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의 백두산 국경 날조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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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물줄기 약도.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이 보이고, 정계비 사이에 토퇴와 석퇴가 있다.오른쪽 강은 두만강으로, 홍토수가 비교적 윗쪽에 있다. 토문강과 홍토수는 연결되지 않으며, 이 사이로 장백산맥이 지나간다. |
간도협약이 체결되기 바로 전 해인 1908년 유건봉이라는 청국 관리는 동삼성(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 총독인 서세창의 명을 받아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의 발원지를 조사했다. 조선과 청의 국경 분쟁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유건봉은 5명의 측량사와 16명의 군인 등 조사단을 이끌고 백두산 인근 지역을 둘러봤다. 최근 간행된 <백두산 국경연구>(여유당 출판사)에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이들의 조사를 면밀하게 분석했다. 이때의 조사를 서 교수는 ‘청국의 백두산 국경 날조사건’이라고 이름붙였다.
유건봉을 비롯한 조사단은 1908년 3개월동안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을 샅샅이 조사했다.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를 포함해 흙무더기(토퇴)·돌무더기(석퇴), 두만강 원류, 송화강 상류, 압록강 원류 등을 답사했다. 조사 후 유건봉이 ‘장백산강강지략’이라는 보고서를 썼고, 장봉대가 ‘장백징존록’, 이정옥이 ‘장백설치겸감분봉길계선서’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이들이 1908년에 조사한 보고서는 1987년 출판돼 중국 연구자들의 필수 텍스트가 됐다. 심지어 유건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양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 서 교수의 주장이다.
유건봉 일행은 조사 도중에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정계비 인근에서 발원하는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가지 않는 것이었다. 1712년에 목극등은 두 물줄기가 만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정계비를 세웠다. 두 물줄기 사이에는 장백산맥이라는 산줄기가 지나간다.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어갈 수 없다. 산줄기를 따라 흐를 뿐이다. 여기에서 유건봉 일행의 역사날조가 시작됐다. 유건봉은 백두산 정계비가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정계비가 원래는 소백산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으나 백두산 남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정계비 대신 십자계비라는 비석을 만들어냈다. 10개의 비석이 국경선에 있었으나 한국 사람들이 없앴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주변 강과 산의 이름 마음대로 왜곡
비석과 강 이외에도 흙무더기와 돌무더기가 문제였다. 정계비에서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토퇴와 석퇴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계비를 세우기 이전인 1674년에 청의 관리인 각라오목눌이 등산로를 만들기 위해 토퇴와 석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청의 기록에서 오목눌은 백두산에 며칠 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토퇴와 석퇴를 만들 수는 없었다. 더욱이 숙종실록에는 토퇴와 석퇴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들 일행은 또 백두산 주변 강과 산의 이름을 마음대로 왜곡했으며, 압록강 상류인 원지를 청의 발상지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일대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원하는 국경선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무너져 내리고 있던 대한제국은 국경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은 만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간도 문제를 연구해 청국과 영유권 논쟁을 벌였다. 1908년 청나라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셈이다.
문제는 현재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유건봉의 장백산 답사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사업을 펼쳤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대로 있는 역사적 진실조차 제대로 조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건봉을 비롯한 조사단은 1908년 3개월동안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을 샅샅이 조사했다.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를 포함해 흙무더기(토퇴)·돌무더기(석퇴), 두만강 원류, 송화강 상류, 압록강 원류 등을 답사했다. 조사 후 유건봉이 ‘장백산강강지략’이라는 보고서를 썼고, 장봉대가 ‘장백징존록’, 이정옥이 ‘장백설치겸감분봉길계선서’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이들이 1908년에 조사한 보고서는 1987년 출판돼 중국 연구자들의 필수 텍스트가 됐다. 심지어 유건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양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 서 교수의 주장이다.
