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은 단군조선 백성이 북두칠성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은하수
통상 삼신을 모계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여신으로 보고, 마고삼신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마고는 고마固麻, 곰과 같은 뜻이고, 고마는 구멍의 변음으로 여삼신이라는 뜻이다.
국도의 이름을 고마, 곰으로 쓴 사람들은 조선을 계승한 한성백제 사람들이었다. 한성백제는 한성을 고마, 곰이라 했다.
삼신은 2500년 전에 태어난 불교에서 삼존불의 원형이 됐고, 2000년 전에 태어난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오면서 삼위일체로 정립됐다.
삼신신앙이 하늘에 투영되어 피드백이 된 것이 천부天符이다. 천부는 해·달·북두칠성인데, 이를 천부삼인天符三印이라 했다. 해는 궁희로, 달은 소희로, 북두칠성은 마고로 동일시했던 시대가 있었다. 해를 숭배하고, 달을 숭배하고,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천부신앙이 생긴 것이다.
마고는 북두칠성에 투영되어 곰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마고가 북두칠성에 투영되기 전에는 직녀織女로 불렸다. 직녀는 직녀삼성으로 불리는데, 마고 궁희 소희를 뜻한다. 직녀삼성 앞에 궁희와 소희가 낳은 네 천신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별들을 점대漸臺라 한다.
부도지에 따르면, 점대는 율관을 불어 율려를 조정한다. 직녀가 이들의 할머니가 된다.
마고 즉 직녀는 단성單性의 여신이므로 음양의 이치에 따라 역시 단성의 남신을 필요로 한다. 이리하여 직녀의 남편으로 선택되는 남신이 북두칠성이다. 마고가 하늘에 직녀로 투영되어, 웅성熊星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리하여 웅성이 직녀의 남편이 됐다. 이들 부부 별은 모두 자미원이라는 하늘 영역에 속해 있다.
북두칠성에서 핵심이 되는 별은 첫 별인 천추성天樞星이다. 천추성은 하늘의 척추가 되는 별이라는 뜻이다. 이 별을 지미성紫微星이라고도 한다. 북극성도 천추성이라 한다. 북극성이 북두칠성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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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은 북극오성北極五星의 머리가 된다. 북두칠성의 천추성과 북극오성의 천추성에는 다 같이 하나님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두 별을 연결하여 천추天樞라 하는데 지구의 척추라는 뜻이다. 천추는 지구 자전축이 된다.
북극성(천추성)이 시작되는 북극오성에서 우리의 시조들이 탄생했다. 마고 한웅천왕 한인천제 단군왕검이 탄생한 것이다. 이분들을 1열로 배열하여 북극오성北極五星이라 했다. 북극오성을 달리 소웅성小熊星이라 한다. 이어서 태어난 별이 대웅성大熊星 즉 북두칠성이다. 그러므로 대웅성에는 소웅성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있다.
소웅성에 속한 북극오성의 첫 별은 북극성인 천추이고, 둘째 별은 황후 즉 마고이고, 셋째 별은 서자 즉 한웅천왕이고, 넷째 별은 천제 즉 한인천제이고, 다섯째 별은 태자 즉 단군왕검이다. 그래서 소웅성에 속한 북극오성을 우리 시조별자리라 말하는 것이다.
단군왕검이 북극오성에서 태자 별자리가 되는 점으로 보아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 명칭이 정해진 때가 조선의 제2세 부루단군 때나 제3세 가륵단군 때였다고 볼 수 있다. 가륵단군이 세종대왕처럼 조선의 문명을 꽃피운 분이므로 필자는 가륵단군 때로 본다.
우리 조상은 북두칠성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별이고 또 생명을 관장하는 별이라 했다. 그래서 생과 사를 관장한다고 하였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12진辰이 운행하는 법칙에 따라서 태어난다. 12진은 북두칠성이 1회전 좌선左旋으로 공전하면서 지구와 12번 만나는 순서를 말한다. 12진을 12지신支神이라 했다. 12지신을 달리 육정육갑신六丁六甲神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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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을 할 때 무당이 <영정물림>에서 영정靈丁을 구연한다. 영정은 죽은 남자의 영을 말한다. 죽은 여자의 영을 영실靈室이라 한다. <바리데기>에서는 영실靈室이 감흥 해야 굿을 한다. 죽은 여자의 영이 감응해야 굿을 한다는 뜻이다.
남자가 죽어 영정이 되고, 영정이 천군天軍에 편성되면 이를 육정육갑신이라 한다. 육정육갑신은 하나님이 부리는 군대로 이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 북두칠성의 7번째별인 요광성搖光星이다. 그래서 요광성의 위력을 파군검봉破軍劍鋒이라 했다.
