전(Cold War) 시대에 미국이 소비에트러시아(Soviet Russia :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위협보다는 오히려 서유럽의 자국 중심의 국민 자본주의의 난동(亂動)들을 더욱 고심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적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미국의 세계적인 패권의 장악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미국은 세계체제, 궁극적으로는 서유럽과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고 있는데, 서유럽과 일본은 자국의 이익 실현에만 혈안이 되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으로 간다는 것이죠. 왜 속담에도 있지 않습니까? 장사를 하다보면, '친구나 친척이 더 도둑놈'이라고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난동을 부리는 이들 형제 자본주의 국가들을 통제하기 위해 소련(소비에트 러시아)이나 중국(공산주의 중국)을 이용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미국은 실제로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하여 서유럽과 많은 자본주의 국가를 미국의 깃발 아래 단결시키고 많은 제 3세계의 국가들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사실 1970년대나 1980년대에도 소련은 "ICBM(대륙간 미사일)을 가진 제3세계"라는 말이 지식인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습니다. 특이한 일이지만, 한국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탄생 70주년이었던 1987년 후반기를 기준으로 보면, 미국과 겨루는 세계 최강의 사회주의 대국 소련의 전화보급률은 13%(당시 한국은 16%, 미국은 77%)에 불과했고, 경제성장률은 13.1%(1958) → 9.1%(1959∼1965) → 8.6%(1966∼1970) → 7.4%(1971∼1975) → 4.5%(1976∼1980) → 3.7%(1981∼1985)로 곤두박질하고 있었으며,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신경제정책 이전에도 이미 10만 명이 넘는 나레보(사익을 추구하는 불법 노동자)가 있었고 소련의 대외 수출품 가운데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원유, 천연가스 등 1차 산품의 수출은 70% 이상이었습니다.(5) 당시 소련은 만성적인 생산성 저하와 당시의 한국이나 대만(Taiwan)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생활 수준의 상태였습니다. 소련의 기업들에게 제품의 질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고스플란(Gosplan, 국가계획 위원회)이 매년 정해주는 할당량만 채우면 그 뿐이었습니다. 사회전역에는 무기력과 알코올 중독이 만연하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보면 과거에 소련이 한 역할을 아프간, 이라크 등을 거쳐 중국이나 북한(DPRK)이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중화패권주의를 노골적으로 행사하려하고 있고, 한국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북한은 극심한 인권탄압으로 그 빌미를 주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나라들이 세계인들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하는 명분을 미국에게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늑대나 하이에나가 있음으로써 라이언 킹(Lion King)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명분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분해되는 자본주의
-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면 비상한다. -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과정을 통해서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그 변혁의 힘으로 사회의 생산력이 해방되고 사회도 진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회사 조직이나 구성도 다양해서 자본가도 개념이 모호하고 노동자도 개념이 모호합니다. 사회운동도 정치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들이 나타납니다. 각종 서비스업이 크게 늘어나서 노동자 개념 자체도 모호해지고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노동자 자체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주택자들에 대한 혜택이 많아지자 돈이 있어도 일부러 임대하여 살면서 각종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강남에는 10억 원 전세에 살면서 무주택자의 혜택을 누리는 얌체족들이 있는가 하면, 7천만 원 이하의 빌라에 살면서도 각종 세금을 물고 혜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하우스 푸어(house poor)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6) 이와 같이 누가 플로레타리아(proletariat)인지 분간하기 힘들어 지고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또 플로레타리아가 되고 싶어도 못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모자동차 회사의 노조와 같이 귀족 플로레타리아도 많습니다. 그래서 플로레타리아들의 이해도 이에 만만치 않게 복잡합니다. 마찬가지로 지배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해는 더 복잡합니다.

1980년대 후반 래쉬와 우라이(Scott Lash & John Urry)는 주저인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종말(The end of organized capitalism, 1987)』에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심각한 균열현상을 지적합니다.(7) 사회에 만연한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상황이 해체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a reflection of phase of disorganized capitalism)이라고 지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들은 ① 견고하고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의 해체, ② 개인(individuality)의 중요성 강조, ③ 논리의 다양성, ④ 여성운동, 민족운동, 소수민족(minority)에 대한 관심 등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우리가 알던 모든 것을 일단 벗어나서 발가벗은 몸으로 존재에 다시 접근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서 과거도 가보고 필연적인 관념에서도 벗어나보라는 것이죠.

래쉬와 우라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들 가운데 ① 예술과 일상이 잘 구별되지 않는 점(refusal of the distinction between art and life), ② 새로운 계급갈등(New class fraction)의 등장, ③ 정체성(正體性)의 다극화(decentering of identity) 현상 등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조직화된 자본주의가 해체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품들은 단순히 그 효용성(utility) 때문이 아니라 개별적인 차이점을 견고히 구축하기 위한 그 상징적인 힘(symbolic power to establish individual distinction)을 위해 소비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회의 지배층들도 중심이 무너지고 다극화된 양상을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배층 내부의 이해관계도 복잡화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새로운 쁘디부르조아(petit bourgeoisie)라고 하기도 합니다.(8)