유건봉 일행은 조사 도중에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정계비 인근에서 발원하는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가지 않는 것이었다. 1712년에 목극등은 두 물줄기가 만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정계비를 세웠다. 두 물줄기 사이에는 장백산맥이라는 산줄기가 지나간다.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어갈 수 없다. 산줄기를 따라 흐를 뿐이다. 여기에서 유건봉 일행의 역사날조가 시작됐다. 유건봉은 백두산 정계비가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정계비가 원래는 소백산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으나 백두산 남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정계비 대신 십자계비라는 비석을 만들어냈다. 10개의 비석이 국경선에 있었으나 한국 사람들이 없앴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주변 강과 산의 이름 마음대로 왜곡
비석과 강 이외에도 흙무더기와 돌무더기가 문제였다. 정계비에서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토퇴와 석퇴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계비를 세우기 이전인 1674년에 청의 관리인 각라오목눌이 등산로를 만들기 위해 토퇴와 석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청의 기록에서 오목눌은 백두산에 며칠 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토퇴와 석퇴를 만들 수는 없었다. 더욱이 숙종실록에는 토퇴와 석퇴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들 일행은 또 백두산 주변 강과 산의 이름을 마음대로 왜곡했으며, 압록강 상류인 원지를 청의 발상지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일대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원하는 국경선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무너져 내리고 있던 대한제국은 국경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은 만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간도 문제를 연구해 청국과 영유권 논쟁을 벌였다. 1908년 청나라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셈이다.
문제는 현재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유건봉의 장백산 답사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사업을 펼쳤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대로 있는 역사적 진실조차 제대로 조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간도 모금, 480만3830원
다음 아고라에서 7월7~26일 20일 동안 간도 모금 청원이 진행됐다. |
7월 한 달 동안 인터넷의 다음 아고라 모금청원 코너에서는 ‘간도, 빼앗긴 우리 땅을 되찾는데 힘이 되어 주세요!’라는 모금 청원이 한여름을 뜨겁게 달궜다. 7월7~26일 20일 동안 모금이 진행된 결과 모두 480만3830원이 모였다. 711명이 453만4030원을 후원했고, 1964명의 후원자가 댓글을 통해 19만6400원을 냈다. 모금 목표는 500만원. 96% 달성률이다. 목표액에 부족한 20만원이 아쉽지 않을 만큼 많은 누리꾼의 성원이 있었다. 모금을 청원하는 글이 우선 눈길을 끌었다.
“땅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간도는 대한제국 시절 간도관리사까지 파견하여 관리되었던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간도의 운명은 일제가 불법으로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으로 인해 영토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간도협약’ 이후 36년 간의 일제 강점기와 분단과 전쟁, 그리고 남북 대치의 민족적 불행을 겪으면서 100년이 다 되도록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사이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을 대대적으로 실행하여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고 가로챔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땅 간도를 영구적으로 차지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적 자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땅 간도를 되찾지 못하고,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내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앞으로 4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가오는 2009년 9월4일은 간도를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됩니다. 우리 세대에서 ‘되찾아야 할 우리의 땅’ 간도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잊혀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2009년 9월4일은 국치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 글에 답한 누리꾼의 댓글이 감동적이다. 누리꾼의 아이디 옆에는 기부한 금액이 있고 이들이 남긴 글이 있다.
