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연천. 이곳은 누대에 걸친 전쟁의 땅입니다. 삼국시대 이래로 그랬습니다. 칼과 창이 부딪쳐 불꽃이 튀었고, 총과 대포가 마주보고 불을 뿜었습니다. 분노와 적대는 모든 것을 부숴버렸습니다. 접적(接適)의 반목과 아슬아슬한 긴장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이런 긴장 속에서 구태여 그곳을 찾아간 것은 아직도 버릴 수 없는 평화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연천에서 만난 것은 긴장과 대치 속에서 금단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자연, 그리고 부서져 뒹구는 것과 땅에 묻힌 것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처 위로 켜켜이 쌓인 시간 위로 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북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한탄강이 직벽의 주상절리 아래로 유장하게 흘러내렸고, 삼각형 ‘지뢰’ 표지판 너머로 강변의 수몰 버드나무의 새잎이 연둣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고구려의 성곽과 신라 마지막 왕릉, 그리고 고려 마지막 왕족의 기구한 삶, 아직도 선명한 총탄의 흔적들…. 이곳의 겨울은 언제 끝나게 될까요. 뒤늦게 당도한 봄볕이 저리도 환한데 말입니다.
#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 ‘엎어진 밥상’. 거기서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의정부와 동두천을 지나 연천 땅으로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그랬다. 마을은 어수선했으며 유달리 가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둥구나무 한 그루쯤 서 있는 깊고 아늑한 마을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돈되지 않은 마을 주변은 농기구와 비료 부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멘트 블록의 오래된 가게 건물은 남루했으며, 새로 지은 집이나 건물은 상당수가 가건물이었다. 길은 좁았고 시멘트 포장도로에는 자주 험상궂은 군용트럭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줄지어 달렸다. 아마도 전쟁 탓이리라. 전란의 와중에 북녘 땅에서 내려와 고향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들은 돌아갈 날만을 손꼽았을 것이었다. 고향을 북에 두지 않은 이들도 전쟁의 기억과 반복되는 위협으로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연천은 어쩌면 전쟁의 상흔이 깊어 아직도 ‘정주(定住)의 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메고 임진강변의 둑에 올라섰을 때 난데없이 ‘앵∼’하고 사이렌이 울었다. 길게 이어지는 사이렌 소리에 더럭 겁부터 났다. 요즘 세상에 전쟁의 참화는 전후방을 가리지는 않겠지만 접적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그 징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공포였다. 강둑 아래서 밭을 다듬던 아주머니가 ‘쉿’하고 손가락을 입에 댔다. ‘(사이렌이) 네 번 울면 산불이 났다는 신호’라고 했다. 숨죽여 숫자를 세었다. 다행히 사이렌은 네 번 울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처에서 작은 산불이 난 모양이었다. 연천에 다녀온 이튿날 밤늦게 스마트폰에 속보 알람이 울렸다. 연천의 임진강 ‘필승교’의 수위가 3m로 높아져 대피령이 내려졌다는 뉴스였다. 연일 북한의 전쟁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시에 물을 흘려보내는 ‘수공(水功)’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높아진 수위는 그러나 북한 지역에 내린 폭우 때문이었다. 연천 주민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인지 모르겠으되 외지 사람들에게는 사이렌과 속보는 두려움에 가깝다. 정주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엎어진 밥상’ 같은 마을의 분위기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리라.
