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김성동의 현대사 아리랑_02

醉月 2010. 2. 12. 18:25

‘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여운형
22세에 스스로 노비 해방시키다

한 행사에서 조국을 위해 연설하는 몽양 여운형.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두물머리 거쳐 양서면 신원리로 갔는데, 묘꼴이었다. 몽양(夢陽) 선생 생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원역 굴다리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고, 어욱새 더욱새 덕갈나무 메마른 가랑잎만 소소리 바람 뒤섞이어 으르렁 스르렁 슬피 우는 몽양 생가 터무니에서 영산마지(담배)만 죽이는데, 저만치 꺼무한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을밋을밋 가보니 빗돌이었다. 해포 앞서 세운 ‘몽양고택유허비’였는데, ‘양평애향동지회’라고 오목새김되어 있었다. 그런데 얄망궂은 것이 빗돌을 세운 사람들 이름도 없고 빗글을 짓고 쓴 사람 이름도 없다. 얼키설키한 몽양 선생 항일투쟁 발자취를 성글게 추려놓은 빗글 끝에 달랑 ‘이기형’이라고만 훈민정음으로 새기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기형(李基炯)이라면 ‘몽양 여운형’이라는 평전을 낸 극노인이다. 25년 전이고, 올해 92살. 8·15 바로 뒤 신문기자를 하여 해방공간 속내를 어지간히 알고 계신 분이다. ‘몽양 여운형’에 나오는 대문이다.

“몽양의 묘꼴 생가는 기역자 기와집 안채와 기역자 초가집 바깥채로 되어 있고 안채는 돌층계 위에 높게 자리 잡았다. 담 안 안채 후원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다. 담 밖 사랑채 앞에는 앞마당이 붙었고 다시 조상대대 분묘가 있는 산으로 연결되었었다. 이 집은 본시 재실로 영회암(永懷庵)이라는 택호를 가지고 있었다. 6·25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폭격에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았다.”

몇 해 전 복권된 몽양 선생이시다. 독립운동 유공자 2등. 1등 유공자는 이승만이었으니, 뜻있는 이들은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가터 가는 쪽을 알려주는 알림표 하나 없고 생가터임을 밝혀주는 알림판도 없으며 ‘역사양평’을 자랑하는 숱한 알림책자며 좀책 그 어디에도 몽양 여운형 선생 성명 삼 자는 없다. 미·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민족자주, 민족주체 정치인 몽양의 중도통합 노선을 이루어냈더라면 이 겨레에게 분단 비극은 없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부질없는 짓인가. 친일 민족반역자들과 손잡고 반쪼가리 나라 세운 이승만 붙좇는 자들한테 돌아가신 몽양 선생은 저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비록 복권은 되었다지만 여태도 시퍼런 수구반공논리가 판치는 이 땅에서 몽양을 기리는 이들이 차마 애타는 마음으로 세워놓은 조그만 빗돌이라는 것을 알 것 같으니, 아아, 민족사의 큰 별을 낳고 길러준 양평 사람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뼈저린 뉘우침도 없는가. 네 둘레를 둘러봐도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몽양 선생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여운형의 암살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 <경향신문>

몽양 여운형은 진서 공부를 하는 틈틈이 온갖 운동으로 체력단련을 하며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 흥화학교, 우체학교를 옮겨다니다가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졸업을 한 달 앞둔 우체학교를 그만두었다. 한 달에 27원을 받는 관공리 자리가 다짐된 졸업장이었다.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인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얽어내고 광동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었으며 골골샅샅 돌아다니며 애국계몽 연설을 하였다.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노비를 해방시킨 것이 22살 때였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그대들을 다 해방시키겠다. 이제부터 저마다 제 마음대로 움직여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그러므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말부터 입에 올리지 마라. 사람은 날 때부터 똑같다. 상전과 종으로 나누는 것은 어제까지 풍습일 뿐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 뜻대로 살아가라.”

1914년 남경 금릉대학 영어과에 들어갔고, 1918년 8월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대표 겸 총무가 되었으며 1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미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전달하였다. 노령과 간도를 순회하며 그곳에 있는 이동휘(李東輝) 장군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고, 상해임시정부 외무부 위원과 상해한인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2월 동경 제국호텔에서 일제 지도자들 면전에 대고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사자후를 토하였다.