“우리 2학년 난초반(고창여자중학교) 이름으로 기부합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 온 국민의 마음이 합해지면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난초반이 진심으로 빕니다.” “우리역사찾기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구요, 이렇게 조금씩 우리 스스로가 하다보면 그게 또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간도의 역사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얼마 안 되지만 역사의식을 가지고 기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역사 의식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지켜 나가길 바랍니다.”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을지라도…그 품은 뜻을!!! 그리고 선각자의 눈으로, 의지로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에게 박수를…. 건승하시고 건강하세요.” “점심값 아낀다는 생각으로 모금합니다. 작은 돈이지만 간도라는 땅을 되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도 500만원이 안 되었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모금액은 다양했다. 1000원도 있었고 1만원도 있었다. 그렇지만 2675명이 참여했다. 돈을 얼마 거뒀다는 것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해 간도가 어떤 땅이고, 간도의 역사를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기만 해도 480만3830원의 효과를 넘어서는 것이다. 2675명이 낸 480만3830원이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땅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간도는 대한제국 시절 간도관리사까지 파견하여 관리되었던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간도의 운명은 일제가 불법으로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으로 인해 영토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간도협약’ 이후 36년 간의 일제 강점기와 분단과 전쟁, 그리고 남북 대치의 민족적 불행을 겪으면서 100년이 다 되도록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사이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을 대대적으로 실행하여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고 가로챔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땅 간도를 영구적으로 차지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적 자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땅 간도를 되찾지 못하고,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내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앞으로 4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가오는 2009년 9월4일은 간도를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됩니다. 우리 세대에서 ‘되찾아야 할 우리의 땅’ 간도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잊혀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2009년 9월4일은 국치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 글에 답한 누리꾼의 댓글이 감동적이다. 누리꾼의 아이디 옆에는 기부한 금액이 있고 이들이 남긴 글이 있다.
“우리 2학년 난초반(고창여자중학교) 이름으로 기부합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 온 국민의 마음이 합해지면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난초반이 진심으로 빕니다.” “우리역사찾기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구요, 이렇게 조금씩 우리 스스로가 하다보면 그게 또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간도의 역사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얼마 안 되지만 역사의식을 가지고 기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역사 의식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지켜 나가길 바랍니다.”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을지라도…그 품은 뜻을!!! 그리고 선각자의 눈으로, 의지로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에게 박수를…. 건승하시고 건강하세요.” “점심값 아낀다는 생각으로 모금합니다. 작은 돈이지만 간도라는 땅을 되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도 500만원이 안 되었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모금액은 다양했다. 1000원도 있었고 1만원도 있었다. 그렇지만 2675명이 참여했다. 돈을 얼마 거뒀다는 것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해 간도가 어떤 땅이고, 간도의 역사를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기만 해도 480만3830원의 효과를 넘어서는 것이다. 2675명이 낸 480만3830원이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간도협약 이후 무효상황 지속됐다
간도에 살던 조선족들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
1909년 간도협약 이후 간도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압록강과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선이 됐다. 조선인은 청의 법을 따라야 했고, 청의 재판을 받아야 했다. 협약에 따라 인명에 관한 중요사안에 대해서는 청국이 일본 영사관에 양해를 구하기로 돼 있었다. 절반에 가까운 조선인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살다가 졸지에 ‘남의 땅’에서 ‘외국인’ 취급을 당했고, 외국인이 가지는 권리조차 일본에 위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설움이었다.
이들 조선인의 처우는 계속 문제가 됐다.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 독립군의 활동을 견제할 궁리를 찾았고, 청나라는 청나라대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만주 지역 조선인들을 ‘다스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과 중국(청나라)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간도협약은 사실상 무효가 됐다. 간도 연구가인 일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오만 교수가 2004년 1월 ‘Weekly 경향’에 실은 기사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잘 나타나고 있다.
간도협약이 맺어진 15년 뒤인 1923년 10월 10일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외무대신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 앞으로 ‘관비 제71호’란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간도의 조선인은 (…) 조약의 실시 상황이 극히 불충분하여 조약의 명문도 거의 유명무실에 가깝고 (…) 적용에 대해서는 (…) 아직까지 양국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 간도 체류 조선인은 마땅히 누려야 할 조약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 불리불편을 입으며(…). 그후 중국측의 조약 실시에 대한 성의가 없으며….’
1931년 만주국 세워진 후 거의 사문화
이 상황은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1915년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 ‘만몽조약’ 체결과 관련이 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기존의 간도협약 중 제 3·4·5조의 대부분이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 오만 교수의 연구 결과다.