지배 계급이나 피지배계급의 내부에서 나타나는 이런 형태의 내분(內分)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이를 기반으로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지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서서히 태동하기 때문이죠. 어떤 의미에서 래쉬나 우라이의 말처럼, 우리들 인생이란 불연속한 사건들의 연속인 상태(the succession of discontinuous event)에 돌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배층의 분열은 변화의 가장 큰 전조(前兆)입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이면 비상하듯이 말이죠. 이것을 『공산당 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결국 계급투쟁이 결정적인 시기가 임박해지면, 지배계급 내부에서 지배계층의 작은 부분들이 스스로 이탈하여 표류하게 되고 이것이 혁명계급 즉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있는 계급과의 제휴하는 격렬하고 찬연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런데 래쉬와 우라이는 이것이 단순히 지배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피지배 계층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래쉬와 우라이는 개별국민 사회들은 '위로부터' 다양한 세계화의 과정을 밟게 되고 다극화되는 과정에서 '아래로부터도' 국민사회를 침식하는 다양한 현상이 나타남을 지적합니다. 즉 국민국가에 대한 정체성 의식이 전반에 걸쳐서 약화된다는 것이지요(물론 이 분석은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등을 분석한 것이기는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구와 산업들이 다극화(decentralization)되고 거대조직(mass organization)이 쇠퇴하면서 분파적인 이익(sectional interests)을 추구하는 경향이 농후하게 되어 계급의 특이성(the salient of class)이 약화된다고 합니다. 또 이 과정에서 사회 내부에 서비스 계급(service class)의 규모와 영향력이 크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각 계급들에 나타나는 집단갈등(Group struggle)도 각 계급들의 계급적 관례들이 유리하게 발휘되도록 하는데 집중을 하고 소비생활 또한 '생산물(products)'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상징(symbols)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래쉬와 우라이는 서유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① 자유방임형 자본주의(liberal capitalism) - ② 조직화된 자본주의(organized capitalism) - ③ 조직이 해체된 자본주의(disorganized capitalism) 등의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래쉬와 우라이는 결론적으로 "사회란 위에서, 아래에서 또 내부에서 변형되고 있다. 조직화된 자본주의, 계급, 산업, 도시들, 국가, 민족, 모든 견고한 것들이, 세계조차도 공중으로 분해되고 있다(Society are being transformed above, from below, from within. All that is solid about organized capitalism, class, industry, cities, collectivity, nation state, even the world, melt into the air)."라고 말합니다.

앞으로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함에 있어서 래쉬와 우라이의 견해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래쉬와 우라이는 자본주의의 중추 산업이 중화학공업으로부터 서비스(service) 산업과 정보(ICT) 산업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이전의 모든 계급이론들이 적용되지 못하는 사회가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이 효과적으로 분산된 상태(effective decentralization of capital)에서 화이트칼라(white-collar)와 서비스 계급(service class)의 증대로 인하여 정당의 계급적 성격이 쇠퇴하여 잘 '조직화된 자본주의(Organized Capitalism)'가 더 이상 생존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었음을 웅변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고정된 문화의 틀에서부터 새로운 문화의 형태가 등장함에 따라 주어진 구조적 틀(structural pattern) 아래에서 잘 조직되고 정비된 형태의 자본주의(Organized capitalism)는 종언을 고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분석들을 통해서 보면 현대 자본주의는 매우 다이내믹(dynamic)하고 복합적으로 움직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수많은 이론가들이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자본주의는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는 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던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변모하여 기존의 강력한 표현 양식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하여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학도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학처럼 현상 분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양의 경제 이론가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신으로 돌아가 패러다임을 다시 구성해야합니다. 그것만이 미래의 파국을 막는 길입니다.

필자 주석

1. 토드 부크홀츠 지음(장석훈 옮김)『러쉬』(청림출판, 2012)

2. Luedtke, Luther,S., Making America, (Forum Series U.S. Information Agency, 1987) p185.

3. Viereck, Peter, Conservatism: From John Adams to Churchill,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6). Rossiter,Clinton, The Seed time of the Republic: The Origin of the American Tradition of Political Liberty, (NY Harcourt Brace & World, 1953).

4. Popcock, "Virtue and Commerce in the Eighteenth Century",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3-1, sum.1972. pp.120∼121.

5.『동아일보』1987.11.2

6. 하우스 푸어(House Poor)는 워킹 푸어(working poor, 근로빈곤층 : 일을 해도 소득이 적어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에서부터 파생된 말로 집을 가지고 있어도 무리한 대출로 인한 이자 부담 때문에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택 가격이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무리하게 은행이나 각종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했지만 금리 인상, 주택 가격 하락, 주택 거래 감소 등으로 인하여 하우스 푸어가 된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부동산을 가장 가치 있는 재테크 수단으로 생각하여 자산의 대부분을 부동산에 쏟아 붓는 관습 때문에 하우스 푸어가 양산되고 있다. 한국 가계의 부동산 자산 비중은 전체 자산의 약 80%로, 미국 37%, 일본 40%에 비하여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Scott Lash & John Urry, The End of Organized Capitalism (Cambridge: Polity Books, 5th 1998).

8. 피에르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지식인으로 '부르디외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사회학을 '구조와 기능의 차원에서 분석하는 학문'으로 보고 신자유주의자를 비판하면서 범세계적인 지식인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