1921년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였고, 광동정부 손문 총통과 조선독립과 피압박 민족 해방 문제를 놓고 토론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레닌, 트로츠키와 회담하며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1929년 7월 왜경에 체포되어 1932년 7월까지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우가키 총독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였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다. 19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았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1940년 2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2월 시모노세키에서 왜경에게 잡혀 2년 6개월 징역을 살았다.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얽었고, 10월에는 고향 양평에서 ‘농민동맹’을 얽었다. 8·15를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얽어 위원장이 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이 되었고, 4월 평양으로 가서 김두봉, 김일성과 회담하였다. 5월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고, 10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11월 사회노동당 임시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당하여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

1919년 12월 27일. 동경 제국호텔에 내외 신문 기자와 일본 각계 명사 500명이 모여 있었다. 조선독립이 왜 필요한가를 역설하는 몽양의 연설은 2시간 넘어 이어지고 있었다. 장강대하로 흘러가는 물너울처럼 거침없는 몽양의 웅변이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당연한 요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조선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과거의 약탈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 나가 평화적 대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들 조선(祖先)은 칼과 총으로 서로 죽였으나 이후로 우리는 서로 붙들고 돕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꼭 전쟁을 하여야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싸우지 아니하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인들은 깊이 생각하라.”

여운형이 암살범들에게 총에 맞아 쓰러진 혜화동 로터리. <경향신문>


대일본제국 척식국장 고하(古賀)는 몽양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대의 의지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 태어났다면 나도 그대와 같이 하겠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총독부에 불을 지르겠다. 내 계책이 성공되지 않은 데서 그대에게 가장 높은 경의를 가지고 있다.”
몽양이 동경을 떠날 때 배웅나온 고하는 “몽양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수야(水野)가 동경에 와 있었는데, 몽양이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며 한 말이다.
“경성역에서 강우규 의사 폭탄에 얼마나 무서웠는가?”
단도직입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몽양의 기습에 당황한 수야는 얼굴이 시뻘개졌다고 한다.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수야가 묻자 몽양이 되물었다.
“그대는 일본이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체신대신으로 있던 야전(野田)은 그때 일제 각료 가운데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몽양 일행을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한 다음 야전이 말하였다.

“그대에게 솔직히 말하면 그대의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일본이 살려고 먹은 것이다. 조선을 내놓으면 일본은 죽는다. 일본의 생사가 달린 조선을 일본은 그대로 내놓을 수 없다. 그대의 일은 망상이다.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웅변이요,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철저하여도 일본은 할 수 없다. 조선이 독립을 하려거든 실력으로 싸워라. 생명을 희생해서 찾아라. 거저는 안 내준다.”

“내가 동경 와서 오늘까지 낙망하였다. 아무것도 볼 만한 것이 없어서 허행을 하게 된다고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에서 인물을 하나 발견한 것이 나의 동경에 온 소득이다. 그대는 과연 인물이다. 일본인 중에 오직 그대가 인간적이요 양심적인 거짓 없는 참말을 하였다. 내 마음이 상쾌하다.”

야전이 기가 막혀서 “내가 밑졌다”며 머리를 흔들었다고 한다.
대일본제국 천황 별장으로 적판이궁(赤坂離宮)이라는 곳이 있다. 외국인은 국빈이 아니면 절대 보여주지 않고 일본인 가운데도 대신급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는 곳이다. 몽양에게 이곳을 둘러보게 한 것은 국빈 대접을 한다는 뜻이다. 궁성 안에서 점심까지 대접받고 돌아오는데 기자가 소감을 물었다. 그때 몽양이 했다는 말이다.

“맹자에 보면 예전에 주문왕(周文王)이 70방리 동산이 있었는데 꼴 베는 이가 들어가고 꿩 잡는 이가 들어가서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동산이 작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선왕(齊宣王)이 40방리에 동산을 가졌는데 사슴 죽인 사람을 살인죄와 같이 벌하며 임금 혼자서 즐겨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동산이 너무 크다고 하였다. 만일 일본에 성군(聖君) 정치가 있다면 이런 것을 다 백성에게 개장해야 할 것이다.”