일본이 이렇게 보았다면 중국은 어떻게 보았을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난해 펴낸 <중국 동북지역 한인관련 자료Ⅰ>에서 중국 측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1915년 만몽조약 체결 후인 10월8일 길림순안사와 길림특파원이 중화민국 외교부에 보낸 ‘한인 개간민의 소송사건과 관련한 대전(代電)’에서는 신약(만몽조약)으로 인한 구약(간도협약)의 폐지를 우려하는 대목이 나타나 있다.
연변 일대 한인은 전체 주민의 3분의 2에 이릅니다. 그간 한인에 대한 법권 행사를 통해 우리(중국)의 주권을 지켜나갈 수 있었는데 구약을 취소하게 되면 법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토지권 역시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난 10년간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권 상실로 인해 발생할 국방상의 공백이 무엇보다도 염려됩니다.
신약 체결을 빌미로 일본 측은 구약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궁극적으로 폐지를 원하는 것은 단지 도문강 계약의 몇몇 조항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존의 모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할 것입니다.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섣불리 양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이 같은 기록을 볼 때 1909년 이후 간도 지역에서 간도협약은 사실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진 후 간도협약은 거의 사문화됐다. 그러나 간도 지역에서 일제가 물러간 뒤 간도협약은 부활했다. 당사국인 조선이 배제된 채 이뤄졌던 ‘엉터리 조약’은 100년이 된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협약으로 한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굳어졌다.
이들 조선인의 처우는 계속 문제가 됐다.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 독립군의 활동을 견제할 궁리를 찾았고, 청나라는 청나라대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만주 지역 조선인들을 ‘다스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과 중국(청나라)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간도협약은 사실상 무효가 됐다. 간도 연구가인 일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오만 교수가 2004년 1월 ‘Weekly 경향’에 실은 기사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잘 나타나고 있다.
간도협약이 맺어진 15년 뒤인 1923년 10월 10일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외무대신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 앞으로 ‘관비 제71호’란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간도의 조선인은 (…) 조약의 실시 상황이 극히 불충분하여 조약의 명문도 거의 유명무실에 가깝고 (…) 적용에 대해서는 (…) 아직까지 양국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 간도 체류 조선인은 마땅히 누려야 할 조약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 불리불편을 입으며(…). 그후 중국측의 조약 실시에 대한 성의가 없으며….’
1931년 만주국 세워진 후 거의 사문화
이 상황은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1915년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 ‘만몽조약’ 체결과 관련이 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기존의 간도협약 중 제 3·4·5조의 대부분이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 오만 교수의 연구 결과다.
일본이 이렇게 보았다면 중국은 어떻게 보았을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난해 펴낸 <중국 동북지역 한인관련 자료Ⅰ>에서 중국 측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1915년 만몽조약 체결 후인 10월8일 길림순안사와 길림특파원이 중화민국 외교부에 보낸 ‘한인 개간민의 소송사건과 관련한 대전(代電)’에서는 신약(만몽조약)으로 인한 구약(간도협약)의 폐지를 우려하는 대목이 나타나 있다.
연변 일대 한인은 전체 주민의 3분의 2에 이릅니다. 그간 한인에 대한 법권 행사를 통해 우리(중국)의 주권을 지켜나갈 수 있었는데 구약을 취소하게 되면 법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토지권 역시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난 10년간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권 상실로 인해 발생할 국방상의 공백이 무엇보다도 염려됩니다.
신약 체결을 빌미로 일본 측은 구약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궁극적으로 폐지를 원하는 것은 단지 도문강 계약의 몇몇 조항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존의 모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할 것입니다.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섣불리 양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이 같은 기록을 볼 때 1909년 이후 간도 지역에서 간도협약은 사실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진 후 간도협약은 거의 사문화됐다. 그러나 간도 지역에서 일제가 물러간 뒤 간도협약은 부활했다. 당사국인 조선이 배제된 채 이뤄졌던 ‘엉터리 조약’은 100년이 된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협약으로 한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굳어졌다.