<영정물림>에서 만신은 굿상 앞에서 잦은 만세받이를 하여 가족으로서 죽어서 이미 하나님이 부리는 신병부대神兵部隊에 편입되어 육정육갑신으로 불리는 영정들을 불러낸다. 그들을 불러서 여섯 상 앞에 모신다. 이들 외에도 본산 먼산 넘어 바다에 있는 영정들도 불러낸다. 뿐만 아니라 저승으로 가려다 아직 이승 길을 벗어나지 못한 영정과 저승길을 다 가지 못한 영정들도 초대한다.
주무가 이렇게 여섯 상에 육정육갑신으로 불리는 영정들을 초대하는 동안, 다른 무당은 굿상 여섯 개를 들고 밖으로 나가, 굿상에 놓인 음식을 마당의 동서남북에 흩뿌린다. 영정들로 하여금 날쌔게 날아와서 대접을 받으라는 뜻이다. 여섯 번째로 흩뿌릴 때에는 “고수레, 고수레”를 왜치며 흩뿌린다. 이를 여섯 번 반복한다. 또 굿상을 차릴 때 상 하나에 음식을 여섯 군데에 차려놓고, 무명, 삼베, 삼색 헝겊에 술잔을 놓고, 날만세받이를 하고는 한꺼번에 갖다버리기도 한다. (김금화 저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 66쪽 참고)
상을 여섯 상을 차린다던가, 상 하나에 음식을 여섯 군데에 놓는다던가 하는 것은 그 제물을 받아야 할 상대가 육정육갑신임을 뜻한다. 갑을신, 병정신, 무기신, 경신신, 임계신이 음양신으로서 대상이 된다. 이리하여 여섯 상이 모두 만상萬床이 되는 것이다.
만신은 이들을 불러드리면서, 이들이 잘 올 수 있도록 무명, 삼베, 삼색헝겊으로 다리를 놓아준다. 이렇게 하여 영계와 이승 사이에 영정들이 스케이팅을 하듯이 지치며 들어올 다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정육갑신과 영정들은 이 다리를 통하여 만무신청으로 들어온다.
무명은 무명無明 쪽에 있는 이들이, 삼베는 직녀 쪽에 있는 이들이, 삼색헝겊은 삼신 쪽에 있는 이들이 타고 들어오도록 만들어 주는 다리가 된다. 우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그야말로 외로운 고혼들인 영정들 모두가 이들 세 다리를 통과한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계의 운행과 북두칠성의 운행을 연구하면서 이들 별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원리가 인간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깊이 연구하여 점성학을 완성했다.
점성학은 크게 나누면 태양을 중심에 두고 태양의 주변을 맴도는 행성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리해 나가는 태양점성학과 북두칠성이 운행하면서 각 방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따지는 칠성점성학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태양점성학은 낮의 점성학이고, 칠성점성학은 밤의 점성학이다.
칠성점성학은 구궁九宮이니 구성九星이니 자미두수紫微斗數니 하는 말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들 점성학은 그 특징이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양택陽宅에도 관심을 두어, 집터를 보는데, 방을 배치를 하는데, 인테리어를 하는데, 점성학을 응용한다. 이 분야는 점을 치는 점성학이 아니라 생활과학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북두칠성이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을 간섭해 온 종교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칠성은 곧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요, 우리가 태어나는 곳이요, 우리가 죽어서 돌아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하늘나라이기도 하다. 이때의 요단의 요는 칠성의 자루를 의미하는 요瑤자로 볼 수 있다.
요단강을 굳이 한자로 쓴다면 요단강瑤檀江이다. 요瑤는 칠성을 의미하고, 단檀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강江은 은하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요단강은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북두칠성으로 가기 위하여 건너오고 건너가야만 하는 은하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무턱대고 건너갈 수 있는 강은 아니고, 우리가 몇 가지 징표를 가지고 있어야 건너갈 수 있다. 그 하나는 천부삼인天符三印이라는 징표이다. 천부삼인은 지금으로부터 14000~12000년 전에 인류 최초의 문명인이었던 마고께서 후손들에게 주신 것이다. 천부삼인은 무당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明斗에 나타나 있다.
기독교인이 목에 거는 십자가도 천부삼인과 관련이 있다. 십자가十字架의 십十자는 문자학文字學에서 볼 때, ‘연다’는 의미가 있으나, 중원 땅에 지나족이 출현하기 전에 우리 조상이 쓰던 태고적의 문자로는 ‘칠성’을 의미하는 문자였다. 열십자는 꽂을 곤자(l자 형상의 문자)를 썼다. 곤자 형상의 문자는 그것이 바로 신을 의미하는 신대가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교회의 첨탑에 박아 놓은 십자가는 우리 조상에게서 건너간 칠성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인들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칠성님의 징표가 된다.
기독교 역사는 십자가가 로마인이 예수를 처형할 때 예수를 매달고 못 박은 형틀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형틀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총 맞아 죽은 사람의 후손이 그의 선조를 쏘아 죽게 한 총을 신앙의 상징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건 몰상식의 도를 넘어 미친 짓이다. 외국인이라면 몰라도 칠성님의 자손으로 태어난 한국인이라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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