몽양을 구슬려 독립의지를 꺾으려던 일제는 약조하였던 총리대신 원경(原敬)과 천황 면담을 취소하였다. 몽양을 수행했던 최근우(崔謹愚)는 이렇게 평하였다.

“몽양의 당시 연령이 34세였다. 전중(田中) 육상(陸相)과 만나는 자리는 군사령관 회의 중이었기 때문에 우도궁(宇都宮)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하여 관동, 청도, 대만 각지 군사령관과 수야 정무총감과 야전 체신대신 등, 고하 척식 국장 등 정계, 군계의 거두들이 열석하였다. 내가 전중이와 몽양을 속으로 비교하여 보니 저편은 연장자요 주권국 대신이요, 군국권위의 배경이 있는 이요, 여기는 나이 젊고 식민지 한민(寒民)이요, 피압박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석은 몽양 혼자 압도적으로 압력을 내어 내리누르며 정의로 싸우는데 나는 처음 느끼는 통쾌감이었고, 정의가 무섭다는 것을 그때 목도하며 깨달았다. 수야가 강우규 의사 폭탄 인사를 받을 때에 수야의 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고 통쾌하다. 그때 수야의 거동은 몽양 앞에 어린애 같았다.”

동행하였던 장덕수(張德秀)는 상해에 있는 동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여운형씨 투쟁은 극도로 만족하였다. 씨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국사(國士)이다. 여러 벗들도 만족히 알고 선투하기를 바란다.”


박헌영과 쌍벽 이룬 조선의 혁명가

몽양 여운형. <경향신문>
몽양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수많은 살해 위협에 시달렸으니, 큰 것만 골라도 12번이다. 민족사의 큰 별이 떨어진 비극의 그날 하오 1시. 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경찰관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몽양 차를 가로막았고, 급하게 멈출 수밖에 없는 차 속에서 몽양과 신변보호인 박성복(朴性復) 그리고 ‘독립신보’ 주필로 건준 간부였던 고경흠(高景欽)과 운전수가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두 발 총소리가 나면서 몽양은 풀썩 쓰러졌다. 한지근(韓智根)이라는 모진 놈이 몽양이 탄 자동차 앞뚜껑 위로 올라가 권총 두 방을 쏘았던 것이다. 이기형옹의 회상이다.

“일본 옷 하까마를 입고 불상을 차려놓고 아이들과 일본말을 주고받는 춘원 이광수를 보고 노여워 하였고, 만해 한용운을 만나고 나올 때는 그의 높은 절개에 경복함과 동시에 가난과 병중에 있는 그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몽양을 만나고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넘어져 가는 고래등 기와집을 떠받치는 큰 기둥을 찾아 불잡는 바로 그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안 되고 당으로 해야”
여기서 잠깐 몽양의 용모에 대해 말해본다면- 빛나는 두 눈, 넓고 반듯한 두드러진 이마, 우뚝한 코, 복스럽고 큰 두 귀, 처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아래턱 윤곽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데 없고 빈틈없는, 원로 언론인 김을한의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미스터 코리아’였다. 그의 조부가 한번 보자 ‘왕재(王材)’라고 탄성을 올린 것도 과찬만은 아니었다고 수긍이 갔다. 키는 보통이 훨씬 넘고 골격은 굵고 운동으로 다져진 짜임새 있는 몸매에 더할 데 없이 당당한 체격이었다. 누구는 그 얼굴, 그 체격을 한마디로 ‘우람하다’고 표현했다. 몽양은 길을 걸으면 길에 꽉 찼고 연단에 오르면 단상에 꽉 찼다.”

몽양은 지극히 직수굿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데다 또 지극히 실쌈스러운(성실한) 사람이었다. 박헌영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여운형론’을 쓴 김오성(金午星)은 말한다.