간도협약 100년 시효설은 맞지 않다
최근 재미교포인 폴 김(김태영) 박사의 간도반환 소송 추진에 대한 기사가 화제가 됐다. 김 박사는 “오는 9월4일은 중국이 ‘우리 땅’ 간도를 실효 지배한 지 100년째 되는 날로 국제법상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최후 시한”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와 관련해 ‘갑자기’ 간도에 관한 관심이 폭증했다. 8월12일 시민단체인 간도되찾기운동본부의 홈페이지가 접속량 폭주에 따른 하루 용량 초과로 몸살을 앓았다. 8월12일과 13일에는 다음 검색 순위에 ‘간도’가 상위 순위에 올랐다.
“국제법에도 없고, 그런 관례도 없다”
관심사는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간도협약 100년 시효설은 그동안 간도 관련 단체에서 일부 관련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이다. 국제법상 조약을 맺은지 100년이 지나면 시효가 지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관련자 역시 간도 문제에 애착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다만 간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너무 없다 보니 간도협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2009년까지는 어떻게든 정부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점에서 100년설을 강조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들에게는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Weekly 경향’ 이 간도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2004년 초에도 100년 시효설이 한창 제기됐다. 이 즈음 간도되찾기 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전문 학자들은 100년 시효설이 근거가 없다고 정리했다. 당시 ‘Weekly 경향’ 의 취재에서도 외교통상부의 관리는 “국제법 어디에도 없고, 그런 관례도 없다”고 밝혔다. 국제법 전문가들도 100년 시효설에 대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이에 어느덧 2009년 9월4일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정부는 여전히 아무런 입장도 발표하지 않았다. 간도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상황은 예전보다 더욱 절박해졌다.
간도협약은 을사늑약을 바탕으로 일제가 영토 협약의 한쪽 상대방인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시한 채 청나라와 체결된 협약이다. 협약의 내용과 상관없이 무효화돼야 하고 정부가 당연히 그 무효를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가 간도협약의 내용이다. 간도협약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고착화됐다. 간도협약에서는 양국의 경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석을수로 나온다. 석을수는 두만강의 지류 중 위치가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협약대로라면 백두산 천지 전체는 물론 백두산 인근 지역이 송두리째 중국 땅이 된다. 물론 북한과 중국이 1962년 조·중 변계조약을 맺어 천지의 절반 가량과 두만강 줄기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지류인 홍토수가 국경선이 됐다. 그러나 조·중 변계조약은 간도협약의 국경 관련 내용을 계승한 측면이 없지 않다. 두만강과 압록강선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압록강 위에는 수십만 명의 이주민이 살았던 간도가 있었다. 간도협약 이후에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17세기를 전후해 조선 백성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넘어 무인지대를 넘나들었고, 이들은 무인지대의 땅을 개간했다. 이곳은 만주족이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과연 이 땅을 누구의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간도협약 무효 이후를 걱정하지 말자
“당신은 어떤 역사적 근거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합니까.”
답의 갈래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1909년 간도협약 ②1962년 조·중 변계조약 ③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④17~19세기의 지리적 상황.
간도협약으로 대한제국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석을수로 확정됐다. 석을수는 두만강의 백두산 물줄기 가운데 비교적 아래 쪽에 위치한다. 간도협약대로라면 백두산 천지는 모두 청의 땅이다.
조·중 변계조약으로 북한과 중국은 백두산 천지를 절반으로 나누고 두만강의 백두산 물줄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홍토수와 연결했다. 이 선이 현재의 국경선이다. 일부 간도 연구가는 이를 부정하고, 다른 연구가들은 승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북통일 이후 결정해야 할 문제다. 조·중 변계조약은 사실상 간도협약의 내용을 계승한 조약이라 할 수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선 자체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지키면 땅도 줄지않아
2개 조약을 무효화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③번과 ④번이 남는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따르면 정계비 분수령에서 압록강과 토문강 물줄기를 따라 국경선이 정해진다. 토문강이 두만강의 물줄기가 아니라 송화강 물줄기라는 사실은 자연 지리가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될 경우 두만강 건너 북간도 지역이 우리 땅이 될 수 있다. 이곳은 실제로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 백성이 대거 이주한 곳이다.