연천은 늘 ‘전쟁의 땅’이었다. 연천에서 가장 앞선 전쟁의 흔적은 임진강을 끼고 있는 고구려성에 남아 있다. 임진강은 고구려와 백제가 한 치의 양보 없이 격돌하던 치열한 격전지였다. 특히 신라·백제 연합군에 밀려 한강 지역에서 패퇴한 고구려가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뒤부터 연천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됐다. 당시 전쟁의 흔적은 임진강변에 남아 있는 고구려성 호로고루성과 당포성, 은대리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성은 예외 없이 모두 임진강의 본류와 지류의 작은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굳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지류에서 밀려온 토사로 강바닥이 높아져 여울을 이루는 자리를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 수위가 낮아진 자리는 바지만 걷어붙이고 강을 건널 수 있으니 침략과 수비의 길목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군이,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 중공군들도 성 아래쪽 얕은 여울을 찾아 임진강을 맨몸으로 건너 진격했다. 고구려 성 중에서 한 곳만 고르라면 호로고루성을 추천한다. 임진강변 주상절리의 직벽 위에 세워진 호로고루성은 자태부터 우람하다. 은대리성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이 중대급, 당포성이 대대급이라면 이곳 호로고루성은 연대급의 병력이 주둔하던 최전방 사령부였다. 인근에 백화점까지 들어섰을 정도로 번성했던 포구였으나 지금은 갈대밭이 되고만 고랑포가 있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릉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도 좋은 위치다. 당시 고구려의 정복 정신은 ‘헝그리 정신’에서 나왔다. 중국 역사서는 죄다 고구려를 ‘배고픈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고구려는 그러나 만주와 요동 일대를 장악한 뒤에는 사정이 나아졌다. 그 증거가 호로고루성의 군량창고에서 나왔다. 창고 터에서는 쌀, 콩, 조, 팥 등의 곡식은 물론이고 소, 사슴, 멧돼지 등의 뼈도 나왔다. 발굴 유물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1300g의 밥이 들어가는 거대한 밥그릇. 요즘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밥이 300g 남짓이니 4배 이상이나 되는 크기다. 직벽의 주상절리 위에 흙으로 두툼하게 돋워놓은 성루에 오르면 성을 방비하던 근육질의 옛 고구려 병사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 신라의 마지막 왕이 여기 묻힌 까닭 삼국의 쟁패 시기를 지나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시간의 고리. 그 고리를 잇는 이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능욕을 겪은 군주. 그의 무덤이 바로 연천의 호로고루성 인근에 있다. 경주 땅을 벗어난 신라의 왕릉은 이곳이 유일하다. 경순왕의 능은 왜 경주를 한참 벗어난 이곳에 있을까. 경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라는 이미 무너졌다. 경순왕의 선대왕은 경애왕. 그는 경주의 포석정에서 거나한 잔치를 벌이다가 견훤에게 붙잡혀 강제로 자결하고 왕비는 능욕을 당했다. 그 뒤에 옹립된 왕이 바로 경순왕이다. 견훤의 선택으로 군주 자리에 오른 경순왕은 허수아비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침략과 약탈을 서슴지 않는 적에 맞서 싸울 힘도 의지도 없었다. 결국 그는 나라를 고려에 넘겨줬다. 나약한 군주의 비겁한 선택이기도 했고, 백성들이 살육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기도 했다. 고려는 항복한 신라 왕에게 정승 자리를 내줬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상여를 막아섰다. 신라의 유민들이 경순왕의 상여를 뒤따라 경주로 향하자 고려는 소요를 우려했다. 급히 ‘도성(개성) 밖 100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법을 만들어 고랑포 앞에서 장례행렬을 막았다. 연천 땅에 경순왕의 능이 들어선 것은 이 때문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왕릉이라 하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늘어선 석물들도 경주 일대에 산처럼 솟아 있는 다른 왕릉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왕릉을 찾아 오르는 길에서 인상적인 건 신라 천년의 회한보다는 철조망과 삼각형의 팻말에 붉은 글씨로 나붙은 ‘지뢰’표지판이다. 왕릉 뒤편 50m의 거리에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세워져 있다. 