“우리나라에 박헌영씨와 같은 투사형 지도자와 여운형씨와 같은 정치가형 지도자가 있음은 원칙과 정책, 전략과 전술의 쌍벽을 가진 것으로 민족적인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분이 들이친 뒤에 다른 한 분이 어루만져 수습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 콤비이냐? 두 지도자는 서로 상이한 부면을 담당하면서 원칙적인 일치를 얻어 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오성은 그러면서 몽양이 타고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며 몽양이 한 말을 든다.
“내 주장이 정당한 줄 의식할 때에도 여러 사람이 반대하거나 또는 다른 주장에 찬동할 때에는 내 주장을 포기하고 그 여러 사람의 주장을 따르겠다.”

1919년 4월 1일쯤이다. 상해 프랑스 조계에 조동호,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조용은, 신규식, 신석우, 여운홍, 현순, 최창식, 이광수, 신익희, 유치진, 이규홍 등 수십 명과 함께 독립운동 기관을 세우자는 의논을 할 때였다. 몽양은 세 가지를 반대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첫째, 사람들이 모두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는데 몽양은 ‘정부’는 안 되고 ‘당’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임시정부라고 하더라도 명색이 ‘정부’가 되면 정부 체면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민심을 강화시키고 일본에 대한 반항의 뜻이 크므로 ‘정부’로 해야 된다는 것이었으니, 몽양 주장은 현실론이고 다른 이들 주장은 추상론이었다.

둘째, 국호 ‘대한민국’의 ‘대한’을 반대하였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조선에서 오래 쓴 적이 없고 잠깐 있다가 곧 망해버린 이름이므로 되살려 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으로 망하였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몽양은 대한제국 황실 우대를 절대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태왕(李太王)이 죽은 뒤에 대한문 앞에 인민의 곡성이 창일하였다. 이것을 보면 민심이 아직도 황실에 뭉쳐 있으니 민심 수습상 황실을 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문을 넣었다. 이처럼 봉건사상과 관료주의에 전통관념 껍질을 벗지 못한 상해임정이었다. 그들은 대한문 앞 인민들 곡성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망국의 울음도 아무 때나 울면 잡혀가므로 참고 있다가 고종 인산이라는 기회를 얻어 터져나왔던 울음이지, 황실을 그리워한 울음이 아니었다. 이만규(李萬珪)가 쓴 ‘여운형투쟁사’에 임정 난맥상이 나온다.

임시정부로 거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안창호(安昌浩)가 오고 이동휘(李東輝)가 오고 이승만(李承晩)이 왔다. 이승만이 오기 직전에 그이의 위임통치 문제가 떠돌아 상해 여론이 물끓듯 하였다. 그가 민주국민회의 명의로 조선을 위임통치하여 달라는 청원을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나자 신채호(申采浩)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북경 기타 지역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였다. 몽양은 이 일을 안창호에게 물었다. 안창호는 “이승만의 하는 일을 나는 모른다”고 하였다. 몽양은 다시 “듣건대 국민회의 명의로 보냈다면서 회장이 모르느냐?”고 반문하니 안이 역시 “모른다”고 하였다. 몽양은 다시 안더러 “그렇다면 이승만의 일은 오해를 풀 수가 없지 않은가. 민단 주최로 환영회를 할 터인데 그 석상에서 설명을 구하고 다시 재신임을 요청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승만은 민단 주최 환영회에 출석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몽양이 손중산(孫中山) 혁명의 일로 광동에 간 동안 민단 총무 장붕(張鵬)이 주최한 민단 환영회에는 출석하여 화관 씌우는 영예를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우대 절대 반대
위_인천에 도착한 서재필(가운데)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오른쪽이 여운형. 아래_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들과 함께 있는 여운형(오른쪽). <경향신문>
몽양은 모택동(毛澤東)과 몇 번 만났는데, 모택동 혁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은 주대(周代) 800년간에 원시 공산주의 유속으로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농민의 생활을 풍유하게 하였다. 진(秦)이 흥하여 전환하여 정전법을 폐하고 지독한 세를 많이 받아 농민생활에 위협을 주다가 2세에 망하고 동한(東漢)에 와서 유수(劉秀)가 농민의 인심을 얻어 혁명을 하고 주원장(朱元璋)이 또한 농민의 아들로 농민의 마음을 얻어 혁명을 하였으니, 지나의 혁명은 농민의 마음을 잃고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제 모택동의 혁명이 그 기초가 농민에 있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몽양은 레닌과 두 번 회견하였는데, 첫 번째는 일본 공산당 거물인 편산잠(片山潛)과 함께였고 두 번째는 손문(孫文) 대리인 구추백(瞿秋白)과 함께였다.
“관대한 덕량, 원만한 기질, 광박한 지식, 평범자약한 의표, 그리고 혁명가의 열정 모두가 과연 고대(高大)한 인물이었다.”
몽양이 본 레닌의 인상이다.
“동무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여 투쟁하겠는가?”
레닌이 편산잠에게 묻고 몽양한테도 물었다.
“동무는 일본혁명을 위하여 투쟁하겠는가?”
둘 다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레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와 소련과 폴란드 사이에는 소련의 우월성으로 저편의 감정을 도발시키고 의구가 생기며 같은 공산당끼리도 원만치 못한 일이 더러 있다. 비록 혁명가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감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일본과 조선이 악수를 한다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터이니 힘쓰라.”