④번의 경우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서간도와 북간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8세기 제작된 외국의 고지도에 따르면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두만강과 압록강 위쪽에 있다. 당시 간도 지역은 무인지대였고, 이곳에 조선 백성들이 넘나들었다. 이들은 나중에 농사를 짓고 정주했다.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면 늘 따라붙는 반론이 있다. 1909년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이 무효화되면 오히려 우리나라 땅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땅이 줄어들 수도 있는데 왜 간도협약 무효화를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①번과 ②번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다. ①번을 인정하게 되면 ②번도 인정한다. 조·중 변계조약은 간도협약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한 조약이다. 백두산 천지 전체는 아니지만 절반까지는 확보했다.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 이렇게 안전한 선택을 한다면 크게 손해볼 것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문제는 근거다. 간도협약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은 일본이 당사국인 대한제국을 배제한 채 청과 맺은 조약이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인정했다. 조·중 변계조약은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인정한 간도협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조·중 변계조약 역시 근거가 희박하다.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던 백두산과 천지가 왜 절반으로 갈라져야 하는지, 천지와 맞붙지도 않은 두만강으로 왜 평행선을 그어야 하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북한과 중국은 그냥 비석을 줄줄이 세워 양국의 국경을 삼았을 뿐 국경을 가르는 백두산 지역의 자연 지형은 아무것도 없다. 서로의 이해 관계로 만든 국경선일 뿐이다.
영토는 물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땅이 줄어들까봐, 당사국이 참여하지도 않은 국경 협약(간도협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 간도협약이 무효화된다고 걱정하지 말자. 간도협약 이전에 국경선은 두만강과 압록강 위에 있었다. 자존심을 지키면 땅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2004년 한 전시회에 출품된 국화 작품에서 간도 지역이 우리 땅으로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
최근 재미교포인 폴 김(김태영) 박사의 간도반환 소송 추진에 대한 기사가 화제가 됐다. 김 박사는 “오는 9월4일은 중국이 ‘우리 땅’ 간도를 실효 지배한 지 100년째 되는 날로 국제법상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최후 시한”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와 관련해 ‘갑자기’ 간도에 관한 관심이 폭증했다. 8월12일 시민단체인 간도되찾기운동본부의 홈페이지가 접속량 폭주에 따른 하루 용량 초과로 몸살을 앓았다. 8월12일과 13일에는 다음 검색 순위에 ‘간도’가 상위 순위에 올랐다.
“국제법에도 없고, 그런 관례도 없다”
관심사는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간도협약 100년 시효설은 그동안 간도 관련 단체에서 일부 관련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이다. 국제법상 조약을 맺은지 100년이 지나면 시효가 지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관련자 역시 간도 문제에 애착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다만 간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너무 없다 보니 간도협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2009년까지는 어떻게든 정부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점에서 100년설을 강조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들에게는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Weekly 경향’ 이 간도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2004년 초에도 100년 시효설이 한창 제기됐다. 이 즈음 간도되찾기 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전문 학자들은 100년 시효설이 근거가 없다고 정리했다. 당시 ‘Weekly 경향’ 의 취재에서도 외교통상부의 관리는 “국제법 어디에도 없고, 그런 관례도 없다”고 밝혔다. 국제법 전문가들도 100년 시효설에 대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이에 어느덧 2009년 9월4일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정부는 여전히 아무런 입장도 발표하지 않았다. 간도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상황은 예전보다 더욱 절박해졌다.