패망한 옛 군주의 쓸쓸한 무덤이 차가운 분단의 자취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거기서 만져지는 건 거대하게 뒤척이며 용틀임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다. 오래됐음에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 고려왕족 왕순례의 벼락 출세 연천에는 또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고리도 있다. 연천이 내세우는 유적지라면 숭의전이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왕들을 모셨던 사당이다. 고려 왕 4명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조선에 협력하지 않겠다던 포은 정몽주의 위패도 있다. 조선은 왜 자신들에게 끝내 협조하지 않은 고려 충신에게 무릎을 꿇고 제를 지냈을까. 그건 조선이 ‘도리’를 앞세운 유교국가였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여기다가 고려 왕에 대한 예우가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을 터다. 숭의전에서 발길을 붙잡은 건 근래에 고쳐 지은 전각이나 위패가 아니라, 길가의 언덕 위에 버려진 듯 쓸쓸한 무덤 한 기였다. 숭의전을 관리했던 고려왕조의 후손인 왕순례의 무덤이다. 왕순례. 그는 누구일까.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왕족들 모두 거제도와 강화도로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머잖아 고려 왕족들은 ‘맹인 이홍무 점괘사건’으로 무참히 살육됐다. 점괘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경남 밀양의 궁벽한 땅의 한 점쟁이가 ‘고려의 공양왕과 조선의 이성계 중에서 누가 더 명운이 낫겠느냐’는 질문에 ‘공양왕의 두 아들이 더 귀하다’고 답한 사건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모두 참수된 건 물론이고 후환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고려 왕족들도 모조리 배에 실려 수장됐다. 왕순례는 이런 와중에 목숨을 건사한 고려 왕족의 후손이었다. 성을 바꾸고 숨어 살던 그는 괴팍한 성격 탓에 이웃과 다툼이 잦았는데, 어느 날 그와 싸운 주민이 그가 고려 왕족임을 고발했다. 조선 개국 직후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만, 조선이 출범한 지 60년이 지나 체제가 안정됐던 조선왕조는 점괘사건 이후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고려 왕족이었던 그에게 숭의전을 관리하는 벼슬을 맡겼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살던 총각이 하루아침에 희대의 출세를 한 셈이었다. 숭의전 곁의 무덤이 바로 그의 것이었다. 체제와 정치가 한 사람의 죽음과 삶을, 은둔과 출세를 갈랐으니 기구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덧없기도 하다. # 긴장의 땅, 그러나 평화로운 자연 거듭된 전쟁의 상흔에도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이야 다칠 리 없다. 연천의 풍경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탄강과 임진강을 끼고 솟아 있는 주상절리다. 50만 년 전쯤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추가령 계곡의 물길을 따라 넘쳐흘렀다. 용암으로 막힌 물은 화산암의 틈새를 가르며 새로운 길을 찾았다. 물살의 힘이 무른 현무암을 깎아내면서 한탄강과 임진강은 주상절리의 웅장한 협곡을 갖게 됐다. 임진강과 차탄천에서 가장 빼어난 주상절리 협곡이 이곳 연천에 있다. 미산면 동이리에는 50m 높이의 깎아지른 직벽이 차탄천 건너편으로 1.5㎞나 이어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칼로 자른 듯 우뚝 선 바위벽이 앞을 막고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의 위용이 대단하다. 누구든 데려와 ‘이것 좀 보라’며 내보이고 싶은 곳이다. 외지인들은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아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찾아가기 까다로운 게 흠이라면 흠. 왕림리의 창산수목원을 먼저 찾아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뒷길 끝까지 가면 강변으로 다가설 수 있다. 차탄천 하류 쪽에도 주상절리 직벽의 구간이 있다. 찾아가는 게 번거롭다면 은대리의 왕림교를 찾아가자. 차탄천을 건너가는 교각 위에서 주상절리의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연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재인폭포도 주상절리의 직벽으로 쏟아지는 폭포다. 재인폭포는 한탄강댐 건설로 진입로가 잠기게 되자 수자원공사가 5월 1일 완공을 목표로 직벽에서 폭포까지 바로 내려설 수 있는 계단과 바닥에 유리를 깐 전망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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