몽양이 소비에트식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조선에 일으켜야 한다고 할까봐 걱정하고 있는데, 레닌이 말하였다.
“조선은 농민의 나라이니 공산당 운동이 먹혀들기 어려울 것이다. 농민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를 공명시켜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지지할 게 아니라 개조시킬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와도 회담하였으나 트로츠키 영어가 서툴러서 많은 이야기는 못하였다. 손문을 만난 몽양이 “선생 머리가 벌써 희어졌다”고 하자 손문이 말하였다. “사람의 머리는 늙을수록 희어지고 혁명은 늙을수록 붉어진다.”

공산주의에 대한 몽양의 생각이다. 다음은 193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진술한 것이다.
“맑스의 이론에는 찬성하나 그대로 실행은 불가능하다. 조선 같은 데는 노동독재를 실행하여서는 아니된다. 맑스주의는 소련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었으니 조선에서는 두 나라와 달리 하여야 한다.

모택동·레닌·트로츠키와 회담
이상으로 공산주의를 찬성한다. 실행문제에 있어서는 조선엔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세계 각국 어디서든지 맑스주의는 그 형태를 변화시켜서 실행되고 있다. 소련까지도 신경제정책이니 5개년계획이니 하며 시대와 처소에 적응시켜 고쳐가며 실행한다.

조선 해방에는 시종일관 조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나아갈 심산이다. 전체가 공산주의를 해야만 되게 되면 곧 공산주의를 실행할 것이요, 수정하여야 될 것이면 곧 수정하여 실행할 뿐이다. 결코 언제든지 일부 소수인을 위하는 운동자는 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이 독립되면 나라 일을 민중 전체의 의사대로 해나갈 터이다.”

박헌영이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자고 할 때 ‘인민’이란 말이 너무 과격하니 그냥 ‘조선민주주의공화국’으로 하자던 몽양이었다. 무정(武亭) 장군이 한 말이 있다.

“선생이 국내에서 혁명운동을 하기 위하여는 회색도 좋고 흑색도 좋다. 우리는 신뢰한다. 선생이 만일 혁명을 하다가 죽는다면 조선이 독립한 후 내가 귀국하여 시체라도 지고 삼천리 강산을 돌아다니며 선전하겠노라.”

1945년 12월 ‘선구회’라는 우익단체에서 한 여론조사가 있다. 조선의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의 응답이 나왔다. 또 조선 혁명가를 꼽는 항목에는 여운형 195표, 이승만 176표, 박헌영 168표, 김구 156표, 김일성 72표가 나왔다.

몽양이 쓰러졌을 때, 수십만 인민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왜놈도 못했거늘 어째 선생을 죽였느냐?”
“선생의 피와 함께 인민은 살아 있다!!”
“아! 우리의 지도자 몽양 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혁명에 흘리신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 있나니… 반동의 총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위대한 죽음을 슬퍼하는 이 노래! 몽양의 유해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이 흐느껴 운다. 고히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 갚으오리다. 몽양 선생 추모의 노래는 오고가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