간도협약은 을사늑약을 바탕으로 일제가 영토 협약의 한쪽 상대방인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시한 채 청나라와 체결된 협약이다. 협약의 내용과 상관없이 무효화돼야 하고 정부가 당연히 그 무효를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가 간도협약의 내용이다. 간도협약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고착화됐다. 간도협약에서는 양국의 경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석을수로 나온다. 석을수는 두만강의 지류 중 위치가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협약대로라면 백두산 천지 전체는 물론 백두산 인근 지역이 송두리째 중국 땅이 된다. 물론 북한과 중국이 1962년 조·중 변계조약을 맺어 천지의 절반 가량과 두만강 줄기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지류인 홍토수가 국경선이 됐다. 그러나 조·중 변계조약은 간도협약의 국경 관련 내용을 계승한 측면이 없지 않다. 두만강과 압록강선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압록강 위에는 수십만 명의 이주민이 살았던 간도가 있었다. 간도협약 이후에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17세기를 전후해 조선 백성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넘어 무인지대를 넘나들었고, 이들은 무인지대의 땅을 개간했다. 이곳은 만주족이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과연 이 땅을 누구의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간도협약 무효 이후를 걱정하지 말자
한 유럽고지도에 나타난 조선과 청의 국경선. 두만강과 압록강 위쪽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 이돈수 교수 제공 |
답의 갈래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1909년 간도협약 ②1962년 조·중 변계조약 ③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④17~19세기의 지리적 상황.
간도협약으로 대한제국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석을수로 확정됐다. 석을수는 두만강의 백두산 물줄기 가운데 비교적 아래 쪽에 위치한다. 간도협약대로라면 백두산 천지는 모두 청의 땅이다.
조·중 변계조약으로 북한과 중국은 백두산 천지를 절반으로 나누고 두만강의 백두산 물줄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홍토수와 연결했다. 이 선이 현재의 국경선이다. 일부 간도 연구가는 이를 부정하고, 다른 연구가들은 승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북통일 이후 결정해야 할 문제다. 조·중 변계조약은 사실상 간도협약의 내용을 계승한 조약이라 할 수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선 자체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지키면 땅도 줄지않아
2개 조약을 무효화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③번과 ④번이 남는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따르면 정계비 분수령에서 압록강과 토문강 물줄기를 따라 국경선이 정해진다. 토문강이 두만강의 물줄기가 아니라 송화강 물줄기라는 사실은 자연 지리가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될 경우 두만강 건너 북간도 지역이 우리 땅이 될 수 있다. 이곳은 실제로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 백성이 대거 이주한 곳이다.
④번의 경우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서간도와 북간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8세기 제작된 외국의 고지도에 따르면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두만강과 압록강 위쪽에 있다. 당시 간도 지역은 무인지대였고, 이곳에 조선 백성들이 넘나들었다. 이들은 나중에 농사를 짓고 정주했다.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하면 늘 따라붙는 반론이 있다. 1909년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이 무효화되면 오히려 우리나라 땅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땅이 줄어들 수도 있는데 왜 간도협약 무효화를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①번과 ②번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다. ①번을 인정하게 되면 ②번도 인정한다. 조·중 변계조약은 간도협약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한 조약이다. 백두산 천지 전체는 아니지만 절반까지는 확보했다.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 이렇게 안전한 선택을 한다면 크게 손해볼 것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문제는 근거다. 간도협약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은 일본이 당사국인 대한제국을 배제한 채 청과 맺은 조약이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인정했다. 조·중 변계조약은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인정한 간도협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조·중 변계조약 역시 근거가 희박하다.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던 백두산과 천지가 왜 절반으로 갈라져야 하는지, 천지와 맞붙지도 않은 두만강으로 왜 평행선을 그어야 하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북한과 중국은 그냥 비석을 줄줄이 세워 양국의 국경을 삼았을 뿐 국경을 가르는 백두산 지역의 자연 지형은 아무것도 없다. 서로의 이해 관계로 만든 국경선일 뿐이다.
영토는 물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땅이 줄어들까봐, 당사국이 참여하지도 않은 국경 협약(간도협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 간도협약이 무효화된다고 걱정하지 말자. 간도협약 이전에 국경선은 두만강과 압록강 위에 있었다. 자존심을 지키면 땅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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